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얻는 신앙은 우리 죄의 완전한 용서와 영생을 확보해주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신앙은, 예수님에게 향하는 것이며, 그것은 회개,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포함한다.

회개는, 죄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의를 추구하려는 마음의 헌신이다.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어떤 구원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일한 주님이요 구원자이다.

영생을 위한 우리의 소망은 어떤 다른 사람에게 두지 않는다.

신앙과 회개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시선을 떼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시고 우리들을 중생하도록 사역하실 때에만 우리가 신앙과 회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신앙( =믿음)

먼저 신앙을 보자!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신앙과 믿음이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통 영어 성경들은 헬라어 명사 pistis(피스트스)를 신앙(faith)이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고,

헬라어 동사 pisteuo(피스테우)를 믿는다(believe)로 번역을 했다.

따라서 believe는 신앙의 동사 형태이고, 신앙은 “믿는다”의 “believe”의 명사 형태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구원 얻는 신앙,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원자로서의 신앙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물론, 다른 종류의 신앙이 있다- 친구들에 대한 신앙, 자연의 규칙성에 대한 신앙 등- 이런 것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구원 얻는 신앙과 유사한 면과 다른 면들이 있다. 세상에서 우리들의 모든 행동과 세상에 대한 우리들의 모든 지식에는 일종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아침에 침대에서 내려왔을 때에, 우리는 바닥이 우리 발 밑에 있을 것이고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믿음 즉 신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인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취급하고자하는 것은 특별하게 성경적인, 신학적인 개념에서의 신앙 즉 특별한 신앙, 또는 구원 얻는 신앙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한다.

1) 구원 얻는 신앙에 대한 정의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신앙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분석을 하였다: 지식, 믿음 그리고 신뢰이다.

(1) 지식 :

이 문맥에서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 즉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대한 일종의 지식이다(롬 1:32, 10:14).

하나님에 대한 지식, 즉 인격적인 지식이나 또는 하나님에 대한 친분이 아니며 계시가 사실이라는 지식도 아니다.

단지, 이것은 계시가 말하는 것에 대한 지식이다.

신앙이 지식에 기초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이 어떤 증거도 없이 어떤 것을 믿는 것 또는 어둠에서 비약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며, 말씀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제공한다. 신앙은 때때로 우리의 감각의 증거를 반대하도록 한다.

마치 아브라함이 롬4:19-21( 고후 5:5)에서 했던 것과 같다.  롬 4:19-21

아브라함의 감각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증거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아들을 약속하였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를 갖기에 너무 늙었다. 그러나 가장 큰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가 자녀를 가질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는 그것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알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점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은 증거, 가장 큰 증거에 기초를 하고 있다; 또는 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다.

(2) 믿음 :

전통적인 분석에서 신앙의 두 번째 요소는 믿는 것이다(요 3:2, 행26:27).

즉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하는 것을 아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계시가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종종 동의(assent)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의는 중요하지 않다고 신학자들은 말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다른 말로 하자면, “네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너의 머리로서 무엇을 믿든지간에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동의는 참 신앙을 위해서 필요하다. 히11:6

그러나 동의가 참 신앙을 위해서 충분한가? 약 2:19절은 악마도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을 믿고 떤다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의 진리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진리에 동의를 하고서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는가?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사단이 어떤 면에서 성경의 모든 진리를 믿었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동의에 정도에 달려있다. 즉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희미하게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 생각, 감정을 좌우할 정도로 믿는다고 한다면, 그때에 참 신앙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가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의 신앙은 단지 동의라기 보다는 신앙의 세 번째 요소에 따라서 설명될 수 있다.

(3) 신뢰(Trust) :

신뢰는 지식과 동의를 포함한다.

이것은 좀 더 훌륭한 개념이다. 사탄은 많은 하나님의 계시, 또는 아마도 모든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지식이 그의 생각과, 행동과 행위에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간청하고 용서를 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하나님의 신뢰하지 않았다.

신뢰(라틴어로 fiducia 피듀시아)는 구원자와 주님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죄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을 신뢰한다(요3:16). 많은 성경구절은 이 신뢰를 다른 말로서 제시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요1:12), 예수님에게 가는 것으로(마11:28-30, 요6:37, 7:37), 그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으로(히7:25). 이 모든 것의 주요 의미는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위해서 그를 신뢰한다는 것이고, 즉 무엇 무엇을 믿을 뿐만 아니라 (believe that), 예수님을 믿는 것(believe in)을 말한다. 바로 이것을 사단이 못한 바이다. 예수님이 그의 백성의 구원자라는 것을 추상적으로 그들은 믿을 수 있지만, 그들은 구원을 위하여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신뢰의 두 번째 요소는 주님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자발적인 순종이 있어야 한다. 약 2:14-26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신앙은 살아있는 신앙, 순종하는 신앙, 일하는 신앙,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예수님이 주님”(롬10:9-10, 고전12:3, 빌2:11, 요20:28)이라는 것은, 우리가 본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약의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을 좌우하는 헌신이다.

참 구원 얻는 신앙은 지식,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때때로 믿는 것과 신앙에 대해서 약하게 말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요 8:31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과 대화를 하였다.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참 신앙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4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너의 아비 마귀의 자식이다”라고 하였다. 이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 기독교의 가르침에 동의를 하였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항한 사단과 같았다.

2) 구원 얻는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Saving Faith is a Gift of God)
이제 우리는 신앙에 대하여 좀 더 성경적인 가르침을 볼 준비가 되었다.

 

첫째로, 구원 얻는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엡2:8-9절을 보자.

요6:44절에서, 아버지께서 그를 이끌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님에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한다. 참으로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영적 깨달음을 가질 수 없다(요3:3, 마11:25-27, 고전2:14, 요일5:20). 은혜를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한다(롬1:18, 21,23,25). 성경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생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하는 것이다(행13:48), 또는 행16:14절에서 루디아에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복음을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능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능력이다(고전 2:4-5, 12-16, 살전 1:5, 살후 2:14).

3) 신앙과 선한 행위( Faith and Good Works)
다음으로, 신앙과 선한 행위들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우리가 신앙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갈2:16).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선한 행위들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신앙이 살아있고,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2:14-26), 어떤 행위들이 나타날 것이다. 선한 행위는 우리들에게 어떤 것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참 믿음과 함께 동반되는 것이다. 신앙과 행위를 비교한, 바울은 신앙은 사랑으로 행하여지는 것으로 이해를 했다(갈 5:6),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명령을 지킨다( 요14:15, 21, 15:10, 딛3:8). 그래서 행위는 신앙의 증거이다.

4) 구원에서 신앙의 역할 (The Role of Faith in Salvation)
우리는 신앙으로 구원을 받는다 또는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신앙은 우리가 하는 어떤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이지, 하나님이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또는 신앙은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한 가지 일인가? 확실히 그것은 아니다. 이것에 대해서 정확해야 하며, 신앙이 하는 것과 그것이 우리들을 위해서 할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첫 번째로, 신앙은 우리 구원의 근거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근거는 우리들로 하여금 영생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다.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한다. 우리가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용서와 교제를 얻을 만큼 선하지 않다. 심지어 우리의 신앙까지도 하나님에게는 값어치가 없다.

똑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구원의 원인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능력을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본 것처럼, 이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고 그를 신뢰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에서 나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일으킬 수 없다.

그렇다면 신앙의 역할이 무엇인가?

 

신학자들은 여기에 맞는 단어를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동의한 단어는 도구(instrument)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벌려야 하는 수단이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채워지기를 원해서 벌린 빈손으로 비유하고 있다. “영원한 반석”이라는 찬송가에서와 같이, 내 손에는 오직 내가 붙잡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전문적인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차라리, 신앙은 신뢰임을 기억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고, 그것에 의해서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우리의 신앙은 단지 그를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뢰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얻게 하는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신앙(Faith in Christian Life)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에서 일어나는 신앙에 대해서 주로 말을 하였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로 이끄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의 첫 순간에서의 신앙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신앙은 첫 번째 순간 이후로는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전 삶을 통해서 지속되고 하나님과 우리의 현재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 신앙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전 삶에 머물 것이다(고전 13:13).

구약의 위대한 성도들이 신앙에 따라 행동한 것을 여러 번 말하는 것을 히 11장에서 본다.

이 구절과 다른 구절에서, 신앙과 보는 것을 비교한다(고후 5:7). 이것은 다음과 같이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에 의한 삶은 어두움 가운데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히 11장에서 신앙의 영웅들은 그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언약의 복들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약속들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본 것처럼, 신앙은 지식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지, 감별력이 아니다. 그가 아들이 가질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였지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너무나 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다(롬 4:19-21). 그의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지식에 기초를 한다.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 그는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히 11장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도성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성취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그들이 눈으로 보는 증거보다 더 확실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이 삶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였다(갈2:20).

신약의 저자들은 종종 신앙을 두 가지 다른 덕, 소망과 사랑과 결합을 시키고 있다(고전 13:13, 엡4:1-5, 살전 1:3, 롬5:2, 갈5:5, 엡1:15,3:17, 6:23, 골1:4,23, 살전1:3,5:8, 딤전 1:14, 6:10-11. 딤후 1:13, 딛3:15, 몬1:5, 약2:5, 벧전1:21).

 

소망은 신앙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신앙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미래 성취를 향하도록 한다.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것이므로, 현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소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식으로, 일시적이고, 불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다. 신앙과 소망이라는 단어는 소망이라는 단어가 미래적인 것에 강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주님의 주권적인 속성이라는 단어로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신앙은 하나님의 권위를 향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소망은, 그의 말씀이 미래에 일어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통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소망이 없는 믿음, 또는 믿음이 없는 소망을 가질 수 없다.

세 번째 그리고 세 가지의 덕 중에서 가장 고결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세 번째 주권의 속성, 그의 인격적인 임재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사랑을 신앙으로서 우리들로 하여금 가장 깊은 개인적인 헌신을 일으키도록 우리 마음에 거하는 소망으로서 규정할 수 있다. 사랑은 전인(全人)의 헌신이다. 하나님은 마음과 뜻과 정신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랑은 헌신, 충성, 그리고 전념이다. 결혼에서,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서약할 때에, 우리는 동시에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바로 그 사람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서약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언약의 사랑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배타적이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하고, 다른 신들과- 돈, 야망, 자존심등과 같은 것과 병행해서는 안된다. 사랑은 또한 행동이다. 우리의 충성을 보여주는 어떤 것을 해야 한다. 결혼에서, 우리가 우리의 아내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쓰레기를 밖에다 버리는 것과 같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세 번째로, 사랑은 애정(또는 호의)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에,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가진다. 우리는 그와 함께 있는 것, 그녀의 아름다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즐거워한다. 결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쟌 파이퍼가 종종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서 기뻐하기를 원하신다. 그를 갈망하기를 원한다. 그를 달콤하게 그리고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사랑은 전념하는 것이고, 행위이고, 애정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규범적이고, 상황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으로 각각 나열한다.

6) 신앙의 필요성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을 다원주의라고 한다, 그들은 여러 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편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기회를 가졌으면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잠정적인 성도들의 구원을 주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사람도 예수님과 떨어져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는 나를 통해서는 아버지에게 나아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요14:6). 베드로는 말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요1:12, 3:16,18,36)라고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 날에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에 의해서 그리고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는 유일한 주님이고 유일한 구원자이다.

어떤 사람도 이 땅에서 예수님에 대한 구두적인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어려운 문제이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성도들은 뱃속에서 죽은 아이들과 말할 수 있기 전에 죽은 아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택함을 받은 어린아이들은 영아 때에 죽는다 해도, 자기가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에 따라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되고 구원함을 받는다. 말씀의 사역을 통한 외적인 소명을 받을 수 없는 다른 모든 택함 받은 사람들도 이와 같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0 장 3조).

 

이 진술은 성경적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눅 1:15절에서 “세례요한은 그의 어머니 태로부터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그의 어머니 뱃속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나타났을 때에 기뻐 날뛰었다고 하였다(41절). 눅 18:15절에서, 예수님이 그의 손을 어린아이에게 놓았을 때에, 그는 그들의 머리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놓은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이 너무 어려서 공개적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를 구원한다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것처럼, 그는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도 구원시킬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분류에 드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교리화 시킬 수 없다. 자연스럽게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 그런 부류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신적인 구원의 그물이 얼마나 넓은지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는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성령이 어떤 사람을 중생시킬 때에, 그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면, 그리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은 그가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사람 중에 주신 다른 이름은 없다고 행4:12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이다.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2. 회개( Repentance)

신학적 전통에서, 회개와 신앙은 회심(conversion)이라 불리운다.

구원은 신앙을 통해서 오지만 또한 회개를 통해서 오기도 한다.

우리가 구원의 수단으로서 오직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에 이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회개는 어디에 적합한가?

그루뎀( Grudem)은 회개를 “죄에 대한 마음 깊숙하게 느끼는 슬픔, 그것을 부인하고 그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하겠다는 진실어린 공약”으로서 정의를 내렸다. 신앙과 같이, 이 정의는 세 가지 요소를 가진다. 첫 번째로, 믿음이 지식을 기초한 것처럼, 회개도 우리가 죄를 지었고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기초한다. 그래서 회심의 첫 번째 요소는 슬픔이다. 성경에서, 거룩한 슬픔과 세상적인 슬픔사이에 차이가 있다(고후7:9-10, 히12:17). 세상적인 슬픔은 유다의 슬픔과 같은 것이다. 그는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룩한 슬픔은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혐오감이 넘치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망이 있다. 진정으로 죄를 인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고 기꺼이 용서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신앙에 동의, 믿음의 요소가 있는 것처럼, 회개도 포기를 포함한다. 동의에서, 내가 믿는다고 말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내가 동의를 한다. 따라서 포기는 슬픔을 넘어서는 행위이다. 그것은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동의를 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신앙이 예수님을 향하는 것처럼, 실제적으로 회개는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신앙이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인 것처럼, 회개는 죄를 대항하려는 인간적인 헌신이다.

따라서 회개와 신앙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로 돌아서지 않고서는 죄로부터 멀어질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은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번 돌아설 필요가 없다. 단 한번만 돌아서면 된다. 신앙과 회개는 같은 것이다. 하나는 적극적인 면에서 다른 하나는 소극적인 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먼저 일 수 없고,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 없으면 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 두 개는 동시적이며 총체적이다.

다음으로, 이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한, 그를 구원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한다(요 14:15).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그의 명령을 지키겠다고 전념하는 것이다. 즉 용서를 위해서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은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그를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고 구원자로만 영접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비 성경적이다. 성경은 주권적 구원을 가르친다. 구원받으려면, 우리는 주님으로 불러야 한다(롬 10:13). 바울은 말하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고백과 함께 시작한다.

주권적 구원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초기부터 주님에게 죄 없는 완전하고 순종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신앙생활 시작부터 예수님의 주권에 우리는 헌신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롬10:9-10, 고전12:3, 빌2:11).

1) 회개와 구원( Repentance and salvation)
이것은 신앙뿐만 아니라, 회개도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렇다 이다.

필요한 두 개의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과 회개는 똑같은 마음의 성향을 위한 두 가지 다른 이름이다. 신약 복음은 많은 구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회개를 위한 요구를 포함한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3:2, 4:17, 막1:15, 눅24:46-47, 행2:37-38, 3:19, 5:31, 17:30, 20:21, 고후7:10, 히6:1).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5.3)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회개가 죄에 대한 대가 지불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사역인 사죄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죄인들에게 회개가 필요함은 회개가 없으면 아무도 사죄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신앙에 대해서 똑같은 말을 하였다. 회개는 구원의 원인이나 근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밖에는 없다. 우리들로 하여금 용서를 받도록 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회개가 없으면 용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기의 죄에 붙어있기를 원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다.

2) 회개와 신앙생활
나는 전에 신앙생활은 신앙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의 삶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삶은 회개의 삶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했을 때에, 우리는 즉각적으로 죄없는 완전한 자가 되지 않는다. 참으로 우리는 총화 때까지 완전할 수 없다.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 고후7:10, 계3:19). 예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계 3:19).”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었을 때에, 베드로는 처음에 저항을 하였지만 나중에 모든 것, 그의 머리, 그의 몸도 씻어달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목욕을 한 사람은 그의 발을 제외하고는 씻을 필요가 없다고 대답을 하셨다, 왜냐하면 우리가 깨끗하기 때문이다(요 13:10).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죄로부터 온전하게 씻었다. 그러나 우리의 발에 팔레스타인의 길에 있는 먼지가 묻는 것처럼,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죄를 쌓는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 이 죄는 우리의 영생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죄와 함께 죽는다면, 우리가 지옥을 갈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매일 짓는 죄가 예수님을 한탄하게 하는 것처럼, 그것이 우리를 또한 슬퍼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서, 그것을 부인하면서 주님에게로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부터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을 때에, 우리는 그에게 가서 미안함을 표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고, 좀 더 잘할 것을 약속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보상을 할 필요가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한 잘못된 일을 매꾸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너를 용서할 수도 또는 용서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용서를 해줄 것이다. 우리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이라는 그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시다. 그는 우리의 매일 짓는 죄를 용서할 자격이 있다. 그는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짊어지었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까지도 말이다.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더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회개는 항상 교만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가를 그에게 고백하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간다면, 우리는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거룩한 것처럼 행세를 하고, 완전한 기독교인처럼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들을 비난할 때에, 마치 우리가 절대로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또는 비난이 오해임에 틀림이 없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우리 자신을 방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어떤 사람이 우리의 죄를 고소할 때에, 그 고소가 맞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반응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랬습니다. 매우 미안하다. 나를 용서해 달라” 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추면, 우리는 또한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출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와 같은 사람이 많을 때에 훨씬 더 좋아지게 될 것이다.

< 연 구 문 제>

1. 사단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신앙의 3가지 요소를 가지고 설명해보라
2. 구원얻는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 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라
3. 남의 돈을 떼어먹었을 때에 진정한 회개자가 밟아야 하는 과정이 무엇인가?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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