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입도 중요하지만 듣는 귀도 준비되어야 한다
설교자뿐 아니라 설교 듣는 사람을 위한 책

설교는이렇게 들어야 합니다


제이아담스 지음



1.문제가 있다
예수님은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듣는 법칙을 말하신다.
그비유에서는 '들으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의 차이를 빚어내는 것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토양의 성질이었다.
이비유를 베푸신 후 예수님은 이 중요한 강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을 반복하심으로써 끝맺으신다.
병행구를이루는 마가복음 4:24에서는 마가가 이러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그리고 누가는 같은 비유에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더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왜설교를 듣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그것은하나님께서 말씀으로써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에덴 이후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말을 듣느냐 하는 것이 늘 문제가 되어왔다.

2.시작에 앞서서
모든사람들은 죄인으로 태어나 하나님께 소외되고, 따라서 그분의 말씀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육에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따라서성령을 받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으면 아무리 설교를 들어보아도 그것은 무익할 뿐이다. 아무리 설교가 훌륭하더라도, 따분하고 화나게 하며, 혼란스럽고 외면하게 한다. 독자도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때문에 설교에서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얻기 위해서 당신은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영적이라는 말은 성령의 내주함을 말한다.
회심하는사람을 보았는가? 참된 회심의 초기에 나타나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말씀의 선포를 고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만약 당신이 중생의 경험이 없다면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가?
당신은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이것이영적 생명의 유익이 되는 설교 듣기를 위해 구비해야 할 단 하나의 선결 조건이다.

 

3.잘듣기 위한 준비
씨가뿌려지고 나면 모든 것이 땅에 상태에 따라 좌우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이렇게 표현한다.
"저희와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말씀이 정수이다. 설교에는 믿음이 합해져야 한다.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메시지에 믿음이 더해져야 한다.
그밖에설교에서 설교자가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듣는 자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 다음은 그것에 관한 몇 가지 조언이다.


-충분한잠
예수님은깨어있는 것과 같은 단순한 문제에 몹시 신경을 쓰셨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시간을 좌우하도록 허용함으로 큰 실수를 범하곤 한다.
세상이창조될 당시 하루는 저녁에 시작이 되었다. 아마 우리도 주님의 날을 같은 방식으로 지켜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토요일저녁을 외식하는 시간, 밤 늦은 시간까지 비디오를 보는 시간으로 여기기보다는 주말의 여가를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편히 쉬며 일찍 잠자리에 드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토요일 밤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 만큼 설교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 없다.
충분히자두라. 그렇지 않으면 형편없는 청중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제시간에 교회가기
허둥대며허겁지겁 교회에 간다면 설교를 들을 마음자세가 갖추어지지 않는다. 정신 없이 차를 몰아 예배 직전에 헐떡이며 도착한다면 가족들이 예배를 잘 드릴 수 없음은 뻔한 이치이다. 게다가 누가 꾸물거려 늦었다느니 하면서 다툰다면 예배를 망칠 요소를 고루 갖추는 것이다. 예배 내내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며 아내의 꾸물거림을 탓하고 있거나 아이들 옷 입히는 것은 거들어 주지 않으면서 빨리 가자고 보채는 남편을 원망하며 눈치보다보면 예배는 이미 마음에서 사라진다.


-충분한 아침식사
배고픈청중은 형편없는 청중이다. 빈 속, 혹은 거의 빈속으로 교회를 온다면 괜스레 짜증과 조바심만 날 뿐이다. 당신은 집에 달려가서 무얼 좀 먹으려고 얼른 예배가 끝나기만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예습
설교가진행될 해당 본문을 미리 읽어본다거나 말씀 중에서 의문에 부딪히는 것을 기록해 둔다면 설교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과 같다. 무엇보다도 예배에 참여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기도
1859년웨일즈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한 설교자가 친구 목사를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존스턴목사, 요즘 목사들이 예전에 비해 설교를 훨씬 더 잘하는 것 같네." 그러자 존스턴이 대답했다.
"사람들이예전보다 훨씬 더 설교를 잘 듣는게지."
그러자그 설교자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럴지도모르지. 하지만 설교자들이 훨씬 더 설교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왜그리 생각하는가?"
"사람들이모두 목사를 위해 기도하고 있거든."


-규칙성
만약당신이 들쭉날쭉 교회에 출석하면 어색하고 불안한 마음이 앞서고 눈에 띄는 존재가 되기 쉽다.

'사람들이 그동안 내가 어디 갔다왔는지 물을까?' 이런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갈려서 설교를 제대로 들을 수 없다.

4.기본적인 태도
우물가에가려고 할 때는 깨끗하고 빈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당신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설교를 듣는가?
물론듣기에 너무나 준비 안된 진부한 설교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의 사자인가만을 기억하라. 그를 경멸하는 것은 그 보내신 이를 경멸하는 것이다.
"너희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눅10:16)
그러므로우리의 임무는 그분의 위임받은 심부름꾼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메시지를 받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다.
당신이그리스도인이라면,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절실하게 심부름꾼, 그가 나르는 메시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보낸 분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모든 설교자는 약점을 가지고 있으나 그 메시지는 그 너머에 있는 주님께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5.기대감,성향, 그리고 영적 상태
배움은동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적이며 영적인 문제이다.
설교를듣는 당신의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꼭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
"하나님께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8:47)
당신의동기가 옳고 마음이 겸손하며 하나님과의 다른 관계가 바를 때, 당신은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기대감
교회에가서 설교를 들을 때에는 한가지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초점을 두라.


-성향
무감각한성향("벌써 오래전에 들은 얘기군"), 은 참호 속의 병사에게 뿐 아니라 회중석의 청중에게도 위험하다.

하나님을 놀랍고 기묘한 분으로 생각지 않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6.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
어떤종류의 메시지든 그 메시지가 선포되는 동안 독자는 선포된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한다.
될수 있으면 한 마디 말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 몇 가지 간략한 예를 들어보겠다.
-하나님께서는내가 인색하지 않게 주시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내가 환난 당할 때 그분을 의뢰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내게 의심을 버리라고 하신다.


히브리서기자는 5장에서 게으르고 어린 회중을 향해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라고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연고요,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할 수준에 이르지 못한 까닭이다.
이런사람들은 "듣는 것이 둔하다"라고 말한다. "둔하다"라는 말은 "뒤쳐진다"라는 말이다. 따라서 필자가 추천하는 듣는 자세는 베뢰아 사람들의 자세와 비슷하다. 그들은 들은 바의 반응으로 성경을 찬찬히 살폈으며 수동적인 참여자도 아니고 적극적인 참여자였다.

7.메시지 이해
설교자의메시지는 세 가지 범주 가운데 하나에 들어간다.
그것들은크게 정보 전달적이거나 설득적(당신에게 무엇을 믿거나 무엇을 믿지 말라고 강권하는)이지 않으면,

동기 부여적(당신에게 무엇인가를 하라고 권하는)이다.
따라서설교를 들으며 이렇게 자문해 보라.
"하나님께서는내가 이 메시지를 들은 후에 어떻게달라지기를 원하실까?"
당신은,"그분께서 무엇 무엇을(내가 전에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을 알기 원하신다"고 자답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정보 전달적이다.
독자는또 이렇게도 대답할 수 있다.
"그분께서무엇 무엇을(어떤 진리)믿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이 메시지는 설득적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반응도 가능하다.
"그분께서는무엇 무엇을(어떤 특정한 행동)하기 원하신다."
그렇다면이 메시지는 동기 부여적이다.
좋은마음을 가진 성도는 진리를 받아들일 뿐더러 진리가 삶과 녹아들기까지 쉬지 않고 고투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루터는 말하기를 "깨닫는다는 것은.. 받아들인 것을 조심스레 지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8.형편없는 설교에서 은혜를 얻으려면
-이단에가까운 설교인 경우
그럴경우 개인적으로 목사님을 만나 겸손하게 그들의 관심을 표현해야 한다.


-이단인경우
이때는장로들에게 이 문제를 말해야 한다.
당회가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속해있는 교단의 상회에 소원을 제출할 수 있다. 만일 교회가 독립 교단이라면 상황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 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많은 수의 회중을 모아 공동 의회를 갖도록 시도해야 한다. 만약 이 조치들 중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교회를 떠나야 한다.


-진부하고 판에 박힌 설교
먼저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그 목사님에게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와 친해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가 설교에 관한 강의를 듣거나 책을 사거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정적인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를 위해 기도하고 스스로에게 물으라.
"목사님이우리 모두를 잘 섬길 수 있도록 어떻게 내가 그를 도울 수 있는가?"

9.베뢰아 사람들의 자세
"베뢰아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17:11~12)
베뢰아사람들은 무비판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자주 붙드는 거짓되고 주관적인 표준들을 한번에 물리치고 객관적으로 주어진 성경으로써 모든 것을 검증하였다. 온당한 들음은 설교의 마지막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설교 사건 이후에 행해지는 일에까지 뻗어나간다.

10.정신을 딴 데 쏠리게 하는 것들
근본적으로신경을 다른 데 쏟게 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외부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내부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왜 집중하지 못하는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우리가 반드시 죄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 일부가 설교를 듣지 않도록 길들이셨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도 전에 아이들을 억지로 끌어다가 회중석에 앉히는 부모들은 그들이 설교를 듣지 않고 다른 짓을 하며 그 시간을 참아내기를 가르친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강론 시간에 데려 오는 것은 경건한 행동이 아니다. 우리는 느헤미야 8:1~8에서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가 율법이 낭독되고 강론되는 것을 들으려고 모였음을 본다. 다른 사람들은 집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오늘날 교회들이 현명하게 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맡겨졌을 것이다.
만일당신이 자녀들이 메시지를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기까지 설교를 듣지 못하도록 한다면 오랫동안 몸에 배인 산만한 습관은 기르지 않게 될 것이다. 게다가 회중석에서 보기 흉한 짓을 하거나 화장실로 달려가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 점이 가장 중요하리라 생각되는데, 그들은 어서 아이라는 "딱지를 떼고"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가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설교를 경청하는 것이 벌이 아닌 특권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설교를들을 때 직면하는 여러 집중 장애물들을 다 적어보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독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발견하도록 하라.
-이목록을 마음에 새기고 예배가 시작되기 전 이 훼방꾼들과 싸워 이길 수 있게 해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라.
-설교가시작되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이 말씀을 귀담아 들으라!"

11.설교자와 나
가득차고 열심 있는 청중은 훌륭한 설교의 대명사일 수 있다.
왜당신의 설교자가 설교를 못하는가 하면 그것은 무딘 회중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귀한 회중(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고 잘 받아들이며 열심 있고 기도하는)이 보내는 응원은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성령께서는 이 분위기를 설교자가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일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회중을 들어 설교자들이 회중을 더 잘 섬기도록 힘을 주게 하신다는 말이다.
1872년무디는 쉬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쉬고 있던 한 주일에 설교해 달라는 강청을 받았다. 교회는 냉랭하고 생기가 없어 보였고, 무디 역시 평소만 못했다. 그런데 설교를 하던 중, 그는 갑자기 좌중에 성령의 충만하심이 가득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거기에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인도되었다.
이런일이 일어난 비결은 무엇인가? 한 친구는 이렇게 전한다.
"그교회에는 두 자매가 있었다. 언니는 건강했고 동생은 몸져누워 있었다. 하루는 동생이 자기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가, 기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 주실 것을 기도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교회는 여전히 활기 없고 냉랭하기만 했다. 미국에서 무디의 집회가 큰 부흥을 몰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그녀는 장차 무디를 그녀의 교회에 보내 주십사고 기도를 드렸다. 그녀의 언니가 아침 예배에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누가 설교할 것 같니? 무디 선생님이 미국에서 오셨어." 그러자 병약한 동생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하나님께서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증거야" 그날 오후 그녀는 금식하며 기도했고 하늘로부터 불의 응답이 내렸다.


12.준행
준행없는 경청은 아무것도 아니다. 옛 격언은 이 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들어서잊어버리고
보아서기억하며
행하여깨닫는다.
그러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여호와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는다. 성경을 믿는 설교자는 언제나 회중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역설하지만, 슬프게도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하여는 태만에 가까운 침묵을 보여 왔다.
말씀을준행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준행은 성경은 계명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둘째로계명 자체가 어떻게 그것을 준행해야 할지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써서 살피는 일이 요구된다.
셋째로준행과 계획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될 때가 많다.
하나님말씀의 준행을 돕는 하나의 도구로 적절한 요점 적기를 권한다.


다음문제들을 적어두고 적용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하나님께서는내가 어떻게 변화하기를 원하시는가?
(믿는일이나 행동에서)
-나는어떻게 변화를 시작해야 할까?
-첫단계는 무엇인가?
-어디서,그리고 언제 시작해야 하는가?

13.하나님,이웃, 그리고 나
그리스도인에게는아무것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설교를 경청하는 일에 있어서도 메시지에서 무엇인가 유익을 얻으려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잘 섬길 수 있을까에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우리가본받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은 내어줌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주셨으니..나를 사랑하사 ...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자기를 주신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원수를 사랑하라.. 원수가 주리면 주고..." 등등의 구절을 보라.
하나님과다른 사람에게 가능한 모든 것을 드리고 주기 위하여 설교에서 최상의 것을 얻어내기를 배우라. 이것이 성경의 방식이다.

14.기술적인 문제들
설교를하는데 있어 기술적인 것들이 부족해 메시지를 듣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있다. 설교가 아무 목적도 없이 부산한 이야기들로 표류하고 있을 때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해야할 책임은 메시지에서 포착한 목적들 중에서 혹시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이 본문의 목적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어느날 한 여인이 알렉산더 휘트에게 말했다.
"저는당신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주에 그녀의 아들이 알렉산더에게 편지를 보냈다.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 앞으로 나왔습니다." 기술적인 면에서 설교는 좋을 수도 또 형편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런 설교를 능하게 하실 수 있다. 모든 회중이 있는 힘을 다하여 진실하게 들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노력을 통하여 전달되고 받아들여진 자기의 말씀을 통하여 능하게 역사하시는 일을 능사로 하심을 기억하라. 그분은 우리의 약함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그분이 언제나 우리를 선대하시므로 우리 설교자와 회중 역시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음에 감사하라!

15.결론
지금우리가 토요일 밤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받을 마음을 준비하는 일보다 교회 갈 때 무엇을 입을까 더 고민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비극인지 모른다. 설교를 수없이 소비하였지만 생활이나 사역에 별다른 변화가 없지는 않는가?
만일그렇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라. 복음적 설교자가 아무리 형편 없다고 해도 여호와 증인의 왕국회관에서 가르치는 '교훈하는 종'이나 몰몬교 성전에서 가르치는 주교보다 더없이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이럴 때면 당신의 특권을 상기하고, 감사하며, 마땅히 누려야 할 축복을 취하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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