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 정치인 키루스 2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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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적극 후원한 이방 통치인”

키루스 실린더(cylinder)에 새겨 있는 비문을 해독한 결과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역사 속 인물로 조명된 키루스

“나는 키루스, 세계의 왕, 위대한 왕이신 캄비세스의 아들이며 … 키루스 의 손자이며 타이스페스의 후손이며(중략) 나는 오랫동안 황폐되어온 성소들과 그 안에 있는 신상들을 티그리스강 저편에 신성한 도성들로 귀환시켰으며 그들을 위하여 영구적인 성소들을 지어 주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모두 모아서 저들의 거주지로 귀환시켰다.”

전승에 의하면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 파사르가대 입구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 앞에 당도했을 때 키루스 2세 대왕의 지석을 발견하였고 그 지석에 새겨진 글을 읽고 그의 망토를 벗어 대왕의 무덤에 덮어주며 머리를 숙여 경배하였다고 한다.

“그대가 오리라고 예상하고 오래전부터 여기 누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나라는 내가 이룩한 것이며 너는 내 무덤을 파괴할 권리가 없다.” 정복자는 정복자를 알아보는지 시대를 초월한 영웅의 무덤 앞에 영웅이 서 있었다. 아리아누스(Arrianus: 고대 역사가)의 글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은 키루스 2세를 향하여 필로쿨로스(Philokuros), 즉 친구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사르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째 되는 해인 기원전 556 년 나보니두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출신으로 바빌론을 지배한 마지막 재왕이다. 나보니두스(Nabonidus, 555-539 BC)가 왕위에 오늘지 5년의 세월이 흐른후인 기원전 612년 니네베가 함락되면서, 바벨로니아와 함께 앗시리아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였던 메디아 왕국은 이웃이자 속국인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메디아의 아스티아게스(Astyages, 556-549 BC)는 자신의 외손자 키루스에게 배신당하여 멸망하고 만다. 이러한 비극적 역사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헤로도로스의 글에 나오는 전설이다.

아스티아게스(Astyages, 550-549 BC)에게는 만다네(Mandane)라는 딸이 있었다. 한번은 그가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그녀로부터 솟아오른 물줄기가 수도를 완전히 물속에 잠기게 하더니 전 아시아로 범람하는 것이 아닌가? 이 꿈이야기를 들은 술객은 그에게 해몽을 해 주었다.

그의 말을 들은 아스티아게스는 깜짝놀랐다. 그는 딸이 결홀할 적령기가 되자 그 꿈이 실현될까 두려워 사윗감을 메디아 인에게서 구하지 아니하고 캄비세스(Cambyses, 640-600 BC)라는 페르시아인과 결혼시켰다.

만다네 공주가 캄비세스에게 시집간 바로 그 해에 아스티아게스는 환상을 보았는데 그녀의 뱃속에서부터 자라난 포도나무가 아시아 전체를 뒤덮는 꿈을 꾼 것이다. 그는 즉시 술객을 불러 해몽을 하게 하였다. 해몽을 들은 그는 사람을 페르시아로 보내어 그녀를 불러왔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로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아스티아게스는 아이가 출산하면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왜냐하면 술객의 예언은 태어난 아이가 메디아를 멸망시킨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키루스였다.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의 신복 하르파쿠스를 은밀하게 불러서 지시를 내린다. 딸이 아이를 낳거든 비밀리에 살해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르파쿠스는 명령을 어기고 양치는 목동에게 아이를 맡겼고 그 덕택에 키루스는 목숨을 건졌다.

그리이스의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 431-355 BC)은 그의 역사 소설 “키로파이디아”(Cyropaedia:키루스의 교육)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제국을 장악하는 동안 결코 폭력에 의존한 적이 없었으며 유명한 관용주의와 더불어 한번 결단을 내린 정책은 빈틈없이 수행하였던 그의 탁월한 리더십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iltanism)의 대명사로 불리운다. 그는 기원전 553년 메디아의 수도 엑바타나를 점령하고 조부 아스티아게스를 축출한 다음 메디아를 페르시아에 통합시켜 버린다.

이렇게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면서 바빌로니아와 아나톨리아와 리디아와 그리고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고 소아시아의 리디아왕 크로에수스(Croesus)가 통치하고 있는 사르디스(Sardis)를 기원전 546년 점령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539년 키루스의 신복 장군이었던 고브리아스(Gobryas)가 바빌론을 점령하였고, 레반트에서 셈족의 지배를 종결하였으며 메디아, 앗시리아, 리디아, 바빌론을 페르시아에 복속시켰다.

키루스는 기원전 537년 유대유민들에게 자신의 본토로 돌아가 성전을 제건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성경에는 섭정왕 바빌론의 벨사살이 페르시야에 점령당하였던 사건을 상세하고 기록하여 놓고 있다(단 5:1-7).

벨사살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원통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명분을 해독하였다. “나의 자식 큰 아들 벨사살의 가슴에 당시의 숭고한 신성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심어 주셔서 죄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완전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바빌로니아를 향한 전투개시 1년 후 페르시야 왕 키루스는 개선 왕으로 당당하게 바빌론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히타이트, 카시트 그리고 앗시리아인들이 페르시야에 복속되었다.

키루스 실린더(Cylinder)에는 이러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내가 평온한 가운데 바빌론에 입성하여 온 백성의 환호 속에 왕자들이 사는 별궁에 거처를 정하였다(중략). 나의 군대는 바빌론 전역을 평화롭게 순찰하였고 수메르와 아카드의 모든 지역에서 누구도 불안해하지 않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 맡아

성경은 키루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키루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대하 36: 23).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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