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이 타락한 결과

 

글 / 이성호 교수

 

1--

찬송이 타락한 결과 탄식이 예배 시간에 사라져버렸다.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CCM일 것이다.

 

인간의 삶은 애통, 절망, 억울함으로 가득차 있는데, 교회 와서는 아무일 없었던 처럼 우아한 찬송만 부른다.

자신들의 억울함을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토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주변의 이웃이나 사회나 정부에 분노를 쏟아낸다.

이것들은 종종 폭력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런 감정을 밖으로 쏟아내지 못하는 자들은 속이 썪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삶을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시편찬송이 교회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시편을 읽어 보라. 절반이 넘는 노래가 탄식의 노래이다.

억울한 자들이여, 성경을 열어 시편을 보라.

시편의 노래와 함께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쏟으라. 그 억울함을 주께서 들으시리라. 탄식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주께서 그들의 위로자가 될 것임이요....

 

2-- 

찬송이 타락한 결과 찬송의 공교회성이 사라져버렸다. 찬송은 온 회중의 찬송이 되어야 하는데, 한 개인의 주관적 체험을 노래하는 것을 바뀌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노래 중의 하나는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이다.
하나를 더 들라고 하면, "어느 날 다가온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어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공교회성을 잃어 버린 오늘날, 찬송은 사사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부르는 노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찬송이 더 이상 말씀의 지도를 받지 않는다.
고신의 헌법에 따르면(다른 장로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찬송의 지도는 명백하게 목사의 직무임에도 불구하고 찬송은 목사가 아니라 전도사나 찬양팀 리더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찬송의 중요성과 격이 현저하게 낮아진 것이다. (낮아졌다는 말이 타락이다.)

예배를 감독하는 것은 당회의 직무인데,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찬송에 대한 감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당회의 직무 유기라고 할 수 있다.

목사와 장로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인식하여 찬송의 공교회성이 회복되지 못하면, 찬송이 말씀에 따라 개혁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3-- 

오늘날 찬송에 대한 논의는 어떤 찬송을 부를 것인가, 어떻게 (어떤 악기로) 찬송을 부를 것인가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결과 찬송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지향한다. 찬송에 있어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누구를 찬송하는가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 질문은 별로 신중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모두가 "주여, 주여"를 소리높여 찬송하고 있으며, 그 이유 때문에 "주님"을 찬송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주여"라고 했을 때 그 "주여"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찬송의 대상은 유일하고 참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인식이 오늘날 상당히 흐려져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예배에서 "송영"이 사라져 버렸다.
송영이야 말로 찬송에 있어서 공교회와 이단을 나누는 기준인데,
송영이 예배에서 빠지자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쉽게 이단이나 사이비 예배에 참석하고도 별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당연히 예배와 집회의 차이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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