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의 황금시대 연 다리오 I 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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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재건 반대하던 적대자들에게 엄하게 경고해” 

 

고레스 2세(CyrusⅡ, 558-547. BC)의 원통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새겨져 있다.

 

 “나는 고레스(키루스)이다. 세계의 왕이며 위대한 왕이며 강력한 왕이며, 바벨론의 왕이며 수메르의 왕이며 아카드의 왕이고, 캄비세스(cambyses)의 아들이다. 캄비세스는 위대한 왕이고 안샨(Anshan)의 왕이며 테이스페스(Teispes)의 후손이다. 테이스페스는 위대한 왕이며 아케메네즈 왕조의 시조이다. 벨(Bel)과 나부(Nabu) 신이 이 가문의 지배를 원하였고 그 후예들이 왕이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기뻐하였다.”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Ⅱ, 530-522 BC)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없다. 페르시아(바사) 제국 내에서도 그의 기록에 대한 자료 역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제2 성전 재건은 중단되고 있었다.

 

페르시아 역사 학자인 존 하트(John Hart)는 그를 강력한 폭군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이집트를 침공함으로써 근동을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를 연 군주였다. 그는 이집트를 정복한 후 계속 남진하여 이디오피아(Ethiopia)도 정복하였다.

 

기원전 522년 봄 캄비세스가 이집트 원정 중에 있을 때 페르시아에서 온 불길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페르시아 심장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었다. 가우마타(Gaumata)라고 하는 조로아스트교 승려가 캄비세스의 잃어버렸던 동생 바르디아(Bardiya)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바르디아는 캄비세스가 이집트로 출정한 후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모의를 하였었는데 이것이 구테타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캄비세스는 급히 귀국하던 중 시리아 하맛(Hamath) 근교에서 준마 위에 올라타려고 하다가 칼집 덮개가 벗겨지면서 칼집에서 빠져나온 칼이 그의 허벅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고 3주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로도투스를 언급하면서 캄비세스가 다메섹(Damascus)에서 죽었다고 주장한다.

 

캄비세스가 사망한 이후 페르시아에서 왕으로 집권한 가우마타는 집권 후 수 주가 지난 뒤에 다리우스(성경 명칭은 다리오)에 의해 기원전 522년 9월 29일에 암살되었다. 이로써 정통 아케메네즈 왕조(Achaemenian Empire)는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캄비세스 2세의 뒤를 이어 다리오(DariusⅠ, 522-486 BC)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다리오’의 페르시아 이름은 다라야-바후-마나(Daray-Vahu-manah)이다. 다리오란 명칭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이름이다(슥 1:1, 7; 7:1; 스 4:5, 24; 5:5).

 

헤로도토스의 역작 <역사>(Historiae) 제3권에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다리우스(다리오)는 제국을 20개의 주로 나누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이 주를 사트라피아(Satrapia, 총독령)라고 하였는데 사트라피아마다 한 사람의 총독이 있었고, 백성들은 그에게 조세를 납부하였다.”

 

다리오의 통치 시대는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꽃피우게 되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를 파라다이스(Paradise:낙원)라고 부르게 되는데 그리스인들은 이 아케메네즈 왕조를 파라다이자(Pairidaeza), 즉 파라다이스로 고쳐 불렀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 수도 페르세 폴리스에는 다양한 장인(匠人)들이 이주하고 있었다. 엘람에서 온 서기관, 리디아에서 온 장인 목수, 이오니아에서 온 석공, 사데에서 온 대장장이, 메데에서 파송된 군사 지휘를 담당하는 고문관, 그리스의 의사, 페니키아(베니게)에서 파견된 해군 용병을 비롯한 리비아의 전차병, 그리고 시리아의 기병과 이디오피아, 박트리아, 소그디아 등에서 차출된 수 십만의 보병들로 구성된 군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 내에서 조공으로 바쳐진 파르티아의 낙타, 앗시라이에서 조달된 양, 아르메니아의 군마, 가바도기아의 노새, 누비아에서 온 얼룩말, 인도의 코끼리, 리디아의 야생염소, 바빌로니아의 물소들이 들어왔으며 제국에는 51만 8000평방km의 사냥터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os)는 이 다리오 치세 기간을 페르시아의 황금시대라고 불렀다. 이 황금시대를 연 다리오도 그리스를 침공함으로 말미암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의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 이 불씨로 말미암아 그가 죽고난 후 150년이 흐른 뒤 엄청난 전쟁에 페르시아가 휩싸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예전에 솔로몬의 화려하였던 성전이 느부갓네사르에 의해 파괴된 것은 기원전 586년이었다. 그후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기원전 536년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제2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하지만 성전 재건 공사는 주변 이방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20년간 중단되고 있었다(스 4:1-5). 이때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백성들이 공사를 계속하도록 격려하셨다(스 5:1).

 

기원전 520년 8월 29일을 기점으로 선지자 학개는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 공사를 재개하도록 세 번에 걸쳐 격려를 하였다. 선지자 학개가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지 두 달 후에 선지자 스가랴가 이러한 선언에 동참하였다(슥 1:1). 성전 재건 공사에는 다윗 계보인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을 재개하였다고 하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또 다시 유대인들은 시련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그때에 유브라데강 건너편 총독 닷드네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스 5: 3).

 

이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은 유프라테스강 건너 편에 있던 총독의 방해를 극복하고 그들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성전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슥 5:5). 후에 다리오는 성전 재건을 반대하던 적대자들을 향하여 엄하게 경고하였다.

 

“내가 또 조서를 내리노니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變改)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 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 더미가 되게 하라. 만일 열왕이나 백성이 이 조서를 변개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헐진대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저희를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스 6:11-12).

이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사건이었다. 장대한 페르시아의 역사의 흐름 속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나타난 시기였다.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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