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 조선초 ‘비어 있던’ 선조들의 풍습 생생히

“산붕·나례 구경하는 부녀자들 부끄러움 모르니… 명산·신사에 내왕하면 남편도 치죄를”

 

 

 

‘인재집’ 책 앞머리에 실린 신개의 유묵.

 

 

“지금 사대부의 아내들은 귀신에게 아첨하고 미혹하여, 산과 들의 음혼한 귀신을 제사 지내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중에도 송악산과 감악산을 더욱 지극하게 높이고 섬기어, (중략) 청컨대 지금부터는 중외(中外)의 명산과 신사(神祠)에 부녀자들의 내왕을 일절 엄금하고,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육전(六典)에 의거하여 실행으로써 논죄하고 아울러 그 남편도 치죄하소서(중략). 산붕(山棚·고려부터 조선까지 산대잡극(山臺雜劇)이 연희될 때 설치한 장식무대)이나 나례(儺禮·민가나 궁중에서 묵은해의 악귀를 쫓기 위하여 음력 섣달 그믐날에 벌이던 의식) 등 성대한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대소(大小) 부녀자들이 길가에 장막을 치거나 행랑의 다락 위에 올라가 빤히 얼굴을 내밀고 마음대로 구경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함이 없으니(중략).”

고려 공민왕23년에 태어나 조선 세종28년에 죽은 문신 신개(1374~1446)는 1431년 6월 25일 ‘산과 들의 음사를 금할 것을 청하는 소’라는 상소를 올렸다.

세종은 1431년 6월 23일 사헌부에 전지를 내려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풍습은 어지간히 그쳤으나 음사(淫祀)를 지내는 일이 많다며 성안에서의 음사를 엄금하라고 했다. 이에 사헌부 수장인 신개가 이 같은 상소를 올린 것이다. 신개는 음사를 금해야 할 근거로 “예기(禮記)에 ‘부인이 낮에 뜰을 나다니지 아니하고, 연고 없이 중문을 나서지 아니하는 것은 부도(婦道)를 삼가는 까닭’이라고 하였고, 본조의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예전(禮典)에 ‘양반의 부녀는 부모, 친형제, 자매, 친백부, 친숙부와 고모, 외삼촌과 이모 외에는 가서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어기는 자는 실행(失行)으로 논죄한다’”라며 성리학 책을 들이댔다.

이것은 명산대천을 찾아 천지신명에 복을 기원하던 우리 민족의 오랜 민간신앙과 산대놀이, 나례와 같이 대중적인 행사를 유교적인 질서 속으로 묶어놓기 위한 것들이었다. 강제력을 얻기 위해 아내의 잘못에 대해 남편인 사대부에게 죄를 묻겠다는 발상도 21세기에 돌아보면 다소 우습다. 고려의 불교적 규범과 질서가 조선의 유교적 질서와 충돌하는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는 관습은 조선시대 500~600여년의 전통이고, 1000년 전으로 올라가면 활달하고 뻔뻔하기까지 한 여성의 모습을 만날 수도 있게 된다. 신개의 문집 ‘인재집’(寅齎集, 고전번역원 펴냄)에서다. 신개가 주장하는 논리를 따라가지 말고, 고려말 조선 초의 풍습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정보수집 차원에서 읽으면 더 재밌겠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 8월, 중대광 문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겸 지춘추관사 백문보(1303~1374)도 척불소(斥佛疏), 즉, 부처를 배척할 것을 상소한다. “신라 때 처음으로 불법을 숭상하여 백성들이 출가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아전들은 다 (출가하여) 노역에서 도피했으며,사대부들도 아들이 하나임에도 모두 머리를 깎게 했습니다. 근래에 이르러 그 폐단이 더욱 심해져 임금에게 아첨하고 백성을 해치며 세상을 미혹게 하고 재물을 좀먹고 있습니다.”

출가해 불교 승려가 되면 군역을 피할 수 있고, 면세 대상이 되니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성리학을 공부하는 학생인 유학(幼學)에 이름을 올리거나 서원에서 공부하면 군역이 면제됐음을 감안하면 승려 운운한 것은 억불정책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불교를 탐탐치 않게 생각하면서도 당대 고승 나옹선사의 어록이 책으로 나오자 백문보가 기꺼운 마음으로 그 서문을 쓴 연유는 백문보의 담암일집(淡庵逸集)에서 읽을 수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신개의 인재집과 백문보의 담암일집을 비롯해, 조선 개국 공신 조준(1346~1405)의 송당집(松堂集), 고려말 문신 이종학(1361~1392)의 시집 인재유고(麟齋遺稿), 역시 고려 말·조선 초에 활동한 이직(1362~1431)의 시집 형재시집(亨齋詩集) 등 5권을 최근 완역해 세상에 내놓았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우리 역사연구가 조선 중기와 후기에 집중돼 고려 말·조선 초기의 시대상황과 개인의 생활상, 역사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면서 “이 5권의 문집이 우리 역사의 빈 공간을 채워줄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학계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고려 말·조선 초기 문집의 연구번역을 공모한 결과가 1차적으로 나온 것으로, 2차 연도 문집은 올해 10월에 출간될 예정이다. 2차 연도 번역 문집은 안축(安軸)의 근재집(謹齋集), 민사평(閔思平)의 급암시집(及菴詩集), 진화의 매호유고(梅湖遺稿), 전녹생(田生)의 야은일고(?隱逸稿), 이원(李原)의 용헌집(容軒集), 이달충(李達衷)의 제정집(霽亭集) 등 6종이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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