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교회 음악관 


글 / 조덕영 박사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0-31)


1.칼빈의 간략한 생애(칼빈의 음악관에 영향을 미친 부분을 중심으로)

 

음악의 창조주는 하나님이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사람  칼빈의 교회 음악관을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그의 간략한 생애를 살펴보도록 하자.

 

존 칼빈(John Calvin,1509-1564)은 소년 시절 고향인 노용 시에서 보냈다. 14세에 파리시에 있는 라 마르세 대학(College of La Marche)을 다니다가 역시 파리 대학의 몽테규 대학(College of Montaigu)으로 옮겼다. 이 대학은 학교의 규율이 엄격한 학교였다.  노동,금식,체벌,미사 등의 규칙이 엄한 것이 이 학교의 특징이었다.

이런 어릴 적의 습관이 그의 신학과 교회관과 음악관을 결정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칼빈은 모든 교칙을 준수하면서 열심히 공부했고 그의 예리한 지성과 판단력으로 논변술을 배웠다.  한편 칼빈은 14세부터 사제(Priesthood)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루터(Luter),멜랑히톤(Melanchthon),쯔빙글리(ZWingli) 등의 개혁 사상과도 접할 수 있었다.  1553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그 해 자신의 친구인 니코라스코프(Nicholas Cope)가 파리 대학에 취임할 때 작성해 준 <기독교 철학>이란 제목의 연설문 때문에 발생한 소동으로 인하여 농부로 위장하여 안굴렘 성당의 수석 신부 집에 피신하게 된다. 이 때 유명한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였다.

 

  이 후 칼빈은 제네바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이 때 루터주의 신학자 파렐이 찾아와 동역을 요구했으나 칼빈은 학문 연구를 계속하겠다고 이를 거절하였으나 파렐의 강력한 요구에 마음의 가책을 느껴 함께 동역하며 성경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강요>가 출판된 것은 1536년 바젤에서 였다.  이 때 그는 <교리 문답서>,

<신앙 고백서>를 작성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제네바 시 의회에 예배시 시편 찬송을 회중들이 부르고 성찬식을 거행 할 것과 성직자의 결혼을 규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후 1538년 그는 스트라스버그에 있는 프랑스 난민 교회에서 목회 생활을 시작하였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 미사 형태를 보존 한데 비해 칼빈은 쯔빙글리의 개혁적 예배 의식을 계승했다. 

즉 루터가 성서 중심이었다면 칼빈은 설교 중심의 예배였다. 게다가 매우 교훈적이었다. 따라서 예배때마다 성찬 의식을 강조한 것도 특이한 점이다. 

공중 기도는 주기도와 아론의 축도를, 찬송은 시편을 중심으로 회중 찬송을 불렀다. 시편의 노래는 내용을 바꾸지 않고 오직 운율화하여 노래했던 것이다. 

3년 간(1538-1541)의 스트라스버그의 생활을 마친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당시 제네바는 극도로 타락한 도시였다. 국가에서는 공창제도를 인정하고 부도덕한 일과 우상숭배까지 하는 때가 있었다.

십일조가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고 칼빈은 십일조를 안 바치기로 결정하였다. 

1537년 시민법을 통과시켰는데 그 내용은 성찬식의 실행, 어린이들에게 신앙 문답의 암송, 중범자의 처벌 등으로 그 후에 술집 도박장, 댄스홀이 문을 닫았다.

 

칼빈은 문란한 사회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무려 58명을 처형 했고 76명을 추방했으나 특히 삼위일체론을 부정한 세르바토스는 사형까지 처해졌다.

사실 오늘날 제네바 도시가 문명화 된 것은 칼빈의 개혁 정신 때문이다.  당시 대의원 제도를 채용한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것이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 사상은 정종의 원칙을 세워주었고 경제와 상업을 강조한 것은 현대 자본주의의 기틀이 되었다.

 

칼빈은 교회 법규를 만들기도했다.  즉 장로직(성찬 보호와 치리권),집사직(재정 업무),교사 직분(교회 학교의 교사)을 제정하여 오늘날 개신교회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2.칼빈의 교회 음악관

 

1)칼빈의 교회 음악관
 칼빈이 활동하던 당시 제네바 거리에는 거의 노래가 없었고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일찌기 다윗 시대부터 아름다운 찬미가 울려퍼지고 아삽의 자손들로 시온의 노래가 회중들의 가슴에 메아리쳐졌는데 성가대의 찬양은 물론 교황의 권세가 찬송을 자기들의 독점물로 삼았다.  찬송이 없는 예배의 분위기는 지루함과 공허함이 컷을 것이고 찬송을 부르지 못한 성도들의 가슴은 답답하고 삭막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인하여 만민 사제의 루터 정신에 따른 회중 찬송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다같이 찬송 부르기에 앞장 선 것이다. 

칼빈의 찬송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찬미하는 순수한 시편의 노래였다. 시편은 아름다운 문학시로 훌륭한 노래다.

 

칼빈이 시편가를 장려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버그에 체류했던 어느날 루터파교회인 그곳의 감독 교회의 음악 지도자이었던 마티어스 그라이더가 대중 찬송을 시편으로

인도하는 것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것은 마르틴 루터에 의한 일종의 코랄(choral)이었다.

 

그리하여 제네바에 돌아온 후 칼빈은 시편가에 대한 확신을 갖고 교회에서 운문 시편(metrical psalms)을 부르도록 허용하었다.

운문시편이란 시편을 음율로 만든 시편 노래를 말한다.  시편에 곡을 붙이는 작업은 불주아(Loys Bourgeois)가 담당하였다.

1541년판 제네바 시편가집에는 30편, 1542년판에는 35편, 1555년판에는 49편 그리고 1562년 제네바 시편가(The Genevan Psalter)에는 150편의 시편가가 완서오디었다. 그는 시편을 작곡하였고 프랑스의 샹송의 멜로디를 모방하여 편곡을 했다. 차츰 불주아는 합창곡을 만들어 화려하게 다성 음악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칼빈은 이를 허용치 않고 불법이란 이유로 불주아를 투옥시키고 제네바에서 추방시켰다. 

불주아로 인하여 시편가의 단선률이 대위법적 다성 음악으로 발전되었으나 결코 칼빈은 이를 교회에서의 연주를 금하고 발전을 제지시켰다.

 

이와 같이 시편을 단성으로만 부르게한 칼빈은 마로와 합작하여 시편가집 18편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제네반 프살터의 모체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주변에 있는 프랑스 난민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는데 당시 그 교회에서 회중이 찬송을 부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로 한때 사회적으로 물의가 야기되어

피신한 일도 있었다.

 

<코람데오><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칼빈의 신앙 정신은 경건성을 바탕으로 하므로 비성서적 혹은 개인의 예술적,신앙적 노래 마저 배척했다. 

그리하여 칼빈은 순수한 시편의 가사만을 마음으로 경건하게 찬송하게 했다.

 

 칼빈은 ‘노래하는 것은 더욱 열광적이고 불타는 마음으로 열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감동 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과 능력이 있다. 고로 음악이 천박하지 않고 경망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진중하고 장엄한 음악이 되도록 항상 조심할 필요가 있고 또한 사람들이 집에나 술집에서 여흥으로 즐기기 위하여 부르는 음악과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이 임재한 교회에서 부르는 시편과는 뚜렷이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 음악은 경건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찬송은 곧 기도라고 하였다.

 

예배에 드려지는 찬송은 바로 시편이고 다윗부터 시작된 시편의 노래는 참으로 예배음악이며 시편 만이 가장 아름다운 찬송으로 보았다. 

‘음악(시편)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도구로 우리의 심령을 더욱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주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지혜,정의로움을 생각케함으로써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고 하였다.

칼빈은 계속해서 음악이란 가장 좋은 것으로 역시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음악을 선용하므로 심성에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저속한 가사를 사용하므로 예배를 그르치고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면서 언제나 감흥을 주는 시편 만을 권장했던 것이다.

이 같은 칼빈의 찬미론을 살펴보면
  (1)바울의 시와 찬미(에5:19)에 근거한다
  (2)시편의 뜻을 모르고 가사만을 외워 부르던 것을 시정 하고자 했다.
  (3)초대 교회의 뜨거웠던 복음 찬송의 재연에 역점을 두었다.


  2)악기 사용의 거부 문제
  칼빈은 쯔빙글리처럼 예배에서의 음악을 자극적으로 보고 모든 악기를 가인의 유산으로 취급하여 오르간 사용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당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쯔빙글리가 교회에서 음악을 배격하고 오르간 사용을 금지시킨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욱 칼빈은 ‘천주교 의식을 모방한다거나 교회를 장식한다든가 또는 오르간 사용으로 더욱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믿는 것은 어리석고 우수운 노릇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서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심중에서 울어나오는 거룩한 찬양을 단순하고 순수한 노래로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

율법 시대는 기악을 사용된느것이 허용되었었다.

 

그 때 사람들이 모두 어린애들처럼 유치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히브리 민족처럼 바보같고 유치하며 은혜스럽지 못한 것으로

일축해 버렸다. 그리하여 당시 모든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오르간을 부수어 파이프는 놋그릇을 만들고 병원에서 필요한 곳에 사용되게 되었다.

칼빈의 지시에 의하여 파괴되기 시작한 오르간은 1727년까지 성공회 교회의 오르간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부서지게 되었다. 


 어느 역사가는 ‘약 100개나 되는 오르간이 헐리고 파이프는 백랍 그릇 만드는 사람에게 팔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쯔빙글리와 칼빈의 기악 음악에 대한 강력한 반발은 그 후 300여년 간 계속되었고 신대륙에 이주한 퓨리탄들에게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866년부터 오르간이 교회 예배에 재등장하여 바야흐로 교회 음악이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찬송과 마찬가지로 악기 사용은 하나님의 강력한 명령(시 147, 149, 150편 참조)이다.  칼빈이 이것을 몰랐을 리 없다.

또한 사도 바울이 교회에 특별한 악기 사용에 대해 지시한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기악음악이 가사로 된 메시지를 갖고 있지 않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악기로 주님을 찬양할 것을 명하고 있다. 회중 찬송에서 악기는 노래 부르는 것을 유도하고 뒷받침해주는도구이다.

터와 비교할 때 칼빈의 음악에 대한 일부 소극적이고 제한된 사고는 늘 논란거리를 제공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3)카톨릭 음악, 루터의 음악관 그리고 칼빈
독일에서는 1571년 마르틴 루터가 당시의 면제부 판매에 대하여 토의와 논쟁의 제목으로 95개 항목을 들어 비텐베르크 예배당 입구에 붙여 놓았다. 

루터의 이러한 종교 개혁이 기독교 음악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


(1)노래 부르는 일까지 포함해서 예배드리는 의식에서 볼 때 개혁자들은 그 백성들의 일상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예배를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2)개혁자들은 잘 훈련된 성가대의 사용을 금하지 않았다. 또한 성가대의 노래를 드기만 하던 회중들이 친히 하나님의 노래로서 찬송을 했다.

 

루터는 훈련받은 음악가였다. 그는 회중이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는 그 노래들이 단순해야 하며 또 아름다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플레인 송에서 멜로디를 빌려오기도 했으며 특별히 작곡도 많이 했다. 어떤 것은 민속 가용에서 따오기도 했으며, 성가대용 가곡을 위해서는 이런 멜로디에 대위법 형식으로 된 노래를 붙였다.

그렇게 해서 된 것이 장엄하고도 동적인 코랄이었다.

 

이에 비하여 종교 개혁이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 대륙의 개혁 교회 음악에 끼친 영향은 독일과는 사뭇 달랐다.  음악에 있어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통을 아주 배제하였다. 1536년 칼린이 제네바에 오기 전에는 개혁 교회에서 파렐이 만든 <예배 의식서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예배 의식에는  회중 찬송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다. 쯔빙글리가 인도하던 쮜리히의 교회에도 찬송이 없었다. 카톨릭의 노래를 없애버리긴 했어도 그것을 대체할만한 노래는 아직 까지 찾지 목했다. 쮜리히에서는 70년 간 예배에 찬송이 없다가 1598년부터 회중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칼빈 당시의 형편이었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칼빈은 독일 개신교도들이 회중 찬송을 부르고 독일 운율에 맞춘 시편가를 부르는 것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칼빈으로 하여금 시편을 프랑스 운율에 맞추어 회중용 노래로 만들 수 있겠다는 화긴을 갖게 하였다.  개혁자 중에서 아마도 칼빈은 가장 음악적 소양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루터나 쯔빙글리 처럼 음악을 좋아하고 잘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고대와 중세 그리곻 인문주의자들의 음악 사상과 이론을 얼마간 배웠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음악적 이론보다는 하나님의 말쓴 곧 성서와 하나님의 주권에 그 촛점을 두었다. 칼빈에 의하면 예배 음악의 임무는 예배에 용납될 수 있는 가사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그 가사는 곧 성서이다. 이러한 사상은 칼빈으로 하여금 예배시에 성서의 노래 즉 시편과 몇 개의 칸타타만을 부르도록 한 것이다. 칼빈은 1543년 도에 출간된 <제네바 시편가>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노래가 있어야 할 것이며 그가 행하신 일을 생각케 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영광 돌릭데 하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러 면에서 노래를 찾아 보았으나 성령 자신이 말씀 하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다윗의 시편보다 더 합당한 노래를 찾지 못했다.

우리가 시편을 노래할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우리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자신으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인간이 만들어낸 노래는 경박하고 이단인 것이 끼어들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순수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노래를 찾았다.

그러한 노래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능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성서 중의 시편을 가장 적절하고 좋은 교회의 노래로 선택하였다.

루터가 창작한 찬송을 사용한 것과는 반대로 칼빈은 이를 배척하였다.

 

칼빈은 예배에서 음악이 감각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을 우려했고 그런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그래서 쯔빙글리처럼 예배에서 다성음악과 악기 사용을 금했던 것이다.

예배 음악으로는 회중 찬송으로 자국어로 된 운율 시편가만 허용하였고 무반주 제창으로 부르게 하였다.

 

프랑스 운율 시편가는 칼빈이 일반 신도들에게 성서의 매력있는 한 부분을 자국어로 부를 수 있도록  해 준 것이었다. 프랑스 개신교도에게 이 시편가는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교통하는 상징과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신앙을 위하여 싸워야 하고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 투사들이었다. 그들은 시편을 노래함으로 용기와 힘을 얻었으며 시편가는 전쟁터에서의 군가였으며 순교자들의 마지막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스트라스부르그 시편가 <칼빈의 첫 시편가>의 저자 테리는 “역사는 이상한 아이러니로 가득차 있지만 카톨릭 궁정에서 여흥으로 시작된 프랑스 운율 시편가가 프랑스

개신교의 가장 엄격하고 독점적인 노래로 된 것만큼 이상한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마로의 운율 시편이 칼빈의 손에 들어오면서 칼빈은 이를 감수하여 자신이

시편 번역(시25,36,46,91,113,138)도 첨가하여 1539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최초의 운율 시편가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스트라스부르그 시편가’라고 불리는

시편가였다. 여기에는 19편의 시편가와 시므온의 노래,십계명,스트라스부르그 신조가 곡조에 붙여 실려 있다.

 

3.결론


결국 칼빈은 루터에 비하여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듯하다. 그것은 그가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면서 형성된 체질일 수도 있다. 그러한 습성이 성경을 보는데도 엄격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더욱 음악적 이해에도 엄격성을 지녔던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찬송을 시편가에만 제한 시켰고 시편 이외의 교회 음악이나 악기 사용을 금하였다.  그가 볼 때 이것이야 말로 교회 음악에 있어 인간이 가진 감각 위주의 쾌락을 막는 길이었다. 그리고 단성음악의 길로 나아간다.

4성부 합창 같은 것은 자기 과시적으로 보고 다성 음악을 금지하였다. 칼빈이 볼 때 찬송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므로 육신적 쾌락이 표출되는 것을

대단히 경계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칼빈은 단순한 시편가의 선율 속에 성서적 경건성을 중요시 했기 때문에 루터의 코랄처럼 성악 예술과 함께 다성적 발전 모습과 음악사에 기록할 만한 음악적 공헌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한 칼빈의 음악관에 대하여 훌라는  ‘루터와는 반대로 칼빈은 음악이 종교적 표현의 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전연 몰랐던 듯하고 음악이 결코 예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고 그의 편협한 음악관을 비난했다.

 

그래서 칼빈은 시편 100편을 노래한 ‘만복의 근원 주 하나님’의 찬송만이 우리에게 남긴 듯하다. 즉 그는 자신의 성서 해석적 입장을 음악의 이해에도 그대로 적용시켰던 것이다. 그것이 음악에 대한 그의 오해와 더불어서 칼빈 자신의 음악관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다의 이름은 "찬송"이다. 유다는 본래 야곱 아들 중 신앙적으로 그리 탁월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 그가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는가?

물론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이 "찬송"을 의미함은 의미심장하다. 천국에 가면 우리는 모든 것이 새로와졌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익숙한 한 가지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찬송이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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