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하나님은 그 백성 가운데 내재하시는 하나님(God’s Immanence)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셔서, 얼굴을 마주보며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다윗은 이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결심하였다.

표준새번역은 시편 27편 8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주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으니”

성경은 한번도 예배의 정의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만큼 예배는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는 행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예배당’하면 촌스런 느낌을 갖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예배당이라는 말은 지역 교회의 중심 사역을 말하고 있는 중요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예배당이라는 말이 촌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학교, 선교 단체, 병원, 친목 단체의 성격이 더 강조되었다.

물론 교회에는 그런 성격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사역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다.

교회의 사역이 다양해졌다고 예배드리는 일이 여러 사역 중의 한 부분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경 공부와 선교를 위하여 예배가 형식적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는 우리 신앙의 중심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최근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예배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예배 갱신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많은 서적들이 출판되었고,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예배는 그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이다.

이 본질을 위해서 다른 비본질적인 것들이 사용된다.

예배의 음악, 예배당 건물, 분위기, 복장, 악기, 순서, 의자, 위치, 시간, 주보, 강대상 등등….

이런 사항들은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본질은 바뀌면 안된다. 그러나 비본질은 바뀔 수 있다.

아니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상황적으로 비본질적인 요소들은 항상 바뀌어 왔다.

본질과 비본질이 혼동되면 우스운 꼴이 된다.

 

예배에서의 음악은 비본질적인 요소이다.

예배에 있어서 음악이 중요하긴 하지만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칼빈의 초기 개혁 교회에는 찬송이 없었다.

청교도들도 그들의 예배에 음악을 절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성가대로 예배를 드리지도, 밧모섬의 사도 요한이 찬양팀으로 예배드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물론 하나님을 찬양했겠지만, 반드시 음악만으로 찬양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꼭 음악이 첨가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음악의 사용을 허락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음악이 감각적이라고 생각하셔서 예배 때 시편 낭독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음악을 통하여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배는 인간의 지, 정, 의를 포함한 전인격으로 드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처음 예배와 음악에 대하여 말하는 곳은 창세기 4장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양자는 결합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첫 예배인 가인과 아벨의 예배에는 음악이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가인의 후예인 유발은 수금과 퉁소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는데,

그가 음악으로 예배드렸다는 기록은 없다.

가인의 후손들은 세상의 문화를 즐기다가 노아 홍수 때 모두 죽고 말았다.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찬송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나타난다.

그들은 뒤쫓는 애굽 군사들을 홍해 바닷가에서 쓸어 버리신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찬양했다.

노래만 부른 것이 아니라 여인들은 손에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찬송했다(출 15:20-21).

이들의 찬양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들에게 홍해의 대합창제를 치를 만한 문화적 인프라가 조성되어 있었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본래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남에게 보일 변변한 문화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고대 문명은 모두 농경 사회에서 나온 것이다.

히브리 음악의 원천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 음악의 원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히브리 음악의 뿌리를 연구함으로써 현대 찬양과 경배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방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선진국 음악의 수입이다.

모세는 어려서부터 이집트의 최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모든 학문과 함께 이집트의 발달된 음악에도 능했을 것이다.

출애굽기 15장의 찬양과 춤이 상당히 조직적인 것으로 보아,

이 찬송은 즉흥적으로 부르게 된 것이 아니다.

이집트의 음악과 춤이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역대하 8장 11절에서는 솔로몬이 바로의 딸과 결혼하는 얘기가 나온다.

유대의 미드라쉬에 의하면, 이때 솔로몬은 결혼 지참금으로 애굽의 악기들을 요구했다고 한다.

애굽의 악기들이 다량으로 이스라엘에 들어왔다.

외국의 악기가 들어왔다는 것은 외국의 음악이 함께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이올린이 우리 나라에 들어 왔을 때는 그것으로 가야금 산조나 수제천을 연주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이올린과 함께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음악이 우리 나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선진국의 음악들이 이스라엘의 찬양 가운데 흡수되었고,

성전 예배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두 번째로 민요를 생각할 수 있다.

어느 민족이나 민요가 있다.

자신들의 삶을 노래로 표현하는 방법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다.

새로운 선율을 만든다는 것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그 옛날,

자연스럽게 민중 사이에서 발생한 민요의 선율 하나는 매우 귀한 것이었다.

또한 민요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미 가치의 검증이 끝난 귀한 곡조들이었다.

민중 사이에서 흔히 불려졌던 민요에서 세상 가사를 신앙적인 가사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그 당시 찬양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시편 56, 57, 58, 59, 69편 등에 나타난 ‘소산님, 요낫 엘렘 르호김, 알다스헷’은

그 당시 불려졌던 민요의 제목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찬송 드리는 것을 ‘콘트라팍타’(Kontrafaktur)라고 한다.

우리의 통일 찬송가에도 콘트라팍타의 찬송이 많이 있다.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의 오른쪽 상단에는 Swedish Folk Melody라고 쓰여있다.

338장은 Auld Lang Syne이라는 스코틀랜드 민요에 찰스 웨슬리가 가사를 붙인 콘트라팍타이다.

초대 교부인 암부로시우스는 ‘찬송은 종교적 민요(Spiritual Folksong)’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말한다. “기독교 음악은 없다. 기독교 가사만 있을 뿐이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에 나타나는 예배 음악은 다윗 이전에는 없었다.

역대상 15장 16-17절은 조직적인 성전 예배의 음악에 대한 첫 기록이다.

다윗의 예배 음악은 어떤 특징이 있었는가?

첫째, 조직적인 예배 음악이었다. 다윗은 4000명의 찬양자를 뽑고,

그 중 288명을 뽑아 1년 12달 중에 각각 24명씩 순번을 정하여 찬양하게 하였다.

120명의 나팔수들이 제단 동편에서 찬양과 감사를 드렸다.

특히 아삽, 헤만, 여두둔과 같은 찬양 리더들을 훈련하고 앞에 세웠다.

둘째, 전문적 표현법을 익힌 예배 음악이었다.

다윗은 음악 표현에 대한 지시를 주고있다.

다윗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찬양 방법은 ‘큰 소리로’, ‘즐겁게’, ‘힘있게’였다

(삼상 18:10, 삼하 6:15, 대상 9:33, 13:8, 15:16, 28, 16:5, 33, 42).

이 방법은 시편에서도 계속되는 하나님 찬양의 전형적인 방법이었다.

셋째, 영적인 예배 음악이었다.

다윗 자신이 당대 제일의 수금 연주자였다.

즉 지금으로 말하면 기교적인 음악가였다.

그러나 예배 음악에서는 음악의 기교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예배를 맡은 성전 음악가들이 신령하게 찬양하기를 지시하고 있다(대상 25:1-3).

예배 음악가로서 다윗의 위대한 점은 그가 연주자들에게 외적인 음악 연주 방법만을 지시한 것이 아니라,

연주자들의 내적인 마음가짐에 대하여도 반복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윗이 어렸을 때부터 그의 삶을 통해 배워온 하나님 찬양의 위대한 방법들이었다.

넷째,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표현한 예배 음악이었다. 구

약에는 총 18종의 악기 이름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는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효과악기들이 있다.

이 모든 악기를 다윗은 하나님 찬양하는데 사용했다. 역

대상 15장에 나오는 악기 편성은 다윗이 어떤 음색으로 예배드리기 원했는지 보여준다.

8대의 비파(네벨)와 6대의 수금(킨노르) 그리고 3대의 심벌(머찔타임)이 사용되었다.

제2 성전 말기에는 최소 2대에서 6대까지의 비파와 최소 9대에서 무한정의 수금이 사용되었다.

심벌은 오직 한대만 사용되었다.

음악적으로 보면 다윗의 악기 편성보다는 1000여 년 후의 악기 편성이 더욱 세련되었다.

비파는 수금보다 조금 큰 악기로 수금보다 저음의 소리가 난다.

현대 오케스트라의 편성법으로 보면 수금의 수가 비파보다 더 많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수금의 명인이었던 다윗은 왜 비파를 더 많이 사용한 것일까?

또 한 대만 있어도 충분히 튀어나오는 심벌을 3대씩이나 사용한 것일까?

다윗의 관점은 소리의 멋진 배합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저음 악기와 심벌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위엄과 그 임재하심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음

악가 다윗이 예배에서 중요시한 것은 음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다.

초대 교회의 예배 음악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하여 함락된 이후, 성전 음악의 전통은 사라졌다.

성전 음악가들의 긍지는 대단했다.

그들은 선택된 하나님의 찬양자라는 생각이 있었고,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유대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었을 때,

성전 음악가들은 그들의 손가락을 잘랐다고 한다.

성전이 무너졌으므로 더 이상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전의 전통이 거의 사라졌다.

그래도 그들이 드리는 예배에는 찬송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고전 14:26)

여기서 말하는 ‘찬송시’는 ‘시편의 찬송 PSALMON’을 말한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말씀도 예배와 찬송을 보여주는 귀한 구절들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초대 교회의 예배 음악은 음악적인 면보다는 영적인 면이 더욱 발달했다.

악기의 연주나 음악적 기교는 지하에서 조심스럽게 예배드리는 저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예배 음악은 영적으로 더욱 깊었던 것 같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찬송을 3가지 장르로 분류한 것만 보아도 찬양의 위치가

그 시대의 예배에서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신령한 노래’가 어떤 노래인가에 대해서는 최근의 찬양 사역자들에 의하여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이 노래는 어떤 특정한 곡조와 가사가 없는

자유로운 노래(Spontaneous Song) 스타일을 말한다.

말하자면 즉흥 연주인 셈이다. 헬라의 음악적 전통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이런 스타일의 음악은 사라져 갔지만, 히브리의 음악을 비롯한 동양권의 음악에는

아직도 자유로운 즉흥 연주가 많이 있다.

이런 예배 음악의 흔적은 시편 66편 17절, 149편 6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찬송 방법이 어떤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모르고 있는 다양한 찬송 방법이 성경에는 있다는 것이다.

본질은 분명하게, 비본질은 자유롭게

성경의 찬양 방법은 매우 자유롭다.

찬양에 어떤 특별한 음악적 제약을 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배와 찬양의 대상이다.

지금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는 분이 확실히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 그 방법은 매우 자유로웠다.

본질은 분명했고, 비본질적 요소는 자유로웠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후로 헬라의 음악사상이 교회 음악에 들어오면서 규칙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음악의 율법화라고나 할까? 헬라 사람들은 음악을 감정 표현의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고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음악에 어떤 특별하고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음악에 대한 율법적 규율(NOMOS)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을 에토스론(The Theory of Ethos)이라고 한다.

헬라 철학자들의 음악 사상은 초대 교부들과 중세 스콜라 신학자를 거쳐

칼빈, 청교도, 본 훼퍼 등에 계승된다.

그러나 그들의 기준은 한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다.

한번 교회에 들어온 새로운 찬송은 누구도 밀어내지 못하고 한 세기 뒤에는 정통의 노모스가 되었다.

현대의 예배(Contemporary Worship 또는 Praise and Worship)는

개신교에서 수백 년간 드려오던 예배의 개혁이다.

이 개혁은 목사나 신학자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인생의 무의미 가운데서 방황하던 젊은 평신도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예배는 이제 30여 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계속 보고되는 통계 자료에 의하면,

현대 예배는 무섭게 교회의 전통적 예배를 바꿔나가고 있다.

현대인은 모든 면에서 감성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 예배는 이제껏 중요시 여겨졌던 이성적인 면과 함께 감성적인 면을 새롭게 부각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2000년간 교회에서 사라졌던 성서적 찬양 방법, 예배 방법이 현대 예배를 통하여 되살아 난 것이다.

나는 곧 구름처럼 허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힘차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살아 있는 예배가 이 땅에서 끊임없이 드려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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