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이끄는 말

 

오직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다가 발견되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논리적인 모순들은 참으로 괴로움을 가져다 주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난제들에 대한 문제제기는 기독교를 무너뜨리고자 획책하는 이단의 무리들이 주로 연구하여 찾아내고 이용한다.

그리고는 문제가 될 만한 구절을 건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기쁨을 얻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미혹의 도구로 사용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내노라 하는 정통신학교에서 조차도 이러한 문제를 빌미로 성경은 오류가 많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정하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그럴 듯하게 들려지는 성경 오류성에 대한 질문들은 대부분 억지로 만들었거나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대충 생각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착각과 성경 이해의 부족이 대부분이다. 또 성경의 논리적 맥락을 무시하고 단편적으로 본문을 보거나, 현대인들의 보편적 과학지식이나 역사적 자료의 권위를 내세워 성경을 평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이런 난제에 대한 의심은 그 심각성이 의외로 크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든다면 출애굽기 6 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은 전능의 하나님으로는 나타났으나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 2장 4절부터 여호와의 이름이 등장하고 오히려 셋을 주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2:4) 라고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이러한 논리적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또 이런 난해한 문제가 한 두개 정도라면 믿는 마음으로 덮어두라고 권하여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심각할 정도로 많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어서 살펴본다면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할 때 나타나는 사건 중의 하나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사람을 진멸하는(수10:~) 전쟁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 때 적을 섬멸하는 시간을 더욱 연장하기 위하여 태양이 멈추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을 놓고 볼 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들 입장에서야 조금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었다고 믿어질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진정 태양이 멈추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과학적인 상식과 다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세상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사실도 모르시는 것인가? 또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자전하고 이를 통해서 해가 지고 달이 뜬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것인가? 하는 의심 때문이다. 이쯤되면 성도들은 구약성경은 천동설적 시각을 가진 우매한 옛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진리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또 하나만 더 예를 든다면 마태복음 1장을 살펴보면 구약 조상들의 이름들이 나열된다. 이 족보를 기록한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때까지 14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러라"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열된 사람들의 숫자를 잘 헤아려 보라. 14대, 14대, 14대라는 말과 사람의 숫자는 이렇게 해도 틀리고 저렇게 해도 틀릴 것이다. 겨우 1장도 벗어나지 못하고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 마태와 누가의 족보는 왜 또 다른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성경에 있으니 미혹의 무리들은 이를 약점으로 이용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들에게 맹목적인 사람들, 우매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조소를 보내고 비난을 서슴치 않으며 괴이한 자신들의 가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동안 믿고있던 막연한 성경에 대한 신뢰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술책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그들은 난해한 문제들을 질문한 뒤에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그럴 듯한 대안을 제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의 가설을 받아들이게 하고 또한 진리인 하나님의 성경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주님의 양들을 노략질하는 이리요, 약탈자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옛날 선지자로부터 사도들에게 성령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필사나 번역상의 오류는 있을지 모르나 전체적인 주제와 체계적인 중심 내용은 변함 없으며, 또한 절대적 진리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옛적 선지자들로부터 초대교회 사도들로 기록하게 하신 계시의 확증이요 진리의 터인 것이다. 이를 기초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확신과 기쁨으로 살아 왔으며 우리는 이를 지키고 전하며 이것을 바로 배우기 위하여 오늘도 꺼져가는 진리의 등불을 높이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라면 이제는 인간의 무능한 지혜로 어떤 부분만을 드러내어 마음대로 오해하고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함부로 오류라고 단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무지함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연구하지 않고 게을렀던 점을 탓할 것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은 지혜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나는 부분적인 난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성경전체의 윤곽을 가지고 해결하고자 한다.

 

이것은 또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부분적 본문에 대한 충실한 이해와 논리적 흐름을 파악하여 해결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막연하게나마 어렵기만 하던 난제들이 아무것도 아닌 낭설에 불과한 것임을 밝힐 것이다. 물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무오함에 더욱더 감탄과 감격을 맛보는 독자들도 생길 것이다.

 

이제 부터 성경의 난제들로 취급되는 시대 착오적 내용과 논리적 모순, 중복되는 사건의 의미, 성경에 나타나는 천동설적인 원시과학의 이해 등을 하나하나 변증과 설득으로 정리함으로 성경은 완벽한 진리이며, 잘못된 것은 오히려 어리석고 우둔하며 미련한 인간들의 소견임을 밝히려고 한다.

 

이 난제의 해결은 대부분 어떤 신학자들의 주장이나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성경 내용으로만 가지고 특별계시의 자증의 원리에 의하여 정리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사실 수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은 여러 개의 문서가 수집된 것이며, 역사의 전승이며, 후대의 편집이라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난제의 원인 제공자는 모두 이들 학자들이 발췌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또 보수주의 입장에서의 이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참하는 것이 앞서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현자적인 학자인양 행세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설명하겠으나 졸필의 실력임을 감안할 때 독자들의 넓으신 이해를 부탁한다.

Ⅱ. 시대착오(anachronism)에 대한 변증과 이해

 

1.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가?

출애굽기에서 살펴보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6:3) 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미 창세기 초반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창2:4) 라고 여호와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또 결정적으로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6) 라고 나타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알게 되고 불렀을까? 출애굽기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말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앞에서 말하는 내용과 뒤에서 말하는 내용이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구약 모세오경은 모세 한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흩어져 있던 옛적 설화들의 내용을 모아서 집대성한 하나의 문서임이 증명되며,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 착오적인 모순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게된다.

 

사실 지금의 기독교 신학계 일부에서는 성경이 무오류한 진리라는 대접을 받기는커녕 선지자 모세에 의해서 성령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 조차도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문제제기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해결하여 나갈 것이다. 제일 먼저 여호와의 이름에 관한 난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하여 밝히고자 한다.

 

1) 여호와의 이름은 창세기에서 왜 나타나는가?

창세기를 비롯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기록한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임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창세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내용은 모세가 직접 경험한 내용이 아니라 순수한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된 이 세상 창조의 비밀과 조상들의 역사를 성령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선택한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 기록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바로 창조의 이유와 인간에게 복으로 "삼대언약" 을 주시는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데 기록의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창조 사역의 주인공인 전능자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계시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이다. 또 이 언약은 아담을 거쳐 셋으로,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으로, 이삭과 야곱을 거쳐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언약하신 것을 이루어 주실 차례가 된 것이다. 전능자 하나님이 창세기 1장28절에서 인간에게 삼대언약을 통하여 복을 주신뒤에 이때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지칭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2) 창세기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여호와의 이름은 성경대로 본다면 창세기에서 벌써 사람들에 의하여 불리워지고 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25) 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여호와의 이름은 이미 아담을 비롯한 창세기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고 부르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사건이 있기전에 사람들 입에서는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살펴볼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이다.

 

이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는 "스스로 있는 자" 라는 절대자의 상태를 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대부분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질문하면 "스스로 있는자" 라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절대자의 상태 개념만 이해하고 있다.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는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아담에 의하여 태어난 사람들 중에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과 사건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가인과 아벨 중 하나님은 아벨만 선택하신다. 이것은 가인으로 하여금 범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벨의 죽음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의 계보가 단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창조 후에 복으로 주신 언약인(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는 삼대언약이 무너지는 듯한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대부분 전능자의 의미를 담고 있을 때 사용되어 진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내용 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전능자로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전능의 능력으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복으로 첫 사람 아담에게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여,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시는 것이다. 이때 언약하신 내용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은 스스로 복으로 언약하여 주신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는 분이 될 것이다.

 

생육번성할 것을 언약하신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가인의 계보는 전승되게 하고, 선택하신 아벨의 계보는 끊어진 상태대로 종말을 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담에게 언약하신 내용을 잊지 않고 아벨 대신 셋을 주신다. 이 뿐아니라 셋은 에노스를 낳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없이 성취되며 계보가 이어져 가는 것이 확증되는 것이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나, 아벨의 죽음과 관계없이 자신이 복으로 언약하여 주신 것을 꼭 이루어 주시고 이를 보고 확인한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즉, 언약할 뿐 아니라 그 세우신 언약대로 이루어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이 여호와이심을 인간에게 알리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박용기 목사는 말하기를 "구약의 핵심적인 중심내용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즉, 여호와는 고유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뜻은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 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로 계시하시려고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섭리를 하시는데, 그 성취 섭리의 사건 중 하나가 셋을 주심으로 아담의 계보를 끊어지지 않게 하며 번성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서 언약하시고 성취 하시는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3) 시대착오와 출애굽기의 전능하신 여호와의 이름

이 출애굽 사건중에서 수많은 구절들 중 단 한 구절에 불과한, 그것도 한 부분만 잘라서 문제화한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은 마치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부를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직접 알리지 않았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출애굽기의 이 내용 앞에서 보면 창세기 전체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불려지고 있다.

오히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알리지 않았다" 는 대상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국한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즉, 아브라함 전에 노아를 비롯한 홍수 이전의 사람에게는 알려주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한 번 잘 읽어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아니하였고……" 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이 시대는 마구잡이로 노아 홍수 이전의 시대와 혼동하여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잘 생각하여 보라. 도대체 성경이 시대착오를 일으켰는가? 아니면 성경을 읽는 학자들이 시대착오를 일으켰는가? 그러나 문제는 또 있다. 하나님은 사실은 노아를 비롯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여호와로 이름을 알려 주시기도 하고 불려지기도 하셨다는 사실이다.

 

노아는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창9:26) 라고 함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명백히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인간이 타락하더라도 하나님은 노아를 남기셔서 생육 번성의 언약을 이어 가시며 아라랏 산에서 노아의 번제를 받으시며 또 다시 아담에게 했던 삼대언약을 재확인하여 (창9:1) 주셨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믿어지지 않던 방주의 사건을 통한 노아 가족의 구원은 언약한 대로 이루어주신 전능자 하나님을 바로 여호와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 이전까지 불려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게도냐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실 때는 무조건적이었다. 그냥 이유없이 부르셔서 언약하시기를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 라고 하셨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은 아직 자신이 여호와임을 알리지 않고 전능자로만 나타나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언약대로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땅 주신다는 언약을 이루어 주심을 확인한 뒤에 그는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12:8) 라고 밝힌다.

즉 언약대로 지시한 땅에 도착하게 된 뒤에 부르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여호와의 이름은 언약할 때는 전능자로 나타나시고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로 불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다 분명한 것은 애굽에서 죽을 위기에서 구출되어 오히려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돌아온 뒤에 다시 한번 강조된다.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13:4) 하고 나오는 것이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언약하고 그것을 이루어 주심으로 불려지는 특징이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 뒤를 이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여전히 여호와로 알리기도 하시고 불려지기도 하신다. 오히려 이삭에게는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창26:24) 라고 말함으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했던 언약이 계승되고 있음을 명백히 한다.

 

이 언약은 또 야곱에게도 계승되어"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창28:13)라고 하여 언약의 계승은 물론이고, 야곱에게 재확인까지 시켜주며 하나님은 여호와임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출애굽기에서 이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알려 주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이미 전부터 불려지고 있으나 이 이름을 아브라함에게 먼저 알린 것이 아니라 전능자로 나타나 언약부터 하셨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자로 나타나시고 아직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언약을 했다는 뜻이다.

 

이제 본문을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 였더니" (출6:2) 이 구절을 잘 보라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그런데 전능의 하나님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나타났으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아니하였고, 그 상태에서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무조건적으로 언약부터 해 주셨다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전혀 알려준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름을 알리기 전에 전능자로 나타나 가나안 땅 주기로 언약부터 해 주었다는 말인 것이다. 이 언약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아담에게 언약하신 대로 셋을 주심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불려지듯이 아브라함에게도 언약만 해 주실 때는 전능자로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가나안에 도착해서는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되듯이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는 입장에서 조금더 논하여 보도록 하자. 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가?바로 그렇게 그들에게 전능자로 나타나서 이름을 알리지 않고 언약하고 그 언약 중에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언약이 있다는 사실이다. 또 이 언약을 이제 이루어 주심으로 민족적으로 여호와로 계시되고 불려지게 될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다음에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너무도 분명한 민족적인 언약을 기억하심을 확증하여 준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네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사백 년 동안 종살이 할 것, 그리고 그 다음에 구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다스리게 해주실 민족적인 언약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15:13∼16) 바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이 민족적인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루어 주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당연히 이 언약대로 이루어 주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여호와인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애굽의 압제에서 탈출하게 됨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출6: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알아라' 라는 명령이 아니라 '알아져 갈 것이다' 라는 점진적 언약성취의 하나님 의지이다.)

 

이제 이 문제를 결론적으로 간단히 정리하여 본다면

첫째,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는 언약하시고 이루어 주심으로 비로소 여호와라는 이름이 불려진다는 사실이다.

 

둘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여호와로 알리지 아니하였고' 라는 말은 이름을 완전히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아직 이름도 알려 주기도 전에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먼저 언약부터 하셨다는 뜻임이 확인된다. 물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이 언약 뒤에 자신이 여호와임을 개인적인 성취로 알게 해 주시고 이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렇게 조상들에게 언약대로 이루어 주심으로 여호와의 이름이 드러난 것처럼 이제는 이스라엘 모든 민족에게 언약했던 것을 기억하며 성취하실 때가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여호와인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언약만 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성취해 주심으로 여호와임이 알려지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를 가지고 성경의 오류성을 말하려는 사람들은 다시 한번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을 재점검해 볼 것을 권한다. 끝으로 이러한 구약사건의 이스라엘 민족의 언약과 성취사건의 예표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까지 조명해 볼 필요가 있겠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은 언약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복으로 언약하신 삼대언약을 인간의 타락과 관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또 예수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중생되어, 지체가 되어, 자라져 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언약대로 이루어주신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이 너무도 분명하다.

 

이제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신 언약성취로 말미암아 더욱더 분명하게 이루어 주실 것이 확증된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2. 창세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있은 후에 기록한 것인가?

이 문제는 창세기의 기록이 이스라엘 왕이 통치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이 기록했다는 증거 자료로 통용되는 구절이다. 즉 왕이 있기 전에 사건을 말하는 것은 마치 후대에 사람이 과거를 말할 때 사용하는 언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이 이러하니라 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벨라가 죽고 보스라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고" (창36:31∼33)

 

위의 구절만 읽어보면 마치 이스라엘의 왕이 있기 전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유대나라에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는 왕들의 족보를 후대사람이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 편집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록자는 모세가 아니라 최소한 사울을 왕으로 본다고 하여도 사무엘 이후의 어떤 사람이 편집하였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 때(창12:16) 바로 대신과 바로궁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 바로를 왕으로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창세기 14장에는 각국 이방족속의 왕들이 나타나는 것이다.따라서 이방은 일찍부터 왕이 다스리는 국가가 설립되었으나 이스라엘은 그 훨씬 후에 다윗에 의하여 왕이 서게 되는 것이다.

 

또 이 글을 기록하는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선지자이다.

그가 왕의 개념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 애돔땅을 다스렸던 왕들을 열거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인가?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 않는가? 오히려 이방들은 사람의 힘과 권세에 의하여 민족을 다스렸으나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왕이 없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인 것이다. 당연히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이라는 말을 모세가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또 이보다 훨씬 전에도 이방에는 왕들이 존재했으며 그들의 족보를 기록할 때에 다른 곳은 왕들이 있으나 이스라엘 민족은 왕이 없다는 뜻이 된다.

 

3. 단이라는 지명은 왜 중복되는 것인가?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자 삼백 십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창14:14) 라고 아브라함 시대에단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그런데 단이라는 지명이 그 이후 훨씬 뒤에사사시대에 붙여지지 않는가? 즉, "이스라엘의 소생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사사기18:29)"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사사시대에 지명이 정해졌으니까 창세기의 아브라함 사건은 사사기 이후에 기록 또는 첨가되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하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전에 일단 먼저 묻고 싶은 것은 전라도 광주와 경기도 광주는 똑같은 장소인가? 만약 단이라는 지명이 이스라엘 나라에 두곳이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성경지도를 구해서 살펴보기 바란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진출한 "단" 은 요단강을 기점으로 위쪽으로 하여 갈릴리 호수를 지나 훨씬 위에 붙어 있다. 그런가 하면 사사기에 정해진 단지파의 영토인 "단" 이라는 곳은 요단강을 기점으로 아래쪽으로 한참 내려가 사해바다 옆에 유다와 베냐민 또 에브라임 사이에 있는 곳이다.

 

또 성경에는 친절하게도 "이스라엘의 소생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이름은 라이스더라"(삿18:29) 라고 단으로 지명이 바뀌기 전의 이름도 기록해 주고 있는 것이다.

 

4. 가나안인과 블레셋인 또 청동기 시대는 역사적 자료가 옳은가?

창세기에 보면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12:6) 라고 나타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왜냐하면 가나안 사람은 가나안 땅 정복 후에 등장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또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창26:8)" 라고 창세기에 벌써 블레셋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가?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블레셋인은 BC 1200년 전에는 팔레스틴 지방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가의 정설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더하면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두발가인은 동철로 가장 날카로운 기구를 만듦)"(창4:22).

이때는 BC 4,000년 전으로 이 때는 청동기를 알지 못하던 시대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참으로 어이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자료에 의한것이 성경의 증거보다 진리라는 것이다. 후대에 새로운 고대 문서가 등장하면 언제든지 바뀌는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진리인 성경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가? 위에 열거된 문제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에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창9:18). 이미 노아 홍수 바로 후에 가나안인은 등장한다. 어떻게 사사시대라는 말인가?또 블레셋인도 마찬가지다. 사사시대 이전인지, 후인지는 성경의 말이 옳은지 아니면 학자들의 말이 옳은지를 판단하기를 바란다. 청동기 시대도 마찬가지다. 노아 홍수가 전세계를 대상으로 일어났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노아 홍수 이전의 연대를 어떻게 비교한다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성경의 증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5. 신명기는 요단강 이편이냐? 저편의 기록이냐?

이 문제는 기록자가 요단강 이편에서 기록했는가, 아니면 저편에서 기록했는가 하는 문제로 그 말 한마디에 모세오경 중의 신명기가 후대에 기록했는가, 모세가 생시에 기록했는가 하는 판가름이 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신1:1) 이 말을 보면 신명기 기록자는 모세가 아라바 광야에서 무리에게 선포한 것을 기록한다는 기록전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록전의 모세가 무리에게 선포한 곳이 "요단 저편"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볼 때 기록자는 이미 요단강을 건넌 후에 건너기 전의 상황을 설명하며 그때 선포돤 것을 모세가 죽은 후에 편집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신명기를 기록하고 있는 기자는 요단 서편, 가나안 땅 안에서 이 신명기를 기록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는 서둘러서 성경지도를 찾기 바란다. 성경 지도가 없는 분도 성경에 부록으로 붙어있는 지도만 찾아도 충분하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후 광야노정을 찾기 바란다. 그 다음 아라바 광야의 위치를 확인하라. 대부분 성경지도에는 아라바 광야보다 바란 이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그래도 충분하다. 대강 어디쯤인 것만 확인하면 되기 때문이다. 조금 상세한 지도는 하세롯이라는 지명도 나와 있다.

 

그 다음 위치가 확인된 분은 본인이 직접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전에 모세가 선포했던 신명기를 기록한다고 생각해 보라. 즉 가나안 땅을 기점으로 바란 광야를 지칭할 때 요단강 이편이라 할 것인가 저편이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다 했으면 이제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세가 되어보라. 이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 동편에 도착하여 마지막으로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보면서 총정리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 신명기를 기록해 보라. 자신이 선포했던 장소인 바란 광야를 요단 이편이라 해야 옳은가? 저편이라 해야 옳은가?

 

단, 주의해야 할 것은 저편이라는 말은 원거리를 말하는 것이지 이쪽 아니면 저쪽 하는식의 근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 주의하기 바란다. 이편이냐 저편이냐 하는 뜻과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는 말은 조금 다른 뜻이다. 또 아라바 광야는 정확한 어떤 장소가 아니라 넓은 범위를 말한다.

Ⅲ. 논리적 모순(inconsistency)에 대한 변증과 이해

 

성경을 읽다보면 앞에서 말한 내용이 뒤에 나오는 내용과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된다. 예를 든다면 창세기 46장 27절에서 애굽에 도착한 야곱 가족의 합은 "칠십 명"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 14절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야곱의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 이럴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창세기 15장 13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실 때 "네 자손이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괴로움을 당할 것" 을 언약하신다. 그러나 출애굽기 12장 41절에는 "사백 삼십 년이 마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라고 "사백 삼십 년" 만의 애굽 탈출을 말하고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성경은 앞뒤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의 진척을 위하여 한 가지만 더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사무엘하 24장에서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라고 여호와 하나님이 인구조사를 하도록 하신다.

 

하지만 역대상 21장에서는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다윗의 이스라엘 인구조사는 누가 하게 하신 것인가?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상고할 때 그 내용이 잘 이해가 가고 무슨 말인지를 깨닫게 되면 모든 성경은 위로와 평강을 누리도록 한다. 하지만 지식적으로 무장된 신학적 학문의 열의는 가끔 의문시 될 만한 문제 제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지금 밝히는 내용들은 주로 장로교 신학교 (광나루)에서 신학생들을 상대로 하여 성경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한 내용들이다. 또 이중에는 직접, 간접적으로 접한 난제도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물론 문제 자체가 단편적이고 사건 중심적이므로 무리가 없을 것으로 여긴다.

 

1.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

이 문제 제기는 신명기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율법에는 여호와의 총회(유대인의 예배 모임)에 사생자는 참석할 수가 없으며, 또한 그 후손은 십대 까지도 참석하지 못할 것을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사기에서 입다는 사생자로서 이스라엘을 이끄는 사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총회에 참석하는 것도 불허하는 하나님의 율법은 어찌하고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사사로 세움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신명기 23:2 )

 

그러나 우리가 먼저 점검할 것은 이러한 성경의 논리적 맥락을 밝혀 주려는 자세보다도 항상 문제 제기가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점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온당한 질문이 아닌 경우는 너무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지금 밝히려는 문제도 국내의 유수한 신학교에서 수많은 신학생들이 점검한 내용이지만, 또 수많은 교수진들이 검토한 내용이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전혀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 삼은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필자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독자들이 직접 신학생들에게 질문해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무엇 때문에 문제 성립이 불가능한가? 그것은 사생자(私生子)라는 뜻에 대한 원어는 고사하고 그 단어의 뜻을 모르고 제기한 질문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모를리는 없겠으나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설마 하시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국어 대사전을 살펴보면, 사생자(私生子)란 법률상 부부가 아닌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말한다. 즉, 아비가 없는 자녀인것이다.

 

성경의 신명기 내용은 간음한 자에 대한 율법을 정하신다.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만나 그를 붙들고 통간하는 중 그 두 사람이 발견되거든 그 통간한 남자는 그 처녀의 아비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 처녀로 아내를 삼을 것이라 그가 그 처녀를 욕보였은즉 평생에 그를 버리지 못하리라"(신명기 22:28 ~ 29).

 

그러나 이 경우는 간음 현장이 발각이 났을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만약 발각이 나지도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혼인한 적 없는 여자가 남편도 없는 아이를 낳게되며 이러한 아이를 사생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에게 반율법적인 범법 행위로 태어난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사기에 등장하는 입다 사사는 이것과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 오려고 돕 땅에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길르앗 장로들이 대답하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게 함이니 그리하면 우리 길르앗 모든 거민의 머리가 되리라" (사사기 11:1 ~ 8 )

 

입다는 비록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본처의 아들들에게 천대를 받기는 했지만 엄연히 아비가 길르앗이요 어미가 있는 것이다. 혹시 지방 지명을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길르앗이라는 지명도 있고 입다의 아버지 이름도 길르앗이다. 이러한 경우 사생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서자(庶子)라고 적혀 있다. 물론 국어사전을 인용하였으나 히브리어 원어로도 분명히 사생자라는 단어는 없으며, 영어 성경에도 마찬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는 처음부터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만약 서자가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솔로몬은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유사한 문제를 하나만 더 게재하고자 한다. 이 문제도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에 관한 문제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쓸데없이 문제를 만들어 글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근거를 가지고 수많은 학생을 대상으로 교수에 의하여 제기된 문제들 임을 알아 주기를 바란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을 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신명기 18:9 ~ 11) 라고 율법에 의하여 정한바 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에 입다는 전쟁에 나가기전 서원하기를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맨 처음 나오는 사람을 번제로 드릴 것을 서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서원에 의하여 번제로 드리게 된다. 하지만 위에 기록한대로 하나님은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못하신 분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사사인 입다가 이를 행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문제도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문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방인들이 행하는 복술, 요술에서 행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즉, 불 속을 걸어다니는 요술을 한다던가, 불 가운데를 통과한다던가 하는 요술이나 복술을 금지하신 것이다.

서원을 금지한 것도 아니요 번제를 금지한 것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문제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과연 성경적 사상인가? 하는 점을 문제 삼는다면 장문의 문제 제기와 놀라운 성경적 해답을 얻게될 것이다. 물론 그것도 성경신학적 해답이 될 것이다. 이 문제는 기회가 있다면 차후에 다루어 보기로 한다.

 

2. 애굽에 도착한 야곱의 가족은 칠십명인가? 칠십오명인가?

성경에는 여기저기에 숫자 파악이 가끔 있다.사실, 필자는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를 상징적으로 혹은 무슨 특별한 비밀이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데 반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많은 성경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러한 숫자에 관한 문제 제기가 많다. 따라서 이번에는 주로 숫자에 관계된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된 뒤에 우여곡절을 거쳐 야곱의 온 가족은 애굽에 도착하기에 이르른다.

그리고 도착한 인원은 창세기 46장 8절부터 27절까지 명단과 인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문을 다 기록할 수는 없고 간략히 결론만 밝힌다. 야곱과 도착한 인원 육십 육명, 요셉과 요셉의 아들 두 명을 합하여 모두 칠십 명이 된다. 여기서 자부는 모두 제외된 상태이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이른 자는 야곱의 자부 외에 육십 륙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나온 자며 애굽에서 요셉에게 낳은 아들이 두명이니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의 도합이 칠십 명이었더라" (창세기 46:26 ~ 27 ) 그러나 사도행전 7장 전편에서 스데반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부터 이삭 야곱을 거쳐 모세와 다윗까지 그 역사를 바리새인들 앞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밝히는 내용을 보면 야곱에 관한 설명 중 그 가족의 수를 거론하게 된다.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사도행전 7:12 - 14 )

 

창세기에서는 칠십 명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어떻게 사도행전에서는 칠십 오명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완전한 논리적 모순이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혹자는 제외된 자부들의 수를 계산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더욱 모순이다. 왜냐하면 베냐민을 제외한 모든 아들들이 자신의 아들들 즉, 야곱의 손자를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부를 더하면 팔십명 이상이 되어야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도 알고 보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말하는 가족은 야곱이 기준이 되어 애굽에 "도착한 온 가족", 그리고 미리 애굽에 살던 요셉을 포함한 인원을 말한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인원은 도착한 인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이 기준이 되어 "초청한 인원" 인 것이다. 즉, 요셉은 칠십 오명을 초청하였으나 정작 도착한 인원은 요셉과 아들까지 포함하여 칠십 명인 것이다. 당연히 팔 명의 인원은 요셉이 애굽에 팔리기 전 부터 야곱이 애굽에 도착하기까지 어떠한 변고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상세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변고가 있음을 밝히는 내용은 있다. "유다의 아들 곧 엘과 오난과 셀라와 베레스와 세라니 엘과 오난은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 또 베레스의 아들 곧 헤스론과 하물이요" (창세기 46:12 )유다의 아들들 중에서 두 명이 죽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므로 요셉의 초청 인원과 도착 인원이 서로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며, 창세기의 도착 인원과 사도행전의 초청 인원을 논리적 모순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더욱 자세히 성경 읽기에 전념하여야 할 것이다.

 

3. 애굽에서의 종살이는 사백 년인가? 사백 삼십년인가?

이 문제도 마찬가지로 숫자에 관한 문제 제기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언약하여 주시기를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하고 언약을 하여 주신다.

 

이 언약이 있은 뒤에 아브라함이 증거를 보여주시기를 요구한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창 15:8).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창 15:9) 라고 번제의 제물을 준비하실 것을 지시하신 뒤에 아브라함이 준비를 마치자 증거의 언약을 하신다. 그 내용은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2 - 14 )

 

이상에서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사백년을 이방의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을 언약하신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한 기한은 사백 삼십 년인 것이다. 이것을 확인해본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출애굽기 12:40 - 42 )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나님의 언약은 사백년,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거주한 기간은 사백삼십년, 과연 어떻게 된 일인가? 하나님의 언약이 빗나간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그러나 이 문제 성경기록의 문제를 거론할 이유는 없으며 역본학이니 사본학이니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방의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는 종살이 기간을 사백 년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기간은 야곱의 모든 가족이 애굽에 도착한 때로부터 탈출하는 기한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즉, 야곱이 애굽에 종으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아들을 총리로 둔 섬김을 받는 입장에서 애굽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요셉이 그 권한을 잃지않은 삼십년을 종살이의 기한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정확하게 언제부터 요셉이 권력을 잃고, 언제부터 종살이라는 명확한 표기를 하지 않음으로 이것이 중요 문제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4. 다윗왕 시대의 인구조사

다윗왕은 재위 중에 인구조사를 실시한다. 그런데 이 인구조사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엄청난 저주를 이스라엘에 내리는 것이다. 인구 조사한 것이 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일인가? 라는 의문이 발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카폐(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통해 성경공부 하기를 권한다.

또한 하나님이 인구조사를 하도록 하시고는 무엇 때문에 저주를 내리시는가 하는 점을 의문시하는 분도 공부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관심은 성경에 나타나는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이 사무엘하의 내용과 역대상에 기록한 내용이 엄청나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에 관한 문제 해결이다. 이 문제는 달라도 조금 다른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이나 성경의 무오성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곧잘 이 문제로 성경의 무오성을 반박한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 (사무엘하 24:1 - 2 )이것은 사무엘 하에 나타나는 인구조사의 내용인데 그 원인자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밝혀 놓고 있다.

 

하지만 역대상을 살펴보면 다르게 나타난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두목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서 내게 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요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 (역대상 21:1 - 3 )어떻게 된 일인지 역대상에서는 사단이 그 원인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서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근본 원인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무엘하는 근원적인 원인자를 말하는 것이라면 역대상에서는 직접적인 원인자를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결과를 살펴보면 양자가 다같이 하나님의 진노에 놓이게 됨으로 그 증거가 된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이렇게 원인자에서의 차이점이라면 간단한 문제이겠으나 원인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건 내용이 서로 너무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확인한 바 분명히 엄청난 차이가 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세 가지 중의 선택에서 칠년 기근이 들 것인가? 삼년 기근이 들 것인가? 하는점도 다르며, 죄사함을 받기위한 번제단을 산 타작마당과 그 대상자의 이름이 완연이 다르며 그 타작마당을 산 가격도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서로간의 차이점을 볼때에 성경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않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것인가? 필자는 솔직히 이문제는 앞으로 더욱 확실한 자료와 많은 역사적 증거를 수집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다만 본 지면을 통하여 밝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문제는 다윗의 인구조사가 한가지 동일한 사건으로 볼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다윗의 제위 사십년동안 최소한 두 번의 인구조사가 실행된 것이며, 결과는 두번 다 정확한 계수는 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의심한 관계로 인하여 진노만 받게되는 결과를 낳는다.

 

혹자는 인구 조사의 어려움을 들어 불가능함을 말하는 자도 있으나 약 10개월 동안이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사십년 제위동안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두 번의 인구조사가 실행되었다는 증거들

​첫째, 인구조사의 숫자가 사무엘하에서의 계수와 역대상의 계수가 두 지파를 제외한 상태에서도 오히려 더 많다는 사실이다. 즉, 역대상 사건은 기간이 상당히 경과한 뒤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둘째, 계수자 요압이 사무엘에서는 별다른 반항이 없으나 역대상에서는 노골적인 반항과 대강의 숫자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타작마당의 가격이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즉, 역대상에서 사들인 땅은 사무엘하에서는 비교가 안되는 커다란 땅의 크기를 가늠하게 한다.

 

넷째, 사무엘하는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끝 마친 뒤에 다른 내용이 없으나 역대상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들인 뒤에 다윗은 곧바로 성전을 짓기위한 준비작업에 돌입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내용은 서로 다른 사건이며, 사무엘하는 이스라엘을 교육하기위한 목적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의 조치이며, 역대상은 사단의 계략을 바꾸어 오히려 성전건축을 준비하게 하시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이러한 인구조사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기를 요압에 의한 인구조사는 분명한 숫자 파악을 끝마치지 못했던 사건임을 밝혀 주고 있다.

 

당연히 인구조사의 목적이 이스라엘의 인구숫자 파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섭리를 나타내는 데에 두 가지 사건의 목적이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의 이십세 이하의 수효는 다윗이 조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사람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음이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조사하기를 시작하고 끝내지 못하여서 그 일로 인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한지라 그 수효를 다윗 왕의 역대지략에 기록하지 아니하였더라" (역대상 27:23 - 24 )

Ⅳ. 중복(doublet)되는 사건과 명칭의 의미적 분석

 

성경을 살펴보다 보면 동일한 사건이 반복하여 나타나면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있다. 즉, 사건이 서로 동일한 사건임에는 분명하지만 사건을 둘러싸고 나누어지는 대화나 결론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를 보게되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사복음서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을 사복음서의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본문을 통하여 사복음서에 나타나는 다양성이나, 혹은 통일성을 밝히려는 의도는 아니다.

단순한 문법적인 해석을 하려는 것이며, 동일한 사건이 서로 모순되거나, 혹은 문맥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마태복음의 계보(系譜)는 모순인가?

동일한 사건에 대한 동일한 성경의 기록이 서로 모순된다면 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무오성에 대하여 심각한 도전이 된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이러한 반론에 답변은 커녕 잘못 판단하면 찬동을 할 우려성이 있다.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고 가장 난해하게 여기는 몇가지 문제만 살펴보기로 한다.

 

1) 마태복음 계보(系譜)의 문제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系譜)를 살펴보면 아브라함때로부터 다윗까지, 다윗 때로부터 바벨론 포로기까지, 바벨론에서 이거 후 예수 그리스도 까지의 계보가 나열되어 나온다. 그런데 조상들에 대한 계보를 정리한 마태는 결론으로 말하기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대러라"(마 1:17) 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이름이 나열된 숫자를 파악해보면 이것이 서로 맞지 않는다, 즉, 14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이름을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 -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아미나답 - 나손 - 살몬 - 보아스 - 오벳 - 이새 - 다윗 14명

(다윗) - 솔로몬 - 르호보암 - 아비야 - 아사 - 여호사밧 - 요람 -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 히스기야 - 므낫세 - 아몬 - 요시야 - 여고냐 중복된 다윗제외 14명

(여고냐)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아비훗 - 엘리아김 - 아소르 - 사독 - 아킴 - 엘리웃 - 엘르아살 - 맛단 - 야곱 - 요셉 -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중복된 여고냐 제외 13명

이상을 살펴보면 분명히 사람 숫자와 마태가 말하는 14대라는 규정은 서로 모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성경 기록의 실수인가?

 

2) 마태복음의 계보(系譜) 이해

이 문제는 사람의 명수는 13명으로 나타나고 마태가 말하는 대수는 14대로 나타나는 앞의 설명과 뒤의 결론이 서로 다른 숫자상의 모순이다. 그리고 마태가 말하는 대수와 사람의 명수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들어서 성경의 모순이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먼저, 사람의 명수와 대수가 서로 동일한 뜻을 가지는 말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보(系譜)대수는 곧, 사람의 숫자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14대조 할아버지라고 하면 본인을 기준으로 하여 위로 14번째, 선조 할아버지라고 쉽게 생각한다. 이러한 오해에서 발생하는 문제 제기인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숫자와 대수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사람의 명수는 태어나는 순서대로 계보의 기록된 숫자를 파악하는 것이지만 대수란 그 가계(家系)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커다란 사건을 기준으로 하여 대수가 새롭게 정하여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든다면, 이성계라는 인물은 "고려" 라는 나라에서는 이씨 가문의 한 자손이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 이라는 나라의 "태조" 가 된다. 즉, 고려라는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신하로,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태조로 그 위치가 바뀌어 버린것이다. 그래서 그는 고려의 신하로서는 몇 대째 자손이겠지만 동일한 인물이 조선의 왕으로서는 태조가 되는 것이다. 대부분 대수를 정할 때는 이러한 커다란 사건을 기준으로 하여 새로이 가계(家系)대수를 정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겪은 커다란 사건도 대수의 전환점이지만 장소의 변경도 대수의 전환점이다.

 

예를 든다면, 필자의 성을 따르면 필자는 "진주 강(姜)" 이라는 "본(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이 진주라는 곳에 정착하여 가계(家系)를 번창시키기 시작한 장소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주라는 고을에 정착한 조상도 틀림없이 그 이전에 어느 장소인가에서 옮겨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진주 강씨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말하는 명수와 대수를 비교하여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고 이해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질문이며 이해인 것이다.

 

다시 한번 대수와 명수는 그 차이점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마태복음의 계보(系譜)를 살펴본다면 다윗이 왕이 된 기준점,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간 기준점, 돌아온 기준점들이 정확하게 14대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항상, 성경이 잘못된 것을 찾아보기보다는 사람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없는가 하는 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계보(系譜)는 서로 모순인가?

마태복음의 계보(系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나열되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아담에 이르기까지 그 이상은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계보(系譜)와 누가복음의 계보(系譜)는 서로 다른 점이 나타난다. 대부분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일치하지만 다윗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는 서로 완전하게 다른 내용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1) 마태복음의 계보(系譜)의 순서

다윗- 솔로몬 - 르호보암 - 아비야 - 아사 - 여호사밧 - 요람 -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 히스기야 - 므낫세 - 아몬 - 요시야 - 여고냐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아비훗 - 엘리아김 - 아소르 - 사독 - 아킴 - 엘리웃 - 엘르아살 - 맛단 - 야곱 - 요셉 - 예수

 

2) 누가복음의 계보(系譜)의 순서

(누가복음 3:2부터 31절 까지의 명단, 뒤에서부터 기록) 다윗 - 나단 - 맛다다 - 멘나 - 멜레아 - 엘리아김 - 요남 - 요셉 - 유다 - 시므온 - 레위 - 맛닷 - 요림 - 엘리에서 -예수 - 에르 - 엘마담 - 고삼 - 앗디 - 멜기 - 네리 - 스알디엘 - 스룹바벨 - 레사 - 요아난 - 요다 - 요섹 - 서머인 - 맛다디아 - 마앗 - 낙개 - 에슬리 - 나훔 - 아모스 - 맛다디아 - 요셉 - 얀나 - 멜기 - 맛닷 - 헬리 - 요셉 - 예수

 

이렇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서로 다른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하여야 할 것인가?

대부분의 보수주의 학자들은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가계(家系)를 따르는 계보(系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 무근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여자를 숫자 파악에 넣지 않는 점 때문이다. 더구나 계보(系譜)를 여자의 가계로 기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무리하게 성경에 증명이 없는 내용으로 이해를 촉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마리아의 계보(系譜)가 맞는지도 모르나 중요한 것은 아무런 성경의 증명을 찾아 볼 길이 없다는 것이 난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계보(系譜)의 차이점을 찾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임을 밝혀주기 위하여 아브라함때로부터 그리스도에게까지 연역적(演繹的)인 방법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계보(系譜)" 를 귀납적(歸納的)인 방법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 서로 다른점이다.마태복음에서 나타나는 계보(系譜)는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으로서 모든 구약에서 언약한 그리스도라는 증명을 하는 것이며, 누가복음은 언약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가 나타나게 된 배경을 생각하는 것이다. 즉, 마태복음은 구약을 배경으로 기록한 것이라면 누가복음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는 대로" 의 기록이라는 점이 다르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系譜)를 기록하기 전에 이 기록의 배경을 설명하기를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눅 3:23 ~ 24) 라고 설명을 시작한다. 즉, 예수는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 당대의 사람들은 예수의 가계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을 밝혀준 것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사복음서가 한가지 사실을 말해주는 것 같으나, 설명 방식이나 배경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며 밝혀주고자 하는 주제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방법이나 배경이 서로 다른 것 같으나 결론은 항상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언약으로 내려진다. 이것을 사복음서의 통일성이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많은 점들이 반론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론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이 차이가 난다거나, 가르치신 장소가 다르다거나, 주기도문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것 등을 반론으로 제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들은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것이 단 한 번이라는 가정하에 반론되는 내용이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며 여러 장소를 오가며 한 번 가르친 것을 다시는 가르치지 않았을까?

Ⅴ. 원시적 지식(primitive knowledge)에 대한 이해

 

성경에는 원시적 과학으로 보이는 내용이 혹간 나타난다.

그중에 대표적인 내용이 지동설(地動說)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여호수아의 발언이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정리하고자 한다.

그 다음에 성경은 성경이 스스로 증명한다는 자증의 원리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순환논법의 모순이라고 강한 반론을 받는다.

스스로 문제를 내고 스스로 답을 내리고 스스로 맞다고 증명하는 어처구니없는 순환논법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논하여 보기로 한다.

 

1. 성경은 원시과학의 서적인가?

1) 여호수아 10장의 내용

여호수아서에서 나타나는 사건을 보게되면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백성과 아모리 사람들과의 전쟁이 일어난다. (여호수아 10장 1절 15절까지) 그런데 이 전쟁 중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아모리 군사를 진멸할 때 태양이 멈추는 사건이 일어난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수10:12)

 

여기서 나타나는 내용은 사실, 아모리 군사와 이스라엘의 전쟁 상황이지만 성경을 무너뜨리고자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주제를 벗어난 문제를 제기하기 마련이다. 즉, 여호수아의 발언을 볼 때 지구를 기준으로 태양이 돌아가고있다는 원시과학적 발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천동설(天動說)과 지동설(地動說)의 차이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상 지동설이 옳다는 결론으로 번복할 수 없이 결론이 내려졌으며 현대과학은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기록된 성경이 천동설을 주장하고 있다는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성경의 원시적 과학이라고 한다.

 

2) 여호수아 10장 내용의 바른 이해

여호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태양과 달은 멈추고 아모리의 군사들은 진멸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태양이 멈추었을까? 또한 태양이 멈추라는 말이 타당한 말인가? 하는 것이 이 반론의 주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언어의 유희(遊戱)에 불과한 문제제기이다.

그것이 만약, 여호수아가 현대의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서 해와 달을 멈추게 하려고 말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가정을 해보면 아래와 같이 된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지구야 너는 자전(自轉)을 멈추어라 달아 너도 공전(空轉)을 멈추어라?

 

현대를 살아가면서 자연과학의 상식인 공전(空轉)과 자전(自轉)의 원리를 다 알고있음에도 이러한 말은 이상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자전과 공전의 원리에 대한 전문적인 과학 서적이라면 오히려 '태양이 멈추었다' 라고 기록하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성경은 인간들의 자연과학을 설명하려고 하거나,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게 하는 특별계시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지 엉뚱한 문제에 매달린다면 생각하지도 않던 오류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20 세기말을 살아가는 현대의 문명인들도 오늘 아침에 "해가 떴다" 라고 말한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을 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혹은 '지구가 자전을 하여 아침이 밝아왔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을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전문적인 언어와 상식적인 언어의 사용을 혼돈한 반론인 것이다.

 

2. 성경은 순환논법의 모순인가?

성경 자증(自證)의 원리(原理)에 대하여 대부분의 중생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의 원리를 순환논법의 오류라고 반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있다. 순환논법의 오류란 자신이 주장하고 자신의 말로 증명하는것을 순환논법의 오류라고 말한다.

 

예를 든다면 스스로 잘생겼다고, 자신이 주장하고, 자신이 주장한 것이 맞는 말이라고 스스로 증거해 준다면, 이것이 얼마나 크게 모순된 말인가? 이러한 오류를 순환논법의 오류라고 말한다.

 

1) 상대적 일반 논법과 정당성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과 일반적인 학문에는 절대성(絶對性)과 상대성(相對性)의 차이점이 있다. 일반적인 학문이라면 순환논법은 모순이다.

 

(1) 상대적 일반논법

어떤 사람이 어떠한 주장을 세워서 주장할 때 자기 혼자서 주장하고, 혼자서 맞다고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주장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몇 사람의 증명을 받는다면 이 주장은 많은 설득력을 가지게된다. 특히, 그 주장에 대하여 특별히 전문적 기관에서 인정해 준다면 더욱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려면 자신이 스스로 증명하는 것보다 객관적인 사람들의 증명이나,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기관의 증명을 받는 것을 객관적 증명의 정설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성경을 확인해 보면 예수는 공적인 사람들의 객관적 증명을 거부한다. 예수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 받으려면 당대의 종교지도자나 당대의 권위자가 인정해주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요 2:24 25)

 

(2) 상대적 일반논법의 정당성

학업을 하는 대학생이 대학을 졸업할 때 자신의 배운 바 학문을 가장 잘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마지막으로 발표하는 것이 바로 논문이다. 이 논문에 의하여 자신이 대학생활 과정에서 배운 바 학문의 정도를 가늠하며 인정받는것이다. 이러한 것이 학위 논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의 정도를 정당화 받기 위하여 논문을 작성했다면 이 논문에 대한 평가는 책임교수들을 거쳐 자신이 몸담은 학교의 최고 학장이 마지막 평가를 하는것이 원칙이다. 만약, 자신이 자신의 주장을 세우고, 자신이 증명하고, 자신이 그 논문의 정당성을 외친다면 이것은 객관적으로 검증된 논문이라고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일반학문의 논고(論考)에 대한 증명은 그 학문의 최고 권위자가 인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의 증명도 최고 권위자의 인정도 원하지 않는다. 오직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계시하며, 언약된 내용이 성취되었음을 확인하며, 또한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과 종말의 마지막 심판까지 스스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 맺기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 ~ 19) 라고 선포함으로 스스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이러한 주장과 결론을 특별계시의 절대성(絶對性)이라고 말한다.

 

2) 절대적 특별계시와 정당성

성경은 상대적인 증명을 필요로 하는 일반학문과 다르게, 절대적인 주장과 증명으로 결론을 내리는 절대적 특별계시의 특징을 가진다. 이에 대한 정당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절대적 특별계시의 특성

성경은 상대적인 증명을 필요로하는 일반학문과 다르게, 절대적인 주장과 증명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이러한 절대성의 정당함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약성경에 대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는 신약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증거를 통하여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가 확인된다는 말이다. 예로 든다면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마 26:54)" 라는 말씀을 예로 들 수가 있겠다.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사들에게 붙잡혀 가실 무렵 열두영 더 되는 군사를 불러서 이들을 물리친다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한 구약성경의 예언" 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신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하신 일들을 이루어 내심으로 구약이 자신을 예언한 진리임을 증명한다. 이를 볼 때 구약성경은 언약하고, 신약 성경은 이 언약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기록인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에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라는 설명이다. 구약성경을 풀어서 구약을 증명자료로 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인 사실을 설명하신 것이다. 더욱 분명한 것은 구약의 증거를 사용하여 자신을 증명하는 예수의 말씀은 이미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증명자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자신의 정당성을 구약의 약속으로 증명하듯이, 신약의 증명으로 구약의 언약이 진리임을 증명하는것이다.

 

결국,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신약이 증거하고있으며, 구약은 신약의 증명자료로 사용됨으로 상호증명을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과 증명의 결과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하심대로 이루어내신다는 것을 증명하는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이 주장하시고, 하나님이 증명하시고, 하나님이 깨닫게 하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어 계시하시는 모든 내용을 특별히 계시하여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절대자 하나님에 의한 절대적 특별계시라 말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요 5:39 )

 

(2) 특별계시 자증(自證)의 정당성

사실, 이세상의 일반적인 논증이나 증명은 당대의 권위자나 혹은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주장들을 가장 믿을수 있는 증거자료로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내가 좋은 사람임을 증명하려면 나보다 더욱존경받는 사람이 나를 인정할 때 내가 증거된다. 그렇다면 절대자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증명해 줄 권위자는 누구인가? 예수가 그리스도요 성자 하나님이라고 증명해 줄 능력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이라고 증명해 줄 지혜자는 누구인가? 만약, 절대자를 증거해 줄 존재가 있다면, 창조주를 인정할 권위자가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자로 믿을수가 없을 것이다. 절대자 하나님을 증거해주는 증거자를 믿어야 할 것이다.

어떤 존재의 증거를 필요로 하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을 절대주권자(絶對主權者)라고 말할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자신을 특별하게 드러내어 알게 하시는 성경 계시도 스스로 주장하고 스스로 증거하여야 한다.만약 성경이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어떤 존재의 글이든, 어떤 신학자의 증명을 필요로 한다면 최종적 절대 진리로서의 가치는 상실되고 만다.

누구인가 성경이 진리라고 인정함으로 성경이 절대 진리가 된다면 그것은 이미 절대 진리가 아닌 것이다. 그 성경을 진리라고 인정한 글이 최종적인 진리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 세상 피조 만물의 주권자요 최종 권위자인 하나님은 누구의 증명도 필요없이 스스로 주장하시고 스스로 증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또한 이 세상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 말씀도 다른 증명 자료를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주장하고 스스로 증명하고 스스로 결론 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자 하나님은 다른 존재의 증명도 필요 없이 여호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언약하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증거하시며, 성령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통하여 중생한 성도를 깨닫게 하심으로 스스로 증거하시는 것이다.절대자 하나님이 스스로를 증거하고 주장하듯이 특별한 증거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스스로를 증거하는 자증의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36-41)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