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의 기원, 중국 菹菜(저채·절임채소) 아니다
박채린 세계김치硏 연구원, 김치연구서 2종 발간

 

 

“쟁반에 오직 김치(침채·沈菜)만 있고, 상 위엔 소금만 올려놓았네. 생각을 많이 말라 맛이 중한 것이니, 젓가락 끝이 매우 청렴하네.”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족하는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시다. 조선 전기 문인 관료인 김정국(1485∼1541)과 이안눌(1571∼1637) 등이 남긴 시를 보면, 자하젓과 오이로 만든 섞박지가 등장해 기존에 알려진 ‘증보산림경제’(1766)의 기록보다 200년 이상 앞선 시기인 15세기 말 이전에 이미 젓갈을 넣어 만든 김치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5대 건강식품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김치는 언제부터 한국인의 일상식과 기본 반찬이 됐을까.

박채린(42) 한국식품연구원 부설 세계김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최근 출간한 ‘조선시대 김치의 탄생’(민속원)에서 “조선시대 김치문화는 중국 고대의 저채(菹菜·절임채소)문화와는 다른 양상과 배경을 지닌 삼국시대 한반도의 저채문화에서 출현한 것”이라고 밝혔다.

절임채소를 칭하는 음식명인 저(또는 저채)가 3000년 전 중국 문헌인 ‘시경(詩經)’에 처음 등장한다는 사실을 토대로 동아시아 문화권의 저채류가 중국에서 전파됐다는 학계의 통설인 중국기원설을 비판한 것이다.

박 연구원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 보완해 펴낸 책에서 한반도의 저채문화가 중국과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중국의 저채류 제조법을 볼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6세기 전반 위진남북조 시대의 농서 ‘제민요술(齊民要術)’이다. ‘제민요술’의 저채류는 소금과 함께 식초나 술, 술지게미 등을 사용해 절이고 한 번 익히는 조리 단계를 거치는데,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 소금이나 장을 주로 이용해 절이고 원료를 가열처리하지 않고 생채를 그대로 사용했다. 바로 이 같은 차이가 1차로 소금에 절인 뒤 2차로 복합양념을 혼합하는 조선 고유의 정체성을 지닌 김치가 탄생하는 바탕이 됐다고 박 연구원은 설명했다.

조선시대 문집류 300여 권에서 560여 건에 달하는 김치 관련 기사를 발굴한 박 연구원은 책에서 조선시대 김치문화와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밝혀냈다.

중국에서 저는 송나라 이후 일상음식으로 사용되지 않고 국가제사 때 제찬(祭饌)으로만 명맥을 유지했다. 한반도에서도 저는 ‘고려사 예지’에 제찬으로 기록된 것이 최초의 출현이다. 고려시대 일상생활 자료에서 저채류는 주로 염채(鹽菜), 지염(漬鹽), 침채 등으로 표기됐다.

중국과 고려에서 국가제사음식 용어로 사용이 제한됐던 저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김치를 뜻하는 일상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박 연구원이 조선시대 문헌에서 김치표기어를 모두 추출해 통계를 내본 결과, 저(저채)가 의례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김치를 뜻하는 용법으로 사용된 비중은 80%에 달했다. 반면 그동안 학계 또는 일반에서 조선시대 김치표기어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침채가 문헌에서 사용된 비중은 12%에 불과했다. 박 연구원은 “김치표기어로 저가 압도적이었던 것은 조선 사회에서 김치가 유교의례적 음식이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와 ‘다산시문집’에서 새롭게 발굴한 내용을 통해 1600년 전후 조선땅에 유입된 고추가 하층민의 음식으로 먼저 사용됐던 값싼 식재였음을 밝힌 것도 이 책의 성과다. 조선 후기 문신 이서우(1633∼1709)의 시에서 ‘증보산림경제’의 기록보다 최소 60년 앞서 김치에 고추를 사용한 증거도 찾아냈다.

방부효과와 단맛을 동시에 지녔을 뿐만 아니라, 어류의 비린내를 가려주는 효과를 지닌 고추와 젓갈을 함께 사용하는 김치 제조법은 19세기에 자리 잡았다. 박 연구원은 잎사귀 숫자가 많은 결구성 배추의 육종에 성공해 재래종 조선배추에 젓갈, 고춧가루가 모두 재료로 사용된 김치(이른바 통배추김치) 제조법이 완성된 시점을 적어도 1830년 이전으로 제시했다.

한편 박 연구원은 이번에 석사학위 논문을 재구성한 문고본 ‘통김치, 탄생의 역사’도 함께 출간했다. 책에서 그는 현재 식용김치의 주류인 통배추김치가 20세기 초반 한반도의 김장문화로 자리 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최영창 기자 yccho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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