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을 아신다.

시편 139편 8-10절은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말한다.

둘째, 우리가 염려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따금 나는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면, 

비행기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걱정한다. 

그러나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폭풍우가 멈추는 것도 아니고,

조종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염려가 상황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염려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그것을 일소(一笑)에 부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어떤 일의 결과가 우리의 예상만큼 나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때때로 강의에 임할 때 나는 비판적 학자와 저명인사가 청중 속에 끼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럴 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부질없는 걱정을 했다는 자책으로 끝나고 만다. 

왜냐하면 내가 걱정한 것만큼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연히 호들갑을 떤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염려에 사로잡혀서 예상했던 것만큼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넷째, 언제나 유쾌한 일만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성숙한 신자로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일이 고의적 죄의 결과가 아니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았더라면…> 또는 <내가 용기를 내어 이러 이러하게 행동했더라면…>이라고 자책하지 말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섭리하시는 분이다. 

이것이 구약의 욥기의 교훈이다. 우리는 욥처럼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러이러하게 행동했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고민에 빠지지 말라.

다섯째, 걱정이 이루어주는 것은 없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사람들을 깊이 묵상하라. 

그들은 낙심하기 쉬운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이긴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순종하여 떠났다. 

그는 자기의 종착지가 어디일까 하고 걱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에스더는 왕의 사전 허락 없이 왕에게 나아갔을 때 혹시 처형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감옥에서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신 것이 아닌가? 내가 꾸었던 꿈이 정말로 실현될 것인가?>라고,

걱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 결과에 대해 바락과 논쟁하면서 드보라는,

<이 사람을 설득하여 전쟁을 치르면 과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걱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걱정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 열매 맺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에 대한 염려가 간혹 정당화될 때도 있겠지만, 이것 역시 거의 생산적이지 못하다. 

우리 자신에 대해 염려할 시간에 차라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하고,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리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방법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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