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노폰에 의해 재조명 된 고레스2세

 

장인수 박사(D.Min, Ph.D)
성지학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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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는 기록 남기지 못해 역사 속에서 잊혀져”

크세노폰(Xenophon, 430-354 BC)은 그리이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가 아끼는 제자 중 하나였다. 플라톤(Platon)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크세이폰의 성장 배경이나 사상이 그리이스의 전통을 잇는 플라톤의 철학적 접근 방법과 달랐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의 흐름이 그리스적인 전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통 계보에 반하여 다른 시각에서 철학사를 이어온 철학자가 크세노폰이었다. 크세노폰은 기사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장군이 되었고 정치가로서도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험과 배경을 바탕으로 역사적, 철학적 저작을 기술하였다. 이러한 배경은 플라톤과 서로 다른 극적인 대조를 이루게 하였다.


소크라테스의 문제 의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철학자였던 플라톤은 좋은 삶에 대해 소크라테스의 이데아(Idea)와 이상국가라는 철학적 교의를 앞세워 심화시켰다. 반면에 크세노폰은 좋은 삶이란 정치적, 실천적인 삶이며 정치 세계에서 절대 필요한 명제를 실천 정치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에 두었다. 이런 점에서 크세노폰은 좋은 삶이란 정치적인 삶이라고 정의하고, 정치 세계에서 진정 필요한 인물은 ‘정치 교사’가 아닌 ‘정치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크세노폰의 철학사상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력을 끼친 두 번째 인물은 고레스 대왕(CyrusⅡ The Great, 558-530 BC)이었다. 고레스는 온건하면서도 포용적인 정복 정책으로 페르시아(Persia)를 대제국으로 이끌었는데 크세노폰은 고레스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실천적 정치인의 모델로 삼았다.

고레스는 캄비세스 1세(CambysesⅠ, 640-600 BC)의 아들이었으며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대하 36:22-23; 스 1:1-8; 사 44:28; 45:1; 단 1:21; 6:28; 10:1). 고레스는 바빌론을 정복한 이후 바벨론에 유민으로 끌려와 있던 유대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칙령을 발표한 군주였다. 이러한 고레스를 세속 역사 속에서 위대한 영웅으로 다시 조명하는데 있어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크세노폰이었다.

지금의 그리스 지역인 고대의 헬라스(Hellas)라고 불렸던 곳에는 그당시 정착하여 사는 인구가 많지 않았다. 집단 이탈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상업도 활발하지 못했고 해로나 육로를 통한 소통의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척박한 땅을 경작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또한 자본도 열악한 상태였으며 메마른 땅에 과일나무조차도 심기가 어려웠었다. 그것은 그만큼 외부의 침략자들이 언제든지 기습적으로 들이 닥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크세노폰은 헬라스의 어려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의 대안으로 고레스의 능력과 자질 그리고 지도력의 유형을 그 모델로 삼았다. 이러한 정치력이 위대한 그리스의 부활을 꿈꾸는 크세노폰의 대안이었다. 하지만 후일에 그리스로 돌아온 크세노폰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고향 사람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354 BC).

고대 아케메네스(Achaemenes) 제국으로 불려지던 페르시아는 자신들의 역사를 기술하지도 않았고 단 한편의 문학 작품도 남기지 않았다. 오늘날 문자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페르시아 왕들의 비문이 전부였다. 바위벽에 새겨진 몇몇 비문들은 그들이 당시 하나의 제국을 다스렸다는 치적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뿐이다. 물론 아직 고고학적으로나 문헌상으로 우리가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페르시아에 대해 1935년부터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이 착수된 이후 페르세폴리스에서 수천 개의 작은 점토판들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유물들이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역사를 푸는 열쇠를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다만 제국내의 행정체계를 일부 알아볼 수 있는 몇 가지 정보만 접할 수 있을 뿐이다.

페르시아는 찬란한 고대 그리스 문화와 쌍벽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부정적으로 언급된 부분이 많이 있다. 서구세계의 역사관은 당시대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와 철학 그리고 정치 등이 서구의 학자들에 의해 문명의 구심점으로 부각되어 있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페르시아 문명은 역사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다. 단지 크세노폰에 의해 페르시아의 장구한 역사 속의 한 단면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의 역사적 전기인 고레스의 교욱(Cyropaedia)은 전집으로 두 권을 차지하는 방대한 저술로 후대에 남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페르시아의 거대한 역사가 자기들의 언어로 자신의 역사를 남기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하여 단편적인 역사의 줄거리로 이어가는 흐름을 짚어볼 뿐이다. 후대의 이슬람 사관에서는 자신들의 역사인 페르시아의 역사를 악의 축으로 보는 이란의 역사학자들도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본 페르시아인들은 자기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문화언어인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야만족일 뿐이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한편으로는 페르시아 군주들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비판적인 관점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적 지도자의 모델로 평가하고 기술하고 있다.

마케도니야의 알렉산더에 의해 철저하게 패망의 길을 걸어갔던 다리우스 3세(Darius Ⅲ, 336-330 BC) 시절의 그리스 저작물들은 페르시아를 철저한 악의 제국으로, 잔인한 폭군들이 군림하였던 고원지대의 야만족으로, 혹은 폭력과 야만이 활개치는 비이성적인 국가로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헬라스, 즉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야만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서구 중심적 이분법에 따라 오늘날에도 역사를 그와 같은 시각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 학계의 주된 흐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 속에서 고레스는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자니라”(사 44: 28).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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