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구약 정경 39권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책으로 손꼽히는데,

그것은 본서의 기록이 동양 고대 국가의 한 궁정 사기를 중심으로 한 세속 왕가의 무용담과 흡사한데도 불구하고,

의연히 정경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에스더서는 예로부터 그 정경성에 대한 많은 의심을 받아왔었다.

본 서론은 바로 이와 같은 에스더서의 성경 신학적 가치와 역사적 사실성의 문제를 증명함으로써 본서의 정경성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며,

아울러 이스라엘로 귀환하지 못한 이방 세계의 유다인들 가운데 역사하신 하나님의 신적 섭리와 구원에 대해 고찰하게 될 것이다.

 

   제1부: 에스더서의 역사적 배경

 

   I. 명칭

 

   히브리어 성경은 본서의 명칭을 본서의 여주인공인 '에스더'(Esther)의 이름을 그대로 본따 ; 에스테르>라 명명하였는데 이러한 이름이 70인역과 라틴 불가타역, 그리고 영역 성경을 거쳐 한글 개역 성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한편 '별'이라는 뜻의 '에스더'는 파사국 말로서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후가 되면서 받은 이름일 뿐 그녀의 본 이름은 아니다. 그녀의 히브리식 본 이름은 '소귀나무'를 뜻하는 '도금양'(桃金孃)이라는 의미의(hS;d'h} ; 하다싸,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하닷사로 표기됨; 참조, 에 2:1)이다.

 

   II. 저자와 기록 연대

 

   1. 저자

 

     에스더서의 저자에 관해서는 본서 자체의 증거도 미약할 뿐 아니라 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세 가지 대표적인 견해를 살펴보겠는데,

그것은 모르드개가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이라고 보는 견해와,  에스더서의 저자인 에스라나, 느헤미야의 저자인 느헤미야가 에스더서를 같이 저술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무명의 유다인(포로)일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1) 모르드개로 보는 견해

   이러한 견해는 '요세푸스'(Josephus)나 주석가 '드 베테'(De Wette) 등이 주장하는 견해인데 그들은 에스더서의 저자가 모르드개라는 뚜렷한 증거는 없으나 본서에 나타난 사건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관리'는 모르드개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가장 유력한 저작자는 모르드개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이 견해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은 모르드개가 하만을 대신하여 페르시아의 최고 실력자가 된 이후 유다인 구출 사건을 국가 공문서로 기록하여 보관하기 위해 원본을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가능성 있는 추정일 뿐 성경상의 아무 증거도 갖고 있지 못한다. 또한 에 10장의 기록은 본서가 모르드개 사후의 기록임과 그의 죽음 이후의 인물에 의해 기록된 것임을 보여 주고 있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2) 에스라 또는 느헤미야로 보는 견해

   두 번째 견해는 본서의 저자를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한 후 아직까지 귀환하지 못한 포로들 가운데서 일어난 일을 듣고 기록했을 것인데 이러한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에스라나 느헤미야라는 것이다. 이 견해 역시 뚜렷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으며, 가능성 있는 추정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에스라나 느헤미야를 에스더의 저자로 보는 것은 각권의 문체와 기법 등을 고려할 때 거의 타당성이 없는 견해이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3) 무명의 유다인(포로)으로 보는 견해

   이 견해는 본서의 저자가 에스더와 동시대에 페르시아 수산(Susa) 성에 살았던 한 유다인으로 보는 견해로서 주로 '영'(E. J. Young)이나 '글리슨 아처'(G. L. Archer) 등의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견해이다. 그들은 본서의 저자가 아하수에로의 통치 당시 페르시아의 궁중 풍습에 익숙한 자인 동시에 본서가 다루고 있는 일련의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유다인이었다는 것이다(참조, 에 2:23; 9:20; 10:2, 3). 왜냐하면 단지 구전으로 입수된 사실들로써 이같이 자세한 사건을 묘사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는 다른 두 견해들처럼 뚜렷한 증거를 갖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가장 타당한 견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몇 가지 이유를 갖고 있다. 즉 왕국의 내력을 상세히 알고 있는 자만이 제공할 수 있는 여러 사실들이 본서 내용 가운데 자세히 드러나 있으며, 기록의 전개 기법 또한 고도로 훈련된 서기관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본문 전체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여호와 유일신 사상이 강조되고 있는 점이나 에 3:8의 '페르시아 각 도에 흩어져 거하는 한 민족'이라는 구절은 본서를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한 유다인이 기록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결국 우리는 본서의 저자를 모르드개와 동시대 사람이었으나 그보다는 더 오래 살았던 어떤 유다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2. 기록 연대

 

     에스더서의 기록 연대는 에스더서의 저자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데 그것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유다 마카비 후대의 기록이라고 보는 견해

   에스더서를 유다 마카비 후대(B.C. 161 이후)의 기록으로 보는 견해는 본서의 내용 전체를 역사적 실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유다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Tm여진 문학적 작품이라 여기는 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그들은 본서를 유다의 민족주의가 극도의 위험을 당함으로 인해 이방인에 대한 적대 감정이 최고도에 이르렀던 마카비 시대에 유다 민족의 저항 운동을 독려하기 위해 제작된 '역사 소설'이라(H. Gunkel, Eissfeldt, Bardtke) 주장한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몇 가지 증거를 내세운다. 그 첫째는 B.C. 1세기 전반에 기록된 마카비 2서 15:36에 나타나는 '모르드개의 날'로서 이날 유다의 부림절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당시 유다인 사회에서 이방인(페르시아)의 절기였던 '푸르'(Puru: 페르시아의 신년 절기-필자 주)가 지켜지고 있었는데 지도자들이 이 절기에 대한 유다 민족적 유래를 만들기 위해서 에스더서의 설화를 꾸며 페르시아인들의 푸르 절기를 유다 고유의 부림절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둘째로, B.C. 180년경에 완성된 외경 벤시락서에도 위대한 신앙 인물 가운데 에스더나 모르드개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근거로 하여 에스더서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난점이 있다. 첫째, B.C. 2c 말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70인역(LXX) 가운데는 이미 에스더서가 정경으로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에스더서가 70인역보다 먼저 기록되어 민간에 유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에스더서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로서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본서가 설명하고 있는 부림절의 유래 역시 페르시아의 신년 절기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유다인의 구출을 기념하는 절기(참조, 에 9:26-28)로 보아야 한다. 둘째, 외경 벤시락서에 관한 증거도 좀더 세밀한 관찰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문제이다. 즉 벤시락서는 역사적인 인물 에스라까지도 빠뜨리고 있는 불완전한 저작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본서가 마카비 후대에 기록된 역사 소설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

 

   2) 아하수에로 왕 사후의 기록이라는 설

   이 견해는 에스더서가 아하수에로 왕의 사후에(B.C. 464)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견해인데 본서의 여러 구절들에 아하수에로(Xerxes I)의 통치를 과거 사실로 기록한 것을 보아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서의 저자가 아하수에로 왕 당시의 사건이나 불타서 붕괴된 수산 궁(B.C. 435)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본서의 기록 연대는 아하수에로 왕 사후의 B.C. 464-424 사이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본서의 서론에서는 그 기록 연대를 마카비 시대로 보지 않고 에스더서의 내용을 직접 경험한 익명의 유다인에 의해 후대에 기록되었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III. 기록 목적

 

   본서의 기록 목적은 표면상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지만, 귀환한 포로에서 유다 민족을 위해 팔레스틴의 유다인을 소개한 것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라면 에스더서는 귀환하지 못한 이방인 가운데의 유다인(Diaspora)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냄으로써 그들이 이방 세계에서 어떻게 하나님 중심의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가를 권고하는 내면적 목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목적과 더불어 유다인의 특별 절기인 부림절의 기원을 밝힘으로써 그것을 후대에 전승하려는 목적 또한 엿볼 수 있는데 이것도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본서의 한 가지 목적이다. 결국 본서의 기록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겠다. ① 이방 세계 가운데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확신시켜 준다. ② 이방 세계에서 신앙으로 승리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처세에 대한 표본을 제공한다. ③ 부림절 절기에 관한 역사적 기원을 설명해 준다.

 

   Ⅳ. 특징과 구조

 

     1. 특징

 

     1) 이방 세계의 왕궁 내사

   에스더서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본서의 배경이 이방 나라인 페르시아의 수산 궁이라는 사실이며, 내용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한번 언급되지 않은 채 이방의 왕인 아하수에로와 유다 여인 에스더와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 멸종의 위기로부터 벗어나 그들을 대적하던 원수들을 다 멸하고 난 뒤 이를 축하했다는 일반 역사의 기록으로만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점들은 구약의 다른 책들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통일성을 이루지 못한다고 비평을 받을 만하다. 특별히 본서의 전반부에는 와스디 왕후의 폐위와 새 왕비의 간택으로 인한 유대 소녀 에스더의 왕후 등림(登臨)이 기록되어 있는데 에스더의 이방 결혼에 대해 비율법적이라고 비평하는 구절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은 거의 같은 시대를 묘사하고 있는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와는 상당히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2) 극단적 유대주의

   본서의 또 다른 한 특징은 민족적 멸종의 위기에 직면했던 유다인들이 극도로 절박한 순간에서 생존권을 회복하면서 그들의 원수를 향해 복수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극단으로 치우친 유대의 민족주의를 표현한 것인데 유다 민족을 미워하던 자들을 수만 명씩이나 살해하고서도 기뻐하면서 축하의 절기를 제정한 것(참조, 에 9:16-19)은 성경 자체에 대한 윤리성까지도 거론될 만한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에 나타난 유대주의를 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분명 에스더 저자의 유대 민족적 경향은 성경 전체의 우주적이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구원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즉 여기에는 타민족을 해치고 죽여서라도 유다인의 영광을 추구한다는 배타적 국수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유대인 사이에서 에스더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서의 유대주의적 편중 성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사실상 '루터'(M. Luther)가 지적한 것처럼 '지나친 유대주의와 잔인성 때문에 정경성까지도 지적받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방 가운데 사는 이스라엘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은 유효하며, 그들의 자유와 번영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맥락으로 본다면 본서의 표면적 유대주의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제2부: 에스더서의 특별 주제들 중 'III. 에스더서의 정경성 문제' 부분을 참조할 것)

 

   2. 구조

 

     에스더서의 구조는 정경의 다른 역사서와 비교할 때 거의 완벽에 가까운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본서는 주제와 전개 방식이 매우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성문서 중에서도 뛰어난 문학적 가치를 지닌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본서의 첫 장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역사적 배경과 사실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지막장 역시 본서 전체 내용에 보충적 기록만이 덧붙여졌고 나머지 여덟 장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유다인이 겪게 되는 민족적 생존 위기를 중심으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명쾌한 이해를 하게 한다. 우리는 본서의 내용 속에서 모험적인 신앙으로 승리하게 된 자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제 본 서론에서는 본서의 자세한 사건 전개와 모든 장면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도표로써 간략하게 요약하도록 하겠다 (참조, 에스더 도표1).

 

   

제2부: 에스더서의 특별 주제들

 

   I. 에스더서의 역사성 문제

 

   현대의 많은 비평학자들은 본서의 역사성을 완전히 부인하고 있다.

그들은 본서를 구약의 다른 부분과 비교할 때 본서가 매우 세속적인 내용(구속사보다는 일반 역사적 주제)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가 페르시아 궁중 생활에 관계된 여러 가지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아하수에로 왕이 페르시아 역사에 나타난 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본서의 역사성은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문제로 에스더서의 역사성을 반박하는 몇 가지 견해를 고찰하면서 그 타당성 여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아하수에로의 왕후 문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투스'(Herodotus B.C. 484-425)의 고대사에 의하면 아하수에로, '크세르크세스'(XerXes I)의 왕후는 매우 잔인한 성품을 가졌던 '아메스트리스'(와스디와 동일 인물로 본다-필자 주)로서 아하수에로의 정부(情婦)인 '알타인타'의 모친을 잔인하게 토막 내어 죽인 적도 있으며, '지하의 신께 바치는 제물'이란 명목으로 바사의 귀족 14명을 생매장하기도 했다 한다. 그래서 어떤 비평가들은 이 잔인성이 유다인의 보복(참조, 에 9:5-16)때 보인 에스더의 잔인함과 흡사하다는 이유로 에스더와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바사 출신 오타네스의 딸이란 와스디에 대한 기록은 이 견해를 반증하고 있다.

 

   한편 페르시아의 정식 왕후는 가장 유력한 일곱 가문에서 태어난 한 여자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헤로도투스 III. 108), 이와 같은 규례에 따르면 유다 여인인 에스더는 왕후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헤로도투스의 기록대로 아하수에로 왕이 정해진 페르시아의 일곱 가문 중에서 간택된 오직 한 아내만을 취했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참조, 에 2:1-4). 그가 그 자신의 소견을 좇아 행한 것이 헤로도투스의 글에도 증명되고 있다(헤로도투스 III. 31).

   한편 '영'(E. J. Young)은 '이 왕후 관계의 법규는 그의 후계자가 될 다리오 왕에게만 적용된 것'이라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내세우는데 이러한 '영'의 견해를 참고한다면 아하수에로는 아무 구애 없이 일곱 가문 이외에서 자신의 왕후를 간택할 수 있었으며, 왕후 이외에도 많은 비빈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참조, 에 2:17). 특별히 아하수에로의 정치 내력을 보면 에스더의 등림에 관한 자세한 상황을 추정할 수 있다. 즉 그는 재위 2년(B.C. 483) 애굽 정벌을 완성했고, 이어 제3년 (B.C. 482)에는 헬라 대 원정을 위한 각료 회의를 소집한 적이 있는데(헤로도투스 VII. 7, 8) 이것은 에스더 1장의 배경이 되는 역사였다.

 

   그 후 B.C. 480년 아하수에로는 헬라 원정에 실패하고 페르시아의 수산 궁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왕비였던 '아메스트리스'가 왕과의 충돌로 인해 폐위된 이후였기 때문에 위로받을 왕후를 새로 뽑게 된다(참조, 에 2장). '글리슨 아처'(Gleason. L. Archer) 같은 이는 '왕후의 폐위가 왕의 정부였던 알타인타에 관련된 질투였다'고 보기도 한다. 결국 재위 7년(B.C. 478)에 아하수에로의 새 왕후로 에스더가 간택되었고(참조, 에 2:17), 총애를 받게 된다.

 

   2. 페르시아의 통치 영역과 도(분할 지역)의 수에 관한 이견들

 

   헤로도투스는 당시의 행정 구역이 127개 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적은 20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광활한 통치 영역과 그 세력하의 여러 민족을 고려할 때 본서의 127도란 결코 지나친 행정 구역의 수효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다리오 왕이 메대 전지역을 120도로 분할 통치한 것을 보아도 페르시아의 127도 행정 구역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증명된다(참조, 단 6:2).

 

   3. 유다인의 적이 75,000명이나 살해된 것에 관한 문제

 

     에 9:6-17에 나타난 바와 같이 무장한 유다인들이 단 하루 동안에 페르시아 제국 내에 있는 원수 75,000명을 살육했다는 것이나, 이것을 허락한 페르시아의 당국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본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자들의 지론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것을 신빙성이 결여된 기록일 뿐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일축한다. 아마 이 같은 이유 때문인지 70인역(LXX)에서는 75,000명을 15,000명으로 줄여서 옮긴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몇 가지 증거들에 의해 본서의 역사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① 이례적인 큰 사건이라 해서 불가능한 일, 또는 신빙성이 없는 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만일 이 논리대로라면 역사에 실재했던 무수한 대학살의 사실들이 신빙성 문제로 사장되어야 할 것이다. ② 하만이 전유다인을 진멸하려고 계획한 점이나 유다인이 미리 준비했다가 원수를 갚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75,000명이란 수효는 충분히 가능하다. ③ 대량 학살, 조직적 살해가 기현상이란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지만 고대 근동의 무자비한 대학살은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 일이 왕실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일종의 보복이었으므로 타당성이 있다.

 

   4. 모르드개는 실존 인물인가?

 

     본서의 역사성에 대한 또 다른 문제는 '모르드개'에 관한 문제로서 만일 그가 B.C. 597년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으로 송치된 포로들 가운데 들어 있던 자라고 하면 에스더 당시 통치자인 아하수에로(Xerxes)의 치세 10년까지의 연대를 계산한다 해도 모르드개는 100세가 훨씬 넘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모르드개가 에스더 때에 생존했던 인물이 아니며, 설사 살아 있었다고 가정해도 그토록 노년에 이르도록 살았던 모르드개의 개인 이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 모르드개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스더서의 후대 저작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해 강력히 지지된다. 그러나 '엉거'(Merrill. F. Unger)를 비롯한 정통주의 학자들은 6절에 사용된 관계대명사 'Who'(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모르드개로 번역됨)가 가리키는 사람이 모르드개가 아닌 모르드개의 증조부인 '기스'란 사실을 들어 이들의 견해를 반박한다. 또한 최근 고고학 연구 결과 밝혀진 비문에 의하면 '아하수에로' 치세 때에 '수사'(Susa-수산 궁-필자 주)에 '마르둑 아이'(Marduk-ai-a) 즉, 모르드개라는 관리가 실존했음을 보여 준다(Ungnad). 결국 이 두 가지 증거만으로도 '모르드개가 당시에 존재할 수 없었다'는 문제는 해결된다.

 

  II. 에스더서와 관련된 몇 가지 위경과 번역본들

 

   1. 에스더 2서와의 관계

 

     공동번역 성서(Common Bible)에는 에스더서가 1, 2서로 나뉘어 있으며, 그중 2서는 외경의 일부로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에스더 1서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에스더서와 같은 것이고, 에스더 2서는 몇 장의 추가분을 모아 따로 엮어 놓은 외경이다. 에스더 2서의 기원은 70인역(LXX)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70인역은 에스더서에다 107절에 달하는 내용을 첨가시킨 최초의 역본이기 때문이다. 이 여분의 장에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사건의 추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르드개가 계시 받은 꿈이라든가 그 꿈의 해석 등이 포함된다. 결국 이 에스더서 2서는 후대에 에스더서의 사건에 대한 더 깊은 종교적 의미 부여를 목적으로 첨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David. F Hinson).

   신빙성 있는 기록에 의하면 70인역(LXX)의 초본으로 남아 있는 것은 B.C. 114-B.C. 78에 예루살렘에 살던 알렉산더 출신 유다인 '리시마쿠스'(Lysimacus)의 것이라 알려져 있고 현존하는 최고의 에스더 2서의 사본은 교황 다마수스로부터 위탁을 받아 라틴 역본을 기초했던 '제롬'(Jerome)의 것으로 판명되었다(Bruce. M Metzger).

   정경 에스더서와 관련된 에스더 2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모르드개의 꿈 내용(11:2-12:6)-꿈속에서 아하수에로 왕의 암살 음모에 관한 암시를 받는다. ② 아하수에로의 조서(13:1-7)-에 3:13에 언급된 유다인 박멸의 조서 내용으로서 그 날짜는 아달월 14일로 지정된다(참조, 에 8:12; 9:1). ③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기도(13:8-14:19)-모르드개의 여호와 유일신 신앙과 에스더의 민족 구원을 위한 용기가 기록되어 있다. ④ 왕 앞에 선 에스더(15:1-16)-에 5:1, 2의 내용을 수정 기록하고 있다. ⑤ 제2조서(16:1-24)-에 13:1-7에서 발송된 조서를 대항할 수 있는 유다인의 보복 허용을 조서한 것이다. ⑥ 맺음말(10:4-11;1)-① 의 '꿈'에 대한 해석과 꿈의 성취를 강조한다. 그리고 11:1은 프톨레미와 클레오파트라 제4년에 모르드개의 부림절 절기에 관한 편지가 도착했음을 부연한다.

 

   2. 마소라 본문(M. T.)과 70인역(LXX)의 차이

 

   성경 전체의 본문은 A.D. 100년 '랍비 아키바'(Rabbi Aqiba)의 학파에 의해 비로소 표준형으로 정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쉬나, 탈무드 등의 랍비 저작물에도 인용되고 있는 소위 '마소라 본문'이다(마소라 본문은 탈굼역이나 불가타역의 기초가 된다-필자 주). 특히 에스더서는 다른 구약성경들보다도 히브리 본문의 보존 상태가 뛰어나서 내용상에 있어서 70인역(LXX)과도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양 사본간의 양적 차이는 실로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즉 히브리 본문의 절수는 163절인데 비해 70인역(LXX) 에스더서는 무려 107절이 많은 270절로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양적 차이는 앞에서 밝힌 대로 후대에 본서의 전승 효과를 높이기 위해 첨가된 것이었다. 다음은 불가타역(Vulgata)에 의한 본서의 70인역(LXX) 추가 부분이다. ① 모르드개의 꿈(70인역은 1:1)의 앞으로 옮김. ② 아하수에로의 조서(70인역은 3:13의 뒤로 옮김). ③ 모르드개의 기도(70인역은 4:17의 뒤로 옮김). ④ 에스더의 기도(70인역은 모르드개의 기도에 이어진다). ⑤ 아하수에로의 제2조서(70인역은 8:12의 뒤로 옮김). ⑥ 꿈 해석과 부림절 축제 설명(끝부분에 위치함).

 

   III. 에스더서의 정경성 문제

 

   에스더서가 구약의 여러 정경 가운데서 특별히 정경성을 의심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비종교적이며, 비인도적 보복 행위를 두둔하는 유대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M. Luther)같은 이는 말하기를 '나는 에스더서가 없었으면 좋겠다. 에스더서의 내용은 너무도 유대인적이고 여러 가지 이교적 비행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같은 성향은 특별히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즉 그 하나는 본서에 실린 내용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적인 기사보다는 유대 민족의 극적 구원에 관한 에스더 왕비의 중재를 위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여인을 민족의 수호신인 양 떠받들게 만들고 결국에는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정신적 순수성을 흐리게 한다고 보는 것'이다(F. W. Schultz). 또 다른 하나는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동기 역시 유대주의적 항거로만 묘사되고 있으며, 그가 왕의 살해 음모를 사전에 진정한 것도 표면상 그다지 선명한 목적을 부여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왕의 두 번째 조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매우 잔학하고 무자비한 유대주의적 복수심 이외에는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이 같은 경향성 때문에 '베르도우'(Bertheau)처럼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복수심에 가득 찬 세속적 유대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본서는 모르드개나 에스더의 개인적 공적을 찬양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을 아무 비평 없이 서술함으로써 신앙적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르드개가 하만에 대해 취했던 행동 역시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민족적 대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하만은 아말렉 족속 아각 사람의 후예임을 본문 가운데 기록하고 있으며, 결국 그들의 갈등이 종교적인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에게 돌릴 수 없다는 제1계명에 관한 신앙에서 연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에스더에게 보낸 모르드개의 대답 중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리라'(에 4:14)고 권고함으로써 그가 유다인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매우 강하게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에스더의 금식 기도와 유대 민족의 합심 기도를 참조할-에 4:1-16). 그러므로 비록 에스더서에 하나님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진 않았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을 강하게 믿고 있었으며, 확고히 의뢰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유다인의 원수들을 75,000명이나 살해한 것은 이미 하만에 의한 왕의 유다인 박멸 조서가 페르시아 전역에 유포된 상태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정당방위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메대-바사의 법률상 왕의 조사가 다른 조서에 의해 취소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유다인의 살육에 관한 조서가 이미 반포된 시점에서 모든 유다인들은 칼을 차고 생존을 위한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델리취'(Delitzsch)의 설명과 같이 '유다인에 의해 희생된 75,000명의 피는 유다인들의 잔학성 때문이 아니라 하만의 계략 때문이었던 것이다.

 

   셋째, 저자의 의도가 표면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저자는 본서를 통해 사건 자체를 비종교적 경향으로 처리하면서도 종교적 요소를 최대한도로 표현하려 하고 있다(Fr. W. Schultz). 즉 저자는 종교적 국면을 함축하면서도 비종교적인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적 기법을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책이 구약의 정경 중 한 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몇 가지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간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의 땅에 남아 있는 유다인들에게도 역사 가운데서 섭리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라는 측면에서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와 같이 포로 후기의 역사서로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IV. 부림절에 관한 문제

 

   에스더서는 부림절이 그 주제라고 할 만큼 그 절기의 기원과 배경을 상세히 묘사해 준다. '부림'(Purim)이란 이름은 '부르'(Puru), 즉 '제비'란 뜻의 파생어로서 앗시리아의 비문에서도 발견된 바 있어서 당시 '부르'를 사용했음이 입증된다. 아각 사람 하만이 모르드개로 인해 분노하게 되었을 때 그는 모르드개의 종족인 유다인 전체를 살해하기 위한 날을 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참조, 에 3: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전멸당하기로 된 날에 오히려 유다인의 원수가 멸망하도록 하셨으므로 이날을 기념하여 절기로 삼게 되었다. 이제 부림 절기의 여러 가지 규례와 부림절 기원에 관한 몇 가지 견해에 관해 살펴보기도 하겠다.

 

   1. 부림절의 어원에 관한 견해들

 

     부림절 기원에 대해서는 '부림'(Purim)의 어원적 유사성들로 인해 많은 견해가 대두되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앗시리아의 '부르'(Puru)란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로서 앗시리아에서는 이날 관직의 임기가 시작되는 신년 절기였다. ② 바빌로니아의 '부흐루'(puhru)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인데 이것은 바벨론의 엘람 신화 가운데 있는 신들의 이름과 에스더서의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연관시키고 있다. 즉 모르드개는 '마르둑'(Maruduk)을 상징하고 에스더는 '이쉬타르'(Ishtar), 그리고 하만과 와스디 역시 각각 엘람의 신들의 이름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본다. ③ 한편 페르시아어 '부림'(Purim)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이 가장 지지를 받고 있다. 본래 '바르'(Bahr)는 '제비'란 뜻인데 신년 축제(푸르디간; Purdighan) 또는 죽은 영혼들의 축제를 뜻하는데 이것이 파르와디간(farwadigahan)의 의미로 변천된 것은 멸망할 자들을 결정할 때 제비를 뽑았기 때문이라 한다.

 

   2. 부림절의 규례들

 

     부림절은 히브리 민간력의 12월(아달월) 14, 15일에 거행되는 절기로서 다른 정경들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외경 에스더 2서, 마카비 2서, 그리고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서 그 풍속을 찾아볼 수 있다. 특별히 이 절기 중 12월 14일은 '모르드개의 날'로 불리기도 했는데 우리는 이 절기가 이방 세계에 흩어진 유다인(Diaspora)에게 있어서 '여호와 중심의 신앙을 통한 승리의 기념'이란 점에서 지금까지도 유다인들 가운데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다인들은 부림절이 되면 12월 13일로부터 하루를 금식함으로 에스더의 금식기도를 기념한다. 그리고 14일이 되는 시간(유다인의 날은 저녁 해가 질 때부터임-필자주)부터 회당에 모여 에스더서의 두루마리를 통독하게 되는데 이때 본문 가운데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발을 구르는 동시에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붓지만 모르드개나 에스더의 이름이 나오면 축복한다. 이날은 밤이 늦을 때까지 축제 식사를 즐기고 '하만에게 저주가 있으라', '모르드개에게 축복이 있으라'는 소리를 구분할 수 없을 때까지 취하도록 술을 마신다. 이때만큼은 랍비들도 그 같은 과음을 허락해준다. 그런데 점차 후대에 이르면서 이날의 축제 양상이 이탈리아의 '카니발'(Carnival) 형식으로 변모되었다. 다음날인 14일 아침에는 다시 교훈을 위한 회당 예배가 있고 에스더서를 낭독한다. 이때 연극이나 찬양, 시낭송 등의 행사가 곁들여진다. 그 후 가난한 자들과 이웃을 위해 선을 베풀고 15일까지는 모든 문제를 서로 푸는 날로 보낸다(참조, 에 9: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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