성령의 내주(內住)와 충만(充滿)에 관한 고찰



하나님의 형상타락한 아담의 형상에 연관하여'

 

글 / 이광호(Ph.D/홍은개혁신학연구원)

 

. 서론

 

성령의 사역은 사탄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창조질서에 대한 원상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과 세계를 재창조하시기 위해 친히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마지막 오순절 날 강림하신 성령을 통해 지금도 그 사역을 지속하고 계신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



교회 가운데서는 성령의 내주와 충만에 관한 내용들이 항상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중요성 자체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성령이 우리가운데 내주하신다는 사실과 성령 충만을 통해 우리의 삶이 온전하게 됨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내주란 과연 어떤 존재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며 성령의 충만은 또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령의 내주를 주장하지만 그 존재 양식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이야기 하지만 그 구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간단하지 않다. 즉 말로써 표현하기는 쉽지만 그 구체성에 대해 언급하기란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간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과 무관한 불신자들이 항상 있어왔다. 우리 시대에도 교회 안으로 들어온 불신자들이 성령의 내주를 주장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성령 충만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또한 어리석은 설교자들이 교회 안의 불신자들을 향해 맹목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외치는 모습이 그리 생소하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불신자들의 마음속에도 성령께서 내주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내주는 인간의 감성적인 요청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종교성을 띤 인간들이 성령을 마음속에 자발적으로 모심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누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이나 요구를 할 때 그것을 받아들여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종교적인 현상이거나 감정일 따름이다.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종교적 감성에 따라 성령 충만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타락하기 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지닌 인간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 관한 선행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관되며 성령의 사역과 직접 연관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각각의 개별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성령의 내주 및 충만과, 교회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성령의 내주 및 충만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교회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사도교회 시대와 보편교회 시대를 역사적으로 구분해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성령의 내주와 성령 충만을 하나님의 사역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판단력을 갖춘 성인(成人) 중심적 해석을 탈피해야 한다. 교회 안의 태아, 영아, 유아,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성도 등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의 내주와 충만은 거듭난 성도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그와 무관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통치와 간섭이 따른다.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이와 관련된 신학적 내용들을 염두에 두고 주제와 연관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타락한 아담의 형상

 

하나님께서는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 그것은 이미 창세전에 작정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자 했던 까닭은 그로 하여금 자신을 인격적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피조세계를 대리통치하시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직접 연관된다.


하지만 처음 사람 아담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나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범죄함으로써 그 형상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 대신 원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타락한 아담의 형상이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은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으나 그 기능은 전혀 행할 수 없었으며 범죄한 아담의 형상만 그 가운데서 기능하게 되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출생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들은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가졌으며 그것이 인간들 가운데 활발하게 기능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된 인간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된 채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 지니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자신이 가진 죄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섬길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이와 관련된 중요한 신학적 확인을 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범죄한 이후의 아담의 자손들 곧 모든 인간들에 관한 문제이다. 아담의 자손들 가운데는 본질상 두 부류의 인간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과 소위 유기된 자들이다. 거기에는 피조물인 인간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란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선택받은 자들은 타락한 아담의 형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반면 유기된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과는 무관하게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모두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지닌 자연인으로서 아무런 외적인 차이가 없다. 그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하나님과 진정한 인간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동시에 지닌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 없이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을 지닌 자의 차이와 특색을 이해하는 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이에 관한 이해가 성령의 내주와 성령 충만에 연관된 기본적인 토대를 형성하기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원형대로 가지고 있던 처음 인간들 곧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그를 섬길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으며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바 피조세계에 대한 원만한 통치가 가능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이 범죄하기 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게 되었으며 그의 요구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파괴당하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하거나 그를 찬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악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죄로 인해, 인간 가운데 작용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악한 모습을 전혀 인식조차 못하는 존재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악한 죄인이 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없었으며 그를 진정으로 경배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예정하신대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이었다. ‘타락한 아담의 형상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탄의 유혹과 아담의 범죄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무관한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지니게 된 것은 사탄과 그의 유혹에 빠진 인간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만일 타락한 아담의 형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하게 되면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들어버리게 되는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죄의 원인자나 조성자가 될 수 없다. 모든 악한 것은 전적으로 사탄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기로 작정되어 그 형상을 지닌 인간들은 구원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 지닌 채 하나님의 형상과 무관하게 출생한 자들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들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형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무관한 타락한 아담의 형상만을 지닌 인간들을 자기 자녀라 일컫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과 예정론에 관한 매우 중요한 이해의 근거가 된다.

 

 

. 성령 하나님의 오순절 강림

 

1. 사도교회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사건,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언약의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창세기 315절에 언약된 여자의 후손과 직접 연관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은 여자의 후손이 뱀 곧 사탄을 심판하며 응징하는 하나님의 사역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오순절날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형성되기 시작한 공동체인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고후4:4; 1:3).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태어났으나 그 기능이 소멸된 채 타락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선택된 인간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의 사역으로 인해 창세전에 선택된 그의 자녀들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파괴당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구약 시대의 마지막 유월절에 뒤따른 오순절날 강림하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사건 그리고 열 두 사도들과 직접 연관된 가운데 오셨다. 즉 이는 언약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과 성령세례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 동안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다. 더구나 개개인 성도들의 성령체험 문제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복잡한 신학적 입장들이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나아가 그 문제는 성령 강림이 단회적 사건이냐 아니면 지속적으로 발생해야 할 사건이 되어야 하느냐는 논의에 까지 발전하게 된다. 흔히 성령세례라고 하는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중생한 성도라 할지라도 다시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결코 바람직한 신학적 견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여기서 성령 하나님의 인격과 위격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이는 성령께서 성부, 성자와 동일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이며 성부, 성자와는 차이나는 현상적 존재가 아니다. 즉 성령은 성부, 성자와 함께 동일 본질을 가지며 일체를 이루고 계시는 분이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직후에 따라온 마지막 오순절날 약속에 따라 성령께서 강림하셨다. 이는 급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사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 전에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을 대신한 다른 보혜사(para,klhtoj)가 오셔서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고 말씀하셨다(14:16). 이는 앞으로 지상에 형성 될 하나님의 몸된 교회와 연관되는 것이다.


성령의 강림은 십자가 사건을 완성하신 주님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적 사역이다. 지상에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사도시대 교회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도하셨다. 성령 하나님의 강림은 성자 하나님의 십자가 사역에 대한 완성과 그의 승천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아담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 자녀들 가운데서 즉시 회복되게 하였다.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을 위해 오셨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기 자녀들과 그들이 모여 무리를 이룬 교회 공동체를 보존하고 보호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직후에 있었던 그의 열두 제자와 관련된 구속사적 사건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가 자살했을 때 열 두 제자의 수에 결원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자 가룟 유다를 대신해 맛디아가 성령과 교회에 의해 열 두 제자들 가운데 속하는 한 사도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탄으로 말미암아 훼손된 열 두 제자의 수를 채우게 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 대한 구속사적 성취를 의미하는 동시에 교회의 기초를 나타내고 있다. 맛디아를 포함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앞으로 있게 될 교회의 기초석이 되며 신령한 기둥이 되는 것이다.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가 열 두 사도에 가입된 후 오순절날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게 된다. 교회의 기초가 되는 열 두 제자의 수가 정비된 위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는 사실은 성령의 오심이 교회와 더불어 교회를 위해서였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이는 열두 사도들과 교회의 기초가 되는 공동체에 주어진 공적인 성령 세례를 의미한다.

 

 

2. 보편교회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된 사도교회는 보편교회 시대의 도래를 위한 예비적 단계의 특수한 교회였다.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부터 보편교회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구약의 언약을 대표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더불어 도래한 보편교회 시대는 그 이전의 사도교회 시대와 확연히 다른 시대로 전환된다.


사도교회 시대에는 특별한 계시적 직분들과 계시적 은사들이 존재했지만 보편교회 시대가 되면 모든 특별 계시들은 종결하게 된다. 이는 사도교회 시대의 완성과 새로운 보편교회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보편교회 시대를 염두에 두고 제자들에게 미래에 있게 될 성령의 사역에 대해 분명히 예언하셨다. 요한복음 1426절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진리를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보혜사 성령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교회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곧 이후의 모든 교회들의 모체가 되는 사도들이다. 즉 그 말씀을 듣는 일차적인 대상은 주님의 제자들이었지만 실제적인 대상은 나중에 있게 될 전체 보편교회를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의 내용은 사도교회 시대이후 도래하게 되는 보편교회 시대와 연관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도교회 시대에는 신약성경이 교회 가운데 단계적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성령께서 직접 택하신 특별한 성도들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계시하셨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의 보편교회 시대가 되면 형편이 달라진다. 보편교회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직접 계시의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이 기록된 성경과 성령을 통해 진리를 배워 알아가야 한다.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그가 기록된 계시로 주어진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하는 지혜를 주시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26절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였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사도교회 시대가 끝난 후 있게 될 보편교회 시대의 계시 종결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8-12절 가운데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서 이끌어지는 사도교회 시대가 끝나고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될 새로운 교회시대의 도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특별계시로서 사도적 직분들과 은사들이 종결되고 난 후, 완성된 기록 계시와 더불어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보편교회가 세워져가게 될 날이 이를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 말씀은 교회 가운데 있게 될 성령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역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 성령의 내주와 성령 충만

 

1. 성령의 내주

 

성령의 내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는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염원이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베푸시는 온전한 은혜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작정과 사역 없이는 결코 인간에게 성령이 내주할 수 없는 것이다.


개개인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은 단순히 개인의 목적을 이루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을 인간적인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은 멸망의 대상이 될 따름이다. 종교적인 목적을 앞세워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것도 동일한 악행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 가운데는 항상 그런 일들이 발생했다. 사도교회 시대에도 그런 악행은 빈번히 일어났다.


사도행전 85절 이하에는 빌립이 사마리아 땅을 다니며 여러 가지 표적을 일으키며 많은 병자들을 고쳐준 기록이 나온다. 그로 인해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게 된다. 그것을 본 시몬(Simon)이라는 자가 자기도 성령을 받기를 원했다. 그는 그것을 통해 자기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고자 했다.


우리는 시몬이 성령을 받고자 했던 근본적인 동기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는 성령을 받아 자기의 종교적 목적을 추구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유익을 끼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을 직접 목격한 시몬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성령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도들은 돈을 들여 성령을 받고자 하는 시몬에게 도리어 저주를 선포했다(8:18-20,참조).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이 원하기 때문에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도들을 통해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도교회 시대가 끝난 보편교회 시대에도 개인의 종교적 여망에 따라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통해 택한 백성들에게 주어진다.

 

(1) 개별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 

성령의 내주는 하나님의 형상과 직접 연관된다. 이는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과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성령의 내주와 하나님의 선택 및 형상은 어떻게 연관되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하나님의 씨’(the seed of God)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녀들에게는 원래부터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는 처음부터 그의 씨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됨으로 인해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 출생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된다. 선택된 자녀들에게도 파괴된 채 그들 안에 잠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에게는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해 계셨음을 의미하고 있다. 아담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섬기며 그의 요구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던 그에게 성령이 내주해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성령강림이 있기 전의 선택받은 성도들은, 저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메시아를 소망하며 살았다. 이는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는 것과 연관된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며 그를 섬기면서 궁극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메시아를 소망하며 기다렸던 것이다.


중생을 통해 구체적으로 내주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중생이 선포되었다. 이는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출생을 의미한다. 오순절날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새 사람이 된 성도들 가운데 내주하시게 된다.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선포와 예수님의 회개의 선포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성도의 중생과 연관된다. 중생이란 옛 사람의 죽음을 전제하며 죽음 이후의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옛 사람은 죽게 되고 새 사람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성령의 내주와 충만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중생한 성도들은 옛사람이 죽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산 것은 죄악에 물든 인생으로서의 육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자기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와 더불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성령 충만이다. 바울은 이를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성령에 힘입어 살아가야할 성도들의 삶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내주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와 방편을 이해해야 한다. 어리석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내주하신다면 몸 어느 부위에 어떻게 거하고 계시는가? 성도의 머리 혹은 두뇌에 거하실까? 아니면 성도의 마음이나 가슴에 거하실까?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부위에 어떤 양상으로 거하고 계실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성령의 내주하심이 실제가 아니라 단순히 상징적인 것인 양 해석하려는 신학적 경향성이다. 성령 하나님은 거듭난 자기 자녀안에 실제적으로 내주하실 뿐 자신과 무관한 불신자에게는 내주할 수 없다. 이는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파괴함으로써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성령의 거처가 되기 때문이다.

 

성도 안에 상주(常住)하시는 성령 하나님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항상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 성령께서는 결코 주거를 옮기시지 않는다. 밤이든 낮이든 깨어 있을 때든 잠자리에 있을 때든 항상 내주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도들이 그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認知) 혹은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생의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부터 중생한 성도들 안에 항상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신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다가 때가 되면 종종 자리를 떠나시는 분이 아니다. 즉 내주와 외출을 되풀이 하시지 않는다. 기분과 형편에 따라 어떤 때는 내주하셨다가 어떤 때는 외출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도의 견인과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22절에서 이와 관련하여 속사람’(inner be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칼빈은 속사람을 단순한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영혼의 영적인 부분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는 거듭난 영을 속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입술로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 

우리가 또한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여야할 부분은 교회 가운데 특수한 상황에 처한 성도들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성도들의 중생과 성령의 내주가 인간의 지적 판단여부나 종교적인 감정에 달려 있는 것으로 오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 가운데는 일반적인 지적 판단능력이 결여된 성도들이 많이 있다. 지상의 교회들 가운데 그런 성도들이 없었던 경우는 없다. 항상 장성한 성도들이 돌보아야 할 어린 성도들이 교회 가운데 있기 마련인 것이다. 정신 지체를 가진 성도들과 태아, 영아, 유아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들은 복음 전파에 의해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을 능력이 없지만 택함받은 자들의 경우 저들 가운데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는 성령의 내주하심은 인간의 지성이나 감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성령의 내주는 인간의 종교적 신심(信心)이나 경험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정과 뜻에 의거한다. 그렇지만 지적 판단능력이 부족한 성도들에 대해서는 교회 공동체의 객관적인 신앙적 인식과 판단을 요구한다. 이는 그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내주가 외적으로 보증되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성령의 내주와 연관된 교회적 적용 

성령께서는 개개인 성도들 안에 거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참된 교회 공동체 가운데 내주해 계신다. 이는 교회를 위한 통치적 근거와 연관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의 타락한 세상 가운데 내재적으로 존재하며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세상 만물 안에 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그에 동의할 수 없다.


성령은 결코 범신론(汎神論)적 존재가 아니다. 성령 하나님은 세상 만물 가운데 내재하지 않지만 우주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다. 성령은 만물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세상을 감찰하고 계시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사건 이후부터 사도교회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 하나님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을 받으라는 말을 구속사적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보편교회 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승천하기 전 주님께서 요구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약속된 성령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오순절 날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초기 공동체가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성령 강림을 맞이하게 되었다. 주님의 명령과 약속에 따라 성령을 기다리던 초기 공동체에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열 두 사도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이 강림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섭리적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사도교회의 구속사적 활동으로서 이후 따라오게 될 보편교회를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곧 이 후 존재하게 되는 모든 교회들의 기초가 된다. 역사적인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오순절 성령께서 임하신 열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모인 그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은 오순절 성령이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강림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 교회의 기초가 되는 특별히 선택된 성도들의 공동체 가운데 임하셨다. 즉 그는 교회 밖에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교회 공동체 안에 강림하셨다.


교회 가운데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지금까지 줄곧 교회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의 것을 간섭하고 계시지만,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보편교회의 공동체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 즉 성령께서는 교회 가운데 거하시면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며 세상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매 주일 행해지는 성찬을 통해 증거되는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의 주된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다(15:26). 이는 성령께서 오신 목적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는 교회 가운데서 항상 발생하고 있으며 그것은 말씀선포와 성찬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작용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리시던 당시의 그리스도께서는 보편교회 시대의 모든 참된 교회들 가운데 항상 내주하여 계신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은 오래전의 일로서 지금은 식어 냉냉한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온기가 있는 상태로 현존하는 교회들 가운데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 공동체 가운데는 매 주일 마다 주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거룩한 성찬이 지속적으로 나누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님의 재림 때 까지 성찬을 나누며 그것을 기념하도록 명령하셨다. 이는 교회 공동체를 위한 생명의 공급을 의미한다. 교회 가운데서 나누어지는 성찬은 그리스도의 내주를 확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공예배 가운데 언약의 성찬을 나눔은 교회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통해 교회 가운데 내주하고 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예배 중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성찬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교회 가운데 내주하고 계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파괴 이후 보편교회 가운데 내주하시는 하나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속사의 최종적인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사도교회 시대에 있었던 계시적 은사들의 완성된 의미를 포함한다. 나아가 사도교회들 가운데 존재했던 계시적 직분들 역시 그것을 통해 완성되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가운데 항상 내주하고 계신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성도들 가운데 내주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성찬의 나눔을 통해 자신의 내주하심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보편교회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특히 교회 가운데 시행되는 성찬을 위해 친히 역사하신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방해하거나 막아서는 안된다. 따라서 성령의 간섭을 통한 올바른 성찬의 의미가 사라진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다.

 

 

2. 성령 충만

 

(1) 개별 성도의 성령 충만 

이제 우리는 성령 충만에 관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개별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령 충만은 종교적 분위기에 좌우되는가? 아니면 개인의 종교적 심성에 기초하는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성령 충만은 개인의 종교적 성향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앙의 스타일이 감성적(感性的)인 사람들이 이지적(理智的)인 부류의 사람들 보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상대적으로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것은 아니다.


성령 충만은 중생한 성도가 세상에 대해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드러나게 된다. 성령에 의해 거듭난 성도들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의와 심판에 대해 철저한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써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심각하게 뉘우치며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세상에 출생한 모든 자연인(自然人)들은 한결같이 전적으로 악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항상 악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어떤 선도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정신적 판단능력이 결여된 성도들일 경우 전체 교회가 소유하는 교회적 성령 충만에 공동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중생한 성도라면 그들 역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수 있게 된다. 즉 연령이 어린 태아나 영아, 유아 및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성도들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다른 장성한 성도들의 성령 충만한 삶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 가족 공동체 가운데 태아, 영아, 유아, 혹은 정신지체 장애인이 있을 경우 다른 성숙한 가족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즉 연약한 가족들은 건강하고 판단능력을 갖춘 다른 가족들의 삶의 정서와 내용에 포함되는 동일한 공동체적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 안의 연약한 성도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성령의 충만한 삶을 성숙한 다른 가족들과 공유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회복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즉 택자라 할지라도 원래 인간이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을 전혀 인식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서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 의사에 따른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케 된 것이다.


오순절 날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창조하신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보혜사(para,klhtoj)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성도들은 이제 사탄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다.


따라서 성령의 온전한 통치를 받게 된 성도는 범죄한 아담의 형상을 거부하게 되며 그로 인한 삶의 형태에 저항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들은 범죄한 아담의 형상의 습성을 포기하며 죄와 맞서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 가운데 살 동안에는 항상 겉 사람과 속사람의 싸움으로 인한 끊임없는 내적 갈등이 야기 된다. 그런 가운데서 자기를 죽이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성화와 직접 연관됨 

성령의 내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는 성도의 중생과 연관된다면 성령 충만은 성도의 성화와 연관된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신다면 그 영이 우리의 모든 삶과 행동을 지배하신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도의 삶에 의해 드러난다. 그것은 인간의 자발적인 종교적 노력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성화와 연관된 성령 충만한 삶은 윤리적 관점에서 드러나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때로 종교 감정적인 기쁨과 감사의 형태가 아니라 분노와 냉정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수님은 물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다.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성령으로 충만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악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진노하셨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 역시 진리와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으로 인해 성화된 결과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통해 항상 자신의 악하고 죄된 모습을 직시하게 된다. 성숙한 성도들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분명히 인식하하며 끊임없이 자행되는 무서운 죄를 더욱 분명히 자각하게 된다.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깊이 자각함으로써 내주하시는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인식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의 자세와 성령 충만의 관계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2) 교회적 성령 충만

 

사도교회 시대의 특별한 은사들과 성령 충만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한다. 이는 절대적인 당위성을 띤다. 사도교회 시대에는 특별한 은사들과 더불어 교회 안에 성령이 충만했다. 그것은 외적인 종교적 정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성령이 충만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종교적인 엄숙한 분위기로 말미암는 것인가? 아니면 찬송가와 악기 소리들이 요란하게 나고 기도소리가 크게 울리는 종교적 행사 분위기를 의미 하는 것이었는가?


사도시대 교회에 허락된 다양한 직분과 은사들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즉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온전한 직분과 참된 은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즉 오순절 날 강림하신 성령은 은사적 성령인 것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 태어난 모든 성도들은 교회적 순종과 더불어 거룩한 순결을 유지하려 애써야 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포기를 의미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의 투쟁을 동반했다. 교회 가운데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다양한 은사들을 통해 성령 충만한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보편교회 시대의 성령 충만 

보편교회 가운데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는 말은 종교적인 적극성을 띠는 것과 다르다. 외견상 건전해 보이고 기독교적 종교성이 농후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령 충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성령을 받고자 하는 종교적 열망으로 인해 성령이 충만해지지는 않는다.


또한 교인들의 종교적 심성을 자극하는 지도자들의 의도 역시 성령 충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반 교인들에게 종교적 만족감을 제공하기 위해 준비된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도리어 성령 충만함을 멸시할 우려마저 있다. 기독교적인 종교 음악과 현란한 춤을 배경으로 한 집회들이라 해서 성령 충만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보편교회는 항상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상태를 보존하려고 애써야 한다.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이 끊임없이 교회를 혼란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뜻이 교회와 세상 가운데 드러나는데 참여하는 성도의 삶을 동반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 이외의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따라서 교회는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세속적 가치관들을 근절하는 가운데 천국에 대한 소망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

 

위험한 거짓 성령 충만

기독교 역사 가운데는 항상 위험한 거짓 성령 충만이 건전한 교회들을 위협해 왔다. 신앙이 어리고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성도들은 기독교적인 종교 활동을 마치 성령 충만 인양 오해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런 잘못된 종교적 행위를 하는 자들 또한 스스로 자기의 행위를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라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행위들 가운데 상당수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한 사역이 아니라 자신의 타락한 종교성에서 발생하는 비성경적인 종교행위였을 따름이다.

 

위험한 거짓 성령 충만 가운데는 윤리적 거짓 충만, 신비적 거짓 충만, 종교적 거짓 충만 등이 있다. 윤리적 거짓 충만이란 윤리적인 선행을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인 양 성도들을 속이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와 사도교회 시대 다수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윤리적인 선한 활동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인 양 오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라 사탄의 간섭을 받고 있는 자들이었다.


신비적 거짓 충만이란 치유, 권능, 예언 등 신비한 종교적 활동을 하며 그것이 마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 양 선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다수의 거짓 예수꾼들이 나타내는 이적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분명히 말씀하셨다(7:22,23).


그리고 종교적 거짓 충만이란 검증되지 않은 다양한 기독교 활동들을 포함하고 있다. 다수의 어린 교인들은 기독교 음악, , 기도, 연보, 종교 활동 등이 그갓 자체로서 성령의 사역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종교적인 활동 자체가 성령 충만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종교적 활동들 가운데 참된 성령의 열매와 어떤 상관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이다(5:22,23).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일반 윤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진리와 연관된 것들이어야 한다.

 

 

. 결론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으며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셨다.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셨으며 그가 부활 승천 하신 후 성령 하나님께서 강림하셨다. 마지막 유월절날 십자가 사건이 있는 후 뒤따라온 오순절날 성령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셨던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루살렘에 모인 열두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모인 신앙공동체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가 오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거하기 위함이었으며, 저들의 온전한 삶을 도우시기 위해서였다. 악한 사탄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결코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도움을 통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자기 자녀들을 끝까지 보호하시고자 하셨다.


성령께서는 창세전에 선택하신 중생한 자기 백성들 안에 항상 내주해 계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소유한 상태로 죄악된 이 세상에 출생한 자들이다. 그러나 저들이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어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잠재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기는 했으나 완전히 상실된 그 기능을 십자가 사역을 통해 그들 가운데 온전히 회복하셨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 안에 항상 내주하시면서 성도들의 무리인 교회 공동체 가운데 거하신다. 그가 개개인 성도들과 교회 가운데 내주하시는 것은 상시적은 활동이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참된 성도들과 교회는 성령의 사역이 충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세상으로부터 생성된 자신의 욕망을 버려야 한다. 교회는 말씀을 통한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여 그의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도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 충만은 단순한 종교적 감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 윤리적인 활동이나 신비적인 요소와 행태들 그리고 교회 가운데 유행하는 음악이나 춤 등을 통해 성령 충만의 상태가 확인될 수 없다. 나아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봉사나 기도, 연보생활 등이 성령 충만한 삶을 보증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성령 충만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들이 아니다.


진정한 성령의 내주와 충만은 결코 인간들이 승인할 사안이 아니다. 설령 인간들이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중생의 은혜를 통해 그 사역을 이룩하시게 된다. 교회 가운데 존재하는 신앙 연령이 어린 성도들이나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성도들의 경우 그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성령의 내주와 성령 충만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며 종교적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기 자녀들에게 항상 내주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으나 그 기능을 상실당한 택한 백성들을 불러 중생케 하심으로써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된 그들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항상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애써야 한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결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좇아 순종하는 가운데 이루어가야 한다. 그것은 분주한 종교적 활동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세상을 거부하는 성도의 삶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 가운데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난무한 실정이다. 성령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성령 충만을 자랑하고 있다. 교회 안의 중생하지 못한 종교인들 가운데는 온화하고 성실하며 관대한 성품을 지닌 훌륭한 윤리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은 성도들을 속이는 종교적인 가면을 쓰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와 성숙한 성도들은 불신자들의 기독교적 종교 활동을 말씀과 성령을 통해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의 종교적인 겉모양을 보고 성령 충만을 쉽게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성숙한 교회와 성도들은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항상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민감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종교적 거짓 성령 충만에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는 항상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그들 가운데 참된 성령 충만이 존재하게 된다. (황창기 교수 은퇴기념 논문집, 2008, 고신대학교)

   

http://siloam-church.org/sub_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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