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복음송(C.C.M.)

 

세속화된 교회의 대중가요 

 

1. 정의(Definition)

 

현대복음송은 세속화된 교회의 대중가요이며 교회의 타락한 음악(노래)을 말한다.

먼저 ʻ현대ʼ(Contemporary)란 이 시대의 철학과 문화로 오염된 그 무엇을 말한다.

따라서 현대복음송이란 이 시대의 철학, 이 시대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음악을 말한다.

이 시대의 철학, 이 시대의 문화란 이시대 다수 사람들의 정신상태, 의식구조, 사고방식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생활양식을 말한다.

영어에서 contemporary는 modern과는 구별된다.

현대복음송은 이런 시대의 철학, 이런 시대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음악이니만큼 그런 음악은 어떠한 음악인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2. 기원(Origin)

 

사탄의 제1의 무기는 음악(The First Weapon)

 

사탄의 원시 상태(original state)는 에스겔서 28장 12-15절에 잘 묘사하고 있다.

사탄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높은 지위에 있는 천사를 계명성(morning star)이라고 하였는데, 영어성경 KJV에는 루시퍼(Lucifer)로, NASB에는 새벽의 별(star of the morning)로, NIV에는 새벽별(morning star)로, 아침의 아들(son of the dawn)로 번역되었다(사 14:12). 타락하기 전 그의 영광은 지혜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였으며 흠이 없었다(겔 28:12, 15).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갖기를 욕망하였고, 다른 천사들과 인류를 지배하기를 욕망하였으며, 심지어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통치하기를 욕망했다(사 14:12-14).

 

그리하여 사탄은 범죄, 타락하므로 천국에서 추방되었고 그때에 그와 함께 한 무리들 즉, 천사들 3분의 1이 함께 추방되었다.

타락한 천사는 본성이 악하여 참소하며, 속이며, 시험하며, 파괴하며, 살인하며,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능력이 있다(마 13:19; 요 8:44; 살전 3:5; 계 12:9-12).

사탄이야말로 마귀들(Devils)과 귀신들(Demons)의 왕이요,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이다(마 12:24; 엡 2:2).

 

사탄의 제1의 무기는 음악이다. 총․칼․대포가 아니라 음악이다.

사탄은 현대복음송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에 침투하며 하나님의 자녀들, 특히 청소년들을 중심한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다.

특히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가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찬송곡들을 부르기 시작한 이후로 더욱 혼돈과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3. 현대복음송의 유래

 

1) 현대복음송(CCM)들 중 일부는 신오순절파(방언파)에서 유래되었다. 

현대 오순절파 운동의 아버지라 일컫는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 1873-1929년)은 1905년 미국 중남부 휴스톤에서 ʻ휴스톤성경학교ʼ(Houston Bible School)를 세우고, 현대 방언을 하며 현대복음송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팔함의 흑인 학생들 중 한 명인 세이모어(W. J. Seymour)는 로스앤젤레스 시(市) 아주사 거리(Azusa St.)에서 목회를 하면서 현대복음송을 불렀다.

손뼉을 치며, 몸을 좌우로 흔들고 춤을 추며, 타악기들을 연주하며, 악기가 없으면 냄비나 프라이팬이나 빨래판 같은 것들을 두드리며, 껑충껑충 뛰거나, 교회 안을 뛰어 돌며 현대복음송을 불렀다.

 

2) 현대복음송들 중 일부는 블루스와 재즈에서 유래되었다. 

블루스(Blues)는 미국 동남부 멕시코만에 위치한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서 흑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음악이다.

블루스 음악의 가사들은 대부분 노예, 가난 등의 슬픈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곡들은 재즈(jazz)의 형태를 취한다.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면서 트럼펫(trumpet), 트롬본(trombone), 클라리넷(clarinet), 색소폰(saxophone) 같은 악기들을 연주하며 쉰 목소리(husky) 같은 음성으로 노래를 부른다.  블루스 음악은 흑인들의 대중가요이다.

 

재즈(Jazz)는 유럽 음악의 화성구조와 아프리카 음악의 복잡한 리듬의 영향을 받은 즉흥성이 강한 음악으로 블루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블루스와 재즈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3) 현대복음송들 중 일부는 팝송에서 유래되었다. 

팝송(Pop song)이란 영어로는 Popular Song(인기있는 노래)으로 다수의 세상 사람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를 말한다.

다수의 세상 사람이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란 물론 가사나 곡조가 모두 세속적인 노래들이다.

현대복음송들 중 일부는 팝송에서 유래되었으므로 리듬이 대중가요와 거의 구별할 수 없다.

 

4) 현대복음송들 중 일부는 찬송곡들을 편곡하여 부르는 노래들이다. 

하우킨스(Edwin Hawkins, 1943년- )는 신오순절 계통의 흑인 피아니스트요 합창단 지휘자로, 영국 회중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인 다드리지(Philip Doddridge, 1702-1751년)가 작사하고 림바울트(Edward Rimbault)가 작곡한 ʻ오 해피 데이ʼ(O Happy Day, 우리말 번역, 주의 말씀 받은 그날)를 빠른 템포에 드럼과 솔로, 알토들의 백그라운드 화음을 가(加)하고, 피아노로 화음과 리듬을 섞어서 편곡하였다. 감정은 레이 찰스(Ray Charles)같이 가사 하나하나에 악센트를 주어 당시 톱(top) 40곡 중 첫 번째로 올랐다.

 

5) 현대복음송들 중 일부는 찬송의 토착화에서 유래되었다. 

찬송의 토착화(Contexualization)란 찬송의 가사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노래들(민요들)의 가락․리듬․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현대복음송 애호자들은 현대복음송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집에는 서양의 가곡․민요․가요․국가 등도 들어 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 고유의 정서와 가락․리듬․곡조에 맞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다.

신토불이의 찬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판소리․굿거리․살풀이․농악․민요 등의 음악 형태들로 찬송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향린교회와 같은 일부 교회들은 벌써부터 그렇게 부르고 있다.

 

6) 현대복음송들 중 일부는 록 음악에서 유래되었다. 

록음악(Rock Music)에서 유래된 현대복음송을 일명 ʻ크리스천 록음악ʼ(Christian Rock Music)이라고 부른다.

미친 듯한 고성(loud voice), 전자 기타, 드럼, 심벌즈, 신디사이저 같은 타악기들의 전쟁소리 같은 요란한 소리들이 계속 반복되어 육신을 흥분시키고 자극한다.

 

이외에도 온갖 세상의 타락된 노래들이 복음송이라고 하는 가면을 쓰고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행 20:28)에 침투해 들어와 암, 독버섯, 누룩처럼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

오! 하나님 아버지여! 이 패역한 세대에서, 그리고 이 타락한 열린예배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옵소서! 

 

 

4. 현대복음송의 특징들(The Characteristics of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현대복음송(C.C.M.)의 특징은 춤추며 노래하는 것이다.

 

1)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른다. 

원래 손뼉을 치며(hand crapping) 열광적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은 신오순절 계통(신비파)의 교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예배시간이나 또는 부흥회와 같은 특별 집회 때 손뼉을 치면서 찬송을 불러왔다. 그러나 지금은 교파를 초월하여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손뼉을 치면서 찬송을 부른다. 그들은 시편 47편 1절,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라는 말씀을 오용한다. 그러나 소위 현대복음송이 교회들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는 열광적으로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던 예배행위가 점차적으로 양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면서 현대복음송을 부르는 면으로 양상이 바뀌고 있다. 물론 손뼉을 치면서 현대복음송을 부르는 것이나 양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면서 현대복음송을 부르는 것이나 모두가 육신의 감정적인 면에만 치우치는 것은 다를 바 없다.

 

2) 양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노래를 부른다. 

오늘날 현대복음송을 애창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양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부른다.

이는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서 시작된 흑인들의 블루스와 재즈 음악(Blues and Jazz)의 형태이다.

이는 마치 세상의 열린 음악회 같은 곳에서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과 같다. 현대복음송들의 곡조와 창법 그리고 현대복음송을 부르는 사람들의 제스처(gesture)가 열린 음악회 같은 곳에서 대중가요를 합창하는 세인(世人)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랴!

 

3) 손유희를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손유희란 율동과 말 못하는 청각장애인의 언어인 수화(sign language)를 혼합한 것을 말한다.

소위 젊은 청춘 남녀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교회 앞에 나와 손유희를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근래에는 찬양학교, 율동학교들이 있어서 소위 찬양사역자들과 손유희 반사들을 양산한다.

손유희를 못하면 주교 반사 자격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분명히 말세의 징조가 아닌가!

물론 열린예배 보는 교회들에서 하는 손유희와 청각장애인들의 수화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청각장애인들의 수화는 의사소통의 유일한 수단이요 방편이다.

입으로 말하지 못하니 손짓으로 말하고 찬양하며, 귀로 듣지 못하니 눈으로 손동작을 보면서 의사소통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각장애인들의 수화는 정당하고 옳다. 그들은 수화로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하심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느끼고, 깨닫고, 찬양하는 것이다.

 

4) 워십 댄스를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워십 댄스(Worship Dance)란 찬송이나 복음송의 내용들을 춤(몸의 동작)으로 나타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5) 현대무용을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 부활절 같은 절기 때와 총동원 전도 주일 같은 때에는 청춘 남녀들이 몸에 꽉 붙는 옷, 앞가슴이나 하체부분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신성한 강단 위에 올라가서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리듬 음악에 맞춰 발랄한 춤을 추는 것이 교회마다 대유행이다. 춤사위로만 메시지가 전달되는 셈이다.

 

6) 꽃․촛불․인형․머플러 등을 가지고 춤추며 노래를 부른다. 

열린예배 보는 교회들은 예배순서 중에 10-20명의 여자들이 한 조(a group)가 되어 머리에 꽃송이를 꽂고, 목에 머플러를 감고,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몸을 율동적으로 흔들면서 춤을 추며 현대복음송을 부른다. 이들은 청년회나 여전도회를 중심한 각 부서들이 경쟁이나 하듯 다투어 전 대원이 사치한 의상들을 갖춰 입고 소품들을 늘 새롭게 바꾼다.

여기에 드는 경비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이러한 모습을 한국에 복음을 전했던 초창기 선교사님들이나 신사참배까지 거부하였던 경건한 하나님의 종들이 바라본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과연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성경이 말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가?(요 4:24; 롬 12:1)

 

7) 뮤지컬을 한다. 

뮤지컬(Musical)이란 대중 오락적인 음악극이다.

다시 말해 노래․춤․연극․의상․분장․무대장치․조명 등에 의해 양식화된 음악극이다. 남녀 신도들이 노출된 옷을 입고, 짙은 분장을 하고,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대사(연기자가 각본에 따라 하는 말)를 외며, 춤을 추며, 연극을 한다. 

 

8) 힙합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힙합(Hip Hop)이란 문자적으로 힙(Hip)은 ʻ엉덩이ʼ를, 합(Hop)은 ʻ껑충껑충 뛰다ʼ라는 뜻이다.

따라서 힙합 음악은 타락한 청소년들이 거지 같은․허스름한․헐렁헐렁한 옷을 입고, 괴상한 모자를 쓰고, 엉덩이를 들썩들썩이고 껑충껑충 뛰면서 허튼 노래를 지껄이는 것을 말한다.

 

원래 힙합은 1970년대 미국 농장에서 흑인들이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브레이크 댄스(Break Dance)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춤을 추면서 노래하다가 노래는 멈추고 춤만 추다가 다시 춤과 노래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힙합은 비트(beat)가 강하고 소리가 크며, 반문화적(counter culture) 은어와 욕설, 섹스, 마약, 기성사회에 대한 반항과 비판 등이다.

이런 타락한 힙합을 추며 소위 현대복음송을 부른다.

 

9) 크리스천 록음악을 부른다. 

크리스천 록음악(Christian Rock Music)이란 빈약한 기독교의 가사를 록음악의 형태(rock music style)로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크리스천 록음악은 현대복음송들 중 가장 타락한 교회 음악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록음악 악기들인 기타, 전자 기타, 드럼, 심벌즈, 키보드 등을 연주하면서 발광을 한다.

 

워렌은 크리스천 록음악을 새 노래(New Song)라고 하면서 새 노래를 부르라고 강조하며 시편 96편 1절의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는 말씀을 오용했다.

 

‣ 또한 워렌은 그의 저서에서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음악의 가사들이 더 근래의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악 스타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날마다 듣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일들 중의 하나는 오르간을 밴드로 대체하는 것이다. … 몰아붙이는 박자(beat)를 가진 큰소리의, 쉰 목소리의 음악이 그의 회중들이 듣는 종류의 음악이다.”라고 했다.

 

‣ 또 그는 “우리는 주말 집회 때 정말 소리가 크다. … 나는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 같은 회중들은 음악을 느끼기를 원하지,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또 “우리는 클래식, 컨추리 뮤직, 재즈, 록, 레게(서인도 제도 자마이카 기원의 록 뮤직), 경음악, 심지어 랩도 사용한다”라고 말했다.

“We used classical, country, jazz, rock, reggae, easy listening and even rap.”

 

답손은 “우리는 록음악을 사용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대답은 ʻ예ʼ이다”라고 말했다.

“Do we have to use rock music? in a word, the answer is yes.”

 

10) 장구 치며 한국 민요가락에 맞추어 현대복음송을 부른다. 

장구 치며 춤추며 우리나라 민요가락에 맞추어 흥에 겨워 현대복음송을 부르는 것을 저들은 찬송의 토착화라고 한다(유명해 국악선교예술단 (02) 391-1599. 유명해 여자 목사(학장)). 

 

비평: 

찬송은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 좋은 음악, 나쁜 음악이 없다? 노래는 모두 같다? 누구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은 좋다? 메시지는 다양한 스타일로 전달될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노래를 부른다? 록․레게 심지어는 랩도 부른다? 교회가 완전히 세속화되고 타락한 증거이다.

 

이것은 철저한 주관주의, 개인주의, 상대주의, 쾌락주의의 생각으로서 진리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한 인본주의자들의 다원주의적 사상이다. 이것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탈현대주의)의 현상이다.

 

① 주관주의(subjectivism)는 개인의 생각․태도․느낌․주장만이 옳다는 주의이다. 따라서 주관주의는 결코 객관성이 없다.

크리스천 록음악은 기독교의 저속한 복음송 가사와 사탄의 음악인 록음악의 형태로 구성된 가장 타락한 교회 음악이다.

열린예배의 주요 음악인 크리스천 록음악이 어떠한 음악인지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록음악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②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자신만을 위하는 철저한 자기 중심의 이기주의이다.

타인들의 안녕에는 관심이 없다.

 

③ 상대주의(Relativism)는 절대적 표준, 가치, 판단,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주의이다.

따라서 상대주의는 표준, 가치, 진리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적 사상은 절대주의가 무너지면서 발생했다.

 

④ 쾌락주의(Hedonism)는 자신의 육체의 쾌락만을 위하는 향락주의이다.

정신적․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크리스천 록음악은 세상에서도 가장 타락한 음악(사탄의 음악)인 록음악 형태로 나타난다.

강단을 무대로 만들고, 조명 장치를 요란하게 하고, 음란한 무늬의 청바지 같은 옷을 입고, 강단 위에 올라가 몸을 상하좌우로 강하게 떨고 흔들며, 기타치고 드럼 치며 고성으로 악을 쓰며 노래한다.

 

기타는 하체 중심부까지 내려뜨리고 좌우로 마구 흔들면서 줄을 튕긴다.

드럼(대북․소북․중북)을 북채로 터져라 때리며, 키보드를 띵띵 땡땡하며, 심벌즈로 계속 챙챙 치며(round medal brass), 전자 앰프의 볼륨(volume)을 높이고, 마이크를 잡고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른다.

 

이 같은 현상은 오케스트라 연주회(관현악 연주회) 같은 곳에서는 물론 세상의 열린 음악회 같은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타락한 장면들이다.

이 같은 현상은 이 세상에서도 가장 타락한 댄스홀(dance hall)이나 사탄의 음악인 록음악 공연장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우리는 인류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를 때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며, 고성으로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나 정보를 찾아볼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노래를 부를 때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며 고성으로 노래를 부른 일이 없었다.

 

이런 소리들과 음들은

① 거칠다(raw), 투박하다(blunt), 난폭하다(wild).

② 혼란한 혼동된 음(chaotic sound)이다.

③ 음이 저속(vulgar)하고 교양이 없다(rude).

④ 사람들의 정신 상태를 마비시킨다(mind-numbing).

⑤ 사람들을 최면시킨다(mesmerizing) -열광시킨다(frenzy).

⑥ 청각을 상실시킨다(hearing damage).

⑦ 예술적 가치는 빵점이다(zero value).

⑧ 사람들을 타락시킨다.

 

우리는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이나 사용하는 악기들이 회중의 귀에 거부 반응이 없도록, 청각을 상실하지 않도록, 정신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음량(volume)을 조절해야 하며, 출력을 제한해야 하고, 마음을 진정․안정시키고, 이성의 지배를 받는 순수한 감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찬송 지도를 올바로 해야 한다.

 

이 세대의 소위 현대복음송을 무엇에 비유할꼬! 출애굽기 32장에 의하면 모세와 여호수아가 시내 산으로 올라가다가 여호수아는 중도에 머물게 하고(출 24:13), 모세만이 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과 대면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십계명을 하사하시고,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다가 여호수아를 다시 만나 이스라엘 진영으로 같이 내려왔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가까이 내려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떠드는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스라엘 진영에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진에서 전쟁 소리 같은 소란하고 요란한 소리가 난다”라고 말했다(출 32:17). 모세는 “내가 듣기에는 요란한 소리, 시끄러운 소리, 떠드는 소리”라고 말했다(출 32:17-18). 모세와 여호수아가 내려와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 제사하고, 춤을 추며, 소란하고 요란한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것을 목도한 모세는 노하여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불사르고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리고 그 물을 그들이 마시게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은 40년 동안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생활을 하지 않았는가!

 

모세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 밑에서 불평하며, 반역하며, 불안하며, 혼돈하며, 타락하여 배도하며, 전쟁 소리 같은 소리(sounds like war)로 노래하며 춤추던 그 노래들과 오늘날 자신들의 여흥을 위하여 전자 기타 줄을 때리며, 북을 치며, 손뼉을 치며, 몸을 뒤흔들면서 부르는 현대복음송이 무엇이 다를꼬!

 

손뼉을 광적으로 치며 찬송 또는 현대복음송을 부르는 것이 성경적인가?

 

손뼉을 치며 찬송 또는 현대복음송을 부르는 사람들은 시편 47편 1절의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예배에 손뼉 치는 것을 합리화한다. 

 

비평: 

손뼉 치는 것은 기쁨의 한 외적 표현이다. 그러나 시편을 기록할 당시는 음악적으로도 고대에 속한다. 유감스럽게도 히브리인들의 순수 음악 유품 같은 것도 전혀 남겨져 있지 않다. 다만 히브리 음악은 질질 끌어 나가는, 즉 시를 읊는 것같이 가사를 읊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가사의 곡은 첫 부분이나 끝 부분에 음을 다소 높이거나 낮추는 정도였다. 고대음악은 음의 고저나 리듬이 없는 단조로운 음악이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 받으신다. 시편 47편 1절의 ʻ손뼉을 치며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넘치는 기쁨으로 마음껏 찬양하라는 말씀이요, 광적으로 손뼉을 치며 예배드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구약시대 예배의식(제사 의식)에 손뼉을 치는 일이 없었으며, 회당 예배의식에도, 신약시대 예배의식에도, 그리고 기독교 역사 2천 년 기간에도 광란적으로 요란하게 손뼉을 치며 예배드리는 일이 없었다. 광적으로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는 예배의식은 최근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과 광신도들의 부흥회 같은 집회들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교회의 성역 없이 퍼져 나가고 있다.

 

음악은 영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 영향을 미치듯이 육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음악의 육체적 반응은 머리를 흔들거나, 손뼉을 치거나, 발바닥을 두드리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반응들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범위 안에서의 반응이어야 한다. 주석가 박윤선 박사는 “손뼉을 치는 것은 기쁨이 충만한 행동이니 그저 기쁨으로 찬송해야 될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손뼉 치는 것을 종교의식처럼 가지라는 명령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5. 현대복음송의 문제점들(Problems)

 

현대 세속화된 교회 음악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1) 현대복음송의 작사자․작곡가들은 자질․자격이 부족하다. 

자질이란 타고난 성질과 품격을, 자격이란 전문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격․지식․기술․경험 등을 갖춘 것을 말한다.

그런데 현대복음송의 작사자․작곡가 대다수는 자질과 자격이 심히 부족하다.

 

교회 음악의 올바른 작사자, 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선천적으로 타고난 예술적 자질(소질)과 재능이 있어야 하며, 후천적으로 그 소질과 재능을 잘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정의 전공 과정을 이수하고, 그 전공 분야에서 상당한 경륜을 쌓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 음악은 종교 음악이니 만큼 바른 신앙과 신학적 지식과 인격이 갖춰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복음송의 작사․작곡가(소위 찬양 사역자)들 다수는 교회 음악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격을 구비하지 못한 무자격자들이 태반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라오디게아 공의회 문헌 제59항은 찬송시를 사사롭게 하거나 예배에 쓰이는 것을 금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나 성곡들을 작사, 작곡한 사람들 다수는 참으로 믿음, 지식, 인격, 자격이 구비된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대표적 인물들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 모차르트(Mozart), 바흐(Bach), 하이든(Haydn), 헨델(Handel), 헨리 퍼셀(Henry Purcell), 멘델스존(Mendelssohn),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토마스 켄(Thomas Ken), 아이작 왓츠(Isaac Watts), 필립 다드리지(Philip Doddridge), 탑플래디(Augustus M. Toplady), 존 뉴턴(John Newton),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 제임스 몽고메리(James Montgomery), 레지날드 히버(Reginald Heber), 존 케블(John Keble), 존 메이슨 닐(John Mason Neale), 존 헨리 뉴만(John Henry Newman), 호라티우스 보날(Horatius Bonar), 후레드릭 윌리엄 훼이버(Frederick William Faber), 토마스 켈리(Thomas Kelly), 세실 프란시스 알렉산더 여사(Mrs, Cecil Francis Alexander), 샤롯 엘리옷(Charlotte Elliott), 캐더린 윈월트(Catherine Winkworth), 존 다이크(John B. Dykes), 조지 제임스 웨브(George James Webb), 디모데 드와잇(Timothy Dwight), 토마스 해스팅스(Thomas Hastings), 레이 팔머(Ray Palmer), 사무엘 후랜시스 스미스(Samuel Francis Smith), 브래드베리(William B. Bradbury), 패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윌리엄 제임스 컥패트릭(William James Kirkpatrick), 윌리엄 하워드 돈(William Howard Doane), 말트비 다벤포트 밥콕(Maltbie Davenport Babcock), 필립 폴 블리스(Philip Paul Bliss) 등이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복음송 작사․작곡가들은 어떠한가!

기타만 좀 칠 줄 알면 아무나 작곡하고, 너나없이 가사들을 쓴다. 음성만 조금 좋다 싶으면 영락없이 찬송사역자라고 이름 붙이고 또 그렇게 행세하며 교회들을 순회, 공연한다. 어떤 교육과정을 거치고 자격요건을 갖췄으며 누가 사역자라는 직함을 주었는가? 기름 부어 안수라도 했단 말인가? 그들 다수는 찬송을 작사, 작곡할 자질과 품격과 자격이 없다. 그들이 바로 주님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노래로 세속화시키는 사람들이 아닌가?

 

2) 현대복음송은 가사 내용이 너무나 빈약하며 잘못되었다. 

 ① 현대복음송 대다수는 내용이 빈약하다.

자격이 결여된 무명의 작사자들의 작품이고 보니 가사의 내용이 빈약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현대복음송들에서는

  ㉮ 종교개혁 이후의 4형태의 찬송들,

  ㉯ 성경 말씀들을 가사로 작곡한 교회 합창들(anthems),

  ㉰ 기독교 교리를 가사로 해 작곡한 찬송들,

  ㉱ 영적 각성과 영적 전쟁을 위한 찬송들,

  ㉲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한 고난에 관한 찬송들

  ㉳ 배교와 불신앙으로부터의 성별에 관한 찬송들

  ㉴ 구원․영생복락에 관한 찬송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대복음송에서는 주님의 보혈(blood), 십자가(cross), 고난(suffering), 영적 전쟁(battle), 성별(separation), 구원, 영생에 관한 가사들을 찾아볼 수 없다. 현대복음송에는 복음이 없다.

 

 ② 현대복음송 대다수는 내용이 잘못되었다.

현대복음송 다수는 가사의 신앙적․교리적 문제들을 많이 안고 있다.

신앙적으로 유치하거나 교리적으로 정통성이 아닌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다. 현대복음송은 신앙의 지로(知路)가 되는 내용들이 결여되고 잘못되었으므로 성도들의 신앙의 성장을 오히려 감퇴시키며 잘못된 길로 오도하고 있다. 구속의 은총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신앙적 지식이 정립(正立)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3) 현대복음송은 곡조가 단조로우며 세속적이다. 

 ① 현대복음송 대다수는 곡조가 단조롭다.

곡조가 단조롭다는 것 자체만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모차르트(Mozart, 1756-1791년)의 곡들은 단조롭지만 고상하여 더욱더 감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현대복음송은 빈약한 내용, 잘못된 내용에 단순한 곡조들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접근하기는 쉬우나 영감이 없고 은혜가 되지 않는다.

 

 ② 현대복음송 대다수는 곡조가 세속적이다.

현대복음송의 멜로디(음율, 가락)와 리듬(박자의 흐름), 하모니(화음)가 전혀 신앙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현대복음송의 곡조들은 세인들의 대중가요 곡조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현대복음송들 중 크리스천 록음악은 사탄의 음악인 록음악과 리듬이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현대복음송들은 가사 내용이 빈약하고 잘못되고 곡조가 세속적이어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면서 세속에 물들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복음송은 타락한 교회의 ʻ대중가요ʼ(Pop music)이다.

 

4) 현대복음송은 감정적인 면에만 치우친다. 

예술에 있어서 감정적인 면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감정이란 순수한 마음(pure heart)에서 나오는 순수한 감정(pure emotion)이어야 한다. 순수한 감정에서만이 순수한 예술(pure art)이 창출된다. 그런데 현대복음송을 부르는 사람들이 육신적, 감정적인 면에만 치우친다는 말은 육신의 욕망(desires) 또는 정욕(lusts)에만 치우친다는 말이며 지적인 면은 소홀 또는 등한시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지식․감정․의지의 균형을 이룰 때 비교적 온전한 인격자가 되는 것처럼, 음악도 지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intellectual and emotional)의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좋은 음악이 된다. 사람이 지식․감정․의지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인격적으로 불구자(handy cap)가 되는 것처럼, 지적인 면이 결여되고 육신의 감정적인 면에만 치우친 음악은 음악의 균형과 조화를 상실한 불구의 음악(crippled music)이 된다.

 

그런데 현대복음송은 육신적, 감정적인 면에만 치우치므로 지적인 면의 빈약․결여․상실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현대복음송은 지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의 균형과 조화를 상실한 불완전한 음악(deficient music)으로, 음악의 본래 모습(integrity)을 상실했다. 지적인 면이 결여된 현대복음송은 지적인 면으로 전달해야 할 내용 또한 결여되므로 내용이 매우 빈약하다. 내용이 매우 빈약하고 보니 음악의 영감(inspiration) 또한 빈약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따라서 현대복음송은 육신의 감정에만 치우친, 음악의 자질이 결여된, 내용이 빈약한, 영감이 없는 불구의 음악이다.

 

5) 현대복음송은 자신을 즐겁게 한다 

현대복음송에 열광하는 사람들 다수는 현대복음송을 부름으로 자기 자신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고 있다.

자신을 즐겁게 한다는 말은 육체의 쾌락을 말한다. 육체의 쾌락 또는 향락의 헬라어는 헤도네(sensual pleasure)로서 육체의 감각에 의한 쾌락을 말한다. 이 단어를 한글 성경에는 일락(눅 8:14), 행락(딛 3:3), 열락(벧후 2: 13), 정욕(약 4:1, 3) 등으로 번역했다. 이 단어는 위로부터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참된 영혼의 기쁨을 의미하는 카라(joy; 기쁨, 희락)와는 성질상 판이하다. 물론 현대복음송 중에서도 크리스천 록음악은 더욱더 육신의 쾌락을 추구한다.

 

현대복음송은 회중의 기분(feeling)을 즐겁게 하는 일종의 여흥오락(entertainment)이다.

대다수의 현대복음송 애호자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예술적 가치와 미(美)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찬송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부르는 성도 자신에게도 영적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현대복음송 애호자들은 현대복음송을 부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대신에 자신들을 즐겁게 한다. 즉, 육적인 즐거움을 추구한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것을 부인하랴! 세상의 쾌락주의 문화가 현대복음송을 통하여 교회 안에 침투한 명백한 증거이다.

 

우리는 연예인들을 가리켜 여흥자들(entertainers)이라고 부른다. 분명히 대중가요를 직업적으로 부르는 가수들(소위 찬양사역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똑같음)은 세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여흥자들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성도들은 연예인도 아니고, 방청만 하는 청중도 아니다. 또한 교회 음악은 예배 음악이요, 예배 음악은 노래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영광을 돌리는 찬송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사람의 쾌락주의(Hedoism)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예배 음악(찬송)이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현대복음송으로 대치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것을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예배와 오락은 구별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귀에 감미로움과 즐거움만을 위하여 작곡된 노래들은 교회의 위엄(존엄)에 합당치 못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음악의 쾌락적인 면을 철저히 금했다.
 

6) 현대복음송은 사람들을 자기중심의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현대복음송은 자기만족을 추구하게 하므로 자연히 자기중심의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현대복음송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으로부터 떠나 자신만을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이기주의, 주관주의, 상대주의, 쾌락주의, 실용주의, 인본주의로 점점 빠져들게 한다. 그 결과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I) 중심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기쁘게 한다. 분명히 현대복음송은 원리 문제와 실행 문제 사이의 충돌을 가져온다. 분명히 현대복음송은 찬송의 의의와 목적에 역행한다.

현대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으로부터 사람 중심이 된 것은 일반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예배의 목적은 개인의 필요와 만족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7) 현대복음송은 신자들의 신앙을 저하시킨다 

현대복음송은 지적인 면이 결여된 빈약한 음악이고 영감 또한 빈약한 노래이고 보니 신앙의 성장, 발전을 저하시킨다.

현대복음송은 신앙적으로 성숙한 음악이 아니다. 현대복음송 애창자들 다수가 자신들을 즐겁게 하고 만족을 추구하므로 신앙의 성장이 거의 없다. 따라서 현대복음송을 애호하는 신자들이나 소위 현대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병 고침)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본인은 현대복음송에 열광하는 자들, 소위 현대 방언이나 신유 은사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을 본 일이 없다. 현대복음송 애창자들 다수는 신앙적으로 미성숙(immature)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굳은 음식(영의 양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0장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다. 기본적 신앙이 장성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reason)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새김질하며, 의지로 준행함에 있다. 

 

8) 현대복음송은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안내한다 

사람이 지적인 면은 도외시하고 감정에만, 그것도 순수한 감정이 아닌 육신적 감정에만 치우쳐 육신의 기분과 만족만을 추구하다 보니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드디어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고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물론 자신들은 자신들이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을 완강히 부인하겠지만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우선시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이다. 이 경우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갖지 말라.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된다.

 

예배의 참 대상자는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시는 영원자존, 전지전능,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억만 죄악에서 보혈로 구속하여 주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9) 현대복음송은 전통적 예배의식을 파괴한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기도와 찬송, 진정한 신앙고백, 뜻과 정성이 담긴 헌신, 감사의 예물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행위이다. 예배드리다 라는 헬라어 동사 세보마이to fear, serve; 두려워하다, 봉사하다)도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신약시대 예배의식은 옛날 구약시대 회당 예배의식으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예배의 요소들은 기도․찬송․신앙고백․성경 봉독․설교․성찬․헌금․축도 등이다. 그리고 찬송도 예배의 성질과 의식에 따라 마음 중심으로부터 순수한 감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 왔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 2천 년 동안에 일찍이 없었던 소위 현대복음송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옴에 따라 지금까지 지켜온 전통적 예배의식은 모두 파괴되고 세인들의 열린 음악회처럼 되었다. 전통적 예배의식은 예배의 성질과 의식에 일치하는 예배, 곧 경건한 예배를 가리킨다. 전통적 예배의식을 모르는 신세대 젊은이들은 예배는 이런 식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신세대를 위한 예배의식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 

 

10) 현대복음송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에 장벽을 쌓는다 

기성세대 성도들의 예배의식, 사고방식과 신세대의 예배의식, 사고방식은 너무나 판이하다. 기성세대 성도들은 전통적 찬송으로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를 드려 왔으나 신세대 젊은이들은 소위 현대복음송으로 자유분방하게 예배를 드린다. 어려서부터 현대복음송으로 자기 기분, 자기만족을 추구하니 엄밀한 의미에서 예배라고 할 수 없으며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장벽을 쌓는 것이 된다. 현대복음송 애창자들은 대다수 공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 세대가 바뀌고, 교역자들이 바뀌고, 현대복음송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회중이 바뀌면 교회는 점점 무당 굿하는 것같이 될 것이 아닌가! 실로 심각한 문제이다.

  

11) 현대복음송은 비성경적 연합운동을 촉진한다 

현대복음송은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장벽을 쌓는 반면에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교회들, 교단들 간의 장벽을 허문다.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기독교 내의 기이한 현상들 중 하나는 교회들의 비성경적 연합운동(Unbiblical Ecumenical Movement)이다. 비성경적 연합운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 하나는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교회들의 기구적․조직적․유형적․세속적 연합운동이요, 또 다른 하나는 소위 현대복음송으로 인한 연합운동이다. 음악은 회중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힘이 있다. 노래는 사람들을 한 음성, 한 생각, 한 마음, 한 정신으로 연합시키는 힘이 있다. 노래로서의 현대복음송은 신앙고백, 신앙 노선을 각기 달리하는 교파, 교회, 신도들을 하나로 연합시킨다.

 

그러면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고 신앙 노선이 각기 상이한 교파들․교회들․신도들이 어떻게 하나로 연합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20세기 자유주의자들의 비성경적 에큐메니칼(연합) 사상에 깊이 감염되었으며 영적 분별력이 결여․부족․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한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 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의 비성경적 연합운동과 현대복음송으로 인한 비성경적 연합운동을 반대해야 한다.

  

<긴급 제안> 

비참하게도 오늘날 대다수의 신학교에는 찬송학이 교육과정에 들어 있지 않으며, 있다할지라도 이론과 실기에만 편중되어 있다.

찬송의 원리에는 무지(無知)하고 세상 풍조는 홍수처럼 들어오는 상황에서 무방비 속수무책이다.

교회가 타락될 수밖에!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올바른 찬송의 정착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로, 현대복음송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셨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서는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만을 즐겁게 하는 현대복음송, 지적인 면을 소홀히 하고 감정적인 면에만 치우치는 현대복음송, 사람들을 이기주의로 만드는 현대복음송, 가사와 곡이 교리와 찬송의 원리에 위배되는 현대복음송, 신앙의 성장을 저해하는 현대복음송,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현대복음송, 전통적 예배의식을 파괴하는 현대복음송,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에 장벽을 쌓는 현대복음송, 가사의 내용이 빈약하고 잘못된 현대복음송, 곡조가 단조롭고 세속적인 현대복음송, 비성경적 연합운동을 촉진시키는 현대복음송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겸하여 나올 수 없음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한 입으로 찬송과 현대복음송을 겸하여 부를 수 없다. 야고보서 3장 11절은 한 샘에서 어디 단물과 쓴 물을 내겠냐고 하셨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바른 교회 음악에 대한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신학교들은 바른 교회 음악 교육을 즉시 시행해야 하며, 각 교회 교역자들, 찬양대 지휘자들 그리고 모든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산교육이 절대 필요하다. 신학교에서의 교회 음악은 찬송의 원리를 가르치는 찬송학이어야 하며, 단순히 이론이나 실기만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기독교 정통 교리를 책임지는 신학자들, 지도적 위치에 있는 교역자들, 교회 음악 전문인들로 구성된 가칭 찬송가 위원회가 결성되어야 한다.

이 위원회에서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곡들 중에 찬송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곡들은 찬송가집에서 제외시키는 반면에, 찬송 원리에 일치하는 적합한 곡들을 발굴한다면 그것을 선별하여 총회에 건의하고, 총회는 토론․심의․결의하여 찬송가에 편입시키며, 각 지교회는 비로소 찬송가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복음성가도 동일함).

 

넷째로, 교역자들은 교회 음악 책임자들을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중세기에는 그레고리 1세 이후로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음악 과정을 필수로 이수하도록 했다. 목회자는 찬송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 음악 담당자들은 목회자의 목회 원리에 일치되는 음악 사역을 해야 한다. 성가대는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찬송, 교역자의 말씀과 일치하는 찬송, 성도들이 은혜받는 찬송을 불러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신앙의 유산,

전통적 예배형식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확고한 신념 가운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리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유 3).

 

마지막으로, 좋은 찬송들을 많이 애창해야 한다.

좋은 찬송이란 가사면에서 성경적․교리적이어야 하며, 곡조면에서 찬송의 원리(정통적 교회 음악의 원리)에 일치해야 한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앞서간 믿음의 열조들로부터 좋은 찬송,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찬송, 영감 있는 찬송, 은혜되는 찬송들을 신앙의 유산으로 많이 물려받았다.

이제 우리는 잠자는 좋은 찬송들을 발굴하고, 좋은 찬송들을 작사․작곡하여 지금의 좋은 찬송들과 더불어 좋은 찬송들을 많이 애창해야 한다.

  

․에베소서 5:10, "주께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시험하여 보라"

"시험하여 보라"(proving by test; 시험하여 증명하라).

 

거지 같은 옷을 입고, 강단에 올라가서 껑충껑충 날뛰며, 기타치고 북 치고 심벌즈 때리고 키보드 누르며, 발광하며 소위 현대복음송을 불러 대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인지 시험해 보라.

 

․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행인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거하라."

"육체의 정욕을 제거하라"(to abstain from sinful desires)는 육체의 소욕들, 죄의 욕망들을 의지적으로 끊어 버리라고(중간태) 충언했다.

 

․로마서 8:6-8,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flesh)은 육신의 부패성, 죄의 성질을 가리킨다.

 

① 육신의 "생각"(mind; 정신,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②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 그 영이 병들고 쇠하고…….

③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육체"(flesh)…영(spirit) "육체"는 몸 안에 내재해 있는 육신의 부패성, 죄의 성질을 가리킨다.

"소욕들"(desires, lusts; 욕망들, 정욕들)은 육체가 원하는 욕망들이다. 이 단어를 정욕으로만 번역하면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제한시키는 것이 된다. 이 단어(에피두메이)는 좋은 면과 나쁜 면, 성령과 육체 등에 모두 사용되었다.

 

"거스리고"(opposes each other)는 서로가 반대하고 대적하고 충돌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들은 영 곧 중생한 영, 자아의 주체가 원하는 것을 반대․대적․충돌하며, 반면에 영의 소욕들은 욕체가 원하는 것들을 반대․대적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소욕들과 영의 소욕들,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서 인간 딜레마(human dilemma)에 빠져 탄식했다.

 

 

현대복음송 찬동자들의 궤변들(Excuces for Using C. C. M.) 

 

1) 현대복음송 금하면 전도․부흥이 안 된다는 궤변 

현대복음송 찬동자들은 "열린예배․현대복음송 반대하면 청소년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없다.

따라서 다음 세대에는 교회 문을 닫게 될 것이다"라고 궤변을 토한다.

 

비평: 

① 철저한 인본주의 생각이다. 철학과 종교에서 인본주의는 신본주의의 정반대이다.

②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③ 성경과 교회 역사가 가르치는 참된 전도․부흥은 기도로, 찬송으로, 말씀으로, 전도로, 환난․핍박으로, 죄 회개함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참된 부흥(revival)의 진정한 의미는 먼저 신자들의 영적 갱신(renewal)이요,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것이다.

④ 원리: 세상+교회=세상 교회

    열린예배를 보는 교회는 이미 세속화된 교회, 타락한 교회이다. 

 

2) 공예배 전에만 복음송을 부른다는 궤변 

현대복음송 찬동자들은 "우리는 공예배(Public Worship) 전(前)에만 15-30분 복음송을 부른다.

공예배 때에는 복음송을 부르지 않는다"고 궤변을 토한다.

 

비평: 

① 그것은 궤변이요, 변명이다.

    그와 같은 궤변은 현대복음송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는 성도들을 무마하기 위한 변명인 동시에 현대복음송은 예배를 위한 찬송이 아님을 스스로 나타내는 증거이다.

② 예배시간 전에 부르는 노래 따로 있고, 예배시간에 부르는 찬송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공예배시간 전에는 현대복음송을 부르고, 공예배시간에는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예배의 일치 원리에 위배된다.

③ 지금 공예배 전에 부른다는 현대복음송들은 불원간에 공예배 때에도 부르게 될 것은 시간문제이다.

   우리는 모든 이론들을 파(파멸)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3) 좋은 곡들만 선별하여 부른다는 궤변 

현대복음송 찬동자들은 "복음송들 중에는 좋은 곡들이 있다.

그러므로 좋은 곡들만 선별하여 부르면 복음송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한다.

 

비평: 

이런 주장은 영적 분별력이 없는, 찬송의 원리와 예배모범에 무지(無知)한 교역자들이나 평신도들에게는 상당한 호감과 설득력이 있는 궤변이다.

 

물론 복음송들 중에 좋은 곡들이 간혹 있다는 것을, 반면에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집에도 찬송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곡들도 들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 26절을 가사로 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일서 4장 7-12절을 가사로 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시편 23편을 가사로 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등 찬송가 외의 좋은 곡들이 있다.

 

그러나 다수의 복음송들은 작사면에서나 작곡면에서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송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실제적 문제는 선별자의 자격구비 문제이다. 누구나 복음송들 중 어떤 곡은 좋고, 어떤 곡은 좋지 못하다고 선별할 수 있는 것인가?

좋은 찬송 선별의 기준․표준은 무엇인가?

 

문제는 음악을 전공한 종교 음악인들은 음악의 이론과 실기에는 능통하나,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모범이나 찬송의 원리에 대하여는 무지(無知)하며,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들 역시 음악의 이론과 실기는 물론 예배모범․찬송의 원리에 대하여도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불행하게도 다수의 종교 음악인과 목회자는 그 수많은 복음송 중 좋은 곡들을 선별할 능력이 없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신학교에는 중요한 찬송학이 커리큘럼(curriculum)에 들어 있지도 않다. 그러기에 일찍이 칼빈은 목회자가 되려면 필히 음악을 바로 배우고 바로 알아야 한다고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좋은 찬송들(Good Hymns)  

노래에도 좋은 노래가 있고 나쁜 노래가 있듯이, 찬송에도 좋은 찬송이 있고 좋지 않은 찬송이 있다.

우리는 좋은 찬송이란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좋은 찬송만 선택하여 불러야 한다. 

 

4) 지금 부르는 다수의 찬송도 그 찬송들이 나올 당시에는 일부에서 반대가 있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지금 반대하는 복음송들도 얼마 후에는 모두가 애창하게 될 것이라는 궤변

 

비평: 

물론 우리가 현재 애창하는 찬송들 중 상당수의 복음찬송들(Gospel Hymns)은 그 당시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① 복음찬송은 하나님을 향한 직접적 경배찬송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루터․칼빈․츠빙글리․낙스․에라스무스들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에 청교도들, 그 후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찬송으로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만의 하나 복음찬송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자신의 육신의 쾌락과 만족으로 기울여질까 염려했다.

 

② 복음찬송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동시에 우리가 찬송의 가사를 따라 은혜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찬송을 경배찬송보다 더 많이 애창하므로 찬송의 목적이 약화되고 우리의 이익만을 위하는 이기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③ 복음찬송들과 현대복음송은 시대․작사․작곡가들의 자격, 가사와 곡조 등 모든 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현대복음송은 자신들의 육신의 쾌락을 위함이요, 하나님께 노래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니 우리는 현대복음송을 철저히 반대해야 한다. 

 

5) 찬송가집에는 서양의 가곡․민요․가요․국가․등도 많이 들어 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정서와 우리 고유의 가락․리듬․곡조에 맞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궤변

 

비평: 

찬송의 토착화(제7장 5항 참조)

 

고린도후서 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라."

"모든 이론"(reasoning)은 모든 상상(imaginations)․추축(speculations)․논쟁(arguments)들을 가리키고,

"파하며"(overthrowing)는 파괴(demolish)를 가리킨다.

 

데살로니가전서 5:21-22,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범사에"(all thing)는 모든 일에, 매사(every thing)를,

"헤아려"(proof, test)는 시험하여 증명함을,

"좋은 것"(good)은 "취하고"(hold fast)는 굳게 잡으라는 뜻이다.

 

매사에 좋은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여 증명하고 좋은 것은 굳게 붙잡고 놓치지 말라는 명령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abstain from every form of evil)

"모양"(form)은 외형적 형태를, "버리라"(abstain)는 속은 물론, 내용, 외형적 모양까지도 버리라, 끊어 버리라, 제재하라는 뜻이다.

 
6) 복음찬송(Gospel Hymns)만 부른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
 

① 복음찬송이 성경적이고 적합한 찬송이라도 복음찬송만 계속 많이 부르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 기독교 교리를 중심으로 한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면, 점점 더 육신적․감정적인 면으로만 흐르게 될 것이요, 신앙은 점점 더 저하될 것이다.
 
② 복음찬송만 부른다면 찬송의 우선순위와 균형이 상실된다.

찬송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이요, 그 다음은 기독교 교리를 중심으로 한 찬송(Hymns)이다.

 
③ 현대복음송은 예배로서의 균형(balance)을 파괴한다.
예배로서는 기도․찬송․신앙고백․설교․성찬․축도 등인데 열린예배는 찬송 대신에 현대복음송만 계속 부른다.

영적으로 어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온갖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7) 현재 찬송가집의 찬송들만으로는 부족한가? 더 많은 찬송들을 필요로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좋은 찬송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찬송들이면 충분하고도 넘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경배․찬양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일찬송가에만도 50곡이 넘는다. 그래도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더 많이 나오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찬송가 작사․작곡가들의 자질이 요구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암브로스, 루터, 칼빈, 토마스 켄, 헨리 퍼셀, 아이작 왓츠, 탑플래디, 찰스 웨슬리, 존 뉴턴, 윌리엄 카우퍼, 레지날드 히버, 토마스 켈리, 토마스 헤스팅스, 레이 팔머, 윌리엄 브래들리, 하워드 돈, 다벤포트 밥콕 등 위대한 찬송시․찬송작가들이 영계의 음악을 담당했다. 이러한 인물들이 요구된다.
  
8) 오늘날 복음송이 그토록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왜 좋은 곡들이 희귀한가? 
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철학과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철학과 문화는 타락한 철학과 문화이다.

 
② 좋은 찬송들이 많이 나오던 종교개혁 이후 독일․스위스․영국․오스트리아․미국 등의 당시 영적․신앙적․도덕적 상황과 이 시대의 영적․신앙적․도덕적 상황은 낮과 밤이 다른 것처럼 판이하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찬송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송들이 숫자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이다.

 
 
7. 춤은 예배의 한 방편이라는 궤변들(Excuses) 
 
춤을 추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경적인가?
 
세속화된 교회들은 "성경을 살펴보면 성경은 춤을 예배의 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고 많은 신앙의 열조들이 이것을 통하여 주님께 기쁨을 드리며 예배를 드렸음을 본다. … 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표현일 뿐만 아니라 기쁨을 표현하는 한 형태이다. … 교회 안에 춤은 회복되어야 할 영역이다. … 시편의 찬송시 등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요한 방편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궤변을 토하면서 출애굽기 15장 20-21절; 사무엘하 6장 16-22절; 역대상 15장 29절; 사사기 11장 34절; 시편 30편 11절, 150편 4절; 마태복음 11장 29절; 누가복음 7장 32절, 15장 25절 등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
 
현대 무용하는 젊은 여성들이 몸에 착 붙고 살이 비치는 얇고도 투명한 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거룩한 강단을 무대 삼고, 번쩍번쩍하는 오색찬란한 조명 아래서 누웠다 일어났다, 다리를 들었다 하면서 춤을 춘다.
 
먼저 우리나라 국어대사전에는, "춤이란 손짓․발짓을 율동적으로 우쭐거리면서 뛰노는 예술적 행동․무용이다"라고 정의했다. 웹스터(Webster) 사전에는 "춤이란 노래에 맞추어 몸과 발을 신속하게 움직이는 동작"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오늘날 세속화된 교회, 열린예배 보는 교회의 젊은이들이 예배 때에 추는 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복음송을 부르면서 양팔을 들어 좌우로 흔들면서 춤을 추는 형태(율동, 손유희)이고, 다른 하나는 기타와 드럼을 치며, 이따금 심벌즈를 챙챙 마주치며, 몸을 뒤흔들고 열광적으로 크리스천 록음악을 부르면서 춤을 추는 형태이다. 이 형태는 더욱 열광적이고 발광적이다.
  
열린예배 찬동자들은 아래의 성경구절들을 오용하여 춤은 예배의 한 방편이라고 궤변을 토한다.
 
① 출애굽기 15장 20-21절,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며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때에 홍해(Red Sea)를 육지같이 마른 땅으로 건넌 후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하심,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온 신기하고도 놀라운 체험,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바로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신 그 크신 은혜를 감사․감격하여 기뻐서 소고를 잡고 춤을 추었다. 소고(timbrels)는 나무로 만든 작은 북으로 오늘날의 탬버린(tambourine)과 유사한 악기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② 사무엘하 6장 12-22절, 역대상 15장 29절은 여호와의 궤(ark, 율법을 새긴 두 돌비석이 들어 있는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춤을 추었다.

이 말씀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는 전혀 무관하다.

 
③ 사사기 11장 34절은 사사 입다가 암몬 자손들과 싸워 크게 승리하고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나와서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했다.

이 말씀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는 전혀 무관하다.

 
④ 시편 150편 4절의 "소고 치며 춤추며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라는 말씀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업적을 기리면서 여러 종류의 악기를 연주하고 찬양하라는 말씀이다.

 
⑤ 누가복음 15장 25절은 한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왔을 때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아 기뻐서 풍류와 춤을 추었다.

풍류는 헬라어로 쉼포니아(symphony; 심포니)로서 그 문자적 의미는 화음을 뜻하며, 이 단어에서 영어의 심포니가 유래되었다. 음악에 있어서 심포니는 교향악단에서 연주하는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를 말한다.

 
이 말씀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는 전혀 무관하다.

신구약 성경 어느 곳에도 사람들이 즐겨 추는 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저들이 말하는 춤이 예배의 한 방편이라는 주장은 성경 말씀의 원리,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속성(성품), 예배의 성질과 특성, 예배 모범, 교회 역사 등에 비추어 볼 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타락시키는 궤변들로서 역사적 기독교 정통 신앙을 지켜오는 우리에게는 큰 독소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 "춤추며"라는 말씀은 구원의 감격을 몸과 영혼에 넘치는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하는 외적 표현일 뿐 구약시대 성전 예배나 회당 예배, 신약시대의 예배, 그리고 기독교 역사 2천 년 동안의 정통교회 예배의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열린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춤은 회복되어야 할 영역이다"라고 했는데 회복이라는 말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회복이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데 이전(과거)에는 춤을 추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상황화라는 이름 아래 춤을 예배의 형식으로 도입한다는 것은 성경과 예배 모범에 비추어 볼 때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

어느 교회도 어떠한 명분과 구실로라도 춤을 추며 예배드린다는 것은 이미 세속화된 증거이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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