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토(Maneto)와 쌍뽈레옹(Chanpollion)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서역사배경연구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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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토의 저서에 출애굽 관련 사실들 기록으로 남아 있었을 것” 

 

지난번 필자는 기원전 6세기 초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입법가인 솔론(Solon 640-560? BC)이 이집트를 방문했던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그곳에서 솔론은 밀레도 출신의 그리이스인들이 정착한 도시였던 델타지방의 나무크라티스 신전(神殿)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위대한 정치가답게 자신의 조국 아테네의 오랜 역사에 관한 일들을 자랑하였다.

 

이때 이집트의 신관들은 자기들의 역사에 대하여 그리스보다 더 오랜 전통과 역사를 비교하며 설명하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네 헬레네(그리스)인들은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이들의 언급은 그리스 역사는 감히 이집트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신관들은 거의 3천년 전으로 올라가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보존하여 온 자들이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료들을 바탕으로 설명한 것이지만, 그들이 생존했던 시대에는 고대 이집트의 화려한 영광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당시 솔론과 대담을 나누었던 신관들의 말들은 전설처럼 구체적으로 내려오지 않지만 아마도 마네토의 역사적 기록을 거론하였을 것이다.

 

델타의 세벤니토스 출신 그리스계 이집트인 마네토(Maneto, 305-246 BC)는 기원전 3세기경에 자세한 이집트 역사인 이집트사(History of Egypt)를 편찬하였다. 오늘날 이집트 연대기는 마네토가 기술한 이집트사를 참고로 한 것이다.

 

마네토는 이집트 역사를 왕조 중심으로 다루었으며 기원전 3,100년 경 이집트 통일에서부터 기원전 343년 정통 이집트 왕조의 마지막 바로였던 넥타네보 2세(Nextanebo Ⅱ, 360-343 BC)까지 30개 왕조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제31왕조는 페르시아의 통치시기였으며, 제32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였으며 기원전 30년에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Ⅶ, 51-30 BC)를 끝으로 오랜 이집트 역사는 막을 내린다.

 

신관 마네토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Ptolemaeous Ⅲ, 246-222 BC)의 명에 의해 그리스판 30권으로 된 이집트사를 편집하였다. 도서관과 신전의 고문서 보관소에 남겨 있던 역사 기록물들을 열람할 수 있었던 마네토는 태고적부터 발생하였던 이집트 역사를 사건별로 추적하였을 뿐 아니라 이집트 옛 사람들의 풍습과 전통 그리고 종교생활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사실 그대로 기록하였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마네토는 원본을 제작한 다음 서기관들이 일일이 필사한 후 이 필사본들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두고 책의 원본은 세라피스(Serapis) 신전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로마의 실력자 율리우스 가이사르(Julious Caesar, 100-44 BC)가 이집트에 원정왔을 때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이 봉기하자 그의 함대가 시민들에게 탈취당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함선들뿐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까지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이집트사 사본도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후 세라피스 신전에 비치되어 있는 원본마저도 서기 391년에 신전에 대한 폐쇄령을 내린 기독교인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Ⅰ, 379-395 AD) 황제에 의해 소실되어버렸다. 신전 폐쇄령에 따라 접근이 어려웠기에 이집트사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원인 미상의 화제로 신전과 더불어 이집트사 원본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집트 3천년의 정사 기록물이 한 순간에 소실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은 우상의 신성문자라는 명분 아래 황제의 명에 의해 이집트 최후의 신전이었던 펠라 신전마저 폐쇄되면서 이집트 문자와 함께 사제들과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 이집트 신성문자는 해독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세계적 학문의 요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을 전부 가져오도록 명령하였다. 책들이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선박을 통하여 운반되자 그는 특명을 내려 보관되어 있던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을 압수한 다음 복사본을 만들고 그 후 원본은 되돌려 주었다. 이렇게 수집된 서적들을 ‘선박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붙여놓고 열람하게 하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49만 권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본을 뺀 진본만 12만 권 이상이 보관되어 지식인들과 학자들에게 많은 자료들을 열람하는 기회를 주었다. 이렇게 하여 알렉산드리아는 지식과 학술을 연구하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비교할 수 있는 도서관은 소아시아 버가모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당시 양질의 파피루스는 알렉산드라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학자들을 위하여 정보 누출마저 금지하였다고 한다.

 

만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세라피스 신전에 보관되었던 20만 부의 중요 자료들이 소실되지 않았다면 마네토의 저서 속에 기록된 출애굽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이 성경의 외적 증거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더 올라가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이주하였을 당시의 바로와 관련된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며, 위대한 총리 요셉의 이야기도 성경 외의 외적 자료로 보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찌했든 데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신성문자 해독 금지령을 발표한 이후 고대 이집트의 신성문자는 신비에 가려진 체 수세기를 흘러가 버렸다(Henry Rida & Yousself Hanna shehata, Guide to the Alexandrian Monyments, Nasr Misr Press, 1987).

 

세월이 흘러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이집트를 침공한지 꼭 1년만인 1799년 8월에 이집트의 고대사를 밝혀줄 획기적인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프랑스 공병대 소속 병사들이 이집트 북부의 로제타(Rosetta)시 근교에 있는 라쉬드에서 한 석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기원 후 450년 펠라 신전에서 유일하게 신성문자를 쓰고 읽던 신관들이 사라져버리자 이를 해독하는 사람들도 사라져 버리고 역사의 미궁으로 빠져버렸었다. 이교도 신전을 폐쇄하라는 명령 한마디에 3천년에 이르는 이집트의 고대 역사가 영원히 지워질 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799년 발견된 로제타석은 나폴레옹(Napoleon)의 원정대 중에 동참했던 언어학자 쌍폴레옹(Chabpollion, 1794-1831)에 의해 1822년 드디어 그 신성문자가 해독되었다. 미궁 속에 잠자던 신성문자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1200년만이었다. 석비의 내용은 기원전 196년 사제들이 프톨네마이오스 5세(Ptolemaeos Ⅴ, 205-180 BC)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검은색 현무암 상 중 하단에는 상형문자, 민용문자, 그리스 문자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리스 문자를 통해 상형문자 해독의 결정적 열쇠를 얻게 되었다(Robert Sole, 나폴레옹의 학자들, 이상빈 역 서울:아테네, 2003, 208-209).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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