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건축헌금으로 당나귀를 드린 성도

(02) 길선주목사의 나는 아간같은 자입니다

(03) 생업이 노상강도였던 사람의 회개

(04) 복음으로 변화되는 조선 가정

(05) 한국 초대교회와 축첩제도

(06) 한국 초대교회의 양반과 상놈

(()7) 손톱과 노동 그리고 한국 기독교

(08) 선교사 부인 우리 집에 와서 보라

(09) 예수교 믿으니 아주 좋습디다

(10) 순교자와 무지개가 뜬 이야기

(11) 죽으면 죽으리다 제사와 유씨부인의 신앙

(12) 조선여자에게 피부를 떼어준 여선교사

(13) 평양의 첫 서양 아기를 보러 몰려오다

(14) 언더우드 '너는 왜 못 가느냐'

(15) 한국에서 결혼한 언더우드의 신혼여행

(16) 아펜셀러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어서

(17) 선교사 펜윅의 헌신으로

(18) 게일 선교사와 김노인이야기

(19) 언더우드선교사 기도로 병자 고치다

(20) 조선 왕실후원으로 전도한 전주지방 선교

(21) 이화의 죽음을 넘는 사랑이야기

(22) 한국의 첫번째 여자 의사 김점동

(23) 구한말의 핍박을 극복한 기독교

(24)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 선교의 준비

(25) 조선의 바울 김창식이 있었기에

(26) 소래교회가 부흥성장한 이야기

(27) 한국인 최초의 세례인 노춘경이야기

(28) 복음의 봇짐장수 ‘권서’에 감사하다

(29) 김익두의 불 세례는 역시 뜨거웠다

(30) 조선 여인 헤어스타일까지 변화시킨 김익두

(31) 기생집에 가서도 전도한 최권능 목사

(32) 노벨상 후보라고 칭찬받은 고찬익 장로

(33) 경성교회의 기초,고찬익 장로

(34) 고찬익의 대감전도

 

 

(01)

건축헌금으로 당나귀를 드린 성도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물질로 선교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물질선교는 처음에는 많은 결과가 있는 것 같지만 얼마 안돼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이런 모습을 보고 선교사들은 가능한 한 물질로 선교하는 일을 피하려고 했다. 선교사들은 전적으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가르쳤다. 교역자 사례와 교회 유지,교회 건축 등은 처음부터 한국인이 담당해야 할 일이었다.

한국의 초대 교인들은 교회의 자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경우에 더욱 분명했다. 1908년 한국 장로교회 수는 188곳이었는데 그중 186곳이 자립교회였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서구 선교사들이나 일본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 자립을 위해서는 열성적인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한국 신자들은 눈물 겨운 희생을 통해 헌금을 했다.

한국 교인들의 헌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아름다운 이야기가 당나귀 헌금이다. 황해도 해주 지방에서 새 교회를 건축했다. 신자들은 교회 건축을 위해서 자기들의 헌물을 가져다가 교회에 쌓아놓았다. 이 교회에는 당나귀에 물건을 싣고 장사하는 성도가 있었다. 당나귀는 그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당나귀를 교회 건축을 위해서 드리자고 말했다. 아내는 남편의 말에 순종하였다. 아내는 아름다운 화관을 만들어서 당나귀의 목에 씌웠다. 남편은 그 당나귀를 끌고 예배당에 들어왔다. 자신의 전 재산을 헌물로 드린 것이다.

 

그후 당나귀 대신에 자신의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시골길을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하며 인내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렸다는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 당나귀 헌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본국에 돌아가서 한국 교인들의 눈물 어린 헌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한 자들의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이다.

 

(02)

길선주목사의 나는 아간같은 자입니다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평가받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길선주 장로다. 1903년부터 이미 한국땅에는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이 부흥의 불길을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하기 위하여 신년초에 전국적으로 특별집회를 갖기로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평양에서도 신년특별집회가 열렸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이 집회에는 약 1500명이 모였다. 그러나 1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하였는데에도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일부 선교사들은 이제 평상시로 돌아가자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주일 저녁 예배시간에 길선주 장로가 설교 대신에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집 살림을 돌보아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길선주가 이렇게 회개하자 교회당을 억눌렀던 이상한 힘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예배는 7시에 시작되었는데 새벽 2시가 지나도록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다. 이 집회에 직접 참석하였던 정익로 장로는 이날 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날 밤 길선주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찼으며 순결과 성결로 불붙었다.그는 길선주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그는 원래 눈이 어두워서 나를 잘 보지 못하였을 것이나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질 때 나타난다.

길선주의 회개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놀라운 오순절의 은혜를 경험하게 됐다.

(03)

생업이 노상강도였던 사람의 회개

송도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을 때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 나왔다. 그는 집회 도중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선교사에게 나와서 자신은 중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사람인데 자신 같은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당시 이곳 선교사였던 콜리어는 그를 작은 방으로 안내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조씨는 자신이 노상강도이며 강도짓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고백했다. 콜리어 선교사는 그에게 성경구절을 읽어주며 함께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자 조씨는 관리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이제부터 자신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강도짓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어 자신의 죄는 사형에 해당될지도 모르지만 죄를 고백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덧붙였다.

 

관리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조씨는 자발적으로 죄를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리는 관찰사에게 이 문제를 보고했다. 관찰사는 조선의 강도 가운데 누구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이 사람을 용서해 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기독교이므로 사람들에게 죄인을 변화시켜 의롭게 만드는 종교인 기독교를 믿으라고 권했다. 관리는 이 소식을 조씨에게 전하면서 4달러 가량 돈을 보내서 억류당했을 때 그가 먹은 쌀값을 지불하도록 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새로 믿게 된 종교에 대해서 너무 기쁘게 생각한 조씨는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의 마을에는 많은 새 신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후 콜리어 선교사는 조씨의 동네를 방문했는데 그때 이미 그곳에는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조씨의 전도로 인해 만들어진 그 신앙공동체는 흔들리지 않았다.

 

콜리어 선교사는 이 마을에 정식으로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때 분명한 신앙을 가진 신자가 31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노상강도 조씨가 진정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씨는 그 후 전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다하는데 전심을 기울였다.

(04)

복음으로 변화되는 조선 가정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가정이 가장 먼저 변화되었다. 한국 여인에게 가정은 행복한 곳이 아니었다. 처녀가 시집을 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라 슬픈 일이었다. 한국 속담에 여인은 두 번의 큰 슬픔을 겪게 되는 데 첫번째가 태어날 때이고 두번째가 시집갈 때라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불순종하였다는 이유로 코가 잘린 여인들을 보았다.

 

옛날 한국인들은 아내를 무시했다. 선교사들은 이것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북장로교 선교사 무어였다. 그는 황해도 평산 감바위골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시골 풍속은 부인들이 밥을 먹을 때는 방에 앉아서 편안히 먹지 못하고 부엌에서 흙상에 놓고 먹어야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항상 낮춤말을 하고 아내는 항상 남편에게 높임말로 대답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안다. 우리가 믿기 전에는 이렇게 행동하였다 할지라도 지금은 성경의 뜻을 알게 됐으므로 동네 외인들이 흉을 볼지라도 이후부터는 이 두 가지를 버리고 밥 먹을 때에 부인들도 방에 들어와 남편과 같이 편안히 앉아서 먹기로 작정하자고 제안하자 일심이 되어 그대로 결정하였다.”

 

무어는 이렇게 말한 다음에 참석한 부인들에게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하여 찬성하느냐?”고 물었다. 대답이 없자 무어는 다시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중의 한 여인이 “너무 기뻐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내가 남편과 대등하게 앉아서 서로 존중하며 대화하는 것은 복음이 들어오면서 생긴 새로운 모습이었다.

 

무어는 당시 어떤 기독교 가정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 아내에게 존대말을 쓰기로 작정했으나 어머니가 강력하게 반대하여 이것을 실천할 수 없었다. 그후에 이들은 분가한 뒤에서야 남편이 아내에게 존대말을 사용하였다. 그 부인은 대단히 기뻐했으며 남편에 대한 대접도 놀랄 만큼 좋아졌다. 이 이야기 말미에 무어는 “신자 여러분! 부인에게 존대말을 써보도록 하십시오!”라고 강조했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신자가 된다는 것은 아내를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05)

한국 초대교회와 축첩제도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축첩문제였다. 물론 기독교는 처음부터 축첩제도를 반대했다. 일단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첩을 얻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미 첩이 있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자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첩을 보내야만 한다면 첩과 그 자녀들은 장래 어떻게 될 것인가? 그냥 용납한다면 성서의 일부일처제도는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한국 교회의 초대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심각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축첩은 용인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인간적으로 볼 때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도,여인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첩을 보내야 입교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문제는 첩을 보내지 않고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진 대표적인 사례가 김씨의 경우이다. 그는 본부인과 자녀 3명을 서울에 두고 목포에 내려와서 매력적인 젊은 여자와 결혼해 남매를 두었다. 그는 기독교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문제는 첩이었다. 그는 첩을 사랑했다. 김씨는 오랜 갈등 끝에 첩에게 자신의 결심을 말하고 재산과 자녀를 첩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부인을 내려오게 해 같이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첩의 가족은 분노하여 김씨를 칼로 위협했다. 그러나 믿음대로 살기로 작정한 김씨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김씨는 비록 첩과 헤어졌지만 첩의 생활비를 모두 책임졌다. 결국 이런 김씨의 태도에 감화를 받아 첩과 그의 어머니도 예수를 믿게 되었고 김씨의 첩은 기독교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뒤 김씨는 선교사의 조사로 일했고 1918년에는 순천지방에서 장로가 되어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많은 일을 하였다.

 

한국 초대교회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분명한 결의를 보여야만 신자가 될 수 있었다.

(06)

한국초대교회 양반과 상놈

조선은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양반들은 상놈을 억눌렀고 상놈은 그 지배 아래서 고난을 받아야 했다. 백정은 상놈의 대명사였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옷이나 갖신도 신을 수 없었다. 그들은 양반이 지나갈 때에는 길을 비켜서야 했으며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가듯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다. 만일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중형에 처해졌다. 바로 이들을 사람 대접받을 수 있도록 해준 사람이 모삼열 선교사였다.

 

모삼열 선교사는 자기가 운영하는 학교에 상놈 출신을 받아들여 교육을 시켰는데 그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이 있었다. 박씨는 불행히도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 이것을 알고 모삼열은 임금의 시의였던 애비슨을 데리고 와서 치료해주었다. 백정으로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하여 박씨의 온 가족이 개종을 하였다.

 

박씨는 1895년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가 백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면서 반 이상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모삼열 선교사는 “예수의 사랑 앞에는 사람의 차별이 없다”고 그들을 설득하였다. 이에 대해 양반들은 “그러면 교회에서 양반과 백정의 자리를 구분하여 양반들에게 앞자리를 달라”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모삼열 선교사는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백정에 대한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895년 4월 모삼열은 한학자 최씨로 하여금 박씨를 도와서 정부에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할 것을 탄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정부는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평민들과 같이 초립과 망건을 착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또한 그 다음해 3월에는 인구조사에 백정이 빠져 있자 이것을 시정하여 백정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백정 박씨의 개종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아들 박동열은 1907년에 최초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학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박씨 자신도 은행업을 시작하여 사업가와 장로가 되었다. 박씨는 백정조합 회장으로 선출되어 백정들에게 해방의 복음을 전했다.

(()7)

손톱과 노동 그리고 한국 기독교

한국 기독교는 이 땅에 들어와서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그 중 하나가 노동에 관한 생각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노동을 천하게 생각했다. 양반이 일한다는 것은 체통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자신의 신분이 고귀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귀족들은 손톱을 길게 기르고 잘 손질하여 광택을 냈다. 이것은 그들이 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상징이었다.

 

복음이 들어가자 한국인들의 사고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북 부안의 관동마을에 신경운이라는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가늘고 긴 손톱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이곳을 순회하는 남장로교의 테이트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구입했다. 성경을 읽은 그는 신자가 되기로 작정했다. 이듬해 봄에 테이트 선교사가 다시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학습교인이 되었다. 얼마 후 테이트 선교사가 다시 방문했을 때 그는 세례교인이 되었다.

 

테이트는 그의 손톱이 짧고 추하게 변화된 것을 보았다. 그는 빈둥거리며 사는 귀족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생활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물어보았다. 신경운은 별다른 변화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선교사로부터 구입한 성경을 열심히 읽었다. 성경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이레 되는 날은 안식일로 지키라’는 말씀이 담겨 있었다. 신경운은 이것을 그리스도인은 빈둥댈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빈둥거리는 양반노릇을 청산하고 충성된 청지기 노릇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교사들은 노동의 모델로 목수 요셉을 내세웠다. 그리고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서 설명하였다. 예수님의 손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못 자국 뿐 아니라 아버지 요셉을 따라서 열심히 일하셨기 때문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초기 한국 교인들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였다.

(08)

 

선교사 부인 와서 보라

개화 초기에 서양 선교사들의 사는 모습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인들은 선교사들이 사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다. 북장로교 선교사로 일했던 베어드 부인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평양 부근 조앙리라는 동네에 무당 심씨가 살고 있었는데,그는 선교사들의 사는 모습이 매우 궁금했다. 그는 동네 여인들에게 “서양귀신들이 산다는 곳을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번 봅시다”라고 말했다. 조앙리 사람들은 읍내에 있는 선교사 집을 구경가게 되었다.

 

이들이 맨 처음 놀란 것은 선교사 부인이 얼굴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텃밭에서 과일과 채소를 가꾸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자들이 밖에서 일할 때에는 항상 얼굴을 가리는 것이 양반집의 모습인데 선교사 부인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선교사 부인은 양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선교사 부인은 이들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이 선교사의 집은 겉으로는 한옥이었지만 내부는 서양식이었다. 마루 대신 응접실이 있었고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한국 여인들의 눈에 비친 집은 너무 깨끗했다. 무당 심씨는 “세상에 산신령이 사는 곳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이런 곳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선교사 부인은 방문객들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처음 서양식 집에 온 이들은 어디에 앉아야 할 줄을 몰랐다.

 

겨우 자리가 정돈되자 선교사 부인은 찾아온 손님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하나님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분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너무 멀리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귀신을 섬겨 재앙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당 심씨 일행은 선교사의 집에서 나오면서 그곳에서 일하는 영구라는 소년에게 이 서양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어보았다. 이 소년은 “그들과 지난 몇 달 동안 같이 지냈는데 남자가 그 여자를 때리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했어요. 또 그 여자가 큰소리 내는 것을 한번도 못 들어 보았어요”라고 대답했다.

 

남자들의 폭력 아래 살아왔던 한국 여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는 선교사들의 모습은 큰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다.

​​

(09)

예수교 믿으니 아주 좋습디다

원래 한국의 기독교는 만주를 통해 들어왔다. 만주에 와 있던 선교사들이 그곳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파,그들을 통하여 한국 선교를 시도하였다.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는 바로 이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신앙이 거꾸로 중국으로 전파된 경우도 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그것이다. 한국 평양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만주 봉천의 장로 두 사람이 한국의 부흥을 보려고 평양에 왔다. 그러나 이들은 때를 놓쳤다. 집회는 끝났고 평양은 조용했다. 그들은 중국인의 습성대로 정확한 날짜를 따지지 않고 느긋하게 왔던 것이다.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자 이들은 평양에 있는 중국인 상인들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중국인들에게 정말로 기독교인들이 많은지 물어보았다. 상인들은 “많습니다”고 대답했다. 중국인 장로들은 다시 그 기독교인들이 선량한 사람들인가를 물어보았다. 이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장로들은 “당신들은 신자가 아닌데 이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중국인 상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한국 사람은 외상을 갚을 줄 모릅니다. 나와 거래가 있는 한국 상인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나는 화를 내곤 하였지요. 그 사람이 외상을 많이 가져가고도 갚지 않습니다. 갚을 마음도,갚을 능력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이 와서 외상값을 몽땅 갚았습니다. 나는 너무도 반가워서 전에는 갚지 않았는데 지금 그 외상값을 다 갚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그 사람이 ‘전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지금은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예수교,아주 좋습디다.”

 

이 중국인들이 돌아가서 복잡한 설교를 하지 않고 단지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이것이 중국 교회에 큰 부흥을 가져왔다. 한국 교회의 부흥이 중국 교회의 부흥을 가져온 것이다.

(10)

순교자와 무지개가 뜬 이야기

서울 북부지방의 미션스쿨에 한씨 성을 가진 학생이 있었다. 그는 너무나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기도쟁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학생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에 가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은 1911년 일본이 한국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서 조작한 것이었다. 사건 당시 일제는 소름이 끼치는 잔혹한 고문 방법을 동원했다. 예를 들면 손가락 사이에 쇠막대기를 끼우고 손끝을 졸라맨 후에 천장에 매달아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이 학생은 원래 결핵으로 고생했는데 모진 고문으로 병이 악화되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 헌병은 신앙을 부인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신앙을 지켰다. 병이 악화되어 이 학생은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이 학생은 너무 잔혹한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죽기 전에 이 학생은 자기를 찾아온 선교사에게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다. 집에 도착한 그는 가족과 친척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진 고문 속에서 자신을 지켜주었는지를 간증했다. 약 10일이 지난 후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하나님이 오늘 자기를 데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오후 친구들이 그의 집에 모였다. 그 학생은 친구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하였다. 같은 시간에 두 사람이 친구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멀리서 무지개가 이 마을의 한 집 위에 머물러 있고 거기에서 밝은 광채가 하늘을 향해서 뻗쳐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불이 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너무나도 선명한 무지개와 밝은 빛이 죽어가고 있는 그 학생의 집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이 순교자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학생의 친구들은 이 집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예수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 순교자의 신앙을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전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이 열렬한 신앙인이 된 것이다.

(11)

'죽으면 죽으리다' 제사와 유씨부인의 신앙

전라도 지역의 최초 세례식은 1897년 여름에 있었다. 이때 세례 받은 다섯 사람 중의 한 명이 유씨 부인이었다. 유씨 부인의 남편은 부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씨 부인은 딸만 둘 낳았을 뿐 아직 아들을 낳지 못했다. 조선 여성의 가장 큰 의무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이 의무를 하지 못하는 여인은 무용지물이었다. 이 가련한 여인에게 예수의 복음이 들어왔다. 이 여인은 여선교사 테이트의 집에 드나들면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단지 서양사람 집을 구경다닌다고 말했다.

 

하지만 계속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받으러 갔다”고 말하였다. 남편은 분노하며 아내를 때렸다. 그는 “여자가 배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암소 같이 영리한 짐승도 배울 수 없는데 여자 같이 어리석은 것이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다. 유씨 부인은 굽히지 않았다.

 

유씨 부인은 박해를 이기고 세례를 받았다. 하나님은 그녀를 축복해주셔서 아들을 낳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단독(丹毒)에 걸렸다. 사람들은 단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돼지를 잡아 아기를 그 위에 눕혀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나을 리가 없었다. 유씨 부인은 의료선교사 잉골드를 불렀다. 그는 돼지 위에 뉘여 있는 아기를 꺼내서 치료해주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내심 아이가 엄마와 더불어 예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을까 염려했다.

 

유씨 부인은 신앙생활의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과거에 유씨 부인은 자신은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제사 준비는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은 제사를 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사 준비도 못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기절할 정도였다. 남편은 부엌에 가서 칼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말을 안 들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아내는 대답했다. “원한다면 죽이시오. 나는 제사를 드릴 수 없소.” 남편은 칼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남편은 곧 바로 신앙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두 딸과 아들을 기독교학교에 보내 교육을 시켰다.

유씨 부인은 밖에 나가서 전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집에서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다.

 

(12)

조선여자에게 피부를 떼어준 여선교사

남녀 차별은 때때로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오기도 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여성 전용병원이 생긴 것은 바로 남녀 차별 때문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여자는 여섯 살만 되면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고 결혼 후에는 집안에만 있게 되었다. 이런 관습 때문에 여성의 질병은 여성이 치료하게 되었고 선교사들은 여성들을 위한 여의사와 여성 전용병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턴은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에 여성병원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1887년 10월 여의사 하워드가 한국에 도착했고 이화학당에 한국 최초의 보구녀관(保求女館)이라는 여성 전용병원이 생겼다. 하워드는 한국에 와서 2년간 복음을 전하면서 최선을 다해 불쌍한 한국인들을 치료했다. 결국 그는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를 이어서 한국에 온 여자 선교사가 바로 셔우드였다. 셔우드는 이 병원에서 최선을 다해서 한국 환자들을 치료했다. 어느 날 열여섯 살의 소녀가 병원을 찾아왔다. 그녀는 화상으로 손가락 3개가 손바닥에 붙어 있었다. 이로 인해 소녀는 시집을 갈 수 없었다. 셔우드는 수술을 해 소녀의 손가락을 손바닥에서 떼어냈다. 하지만 손에는 심한 흉터가 남게 되었다.

셔우드는 피부 이식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먼저 자신의 피부를 떼어 본을 보인 다음에 소녀의 피부를 떼내어 수술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소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결국 다음날 셔우드와 다른 여선교사들이 이 소녀를 위하여 피부를 제공했다. 이것을 본 다른 한국인들도 피부를 제공했다. 마지막에는 이 소녀도 자신의 피부를 떼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모두 30여개의 피부 이식수술을 했다. 결국 수술은 성공했다.

 

셔우드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조선 여자에게 자신의 피부까지 떼어준 여자’로 알려졌도 그것이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후 셔우드는 같은 의료선교사인 홀과 결혼하여 평생 한국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술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다.

(13)

평양의 첫 서양 아기를 보러 몰려오다

한국 최초의 국제결혼식은 1892년에 있었다. 신랑은 캐나다인 의료선교사 홀과 미국인 신부 셔우드였다. 한국인들은 노처녀 셔우드의 결혼을 축하했다. 한국의 기준으로는 30살이 넘은 처녀가 시집을 가지 않았다는 것은 큰 수치였다. 한국인들은 이 결혼식에서 신부의 결혼예복이 흰색인 것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 조선에서는 신부는 반드시 화려한 옷을 입어야 되며 흰 옷은 상중에 입는 것이었다. 상복을 입으면 화가 닥친다고 믿었다. 얼마 후 이 부부에게는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셔우드 홀이었다.

 

이 신혼부부는 평양에서 의료선교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894년 홀 가족은 배를 타고 서해를 거쳐 대동강으로 올라와 평양에 도착하였다. 많은 사람이 서양 사람을 보기 위하여 나와 있었다. 셔우드는 평양에 온 최초의 서양 여자였으며 셔우드 홀 역시 평양 최초의 서양 아이였다. 홀은 이것을 한국인들과 사귀는 기회로 삼았다. 조선 부인과 어린이들에게 한하여 다음날 자기집에 오면 10명씩 한 조를 짜서 5분씩 아내와 아이를 보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다음날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홀 부인은 아마도 1500명 이상이 자신과 아이를 구경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서양아이에 대해서 내린 평가는 매우 흥미로웠다. 어떤 사람은 아이가 귀엽지만 코가 너무 높다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이의 귀가 너무 크다고 수군거렸다. 또 다른 사람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아이가 꼭 개 같이 생겼어”라고 말했다. 한국의 개 중에는 파란 눈을 가진 개들이 있었다. 어떤 극성스러운 사람들은 자꾸만 아이를 만져보려고 하였다. 결국 아이는 울고 말았다.

 

당시 평양은 서양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선교사를 돕던 한국인들은 관청에 끌려가 모진 매를 맞았다. 하지만 이런 삼엄한 분위기도 여인과 아이들의 호기심을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을 보면서 홀 부부는 머지않아 평양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4)

언더우드 '너는 왜 못 가느냐'

아무도 모르는 낯선 나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이것은 한국의 첫번째 복음 선교사인 언더우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언더우드는 원래 인도 선교사로 갈 것을 작정했다. 그러나 그에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국 선교사로 갈 것을 권고하였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한국 선교사로 가겠다는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그의 마음속에 ‘왜 너는 못 가느냐?’는 생각이 떠올랐다. 결국 그는 인도 대신 한국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자신이 속한 네덜란드개혁교회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로 지원했다. 하지만 선교부의 대답은 자금이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 후 다시 한번 간청하였으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계획을 바꾸어 장로교 선교부에 선교사로 가게 해달라고 두 차례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대답은 ‘쓸데없는 일을 계획한다’는 핀잔뿐이었다.

 

그러던 중 뉴욕의 한 장로교회에서 청빙을 받았다. 오랜 생각 끝에 그는 청빙을 수락하기로 작정하고 답장을 썼다. 청빙수락서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는 순간 그는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느냐?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음성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는 청빙서를 주머니에 넣고 한국에 가는 길을 다시 한번 모색하기로 작정하였다. 다시 장로교 본부 선교사무실을 찾았다. 전에 부정적으로 말하던 총무는 보이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엘린 우드 박사였다.

 

그는 자신도 한국 선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후 언더우드는 회신을 받았는데 다음회의 때 언더우드가 한국 선교사로 임명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1884년 7월28일 장로교 선교본부는 언더우드를 한국 최초의 선교 목사로 임명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헌신의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너는 못하느냐?”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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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결혼한 언더우드의 신혼여행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5년 26세 총각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는 젊은이답게 선교 열정이 충만해 있었으며 다른 선교사에 비해서 한국어도 빨리 배웠다. 하지만 총각인 그에게 시급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결혼이었다. 마침 그때 한 여성이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 이름은 릴리어스 홀턴이었다. 홀턴은 의사가 되어 선교지에 가려고 작정하고 30세의 늦은 나이에 의과대학에 입학해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다. 원래 수술할 수 있는 성격이 못되었지만 선교를 위해서 참았다.

 

홀턴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1888년 봄 36세의 나이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곧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병원에서 일했다. 이런 가운데 언더우드와 홀턴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홀턴은 언더우드보다 8세나 많았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홀턴은 모든 꽃 중에서 순백색의 인동 덩굴꽃을 가장 좋아했는데 언더우드는 그것을 알고 그 꽃을 홀턴의 집에 전달하곤 했다. 두 사람은 1889년 3월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 다음날 언더우드와 홀턴은 9주간 신혼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압록강 내륙지역이었다. 이곳에는 이미 만주에서 사역하던 로스 선교사의 노력으로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지만 어떤 선교사도 그곳을 방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언더우드 부부가 그곳을 방문하겠다고 자원한 것이다. 이것은 달콤한 신혼여행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전도여행이었다.

 

언더우드는 신혼여행 동안 한문 전도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당시 조선은 국법으로 전도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어떤 법도 복음 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언더우드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홀턴은 환자를 치료해주었다. 그 숫자가 600명이 넘었다. 이 신혼부부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그들이 잠을 자려고 하면 구경꾼들이 몰려와서 창호지에 침을 바르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홀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좀 쉬려고 해도 창문 구멍마다 우리를 쳐다보는 눈이 있으니 이 얼마나 놀랄 만한 일인가?”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부부는 복음을 위해서 신혼여행까지도 전도의 기회로 사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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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어서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초기 외국 선교사들은 어떤 유형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상대화한 자유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항상 정통교리만 강조하는 정통 보수주의자들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경우에서 잘 찾아 볼 수 있다. 언더우드는 칼뱅 정통주의 계통인 네델란드 개혁교회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네델란드 개혁교회는 앵글로색슨의 경험적인 신앙과는 달리 교리적이고 예전적인 신앙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이런 답답한 정통주의의 틀을 뛰어넘어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구세군에 가담했다. 언더우드는 구세군과 함께 거리에 나가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전도집회를 인도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교수들과 가족들로부터 ‘요란한 감리교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경험적인 신앙의 강조는 아펜젤러의 경우에 더욱 잘 드러난다. 아펜젤러 역시 개혁교회에서 견신례를 받고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냉랭한 정통주의 신앙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보다 생동력있는 신앙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감리교회의 기도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만족을 얻었다. 그 뒤 그는 감리교로 옮겼다.

 

1879년 10월1일 아펜젤러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876년 이래 나는 주로 감리교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개혁교회보다 훨씬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게일은 ‘선구자’라는 소설에서 아펜젤러에게 왜 감리교로 바꾸었냐고 물었다. 그는 “나는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었읍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장로교회에서는 그렇게 외칠 수가 없읍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외칠 수 있는 감리교로 옮겼지요”라고 대답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모두 정통주의적 전통에서 자랐지만 그들은 보다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하였다. 언더우드 부인은 이들에 대하여 “여러 방면에서 유사점이 많은 이 두 선교사는 원기왕성하게 찬송가를 불렀는데 한국인들과 부른 찬송 소리는 거의 1.6㎞까지 퍼져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런 복음주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한국 교회의 주류는 자유주의도,정통주의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을 강조하는 체험적 복음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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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펜윅의 헌신으로

초대 한국교회의 선교사 가운데 펜윅이라는 분이 있다. 캐나다 출신인 그는 어느 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선교적인 사명을 강조하는 설교를 듣게 되었고,한국에 선교사로 가라는 권유를 받았다. 전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펜윅은 자기는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변명하였다. 사실 펜윅은 신학교육은 커녕 일반교육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다. 여기에 대해서 인도에서 온 윌더라는 선교사는 사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예를 들어서 설명했다. 그는 사막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멋있는 그릇에 물을 담아 주면 더욱 좋겠지만 보잘 것 없는 그릇에 담아 주어도 기쁘게 받아 마실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그릇 속에 있는 생수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펜윅은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당장 선교사로 가겠다는 결단이 서지 않았다. 펜윅은 사업가였고,어느 정도 편안한 삶을 살수 있었다. 이것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때 다시 윌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배에 올라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노를 저은 뒤에 배가 아직 선착장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일어나서 고물로 가 보니 배가 선착장에 묶여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헛고생을 해 가며 노를 저었던 것입니다. 칼을 꺼내 밧줄을 끊고 노를 저으니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펜윅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자기를 매고 있는 편안함이란 밧줄을 끊어 버렸다. 그리고 넉 달의 항해 끝에 선교지 한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펜윅은 한국에서 선교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대부분의 선장들은 하선하는 승객들에게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펜윅에게 “나는 너와 함께 간다. 네 목자가 되어 너를 데리고 이 한국의 산들을 넘고,아름다운 골짜기들을 지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펜윅은 250여 교회를 개척하고 만주와 시베리아에까지 가서 교회를 세우는 열정을 보였다. 또한 독자적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찬송가를 간행하기도 했다. 그의 선교는 오늘날 한국 침례교회의 뿌리가 되었다.

 

(18)

게일 선교사와 김노인이야기

게일은 1898년에 ‘코리안 스케치’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인의 여러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다. 다음은 그가 조선의 북동쪽에 선교하면서 만났던 김 영감의 이야기다.

 

게일이 한 마을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복음을 전했다. 사람들이 꽉 차있는 가운데 먼 구석에서 짜증스런 얼굴의 몸집 작은 노인이 앉아서 게일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은 갑자기 일어나 “이 교리는 자기의 부모를 증오하고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라고 하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다 알고 있소”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한참 있다가 그는 다시 돌아와서 게일의 설교를 열심히 들었다. 점점 그의 얼굴은 굳어갔다. 게일의 설교 가운데 ‘길손은 쉬게 하라.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 근심있는 자는 모두 오라! 마땅히 천벌을 받아야 했던 도둑은 천국에 가서 평안을 얻었다’는 말이 그의 마음에 와닿았다.

 

김 영감은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유는 잘 모르지만 예수의 이야기는 자신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50년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김 영감의 얼굴이 달라졌다. 그의 얼굴에는 평화가 넘쳤다.

 

이에 마을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여서 고사를 지내며 이 마을에 들어온 귀신으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빌었다. 그 중 한 사람이 김 영감을 위협하고 하나님을 모독한 뒤 산밑에 있는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마을에 큰 비가 내리고 산사태가 나서 그 집이 파묻혀버렸다.

 

김 영감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나는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하고 있었소. 그때 만사가 매우 힘들어 지쳐 있었소. 나는 나무더미 위에 앉아서 하나님께 모든 사정을 다 아뢰었소. 그러자 주님은 내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셨소.” 김 영감은 최후까지 충실했다. 그는 부활의 소망으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게일은 조선땅의 가난한 노인에게서 살아있는 신앙을 발견하였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복음을 들은 한국인들은 그 복음대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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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선교사 기도로 병자 고치다

우리가 한국 교회사를 말할 때 병원을 통한 의료선교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신유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신유운동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최초의 복음 선교사 언더우드도 신유사역을 했다. 언더우드는 1907년 어느 날 안산읍 반월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 지역에는 불치병으로 칩거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부어 있었고 사람들은 얼마가지 않아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언더우드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 사람의 집에는 무당이 방문해 굿을 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궁금한 나머지 이 집을 방문하였다. 전후 사정을 들은 언더우드는 자신이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언더우드는 이 사람의 아버지에게 “이 사람이 오늘 죽는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질문한 뒤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며 복음을 전했다. 아버지는 병만 낫게 해주면 예수를 믿겠다고 대답하였다. 언더우드는 오히려 “당신의 아들이 살지,죽을지 나는 모르지만 예수를 믿고 그 영혼과 당신의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 노인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달라고 말했다. 언더우드는 환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남녀 무당들을 모두 쫓아냈다. 그리고 환자에게 “예수를 믿겠는가”고 물었다. 환자는 “예”라고 대답했다.

 

언더우드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금식하며 3일 밤낮 동안 그곳에 남아 중단하지 않고 기도를 드렸다. 3일째 되던 날 부기가 가라앉기 시작해 해가 지기 전까지 부기가 다 사라지고 그 생명이 구원을 받았다. 그가 계속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셨던 것이다. 그 후 우리는 그 집에서 악령을 숭배하던 모든 것을 다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이 놀라운 경험의 결과로 그의 모든 가족과 많은 다른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이 땅에 구원의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병든 한국인들을 위해 신유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20)

조선 왕실후원으로 전도한 전주지방 선교

전라도 지역 선교는 미국 남장로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892년 한국에 온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893년 2월 장로교 선교사들로 구성된 장로교공회에서 전라도와 충청남도를 선교구역으로 삼았다. 이들은 1895년 전주를 선교 거점으로 정했다. 처음에는 조선의 집을 사서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그후 남장로교 선교부는 전주성 외곽 완산동에 땅을 샀다. 1897년 가구당 약 1500달러를 들여서 아담한 반양옥집 2채를 건축하였다. 겉으로는 한옥이었으나 안에 들어가면 서양식 문과 창,응접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 집은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선교사들이 심신을 쉴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900년 어느 날 선교사들이 이 집에 정을 붙여서 정원을 가꾸고 과일나무를 심고 있을 때 전주감영 관리로부터 전갈이 왔다. 지금 선교사들이 살고 있는 땅은 약 500년전 조선왕조 창시자의 조부가 태어난 신성한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은 선교사들에게 그 땅을 다시 팔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선교부와 왕실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졌는데 결론은 땅을 돌려주는 대신 전주 지역 중심에서 가까운 화산동 땅을 불하받는다는 것이었다. 화산동 땅은 이전 땅보다 더 넓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비도 충분하게 보상 받았다.

 

이 새로운 땅위에서 남장로교의 선교는 시작되었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이곳에 예수병원을 세우고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사택을 마련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전주지역 선교가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선교사들은 정부로부터 뜻하지 않은 기쁜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때까지 선교사들은 내지에 땅을 사고 정착하는 것이 불법이었으나 당당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아 새롭게 선교기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선 내지 선교의 문이 보다 확실하게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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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조선여성의 피란처와 해방자인 기독교

한국에서 복음을 가장 열렬하게 받아들인 계층은 여자들이다.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제도에 얽매여 마치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던 한국 여인들에게 복음은 글자 그대로 복된 소식이었다. 어떤 선교사는 기독교가 한국 여성들을 변화시킨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는 한국 남성들에게 기적을 일으키고 있다. 도박과 음주 같은 잘못된 죄악들은 중단되었다. 싸움과 아내 구타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선교사의 가르침을 받은 남편은 아내가 바느질을 잘할 수 있도록 불을 밝혀주고 창호지로 된 문에 유리창을 달아줘 편하게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해주며 대문 가까이 우물을 파 물을 쉽게 길을 수 있도록 해준다. 신앙을 가진 남편은 아내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며 아내를 진실한 사랑으로 대우하기 시작한다. 한국인의 작은 오두막집은 이 짓밟히고 뭉개진 불쌍한 여성들을 위한 작은 항구가 되어갔다. 한국 여성들은 이런 일들을 결코 꿈꾸지 못했다.

 

여성들을 위한 학교들이 세워지고 있다. 흥미진진한 새로운 세계가 이들 젊은 여인들에게 열리고 있다. 이들은 지금 노래를 배우고 있으며 또한 부를 노래를 갖고 있다. 그들은 찬송을 배우는데 놀랄 만한 열성을 보이고 있다. 곡조를 맞추고 노래를 배우면서 큰 기쁨을 얻고 있다. 글자를 모르는 나이 많은 여인들은 가사를 암송하여 찬송을 부른다. 희미했던 눈에서는 빛이 나고 입술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국 여성들을 위해서 역사하셨는가를 스스로 드러나게 해준다.”

 

여성들에게 교회는 일종의 피난처였다. 교회에 다니는 여성들에게 안식일은 글자 그대로 모든 속박과 노동에서 벗어나는 안식의 날이었고 인간 대접을 받는 유일한 날이었다. 동양선교회 선교사인 카우만 부인은 예수님이 한국 여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한국 여인의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해결자이다. 예수님은 오두막집에 불을 비춰주시고 무거운 짐을 덜어주시며 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줄 것이다. 혹 그들의 외적인 모습은 전과 같을지라도 그들의 내면에는 감미로운 평화,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가벼운 하늘 멍에가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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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 죽음을 넘는 사랑이야기

초기 선교사 노블은 1906년에 ‘죽음은 사랑을 넘어서’라는 소설을 썼다. 이 소설에는 승요라는 남자 주인공과 이화라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다. 승요는 승지의 아들이었지만 종인 이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승요는 사랑을 위해서는 양반 신분을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난리 때문에 이 사랑은 계속되지 못했다.

 

승요는 사방으로 이화를 찾아나섰고 다른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화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이화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는 이화에게 순종과 희생을 알려주었다. 이 두 사람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예배당에 가서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목사 앞에서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화는 주인에게 순종하는 전통적인 여자였지만 동시에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믿는 기독교인이었다. 여기에 이화의 갈등이 있었다. 이화가 내린 결론은 주인집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다. 승요는 여기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과거의 법은 잘못된 법이고 그 법은 지킬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화는 달랐다. “그건 나의 새 신앙에 모독이 됩니다. 사람들이 야소교인들은 도둑놈들이고 불법을 권장한다고 욕할 것입니다.” 이화는 전통이 잘못되었지만 그 전통을 무시하지 않았다.

 

일찍이 주인은 이화의 손에 십자가 모양의 문신을 그려주었다. 이것은 종의 신분을 표시한 것이었다. 이화는 이것을 볼 때마다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운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화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뒤부터 이 십자가 문신은 그의 자랑이 되었다. “저에게는 수치스럽고 죽음으로 가는 그 십자가의 문신이 성스러운 상징이요 승리의 상징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십자가 안에서 조선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이화의 신앙고백이었다.

 

승요와 이화는 주인집으로 돌아가서 결혼했다고 밝혔다. 주인은 종들을 시켜서 이화를 치도록 했고 이화는 매를 맞아서 죽게 되었다. 이화가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십자가! 서방님!”이었다. 그녀는 주님을 죽도록 사랑했고 동시에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다. 이것이 신앙을 가진 한국 여인의 사랑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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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번째 여자 의사 김점동

김점동은 한국 최초의 여의사였다. 그녀는 원래 선교사들이 세운 동대문진료소(현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간호보조원이었다. 대부분의 한국 여인들처럼 이름이 없었던 그녀가 세례를 받으면서 에스더라는 이름을 얻었다. 감리교 여자 의료선교사였던 홀 부인은 에스더를 의사로 키우고 싶었다. 에스더는 처음에는 수술이 두려워서 의사가 되는 것을 싫어했지만 홀 부인이 언청이 수술에 성공하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우선 에스더에게 급한 것은 결혼이었다. 선교사들은 신앙을 가진 남자들 가운데서 에스더의 남편감을 찾았다. 그래서 선발된 사람이 박유산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박유산의 신분이 에스더보다 낮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스더는 홀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지체가 높거나 낮거나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당신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결국 이들은 1893년 5월24일 결혼하였다.

 

1894년 12월 홀 부인은 에스더와 그의 남편 박유산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에스더에게 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다음해 2월 에스더는 공립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공부를 시작하였고 남편 박유산은 농장에서 일하며 아내의 학비를 마련했다. 2년 후 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 의대)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동안 남편은 볼티모어의 식당에서 일하며 아내를 돕다가 결핵에 걸렸다. 결국 그녀의 졸업을 앞두고 박유산은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그는 아내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일하다가 죽은 최초의 한국 남성일지 모른다.

 

1900년 에스더는 한국 최초로 서양의학을 공부한 여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돌보아준 홀 부인과 함께 평양의 여성전용병원인 광혜여원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어려운 환자를 치료했다. 에스더 역시 남편과 같이 결핵으로 고통을 받다가 결국 1910년 4월13일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한국의 첫번째 여의사 에스더(김점동)는 믿음으로 살다가 부름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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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의 핍박을 극복한 기독교

이 땅에 전해진 복음은 처음부터 심한 반대에 부닥쳤다. 먼저 조선의 중심 이념이 되었던 유교의 반발이 컸다. 1896년 10월 당시 학부대신 신기선이 유학경위(儒學經緯)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 보수적인 유교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근세 서양인이 믿는 이른바 예수교는 비천하고 망령된 것으로 오랑캐 풍속의 비천한 것일 뿐이다. 더불어 말하기도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그런데 아시아 외의 모든 나라가 이 종교를 믿으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되묻고 있다.

 

신기선의 이같은 주장은 당시 선교사들과 조선에 나와 있던 서구 외교관들에게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결국 그는 학부대신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같은 반기독교 운동은 단지 유교 식자층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이들은 보부상들을 앞세워 황국협회를 세워 반기독교 운동을 조장했다. 보부상들은 1898년 10월21일 기독교학교와 교회에 다음과 같은 경고장을 보내고 기독교를 박멸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무릇 대한의 신민이 된 자는 모두 마땅히 공자를 외우고 맹자를 배운다. 오호라,너희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우리 도(道)를 버리며 우리 스승을 배반하고 저 눈이 쑥 들어가고 콧대가 높은 양놈들을 스승으로 삼아 임금도 모르고 애비도 모르는 천주교를 배우고 독립협회의 역당(逆黨)의 미친 귀신이 되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기독교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같은 해 12월9일 황성신문은 “보부상들이 장차 교회당을 훼파하며 신도를 도륙하겠다고 하니 이들의 행위는 우매하고 고루한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통분해 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외교문제가 되어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보부상들은 한발 물러나 그같은 일은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모함하는 자들의 소행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미국 공사관에도 해명서를 보냈다. 하지만 이것으로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 땅에 반기독교적인 정서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계속된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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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예루살렘 평양 선교의 준비

초기 선교사들은 조선정부가 허락한 안전한 지역에서 전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왕으로부터 내지여행 증명서를 발급받아 내륙을 탐사해 새로운 선교기지를 개척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 가운데 하나로 감리교 선교부는 존스 목사와 홀 박사를 서북지방으로 보내 새로운 선교 가능성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목사와 의사가 한 팀을 이루어 선교하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었다. 의사가 육신의 병을 치료해주면 목사는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치료해준다.

 

1892년 3월 초순에 이들의 서북지방 첫번째 여행이 시작되었다. 존스는 평양의 첫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평양에 도착한 날은 1892년 3월14일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방문객들이 우리를 쉴 새 없이 찾아왔다. 우리는 모두에게 진리를 설교했다. 또 환자들을 치료하며 바쁘고도 행복한 한 주일을 지냈다. 우리의 거처에다 책방을 차렸는데 하루 사이에 80권의 기독교서적이 팔렸다. 책을 파는 일은 사실상 평양감사의 금령을 어기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계속 책을 팔았다.”

 

평양에 다녀온 이들의 보고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이들은 평양에 새로운 선교기지를 세우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라고 선교부에 보고했다. 첫째로 평양은 조선에서 가장 문란하고 더러운 도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곳이야말로 선교가 가장 필요한 곳이다. 둘째로 인구가 10만명이 넘으며 주민들은 적극적이고 상업적이라서 비교적 번성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셋째로 평양은 서울과 중국 베이징을 잇는 도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육로 사정도 괜찮고 해상교통도 편리하다. 결국 이들의 판단은 옳았다. 평양의 선교는 세계 장로교와 감리교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성공사례로 평가되었다.

 

평양은 건달이 많은 도시로 유명했다. 평양 사람들은 기분에 맞지 않으면 일반인이든 관원이든 막론하고 돌멩이를 던진다. 그러나 다행히 선교사들이 베푼 의술의 효과가 컸다. 홀 박사가 다시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자신이 치료해준 한 소년을 찾아갔다. 그 소년은 평양 감영의 고위관료의 아들이었고 그의 집은 35칸의 큰 저택이었다. 이들은 홀 박사를 환영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진료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평양감사도 선교사들의 의료행위를 묵인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평양에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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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바울 김창식이 있었기에

1890년대초 조선은 외국인들이 개항장 이외의 내지에서 전도하는 것은 물론 부동산을 매입하고 거주하는 것 등을 금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평양에 한국인 이름으로 건물을 사고 그들을 먼저 보내 살도록 했다. 감리교는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인 조사 김창식을 먼저 평양에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인 1894년 5월4일 의료선교사인 홀 박사 부부를 가게 했다.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새벽 1시쯤 관리들이 들이닥쳐 김창식을 체포한 뒤 구금하고 심한 매질을 했다. 그리고 그에게 칼을 씌웠다. 아침이 되면 김창식은 심한 곤장을 맞게 될 것이다. 다음날 관리가 와서 뇌물 10만냥을 요구했으나 홀 부인은 이것을 거절했다. 홀 박사 집에는 밤마다 돌팔매가 날아들어와서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서울에서도 상황은 바쁘게 움직였다. 미국과 영국의 영사관은 조선의 외무부에 항의하고 조약을 내세워 외국인과 그들 조수들의 안전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장로교선교사 모펫은 홀에게 전보를 보냈다.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을 고통 당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전해주시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김창식은 절도범 감방에서 사형수 감방으로 옮겨졌다. 다른 사람들도 곤장을 맞았다. 사람들은 김창식과 장로교 조사인 한석진이 예수를 전한 죄로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수근댔다. 서울에서는 외무대신과 영국영사가 면담했다. 외무부는 ‘즉시 석방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전문을 평양감사에게 보냈다.

 

김창식은 감옥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 석방해주면 또 예수를 전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석방돼도 계속 예수를 전하겠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김창식은 거의 죽도록 맞고 석방되었다. 관리는 사람들을 동원해 김창식에게 돌질을 하도록 사주하였다. 김창식은 죽은 목숨이 되어서 돌아왔다. 김창식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도행전 16장을 읽으면서 예배를 인도했다. 선교사들은 이런 조선인의 신앙에 감복하였다. 그들은 김창식의 발아래 꿇어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홀 박사는 조선에서 예수를 위해서 고난 받는 신앙인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홀 부인은 김창식을 ‘조선의 바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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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교회가 부흥성장한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평양의 부흥운동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약 10년 전에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운동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다. ‘한국 개신교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소래교회는 만주에서 복음을 들은 한국인들이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세운 교회다.

 

1889년 한국에 도착한 캐나다인 선교사 말콤 펜윅은 복음주의 운동에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 종종 소래를 방문해서 한국어도 배우고,그들의 신앙도 살펴보았다. 청일전쟁의 상처가 짙게 배어있던 1896년 말,펜윅은 소래를 다시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하였다. 약 300명의 신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으나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집회 12일째 되는 날,펜윅은 한 사람을 불러서 물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에 역사하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제 눈에는 감격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서로 미워하는 신자 두 사람만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중단될 수 있습니다. 자,이제 이곳 신자들 중에서 누가 서로 미워하고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펜윅의 말이 끝나자 그 사람은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하며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된 배경을 이야기했다. 펜윅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미워했던 그 사람에게 가서 사과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펜윅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동안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 후,그 사람은 그 길로 미워하던 두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서로 화해했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다. ‘죄 씻음’을 받은 그 신자가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자 모든 신자들이 함께 회개하였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이 이야기를 듣고,“수 천리를 걸어서라도 죄 때문에 그렇게 운 한국인을 만나보고 싶군요. 난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회개는 참된 부흥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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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세례인 노춘경이야기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84년이다. 하지만 복음 전파의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은 것은 1898년이 되어서였다. 복음 전파의 문은 서서히 열렸다.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움트기 시작한 호기심은 법으로 막을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노도사라고 알려진 노춘경(盧春京)이었다. 그는 우연히 한문으로 된 기독교 배척문서를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선교사들에게 접근하여 기독교를 알고자 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주저하였다. 노춘경은 포기하지 않고 선교사 앨런의 집에 가서 그의 책상위에 놓여 있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몰래 가져가 열심히 읽었다.

 

노춘경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구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기독교 서적을 읽었고 선교사들의 주일예배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언더우드에게 세례문답을 받았다. 언더우드는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법이 아직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으며 한번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돌아서면 안된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노춘경은 자신의 결심은 분명하며 최악의 경우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고 대답했다.

 

선교사들은 이 세례문제에 민감했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느낌을 1886년 7월24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로서는 그 의식이 대단히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 분께서 그를 지키시리라고 확신한다.” 이런 논의와 기도 과정을 거쳐서 1886년 7월18일 주일에 헤론 선교사의 집에서 노춘경은 세례를 받았다. 한국땅에서 한국인에게 준 최초의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세례는 목숨을 건 세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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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봇짐장수 ‘권서’에 감사하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있게 만든 뿌리에는 권서들이 있다. 권서는 ‘성경책이나 전도책자 등을 사서 읽도록 권하는 사람’을 뜻한다. 한국 최초의 권서는 ‘한국 교회의 요람’으로 불리는 소래교회를 설립했던 서상륜이다. 그는 1882년 10월 로스 선교사가 만주에서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조선에 들어와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권서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도처에서 온갖 경멸과 모욕,핍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종종 서양귀신에 씌웠다면서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머리가 깨지고 얼굴이 터져 피범벅이 되었다. 심지어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 ‘한 권의 성경보다 한 줌의 쌀’이 더 필요한 것 같았지만 권서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 민족의 살 길이며 이 땅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 생명줄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악착같이 성경을 팔았다.

 

권서들은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성경을 무료로 배부하지는 않았다. 돈이 없으면 곡식 생선 달걀 옷 성냥 등으로 성경과 교환해줬다. 그런 것이 없으면 자신들이 대신 지불하고 성경을 건네주기도 했다. 권서 안교철의 이야기는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나는 오늘 한 가난한 여인에게 성경을 권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돈이 없어서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달걀이라도 한 개 주면 성경을 팔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하루에 한 끼 먹고 사는 데 오늘은 그것도 먹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 불쌍해서 돈을 대신 내고 그녀에게 성경을 주며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성경을 받아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잠시 후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내게 동전을 내밀면서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책을 한 푼도 내지 않고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돈을 이웃집에서 빌려왔습니다. 책값으로 받아 주십시오.’ 내가 한사코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그 여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초기 한국 신자들은 끼니도 먹지 못하면서 한 권의 성경을 사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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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두의 불 세례는 역시 뜨거웠다

한국 교회의 초기 대부흥은 1907년에 일어났으며 그 다음 부흥은 3?1운동 이후 일어났다. 이 부흥운동의 주역은 김익두 목사였다. 이 부흥운동의 힘으로 한국 교회는 1920년대에 밀려든 세속주의와 사회주의의 거센 바람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래서 김인서 목사는 “기미 이후에 만일 김익두가 없었더라면…”이라면서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청?일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김익두의 고향 황해도 안악에도 복음이 들어가 교회당이 생겼다. 친구 박태준의 뒤를 따라서 교회에 나간 김익두는 마침 소안련 선교사가 영생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던 김익두는 교회에 나간지 3주만에 신앙을 갖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작정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어머니께서 말하기를 “나는 천자대감을 섬기고 있다. 그런데 지난 밤 꿈에 귀신이 ‘익두가 방망이로 나를 때려죽이는구나’라고 외치기에 깜짝 놀라서 깨어났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이후 천자대감을 섬기던 김익두의 어머니와 그의 아내도 김익두를 따라서 예수를 믿게 됐다.

 

김익두는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하여 비신자 마을에서 신자 동네로 이사하였다. 술을 권하면 금주하였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자기는 신약과 구약으로 족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신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입교한지 3개월만에 그는 예전의 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기생집에까지 가게 되었다.

 

그때 그에게 불현듯 ‘예수를 다시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가슴을 치며 밤새도록 철저하게 회개하였다. 그리고 새벽에 집에 와서 쓰러져 누웠는데 비몽사몽간에 큰 불덩어리가 그의 가슴에 안기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 “아이구 벼락이야”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이 소리에 안방에서 자던 그의 어머니가 놀라서 뛰어와 그를 깨웠다. 그것은 벼락이 아니고 불세례였다.

 

이때부터 김익두는 죄를 미워하고 성령에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 후 김익두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일제시대 한국 교회의 최대 부흥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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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인 헤어스타일까지 변화시킨 김익두

한국 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유사역자는 장로교 김익두 목사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신유를 의심하고 배척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여기에 대항해서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 나타난 이적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이것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에서 1921년 장로교 목사 임택권은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임 목사는 일본 유학을 한 지성적인 목사로서 1924년에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임택권의 이적명증에는 김익두의 부흥집회에 나타난 놀라운 이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김익두의 신유사역을 전국적으로 널리 알린 첫번째 사건은 경북 달성군 현풍리에서 나타난 신유 역사였다. 이 교회에 박수진이라는 거지가 있었다. 그는 아래턱이 빠져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음식을 씹지 못하므로 물과 함께 음식을 부어 넘겼다. 또한 늘 침이 흘러 턱받이를 하고 다녔다. 막대기를 짚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막대거지라고 불렀다.

 

김익두는 이 거지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다. 처음에는 별 효과가 없었으나 다음날에는 역사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곶감을 가져다주면서 먹어보라고 하였다. 이 거지는 곶감을 맛있게 먹었다. 10년 동안 시달리던 병마에서 해방된 것이다. 김익두 목사는 그 거지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는 의미로 박수은(朴受恩)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김익두의 부흥집회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풍습을 만들어냈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머리를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서 머리에 다리를 드리고 다녔다. 이것을 월자(月子)라고도 한다. 이것이 크면 클수록 사회적 신분이 높은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양반집 여인일수록 크고 멋있는 월자를 하고 다녔다.

 

김익두의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여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월자를 하나님께 드리고 쪽머리를 하고 다녔다. 원래 쪽머리는 기생이나 노복들이 했었는데 은혜를 받은 여인들은 주를 위하여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기꺼이 쪽머리를 하였다. 김인서에 따르면 이런 부흥의 물결이 지나간 다음에 평양시내에 쪽머리가 유행했다고 한다. 부흥운동은 여인들의 헤어 스타일까지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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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집에 가서도 전도한 최권능 목사

최권능 목사의 본명은 최봉석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가 기사와 이적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별명이 최권능이 되었다. 워낙 열심히 전도하여 세인들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복음을 전해 70여개의 교회를 세웠다. 일제시대 평양 시내에서 그의 전도를 듣지 않았던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는 기생집에도 들어가서 전도하고,남의 부엌에서도 전도하고,낯 모르는 목사와 장로들에게도 전도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신자다”라고 말하면 그는 “신자면 왜 내게 전도하지 아니하느냐?”고 무섭게 책망하였다. 어느 날 최 목사가 길거리에서 너무나 열심히 전도했기 때문에 교통이 혼잡해졌다. 순사가 이것을 보고 전도활동을 중지시켰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결국 그 순사는 최 목사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최 목사는 따라가면서 “내가 오늘에서야 경찰서장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최 목사가 평안도 구성에서 전도할 때 일어났던 일이다. 그가 김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 전도한 뒤 그 옆집으로 가 또 전도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이 전도한 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곧 김씨의 아들이 와서 최 목사를 향해서 아버지를 죽인 자라고 욕하면서 잡아가 자기집에 가두었다. 이때 최 목사는 오히려 그 아들에게 “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내가 기도해서 아버지를 살려 줄터이니 예수를 믿겠느냐?”고 물었다. 아들은 할 수 없이 “믿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최 목사는 곧 죽은 그 아버지를 붙잡고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였다. 기절하여 죽었던 자가 숨을 쉬며 살아났다. 최 목사는 이처럼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현대인들은 최 목사의 전도 방법에 이의를 제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한 최 목사의 불굴의 전도정신은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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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후보라고 칭찬받은 고찬익 장로

한국의 초기 선교사로서 연동교회 담임목사였던 게일은 평소 자기가 만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연동교회 초대장로였던 고찬익을 꼽았다. 고찬익은 전형적인 노름꾼 사기꾼 술꾼이었다. 그는 관가에 잡혀가 매를 많이 맞아서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빚 독촉에 시달려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였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선교사 게일의 전도를 받게 되었다. 게일은 그에게 “네 이름은 무엇이냐?”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주었다. 이 전도지는 고집쟁이며 욕심꾸러기인 야곱에 관한 것이었다.

 

그날 밤 고찬익은 꿈에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을 들었다. 고찬익은 말도 못하고 “고…고…고”라고만 대답하였다. 그런데 다시금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너무나 떨리고 무서워서 “내 이름은 고가고,싸움꾼이고,술꾼이고,망나니올시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울면서 대답하였다.

 

이때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그의 몸을 때리면서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꿈이 하도 이상하여 전도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갑자기 혀가 완전히 풀리고 말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뒤 고찬익은 게일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수없이 “제 이름은 고가요,이제는 당신의 아들입니다”고 중얼거렸다. 고찬익은 원래 짐승 가죽으로 신을 만드는 갖바치로 조선사회의 가장 비천한 천민이었다. 천민에게는 이름이라는 것이 없었다. 찬익(燦益)은 게일이 남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었다.

 

새 사람이 된 고찬익은 자신이 과거에 해를 끼치거나 신세를 졌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나는 도적놈에다 싸움꾼 사기꾼이었습니다.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만든 신발을 드리겠습니다”고 말하면서 전도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힘이 아니고는 그런 불량배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찬익은 그 뒤 게일의 조사가 되었고 1904년 연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게일은 만일 자기에게 노벨상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고찬익 장로를 추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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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교회의 기초,고찬익 장로

한국의 선교 역사에는 수많은 신앙의 거인들이 있었다. 저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한국 초기 선교사로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연동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게일은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연동교회 초대장로였던 고찬익을 꼽았다.

 

고찬익은 원래 원산에서 게일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원산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였다. 가난한 신자들의 방 자리 밑에서 알 수 없는 돈이 나오고 혹은 뜰에서 쌀자루가 발견되었다. 또 원산 거리에서 거지가 매우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궁금했으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고찬익이 게일을 따라서 서울로 가게 되었고 그후에는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 사건들이 고찬익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고찬익은 게일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서 연동교회에서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찬익이 하루는 20세 전후의 청년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나는 의식이 빈궁해서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고찬익은 “노동을 하면 먹을 것이 나오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양반 출신이어서 노동을 천하게 생각했다. 고찬익은 청년에게 “내일 아침 일찍 아침식사 전에 우리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고찬익은 집에 가서 지게와 수건을 둘씩 준비하고 아내에게 밥을 한 그릇 더 지으라고 했다. 다음날 청년이 약속시간에 고찬익의 집에 왔다. 고찬익은 청년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지게를 하나씩 지고 인근 선교사댁 건축 공사장에 가서 함께 종일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받은 노임을 그 청년에게 주었다. 고찬익은 청년에게 복음을 전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의 소중함까지 가르쳐주었다. 길선주 목사는 고찬익 장로를 “경성교회 기초사역에서 가장 유능한 전도자”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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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익의 대감전도

연동교회 고찬익 장로는 원래 출신이 낮고 배운 것이 없지만 지식계급에도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다. 당시 연동교회에는 월남 이상재를 비롯해 당대 최고의 양반 이원긍,개화당의 유성준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고찬익의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고찬익 장로가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한 박승봉 대감을 전도한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이다. 고 장로는 박승봉 대감을 전도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감히 천한 신분에 큰 벼슬을 한 분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지혜를 얻어 대감에게 한문공부를 하기로 하고 매일 한문성경을 가지고 가서 마태복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박 대감은 한문은 알아서 글자적으로는 읽을 수 있으나 그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 장로가 그 의미를 설명해주곤 했다.

 

이렇게 2개월이 지나자 박 대감은 기독교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고 장로의 안내로 연동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교회에 가서 보니 자기에게 글을 배우던 고찬익이 장로로 설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강단 밑에서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겸손하게 설교를 듣고 있는 모습에 또 놀랐다. 여기에 감복한 박 대감도 믿기로 작정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훗날 안국동 묘동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고찬익 장로의 집 부근에 잡화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고 고 장로가 지나가는 것만 보아도 공연히 비방을 했다. 그러나 고 장로는 한번도 대항하지 않고 늘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물건을 살 일이 있으면 일부러 그 상점을 찾아가서 한푼도 깎지 않고 공손하게 사서 돌아왔다. 성도다운 아량과 겸손을 보인 것이다. 오랜 기간을 두고 노력한 결과 잡화상 주인도 회개하고 훌륭한 신자가 되었다.

 

고찬익을 전도했고 그와 함께 사역했던 게일 선교사는 고 장로의 일생을 소재로 한 ‘선구자’라는 영문소설을 썼다. 그는 고 장로가 자신이 만난 어떤 사람보다 진정한 신앙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하는 서양 기독교인들은 꼭 고 장로를 방문했다고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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