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나는 찐빵 대소동으로 인해 방송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서 얻은 교계정보가 많았는데 그중 특히 ‘198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 비롯된 전반적인 교세성장의 둔화 현상’이었다. 그리고 교세 성장의 둔화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초신자 신규 영입 증가율의 감소와 신세대 청년층의 잇단 교회 이탈현상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국민일보 부설 교회성장연구소의 한 통계자료를 보면 교세 성장의 연평균 증가율을 따졌을 때 60년 대에 41.2%, 70년대에 12.5%, 80년대에 4.4%, 그리고 90년대 이후에는 불과 3% 미만 내지는 -1%로 나타나 있다. 줄어든 주요 원인은 우리 교회가 다원화, 정보화, 도시화, 민주화, 세계화로 치닫는 시대적 사회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미처 따라가 주지 못한 데서 온 결과로 지적되고 있다.

 

신세대 젊은이들에게 그 좋은 하나님 사랑 얘기를 해주자면, 그러자면 우선 내 자신이 신세대를 알아야 하는 것이 순서였다. 저들의 의식성향을 알아야 하고, 저들이 행동양태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저들이 왜 교회를 멀리 하려 하고, 왜 교회를 떠나려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겠기 때문이다. 다행이 내 주변에는 신세대 젊은이들이 많다. 이들을 참고로 이책을 쓰게 되었다.

 

오랜 기도와 숙고 끝에 나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 세세한 사연들을 가급적 있는 그대로 이 책 내용 각 항의 화두로 삼기로 했다. 실재하는 현상을 그냥 묻어두거나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나름의 판단, 그리고 누군가는 일대일로 맞서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풀긴 풀어야 된다는 나름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 ‘사명’을 왜 반드시 내가 져야 되는가에 대한 회의도 없지 않았지만, 나는 기신자보다는 비신자와 초신자에 대해 관심이 더 많다. 나 자신이 불과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비신자였으며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내 따끈하고 치열한 ‘초신자’의 삶으로 하나님을 만나면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소망이 바로 내가 가진 사명의 자격 전부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느끼겠지만 자칫 정형화되기 쉬운 교회식 논리나 율법처럼 들리기 시운 성경적 어법을 가급적 피하고자 하였다. 어떻게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디 뜻과 섭리를 보다 쉬운 생활언어와 피부언어로 바꿔서 닫힌 마음의 저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 고심하면서 아프고 뜨겁고 곤혹스러운 화두들 앞에 조심조심 접근하곤 했다.

 

저자 이만재: 카피라이터이며, 칼럼니스트이다. 서울카피라이터즈 클럽 회장 2회역임을 하고, 한국 수필가협회 회원이며, 조선일보광고대상, 경향신문광고대상 심사위원, 40대 후반에 늦깍이로 예수님을 영접, 기독교계 최고의 스테디셀러가 된 <막쪄낸 찐방>,<세상 속의 찐빵>의 저자이며, [카피파워]대표이다.

 

목 차

 

교회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1. 노방전도 모습 보면 만정이 딱
2. 여유 없어 교회 못 가
3. 말 많은 전도사 싫어
4. 부자 교회 천국 갈 수 있을까
5. 내가 믿는 건 나 자신뿐
6. 술 담배도 이해 못하는 교회
7. 종교, 미신과 뭐가 다르담
8. 타종교 타종파에 너무 배타적
9. 종교 없어도 불편함 못 느껴
10. 부모님이 반대하신다
11. 조용한 교회 어디 없나
12. 교인 아니면 다 사탄인가
13. 기독교는 외래문화
14. 광신도들의 광적 행태 무서워
15. 허황된 성경얘기 어떻게 믿나
16. 팔자 편한 사람들의 교회
17. 동정녀 마리아 잉태 이상해
18. 건축헌금 무서워 개척교회 못 가
19. 세상문화를 사탄으로 매도
20. 무교회 종교론에 공감한다
21. 꼭 교회에 가야 할 이유 몰라
22. 광란의 기도원 풍경 혐오
23.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 거짓말
24. 하나님 전지전능 못 믿어
25. 종교생활 각종 제약 싫어
26. 교회 요구사항 뻔해

27. 무전여행 때 냉대당했다
28. 목사 결혼 세속적이다
29. 현찰로 돈 내면 천당서 갚아
30. 유흥업 하는데 예수를
31. 부흥회 가보고 어이없어
32. 형제 자매 장로 집사 호칭
33. 가정파괴 광신도 봤다
34. 세무조사 반대 이해 안 돼
35. 양보 모르는 압력집단
36. 죽은 후 천당에서 영생할까
37. 붉은 십자가 너무 많다
38. 개척교회 과잉경쟁
39. 신체장애 때문에 안 간다

 

교회경험이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40. 각종 모임 참석 강요 많다
41. 기업화된 교회 위화감 싫어
42. 빈민구제 외면, 이해 안돼
43. 교회에 쓸 만한 총각 없다.
44. 감사할 줄 모르는 탐욕 메카니즘
45. 교회에서 진짜 신앙인 못 봐
46. 교회는 또 하나의 계급사회
47. 교회는 고리타분하다
48. 양보없는 일등주의 세속성
49. 세상과 타협하는 기회주의
50. 교인들은 재미가 없다
51. 인간 약점 이용 겁준다
52. 헌금명단 공표 속보인다
53. 일요일 늦잠 잘 수 없다
54. 자유로운 모험정신 억압
55.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않나
56. 목사 수준 낮은 것 같다
57.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나
58. 교회 종파분쟁 이해 못해
59. 이중인격자 많아 싫어
60. 헌금따라 사람대접 달라
61. 교회 단순논리 사고력 퇴행
62. 마음 터놓을 깊은 친구 없다
63. 진화론 부인 교리 못 미더워
64. 교회에서 연애 많이 한다
65. 엉터리 목사 많다
66. 뭔가 달라야 한다는 시선부담
67. 교회비판 함구는 불문율인가
68. 사기꾼 목사 봤다
69. 예수님 좋으나 교회는 싫어
70. 능력 이상의 직분 강요한다
71. 꼴보기 싫은 사람 많다
72. 이성교제 제약 받는다
73. 음치라서 찬양 재미없다
74. 지옥협박 고립주의 이해 안 가75. 자신의 이중생활 가책스러워
76. 아전인수 자기합리화 도구
77. 신분차별 때문에 벽 느꼈다

 

발행인의 변

 

 

교회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1. 노방전도 모습 보면 만정이 딱 떨어진다

지하철역 같은 곳에서 큰소리로 “예수구원”, “천국구원” 등을 외치는 이들을 자주 본다. 이상스런 각설이 복장에 화가 난 흉한 얼굴로 “말세!”, “종말!”을 외치는 사람도 보았다. 예수 믿으면 나도 저렇게 될까봐, 또는 남들이 저 비슷한 부류로 취급할까봐 아예 교회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다.

 

찐빵의 생각 신앙의 속성이 원래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도 어떤 이는 묵상하기를 즐기고, 또 어떤 이들은 통성하기도하기를 즐기지 않습니까?
또 스스로 거리로 뛰쳐나가 세상 만인들한테 당장 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예수님의 재림 임박을 간절히 믿는 경우도 있겠지요.

다행한 것은 이제 날이 갈수록 그런 이들의 수가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는 사실이며, 또 이제는 대부분의 목사님들도 그런 방식의 노방전도는 별반 권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귀뜀을 하자면 이상스런 언동으로 노방전도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일부는 정통 기독교단 소속이 아닌 사이비 교파 사람들도 끼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그런 사소한 이유로 해서 젊은이가 교회를 멀리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젊은이의 냉철한 이성과 지성을 의심할 만한 일도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군요. 종교의 모습 가운데 99.9%는 참으로 아름답고 경건하며 진실된 정황이 아닙니다. 0.1%의 상한 기분 때문에 99.9%나 되는 ‘생명의 보물’을 포기하는 미욱한 젊은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참모습은 거리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2 시간적, 정신적 여유 없어 교회 못 가

 

나처럼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솔직히 주중보다 주말이 더 바쁘다. 듣기로는 한 번 교회에 나가기 시작할 경우 교회에서 여러 가지 임무를 준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부담이 되거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과 아울러 내 마음 자체에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찐빵의 생각 그러나 사실은 시간적 여유나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교회에 다닐 ‘생각’이 없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직한 대답이 아닐까요? 교회생활에 충실한 신자들은 어떻게 시간관리를 하는 것일까요? 젊은이의 경우와 신자들의 경우가 다른 것은 시간 배분의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점을 먼저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인들은 월요일을 한 주일의 시작으로 치고 주말을 한 주일의 끝으로 칩니다만 교인들은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작으로 칩니다. 일주일의 첫째날을 주님께 바치고 나서 그 다음 월요일부터 제 생업에 착수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바로 ‘생각’의 차이가 있고 ‘필요성’의 여부가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제 할일을 하고 나서 남는 시간에 그냥 교양 삼아 가는 곳이 아니라 한 주일치 자신의 올바른 삶을 위해 말씀의 생명력과 보혈처럼 귀한 성령을 내 영혼 안에 충전받기 위해 가는 곳이라고 한번 ‘생각’을 바꿔보시지요.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면 자연히 ‘필요’의 가장 절실한 우선순위에 교회가 등장할 것입니다.

무한경쟁의 현대사회에서 ‘사람의 일생은 곧 시간의 승부다.’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든 시간 사용을 자기중심적으로 철저히 효율화함으로써 남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이 거칠고 각박한 세상을 쉰 해 정도 치열하게 살아본 내 경험에 의하면 사람의 일생은 세상적인 시간 효율 가동량의 과소 여부로 승부가 나는 게 아니라 삶의 질, 시간의 질, 성취의 질, 또는 심성의 질에서 결국 판가름이 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쉽게 바꿔 말하자면 그 사람이 얼마만큼의 거리를 많이 달렸느냐보다 그 사람이 얼마나 제대로 된 길을 바로 걸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더라는 얘기입닏. 교회식으로 말하는 소위 영혼의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나중 문제입니다. 단 한 번뿐인 귀한 자기 인생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옳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만 국한해서 따져 본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도출될 정답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필요’ 여부나 우선순위도 덩달아 달라지겠지요? 쫓기듯 살아온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한 호흡 멈추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귀한 일생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기필코 성공적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 가지 삶의 목표들이 있겠습니다만 그 모든 것들 가운데서 가장 영원한 가치를 지닌 최상의 길 하나를 선택했다고 믿기 때문에 많은 훌륭한 분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교회생활을 첫번째 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택해서 추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유익의 길을 외면하는 것처럼 손해보는 일생은 없을 것입니다.

 

3. 말 많은 전도사 너무 싫어!

 

전도사한테 한 번 걸렸다 하면 이건 완전히 사람 병시된기 딱 알맞다. 어찌나 집요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학질을 떼는 기분이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말로 자기네 일방적인 주장만 늘어놓는데 그 내용이 너무 허무맹랑할 뿐만 아니라 뜬구름 잡는 것과 같은 비합리적인 얘기들이어서 정상적인 이성으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다. 게다가 자기 혼자만 세상이치를 다 아는 듯이 독선적으로 떠벌린다. 그럼 나는 골빠진 병신이란 말인가?

 

찐빵의 생각 삶의 신고를 통해서 우리는 어느 날 문득 절대의 힘과 절대의 사랑을 가진 단 한분의 존재가 그렇게 절실하게 소중하다는 필요 앞에마주서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막연하게 그냥 기다리는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될 줄 압니다. 전도사님들이 입에 침을 튀기면서까지 우리를 위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 일 터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기실따지고 보면 아쉬운 것은 전도사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아닐는지요?

 

4 부자교회, 천국 갈 수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부자 교회들이 많은 곳도 아마 없지 않을까? 신도들보고는 부자 되기를 포기하라 하고 교회는 다투어 부자 교회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 아닌가. 끝이 보이지 않는 탐욕을 그러싸한 명분으로 위장하여 냐?이 갈수록 뚱뚱하게 살쪄가는 비만증 교회들, 엄청나게 많은 신도들의 숫자를 앞세워 툭하면 압력단체로 군림하곤 하는 권세 높은 교회들이 내 눈에는 별로 존경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찐빵의 생각 깐깐하고 검소한 예산 집행 과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부자 교회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예산은 어느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교회의 교육사업, 선교사업, 자선사업 등으로 쓰여지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는 대부분이 우리 사회에 다시 환원되는 성질의 것이랍니다. 다만 그것들이 말씀의 본디 뜻에 따라 소리 소문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반 사회인들한테는 잘 알려지지 않을 뿐입니다.

 

좋은 일 좀 했다 해서 떠들썩하게 제 자랑하는 교회를 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는 이른바 부자 교회보다는 그렇지 못한 극빈의교회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예로 기장 교단의 경우를 한 신학자가 조사한 것을 보면 신도 수 50명 미만인 교회가 전체 348개 교회 중 286개나 됩니다. 목회자의 월 사례비는 전체 평균액이 533,000원이랍니다. 특히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5.5%가 교사, 농업, 건축, 우유 배달, 청소부 등의 부업을 하고 있고, 사모들의 10.9%가 공무원, 유치원 교사, 간호사 미용사, 도배사, 보험 설계사 등의 취업 전선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넉넉지도 않은 성도들의 헌금에 자신의 생계까지 의존하지는 않겠다는 각오들이겠지요. 젊은이가 지적한 소위 부자 교회로 분류되는 비율은 아마 전체의 1%가량도 못마땅하다하여 그 단순한 이유 때문에 교회를 멀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젊은이의 중대한 자가당착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겉만 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5. 내가 믿는 건 나 자신뿐!

 

찐빵의 생각 우선 지금껏 하나님께서는 젊은이를 얼마나 사랑해 오셨는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코 유복하다 할 수 없는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명문 학교의 학생으로 좋은 성적을 성취하게 해주신 축복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보기로 권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젊은이의 생명을 과연 누가 주셨는가. 젊은이의 영특한 두뇌와 재능과 의지력을 누가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 지구상에는 훌륭한 위인도 많고, 위대한 예술가도 많고, 뛰어난 과학자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우리 인간 모두는 원래가 보잘것없는 한 줌 흙이었습니다. 그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바로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아니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님의 깜깜한 뱃속에서 어머님의 핏줄을 빨아먹으며 성장하는 채아가 당장 제 눈에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제 엄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형국일 것입니다. 만일 어느 날 뱃 속의 그 태아가 소리를 내어 “보이지도 않는 엄마 같은 것은 내게 필요 없다. 내가 믿는 건 나 자신뿐이다.”하고 외친다면 젊은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쥬라기 시대의 공룡보다 더 힘 센 동물은 지구상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공룡의 그 힘보다 더 덧없는 힘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간의 패기, 젊음, 총명..., 그것의 한계는 과연 영원하고도 완벽한 것일 수 있을까요?

 

6 술 담배도 이해못하는 교회, 이해 안 돼!

 

술과 담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호와 취향의 문제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신앙생활과 결부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술 담배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물에는 이해의 양면이 공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꼭 교회에 나가야 된다면 나중에 술 담배 끊고 나서 한 번 고려해 보겠다.

찐빵의 생각 교회가 그것을 멀리하는 것은 우리 인체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고귀한 성전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성전을 술이나 담배 따위로 오염시킬 필요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술이나 담배가 우리 몸에 이로울 것은 없지요. 그러나 우리 교회는 몸 쪽보다는 정신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술 담배를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로움과 해로움의 야면이 있다는 절음이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해로움을 피하여 이로움만 취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쪽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겠지요?

 

일단 교회에 나가보세요. 술 담배 따위와 싸우기는 그렇게 대단한 문제가 아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7 종교, 미신과 뭐가 다르담?

 

찐빵의 생각 미신들의 공통점은 물리적 가시성과 과학적 논리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어쩌면 종교도 그 부분만 보자면 미신과 대동소이한 면을 갖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 점 때문에 우리는 자칫 미신과 종교를 같은 카테고리 안에 넣고 보기가 쉬운데 바로 거기에 세속적인 우리 인간 지능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조차도 한때는 그런 유물론적 관념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까짓 밑져야 본전이라는 단순한 생각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생애의 지표로 한 번 삼아 보겠노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의 형국으로 뜬금없이 성경책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나이를 많이 먹고 난 후의 일이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문득 하나의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뜻 보아 가장 비과학적이고 가장 비논리적인 것처럼 여겨 왔던 성경 말씀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렇게 ‘과학적’ ‘논리적’일 수가 없더란 얘기입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 정치사, 문화사, 정신사를 정학히 꿰뚫는 그 완벽성하며, 한 치도 오차가 없는 그 절절한 윤리관의 정의하며, 진실된 삶의 가치관을 명쾌히 규정한 그 투명성하며, 미완성의 과학 수준이나 그 가설적 본질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내 정신을 매료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현재 닿아 있는 그 시점으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먼발치서나마 자주 홀깃거려 보시기를 원합니다. 그분보다 더 매력적인 인물이 인류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8 타종교, 타종파에 너무 배타적이다.

 

타종교, 타종파를 존중할 줄 알아야 내 종교, 내 종파도 존중받는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말씀에서 ‘이웃’은 이웃종교도 포함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특유의 종교 이기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찐빵의 생각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는 ‘남을 해코지하지 말고 착하게 살자.’는 데서는 부분적으로 일치합니다. 허나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납니다.

첫째, 우리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엄연히 적시한 성경 대목입니다. 바로 이 생명 지음 받음보다 더 감사한 일을 달리 떠올릴 수 있겠는지요?

둘째,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의 원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바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차원의 사랑을 달리 찾아보실 수 있는지요?

셋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3일 후의 부활을 예언하시고, 꼭 그대로 어김없이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신격의 증거를 달리 찾아보실 수 있겠는지요?
이와 같은 엄연하 교리의 차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설득 방법의 미숙으로 인해 그것이 세인들의 눈에 배타적, 비판적, 이기적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교회의 잘못일 것입니다. 기독 사상의 근본 정신은 온유와 인내와 포용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군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오로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리시고 목숨을 바치신 그 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종교가 바로 우리 기독교 아닙니까?

 

9. 종교 없어도 불편함 못 느낀다

 

왜 그렇게 종교인들은 전도에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종교가 없어도 전혀 사는 데 불편함이 없다. ‘좀머씨’의 말처럼 날 좀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산 속의 산토끼도, 노루도 꽃과 나비도 종교가 없지만 그냥 섭리대로 잘 살지 않는가 말이다. 나는 그냥 이대로가 좋다. 편하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 못지않게 나는 자유주의자였고 낭만주의자였고 인본 개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왜 나이 쉰이 다 되어서 아차 하는 뒤늦은 깨달음과 만났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옳다고 믿었던 그런 내 방식대로의 생활 자세가 결국 하나뿐인 내 삶의도식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방식의 삶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수가 잠복해 있었고, 나의 그런 자유방임적 인생관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행착오가 끊이지 않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번민가 고뇌가 난마처럼 얽히고 꼬여 이제는 더 이상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을 즈음에 나는 한 줄기 눈부신 구원의 서광을 찾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나는 헛것들로 가득 찬 나를 비워내고, 꽉 막힌 나를 뚫어내고, 그렇게도 무거웠던 운명의 짐, 자업자득의 짐, 그리고 끝간데 없는 욕망의 짐을 다 내려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내 방식대로가 아닌 말씀의 방식대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오리무중이던 시야가 밝게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따라 손을 뻗으면 거기에 올라갈 사다리가 있었고, 말씀에 따라 발을 내딛기만 하면 그곳에 어김없이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오감에 닿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외면하고 살았던 성경 말씀을 진정한 ‘복음’으로 그렇게 꿀맛처럼 감사히 영접해 맞아들인 연유가 그러합니다.

종교는 바로 그 죄를 사함 받고 영혼의 구원을 얻는 데 큰 뜻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만일 “내겐 종교가 필요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치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동물처럼 살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영혼의 얘기입니다.

 

10 부모님이 반대하신다

 

찐빵의 생각 아직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완고히 묶여 사시는 어른들이 참 많지요. 그것은 그분들이 종교를 ‘생명의 빛’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냥 단순한 관습적 타성에 젖어서 관념적으로만 여겨온 데 까닭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체된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생의 전기를 마련하자면 우선 젊은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혼 구원과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가를 먼저 인식하고 체험하는 게 순서일 줄 압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에 유익된 것을 추구하는 본능을 지녔습니다. 성경의 일차적인 매력은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하나같이 다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올바른 길에서 끝내 승리하게 하는 놀라운 비법의 보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젊은이가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 승리하는 삶을 개척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이 부모님께도 효도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새로운 삶을 함께하기 위해 젊은이는 부모님을 향하여 자신있게 설득 권면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있습니다. 자식이 올바른 삶의 길을 찾았다는데 그것을 싫어하실 부모님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그 행복한 삶의 요람으로 부모님을 모셔들이는 일 또한 자식된 도리가 될 것입니다.

부모님이 교회생활을 반대하신다고 해서 쉽게 포기해 버리는 그런 나약한 젊은이가 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자, 힘을 내서 지금 당장 ‘생며의 빛’을 움켜잡으시기 바랍니다.

 

11. 조용한 교회 어디 없나?

 

성스럽고 신성한 교회, 그래서 아무때나 마음의 위안을 받고 싶을 때 누구나 부담없이 들어가서 조용히 자신을 의지하거나 회개하거나 할 수 있는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는 목사나 교인들의 극성 때문에 섣불리 접근하기가 겁난다. 어디에 사는 누구냐는 둥, 무슨 직업을 갖고 있느냐는 둥, 전화번호와 주소가 어떻게 되느냐는 둥,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떻고 어떻다는 둥, 영혼구원이 어떻고 어떻다는 둥......., 한 번 잘못 걸리기만 하면 혼쭐이 날 만큼 고역을 치러야 한다. 만일 그에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금방 냉담해져 버린다.

 

찐빵의 생각젊은이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누구든지 부담없이 마음놓고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나 성당에 들어가려면 경비원이 제지하고, 사찰에 들어가려면 입장권을 사야 하는 현실은 세상의 편의를 위해 원칙을 무시한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교회의 문을 무인지경으로 항시 열어둘 수 없게 된 것은 교회의 탓이 아니라 아마 세상의 탓일 것입니다. 예배 집회를 위해 항시 깨꿋이 정돈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할 성전이 무시로 드나드는 신분 불명의 불청객(?)들에게 개방된다면 차마 그 뒤치다꺼리르 다 감당하기가 어렵겠지요.

 

문제는 교회의 문이 잠겨 있나 열려 있나가 아니라 교회를 보는 이의 마음 자세, 그리고 교회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싶은 간절한 심정 여하에 달려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굴절된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면 굴절된 교회만 보일 것입니다. 교회 탓하지 말고 젊은이 자신의 심성을 먼저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12. 교인 아니면 다 사탄인가?

 

교회의 일방적인 이기주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기네 종교를 믿으면 천사요, 안 믿으면 악마라는 식의 억지 논리를 누가 과연 믿을 것인가. 교회식 논리에 따르자면 마이클 잭슨도 사탄이고 스필버그도 사탄이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옷을 일이다. 그러니 성인이 된 내가 어떻게 그런 억지논리를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대다수 현대인의 공감을 사려면 교회의 논리도 이제 그 폭을 한참 넓혀야 할 것이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는 기독교가 기독교 아닌 모든 것들을 사탄시한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잘못 와전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독정신의 근본은 타인을 사탄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웃을 긍휼히 여겨 사랑하고 그 영혼을 원죄로부터 구원하는 데 있음을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마이클 잭슨이나 스필버그도 사탄이 아니라 전도와 구원의 대상일 뿐입니다. 바림직한 것은 교회를 밖에서 겉모양만 볼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안에 들어와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참모습과 만나는 일이 아닐까요?

 

13. 기독교는 외래문화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 앞을 지날 때보다는 절 앞을 지날 때 마음이 훨씬 편하다. 아무튼 종교라는 게 대충 다 그게 그거라면 왜 우리 종교를 마다하고 서양종교를 믿는지 모르겠다. 전통을 숭상하는 민족 자존심은 어디로 갔나?

 

찐빵의 생각 요즘 젊은이들은 종교를 대충 사념이나 관념의 치장쯤으로 허술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종교는 ‘그게 다 그거’가 아닙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기독교를 외래종교, 불교는 전통종교로 알고 있는 듯한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외래로 치자면 기독교나 유고나 불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불교는 인도에서 발상하여 중국을 거쳐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고, 유교는 중국에서 생겨나 불교와 비숫한 무렵에 고구려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가 순수한 우리민족 종교라면 불교나 유교가 아니라 상고시대의 주술적 기복신앙이나 조선 말기 실학사상, 동학사상을 근간으로 한 천도교나 증산교 등을 꼽아야 옳을 줄 압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과연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 중의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냐 하는 물음일 것입니다. 이 물은 ‘대충’ 기분으로 가볍게 이루어지거나 답변되어서는 안 될 물음입니다. 어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을 갖고 이루어져서도 안 될 물음입니다. 왜냐면 이 물음이야말로 우리 생의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구획짓는 최후의 물음이고 운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타종교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모두가 저 나름대로 우리의 혼탁한 사회현실을 정화하는 순기능적 역할을 하나씩 맡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지요. 그런 가운데서 기독교는 내게 특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우리 대신 스스로 ‘사랑과 구원의 피’를 흘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앙의 대상 가운데 사랑과 희생의 화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랍니다.

 

14 광신도들들의 광적 행태 무서워!

 

하나님께서 과연 남의 눈에 너무 튀는 그런 광적인 삶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일까? 교회라는 델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가 자칫 나도 그렇게 물들까봐 솔직히 겁나는 부분이 많아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찐빵의 생각 우리가 놀이터의 청룡열차를 탄다고 가정합시다. 어떤 이는 이를 악물고 그 경이적인 속도감을 조용히 혼자서 참아냅니다. 아니, 속도감을 즐기는 반응 양상이 그렇게 조용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이는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속도감에 대한 쾌감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 기도드리는 모습도 그렇게 조금씩 다르답니다. 어떤 이는 혼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기도를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에 감동한 나머지 격정적인 감정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제3자가 한마디로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성질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이란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모방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신앙 자세를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다른 이들의 모습에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을가 싶습니다. 신앙에도 질이 있다면 그 질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말씀이 과연 진리 중의 진리로구나하는 깨우침에 도달하는 일, 그리고 그 깨우침에 기필코 나도 한 번 도달해 보겠다는 각오 아래 말씀공부에 임해보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경 젊은이의 닫힌 마음문도 조금씩 열려질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신앙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삶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15. 허황된 성경얘기 어떻게 믿나?

 

기독교 교리를 깊이있게 잘 모르는 처지에서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힌 성경에는 너무나 허황된 얘기들이 많다. 미신 같은 천지창조는 그렇다 치더라도 특히 ‘노아의 홍수’같은 사건들은 너무나 허황되어 보인다. 지금은 주술적 공상시대가 아니라 사물의 이치가 명명백백한 과학시대인 것이다. 학교에서 과학을 배운 초신자나 비시자들한테 성경을 제대로 이해시키려면, 성경채 뒷부분에 해명성 해설기사(?)라도 함께 실어서 독자를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옳을 것이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가 문제로 제기한 노아의 방주나 노아의 홍수 얘기도 그렇습니다. 40일 동안이나 비가 내렸고 그 비가 천하의 산들을 다 뒤덮는 대홍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언뜻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박사학위를 가진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모여 만든<창조과학>을 조금 더 인용을 하면 성경은 노아의 방주가 유프라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아라랏 산 꼭대기에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일 그 홍수가 유프라테스 강 정도를 범람시킨 국부적 홍수였다면 노아의 방주는 강 하류를 따라서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대홍수에 대한 전설기록은 지구 도처의 많은 민족들 간에 공통되게 전해지고 있는데 그 설은 지금까지 수집된 것만해도 27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특히 미대륙 인디언들이 남겨놓은 점토판에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 아주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궁창 위의 물로 인해 일그러져 보이는 태양, 물 속에 빠져서 아우성치는 사람들, 비가 내린 40주야를 상징하는 40칸의 네모판 그림, 나뭇잎을 문 채 날고 있는 새, 커다란 배, 그리고 그 옆에서 하늘을 향해 경배를 올리고 있는 네 남자와 무지개가 뜬 가운데 배로부터 각기 한 쌍씩 나오고 있는 갖가지 동물들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일찍이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어떻게 노아의 홍수 사건을 그토록 성경 내용과 똑같이 묘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담으로부터 시작돼 인류의 번성은 홍수 이후 노아의 가족을 유일 조상으로하여 다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연평균 지구상의 인구가 0.5%씩 증가했다고 했을 때, 노아의 가족인 네 쌍의 부부로부터 현재의 50억이 넘는 인구에 도달하기까지 대략 4,000년의 기간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입니다. 창조론은 미신이 아니라 과학이고 역사학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무제를 앞세워 성경의 엄연한 사실 역사를 ‘허황된 얘기’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얄팍한 지식이 아닌, 진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젊은이의 가장 큰 힘이 될 것입니다.

 

16. 팔자 편한 사람들이나 다니는 곳이 교회 아닌가?

 

찐빵의 생각 교회는 ‘팔자’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쪽이라는 사실을 젊은이가 올바로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고뇌와 비탄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앞에 영육의 전부를 의지하고 사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이들이 함께 모인 ‘천국’이 바로 교회라는 곳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행복한 인간들을 축복하려고 세상에 오신 게 아니라 죄 많고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감싸안으며 그 가엾은 영혼들을 구원할 오롯한 목적 하나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혹스런 운명의 꼬임도 말씀의 능력을 통해 한 수간에 다 풀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 모든 고통의 원인, 모든 죄악의 무게와 그 본질을 누구보다도 훤히 다 꿰뚫고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눈을 떠서 교회를 바로 보고, 그리고 눈을 감고는 자신의 모든 무거운 짐들을 그분 앞에 살며시 내려놓아 보기를 권합니다. 우선은 성경말씀을 한 번 찬찬히 잃어보는 것이 순서일 줄 압니다.

17.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이상하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의 의심은 세상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의심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인간세상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그 아드님, 즉 우주에 유일하신 신의 세계를 얘기하고 잇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도 나와 있듯이 예수님은 죄악으로 물든 이 혼탁한 세사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내려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하나님의 뜻, 즉 성령에 의해 마리아의 몸을 빌어 잉태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네 보통 인간으로 보려 하는 데서 부터 젊은이의 잘못이 비롯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억조창생을 다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짦은 경험과 얕은 지식 잣대로 가늠하려 하는 것은 애초부터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흙을 빚어 인간의 형상을 만든 다음 거기에 스스로 생명력의 숨을 불어놓어 우리를 만드시니 일에 비한다면 당신이 점지하신 한 처녀의 몸 안에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는 일쯤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 일의 어렵고 어렵지 않고에 있는 게 아니라 죄악 투성이인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하나뿐인 독생자를 내려 보내셨다고 하는 그 무한한 사랑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 또한 보통의 인간이 아닌 성모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8 건축헌금 무서워 개척교회 못 가겠다

 

찐빵의 생각 알게 모르게 신앙과 물질이 이처럼 자주 정면으로 부닥치는 우리 교회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마음의 평안과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한 마지막 안식처로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가는 것인데 오히려 안식처가 ‘부담처’가 된다면 그것은교회의 존재 의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어려운 가정경제에 무리를 하면서까지 건축헌금을 하라고 강요하는 교회는아마 없을 것입니다. 또 소수이긴 하지만 어떤 목사님들은 신도들의 경제효율성을 감안하여 아예 독립된 자기 성전을 따로 짓지 않겠노라고 공식 선포를 하고 대신 학교나 회관등 공공기관의 시설 일부를 빌료서 당당히 목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일정액의 물질을 드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교회로부터 얻는 정신적인 위안과 축복과 은혜의 분량은 그야말로 물질이나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사실입니다. 또 실제로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이나 마음을 그냥 공짜로 받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를 드리면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열 배로 되갚아 베푸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물질을 드리는 기쁨이나 보람은 마음과 물질을 드려본 이들만이 느껴 누릴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축복이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닿지 않으면 건축헌금에 대해서 신경 쓰시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능력대로만 바치면 그것으로 족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늘 들여다보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9 세상 문화를 모두 사탄으로 매도하는 비현실성

 

지나친 경건주의인가 아니면 종교 이기주의인가. 우리나라 교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현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너무 좁은 것 같다. 대중들이 오락으로 즐기거나 예술적 창작 행위로 표출하는 영화, 텔레비전, 음악, 연극, 무용 등은 대부분 다 사탄이라고 매도해 버린다. 음악도 찬송가나 찬양곡만 음악이고 연극이나 영화도 성극이 아니면 다 사탄이다. 특히 전위적인 음악 등 새로운 예술 장르는 아예 악마의 굿거리쯤으로 취급해 버린다. 인류의 정신 사조적 추이와 아름다움의 새로운 가치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예술 창작 표현행위가 다 사탄이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봉건 중세기의 고루한 사고방식만 최고의 가치로 알고 진부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싶다. 교회에 식자들은 많으나 새시대를 능동적으로 앞서 개척할 만한 용기를 못 지녔다. 앞선 자는 손해를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현실 안주만을 안일하게 탐하다가는 지난날의 불교나 유교처럼 기독교도 머지 않아 시대에 뒤처진 ‘골동품 종교’로 낙후될지 모를 일 아닌가.

 

찐빵의 생각 시대는 계속 변천하고 있으며 가치관 또한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정신도 시류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정신도 시류에 따라서 끝없이 각색디고 윤색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향후백년쯤 뒤의 성경 해석이 과연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의 위대함이 어디 있다고 보시는지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고 뭇 제국의 흥망성쇠가 수업이 거듭되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황금의 빛처럼 그 가르침의 엄정하심과 예언의 정확하기가 예링한 칼날처럼 오늘날까지 생생한 진리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젊은이는 과연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인간 정신 활동이나 행동규범은 본디 제한됨이 없이 움직이는 속성을 지녔습니다.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놀랍게도 그런 모든 시대의 흐름과 인간의 변화해 나갈 모든 몸짓들을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예견하시는 가운데 그 모든 시대와 무든 움직임과 모든 가치들을 빠짐없이 하나로 꿰뚫는 불변의 진리를 말씀으로 남기셨습니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성경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율법이기 이전에 우리의 취할 바 행동양식이며 우리가 추구할 바 살아 있는 행동의 규범이 되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그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비타민C라는 물질을 발견한 공로로 1938년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미국의 과학자 엘버트 젠트교르기 교수가 평생의 과학철학을 집대성한 책 한 권을 만년에 쓴 일이 있습니다. 그책츼 제목을 ‘The Mad Monkey'(미친 원숭이)였습니다. 놀랍게도, 인류의 그가 이룩한 과학문명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는 예견이 그 내용입니다. 새로움의 탐욕에 사로잡혀 끝간 데를 모르고 달리는 우리 인간의 초상을 미친 원숭이에 비유한 경고였던 것입니다. 새로움에 집착하지 말기를 권합니다. 언뜻 낡아 보이는 가치를 외면하지 않기 바랍니다. 아무리 빼어난 오늘의 새로움도 내일이면 이미 낡음일 터, 영원히 변치않는 최후의가치는 역시 이천 년 전에 우리가 은혜로 받은 단 하나의 말씀뿐입니다. 영민한 젊은이의 두손을 꼭 잡고 이말만은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예술도 새로운 과학도 결국은 진리의 말씀 앞에서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20 무교회 종교론에 공감한다

 

고 함석헌 선생의 무교회 종론을 읽었다. 공감 가는 대목이 많았다. 굳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이 혼자서 성경공부를 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 조직에 얽매이다보면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교회는너무 탐욕적이고 아전인수적이다.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마구 겁준다. 공짜 노력 봉사와 공짜 돈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한마디로 염치가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신도들로부터 챙기면서 감사는커녕 그것들이 다 사람 덕분이라고 했다가는 빚쟁이로 몰릴까봐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속보인다. 공짜만 밝히는 그런 놀부 같은 교회들 말고, 진짜 돈 욕심 없는 흥부 같은 교회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신도들의 돈을 노리지 않고 자기의 재산을 스스로 바쳐서 하는 목회가 진짜배기 아닐까?) 아무튼 나는 착한 사람은 되고 싶으나 여러 가지 스트레스 때문에 교회에 가기는 싫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의 경오를 나는 감히 불효자식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낳아즈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는 생각지 않고, 부모님의 명령이나 부모님의 부양 으무 따위를 스트레스로 생각하는 불효자식을 보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불효 자식들에게 일정한 틀이 있지요. “누가 날 낳아 달라고 언제 부탁하기라도 했나?”, “왜 귀찮게 이래라 저래라 내게 명령하나?”, “무슨 유산 물려준 게 있다고 내게 의탁하려 하나?”등등 입니다. 부모와 하나님이 동격이라면 교회는 가정과 동격이 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면 부모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고, 교회를 부정하면 가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론 부모님과 가정을 버리고, 그렇게 혼자 가출해서도 그럭저럭 연명은 하겠지요. 그러나 그 생애가 온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젊은이늬 과겨간 표현은 일시적인 젊은 객기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섣부른 무교회 종교론의 지지 배경을 유추한컨대 치열한 자기탐구의 벼랑에서 모험적 자기싸움을 통해 나름의 사회과학적 관점으로 설파한 함석현 선생의 소위 ‘무교회 종교론’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젊은이의 주장대로라면 사람은 의학서적 한 권만 있으면 몸이 아플 때도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21 꼭 교회에 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찐빵의 생각 종교나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바꿔말해서 세상을 살아가는에 스스로 자신이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특히 젊은 날에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만드어 갖기가 쉽지요. 그러나 조글 더 세상을 살아보세요. 자신의 의지나 지혜나 능력만 갖고는 도저히 풀리지 않아 마치 하나의 미로와도 같고 난마와도 같은 거대한 실타래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미로의 실타래는 말할 것도 없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매사 현명하고 정직하게 산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 인간적인 의지나 지혜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제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난마의 실타래를 푸는 완벽한 해법은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사태는 심각해지는데 함당한 해법이 발견되지 않을 때 삶들은 갖가지 편법을 생각합니다. 편법의 끝은 나락이지요. 미로와 같은 세상험로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를 대낮처럼 밝혀주는 놀라운 횃불이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횃불을 만나기 이전의 나는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마치 장님과 같았었습니다. 신앙이 필요없다고 말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의 낳으심, 부모의 가르치심이 나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바보의 세월을 하루라도 빨리 졸업하는 젊은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22 광란의 기도원 풍경, 혐오감 준다

 

찐빵의 생각 나는 아직도 교인된 사람의 기도란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하는 가운데 얻는 하나님과의 1:1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가급적 자제학 살아온 내 성격 자체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 또는 정서상태가 나와 꼭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평소 우리 생활에 비유해 봅시다. 몸이 건강한 사람은 중환자의 극심한 통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배가 부른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절실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신체가 정상적인 사람은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예로 든 모든 경우에 공통되게 쓰이는 단어가 ‘이해’입니다.

 

이해란 내가 그사람의 처지가 되어 생각해 보는 마음 씀씀이로서의 도량입니다. 누군가가 통곡을 하면서 하늘에 대고 울부짖는 광경을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사람의 절박한 처지나 심정을 먼저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음을 비운 가장 편안한 상태로 교회에 나와 보세요. 교회는 험한 세파 속의 ‘방주’랍니다.

 

23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거짓말!

 

찐빵의 생각 현실적인 생각이나 생활에 젖어 살다보면 가끔씩 비현실적인 말들이 우습게 들리는 경우가 참 많지요 예수를 믿으면 장사가 잘 됩니다. 나는 확실히 장사가 더잘 된다고 감히 자신있게 단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기적중의 한가 바로 비운 만큼 반드시 채워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를 바치면 열을 되돌려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기적, 은혜, 운운하니까 너무 교회식 답변으로 들립니까? 그렇다면 세상 식으로 풀어서 설명하지요. 우선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사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상이란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남에게 따뜻이 베풀고 이웃을 지성르로 섬기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이웄을 내 몸같이 아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범사에 기쁨으로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는 곧 웃는 얼굴의 시발점입니다. 그 웃는 얼굴은 곧 바로 인간관계의 화목과 우애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실로 하해보다 깊으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이렇게 얄팍한 장삿속으로 풀어서 언급한다는 자체가 심히 불경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를 받으시면 열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좇아 교회에 다니면 장사가 열 곱으로 번창할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도니다는 말은 정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모든 사람이 꿈꿔 마지않는 마음부자까지 됩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바로 은총과 축복이시기 때문입니다.

 

24 하나님의 전지전능, 믿을 수 없는 경우 많아

 

새벽기도를 다녀오던 부녀자가 괴한에게 겁탈을 당하고. 수련회에 가던 교회버스가 벼랑길에서 굴러 떨어져 사상자가 많이 났다는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다. 신문에 나지 않은 사건들은 아마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전지전능하다면 왜 저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나? 세상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위심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만사가 형통이라지만 그렇게 수많은 교회들은 그렇다면 기도를 안 했다는 말인가?

 

찐빵의 생각 우리사회에는 성범죄가 많고 교통사고가 많고 부정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처방을 따르지 않은 우리 인간들 탓입니다. 딱히 적확한 비유는 아닐지 모릅니다만, “교회가 많아 저마다 기도를 많이 할 것임에도 왜 각종 범죄와 불상사는 끊이지 않고 있는가?”하는 질문은 마치 “우리사회에는 병원이 많아 의사들이 저마다 진료를 하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왜각종질병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가?하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병원의 존재와 의사 진료행위의 필요성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교회의 존재와 기도의 필요성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의사의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은 의사의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은 의사의 몸과 두뇌와 그 의술의 길을 만들어 주신 분이시고, 의사는 그의 쓰임 받은 최소한의 도구라는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진작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안전과 행복과 평안의 완벽한 길을 다 예비해 주셨습니다.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는 정치와 법과 경찰제도라는 인위적이고 물리적이 수단까지도 우리에게 못이긴 척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 은혜의 큰 틀을 생각한다면 우리들 중 누구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의심해서는 안되고, 생명과 생존조건을 허락해 주신 고마움을 추호도 잊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25 종교생활로 인한 각종 제약이 싫어!

 

찐빵의 생각 ‘자유’라는 말이 지닌 양날의 칼과 같은 함정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단 한 번뿐인 귀한 삶을 사는 동안 종교를 통해 진리의 말씀을 얻어서 그에 따른 믿음 아래 일생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우리 이냉의 집을 잘 짓는다는 뜻일 것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단언합니다.한때의 젊은 기부에 의한 그런 자유바임의 삶으로는 절대로 서공적인 인생을 일궈낼수 없습니다. 젊은이의 경우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그 어느 뛰어난 누구도 종교에 의한 신앙심이 없이는 자기의 인격적 완성을 도모해 내지 못산다는 뜻입니다. 젊은이의 눈에언뜻 재미없고 답답해 보이는 그사람들을 한 번관심 갖고 관찰해보기를 권합니다. 그들은 불변의 진리 말씀안에서 어쩌면 젊은이보다 열 배나 더트인 긴 안목으로 세상과 세상 이상의 것을 꿰뚫어 내다보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노여움 아래 누리는 세상세서의 재미나 자유는 한 순간에 불과하지만, 진리의 말씀안에서 진리의 뜻대로 일궈나가는 저들의 삶은 절은이보다 열 배는 더 성공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자, 단 한 번 뿐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제 전적으로 젊은이의 자유이자 책임입니다.

 

26 교회 요구상항 뻔하다.

 

찐빵의 생각 모든 종류의 헌금은 경제 사정이 하락하는 한도 내에서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인데 젊은이의 표현대로 ‘요구’난 의무로 이해가 되어서는 곤란한 일입니다. 아무리 개척교회라고는 하지만 교회의 필수 비품인 피아노나 성가대 거상조차 마련하지 못한 교회라면 그어려움을 짐작할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를 이렇게 무질적인 면만 가지고 논의를 한다는 자체가 벌써 틀린 일이지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는 사실 피아노나 성가대 비품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신실한 신도들이 모여서 그냥 목사님 모시고 무릎꿇고 않아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하니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의 가정처럼 시앙생활에 서툰 일부 신도들 사이에서 가끔씩 교회의 물질 ‘요구’에 대한 이견을 재기하기도 하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이 아무리 ‘엄청난 액수’의 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과 삶의 모든 것’에 비하면 매우 적은 티끌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거듭 말하지만 헌금이란 결국 그 모든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작은 표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세요. 물질 때문에 이렇게 시험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거나 하는 현실이 나도 참 안타깝기만 합니다.

 

27 무전여행 때 교회에서 냉대당했다

 

나는 무전여행을 좋아한다. 어느 겨울비 오는 날 저녁(지역은 밝히지 않겠음),너무 추운데다가 객지 땅이라 잠잘 곳이 없어 방황을 하던 중 어느 바탈진 주택가 교회 사택엘 찾아갔다. 그러나 예배를 보다 말고 고개를 내민 신체 건장한 목사 내외로부터 들은 말은 “잠자려면 여관에 가야지!‘였다. 그러고는 현관문을 꽝닫아버렸다. 보통 사람보다 더 냉랭했다. 그날밤 나는 얼어 죽을 만치 혹독하 고생을 했다. 그런 일이 있는 뒤로는 주위로터 전도를 받을 때마다 나는 냉소를 보낸다. 위선자들이여!

 

찐빵의 생각 우리가 합리적이 이성을 갖고 생각을 정리해 보자면 잘못의 근원은 젊은이의 ‘무전여행 버릇’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전여행이란 말 그대로 내돈 없이 그냥 공짜 여행을 해보겠다는 심산 그 자체지요?먹고 자고 씻고 목축이고 하는 일들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고 순전히 생면부지의 누군가한테 폐를 끼침으로써 해결한다면 그것이 옳은 일, 양심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생각지 않고 남의 정상적인 반응 만을 섭섭하게 여긴다면 너무 이기적인 행각이 아니겠습니까? 외국의 젊은이들이라면 그런 경우,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일노동을 해서라도 어떻게든지 자력으로 여비를 벌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하나 지적하자면 젊은이의 세상을 보는 시각입니다. 옳은일, 귀한 일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의 이성과 지성으로 능동적인 판단을 하려 하지 않고 전작에 누군가가 내게 어떻게 했으므로 그것이 못내 섭섭하니 옳은 일, 귀한 일도 결국 내 알 바 아니다 하는 식의 무책임한 막된 반응은 누가 보더라도 유치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거나 위함을 받으려먼 내가 먼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며 주님의 말씀이기도 하답니다. 남에게 페를 끼치기만 하면서 남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어리광을 부리는 일은 철없는 어린아이들이나 할 짓입니다. 교회에 다녀보세요 곧 어른이 될 것입니다.

 

28 목사는 결혼을 한다. 그게 벌써 세속적이다.

 

찐빵의 생각 개신교 성직자와 천주교 성직자를 그런 단순한 방식으로 평면비교를한다는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개신교냐 천주교냐가 아니라 성직자 개개인의 신앙심과 신앙적 삶의 실천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의 교리를 잘 모르니까 신부님들이 왜 결혼을 하지않는지 그 까닭을 설명할 재간이 내게 없습니다만, 목사건 간에 인간이면 누구나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일구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지극이 합당한 하나님의 섭리이자 명령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신교는 목사가 결혼을 하기 때문에 싫다는 식의 논리는 젊은이가 말씀 이전에 우선 인생 자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비롯된 선입견의 오류라고 여겨집니다. 편협한 선입견으로 겉어 보이는 형식의 어느 일부만을 보고 그것이 사안의 본질의 양 속단하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물론 목사 중에는 머리 좋은 자녀를 두어 좋은 교육기회를 획득한 경우도 더러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의 일반적인 가정생활을 송두리째 희생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뜻을 구현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실제로 내가 만난 한 선교사님은 가족과 함께 아프리카 빈국 오지에 파송되어 지금 9년째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현지의 풍토병으로 5살 나 딸아이를 슬픔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교사는 지구상의 ‘가장 낮은 곳’인 그 땅에 자신의 뼈를 묻을 각오로 움막 침소안에 자신의 관을 짜 매달아 놓고 선교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까지도 젊은이는 ‘결혼 때문에 세속화한 성직자’로 보려합니까?

 

29 현찰로 돈 내면 나중에 천당에서 갚겠다.

 

찐빵의 생각 우리는 하나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가령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라는한 인물의 생애를 떠올려 볼 때도 과연 그를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세상의 경제관념 안에 끌어들여서 계사적 이간, 타산적 생애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분은 가연 무엇을 얼마나 얻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까시 십자가에 달리셨을까를 우선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지요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얼마나 바라고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우리를 제 생명처럼 아껴키워주셨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나름대로 때마다 물질을 바친다고는 하나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의 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 아주 적은부분에 불과합니다. 가능만 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뜻을 실천하고 그 사랑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것 일테면 생명까지도 바칠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우리 주위에는 실제로 많고 많습니다. 언뜻 젊은이는 경제논리에 밝은 듯이 보이나 그 경제논리가 세상 이치의 전부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재물을 수치로 따져 재는 경제논리보다 훨씬 더 놓은 가치의 덕묵들이 우리 인생에는 얼마든지 있답니다. 실제로 우리 주의에 보면 제 가진 것의 많은 부분을 하나님께 다 드리면서도 세상의 그 어떤 재벌보다 훨씬 더한 행복과 평안과 감사를 누리며 사는 훌륭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세상의 돈은 세상의 일을 위해 쓰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입니다. 그 차이도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30 유흥업을 하는 집안인데 어떻게 예수를 믿나?

 

찐빵의 생각 예수님이 만일 오늘날 우리 곁에 가까이 살아 계신다면 틀림없이 그런 유흥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차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해와 긍휼로 감싸안아 위로하심으로써 저들 스스로가 저들이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헤아려 자성토록 만드실게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의 직업 때문에 예수님을 등지고 살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가르침도 받고 사랑도 받고 구원과 축복도 받아내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은 젊은이 자신이 먼저 교회에 나가 예수님과 만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그런 일들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부자나 가난한 이나 사람이 하루 세 끼 밥먹고 살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하필 우리는 그런 ‘어려운 직업’을 통해서만 밥을 벌어야 하는가에 대한 각성도 자연히 그 다음에 따라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꼽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게 되면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를 예외 없이 다 그분이 손수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주 하나님’, 즉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직업 때문에 지금 겪고 있는 젊은이의 내적인 고충을 십분 이해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열배, 백 배로 더 깊이 이해하고 계실 것입니다.

 

31 부흥집회 가보고 어이가 없었다

 

찐빵의 생각 잘은 모르겠지만 젊은이는 모처럼 부흥회에 가서 속알멩이는 보지 못하고 겉모양만 보고 온 것 같군요. 만일 젊은이가 가서 본 광경이 사실이라면 나부터도 거부감이 일어났겠다 싶긴 합니다만, 젊은이의 표현과 같은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났던 상황일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군요.

젊은이가 무엇을 잘못 보았거나 아니면 젊은이가 운 나쁘게도 정말 질이 낮은 사이비 종파의 집회엘 잘못 갔다왔던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제대로 된 부흥회라면 많은 사람들이 ‘식어가는 믿음에 기름부음을 받고 다시금 뜨겁게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확인하는 은혜로운 자리’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어느 날 우연히 부흥집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신앙적인 거듭남의 놀라운 경험을 한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답니다.

내가 젊은이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신앙의 실체를 무슨 일회용 시험대인양 어디 찾아가서 눈으로 확인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눈을 감고 엎드려 자기 심성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음성을 듣고자 부단히 노력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음만 열면 ‘진짜배기’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계십니다.

 

32 형제, 자매, 장로, 집사......호칭 이해 안 가

 

교회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쓰지 않는 호칭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무개씨, 아무개 양 하면 될 걸 가지고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르는데 어색할 뿐만 아니라 다소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른 들으면 좋은 말 같지만 사실은 지극히 배타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형제, 자매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족속이 다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말은 하면서 어찌 그리 끼리끼리만 놀고 배타적인가. 내가 보기엔 논리에 모순이다. 장로, 권사, 집사 하는 유별난 비사회적 호칭도 특정 계급 사회의 도구로 여겨진다. 끼리끼리 노는 교회 말고, 세상 가운데 탁 트인 교회는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찐빵의 생각 형제님, 자매님은 젊은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편가르고 놀자는 배타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친근감, 동류감의 호칭이라고 가볍게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굳이 따지기로 말하더라도 원래 세상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자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자손드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자손됨을 고백해야 합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고백만 하고 나면 금세 형제 자매가 될 수 있지요. 그것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순리와 화합을 전제로 한 선의의 관행입니다. 당연히 젊은이 자신도 하나님의 크신 진리와 섭리 앞에 자신을 고백하면 형제가 됩니다. 고백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냥 ‘선한 이웃’이겠지요. 그리고 장로, 집사 같은 호칭도 함께 지적했는데 그것은 교회조직을 계급사회로 잘못 본 데서 온 오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의 직급이나 호칭은 계급으로 누르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엎드려 섬기고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사회의 다른 이름은 바로 ‘봉사사회’이지요. 봉사를 제대로 하려면 누구한테나 나름의 일몫이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규범도 필요하겠지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세상에서 교회만큼 ‘열린집단’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산의 유무를 막론하고 배움이 있고 업고를 막론하고, 심지어는 국적이나 인종이나 이데올로기까지도 초월해서 교회는 누구한테나 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교회는 특정 집단 누군가의 소유가 아니라 천하 만인을 위한 하나님 소유의 요람이기 때문입니다.

 

33 가정을 파괴하는 광신적 교회생활 목격했다

 

우리 이웃에 중학교 선생이 산다. 부인은 각종 교회행사는 물론 툭하면 철야예배, 툭하면 새벽기도, 기도원 나들이, 각종 전도행각은 물론 남편이 갖다 준 월급도 생활비보다는 교회에 더 많이 갖다 바치는 바람에 늘 빚을 진다는 소문이고, 그 집 아이들은 엄마가 늘 집을 비우는 바람에 학교공부도 엉망이고, 특히 큰 딸은 불량소녀가 되어 밖으로만 나다닌다. 어느 날 남편은 교편생활도 집어치우고, 엄청난 불화 끝에 결국 그 가정은 풍지박산 되고 말았다. 동네사람들은 종교가 마약처럼 무서운 것이라고 수군댄다. 어느덧 교회는 내게 은연중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찐빵의 생각 이 세상의 어떤 교회에서도 교인들한테 제 가정을 뒷전에 팽개치고 교회에만 몰두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우리의 개개 가정을 말씀과 은혜의 보금자리로 잘 섬겨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교회와 가정 둘 중 어느 쪽이 우선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가정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입니다.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건전하고 건강한 가정의 토양 안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올곧게 뿌리내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원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젊은이가 목격한 그런 특수한 사례로 인해 교회를 ‘공포의 수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34 세무조사 결사반대, 이해 안 돼

 

국법앞에서 또는 국민의 신성한 의무 앞에서 만인이 평등해야 하는데 교회는 독불장군인가? 신성불가침의 성역인가? 국민의 세금은 국민을 위해 쓰인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눈에 드러나지도 않게 들어오는 엄청나게 많은 그 교회 수입을 굼니을 위해서는 쓰지 못하겠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교회가 언제부터 막강한 정부도 무시 못할 정도로 그렇게 어마어마한 압력 단체가 되었나? 물질과 교세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나?

찐빵의 생각 세무조사란 결국 정부가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뜻을 전제로 한 발상일 터인데 그렇다면 그 발상이 우선 잘못된 것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사견입니다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회는 정부의 행정적 장악대상,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동시에 교회의 모든 제도와 모든 인력과 모든 능력과 모든 종교적 성과과 모든 재산은 다 하나님의 것일 뿐입니다. 이 대원칙 아래서 교회는 나름대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사회적인 봉사고 하고 구제사업도 하고 도덕적인 규범도 만들어 운위하면서 우리 사회를 좀더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 나가는 데 일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로 환산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의 여러 가지 좋은 활동은 누에 보이는 부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고 큽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외손이 모르게 하라.... 그것은 곧 하나님의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만인의 평등을 위하고자 하는 기독사상이야말로 근대 정치사의 현주소를 있게 한 민주주의 사상의 근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지역은 오늘날 다 선진국이 되어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일부 지역은 비참한 후진국으로 전락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만일 젊은이의 말대로 우리 교회가 정부의 세무조사에 결사 반대하고 나선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교회의 물질이나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거룩하신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나라를 융성의 대로로 이끌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진정한 애국이라면 우리 교회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앞장서 왔습니다. 지금도 가장 앞서 있습니다.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야말로 세금 몇 푼과 감히 비교될 성질이 아님을 기억하세요.

 

35 양보 모르는 기독교계, 압력집단인가?

 

기독교를 조금만 깍아내리거나 현실적으로 손해가 예상되는 일이 발생하면 교계가 온통 벌데처럼 들고 일어나는 광경을 자주 본다. 종교철학의 참 뜻은 조용히 기다리고 양보하고 말없이 손해를 감수하는 데 있지 않나 싶은데 오늘날의기독교는 그 영악한 현실 감각이 일반 사회의 집단보다 더 지독한 것 같다. 그것이 뭐 꼭 어떻다는 건 아니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튼 문가 논리상 앞뒤가 안 맞는 게 아니냐 하는 느낌을 떨여 버릴 수 없다.

 

찐빵의 생각 실제로 인류의 역사를 보면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소위 종교전쟁이라는 살육전도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아니, 지구촌의 어느 지역에서는 아직가지도 저들 나름의 심각한 종교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참이지요. 비단 기독교뿐만이 아닙니다만, 아무튼 기독교가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실 때, “아, 저들이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구나.”하고 안타까워 혀를 차시겠지요. 크든 작든 이 부분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반성해야 옳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 현실을 돌아볼까요?

 

현재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 인구는 1천 3백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 인구의 1/4이 넘는다는 얘기이지요. 인간이 집단화하면 거기에는 조직이 결성되게 마련입니다. 조직에는 또 책임이라는게 따르게 마련, 그 책임이란 일차적으로 ‘교권수호’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교권이란 교리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이 다 포함됩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 자체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서 우리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니라 타 종교들과 함께 보이지 않는 세력을 형성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이 우리 기독교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양보와 손해’를 감수하면서 말없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까? 순교의 거룩한 피로 얻어진 교권은 우리가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 자체이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정작 중요한 것은 젊은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우리 기독교계가 얼마나 많이 양보하며 참으며 기도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36 죽은 후 사람은 과연 천당에서 영생할까?

 

잘은 모르지만 기독교 교리 중에 교회에 다니면 죽어서도 천국에서 다시 태어난 영생을 보장한다는 말이 있다는데 믿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끝이 아닌가 말이다. 지금이 원시 미신시대도 아닌데 그런 황당무계한 교리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다는 주장도 미안하지만 믿기가 어렵다.

 

찐빵의 생각 우리네 인간 세상이라는 게 당장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결과나 현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이해를 한다는 뜻이지요. 성경의 교리도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만사를 통해 얽히고 설킨 모든 생각과 행동의 결과에서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귀납적 공약수를 엄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말씀들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과연 죽어서도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지극히 쉬운 이 말 하나만을 놓고 우선 생각해 봅시다. 멀리 천국까지 갔다 올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네 가까운 인간사회에서도 영생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육신만 있는 게 아니고 영혼도 함께 있다는 사실마저 부인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영육이라는 단어도 있지 않습니까? 이순신 장군 또한 죽은지 380년이 넘었지만 그 혁혁한 충절 호국정신은 아직도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서 어느 한 순간도 죽지 않고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왕성한 생명력과 더 큰 영향력으로 민족정신의 등불이 되어 옹휘롭게 살아 있습니다. 사후의 세계라면 굳이 먼 데서 찾을 필요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젊은이는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합니까? 천당과 지옥을 따로 어렵게, 멀리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선과 악의 경계를 구분지어 놓으신 하나님의 엄정하신 섭리에 의한 결과입니다. 천당과 지옥은 당장 믿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변할 수 없는 섭리의 뿌리에 대해서는 젊은이가 스스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젊은이 스스로가 영생의 진정한 의미까지도 알아 차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가신 지가 2천년이나 가까이 되었지만 그분은 살아계실 때보다 몇 백 곱절, 몇 천 곱절 더 한 사랑의 위력으로 오늘날 우리 지구촌의 존재가치와 존재의의를 형성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분은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 보좌의 우측에 앉아 우리에게 선과 악,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를 그어 주실 것입니다. 제눈은 믿지 않더라도 진리는 믿어야 그것이 참된 인간입니다.

 

37. 밤에 보면 붉은 십자가가 너무 많다.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과연 그렇게 많이 생겨나야 하는 것인지? 우리 집은 지대가 약간 높은 데 밤에 내려다 보면 시내가 온통 붉은 십자가 투성이다. 심지어 지하층은 술집, 2층은 당구장, 3층은 교회와 전당포, 4층은 잘 기억이 안 나고, 5층은 불교 포교원이 들어있는 변두리 건물을 본 적이 있다. 그런 곳에서 무슨 거룩한 신앙심이 생기겠나 싶다. 각종 교회는 과연 그렇게 많아야 하나? 너무 많이 양산되는 신학생들 때문일까? 죄악이 너무 많은 도시이기 때문일까?

 

찐빵의 생각 몇 달 전 기독교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구 소련지역으로부터 우리나라 선교사의 안식년 귀국길에 함께 따라온 한국인 3세 소녀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소녀들은 우리 선교사에 의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사연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녀들의 첫인상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녀들은 서툰 우리 말로 “서울에 와서 밤거리에 붉은 십자가들이 수없이 많은 것을 보고는 복받쳐 오르는 감격에 마구 눈물이 났습니다. 한국이야말로 하나님의 세상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국 서울이 참 부럽습니다. 구 소련지역은 수십 년 동안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한 동토의 땅이었음을 젊은이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흔히 보는 십자가지만 저들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그렇게 은혜롭고 감사한 축복의 풍경으로 그렇게 눈에 비쳤다는 얘기입니다.

 

한 겨울에 우리나라에 찾아온 동남아 관광객들은 하얀 눈천지 그렇게 아름답고 부러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초록색 나무나 하얀 눈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흔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것들이 귀하고 값진 존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 주었으면 싶습니다. 십자가가 많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를 우리는 모른 채 무심히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의 글에는, 변두리 밀집지역의 ‘멋없어 뵈는 군소 교회들’얘기가 있는데 지하에 술집이 있거나 말거나 당구장이 있거나 말거나 아무튼 도시 변두리 지역의 그런 곤비스런 환경에 사는 사람들한테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하나님의 십자가는 우뚝 서야 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이제부터는 십자가 하나하나를 귀하고 예쁘게 보아주세요.

 

38 개척교회 과잉 경쟁 지겹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 단지 상가 건물에 앞뒤로 층층이 개척교회가 세 개나 있다. 서로 신도끌어오기에 어찌나 경쟁이 심한지 겁나서 얼씬도 하기가 싫다. 주일날 이면 각 교회들이 신도들을 동원하여 저마다 노란색 어깨띠를 두르고 교회 입구 길목을 지키고 ‘호객행위’와 같은 짓을 한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 광경을 보고 쑤군쑤군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한마디로 지겹다. 천주교는 그런 일이 없다는데....

 

찐빵의 생각 미안한 얘기 같지만 젊은이와 같은 경우를 내가 당했어도 아마 비슷한 거부반응이 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얘기가 정말 과장 없는 사실이라면 물론 일부 소수의개척교회에 해당하는 일이겠지만, 그 목적이 아무리 좋은 것이었다 해도 역시 방법론에 있어 전혀 은혜롭지 못한 처사로 지적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소견이 내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그것이지요.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예컨대 똑같은 개구쟁이 짓이라도 내 자식이 그것을 하면 귀여운 재롱이 되고, 남의 자식이 그것을 하면 귀찮은 말썽짓거리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나도 오래 전 동네에서 그와 비슷한 경우를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아, 교회하나를 개척해서 자리를 잡기가 저토록 힘든 것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하는 일의 목적이 교회의 부흥이라는 좋은 쪽의 의욕이 있으이 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열성 신도들의 그런 과잉 태도가 반드시 그 교회 목사님의 지시나 생각이 아닐 확률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마음 약한 목사님들은 자신의 본래 뜻이 아니더라도 기존 신도들의 열성적인 어떤 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만류를 하지 못하는 수가 실제로 허다하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더러 숲 전체를 보려 하지 않은 채 부분적인 나무만 보고서는 숲 자체를 잘못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곤 하는데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나무 몇 그루 때문에 숲 전체를 잘못 넘겨 짚은 일은 없어야 될 줄 압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 곳곳의 많은 개척교회들이 그 여러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참말씀을 실천하고자 남몰래, 말없이 훌륭한 헌신과 희생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맨 처음에는 다 영세한 개척교회였다는 사실가지 아울러 생각해 주기를 권하고 싶군요.

 

39 신체장애 때문에 사람 많은 곳에 안 간다

 

나는 소아마비와 골수염으로 하체를 쓰지 못한다. 목발이 없으면 걷지고 못하는 것이다. 나는 남들이 다 가진 여자 친구 하나 없다. 교회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그것은 나와 같은 사람의 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로 대표적인 곳이 아닌가.

 

찐빵의 생각 개인적으로 젊은이가 매우 두뇌가 영리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젊은이는 대학에서 성적도 뛰어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도 프로고. 독서량도 많아 문필도 뛰어나며, 두 다리가 좀 불편할 뿐 신체가 건강하여 남자다운 두 팔의 완강한 근육은 보기에도 듬직합니다. 훌륭하신 부모님도 계시고, 통기타 솜씨 또한 대단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젊은이는 좋은 교육을 받았고, 무엇보다 나이가 젊습니다.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보장되어 있는 셈이지요. 젊은이는 나보다 시력이 좋고 청각도 좋고 손재주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너무나도 많은 축복 가운데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에 열거한 모든 조건들은 목발을 짚는다는 사실 말고는 훌륭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충분조건을 두루 다 갖추고도 남음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젊은이가 그런 정도의 장애를 이유로 대중 앞에 나서기를, 특히 교회에 나가기를 꺼려한다면 세상에 그것처럼 바보짓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신히 곤고한 자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당장 힘차게 집을 나서기를 권합니다.


- 교회 경험이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40. 각종 모임 참석 강요 너무 많다

 

교회 구성원으로 버티기가 힘들 정도로 교회에는 각종 모임, 집회가 너무 많아서 참 부담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연중 끊임없이 계속되는 부흥회, 각종 사업, 각종 행사, 각종 교육, 각종 직분과 사역 때문에 정신이 없다. 모임에 빠지면 보이지 않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 같아 그것도 은근히 부담스럽다. 내 경우, 직장생활에 쫓기면서 교회가 강요하는 각종 모임에 다 참석한다는 게 참 무리다. 원만한 사회생활과 자기 발전을 위한 현실적인 시간관리에 지장이 많은 게 솔직한 고백이다.


찐빵의 생각 아무리 교회에 성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에는 가끔씩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이 귀찮아 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 우리 인간의 인간적인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지켜야 하는 것은 교회가 본래부터 지닌 사명을 어느 경우에도 외면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바로 예배, 전도, 친교, 봉사라는 네 가지 일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교회의 일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입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즐겁게 신명을 내서 하는 경우가 있고, 마지못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누군가가 만일 타인의 눈치를 의식하여 후자 쪽에 서서 일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의 방식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힘들게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비교해 본다면 너무나도 미미한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일을 할 때의 마음 자세는 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강조하고 싶군요.

 

은혜의 옷을 입고 교회의 일도 즐겁게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얻는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사회생활도 열심히 할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겠지요. 한 가지 일을 하자니 또 다른 하나의 일을 잘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능히 두 가지 일을 모두 즐겁게 잘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41. 기업화된 교회, 웅장한 교회가 주는 위화감이 싫어!

 

외국의 교회는 아음이 참 편하고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귀국해서는 교회에 다닐 마음이 나지 않는다. 치밀 주도한 각종 헌금체계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는 교회! 일반 대기업과 무엇이 다른가?

 

찐빵의 생각 교회가 기업화되어 있다고 한 말은 아마 오늘날의 교회 재정 운영 체계가 그만큼 조직화, 능률화, 효율화를 추구하고 있음에 대한 평가인 듯 싶습니다. 효율화를 추구하고 있음에 대한 평가인 듯 싶습니다. 실제로 큰 교회들에서는 이미 컴퓨터 전산망을 통해 재정관리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살림 규모도 커지고 살림 규모도 커지다 보니 또 그 만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재무 관리 기법이 도입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특히 신도를 하나하나가 귀히 바친 헌금을 낭비 없이 제대로 관리하여 옳은 곳에 정확히 사용 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교회가 헌금 받기를 즐겨 원한다기보다는 신도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제 가진 물질의 일부를 돌려드릴 줄 알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해야 더 옳은 답이 됩니다. 교회는 하니님의 말씀과 신도들의 믿음을 이어주는 항구 역할을 할 뿐인 것입니다.

 

밖에서 외형만 쳐다보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가 하는 여러 가지 좋은 일들에 직접 동참해 보시기를 먼저 권합니다. 이 세상에는 규모가 작아서 좋을 일도 있겠지만, 규모가 커서 좋을 일들도 더 많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군요.


42. 빈민구제 외면하는 교회, 이해 안 돼

 

찐빵의 생각 젊은이가 말하는 빈민구제는 교회의 임무 중 아마 ‘봉사’ 영역에 해당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갖가지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참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압니다. 물론 사회 구석구석에서의 구제사업도 포함됩니다. 먹지 못하는 이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일차적인 일 말고도 예컨대 빈민촌에서 탁아소 봉사를 한다든가, 낙후된 농촌지역에서 영농선교와 함께 부업지도를 한다든가, 식수난으로 고생하는 외딴섬들을 찾아다니며 우물을 파준다든가,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준다든가, 불우노인들을 돕는다든가, 무의탁 장애인들을 맡아 거둔다든가, 윤락여성들을 돕는다든가, 교도소를 찾아 다니며 수형자들을 돕는다는가, 무료 의료봉사를 한다든가, 극빈계층의 법률상담을 해준다든가, 학용품 책 의류들을 수집하여 저들을 돕는다든가 하는 일들을 가지의 개교회 목회 사역자들과 크고 작은 선교단체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땀흘리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43. 교회에는 쓸 만한 총각이 없다.

 

찐빵의 생각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잘 리드’ 한다는 게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으나 젊음이의 기분대로 ‘박력’이나 ‘재미’만으로 ‘괜찮은 남자’의 자격 기준을 삼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그렇게 단세포동물일 까닭이 없습니다. 인간의 품성을 제대로 평가하자면 거기에 얼마나 많은 기준 요건들이 따라야 하는 것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남자라면 우선 온유한 가운데 스스로 겸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남자라면 자기를 반성하면서 상대를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해야 되고 매사에 성실해야 합니다.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인생의 지표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기필코 실현해 낼 수 있는 신념도 갖춰야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이 무엇이고, 소망이 무엇이며,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남자, 그런 남자가 정말 남자다운 남자 입니다. 말을 바로 하자면,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을 거의 다 갖춘 훌륭한 젊음이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사회 입니다. 정말로 괜찮은 젊은 남자를 찾는 것이 교회에 다니는 솔직한 목적 중의 하나라면 교회야 말로 그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적합할 장소일 것입니다. 이제 남자를 바로 볼 줄 아는 눈을 갖추는 일만 젊은이에게 남았습니다.

 

44. 감사할 줄 모르는 탐욕의 메카니즘 . . . . . . 싫어!

 

내가 아는 한에서 교회라는 곳은 늘상 입으로는 ‘범사에 감사할 것’을 신도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탐욕스런 ‘신앙기업’에 다름이 아니다. 모처럼 큰맘 먹고 주일예배에 참석해 볼라치면 그 끝없는 탐욕의 메카니즘에 기가 질리고 만다. 얼른 들으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좋은 말 같지만 기실 그 내용과 행간을 잘 뜯어 보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뭔가를 계속 헌납하라는 탐욕의 연속이다. 교회에 헌금 더하라, 교회에 봉사 더하라, 교회에 순종 더 하라가 결국 그 내용의 본질인 것이다.

 

찐빵의 생각 우리는 흔히 우리가 아까운 소유물을 떼어 교회에 공짜로 바친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유물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한 번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베풂과 허락 없이 어떻게 내가 나의 재물을 소유할 수 있는가 하는 얘기입니다. 젊은이의 생각이 교회의 생각과 다른 점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허락하신 하나님 말씀의 귀한 사업장이며, 따라서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잘과 정신과 섭리를 하나님의 영역권 내 소유로 보는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결론을 내지요, 헌금은 스스로 즐겁게 바칠 때만 은혜가 된다는 점 잊지 말기로 합시다. 내가 스스로 즐겁게 헌금하게 될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도 그중 한 방법입니다. 절대로 헌금에 대해 불필요한 부담감을 갖지 않기를 권합니다.

 

45. 교회에서 진짜 신앙인을 보지 못해 실망했다.

 

말로는 전부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옹졸할 뿐만 아니라 계산적, 타산적, 이기적인 편협한 사람들 일색이었다. 부흥사 등 더로 교계에서 유명한 사람도 보았는데 내 눈에는 순 그 방면의 직업적인 사람들로 보였다. 진심으로 올려볼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찐빵의 생각 인간이면 누구나 신처럼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그 미흡함과 부적함을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는 가운데 말씀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을 변모시키여 부단히 노력하는 그런 분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 사회입니다. 사족처럼 또 하나 곁들이자면 이런 추론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에는 그야말로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이 우리 눈에 그렇게 잘 안 띄는 것이냐.” 하고 물었을 때 거기에는 한 가지 분명한 해답이 나옵니다. 내 관찰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기의 존재를, 자기의 선행을 잘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사회를 세심히 들여다 보년 크든 작든 나름대로 엄청난 눈물과 피와 땀의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복음전도를 위해 성자 못지않은 지성으로 오직 묵묵히 실천 헌신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수면 위, 빙산의 일각만 보고서 깊고도 거대한 빙하의 규모 전체를 속단한다는 아마 그것은 ‘젊음의 특권’ 밖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46. 교회는 또 하나의 계급사회?

 

예수님은 항상 만인을 평등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신을 낮추고 낮은 곳으로 임하라 명령하셨는데 오는날 우리네 교회의 낮은 곳에는 언제나 나와 같은 끗발 없는 평신도들밖에 없다. 보이게 안 보이게 귀족 따로, 평민 따로의 계급이 존재하는 조직이라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형편없는 인간들도 각종 헌금을 왕창 많이 내기만 하면 교회의 귀족이 된다.

 

찐빵의 생각 세상적인 필요목적에 의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내려다 보시는 심정이 그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밖으로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야 할 때가 많고, 보고서도 못 본 척 외면해야 할 때가 목사님들한테는 참 많답니다. 그러면서 혼자서 남몰래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이지요. 맑지 못한 심성을 가진 이들이 말씀의 감화를 통해 언젠가는 맑은 심성으로 돌아오기를 말없이 기다리는 것이지요. 맑지 못한 심성을 가진 이들이 말씀의 감화를 통해 언젠가는 맑은 심성으로 돌아오기를 말없이 기다리는 것이지요. 말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온유한 마음으로 참으면서 기다리는 목사님의 모습, 장로님들의 모습은 평소 우리의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특히 젊은이의 경우와 같은 부정적 시각에는 잘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언의 실체를 헤아리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신실한 자기 신앙을 쌓아 가는 것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자세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코앞의 산도 볼 수가 없답니다.

 

47. 교회는 고리타분해서 싫어!

 

친구 따라서 교회에 몇 번 가봤다. 교회에 가면 재미있는 일이 많다고 해서 간 것이다. 그런데 몇 번을 꾹 참았는데도 갈 때마다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목사님은 만날 고리타분한 얘기만 하고, 교인들도 사고방식이나 행동거지가 고리타분했다.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교회 다니기를 그만두었다. 재미도 없는데 귀한 시간만 허비하고, 게다가 사람들 눈치 때문에 헌금까지 해야 하니 솔직히 말해서 이중, 삼중고를 사서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다. 다른 교회는 혹 어떨지 약간은 궁금하지만 결국 교회는 다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 하고 있다.

 

찐빵의 생각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고 난 다음, 나는 나이 쉰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마음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을 심중에 영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감격을 나는 꿈에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도 두터웠던 검은 먹구름이 걷히고, 그렇게도 괴롭고 거칠기 짝이 없던 사나운 풍랑도 한 순간에 걷히고, 그야말로 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내 인생의 항로에 비추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가물가물 암담했던 시야가 맑은 눈으로 또렷이 트이고, 그렇게 힘들어하던 하루하루의 삶은 한 순간에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닫힌 문이 열리고, 꼬인 것은 바로 펴지니 불면증까지 없어졌습니다. ‘아, 지금껏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 이라는 기도가 절로 내 입에서 터져나왔습니다. 지금 당장 교회에 나가기가 싫다면, 이것 하나만은 염두에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괴롭고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누군가가 내 곁에서 내 운명을 긍휼과 사랑과 전지전능한 힘으로 찌켜주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입니다. 그냥 손을 뻗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놀라우신 그분이 젊은이의 손을 굳게 잡아줄 것입니다. 손만 뻗으십시오.

 

48 양보 없는 일등주의 세속성 환멸

 

누구나 대부분 처음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착한 일 해서 착한 사람’, ‘좋은 일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보람을 누렵보고자 교회에 나가는 것이라 믿는다. 그런 기대감을 갖고 어느 날부터 교회에 나가보기 시작했는데 정작 들어가서 보니까 많이 달랐다. 교회 주변에는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이 참 많은데 그들을 돕는 데는 너무 소극적이었다. 교회로 들어오는 그 많은 헌금은 구제 사업보다 ‘일류교회 만들기 운동’에 우선적으로 쓰이는 것 같았다.

 

하나님을 앞세운 그런 식의 일등주의 추구라면 허구헌날 일류, 일등, 최고, 최대를 외쳐대는 시정(시정)의 장삿속 기업형태와 무엇이 다른가 묻고 싶다. 낮은 곳으로 임해야 된다고 맨날 설교는 하면서도 생생나는 높은 자 리나 명예를 딸 기회라면 죽어도 양보할 줄 모르는 집단이 교회 아닌가도 묻고 싶다. 나는 늘 양보하면서 낮은 곳에서 소리없이 착한 일하는 희생정신을 배우고 싶어서 교회를 찾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느낌이다.

 

찐빵의 생각 교회활동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겉모양만 보면 ‘일부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눈에 띄어 거슬릴지 모르지만 그 속을 오래토록 찬찬히 제대로 관찰하다 보면 그 세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위안 속에서 구원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모른답니다.


교회도 패배하는 교회보다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나름의 합리적인 경영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누구나가 머리로는 높은 이상을 추구하되 두 발로는 현실의 땅을 굳게 딛고 있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산혜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마음의 기근을 앓는 모양이 참 안타깝습니다. 처방은 하나입니다.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우선 마음을 비우고 말씀을 정독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조용히 음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49 세상과 타협하는 기회주의적 설교-속보여

 

정의감이나 시대의식이 결여된 소위 해바라기성 속물 목사들이 싫다. 무조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현실 안주형의 설교를 하는가 하면, 집권 정당의 안보논리나 안정논리를 신도들에게 강요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상가 타협하기만을 일삼는 기회주의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목사뿐만이 아니라 장로들도 한통속이다. 무식해서 그런지 정말 저질 속물이라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런 설교를 듣노라면 은혜를 받는게 속에서 마구 열불이 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지성, 신념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 정신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선거 때는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를 은근히 지지하는 듯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 다음부터 교회에 가기가 싫어졌다. 어디에 좀더 지성적이고 이성적이며 진취적인 ‘열린 교회’가 있는지 지금 나는 알아보는 중이다.

 

찐빵의 생각 정말로 설교 중에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것은 누가 보아도 잘못된 일입니다. 교회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신성한 곳이어야지 세 속의 정치 따위에 관여하는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과격하거나 성급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일면도 함께 있습니다. 연세가 많고 세상 경험이 많은 어른들은 자기의 주관적인 속마음을 쉽사리 열어놓기보다는 주위 여론과 환경 추이에 따라서 어느 정도 적당한 타협선을 찾아 온건심의 형태로 의사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중용지덕이라고 하지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급히 단정하여 어떤 일방의 값으로 매도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통해 오래도록 수양을 많이 한 분들 가운데는 가급적 과격한 급진주의를 피하고 대신 온유와 자비와 인내로써 때를 기다리는 경우가 흔한데 젊은이가 지적하는 경우도 혹 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 인생을 100미터 단거리 경주 선수처럼 사는 쪽보다 42.195킬로미터를 꾸준히 달리는 그런 쪽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삶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50 교인들은 인간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찐빵의 생각 ‘인간적으로 화끈하게 소주 한 잔’이라면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이 왕년에 참 많이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얘기인데 술자리 대화에서 ‘화끈함’이라는 것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한 번 따져볼 만합니다. 술기운을 빌어 나누는 대화라는 게 대개는 과격한 말로 누구를 헐뜯거나 정치체제를 비난하거나 아니면 직장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거나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심중에 쌓인 감정의 찌거기들을 쏟아내버리는데는 다소 효과가 있겠지요.

 

실제로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그것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듣긴 했습니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그렇게 남의 욕이나 잔뜩하고 난 다음에 부산물로 따라 오는 공허감이나 좌괴감은 그냥 만만히 볼 것은 아니었습니다. 친구관계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벽을 허물고 속마음을 털어 놓는게 좋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정도가 지나치면 반드시 휴유증과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상기해야 합니다. 친교나 교우에서도 성경말씀의 가르침과 그에 따른 방식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맨 마지막의 최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지요. 그냥 조금 더 깊이 교회식 친교에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피와 목숨까지도 바칠 만한 헌신의 아름다움과 생명 긴 인간미의 진정한 관계를 그 안에서 기필코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세속적인 재미는 못 구할지 모르지만 대신 젊은이는 사랑의 참된 의를 그 안에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51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서 겁주는 곳은 싫어

 

친구 따라 교회엘 몇 번 가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가만 보자니까 교회 목사는 우리 인간의 여러 가지 약점을 꼬투리로 삼아 마구 신도들을 야단치거나 또는 인간의 완벽하지 못한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무조건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곳은 합리적, 논리적이거나 인간적인 대화나 공감의 장소가 결코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야단칠 수 있단 말인가. 속직히 포켓볼을 하거나 볼링을 치면서 재미있게 놀 수도 있는 그런 시간에 교회까지 가준 것만도 내딴에는 큰맘 먹고 간 터인데 처음보는 사람으로부터 도매금으로 야단을 맞고 나니까 재미가 하나도 없음은 물론 만정이 다 떨어졌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 뒤로부터 나는 교회라는 곳에 대해 흥미도 관심도 갖지 않고 살기로 했다.

 

찐빵의 생각 재미로만 따지자면 교회는 당구장보다 확실히 부족함이 많은 곳입니다. 또 목사님들 나름으로는 성격이나 설교 습관에 따라 그 모양이 각기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찾는 목적이 설탕이나 만화책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금, 충고, 또는 자기성찰을 구하는 데 있다는 생각도 한 번 쯤 아울러 해보시기를 권유합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교회의 재미없음’에 있다기보다는 우리 시대의 즉물적 쾌락 지상주의에 더 있지 않을까 하는, 보다 본질적인 면까지를 함께 반성하게 되는 군요.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하는가, 그 숙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우선 교회라는 ‘재미없는 곳’에 가서 한 번쯤이라도 자신을 낮춰보기 연습을 해보는 것이 필요한 듯 싶은데........, 글쎄요. 지금 이 얘기가 고리타분하다 싶거든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몸이나 마음이 아파서 쓴 약을 마시게 될 때, 왜 약은 설탕처럼 달지 않고 써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지금 이 얘기를 꼭 한 번만 다시 떠올려주시기를 당부하고 싶군요.

 

52. 헌금 명단 공표, 속보인다

 

찐빵의 생각 할 말이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건하고 순수해야 할 주일예배시에 헌금자 명단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좋은 일일수록 남로르게 하라고 가르쳐야 할 교회의 본분을 다소 벗어난 세속적인 행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에는 양면의 진실이 있듯이 교회를 새로 개척하여 모든 살림을 꾸려나가야 할 목회자의 처지도 우리가 한 번쯤은 이해의 눈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헌금은 어떤 경우에도 억지로 무리해서 바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자진해서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도 결코 반겨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수입의 일부를 하나님께 기꺼이 되돌려 드리는 것이 평신도들의 헌금입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교회에 헌금을 드리는 날이 가장 즐겁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젊은이는 아마 알 것입니다. 이러한 헌금의 의미를 아버님께 자연스럽게 설명해 드리고 부담을 갖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교회는 가급적 옮겨 버릇하지 않는 쪽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교회의 좋은 점만 골라보려고 노력하세요.

 

53. 일요일에 늦잠을 잘 수가 없다

 

늦잠도 실컷 잘 수 있고, 목욕탕에도 갈 수 있고, 모처럼 자동차도 손볼 수 있는 날이 바로 일요일 하루 아닌가. 그런 여러 가지 것을 포기하고 무리하고 교회에 꼬박꼬박 참석하자면 자연히 예배시간에는 피로와 졸음을 못 이겨 잠을 자게 된다. 잠을 자다 깨서 보면 남들한테 미안하고, 또 죄의식과 좌괴감도 느껴지는 게 싫어서 아예 교회를 빼먹는 경우가 있다. 나라는 이런 존재가 과연 구제불능으로 많이 나쁜 사람일까?

 

찐빵의 생각 결론부터 말하자면 젊은이는 절대로 구제불능이거나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와 꼭 같은 생각을 나도 가끔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계산으로는 모처럼 일을 떠나서 쉴 수 있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주일 하루야말로 일주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주일은 세상에서 찌든 영혼과 육신을 편히 쉬게 하는 안식의 날입니다.


교회 예배 때문에 육신을 쉴 수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우리 인간의 육신은 육신만으로 제 감당을 해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영혼에 의해 지배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안식을 취하게 되면 육신도 따라서 자연스런 안식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육신이 피곤하다는 것은 곧 영혼이 피곤해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돌보고자 할 것이 아니라 우선 영혼의 안식부터 도모함이 순서일 것입니다. 영혼의 안식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수고롭고도 무거운 영혼의 짐을 우선 주님께 맡겨 내려놓은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럴 수 있는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장소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입니다. 주일예배의 뜻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주님 닮게 가꾸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바로 교회에서의 주일예배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우리 자신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로부터 얻는 기쁨과 감사를 함께 찬양하고 진심으로 경배드릴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주일예배인 것입니다.

 

54. 자유로운 사고와 모험정신 억압해서 싫어

 

교회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조금만 튀는 이상한 행동을 하면 곧 찍힌다.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 그리고 진취적인 모험정신이야말로 젊은의 특권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기계에서 제조된 모형 공작물이나 인형처럼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행동만을 요구한다. 우리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인간이다. 답답해서 교회에 못 다니겠다. 교회에서 젊음을 발산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디에 가서 무슨 짓을 하고 놀란 말인가? 답답한 교회에서는 형식적인 질서와 균형, 화석처럼 굳어진 율범, 그리고 정죄와 회개라는 이름의 감상주의만이 허락되는 것 같다. 교회는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 아, 미치겠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지금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고 있을 뿐이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는 지금 한창 나이의 청년으로서 자기 개성과 자기 인격의 독립기를 통과하고 있는 중이라 여겨집니다. 그 나이 때는 누구나 자기 환경에 대해 다소 반항적이 되고 현실로부터 일탈을 꿈꾸기도 합니다. 교회가 따분해져서 교회를 벗어날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생전 하지 않던 행동을 하고 싶기도 하고 생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장소에 가보고도 싶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머니의 치마폭과 같은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공식이 눈에 선히 보입니다. 그냥 돌아오면 다행이겠는데 사실 많은 상처와 후회를 안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그럴 바에야 그런 손해보는 짓은 하지 않아야 현명한 처신이 됩니다. 열차가 레일에서 탈선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고로 인해 큰 불행을 겪게 되겠지요? 그런 줄 알면서도 만일 어떤 생각을 잘못 먹은 열차가 하나 있어서 “아, 맨날 똑같은 레일 위를 달리다 보니 따분하고 답답하구나.”하고 이제 제 궤도를 이탈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하지요? 교회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인생 운행을 약속할 수 있는 탄탄한 레일과 같습니다.

 

요란하게 기적을 몇 번 울려서 스트레스를 해소한 다음, 그런 다음에는 심기일전해 자기에게 주어진 레일을 감사하게 달리는 것이 현명한 열차의 선택일 것입니다. 전사의 갑옷은 답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갑옷은 화살과 독침을 막아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줍니다. 교회는 바로 우리의 갑옷이요 레일입니다. 둘의 몇 가지 공통점을 안전, 감사, 그리고 은혜입니다.

 

55. 교회에 안 가도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않나?

 

나는 하나님의 존재름 믿는 사람이다. 한때 교회 청년부 생활도 했다. 그래서 내게는 하나님이 확실하다. 그러나 교회에 가기는 싫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 혼자 내 방에서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하면 기분이 좋은데 교회에 가기만 하면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스트레스란 주로 교회의 제도나 형식주의에서 오는 것, 그리고 사람들끼리 부딪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가깝게 모시기 위해 작년부터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참고 교회에 계속 나간다면 자칫 하나님조차 멀어질까봐 겁난다. 반명, 궤변 같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내 생활도 옛날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진실하고 건실하다.

 

찐빵의 생각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갈 때 나를 전도한 친구 윤형주 장로가 그러더군요. “교회에서 상처받는 사람도 더러 있다오. 교회도 역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기 때문이지요. 3년 동안 찾아다녀도 찾지 못하던 악질 빚쟁이를 어느 날 교회에서 마주쳤다는 사람도 있답디다. 그러니 교회에 갈 때는 사람들을 본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만나로 간다고 생각하시오.”

 

믿음이 깊은 윤형주 장로는 교회를 ‘사람들이 모인 집단’으로 일단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결함 투성이의 인간’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사회를 모든 면에서 완전한 조직집단으로 보려 하는 기대심리를 갖기가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면들 가운데 그 기대심리가 하나라도 적중하지 않을 경우, 크나큰 실망감에 휩싸이거나 심지어는 허망감과 배신감에까지 이르는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부터 부족한 인간, 또는 인간사회가 완전할 까닭이 없습니다. 교히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인하고 스스로의 죄를 회개하려는 이들이 ‘말씀’의 거울에 자신의 한계를 비춰보기 위해 모인 집단입니다. 미국의 종교가 매카나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것은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의 실천’이라는 말이 여기 등장합니다. 실천 가운데는 회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포함되어 있고, 용서도 포함되어 있고, 구제와 교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도와 선교가, 봉사와 헌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공동체생활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실천’들은 방안에 앉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자폐증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 방구석의 자기한계로부터 탈출하여 우선 밖으로 나오기를 젊은이에게 권합니다. 말씀의 성전을 다시금 올려다 보시기 바랍니다.

 

56 목사의 지적 수준이 낮은 것 같다

 

내가 겪어본 목사님의 설교는 이 복잡다난한 현대사회를 너무나 단순하고 고루한 흑백논리로만 판별하고 있었다. 문학이니 예술이니 심리학이니 또는 인류의 정신사조니 사상적 변천이니 따위를 이 목사님이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적이 있는지 의심이 갔다. 지적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막무가내식의 그런 설교는 교육을 받지 못한 할머니 신도들에게는 통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답답하고 공허한 생각이 들어서 교회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나는 종교에 대해 지금도 관심이 있기는 있는 편이다.

 

찐빵의 생각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참된 신자가 교회에 가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만 보인다.”고 말이지요. 실제로 우리 속담에도 그 비슷한 “글 못쓰는 녀석이 붓타령만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표현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목사님의 설교 수준을 탓하기 전에 먼저 복음의 말씀을 수용하는 자신의 마음 자세에 혹 더 큰 원인이 있지 않을까를 먼저 반성해보라는 조언도 한마디 해주고 싶군요. 적어도 교인들 앞에 나선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여 그것을 우리 평신도들에게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명을 받은 전문직으로서의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평신도 입장에서 목자의 자질을 의심해야 하는 경우처럼 불행한 일도 없을 터이지만, 그러나 이단 사이비 종파가 아닌 다음에야 목자가 어린 양들한테 옳지 못한 길을 가라고 인도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이 대목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도하는 방법과 기술이 다소 정교하지 못하다거나 또 설교의 매너가 젊은 신세대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는 혹 있을지 몰라도 그 말씀의 ‘수준’을 의심해서는 안되리라는 생각입니다. 원래 배부른 사람은 산해진미도 성에 차지 않는 법이지요. 젊은이 스스로가 하루 빨리 복음의 말씀을 간절히 구하게 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57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보이지도 않는 존재에 대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인지?
찐빵의 생각 하나님은 영겁 저쪽의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안에 가득 차서 살아계십니다. 하나니은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느끼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부터 백까지를 다 만드시고 그리고 하나부터 백까지를 다 일일이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은 다 하나님의 섭리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뜻의 동작’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잡혀 보이지 않을 따름입니다. 차원의 단위가 한시적인 우리 인간과는 다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 뱃 속의 태아가 제 어머니를 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의 탯줄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뱃 속의 태아가 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만일 제 어머니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우를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지구의 자장이나 인력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생체의 유전인자나 모든 동식물에 해당되는 생명세포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 생명세포의 성장체계나 소멸과정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주의 은하계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홀몬 분비나 엔돌핀, 비타민 성분들, 각종 영양소들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고 하면 이쯤해서 우리는 항복을 해야 합니다.

‘있다’와 ‘없다’를 가름짓는 기준은 눈에 ‘보인다’와 ‘보이지 않는다’가 아니라 ‘안다’와 ‘모른다’가 되어야 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시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보다는 볼 수 없는 사물의 존재가 훨씬 더 많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엄존하심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우리 인간이, 대자연이,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세상만사에서 왜 악은 반드시 패하고 선이 반드시 승리하는 것입니까? 왜 선한자에는 반드시 축복이 내려지는 것입니까? 이 엄연한 섭리 앞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겠습니까?

 

58 교회 분쟁, 종파간 힘겨루기 이해 못해

 

찐빵의 생각 분쟁이나 파벌의 발생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가르침인 ‘순종’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갖고 그 내막을 잘 들여다보노라면 그것들이 대부분 저마다 발전적 돌파구를 찾기 위한,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몸짓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답니다. 또 분쟁이 정말 실제 분쟁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개신교의 언로가 그만큼 열려 있다는 뜻에 다름이 아니지요. 상호 의견 제시가 자유롭고 불만의 표출이 자유롭다는 것은 그 열린 언로가 아직은 음지에 있지 않고 양지에 있다는 뜻이라고 나는 좋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언로가 열려 있으면 다소 시끄럽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썩어서 곰팡이가 필 염려는 없는 것이겠지요? 교회의 내분들도 그런 주된 내용은 서로가 다투어 보다 발전적이고 상향적인 가치를 추구하자는 것이지 결코 세상의 풍속처럼 자리다툼이나 이권다툼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어느 경우, 그 방법들이 다소 세련되지 못하여 보는 이들을 은혜롭지 못하게 만드는 수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참으로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답니다. 방법이나 모양새만 보려 하지 말고 그 속에 흐르는 참 뜻을 들여다 보려고 노력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그런 종파의 다양성이 바로 우리 개신교 발전의 활력소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함께 헤아려야 합니다. 당연히 나는 그것조차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확일로 인한 침체나 딜레마보다는 다양성이 서로 경쟁하며 공존 발전하는 이쪽이 오히려 역동적 소지가 많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59 이중인격자들 많아 교회가 싫어져!

 

교회의 중책을 가진 사람들이 도덕적인 면은 물론, 각종 비양심적인 사회적인 비리까지 저지르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좋은 말을 앞세워 근로자들을 착취한다는가, 탈세를 밥먹듯이 한다든가, 경찰 등 공무원과 결탁하여 토착비리로 지탄을 받는다는가, 부도를 내고 달아난다든가, 뇌물을 먹고 시침뗀다든가...., 이 모두가 이중인격자들 아닌가.

 

찐빵의 생각 교회에 이중인격자가 많다고 했는데, 그 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앞의 ‘교회에’를 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면 우리 인간은 원래가 이중, 삼중, 사중인격자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가변적 심성을 36국면으로까지 나눈 적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도 누구나 순간적으로 악인이 될 수 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 가운데서도 선한 감정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고 오 헨리는 말하고 있습니다. 직립보행 상태로 머리가 좋고 혀가 좋아 일견 만물의 영장인 듯이 여겨지는 것이 인간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간교하고 악랄하며 가장 비열할 수도 있고 추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어찌 비단 이중인격뿐이겠습니까. 일찍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인간의 근원적 죄악의 소지를 다 알아차리시고, 그 모든 죄를 한 몸에 다 뒤집어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중인격, 삼중인격의 원죄적 숙명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회개하여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완벽한 인간이라고 치부하는 데는 그래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그리스도는 미천한 우리 인간에 대해 한 번도 ‘환멸’을 느끼시는 적이 없으시답니다.

 

60 헌금따라 사람대접 달라

 

찐빵의 생각 목사님들은 머리가 좋은 분들입니다. 신앙심이 범인들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분들입니다. 세상의 고난의 인내로써 감내하며 예수의 형상처럼 살고자 늘 기도하는 분들입니다. 자신이 그 길을 선택했고, 그로써 또 하나님에 의해 당신의 종으로 선택받은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물질 확보에 눈이 어두워 자신이 선택한 귀한 길에 스스로 세속의 흙탕물을 끼얹을 까닭이 없습니다.

 

성직자의 시련 제1조가 바로 물질 기준에 의한 세상 평가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그분들입니다. 물질로부터 초월해 있지 못하다면 결코 목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신도 입장에서 목회자를 왜곡되이 의심하거나 폄하하거나 하는 것으 믿은 이의 신분상 상당한 죄악에 속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보는 시각이 비뚤린 사람의 눈에는 비뚤린 사물만 보인다지요? 먼 발치에서 사시로 목사님을 보려 하지 말고 아무때나 가까이 다가가서 스스로 목사님의 따뜻한 손을 잡아보시기 권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얼굴을 바로 올려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관계의 첫출발입니다.

 

61 교회의 단순논리에 내 지적 사고력이 퇴행?

 

미안한 얘기지만,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서 하는 얘기들은 너무 단순하다. 선 아니면 악, 건전 아니면, 퇴폐, 열심 아니면 나태, 사랑 아니면 저주라는 식의 이분법적 논리뿐인 것이다. 이러다가는 이 젊은 나이에 내 왕성하고 분방해야 할 지적 사고력이 노인네들처럼 단순화되고 퇴행하는 것은 혹 아닌지 은근히 걱정될 때가 많다.

 

찐빵의 생각 ‘인간적’으로나 정서적, 감정적, 사상적으로나 성경 안에는 우리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느낌의 예범들이 넘쳐나리 만큼 많이 담겨 있답니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경 얘기를 바탕으로 한 문학작품들이나 영화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노라면 참으로 다양한 갖가지 형식과 종류의 사랑이 등장합니다. 인간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배신과 비리와 부도덕, 패륜이 등장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인간군상들이 삶의 양태와 갖가지 복합적인 감정들이 놀라우리 만치 세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거울삼지 않을 수 없는 무수한 얘기의 사례들이 엄청나게 등장합니다. 그 다양한 얘기의 재미와 스케일에 압도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비단 젊은이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성경에 등장하는 얘기나 논리들을 ‘단순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필경 성경을 제대로 탐독해보지 않은 이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젊은이가 ‘지적 사고력의 퇴행’을 걱정하고 있는데 인간의 지적 사고력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어디로부터 왔는가, 또 그것이 애초 누구로부터 주어진 능력인가를 한 번 찬찬히 생각해 보시기 권합니다. 우리 인간을 애초에 누가 지으셨는가를 떠올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든 능력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생각해 본다면 젊은이의 너무나도 철없는 그 기우가 우습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말슴은 ‘퇴행’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길이 올바르도록 밝게 비취 인도해 주는 매우 전진적이고도 발전적인 거대한 횃불입니다. 단언하건대, 성경말씀이 비추는 대로 우리가 살 수만 있다면 그 길은 지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가장 완벽한 궁극의 길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희망과 용기와 지혜와 지식을 얻어 왔는지를 생각해 보기 권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좇아 학문적으로 성공해 왔는지를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위인들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제 정치적, 사상, 예술적 업적을 쌓아 왔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우리가 추구했거나 추구하고 있거나 추구해 나가야 할 모든 가치와 질문과 해답들이 우주적 차원으로 가득 담긴, 진정한 지혜의 보물창고가 바로 성경이랍니다.

 

62 마음의 터놓을 깊은 친구가 교회에는 없다

 

행복이 있으면 번민도 있듯이 인생이라는 게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버인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맨날 미소띤 얼굴로 양지 흉내만 내면서 교제하자니 속직히 깊은 맛이 없어 답답하다. 그래서 내 진자 친한 친구 몇몇은 교회 바깥에 있다. 가끔 친구들 마나서 소주 한잔 탁 멀고 속마음 다 털어내놓고 꽥꽥거리고 나면 교회생활에서 은근히 받은 스트레스가 확 풀려서 기분이 참 좋아진다. 인생이라는 게 그래야 인간적으로 자연스럽지 않나? 모르겠다.

찐빵의 생각 지금껏 교회생활을 ‘슬슬’했다고 했지요? 거기에 원인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깊은 친구를 사귀지 못한 것은 지금껏 젊은이가 교회의 사람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깊이 들아가 보세요. 그 안에 오히려 인생이 온갖 희비애락이 다 있습니다. 번민도 있고, 눈물도 있고, 차마 말이나 글로 다 형용하지 못할 엄청난 사연들이 너무나 많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소주 한 잔 먹고’ 사람을 상대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깊고고 깊은 참회의 심정을 여한없이 다 토로하는 것이지요. 요컨대 젊은이가 하나님의 말씀 능력 가운데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세상의 인정 속에서 해답을 찾겠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으니까 ‘답답함’이 그렇게 스트레스로 쌓이는 것입니다. ‘깊은 친구’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니까 깊은 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지 내가 만일 먼저 허심탄회하게 마음의 문을 열어놓는다면 어느 환경에서도 의기 투합하는 친구를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가 교회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한테 혹 있지 않나를 반성해 보기를 권합니다. 나도 괄호로 맺지요.(그렇다고 해서 ‘족발에 소주 한 잔’의 긍정적 가치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님).

 

63 진화론을 전면 부인하는 교리 못 미더워

 

인간의 근원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이빨이 안 맞으니까 다른 교리도 미덥지 못하다.

찐빵의 생각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이 범하고 있는 실수 가운데 가장 큰 거이 바로 학교에서 진화론만 가르치게 하고 창조론을 가르치게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무려 1세기 가까이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지요. 실제로 다윈은 젊은 시절에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원시적 생활을 하는 부족을 찾아내어 저들이 바로 유인원의 한 족속이라고 공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그가 다시 섬을 방문했을 때 놀랍게도 그 부족은 그 동안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 다니며 문명생활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다윈의 진화론을 의심하는 과학자들이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왕년에 진화론을 숭배하던 학자들도 지금은 “종에서 종으로 변화하는 대진화의 증거는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간이 라미테쿠스와 같은 작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였다는 어떤 증거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회에서 배운 지식을 잠시 소개하지요. 유명한 해부학자 주커만 경이 진화론자들이 유인원의 뼈라고 주장하는 유골들을 조사한 결과 그것은 원숭이의 뼈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 소위 자바인의 뼈라고 주장하는 유골의 경우, 조사 결과 머리뼈는 원숭이의 것이었고, 대퇴골은 인간의 뼈로 나타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들의 발견장소가 15미터가 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바인의 뼈를 처음으로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듀보아 같은 학자로 죽기 직전, 자신이 발견한 것이 꼭 유인원의 뼈는 아닐 거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화석으로 남아 있는 유골들도 사실은 원숭이 뼈 아니면 인간의 뼈였던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의 뼈도 유인원의 뼈가 아니라 인간의 뼈입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종교재판을 받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당신 종교인들은 최고의 과학자들이었고 지성인이었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성경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당시의 과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의 과학적인 주장이 당시대의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1세기나 지배해 온 진화론을 우리시대의 지식계급이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요. 유전인자 연구의 권위자인 칼 박사, 윌슨 박사 등이 북미주, 아프리카, 유럽, 중동, 아시아, 뉴기니아, 호주 등지의 원주민 147명의 태반을 조사한 결과 이들은 모두 한 여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우리 인류 모두는 하나님의 자손, 즉 노아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64 교회에서 연애하는 것 많이 봤다

 

찐빵의 생각 같은 교회생활을 하니까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가 많겠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말씀의 축복 속에서 좋은 생각으로 좋은 삶을 살 확률’이 훨씬 높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가능만 하다면 나는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세계 안에서 연애를 많이 하기를 바랍니다. 그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젊은이들이 바깥세상에서 노는 것보다는 교회 안에서 노는 것이 훨씬 건전하고 안전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서 청춘남녀가 서로 아름다운 사랑을 키우다가 그러다가 뒷날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내가 무엇보다도 부러워해 마지 않는 ‘모태신앙’의 자녀를 출산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느냐 싶기 때문입니다.

 

마음문을 활짝 열고, 일단 교회세계 안으로 들어가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남들이 무엇을 하는가를 관찰하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지 마시고, 나 스스로가 무언가를 하는 능동적인 젊은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는 주연 따로 조연 따로가 없습니다. 스스로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가 다 주연이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젊은이도 교회세계안에서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누군가를 마음놓고 사랑하십시오.

 

65 엉터리 목사 많이 있다

 

헌금도 말고, 매매도 말고, 그냥 돈과는 일절 상관이 없는 그런 교회는 혹 어디 없을까?

찐빵의 생각 어느 종교나를 막론하고 성직자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어서 일까요? 성직자의 비리에 대한 기사들, 소문들은 나도 더러 알고 있습니다. 고해성사 때 애정고백을 듣고 파계해버렸다는 신부 얘기도 들었고, 밤이면 가발 쓰고 유흥가를 출입한다는 중 얘기도 들었고, 남의 재산을 탐한 나머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가며 사리사욕을 꾀했다는 목사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지 아무튼 세상이 그렇게 돼가고 있네요. 그러나 세상에는 오로지 말씀이 명하는 바에 따라 누구보다도 가장 낮은 곳에서 오롯한 희생과 헌신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훌륭한 성직자들이 백 배 천 배나 더 많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일부 지방의 어떤 생선에 일시적으로 비오브라 균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평생 생선을 먹지 않고 사는 바보가 되어야 옳습니까?

사과 상자 안에 가끔씩 썩은 사과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평생 과일을 먹지 않고 살아야 옳습니까? 서울 시내 어느 지역의 공기가 특히 탁하다고 해서 평생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수많은 훌륭한 교회들과 수많은 훌륭한 성직자들이 헌신 사역하고 있는 사회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도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른답니다. 그냥 단순한 시각 차이일까요?

 

66 뭔가 달라야 한다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기독교인이면 행동거지 하나하나까지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시선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나는 자유인이고 싶은데, 그리고 인간의 감정은 가변적인데 어떻게 맨날 똑같은 교과서적 모범생 노릇만 꾸며 다닐 수 있나? 서양사람들은 종교를 믿어도 늘 누구나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우리나라만 유별만 것 같다. 으......지겨워!

 

찐빵의 생각 사실 처음 한때는 나도 젊은이와 모습이 비숫했습니다. ‘지겹다’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냥 무언가 몸에 잘 맞이 않는 옷을 입었을 때처럼 다소 불편했지요. 그러다가 차차 익숙해지니까 지금은 참 편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는 몸과 마음이 자유롭긴 했지만 불안했지요. 마치 어두운 밤에 낯선 비포장도로를 뒤뚱거리며 달릴 때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밝은 대낮에 잘 놓아진 레일 위를 안전하게 달리는 듯한 기분입니다. 실수할 염려가 없어 좋고, 충돌한 염려가 없어 좋고, 구렁텅이에 빠질 염려가 없어 좋고, 방향을 잘못 잡아 헷갈릴 염려가 없어 언제나 마음이 놓이니 그것이 참 좋습니다. 마음이 마냥 편하니까 남의 시선을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젊은이의 경우처럼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현재 자기의 생활이 무언가 믿음의 양심에 비추어 약간씩 잘못되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자유분방한 젊은 나이의 사람들한테는 기독교적 삶이라는 게 더러 하나의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족쇄를 바로 보는 일입니다. 언뜻 그 족쇄라고 여겨지는 것이 바로 인생의 안정행로를 약속하는 레일이자 자기를 사탄으로부터 온전하게 지켜주는 갑옷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에 얽매여서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마시고, 스스로 조금씩 마음을 크게 키워가면서 그 형식을 하나씩 마음의 우리 안에 거두어 길들여가는 젊은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남의 시선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다짐이자 소망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고 있습니다.

 

67 교회비판 절대 함구는 불문율인가?

 

어릴 때는 잘 모르고 그냥 교회에 다녔는데 철이 들면서 보니까 문제점들이 눈에 하나씩 띄기 시작했다. 교회는 한마디로 매우 보수적, 폐쇄적, 이기적, 권위적 집단이다. 대표적인 것이 누구도 교회제도를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비판을 하는 즉시 사탄으로 매도된다. 건전한 발전적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다. 중세의 로마 교회들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나라 교회도 대대적인 종교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내내 이대로라면 나는 교회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이건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찐빵의 생각 내가 알기로는 교회에서 금기가 되어 있는 것은 교회비판이 아니라 그 비판이 왜곡 비약하여 자칫 하나님 비판으로 이어질까봐 그것을 금기시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만의 하나라도 하나님의 비판, 또는 그에 준한 비판적 태도가 현실로 나타나거나 그럴 우려가 발생한다면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될일이지요.

 

하나님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오롯이 엎드려 순종하고 복종할 절대의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 인간에게는 그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을 비판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첨삭 수정하거나 할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속 교회에서 근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아무튼 만의 하나라도 교회 내에서의 인간적인 갈등이나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하나님의 성전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교회가 어떤 특수한 인맥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이기 때문에 가령 연령이 높은 계층과 젊고 진취적인 계층간의 의견차이가 능히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혹 개선 노력에 접근하는 이들의 방식에 있지 않을까 가능한 일일까요? 개혁도 하나님이 필요하신 때를 골라 하나님이 하신일이 아닐까요? 교회의 부분적인 나무에 지나치게 민감해 하는 대신 교회의 큰 숲을 보고자 하는 온유의 태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68. 사기꾼 목사를 봤다.

 

우리가족은 모두 교회에 나가다가 지금은 천주교 성당에 다닌다. 어차피 나는 그 어느쪽도 별로 열심인 편이 아니지만, 아무튼 우리 가족이 천주교로 돌아선 데는 사연이 있다. 우리교회의 목사가 신도들의 돈(교회 돈을 포함)을 떼먹고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해외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며칠 전만 해도 하나님을 소리 높여 부르며 눈물로 기도하던 목사가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 얘기를 LA에 있는 친척한테 했더니 미국에서는 그렇게 해서, 또는 다른 핑계로 들어와 주저앉아버린 사기꾼 비슷한 불법 체류 목사들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저 한테 말하고 싶으실테지만, 그 사건은 내 평생 잊혀질 것 같지 않다.

 

찐빵의 생각 사실 이 항목을 싣지 말고 그냥 빼버릴까 생각하면서 이 글쓰는 작업 자체를 며칠 동안 덮어놓았다가 지금 마음을 굳게 다져먹고 다시 계속하고 있는 중입니다. 힘이 들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게 실로 얼마나 교활한 영물인가 싶고, 또 가끔씩 종교나 신앙이라는 게 그렇게 나쁜 이들의 도구로도 쓰이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냉정을 잃지 말고 사안의 본질을 가려서 생각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줄 압니다. 만의 하나라도 젊은이는 문제의 핵심을 기독교냐 천주교냐의 이분법으로 비교하지 말기를 우선 바랍니다. 성경에도 보면 그 충실하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배신한 자가 끼어 있었지요? 나라의 대통령 중에도 더러는 비리 인물이 있을 수 있고, 훌륭한 학교 선생님이나 뛰어난 예술가들 가운데도그릇된 사람은 끼어 있을 수 있습니다. 멀리 있는 남의 얘기를 끌어올 필요조차 없습니다.

 

말을 서로 안 해서 그렇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아도 알게 모르게 나쁜 죄악을 얼마나 많이 짓고 오늘날까지 살아왔습니까? 열 번 회개하고 반성하고 기도하고 하는 가운데서 잠시나마 사탄의 유혹에 빠지게 되면 다시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매달려서 조금이라도 죄를 덜 짓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가든 성당에 나가든 아무튼 젊은이가 좀 더 신앙의 깊이를 쌓는다면 언젠가는 그 목사도 용서할 날이 올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그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지요? 이 사실 하나를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69.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어

 

중학교 때 한동안, 그리고 고교 때도 1학년까지는 가끔 교회에 다녀봤다. 그런데 대학에 올라온 이후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그 ‘어쩐지’ 에 대해서 지금 곰곰 생각해 보고 있는데 결론은 이런 것이다. 교회의 각종 제도가, 각종 불문율이, 교회 사람들이 각종 형태나 눈치나 수준이 싫은 것이다. 교회가 지능적으로 교묘히 돈을 밝히는 것도 물론 매우 싫다. 이런 생각을 무례하게 써서 미안하다. 그러나 솔직히 예수님은 좋다. 교회에 나가서 그냥 혼자서 예수님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아무 교회에나 기꺼이 나가겠다. 당장 오늘이라도!

 

찐빵의 생각 젊은이는 언젠가 반드시 신실한 신앙인으로 제 모습을 만들어나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지금 내게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훌륭하심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사실만도 얼마나 반가운 가능성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것은 누구누구처럼 멋진 사람이 되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수준 높은 사람으로 고고히 살겠다는 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수준’에 맞지 않는 세리와 창녀와 장사치와 좀도둑들을 제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멀리에 있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래서 거짓말이 됩니다. 에수님을 사랑하려면 우선 가까이에 있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러메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벽하지 못한 그 문을 사랑으로 감싸안고 통과해야지만 비로소 예수님 근처에 접근할 자격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 세상에 오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70 내 능력 이상의 교회직분을 강요한다

 

나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내게 성가대원이 되라 하고 또 주일학교 교사를 맡아야 된다고 은근히 강요한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야 가르치고 말고 할 게 아닌가. 교회에 갈 때마다 스트레스가 보통 아니다. 그래서 요새 갈등이 심하다.

 

찐빵의 생각 믿음이 돈독한 이들은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 않고 교회를 섬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내 마음문을 모두 활짝 여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를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보는 곳으로 생각하지 말고 내 생활과 활동반경의 중심부로 생각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릴 것이지만 그 일이 말처럼 하루아침에 쉽게 되기는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우선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하고 당분간 시간을 버십시오. 그 다음에 따르는 문제가 소위 능력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으로부터 완벽한 능력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교회는 젊은이에게 완벽한 능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것을 드리면 그것이 바로 교회를 잘 섬기는 자세가 됩니다.

 

71 꼴보기 싫은 사람 많아 교회에 못 가겠다

 

교회생활 가운데 제일 지겨운 것이 저 혼자 잘난 척, 저 혼자 경건한 척하는 꼴 보기 싫은 사람들과 대하는 것이다. 이중인격자로 내 눈에 보이는 그런 사람들한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스스로 지도자인척하는 태도도들이다. 겉으론 겸손하지만 속으로는 자기과시욕에 젖어 있다. 나서기 좋아하고 생색내기를 좋아한다.

 

찐빵의 생각 세상을 살면서 남과 자신을 함께 돌아볼 줄 알면 어른이고, 남의 행동만 탓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면 아직 정신적으로 어린아이지요.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자기와 행동반응이 다르다고 해서 미워하고 꼴보기좋차 싫어하자면 굳이 교회생활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교회는 바로 ‘예수님 공부방’과 마찬가지니가요. ‘예수님 공부방’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른 정반대의 생각을 얻는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자기의 마음속에 혹 교만이라는 조그만 마귀 한 마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살펴보지 않겠습니까? 고놈만 제거해 버리고 나면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뻐 보일텐데요.

 

72. 이성교제에 제약을 받는다

 

찐빵의 생각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기의 중심’을 갖고 산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길만이 오직 유일한 진리의 길이요. 영원한 생명의 길임을 올바로 헤아려 아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남자가 만일 젊은이 곁에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남편감입니다. 그런 남자가 가는 길을 함께 갈 수 있다면 젊은이야말로 가장 성공적인 사랑과 결혼을 약속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의 ‘매력’이 있습니까? 똑바로 깨인 눈으로 세상과 자신의 미래와 그리고 남자의 참된 값어치를 볼 수 있기 바랍니다.

 

73 음치 열등감 때문에 찬양 재미없다

 

찐빵의 생각 찬송이나 찬양은 ‘멜로디를 붙인 기도’입니다. 그 멜로디를 소화하는 기술은 사람마다 각기 달라 원래부터 개인차가 심한 법이지요. 훈련된 음악 전공자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조금씩은 음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숲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새들이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까? 만일 숲 속의 새들이 모두 하나 같은 목소리밖에 내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참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제 자식이 노래 부르는데 음치라고 해서 그 노래 듣기 싫다 하실 부모님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음치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잇습니다. 멜로디를 잘 소화하지 못하는 대신 남조다 더 열심껏 찬송할 줄 아는 귀한 심성을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심성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키워가는 것입니다.

 

74 지옥 협박, 고립주의 이해 안 가

 

찐빵의 생각 이미 오래 전 얘기지만 나는 잠시 동안의 교회생활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의 교회생활 경험을 갖고 있다. 당시의 교회시절을 떠올리면 언뜻 기억나는 게 무시무시한 지옥 불구덩이 협박이고, 그 뒤에는 항상 겁을 주는 징벌협박(채찍)이 따른다. 속 보이는 당근과 채찍......., 사람을 뭘로 보는가. 나는 교회식으로 세상과 고립된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화목하고 친근하게 잘 지내려는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그 뜻을 우리는 섭리라고 부릅니다. 우연과 섭리를 구분해서 볼 줄 아는 혜안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말로는 왜 그렇게 처참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늘아래 최강을 자랑하던 로마제국은 왜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오늘의 우리 인류 위에 덮여온 에이즈의 공포나 환경재해의 공포는 애초 어디서부터 그 사단이 비롯되었는가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속의 교리를 당근과 채찍과 술수쯤으로 허술히 여기는 젊은이의 비뚤린 시각이 심히 염려됩니다. 또 젊은이는 세상의 가치를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해석의 오류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가치를 존중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죄악투성이일지라도 우리는 세상을 사랑과 봉사와 희생으로 껴안아야 된다고 예수님께서는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75 나 자신의 이중생활이 가책스러워

 

찐빵의 생각 동물들은 성욕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동물들은 성욕 표출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만물 가운데 우리 인간만이 성욕과 관련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삽니다. 사회적 동물이자 생각하는 동물인 우리 인간에게는 표출의 자유 못지 않게 규범과 상식에 따른 절제의 의무가 함께 지워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젊은이는 절대로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조율의 의지가 다소 약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신실한 믿음의 생활훈련을 통해 육을 압도할 수 있는 영의 힘을 길러나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실적으로 따지더라도 인생을 길게 보면 본능의 시련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76. 아전인수와 자기합리화의 도구가 성경인가?

 

교인들을 만나는 일이 싫고, 목사의 설교가 듣기 싫은 것은 매번 들을 때마다 저들이 한결같은 아전인수와 자기합리화의 선수들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당할 때라도 교인들은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아전인수를 일삼는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게 있군요. 교인들이 성경말씀을 찾아가며 자신과 타인을 위안하고자 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의 노력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말씀 밖에서 보는 부정적인 시각에 의해 혹 그것이 아전인수나 자기 합리화로 보였다 해도 제반 인간사의 갈등과 질곡을 진리의 기준에 입각해서 분석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려 하는 자세야말로 우리 기독교인들의 고유한 미덕이 아닌가 나는 믿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 이상의 가치, 성경 말씀 이상의 기준이 될 만한 그 무엇을 적어도 우리시대에는 달리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도 이제부터나마 말씀의 무조건적인 남용 대신 보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합리적인 설득 추구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77 신분차별 때문에 벽 느꼈다

 

찐빵의 생각 못난이 같은 그런 열등감은 빨리 반성하고 온전한 눈으로 당당히 세상을 볼려고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장담하건대 지구상의 어떤 교회도 학력 따위 때문에 신분을 차별하는 교회는 업습니다. 예수님이 대학 나왔다는 얘기가 성경에 있습니까? 토마드 에디슨이 대학 나온 적이 있습니까? 링컨이 대학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학력 때문에” 운운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도 못난 핑계일 뿐입니다.

 

자기 열등감이나 열등감의 이음 동의어의 교만의 수렁으로부터 과감히 빠져나와 자유로운 심성, 순수한 심성을 먼저 되찾으십시오. 그렇기 되기 위한 방법은 성경말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다 들어 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자기 주장이나 자기 관점을 버리고 하늘의 관점으로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좀더 낮은 자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노라면 삶의 모든 국면에서 넘치도록 축복이 샘솟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람된 자’를 버리시는 법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