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람(Elam)의 중심지역 초가잔빌(Choqa zanb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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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엘람은 노아의 아들 셈의 자손들이 세운 왕국”

 

 

엘람은 바빌론 동쪽 페르시아만 북쪽 평지의 서남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다. 현지명은 초가잔빌이다. 고원지대인 이곳에 엘람인들이 거주하게 된 배경은 카룬(Karun)강과 케르카(Kerka)강의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유리한 지정학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람인들이 거주하였던 주변 지역에는 기원전 4000년 후반부터 거주하고 있던 수메르, 바벨론, 앗시리아인들과 그후 페르시아(바사)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엘람인들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엘람왕들의 역사 기록문서에는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주로 이들의 기록 토판은 수사(Susa)에서 발견되었다.

 

엘람족의 설형문자는 수메르(Sumer)의 문자와 혼용되어 사용되었으며 수메르를 정복하고 아카드 왕조시대를 연 사르곤 1세(SargonⅠ, 2360-2180 BC) 시대가 도래하면서 엘람어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 사르곤 대왕의 손자 나람신(Naramsin)과의 조약문서에서는 이 엘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엘람인들은 그들의 언어대신 바벨론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엘람족의 시조는 앗수르, 아르박삭, 룻, 아람과 함께 셈의 자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창 10:22). 그리고 에스라 4장 9절에 보면 엘람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베히스툰(Bisotun)석비에 기록되어 있는 고레스 1세의 칭송 기록은 바빌론, 고대 페르시아어와 엘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 엘람의 중심지역인 초가잔빌은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국제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특별히 이곳에 우뚝 서 있는 지구랏은 기원전 13세기 중반 엘람왕 운타시갈(Untash Gal, 1250 BC)이 건축한 도시이다. 이 지구랏은 기원전 640년경 앗시라이의 침공으로 멸망한 이후 폐허로 남아있다. 옛날 아모리족들이 다스리던 시기(1894-1595 BC)에 구 바벨론 통치자는 법전으로 유명한 하무라비왕이다. 엘람왕국의 전성기 시기는 그돌라오멜(창 14:1-17)이 통치하던 시기였다.

 

기원전 740년경 엘람 족속은 앗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이 이들을 진멸할 때까지(640 BC) 바빌론과 군사적 동맹을 맺고 있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를 침공한 앗시리아 군대 중 용병으로 출정한 엘람인들이(사 22:6) 바빌론을 침공한 궁수를 언급한다. 그후 페르시아(파사)의 고레스왕 휘하의 엘람인들을 이사야 선지자는 언급하고 있다(사 21:2).

 

에스라서 4장 9절에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페르시아(바사) 정부의 관리로서 르홈과 심새와 함께 수산인과 엘람인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성전재건을 반대한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티그리스 강 하류계곡을 향하고 있는 이란고원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엘람의 역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안에서만 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이 역사의 기원은 첫 번째의 시기가 기원전 1800년대 시기이며 두 번째 시기는 1800-1100년의 기간까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1100-645년까지로 나눌수 있다.

 

고대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아완, 얀산, 시마슈, 수사의 네 지역이 엘람의 주요도성이었다. 1차 시기는 엘람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가 있다. 엘람은 우루크(Uruk) 제1왕조의 루갈(Lugal), 도무지(Dumuzi), 길가메쉬 통치자들을 공략하여 우르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근 100년 동안 엘람왕국이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였다. 그후 엘람이 수메르 우르크에서 철수한 시기는 아다브시(市)의 루갈랄네문드와 키시의 왕 에안나툼과의 전쟁에서 패하였기 때문이었다(2400 BC).

 

엘람인들은 수메르인들에게는 항상 골칫거리였다. 이러한 공포의 대상이었던 엘람족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몰아낸 인물은 고대 위대한 정복자 사르곤 1세였다(2333-2279 BC). 사르곤 대왕은 엘람을 응징한 전과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러나 엘람인들은 항상 기회만 주어진다면 수메르와 우르왕조를 정복할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다.

 

우르 왕조는 슐기의 아들 압비신 때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이시비 아르아(Issbi-Erra) 장군의 반란으로 왕조의 세력이 양분화되는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을 때 엘람은 이 기회를 틈타 우르 제3왕조를 멸망시키고 수도 수사를 정복하였으며 우르 3왕조의 마지막 왕 압비신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아마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하란으로 이주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엘람에 의해 우르 왕조가 패망한 이야기는 기원전 2000년기 중엽의 추모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의 엘람왕은 숙갈마(Sukkalmah)였다. 기원전 18세기 말 바빌론의 함무라비가 국력을 키워 세력을 확장하자 엘람왕들은 바빌론과 대치하며 긴장을 조성하는 것이 국익에 손해가 온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바빌론과 평화조약을 맺게 된다.

 

한편 새로운 신흥세력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던 유목민의 후예들인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엘람을 침공하기로 하였으나, 엘람왕 할루슈(Hallushy)는 오히려 이 기회를 역 이용하여 산헤립(Sennacherib, 704-681 BC)의 아들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엘람은 내부 분쟁에 의해 멸망하고 엘람의 귀족과 지식인들과 주요 인물들은 기원전 639년 사마리아로 이주하였다.

 

신약시대 오순절 절기 때 예루살렘에 온 엘람인들은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로 추정할 수 있다(행 2:9).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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