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재조명한 이집트학(Egyptology)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586jang.jpg

    쌍폴레옹에 의해 해독된 로제타 스톤

 

 

“나폴레옹 원정으로 고대 이집트 문명과 역사 활짝 열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전쟁과 파괴의 문명보다 월등하게 풍부하게 많은 자료를 남기고 있다. 더구나 이 많은 기록들은 상당히 오랜 고대시대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기원전 2250년경 멤피스(Mempis)에 석비가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그동안 이집트를 통치하였던 140명이나 되는 바로들의 연대기가 기록되어 있다(Ludlow Bull, In the Kdea of History in the Ancient Near East 4-5).

 

튜린 파피루스(Turin Papirus)로 알려져 있는 석비는 기원전 13세기에 와서야 제작되었지만 300여명에 달하는 기원전 16세기 이전 왕들의 목록을 담고 있으며 고대 선사시대 시절 지배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는 신화 속의 신들의 이름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토스 1세(Setos Ⅰ, 1291-1278 BC) 때 작성된 왕들에 대한 인명록도 기원전 2000년경의 뛰어난 두 통치자에 대한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역사 기록은 기원전 7세기와 6세기 이집트의 암흑시대의 기록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집트는 자체의 세력이 쇠퇴함을 의식하고 무려 1000년 이상 지난 옛 관습과 예술, 그리고 사회적 전통에 대한 기록을 남겼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집트의 권력자들과 역대 바로들은 이스라엘에 관계된 사건들만은 이상하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부분이 있다.

 

고대의 역사 기록은 영광과 화려한 치적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이스인이었던 사관(史官) 마네토(Manetho)는 이집트 역사에 대해 객관적인 저술을 남겼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서 무어라 평가할 수 없다. 특별히 창세기 50장 이후부터 출애굽기 1장 사이의 430년의 세월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이집트 문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데오도시우스 황제(Theodosius Ⅰ, AD 379-395)는 그의 제위시대에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 원본을 보관하고 있던 세라피스(Serapis) 신전을 불태워버림으로써 후대의 학자들이 열람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박탈하여 버렸다(AD 391). 그 후 643년 술탄 오마르(Sultan Omar)에 의해 이집트에 남아있던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 기록물들 역시 소각되고 말았다. 오직 헤로도투스가 남긴 기록물과 마네토의 기록물을 인용한 내용들만 단편적으로 전하여질 뿐이다.

 

AD 320년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ts Ⅰ, AD 324-337)는 이집트 룩소(Luxar)에 있던 모세와 함께 자랐던 시기로 추측하는 투트모스 3세(Thutmose Ⅲ, 1504-1450 BC)의 오벨리스크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이 오벨리스크(obelisk)는 지금도 이스탄불(Istanbul)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내용은 투트모세 3세의 시리아 원정을 찬양한 것으로 바로에 대한 칭송비로 해독되었다. 1600년대 독일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해독한 4권의 책을 출간하였지만 후일 신성문자가 해독된 후 그의 번역은 오역으로 하나도 정확한 번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18세기 말이 되어 가면서 스웨덴 학자 아케르블라드와 덴마크 학자 조에가 상형문자를 해독하였다고 하였지만 완전히 해독하지는 못했다. 그후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이후 비로소 이집트의 고대역사에 대한 신비가 벗겨지는 시기가 오게 되었다.

 

나폴레옹 원정대에는 200여명의 학자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비방드농(Vivant Denon Dominiqe)은 1809년부터 1823년까지 이집트 고대 유적 의 스케치를 곁들인 ‘이집트의 이해’ 36권을 출간하였다. 드농은 1804년 나폴레옹(B. Napoleon)의 의해 박물관 관장으로 임명되어 1815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스페인, 폴란드를 원정할 때마다 박물관장 자격으로 동행하며 어떤 예술품을 약탈하여 올 것인가를 조언하였다. 오늘날 이 모든 예술품의 대부분은 루블(Louvre)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침내 나폴레옹 원정 이후 전 세계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기원과 역사에 대하여 새로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직적인 발굴이 시작되었고 고대 근동문명사를 그리이스 위주로 연구하던 기본 가치관을 뒤집기 시작했다. 이 또한 성경의 배경 역사를 다시 한번 재 조명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그후 세계 여러 나라의 학자들이 이집트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아직 그 누구도 상형문자를 해독하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신비에 쌓여 있던 이집트의 고대 역사를 비로소 해독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 시작하였다.

 

1799년 8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동북쪽 약 56㎞에 있는 로제타(Rosetta) 마을 부근에서 나폴레옹 군대장교였던 부샤르(Bouchard) 대위에 의해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이 발견되었다. 길이 114cm, 폭 72cm인 이 현무암에는 세 종류의 문자가 가득 적혀 있었다. 위 14행은 상형문자였으며, 중간 32행은 민용문자, 아래 54행은 그리이스 문자였다.

 

이 석비는 기원전 196년 이집트 신관들이 멤피스(Memphis)에 회집되어 신전과 신관을 위하여 많은 선행을 베푼 젊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5세(Ptolemaeos Ⅴ, 205-180 BC)를 위한 칭송에 관한 내용이었다. 참석자들은 이 신전에 젊은 바로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이 로제타 스톤은 이집트 상형문자인 히에로그라피(hieroglyp)를 해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1801년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철수 한 뒤 로제타 스톤은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후 이집트 고대의 역사는 나폴레옹에 의해 임명된 언어학자 쌍뽈레옹(J. P. Champollion, AD 1793-1880)에 의해 1822년 9월 27일 더디어 해독되기에 이르렀다. 쌍뽈레옹의 이집트 문자해독으로 고대 이집트 역사 속에 출애굽 연대기와 바로의 이름들을 드디어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출애굽 연대기를 성경(Text)에 기초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Context)을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옮겨옴)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