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고난당하는 신앙인들에게는 욥기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고뇌에 찬 질문들을 가장 아름다운 시예적(詩藝的) 표현으로 심도 있게 파헤쳐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줌으로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지만 비평학자들에게는 욥이라는 전설적 인물의 이야기를 후대의 편집자들이 편집해 놓은 설화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본 서론은 이러한 두 가지 견해를 중점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되 먼저 비평학자들의 비평적 견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후 욥기에 나타나는 의인의 고난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고난으로부터의 회복이라는 점을 자세히 고찰하여 욥기서를 연구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와 함께 심한 시련과 시험을 당하는 성도가 지녀야 하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진리들을 깨닫게 하고자 한다.

 

   제1부: 욥기의 역사적 배경

 

   I. 명칭

 

   히브리어 성경은 본서의 명칭을 욥기의 주인공인 <b/yai ; 이요브>의 이름을 그대로 본따 <b/yai ; 이요브>라 칭하였는데 이러한 명칭을 70인역은 <!Iwb; 이오브>로 라틴 불가타역은 'Iob'로 영어 성경은 'Job'으로 인용 받아들였고, 한글 개역 성경 역시 '욥기'라 칭하여 이들의 견해를 뒤따랐다. 한편 본서 욥기의 주인공인 <b/yai ; 이요브>의 의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돌아온 자', 즉 '하나님께 돌아온 자'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 이 견해는 히브리어 <b/yai ; 이요브>가 '돌아오다' 혹은 '회개하다'라는 의미의 아랍어 '아바'('aba')에서 근거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서 '욥의 회개'에 그 초점을 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욥'의 아랍어 철자는 '아와분'('Awwaun)이 된다. 둘째, '미움을 받는 자'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 이 견해는 '욥'의 이름을 히브리어의 <by:a; ; 아야브>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로서 '공박을 받는 자' 즉 '고난당하는 욥'의 의미에 초점을 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 중에서 '글리슨 아처'(Gleason L. Archer)는 욥이 북쪽 아라비아 사람이었고 욥의 배경이 히브리적이기보다는 아라비아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본문의 어원을 아라비아적인 것으로 보지만 이렇듯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보다는 '얀센'(Irving L. Jensen) 박사의 말대로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욥의 체험 속에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II. 저자와 기록 연대

  

   1. 저자

 

     욥기의 저작설에 관한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도 다양하다. 그것은 단일 저자에 의한 저작물인가, 아니면 여러 사람에 의한 편집물인가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단일 저작물일 경우 어느 시대의 누구에 의해 기록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많은 복합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듯 많은 문제들을 한꺼번에 언급하려면 너무나 복잡한 서술이 되므로 욥기의 단일 저작설 문제에 관한 것은 그와 관련된 주제인 '욥기의 통일성과 완전성'부분(제2부 욥기의 특별 주제들 중의 III번 참조)에서 다루기로 하며, 어느 시대의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욥기의 기록 연대 부분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본문에서는 그 결론적인 소개만으로 넘어가려 한다.

 

   전형적인 고등 비평학자들은 본서의 단일 저작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끼리도 서로 다른 무수한 견해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28장의 지혜시와 32-37장의 엘리후의 말, 그리고 38-41장의 하나님의 말씀이 후대의 여러 편집자들에 의해 편집된 것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결국 그들은 욥기를 욥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에 신정론에 대한 보다 진보한 개념을 부여하기 위해 여러 가지 후대의 이야기를 첨가한 설화적 편집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음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본서가 고난 받는 의인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의인의 회복이라는 일관된 사상의 흐름과 시기에 맞는 적당한 언어의 구사, 그리고 본서의 전체적인 문체의 통일성을 들어 본서의 단일 저작설을 주장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제2부 욥기의 특별 주제들 중 III. 욥기의 통일성과 완전성 부분 참조).

 

   한편 탈무드는 욥기의 저자를 모세라고 보았고(Baba Bathra 14b), 주석가 '볼덕'(J. Bolduc)은 모세가 욥기를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본래 아랍어 형태로 되어 있는 원본을 보고서 그것을 히브리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탈무드의 주장이나 '볼덕'의 견해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욥기는 그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조금도 암시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있는 그대로 욥기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일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가 어느 시대의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추측이 가능한데 그것은 솔로몬 시대의 사람일 것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인 통설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2. 욥기의 기록 연대 부분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욥기의 저자가 단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되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단지 솔로몬 시대의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2. 기록 연대

 

     욥기의 저작 연대에 관한 견해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모세 시대라는 설

   이 견해는 최근까지 여러 기독교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어온 견해로서 욥기의 저작 연대를 모세 시대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욥 24:2-11에 나타난 모세 율법의 흔적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출 22:26에서 금한 전당잡힌 옷을 밤새도록 보관하는 악에 대한 기록,

둘째, 레 19:9에 기록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부잣집 밭에서 이삭을 남겨 놓도록 하는 습관에 대한 기록,

셋째, 신 19:14에서 금했던 땅의 지계표를 옮기는 악에 대한 기록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욥 24:2-11의 기록을 좀더 면밀히 살펴볼 때 너무 편협된 해석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을 위해 부잣집 밭에 이삭을 남겨 두는 습관이나 가난한 자들이 그들의 옷을 전당잡혔을 때 옷 없이 벌거벗고 자도록 한 것은 단지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에 관한 기록일 뿐 정해진 법률 조항이 아니며, 지계표를 옮기는 악 역시 모세 시대만의 특정한 습관이 아닌 고대 근동 지방에 흔히 있는 일이므로 이러한 기록만을 가지고 욥기의 기록 연대에 대한 확고한 증거라고 보기에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기의 기록 연대를 모세 시대로 보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2) 므낫세 시대라는 설

   '에발트'(Ewald)와 '힛지그'(Hitzig)에 의해 지지되는 이 견해는 욥 9:24의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었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라는 탄식을 그 근거로 한다.

즉 그들은 욥 9:24의 상황이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사회에 부정이 극심하게 횡행하되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하여야 하며, 불행과 재난이 그렇게 심한지 반문할 정도로 악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조차 의아심을 가질 정도였던 므낫세(B.C. 698-643) 통치시대의 사악한 상황과 동일하다고 판단, 본서의 저술 연대를 므낫세 통치시기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정설로 받아들일 만한 견해는 못 된다. 왜냐하면 므낫세 치세하의 죄악이라 주장하는 본문의 부패상은 비단 므낫세 치세 하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범죄요 부패상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욥이 말하는 고난이나 재난은 자기 자신의 재난을 말하는 것이지 므낫세 치세 하에서의 모든 의인이 당하는 고난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재난과 비교해서 악인이 흥왕해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한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본서의 부패상의 고난을 므낫세 치세하의 부패상이나 므낫세 시대의 모든 의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기록이라 볼 수는 없고 따라서 본서의 기록 연대를 므낫세 치세로 볼 수는 없다.

 

   3) 예레미야 시대의 B.C. 600-400 년경의 기록이라는 설

   '스타인뮬러'(Steinmueller)와 '드라이버'(Driver), '데이비슨'(Davidson) 등에 의해 지지되는 이 견해는 예레미야와 욥기 사이의 두 가지 유사점을 그 근거로 내세운다.

첫째는 그 내용과 언어 면에 있어서 눈에 띄게 유사한 구절들이 있다는 것과(비교, 욥 21:7-15; 렘 12:1-3; 욥 3:3; 렘 20:14-18),

둘째는 욥기 이외에 욥의 고향인 '우스' 땅이 언급된 곳은 다만 예레미야(참조, 렘 25:20)와 예레미야 애가(참조, 애 4:21)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많은 허점이 있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악한 자가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기록인 욥 21:7-15은 렘 21:1-3보다 오히려 시 37편에서 더욱 자세하고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으며, 자신의 탄생일을 저주하는 욥 3:3의 언급이 예레미야가 그 자신의 탄생일을 저주한 렘 20:14과 비슷하다 하더라도 욥기가 예레미야 시대에 예레미야서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보다는 예레미야서가 욥기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렘 25:20에서만 언급된 '우스'라는 지명이 욥기의 예레미야 시대에 저작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스'라는 이름이 예레미야 시대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거나 예레미야 이전에는 히브리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기의 저작 연대를 예레미야의 시대라는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4) 포로 후기의 저작이라는 설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이 견해는 욥기를 주로 신명기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견해이다.

즉 이 견해는 욥기에 기록된 욥의 세 친구가 주장하는 경직된 인과 응보적인 징벌 사상은 국가의 번영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직결된다는 것을 역설하는 신명기적 교훈이 개인들에게 적용되던 시기에 욥기가 저술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 하에서 그들은 신명기 학파가 B.C. 7c에 번성했고, 신명기적 역사관에 의해 기록된 전 선지서는 B.C. 7c와 6c에 쓰여졌으므로 욥기는 B.C. 6c 중엽 이후에 쓰여졌을 것으로 보고 더 나아가 B.C. 500년 이전에는 쓰여지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결정적 허점은 신명기가 요시야 왕 무렵에 쓰여졌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으며, 신명기가 경직된 인과 응보적인 사상을 가르친다는 일방적인 결론에 근거한다는 것에 있다. 즉 신명기가 모세의 저작이 아니며 모세 시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그들의 가정은 성경 스스로가 증거하는 신명기의 모세 저작설(이에 대해서는 신명기 서론 부분 참조)을 능가하지 못하며,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신명기의 경직된 인과응보의 사상은 신명기 저변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선명히 드러나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기의 기록 연대가 포로 후기의 기록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5) 솔로몬 시대의 기록이라는 설

   A.D. 390년에 죽은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Nazianzen)에 의해 주창된 이 견해는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를 비롯해 '해버닉'(Haevernick), '카일'(Keil), '델리취'(Delitzsch), '영'(Young) 등의 보수주의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는 견해되는 '영'박사의 말대로 가장 적은 반대 의견에 부딪칠 수 있는 견해이다.

이들이 욥기의 기록 연대를 솔로몬 시대로 생각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솔로몬 때에 문학적인 활동이 가장 활발할 수 있었던 여유가 있었다.

② 솔로몬 시대는 특별히 지혜에 관심을 두어 삶의 실천적인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던 때였다.

③ 욥 15:8과 28장에 기록되어 있는 지혜의 귀중성과 우수성은 솔로몬이 기록한 잠언 8장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④ 욥기에 기록되어 있는 외국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들은 이스라엘이 외국과 무역을 하며, 교역이 잦았던 무역의 황금시대,

     즉 솔로몬 시대와 일치함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욥기의 저술 연대는 솔로몬 시대라고 주장될 수 있는 것이다.

 

   III. 기록 목적

 

   욥기의 주된 기록 목적은 '의인의 삶에 고난이 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욥기는 지리할 정도로 욥과 욥의 세 친구와의 논쟁을 상세히 실었고, 그것을 통해 인생과 세상의 최종적 결정자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증거하여 근원적인 해답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욥기의 표면적인 기록 목적은 '고난 받는 의인의 삶'이지만 그 내면적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것 위에 초월해 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욥기의 기록 목적을 좀더 세분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욥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가장 강하게 증거하되 모든 것을 능가하고 지배하는 그의 주권과 그가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과 관계없이 언제나 경배와

     존경을 받으셔야 할 분이심을 증거하였다.

② 욥기는 의인에게 임하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되 의인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며, 믿음을 연단하는 수단으로서의 고난을 증거한다.

③ 욥기는 인내하는 욥의 모습을 통해 고통당하는 성도가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와 믿음을 보여 준다.

④ 욥기는 욥과 욥의 세 친구와의 논쟁을 통해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권선징악 사상'의 허점과 모순을 보여 준다.

 

   IV. 특징과 구조

 

   1. 특징

 

     욥기의 가장 큰 특징은 욥기에 사용된 문체에 관한 것이다. 즉 욥기는 모든 성경 신학자들이 인정하는 대로 상당한 수준의 지혜를 증거하는 지혜서이지만 그 뿐만 아니라 욥기의 문학성은 세속 문학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드라마틱한 하나의 '극시'(Dramatic Poetry)라는 점이다. 때문에 욥기는 사람들의 행동보다도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과 사상들의 묘사가 더욱 두드러지며, '시'가 지닐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장 기법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실로 욥기의 문장은 다양성과 박력, 그리고 간결성고 우아함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법이라는 가장 대표적인 시적 표현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욥기가 지닌 두 번째 특징은 욥기에 사용된 언어의 특성이다. 욥기에 사용된 어휘는 다른 성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상당히 많은 수의 용어와 표현이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다. 이들 어휘는 대부분 아라비아어, 아람어, 아카드어, 그리고 애굽어의 표현을 빌어서 기록되어 있다. 오히려 욥기의 저자는 시적 대구법을 사용할 경우 히브리어와 동의어를 사용하지 못하면 아람어 형태를 빌은 히브리어를 사용하였고, 어떤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몇 가지 아람어 형태를 더욱 즐겨 사용하기도 하였다.

 

   욥기가 지닌 세 번째 특징은 욥기 전체의 기본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대화체이다.

즉 4장부터 37장까지의 욥과 세 친구와의 논쟁이 단순한 대화가 아닌 한 사람의 장황한 연설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종의 '연설'은 대화자의 의견 피력 도중 다른 사람의 간섭이나 개입이 전혀 없었고,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의견과 사상을 가장 아름다운 표현을 빌어 논리적이며 일목요연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설형인 동시에 시적인 대화체는 다른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욥기만의 독특한 특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언어와 문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VI. 욥기의 언어와 문체'부분 참조).

 

   2. 구조

 

     욥기는 비평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산만한 내용들의 편집이 아니라 일관된 하나의 분명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먼저 욥 1, 2장은 시험받는 욥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3장은 절망하는 욥, 그리고 4-37장은 충고하는 욥과 38-42:6까지 하나님의 음성의 임한 후 회개하는 욥과 회복하는 욥이라는 줄거리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줄거리 속에서 욥기는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세 친구 사이의 논쟁을 보다 명확히 증거하기 위해 세 개의 주기로 나누고 엘리후의 네 가지 담화로 나누었는데 그것은 4-14장까지의 첫 번째 주기, 15-21장까지의 두 번째 주기, 그리고 22-31장까지의 세 번째 주기와 32-37장까지의 엘리후의 네 가지 담화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욥기 저자는 인간들의 지적 교만과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시키며, 영적으로 성숙해져 가는 욥의 모습을 보여 줌과 동시에 시험받기 전의 욥과 시험받은 후의 욥의 모습을 대비시킴으로 성도와 사탄,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 그리고 고난의 유익과 고난당하는 자의 인내를 극명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구조를 알기 쉽게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욥기 도표1).

 

   V. 정경에서의 욥기의 위치

   유대인들은 욥기가 익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작품이라는 생각 하에서 율법서, 선지서 그리고 성문서로 분류된 구약의 세 부분 중에서 셋째 부분인 성문서에 포함시켜 시편과 잠언 사이에 위치시켰다. 70인역은 모든 시문서를 역사서 다음에, 그리고 선지서 앞에 놓았는데 욥기는 시편, 잠언, 전도서 그리고 아가서 다음에 실려 있다. 이러한 순서는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에 의해 어느 정도 변경되어 욥기가 시편과 잠언의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고, 초기 기독교 교부들, 예를 들어 예루살렘의 '씨릴'(Cyril of Jerusalem)과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그리고 '제롬'(Jerome) 등은 욥기가 시편과 잠언의 앞에 위치해 있는 정경으로 알고 있었다. 한편 수리아역인 '페쉬타'(Peshitta)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욥기를 신명기 다음의 위치에 실어 놓았는데 이것은 욥기를 모세의 저작으로 보고 모세 오경과 함께 묶어 놓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가타역'은 욥을 시문서에 포함, 시편과 잠언의 앞에 실었고 이 순서가 '트렌트 회의'(Council of Trent)에서 확정되었다. 현대의 번역본들은 영어를 비롯해 모두 이 '불가타역'을 따라 욥기의 순서를 결정하고 있다.

 

   VI. 욥기의 언어와 문체

 

   1. 언어

 

     욥기에 나타난 가장 현저한 언어학적 특징은 욥기에 사용된 언어의 강렬한 아람어적 색채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일단의 비평학자들은 욥기를 '본래 아람어로 기록되었던 것을 익명의 어떤 자가 히브리어로 번역한 것'이라 주장하기도하였다. 그들은 욥기의 본문이 비록 표면상으로는 히브리어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다른 히브리 문헌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아람어형의 단어들이 무수히 많을 뿐만 아니라 욥기의 특성과 환경이 에돔에 관계되어 있음을 볼 때 본서는 익명의 에돔인에 의해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나 후대에 어떤 히브리인에 의해 히브리어로 번역된 번역물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물론 욥기에는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이 매우 많이 등장한다. 우리가 이미 본서의 '특징'부분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듯이 욥기에 사용된 독특한 언어는 대부분 아람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언어 표현을 빌어 사용한 것들이었고, 때로 욥기 저자는 시적 대구법을 사용할 경우 히브리어와 동의어를 찾지 못할 때 아람어 형태를 빌은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앞의 가설들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욥기의 특성과 상황이 에돔이라는 단순한 사실 한 가지만으로 욥기의 저자가 에돔인일 것이라는 추측은 룻기의 주인공인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사실 하나로 룻기의 저자를 모압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추측이나 에스더서의 상황과 환경이 이방 나라 페르시아라는 사실 때문에 에스더서의 저자를 페르시아인이라고 주장하는 억지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서가 아람어 작품의 번역이라는 견해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비록 욥기에 아람어의 영향을 받은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서의 대부분이 정통적 히브리 사고를 표현하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으며, 본서에는 아람어 형태의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어'와 '아카드어' 그리고 '애굽어의 표현을 빌려 쓴 히브리어'까지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솔로몬 시대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저자에 의해 히브리어로 기록된 정경임이 분명하다. 욥기서의 저자는 히브리어라는 기본적인 바탕 위에 본서의 보다 포괄적인 사상의 전개를 위해 그 당시에 사용되던 주변 언어의 형태를 그의 저작에 인용 기록하였던 것이다.

 

   2. 문체

 

     욥기는 문장 분류상 '극시'(Dramatic Poetry)로 분류된다.

욥기의 문장에는 아름다운 문체와 열정적인 감정이 있으며, 진지한 진실이 내재되어 있다. 때문에 욥기는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세속 문학자들에게서도 훌륭한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다. 한편 훌륭한 '극시'로 평가되는 욥기는 그 문체상 또 다시 '서론'(1-2장)과 '결론'(욥 42:7-17) 부분을 '시'로 분류할 수 있으며, 그 나머지 3장에서 42:6까지는 산문으로 구분할 수 있고, 그 전체는 '대구법을 위주로 한 대화체'로 규정할 수 있다. 욥기서의 기자가 사용한 가장 일반적인 대구법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① 동의적(同意的) 대구법:

욥기에 나타난 대부분의 대구법이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서 어떤 사상이 첫 시행에서 진술되면 다음의 시행에서도 그와 비슷한 언어로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예)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참조, 욥 4:9).

② 반의적(反意的) 대구법:

둘째 시행의 시구를 첫 시행에 사용된 시구와 대조적인 의미를 사용하는 법을 말한다. 예)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참조, 욥 16:20).

③ 종합적 대구법:

첫 시행에서 진술된 사항들을 점점 자세하게, 그리고 확장하여 진술하여 진술하는 것을 말한다.

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그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참조, 욥 5:18-26).

 

   제2부: 욥기의 특별 주제들

 

   I. 욥의 실재성과 그의 활동 연대

 

   1. 욥의 실제성

 

     욥이 역사적인 실제 인물이라는 사실은 전통적 견해에 의해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왔는데 이 사실만은 욥기의 단일 저작설과 정통성을 의심하는 비평학자들까지도 인정하고 있다. 즉 욥기는 욥이라는 실제 인물이 당한 큰 환난과 고난의 이야기를 히브리인 성경 기자가 시적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욥의 실재성에 대한 증거를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겔 14:14-20의 증거

   욥의 실재성에 대한 가장 명확한 증거는 겔 14:14-20의 증거이다. 즉 겔 14:14-20에는 의로운 인간의 모형으로 에스겔, 욥, 다니엘의 세 명을 거론하고 있는데, 에스겔과 다니엘이 실제 인물임이 분명하므로 그들과 함께 기록된 욥 역시 실제 인물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증거를 무시하고 욥을 가상의 인물이라 주장하려면 성경 기자의 오류나 에스겔과 다니엘의 비실재성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욥의 실재성은 분명하게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2) 약 5:11의 증거

   욥의 실재성에 대한 두 번째 증거는 약 5:11의 기록이다. 즉 야고보서의 기자는 약 5:11에서 성도의 인내를 교훈하기 위해 욥의 고난을 제시하였고, 고난을 당하는 성도는 욥의 인내를 깨달아 끝까지 인내할 것을 권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야고보서의 기록 역시 욥이 실제로 존재했었던 실제 인물임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만약에 욥이 당한 고난과 그의 인내가 실제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이 가르침은 허공을 치는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3)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적 묘사

   욥의 실재성에 대한 세 번째 근거는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공상적인 명사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람의 이름이라는 점이다. 즉 '고난당하는 자' 또는 '돌아오는 자'라는 의미의 '욥'과 '금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의 '엘리바스', '논쟁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빌닷'과 '거칠다'라는 의미의 '소발'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의 '엘리후' 등의 이름이 결코 상징적 명사가 아닌 분명한 의미를 지닌 실제적 고유명사라는 것이다.

 

   4) '우스'땅의 근거

   욥의 실제성에 대한 네 번째 근거는 욥기에 등장하는 '우스'땅에 대한 기록이다. 욥의 거주지로 기록된 '우스'땅은 예레미야 애가 4장 21절에 나타나는 대로 팔레스틴 동부에 위치한 땅이며, 창 10:23; 22:21; 36:28 등에 의해 실제적인 지명임이 증거된다. 또한 중동 지방의 고대 문서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우스 땅이 팔레스틴 동쪽 에돔 근처에 위치한 지역으로 판명되었으며, 따라서 실제적인 지역에 거하고 있던 욥 역시 실제적인 인물임이 분명한 것이다.

 

   2. 욥의 활동 연대

 

     욥의 활동 연대, 즉 그가 생존해 있던 때는 욥기가 기록된 기록 연대와 엄격히 구분하여 생각해야 한다. 즉 욥기의 기록 연대가 솔로몬 시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욥이 살았던 시대 역시 솔로몬 시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욥기의 기록 연대는 분명 솔로몬 시대이지만 욥의 활동 연대는 그보다 훨씬 앞선 '족장 시대'일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제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가장(家長) 중심의 종교 예배

   욥의 활동 연대를 아브라함으로부터 요셉까지의 족장 시대로 볼 수 있는 첫 번째 근거는 욥기에 나타나는 가장(家長) 중심의 씨족 사회 체제와 가족 중심의 종교 예배, 또는 가장이 일종의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는 가장 중심의 종교 예배가 족장 시대의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2) '케시타'라는 돈의 명칭

   욥 42:11에 보면 돈의 일종이었던 <hf;ycq] ; 케시타-금 한 조각>가 나오는데 이 명칭은 성경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족장 시대인 창 33:19에만 나온다. 그러므로 욥이 살던 시대는 창 33:19의 시대, 즉 족장의 시대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3) 겔 14:14의 증거

   욥의 활동 연대가 족장 시대라는 또 다른 증거는 겔 14:14에 나오는 '다니엘과 욥'이라는 표현이다. 즉 겔 14:14에 나오는 '다니엘과 욥'이라는 표현은 다니엘과 욥을 동시대 사람임을 증거하는데 에스겔이 말하는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아니라 고대 가나안 지방의 영웅이었던 '다넬'(Dan'el)을 말하며 따라서 욥은 족장 시대의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4) 모세 오경에 나타나는 율법들의 부재

   욥기에는 아브라함의 소명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의 핵심을 이루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모세의 율법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또한 욥기에 기록된(참조, 욥 1:5) 번제 역시 모세의 규례에 의한 제사가 아니라 족장 시대의 제사와 같이 가장 중심의 제사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욥의 활동 연대가 적어도 모세 이전의 시대임을 시사하며, 따라서 욥의 활동 연대는 모세 이전의 족장 시대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욥의 활동 연대와 욥기의 기록 연대를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욥기 도표2).

 

   II. 욥기의 비히브리적 배경

 

   구약의 모든 정경들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는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의 모든 인격과 지식, 그리고 환경을 무시한 체 성경 기자를 일종의 도구로만 삼아 구술적인 방법으로 기록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 기자를 부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 기자가 자신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성품과 주변 환경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기록하도록 하되 그 모든 것들을 성령께서 주관하시고 감동으로 역사하심으로 조금의 오류도 없게 자신의 뜻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욥기의 저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익명의 그 저자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뿐만 아니라 '성령의 통제 아래'에서 비히브리적 사상과 문헌을 이용,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 욥기에 드러나는 비히브리적 사상을 연구해 보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학자들이 말하는 욥기의 비히브리적 배경은 '에돔의 지혜'와 '국제적 민족 전승' 그리고 '애굽의 비관주의'와 '바벨론의 회의주의'의 네 가지이다.

 

   1. 에돔의 지혜

 

     욥기가 에돔 사람들의 지혜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된 이유는 욥기의 지명이나 인물들이 에돔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욥 1:1; 2:11). 또한 욥기 가운데 자주 쓰여진 하나님의 이름 '엘로아'(Eloah)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단어로서 에돔의 드만과 어떠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생각되며(참조, 합 3:3), 아라비아의 현인인 '아굴'이 이'엘로아'라는 명칭을 상당히 많이 사용하는 점(참조, 잠 30:5)을 보아 욥기가 에돔 사람들의 지혜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근대 역사가들과 같이 욥기의 저자를 에돔인이라고 추측케 하는 데 절대적인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2. 국제적 민족 전승

 

     욥기가 국제적인 민족 전승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주된 이유는 의인이 사탄이라든가 또는 다른 어떠한 신적 존재에게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한다는 욥기 전체의 줄거리가 고대 근동 지방의 국제적인 민족 전승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는 데에 기인한다. 이러한 민족 전승의 대표적인 예가 인도의 '하리스칸드라'의 이야기이다. '하리스칸드라'의 주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남신들과 여신들이 하늘에서 일곱 '메누스'와 같이 모이게 되었다. 그 회의의 주된 논제는 이 세상에 흠과 점이 없는 깨끗한 왕자(王子)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신들은 이 세상에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시슈타'신만은 '앝샨디라'가 완전무결한 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시바러트렌'즉 '파괴자'는 만일 그 왕자를 시험할 수 있는 전권을 자신에게 허락하면 그 왕자가 결코 의인이 아님을 증명하겠다고 주장하였다. 이 제의에 접한 '바시슈타'는 '시바러트렌'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그 결과를 보아서 진 편이 승리한 편에게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고행한 끝에 얻은 모든 권리를 넘겨주겠다는 조건에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시바러트렌'은 '앝샨디라'에게 여러 가지 종류의 고통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한 고통은 그의 모든 재산과 왕국과 아내와 그의 독자까지도 빼앗아 가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앝샨디라'는 조금도 그의 의를 굽히지 않았으며, 그래서 신들은 그에게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허락했고, 그전의 모든 소유까지도 되돌려주었다. 한편 '시바러트렌'은 '바시슈타'에게 그가 갖고 있던 권한을 모두 넘겨주었고 '바시슈타'는 그 권한을 시험을 이겨낸 '앝샨디라'에게 넘겨주었다.

 

   이와 같이 하늘의 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승부에 대한 이야기는 '스아헤리스'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천사장 '가브리엘'과 '미가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처럼 민족 전승의 이야기는 모두 공통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욥기는 그러한 민족 전승들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에 벌어지는 일종의 승부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욥기가 비록 이들 민족 전승의 기록에 영향을 받아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욥기와 그러한 민족 전승 가운데는 본질적인 한 가지 차이가 있다. 그것은 다른 민족적 전승들이 인간의 공로에 따르는 신들의 태도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으나 욥기는 인간의 공로나 선행에 관계없는 절대적 의와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으며, 국제적인 민족 전승들이 모든 신들의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욥기는 절대적 하나님의 주권, 즉 우주와 인간 전체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완전한 주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애굽의 비관주의

 

     욥기에 나타나는 애굽의 비관주의의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욥기와 애굽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문학 양식의 유사성이다. 즉 욥기는 서론과 결론 부분이 '산문'이고, 중간의 대화 부분이 '시'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문학 양식은 이스라엘의 문학에서는 극히 드물고 오히려 애굽 문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형태이므로 욥기는 애굽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B.C. 2800년에 기록된 애굽의 '능변적인 농부의 불평'이라는 작품은 아홉 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되 본론은 주로 시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서론과 결론은 산문으로 되어있고, '네펠 로후'의 예언 본론은 시로, 그리고 서론과 결론은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뿐만 아니라 욥기에 나타나는 애굽적 표현(참조, 욥 3:14; 9:26; 21:32; 28:1, 2; 29:18; 31:4, 6; 38:14, 17, 33, 36; 39:13, 14; 40:15, 16; 41:7, 8)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굳어지게 한다. 둘째로 욥기에 나타나는 애굽의 영향은 욥기의 시의 부분에 나타나는 욥의 비관적 생각과 애굽의 '인생에 싫증난 사람과 그의 영혼과의 대화'라는 책에 드러난 비관주의와의 유사성이다. 애굽의 고왕국(古王國)에서 중왕국(中王國)으로의 변동기(B.C. 3000년 기말)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 책의 주제는 고난당하는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동경, 또는 세상에 대한 비관이다. 즉 욥과 같이 애굽의 주인공 역시 병들고 여러 종류의 고난을 당하게 되어 그의 친구들과 형제들이 그를 떠나게 되었으며, 아무도 그가 과거에 행한 선행을 기억하지 못했고 그의 이웃은 그에게 나아와 그의 재산을 빼앗아 갔는데 이러한 고통을 당한 그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에게 임한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생일까지도 저주하고 심지어는 죽기를 원했던 욥의 생각과 일치하며, 따라서 욥기는 이러한 애굽의 비관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욥기가 애굽의 비관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렇듯 비슷해 보이는 욥기와 애굽의 비관주의 사이에는 분명한 한 가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애굽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인생의 허무와 그로 인한 염세주의적 비관주의로 치우친 반면 욥기에서 드러나는 욥의 슬픔은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비관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욥기에 나타나는 욥의 한탄은 한탄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일종의 역설적 간구이기도 한 것이다.

 

   4. 바벨론의 회의주의

 

     욥기에 나타나는 비히브리적 배경의 가장 큰 영향은 '바벨론의 회의주의'이다. 본래 바벨론 문학의 주된 사상은 '권선징악'이었다. 많은 비평학자들이 여러 해에 걸쳐서 욥기의 기원을 찾기 위하여 '아카디아' 문학을 연구해 온 결과 번영, 건강, 장수는 의인에게 임하는 축복이고 반대로 질병, 빈곤, 고통, 단명 등은 죄에 대한 벌로 임하는 것이라는 사상의 흐름을 밝혀낸 것이다. 이러한 사상 역시 욥기에 등장하는 엘리바스와 빌닷, 그리고 소발의 '권선징악'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욥기가 바벨론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상에 반기를 든 일부의 소수 문학, 즉 '바벨론의 욥기'라고 불리는 '고난당하는 의인의 시'와 신정론(神政論, Theodicy)에 대한 기록인 '아크로스틱 대화'(Acrostic Dialogue), 그리고 '주인과 종과의 비관적 대화'가 욥기에 더욱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1) 고난당하는 의인의 시 정치

   이 시는 감사의 노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이 노래의 주인공이 알지 못할 질병에 의해 고통당하다가 신비한 힘으로 그를 구원해 준 신에게 찬양을 드린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욥기에서처럼 찾아온 친구들과의 논쟁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긴 독백가운데에는 욥의 독백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주된 흐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난의 주인공은 자신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는 말 못하는 벙어리 같구나.

내가 과거에는 권세가 있었지만 지금은 노예가 되었구나. 낮에는 한숨짓고 밤에는 눈물 흘리며 달마다 슬퍼하고 해마다 탄식하는구나.'

둘째,

그는 이러한 고통에서의 해방을 위해 남신과 여신에게 기도를 드렸으나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내가 신을 향하여 울며 부르짖었으나 그는 내게 그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내가 여신에게 간구하였으나 그는 내게 그의 머리를 들지 않았도다.'

셋째,

때문에 그는 이제 비관하게 되었고 그의 비관적 마음을 일반적 생활에 나타내려고 노래하였다.

'이 세상에 얼마나 악이 관영하였는고 내가 뒤를 돌아본즉 거기에도 불행이 따르도다.'

넷째,

그러나 그러한 고통 중에서도 그는 결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원인이 죄의 결과라든지 종교 의식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다섯째,

그러다가 그는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경건한 생활을 한 자였는가를 주장한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경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커다란 비탄 속에 잠기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죽음까지도 생각하는 자리까지 나아갔으나

갑자기 새로운 소망이 생기게 되어 '말둑'신의 자비가 선포되고 정결케 하는 종교 의식을 거행한다.

 

   결국 '고난당하는 의인의 시'에 나오는 바벨론 시인은 욥과 같이 그의 무죄함을 호소하고, 자신의 경건을 변호하며,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해 항의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고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2) 아크로스틱 대화(Acrostic Dialogue)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대화를 주된 매개체로 하여 고난당하는 주인공이 그의 친구들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문제와 생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변론하는 것이다.

 

   '아크로스틱 대화'는 먼저 수난자를 찾아온 친구의 동정하는 말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의인은 형통하고 악인은 고난을 당한다'는 권선징악적인 말이었고, 이 말을 들은 수난자는 그의 인과응보의 교리를 꼬집어 비난하였으며, 이 말을 들은 친구는 그가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수난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의를 주장하며, 그의 친구들은 계속해서 그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내놓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며, 이러한 논쟁이 계속되다가 욥이 경우와 같이 수난자가 자신을 위한 절대자의 마지막 변호를 기대하며 끝맺는다. 이러한 형태의 주제, 그리고 사상은 욥기의 논쟁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 아크로스틱 대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이며, 따라서 그들은 욥기가 이러한 문헌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3) 주인과 종과의 비관적 대화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어떤 지방에 성행하고 있던 종교적 비관주의와 완전한 절망 상태를 보여 주는 것으로 주인과 종의 냉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한 주인이 그의 종을 불러서 자기의 요구를 말하고 종은 그것에 침묵으로 순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순종을 결심한 그 종은 주인의 계획된 일에 대하여 찬양한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의 마음이 변하였고, 그 종은 진실로 맹종적 태도로써 주인의 그전에 계획했던 것과 반대가 되는 일들을 냉소주의로써 열심히 변호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하여 그는 사회적인 야망과 연회의 즐거움, 여행, 도피주의, 건축, 정치적 음모, 원수를 용서하는 것, 여자를 사랑하는 것, 은행 사무 등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차례대로 찬양하기도하고 공박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상이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눈에는 변덕자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역사를 서술한 욥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는 것이다.

 

   5. 욥기의 비히브리적 배경에 대한 결론

 

     욥기는 많은 주변 환경의 영향 하에서 쓰여졌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욥기의 절대적 하나님 주권 사상이 여타 다른 비히브리적 사상에 의해 영향 받았다는 것은 보는 자의 관점에 의해 인정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욥기의 사상이나 주제가 기타 비히브리적 문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탁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기의 저자가 비히브리인이라든지, 그가 비히브리적인 여러 민화와 신화를 보고 베꼈을 것이라는 생각은 결코 인정될 수 없는 지나친 착각이라는 것이다.

 

분명 욥기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통제되고 감동받아 쓴 독자적 기록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영향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욥기 저자가 그러한 비히브리적 배경에 영향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자신의 뜻과 섭리를 선포하는 데 조금의 오류도 없이 완벽하게 기록되도록 정제되고 재창출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욥기는 분명 여타의 비히브리적 배경과 문헌과는 전혀 다른 절대적 하나님의 의와 주관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으며, 온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절대자로 믿고 복종하는 사상을 강조하는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III. 욥기의 통일성과 완전성

 

   1. 문제 제기

 

     욥기의 통일성과 완전성에 대한 질문은 서론과 결론 부분에 나타난 사상과 욥과 세 친구 사이의 논쟁인 본론 부분에 나타나는 사상의 불일치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비평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이 견해는 다음과 같다.

① 서론과 결론은 전통적인 경건과 인내심의 욥을 보여 준다. 그는 그에게 닥쳐온 극한 상황과 고난 속에서도 그의 믿음과 온전함을 잃지 아니한다. 그러나 본론의 대화 속에 나타나는 욥은 이러한 욥과는 전혀 다른 불평과 비난의 욥,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생을 저주하는 욥으로 기록되어 전혀 다른 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므로 두 부분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② 대화 부분인 본론에서 욥이 주장하는 일관된 사상 하나는 친구들이 주장하는 권선징악의 사상을 부인하고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결론 부분에서는 의인으로 설정된 욥이 하나님께 축복 받음으로써 이러한 사상을 뒤집고 있으며, 따라서 서론과 본론은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③ 서론에서 욥은 희생 제사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다(참조, 욥 1:5). 그러나 본론에서의 욥에게는 그러한 열의나 행동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심지어 그가 극한 고난 속에 있을 때에도 그러한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돌이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 부분은 서로 다른 부류의 자료를 편집했다는 것이다.

④ 서론에서 하나님을 칭하는 명칭은 '여호와'(Jehovah)인 반면 본론 부분인 대화 중에는 '엘'(El), '엘로아'(Eloah), '엘로힘'(Elohim), '샷다이'(Shaddai)를 사용한 것을 볼 때 서론과 본론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자료의 편집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비평학자들은 욥기의 4부분, 즉 ① 서론(욥 1, 2장)과 결론(욥 42:7-17)부분, ② 신령한 지혜에 대한 시(욥 28장) ③ 하마와 악어에 대한 묘사 (욥 40:10-41:25), ④ 엘리후의 말(욥 32:1-37:24)을 본래의 저작이 아닌 이방 민속의 편집, 또는 후대인의 삽입구로 보는 것이다.

 

   2. 욥기의 통일성과 완전성에 대한 증거

 

     1) 서론과 결론 부분의 자료설에 대한 재해석

   먼저 서론과 본론에 나타나는 욥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는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답변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욥기 저자는 그러한 욥의 모습을 통해 아무리 완전해 보이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여러 가지 실수와 모순을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의 범주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과, 그러한 인생과는 달리 때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는 전적으로 옳으며, 그는 모든 인생으로부터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절대자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론과 본론에 나타나는 욥의 모습은 서로 다른 자료에 의한 차이가 아니라 '절대적 하나님의 의'라는 욥기의 주제를 더욱 명확하게 하기 위한 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욥이 42:1-6 부분에서 이제껏 취해 오던 자신의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공의로움을 인정한 데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둘째로, 결론 부분에 기록된 욥의 회복은 본론의 내용과 상반된 결론이 아니라 서론에서부터 줄곧 이어져 내려온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승부에서 승리한 욥에게 그의 축복을 다시금 회복시켜 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 부분의 회복은 악인이 의인이 되어서 축복으로 보답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의인이던 욥이 시험으로 인해 그의 의가 더욱 큰 의로 증거되고 드러나자 그에게 유보되었던 축복이 임했던 것뿐이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셋째로 희생 제사에 대한 욥의 태도 차이 역시 본서의 주제를 이해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즉 시험받기 이전의 욥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희생 제사의 열심히 있었으나 고난당하는 욥은 그러한 희생 제사에 대한 관심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었고, 때문에 자신이 소망하던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게 되자 곧바로 회개하고 축복을 회복 받았으므로 고난당하는 욥에게 있어서 희생 제사의 기록이 없는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론과 결론의 내용이 본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은 본서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면 자연히 해결될 수 있는 견해이다.

 

   즉 본서의 주제와 목적은 '의인 욥의 고난'이라는 표면적인 흐름을 통해 '인간의 어떠한 의나 평가와는 관계없이 절대적 의를 소유하신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욥기는 이러한 주제를 위해 서론에서는 사탄까지도 복종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을, 본론에서는 인생의 판단과 뜻과는 상관없이 경배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주권을, 그리고 결론에서는 의인에게 축복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주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또한 서론은 본론의 논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 설명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며, 결론 부분은 본론의 결말을 보여 주는 부분이므로 없어서는 안 될 내용이며, 따라서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은 결코 상충되거나 서로 다른 내용의 기록이 아니라 통일된 하나의 주제를 서술하는 온전한 기록인 것이다.

 

   2) 욥기의 통일성과 완전성에 대한 결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욥기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서론과 결론 부분의 사상과 본론 사이의 사상적 차이를 비롯하여 욥 27장의 지혜시와 욥 40:10-41:25의 하마와 악어에 대한 묘사, 그리고 욥 32:1-37:24의 엘리후의 말에 대한 기록의 재편집 또는 삭제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주제의 통일성에 대한 문제를 인정하게 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어떠한 환경이나 상황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 그의 주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을 때 욥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난제들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욥기의 통일성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져야 하며, 따라서 욥기의 완전성 역시 한 사람의 단일 저자에 의해 기록된 온전한 기록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IV. 욥의 세 친구들과 엘리후

 

   욥의 세 친구들과 엘리후가 욥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따라서 욥기 연구에 있어서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그들의 간단한 이력과 사상,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엘리바스

   '순금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의 '엘리바스'는 팔레스틴 동남쪽에 있는 에돔의 도시 '데만'(참조, 욥 2:11)출생인데 그곳은 예로부터 지혜자들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곳이다(참조, 렘 49:7). 그는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인 듯하며, 세 친구를 위한 지도적인 대변인 역할도 수행했었다. 그는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였고 그의 사고는 진지했으며, 지혜롭고 품격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 친구 중 가장 명료한 사고력과 사려 깊은 비평을 보여 준 과학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내세운 두 가지 중요한 주장은 하나님은 완전히 순결하시며 의로우시다는 것(참조, 욥 4:17)과 '인간은 스스로 자신에게 곤란을 초래한다는 것'(참조, 욥 5:7), 즉 고난은 스스로의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사고는 궁극적인 원칙 면에서는 타당성이 있는 견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보편적 원리를 특수한 경우의 욥에게 억지로 적용시키려 했고, 그것이 잘 되지 않자 나중에는 여러 가지 죄명을 들어 그를 비난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는 자리에 처하게 된다.

 

   2. 빌닷

   '논쟁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빌닷'은 수아 사람으로서 전통주의자(참조, 욥 8:8-10)인 동시에 엘리바스보다 더욱 치밀한 논쟁적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욥을 불경건한 자(참조, 욥 8:13)라고 비난하고 나섰는데 그의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결코 공의를 굽게 하시지 않는다(참조, 욥 8:3)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 역시 근본적으로는 틀린 것이 없었으나 그 역시 지나친 권선징악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욥의 특수한 경우를 무시한 채 자신의 사상에 흡수시키려 하다가 나중에는 욥을 위로하러 온 그가 욥을 책망하며 비난하였기에 끝내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 된다.

 

   3. 소발

   '거칠다'라는 의미의 '소발'은 아라비아 북방으로 추측되는 나아마 사람이었다. 그는 무뚝뚝한 독선자였고 도덕주의자였으며, 하나님은 악한 일을 아시고 보시는 분이라는 사상 속에 사로잡힌 자였다(참조, 욥 11:11). 욥의 자랑을 비난하는 것(참조, 욥 11:2-6)으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변론은 권고가 아닌 책망으로 시종 일관하였으며, 종국에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권고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욱 거룩하다는 논조로 발전, 그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책망을 듣는 자리에 처하게 된다.

 

   4. 엘리후

   '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의 '엘리후'는 부스 사람으로서 네 사람 중 최연소자이며, 욥의 세 친구들과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의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은 선하시다(참조, 욥 33:24)라는 것이었는데 네 사람들 중 엘리후가 가장 좋은 진단을 내렸다. 즉 그는 앞에 세 사람들처럼 욥의 고난을 천편일률적인 권선징악의 공식에 집어넣어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때로는 의인을 연단시키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시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앞의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의 책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욥의 의로움과 경건함을 인정하지 않은 편견, 그리고 논쟁 중의 과격한 발언으로 인해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되지는 못했다. 결국 그의 견해는 앞의 세 사람보다는 발전되고 좀더 정확한 것이었으나 욥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는 못하였기에 완전한 지혜와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V. 욥기의 난제들

 

   욥기는 욥기가 지닌 독특한 특성과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상당히 많은 난제를 안고 있다.

본래는 본 서론에서 이러한 난제들을 모두 다루어야 하겠으나 자세한 해석은 본서의 주해 부분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1장에 나타나는 난해한 단어 세 가지와 욥 19:25에 나오는 나의 구속자에 대한 해석, 그리고 욥 19:26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1. '우스', '동방 사람',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1) '우스'

   욥의 고향인 '우스'땅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하란'(Hauran)설이고 다른 하나는 '에돔'(Edom)설이다.

 

   (1) '하란'(Hauran)설

   '우스'를 '하란'(Hauran)으로 보는 견해는 70인역의 부록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70인역의 부록에는 욥의 고향이 에돔과 아라비아 국경에 위치한 것으로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데라'(Dera)와 '세이크 메스킨'(Sheikh Meskin) 사이에 위치한 현대의 '두네이베'(Dhuneibeh) 곧 '덴나바'(Dennaba)를 욥이 거주했던 도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요세푸스'(Josephus)가 말한 아람의 네 아들 중 하나인 '우스'(참조, 창 10:22, 23; 대상 1:17)가 '트라코니티스'(Trachonitis)와 '다마스커스'(Damascus)를 창건하였다는 사실과 '아불페다'(Abulfeda)가 일반적으로 '테마'(Tema)와 '부잔'(Buzan)의 북서쪽 지방의 하란 동부 옥토 지대를 욥이 살고 있었던 다메섹 지방인 '엘 베데니제'(el-Bethenije)로 언급하고 있는 것, 그리고 시리아 전승이 욥의 거주지를 '하란'(Hauran)으로 보는 사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우스'가 아브라함의 아람인 형제 나홀의 장자 이름이라는 사실(참조, 창 22:21)이 우스와 아람인과의 관계를 더욱 강하게 결속시키고 있으며, 다메섹 지방 안에 있는 욥을 기념하는 수도원이 '다일 에윱'(Dair Ejjub)이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이 외에도 '에데리우스'(Etherius)는 암 6:13에 언급된 '콰르나임'(Qarnayim)즉 '카르네아스'(Carneas)를 덴바나로 보고 있는데 '콰르나임'은 갈릴리 호수 동편 약 37km정도 떨어진 하란의 우뚝 솟은 '토루'(土壘) '세이크 사아드'(Sheikh Sa'ad)로 알려졌다. 여기서 발견된 비는 욥의 비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우스'가 하란(Hauran) 또는 그 근방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2) '에돔'(Edom)설

   이 견해는 그 근거를 주로 성경에 두는 견해이다. 먼저 창 36:28에 의하면 에돔의 호리족 족장인 '디산'(Dishan)의 아들 중 '우스'라 불리는 아들이 있었으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 25:19, 20에서 우스 땅의 왕들을 이집트, 블레셋, 에돔, 암몬의 왕들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이 견해의 근거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강력하고 확실한 증거는 예레미야애가 4:21에서 '우스'땅과 '에돔'이 거리낌 없이 동일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델리취'(Delitzsch)는 우스 땅을 에돔부터 시리아까지 동북쪽으로 뻗치는 아라비아 사막의 북쪽 지방을 집합적으로 가리켜 말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비록 '우스'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라고 지적하여 말할 수는 없으나 에돔 근방으로 보는 것이 더욱 무난한 듯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일 때 에돔적 성향이 짙은 본서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조화될 수 있으며, 고통 받는 욥을 찾아왔던 세 친구들의 고향인 '데만', '수아', '나아마' 등이 거의 에돔 지방을 지칭하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2) 동방 사람

   '동방 사람'을 원어 그대로 직역하면 '동방(qudem)의 아들들'이라는 뜻이다. '퀘뎀'(qudem)이라는 셈어는 B.C. 1000년대의 '시누헤'(Sinuhe)라는 이집트인의 동화에서도 사용되는 말이다. 창 29:1에서는 이 용어가 북부 유프라테스를 따라 살던 아람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응용되고 있다. 한편 사 11:14에서는 이 단어가 동방에 있는 이스라엘의 적들, 즉 에돔, 모압, 암몬족들을 지칭하는 동시에 서방의 블레셋과 대조해 사용되었다. 또한 사 6:33; 7:12; 8:10등에서는 이 단어가 사사 시대의 미디안 사람과 함께 이스라엘의 국경을 침범하던 유목민들에 특별히 사용하기도 하였다. '무실'(Musil)은 '이 말을 아람인들이 농부와 대조되는 말로서 사막의 거민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말이 이러한 의미가 아닌 '에돔족이 살던 그 지방 부근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하나님의 아들들

   창 6:1, 4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자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신실하고 경건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관 하에 하늘에서 열리는 '천상의 회의'에 참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육적인 존재가 아닌 영적인 존재, 즉 '천사'들로 보아야 한다. 한편 '마빈 포프'(M. H. Pope)는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고대 이방 범신론에 있어서 보다 낮은 계급의 신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았으나 이보다는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욥 19:25의 '나의 구속자'에 대한 해석

 

     욥 19:25에 나오는 '구속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laego ; 고엘>은 '회복하다', '구속하다'라는 의미의 능동 분사형 동사이다.

이 단어는 보통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① 이 단어는 빚 때문에 팔린 재산의 소유권을 다시금 회복하는 데 사용되었다(참조, 레 25:25).

② 이 단어는 자손 없이 죽은 사람의 기업(혈통)을 회복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즉 죽은 자의 형제가 죽은 자의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낳아 줌으로써 죽은 자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참조, 창 38:8; 신 25:5). 이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실례가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laego ; 고엘>이 '친족'을 뜻한다.

③ 고엘의 또 다른 의미는 '피의 보복자'라는 의미이다.

즉 고대에 있어서 살인이란 그 사람이 피해자를 지상의 친척과 재산으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피살자의 친척에게는 살해자에게 복수하는 의무가 주어졌다(참조, 민 35:12-34; 신 19:1-3).

그러므로 '고엘'은 한마디로 과부와 고아의 보호자, 또는 억눌린 자의 대변인을 말한다(참조, 잠 23:10, 11).

④ '고엘'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개념이다.

이 용어는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참조, 출 6:6; 15:13), 또는 멸망으로부터(참조, 렘 50:34), 그리고 흩어진 포로의 상태로부터(사 43:1; 44:6, 24; 48:20; 52:9)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여호와께서 죽음으로부터 개인을 구원하는 데에도 적용되고 있다(참조, 시 103:4; 애 3:58).

 

   그런데 문제는 본문에서 욥이 과연 이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본문의 '구속자'를 하나님으로 생각할 경우 다른 곳에서 욥이 그렇듯 여러 번 강조하여 말한 '대적자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욥의 불평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단의 주석가들은 본문의 '구속자'를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옹호해 주는 대변인 또는 옹호자'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비록 구속자의 개념이 욥기의 욥의 불평과 상충된다 하더라도 본문의 구속자는 분명 궁극적인 회복자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26절에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과 자유, 해방을 갈구하였으며 욥을 변호해 줄 인간적인 변호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정 욥을 회복시키고 구원할 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 안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구속자는 비록 욥이 한때 자신을 버린 것같이 보이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평하기도 했으나 그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자신의 구속자요 해방자로 생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욥 19:26에 대한 해석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본문의 '육체 밖에서'라는 표현을 '육체에 있어서'로 해석하여 욥이 자신의 회복을 기대한 상태에서 '내가 회복된 후에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자신의 회복을 이미 포기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욥의 심정과 고백을 생각할 때 인정하기 힘들다.

 

둘째는, 본문의 '육체 밖에서'를 '그에 의해 다시 태어나'라는 의미로 해석, '사후의 신생 교리'에 대한 증거라고 보는 견해이다. 즉 이 견해는 부활의 사상을 뛰어넘어 불교의 윤회설 사상에 가깝게 접근한 해석으로서 죽었던 자가 실제로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을 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재생의 교리를 옹호하거나 암시하는 구절은 성경의 단 한군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의 영혼이 저 사람으로 다시금 태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태초 이전에 이미 예정하실 뿐만 아니라 인생에게는 두 번의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셋째로, '육체 밖에서'라는 말을 '육체를 떠나서' 즉 '죽은 후에' 또는 '부활하여'라는 의미로 해석, 본문을 '이제 내가 죽은 후에 또는 부활하여 하나님을 보리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가 본문의 문맥과 가장 잘 어울리는 해석인 듯하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욥은 이미 현세에서의 회복을 포기한 뒤였고, '나의 이 가죽이 썩은 후'라는 말이 인간의 죽음과 육신의 부패를 가리키는 분명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러므로 이 말은 구속자 하나님을 기다리는 욥이(25절) 비록 이 땅에서는 소망이 끊기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자가 되었으나 그래도 공의로운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내세에서라도 하나님을 뵙고 그분의 공의로움에 의해 회복될 것을 신앙하는 욥의 내세관에 대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VI. 욥기의 신학

 

   1. 욥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

 

     욥기에 드러난 하나님에 관한 사상의 핵심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는 욥의 고백에서 드러나는 대로 '하나님은 그의 행위와 관계없이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이다. 즉 욥기의 저자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절대적인 신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은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한하고, 그는 이러한 그의 지혜로 자신의 완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그는 언제나 선하고 공의로우며, 따라서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이제 이러한 욥기의 신 인식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욥기서의 기자는 온 세상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는 인간세계뿐만 아니라 우주와 동물계까지도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거함으로써 모든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필연적임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둘째, 이렇듯 절대적인 주권을 소유한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희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욥기 저자의 사상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 생각의 투사가 아니며, 때문에 그분은 인간이 생각지 못한 예상외의 이상한 행동을 취하신다는 것이다.

  

셋째, 그가 비록 인간이 생각지 못한 그리고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를 행하신다 할지라도 그분은 조금의 악이나 잘못이 없으시고 언제나 공의로우시며, 완전한 선을 소유한 분이시라는 것이 욥기 저자가 지니고 있던 또 다른 신 인식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욥이 결론 부분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고 잠시라도 그의 선하심에 의문을 품었던 그의 어리석음을 회개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넷째,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한 목적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의인에게 임하는 고난이 바로 이러한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의 저변에는 죄의 결과로 인한 고난이라는 사상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상으로 흐르고 있다.

  

다섯째, 인생은 하나님께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 역시 욥기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 인식 중의 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을 향해 질문하시는 질문자가 되시며, 인간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역설했던 것이다.

  

여섯째, 질문할 수도 없고 질문에 대답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완전히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그러므로 그 하나님은 인간의 판단에 의해

좌우되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전개되는 어떠한 상황에 관계없이 언제나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이 욥기 저자의 신 인식에 대한 절정이다.

  

일곱째, 욥기 저자의 신 인식에 대한 결론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지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로 종결된다. 즉 구원은 이론이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이 신앙의 핵심인 동시에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욥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던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2. 욥기의 물질관과 사탄론

 

     1) 욥기의 물질관

   욥기의 나타난 물질관의 핵심은 그것이 인간의 뜻대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달려 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서론에 나오는 욥의 고백이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그러므로 욥기가 강조하는 물질관은 한마디로 '청지기적 물질관'이라 할 수 있다. 즉 적신으로 나온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필요대로 물질을 허락하시되 때로는 그의 선하신 뜻에 의해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며, 결국에는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이므로 사람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리고 그의 뜻대로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해 선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욥기가 주장하는 물질관인 것이다.

 

   2) 욥기의 사탄론

   욥기에 나타난 사탄론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사탄의 주된 임무는 파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며 성도의 믿음을 파괴하고,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을 파괴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둘째, 파괴를 위해 사탄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중상모략이라는 것이다.

욥을 파괴하기 위해 하나님께 중상모략을 펼치는 사탄의 모습은 이러한 견해를 분명하게 증거해 준다.

 

   셋째, 사탄 역시 큰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욥의 자녀들을 한꺼번에 죽이고 욥의 재산을 한꺼번에 몰수하여 욥의 몸에 악창이 나게 하는 사탄의 능력은 실로 소름끼칠 정도의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넷째, 그러나 그렇듯 능력이 많은 사탄이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의 하나라는 점이다.

욥기의 저자가 역설하여 강조하고자 한 사탄론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었다. 즉 아무리 사탄이 능력이 많다 할지라도 그의 능력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능력이고 그의 권모술수 역시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에 의해 감시되는 계략이며, 그의 활동 역시 하나님의 허락 하에 시행되는 극히 제한적인 것이라는 사상이 욥기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이었던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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