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속의 음악과 찬양

   

글 / 홍정표 교수(서울 장로회신학교 교회 음악과) 


인류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면 갈수록 그에 관한 자료와 기록이 부족하여 그 국가나 사회 풍습과 문화를 연구하기 어려워진다.

시간예술인 음악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성경에는 많은부분은 아니지만 이에대하여 매우 중요한 자료가 있다.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음악가와 음악에관한 기록이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있다.

21절에 "그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고 기록된데로 최초의 음악가는 유발이다.

그는 아담의 7대손이다. 그당시에 벌써 수금과 퉁소가 있었고 이에맞추어 노래를 하였다는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볼때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아름다움 등을 노래(음악)로 표현하고 위로를 받고 만족을 얻고있다. 또한 23-24절에 보면 최초의 노래가 기록되어있다.

 

원래 성경에는 시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대 히브리어의 시는 운율이 잇었기 때문에 시들은 모두 노래로 불려졌다.

이 노래의 내용은 라멕이 사람을 죽인 후 나를 해치면 가인을 죽이는 것보다 벌 이 10배나 더하리라는 잔악하고도 교만함을 노래한 내용이다.

인류의 최초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이 시의 내용이 유감스럽게도 사람을 죽이고 의기 양양하게 읊은 내용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온 인류는 이 죄악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살인,또 그 후예들은 갈수록 그 죄악의 양상이 흉악해지고 더욱더 잔인한 방법들을 쓰고잇으며 엄청나게 많은사람을 한번에 죽일 수 있는 무기들을 쌓고있다.

사람들은 역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도저히 이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류 역사와 우리 조상들의 모습과 또한 나의 모습을 보고 알수있다.

이것을 안 믿음의 선진들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kyrie eleison)"로 에배를 시작하였다.

죄인의 모습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그냥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최초의 찬송,최후의 찬송

출애굽기 13:1-21 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의기적을 체험한 후 에모세와 이스라엘자손이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이 나온다.

신약에서 최초의 찬양모습은 누가복음1:46-55 에 나타난 마리아의 찬양이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온 백성이 기다리던 구세주가 바로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난다는 말을 듣고 세레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앞에서 부른 찬송이다.

그 내용은 구원의 주에수그리스도를 나 같은 비천한자를 통하여 잉태케하여 복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것이다.

구약과 신약 최초의 찬송은 모두 구원에 관한것이다.

 

구약에서는 집단적으로 찬양을 했고 신약에서는 개인적으로 찬양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구원의주 예수그리스도의 잉태함의 소식을 듣고 찬양하였다.

찬양의 동기는 바로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어야한다.

상황을 바꾸어 개인적으로 이것을 적용해보면 죄로인해 죽었던 나를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나의죄를 대신지시고 돌아가셔서 나를 구원하여 주신 그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알아야 할것은 그 사랑과 은헤를 찬송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그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특히 젊은층에서 너무 체험적인 내용의 성가들이 많이불려왔었다.


이것은 자칫하면 궁극적으로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을 빼버리고 내가 받은 은혜와 감격에 파묻혀 일종의 자기만족과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정도의 얄팍한 수준의 노래밖에 되지 못하는 경우가 된다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노래가 새롭게 큰 힘을 가지고 한국 교회에 도전을 주고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의 기쁨과 감격과 사랑도 함께 찬양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편에 보면 땅과 바다와 충만한것,해,달,별,온 우주만 물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호흡이 있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기록되어있다.
사실상 피조물이 자기 위치에서 움직이고 활동하는것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답게 운행하며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든지 엄청난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캐년의 모습을 볼때 자연 그 자체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온 우주만물이 곳곳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보다 어린양의 피로 주고 사신 당신의 구원받은 자녀들을 통해 부르는 찬양을 들으시기를 원하신다.

신약의 마지막 부분인 요한계시록에서도 흰 옷입은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세세무궁토록 부르는 찬양의 주제도 구원의 하나님과 어린양에게로(계 7:9-10)기록 되어있다.

 

훈련된 성가대의 찬양

출 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찬양에 대한 기록을 보면 모든 전쟁에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이 시대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 잇었기 때문에 정착된 음악제도가 없었다.

그러나 다윗완 시대부터 찬양을 위한 제도적이고 전문적인 성가대가 제사장직을 맡은 레위지파 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심 인물은 아삽,헤만,여두둔이었다.(대상 25:1)

 

찬양하는 자들의 수효는 4천명이었으며(대상 23:5)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찬양하는데 모든 시간을 사용하였다.(대상 23:30)

솔로몬 시대에 다윗왕이 원하고 원했던 성전을 완성한 후 성전낙성식때 세마포를 입은 레위지파 120명의 성가대가 제금,수금,비파,나팔을 불며 찬송할 때 하나님의 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였다(대상 5:12-14).

이것을 볼때 성가대의 찬양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것인지를 알수있다.

예배시간에 모든 성도가 함께 부르는 회중 찬송도 중요하지만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이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여 정성들여 준비한 성가대의 찬양은 더욱 중요하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는 레위지파 중에 구별하여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찬양하는데 전념하였다고 하는데 오늘날 모든 성가대원들이 그때와 같이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생활이 하나님과 연결된 생활이고 찬양하는 삶이 계속될때 그들이 하는 찬양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찬양이 될 것이다.

세상의 축제인 올림픽을 위하여서도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몇 년동안 열심히 준비하여 최선을 다하는데 전능하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하는데 예배 때 찬양을 준비하는 자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겠느가?

그러나 음악적인 면만 지나치게 치우치어 이것만을 추구한다면 차라리 멋진 녹음 테이프를 듣는 것 만도 못할 수 있다.
성가대는 밀폐된 공간에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때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있는데서 온 성도들을 대표하여 찬양을 드린다.


찬양하는 도중에는 모든 성도가 한 맘 한 뜻이 되어 가사와 음악을 함께 생각하며 묵상하고 찬양이 끝나면 아멘으로 화답하는 찬양이 될 때 그 찬양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신다.


성가대의 찬양은 하나의 연주가 아니고 단순히 설교를 돕는 정도가 아니며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무드 음악도 아니며 음악적인 감흥을 돋궈주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제사이며 찬양 그 자체가 예배의 한 부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찬미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찬송하신 기록이 나와있다.

마태복음 26:30, 마가복음 14:26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만찬후에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신 기록이다.

그런데 이장면을 깊이 묵상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바로앞에 둔 그 상황이었다.

"이 잔이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아버지원대로 하옵소서"의 피눈물 나는 겟세마네의 기도 바로 전의 모습이다.

 

이미 유월절 다락방에서 유다의 배반을 아신 주님,모든 제자들도 다 버리고 홀로 십자가를 지어야하는 줄을 미리 아셨던 그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그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감당키 어려웠을까?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함께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올라 가셨다.

이때에 예수님은 구원의 사역에서 이미 승리하신 것이다.

 

이 노래는 승리의 노래요 순종의 찬송이었다.

우리는 조금만 가슴이 아파도 우리 입술에 찬송이 마른다.

아니 날씨만 나빠져도 기분만 조금 상해도 찬송은 커녕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된다.

찬미하며 감람산에 오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병들 때나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제자들과 함께 찬송하며 감람산에 오르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찬송은 쉽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인데 시는 구약의 시편과 같은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찬미는 찬송가와 예배때 불리는 성가곡들이며 신령한 노래는 그밖의 생활 속에서도 필요한 기도 확신 전도 헌신 등에 관한 노래들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복음성가 문제로 인해 사람들의 의견과 주장이 많아 복음성가(Gospel song)의 개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흔히 복음성가라하면 현대 스타일로 작곡되어지고 노래되어지는 모든 곡들을 말하는데 이른바 복음 성가 "나의 입술에 모든 말과 "라는 찬송을 볼 때 이 노래는 사실상 예배와 경배 혹은 기원 찬송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잘못되어 진 것은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구분을 가사와 곡의 내용보다 곡의 스타일(현대적인가 아닌가)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복음성가인가 아닌가는 곡의 내용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마땅하다.

현재 우리 나라 찬송가 안에서도 많은 복음 성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찬송가 안에 들어 있다고 해서 찬송가로 불리워지는 것이지 엣날스타일의 복음성가이다.(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것들을 Gospel Hymm 이라고도 함)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복음성가라 하는 것 중에도 Worship Song(예배와 경배를위한 찬양),

Scrip cripture song(성경을 가사로 한 찬양),

Gospel song(복음성가),

contemporary music(현대스타일의대중적인찬송) 등으로 구분 할 수 있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도 이렇게 분류할 수 있다.

최근 미국과 영국,유럽의 복음주의교회에서도 이러한 현대 스타일의 찬양을 개발하고 실제로 예배때에도 부른다.

전통적인 찬송가만 부르는 교회보다 오히려 생동감이 넘치며 많은 사람이 부담없이 부를 수 있는 찬송들을 통해서 쉽게 하나님께로 나가는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현대 스타일의 찬양을 통해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감정에 맞는 우리의 음악이 개발되어지고 찬송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더욱이나 바람직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할찌니라(요 4:24)"

 

영이신 하나님께 영으로 찬양함은 마땅한 일이다.

이러한 찬양은 신령과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일부의 독창자들은 너무 성악적이고 음악적인데 신경을 쓰다가 가사의 내용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소리를 잘내는데만 신경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런 찬송을 기뻐 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다.

또한 바이올린이나 풀륫 또는 피아노로 에배때에 찬송가가 아닌 일반 명곡을 버젓이 연주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다.
독창자는 가능하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사의 의미를 나의 것으로 한 후에 음악적인 면으로도 최선을 다하여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영으로 찬양할때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신다.


기악 연주는 가능하면 회중이 아는 찬송으로 편곡도 하여 악기가 연주 될 때 모든 사람들이 그가사를 외울 수 있어서 찬송으로 화답하며 하나님께 영으로 드리는 찬양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음악적인 재능 만으로 하지 말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다윗은 시인이자 음악가이며 감정이 풍부한 멋있는 에술가임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의 생애를 볼때 몇번의 인생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동이 넘치는 시를 썼으며 그 유명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23편)"를 남겨 많은 사람들의 목자되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감사하고 있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눈물로 침상이 뜰만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죄를 범했던 신자들이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은혜를 끼쳤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윗은 훌륭하고 완벽한 찬양을 드렸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아모스의 눈에는 이렇게 보여졌다.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암 6:5)".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였다.

이것은 음악적인 감정을 위해 나만 좋아하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만족해하는 모습을 경고하는 것이다.

혹시 나는 이제까지 계속하여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지 않았나 생각해보라.

계속하여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의 경고 말을 기억하라.

"너희가 내게 번죄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2-23).

만약에 우리가 매주일 드리는 찬양이 열심히 준비했던 성가대의 찬양이, 멋있는 독창이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네 소리를 그치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되겟는가?

그저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좋아라고 행해지는 하나의 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헛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모든 자들이여 이 경고의 말씀을 모두 기억하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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