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개신교의 예배는 심각한 세속화를 겪고 있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예배를 사람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허다하다.

 

각종 개강예배, 신입생 환영예배, 출판 기념예배, 각종 헌신예배, 개업예배, 추도예배, 생일예배, 이전예배,

직분 임직예배, 각종 절기예배, 돌잔치 예배 등 수 없는 성도의 일이 예배의 목적이 된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일이 목적이 되자 결혼 축하예배 등으로 사람의 의식을 예배로 만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예배당 신축예배 그리고 교회 몇 주년 예배 등은 하나님만이 홀로 받으시는 예배를 사람들의 행사로 바꾸어버리고

사람이 하는 목적에 따라서 예배가 만들어지게 된 전형적인 모습이다.

 

예배를 드리는 중에 자연히 감사의 공적 내용이 나오는 것이다.

어떤 목적을 만들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른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적예배가 되려면 예배에 어떤 개인이나 사람의 조건이 없어야 한다.

사람의 일이 조건으로 붙으면 예배는 사람의 공로로 드리는 행위가 나타난다.

자기 건물을 지었으니 감사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행위는 예배에 그 사람의 건물에 대한 행사목적이 추가된다.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찬양할 수는 있으나 공식적인 예배는 될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예배하라고 해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의 목적을 만들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요구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 할 때에 마음으로 몸으로 드리되 시와 찬송과 감사의 고백과 기타의 행위로 경건하게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는 순수성이다.

오직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의식이다.

그런데 예배에 사람의 일이 추가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예배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의 순수성을 상실한 것은 예배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에서 출발한다.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공적 예배의 장면을 살펴보라! 사람의 일이 추가되는 장면이 있는가?

대부분 시와 찬송과 경배와 감사와 기쁨의 고백 등이다.

이렇게 예배는 성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자의 영적인 신앙 행위이다.

계시록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장면은 인간의 어떤 것도 추가되지 않고 그가 홀로 영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몸으로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헌금이 예배의 한 요소라면 물질만이 아닌 마음을 드리게 된다.

즉 헌금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기 때문에 예배의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기도가 예배의 요소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입술로 하는 마음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찬송이 예배의 요소가 되는 것은 찬송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받으시는 목적에 의해서 찬송과 기도와 감사 등으로 구성된 것이 정상적인 공적예배이다.

이와같이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하나님의 예배이다.

찬송이 하나님께 드리는 목적이 바뀌어지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이 이상한 찬송 대회이다.(행사로 전락)

하나님께서 먼저 예배의 목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조건은 사람의 행위나 기타 어떤 것도 추가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예배는 하나님의 요구이며 명령이다.

하나님이 하라고 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마땅히 예배의 조건이 하나님의 요구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요구에 순종해서 드리는 것이 순수한 예배이다.

 

우리는 예배의 조건이나 의미를 만들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받으신다는 것이 참 목적이며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서 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는 하나님의 요구보다 사람의 요구와 목적이 앞선다.

축하 예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굴 축하한다는 말인가?

예배에 사람을 축하하는 것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예배의 회복은 우리의 출발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의 회복이다.

사람의 축하할 일이 있어서 예배가 되거나 예배의 제목이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는 분이며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입장이다.

예배를 드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임의로 예배의 목적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요구하는 것 외에 우리가 어떤 목적을 정해서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추도예배와 장례예배 등 사람이 죽은 것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이상한 예배이다.

추도식이며 장례식은 될 수 있지만, 예배는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서 죽은 자들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했는가?

 

예배당을 건축해서 봉헌 건축 예배를 드리라고 말했는가?

지교회가 오래되었다고 몇 주년 기념예 배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명하셨는가?

 

이미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벌써 시작되었다.

모든 지 교회와 미래에 오는 모든 교회는 이미 사도로 세워진 교회의 터 위에서 나타나는 것뿐이다.

 

그런데 지교회 들이 예배를 지교회들의 목적으로 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면 사도들이 세운 교회를 두고두고 예배를 드려도 된다는 논리가 정당화된다.

 

혹시 그래서 오순절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성령이 오신 것을 두고서 예배를 드린다니 말이 안 된다.

 

카톨릭도 이미 우상화가 되어서 예배를 사람의 목적으로 만들고

사람들의 업적에 의해서 거룩한 자라고 성인으로 호칭하면서 부르게 된 것이다.

 

개신교는 신약성경에서 거부하는 온갖 절기를 만들어 놓고 또 예배가 아닌 것을 예배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상당히 벗어난 한국교회가 스스로 잘못을 찾기는커녕 개혁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이다.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는가?

 

십일조가 성경적이지 않는 것이라고 외쳐도 교회의 절대적인 예산으로 십일조 주장한 사람을 제명시킨 한국교회이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한국교회 총체적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것에는 누구도 의심이 없지만 막상 현실이 그렇게 어려우니 타협하자는 식이다.

 

예배도 타협의 대상인가?

하나님께 진실로 드리는 헌금도 타협의 대상이라는 것인가?

특히 교회를 나누는 행위는 정당화 하면서도 개혁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는 한국교회이다.

참으로 개혁을 원한다면 우리가 스스로 나서야 한다.

혹시 성령이 홀로 개혁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는가?

 

하나님이 교회를 스스로 정화시킬 것으로 믿는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는 믿음이라고 했다.

행함이 없는데 하나님이 홀로 교회를 살려주신다고 보면 착각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 한국교회는 거짓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서야 한다.

 

이방의 종교도 한국교회 정도의 충성을 한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슬람과 회교 국가를 보라 그들의 열심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교회 참으로 종교적인 열심을 버리고 참으로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종교적 열성은 이미 유대인과 카톨릭에서 우리가 익히 보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진 자들로 살아있는 믿음과 신앙이 나타나야 한다.

실제로 그렇게 나타나면 이방의 종교들과 엄격하게 구분되고 그들은 감히 우리의 참 신앙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진정으로 한국교회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세상에서의 나그네 된 삶을 가르쳐야 한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신앙 그리고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신앙과 종교 생활은 이방의 종교들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참으로 변화할 것이라면 성도들에게 이 세상은 잠깐이며 하늘에 소망을 품게 해야 한다.

우리가 어찌 하늘의 구원과 세상의 향락을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성도가 진정으로 하늘에 소망을 보면 그는 오늘 죽어도 소원이 없는 영적인 깊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신앙이 있다면 그는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제 아시아 최대의 복음 선교지인 중국이 서서히 문을 걸어 잠그려고 한다.

 

우리는 몇 년 동안 중국에 대한 물적 질적으로 선교에 투자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기회가 없어져 간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교회의 헌금을 자기 교회의 운영이나 방만한 지출로

대부분 사장시킨 것이 범죄가 아니라고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것인가?

 

물론 한국교회 선교비가 얼마 되지도 않은 것을 생색을 낸 것이 사실이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과 행위로 나타나는 헌금은 분리될 수 없다 교회 세우고 짓는데

열심인 한국교회가 무슨 선교에 대해서 얼마나 믿음으로 투자를 했다는 것인가??

 

교회 예산의 70%를 선교비로 사용해도 아쉬워하는 마음이 선교의 마음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전체 헌금의 예산에 2%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선교했다고 자랑한다면 하나님이 비웃을 것이다.

(국내선교를 제외하면 더 적을 것이다.그리고 성도 개인에게 적용시키면 개인의 선교헌금은 자신이 여가 지출에서 사용하는 것에서

겨우 약 0.5%나 될까?=개인적 추정?)

지금이라도 교회는 스스로 가난한 자처럼 되어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나라에 식량을 무기로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다.

지금까지 미루어왔던 것도 억울한데 언제까지 국내선교에 목숨을 걸려는 것인가?

 

이제는 70년 동안 목사 배출 그만해야 한다.(70년 이후는 100세 이상 장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방의 종교처럼 성직으로 생계를 누리는 것이 성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헌금이 비상식적인 이유로 허비되고 있어도 목사 배출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20명의 성도가 1명의 목사를 책임져야 되는 이상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어차피 성직의 길을 가려고 한다면 최저 생활비로 생활하게 하는 극단의 처방이 요구된다. 한국은 이미 포화상태이다. 해외로 나가서 선교사가 된다면 몰라도 목사가 되는 것이 생계를 위한 수단이 된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거짓을 벗고 진정한 개혁으로 나간다면 지금의 헌금보다 배는 증가할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세상이 깜짝 놀란 만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느 종교도 따라올 수 없는 열정과 헌신이 나타난다면 헌금의 액수는 믿음으로 따라오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한국교회의 헌금예산보다 수배는 될 것이고 선교비는 70% 이상을 하게 된다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선교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단순히 선교를 위해서 또는 예배를 위해서 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 스스로 살아나는 축복이고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통해서 세계를 품으려는 원대한 계획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스스로 깨우치고 일어나야 한다. 더 이상 세상의 것에 교회가 종속될 이유가 없다.

교회는 최소한의 경비를 제외하고는 세계의 넓은 선교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반쪽나라 한국교회에 거는 기대가 아닐까?

 

한 순간에 나라가 망하는 경우도 있다.

만약에 한국이 언젠가 망한다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심판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단들이 돌아오는 것과 지금 나누어진 교회가 하나로 화합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남은 것이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 한다.

우리가 잠자든지 혹은 깨어있는지 하나님은 아신다. 심은 대로 거둔다고 했다.

한국교회 무엇을 거두고 있는가? 교인 수를 거두었다고 자랑할 것인가?

 

종교의 확산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다. 우리가 빠른 성장을 한 것이 사실이다. 경제성장도 그렇고 종교 성장도 그렇다. 적절한 때에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우리의 복음 전파는 우선 기회가 좋았다. 반공사상으로 다른 기존 종교나 사상들을 어느 정도 약화시키는 것이 적절했고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과 서방의 경제와 군사원조가 절실했다는 것은 기독교를 확산시키는데 일조를 했다.

물론 해방 이전부터 기독교의 뿌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일제의 학대와 남북전쟁은 한국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고 기독교사상이 쉽게 내린 결과이다. 하나님의 작정이었다.

 

이러한 결과와 함께 한국인의 종교적인 열성도 한몫했다는 것은 부흥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서방에 대한 비판보다는 오히려 서방에 의존하려는 것이 강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한 의존적인 한국인에게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는 없었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개척정신과 같은 새로운 민주사회 개발 논리는 새로운 기독교도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같은 민족끼리 치열하게 싸웠으니 그들의 혼란이 얼마나 크게 나타났겠는가?

그런 혼란은 기존의 것보다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데 충분한 원동력이 되었다.

 

교회의 성장은 이렇게 환경적인 조건을 하나님이 예비한 것이 사실이다.

과거 이성계 시대에 복음이 들어 올수 없었던 것은 환경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이 쉽게 들어오게 하는 기초로 일제의 압제를 이용한 것이고 (기독교의 특성은 압제 속에 오히려 저항하면서 뿌리를 내림) 그리고 전쟁으로 사회가 개방에 대해서 급물살을 타게 되면서 기독교도 함께 강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스스로 잘해서 부흥했다고만 자랑한다면 오늘의 교회가 과연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과는 별개이다.

 

예수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들 수 있다고 한 것을 기억하자.

 

만찬과 예배와 집회에 대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행위에 대한 소견

 

주의 만찬을 매 주일마다 해야 된다는 000님의 주장에는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초대교회는 만찬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교회가 반드시 할 수 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예배와 만찬은 구분해야 한다.

만찬은 기념의식이며 예배는 드리는 의식이다.

만찬이 예배의 중간에 들어 갈 수는 있어도 만찬 자체를 예배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우리는 기도를 예배로 부르지 않는다. 찬송도 그렇다.

그 이유는 예배의 한 요소이기 때문인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 기도와 찬송과 감사의 시 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는 공동으로 드리는 공적인 공동예배이다.

 

말씀의 강론은 나중에 따로 다루면 될 것이다.

 

만찬이 매 주일 마다 없는 것에는 문제를 충분히 공감하지만, 만찬이 기념 이상으로 우상화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만찬이 의식에 의해서 우상화가 된다면 차라리 행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십자가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의식으로 행하는 것은 (기억하기 위해서) 마땅하나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적용시키는 카톨릭은 더 큰 문제이다.

 

여기에서 카톨릭이 성찬을 한다고 자랑하지만 지구상에서 기독교를 가장한 우상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곳도 카톨릭이다.

그런 카톨릭의 성찬이 성경적인 성찬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리아 우상 하나도 해결 못하는 것은 얼마나 치명적인 교리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만찬 자체를 (물리적) 성찬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의식을 성도가 행할 때에 거룩한 의식이라고 부르는 의미에서 물리적인 것이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의식 자체가 (물질적인 것과 제도) 거룩하게 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의식은 의식이다.

 

그 의식을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만찬으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한다는 것이 참 의미이다.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이 주님의 명령과 같은 만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만찬을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만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 일을 거룩하게 함으로 거룩한 만찬이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인 대답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거룩한 기도이며 믿음으로 찬송하면 거룩한 찬송이다.

믿음으로 예배드리면 거룩한 예배이며 믿음으로 만찬을 행하면 거룩한 만찬이다.

이렇게 거룩한 것이 되는 중요한 원인은 하나님이 받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이 거룩한 것이며 믿음으로 드릴 때에 거룩한 행위로 드려지는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에 거룩한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에 거룩한 기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으로 만찬을 행하기 때문에 거룩한 만찬이 된다는 것이다.

 

WCC의 리마 예식서를 보면 얼마나 성찬이 의식화됐는지 알 수 있다.

주님은 이렇게 복잡하게 만찬을 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도 복잡하게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그 내용은 철저히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려는 목적으로 설명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나오는 바울의 증거는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식사라는 것이며 식사를 하는데 누가 그렇게 거창하게 의식으로 형식화 하겠는가?

가장 좋은 것은 주님이 유월절 만찬에서 보여준 제자들에게 보인 의식으로 끝내는 것이 옳다.

주님의 만찬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이다.

구약의 유월절 만찬도 단순한 식사였지 거창한 예배와 같이 형식을 갖추어서 드린 것이 아니었다.

 

사실 초대교회는 가정에서 저녁에 만찬을 행해도 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교회가 점점 커지면서 공적으로 하다가 점점 형식을 갖추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매일 매일 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러한 식사가 공동체에서 일어나면서 감독의 지도 아래에서 적용된 것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매일은 못하더라도 매 주일에 만찬은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만찬을 예배가 아닌 식사로 인식한다면 만찬은 간소화 될 것이 분명하며 예배가 아닌 공동의 식사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의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주님이 보여준 만찬은 떡을 가지고 말씀하고 먹었으며 또 잔을 가지고 말씀하고 먹었다는 것이다. (간단한 의미 부여)

 

순수한 식사와 함께 의미를 부여한 것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성만찬이라는 것은 식사가 아닌 철저히 예배로 의식화되었다.

그것도 복잡하게 꾸며서 은혜의 수단으로 만든 것이다.

주님도 간단히 행한 것을 사람이 임으로 복잡하게 하여 무게를 더하려는 것은 공교롭게도 의식화된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식사이다. 식사이기에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배는 예배이며 식사는 식사이다.

식사를 통해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초대교회 공동식사에서 나타나게 되었고 공동체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서로 하나 됨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만찬은 식사와 함께 자연스럽게 공동식사의 성격이었다.

 

물론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예배와 같은 의식으로 드려지는 것보다는 떡을 뗄 때에,

잔을 마실 때에 사회자가 말씀을 읽어주거나 의미를 알리고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식사 만찬이 사람들에 의해서 복잡하게 예배의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공재설을 주장하는 것은 이 만찬 자체를 신성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스도가 임재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이상한 주장이다. 공재설이라는 것은 비 성경적이다.

이미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는데 무엇이 더 임한다는 것인가?

공동식사에 함께하시는 성령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항상 계시므로 예배도 항상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혹은 영적 임재설이 있다. 사실 이것도 성찬을 무게 있게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곳에는 성령이 함께 하신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다.

예배, 기도, 찬송, 헌금, 등 모든 곳에서 성령이 임재 하신다는 것이다. 공동체와 함께하는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영적인 임재라는 의미가 성찬에만 있는 것을 강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칼빈의 기념설은 너무 형식을 약화시킨 요인이 된다.

이렇게 만찬은 기념하는 것과 영적으로 성령이 함께한다는 것을 모두 수용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임재 가운데 주님의 죽음을 기념한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기념, 임재설)

 

예배라고 하면 우선 공동체가 드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수가 많든지 공동으로 일정한 형식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이 너무 복잡하게 되면 오히려 예배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너무 정형화된 예배도 문제가 된다.

흔히 교회에서 한 시간 드리는 예배를 보면 너무 정형화된 예배의 틀을 가지고 있다.

말씀이 예배의 요소라고 하지만 말씀은 예배의 요소라기보다 강론과 같이 설교의 특징이 있다.

 

예배는 드리고 올라가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강론은 또는 설교는 말씀을 풀어서 교우에게 설명하는 것으로 예배의 요소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길에서나 혹은 아무 데서나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또 훈계한다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그것을 예배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르침은 예배의 요소가 아니다.

 

성경 공부 혹은 말씀의 교훈이나 훈계 등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예배의 형식이 있다.

그것은 공동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고백과 찬송과 성도의 화답과 찬미와 감사의 찬양 등에 대한 것들이며

시와 찬미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으로 나아가는 의식이 예배이다.

 

일반 설교와 달리 말씀이 예배 중에 사용될 때는 예배 중에서 예배의 성격에 맞는 말씀을 낭독하고,

낭독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통해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강론하는 것은 예배와 분리해서 집회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와 집회는 구분될 수 있으며 예배와 집회는 서로 연결되는 특징이 있다.

예배는 예배이며 집회는 집회이다. 이렇게 예배시간과 집회가 함께 혼합될 수도 있고 또는 앞뒤에 각각 구분되어서 배치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예배이며 집회는 집회가 되어야 마땅하다.

 

광고와 헌금행위 그리고 성도의 교제는 예배가 아니다.

간증도 집회의 요소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형식을 통해서 위로 나아가는 찬송과 감사의 산 제사가 나타난다면

집회는 아래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교제나 은혜의 강론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평적인 것은 집회의 특징이 있고 수직적인 것은 바로 예배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이 정확히 당장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구분되어야 예배의 공적 모습이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신앙의 행위가 이렇게 수직적인 특징인 예배와 수평적인 특징인 집회로 나눠질 수 있다.

수평적인 행위로는 가르침과 교훈 그리고 간증과 만찬 등이다.

 

반면에 수직적인 특징은 찬송과 감사의 시와 하나님께 향한 고백과 기도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예배의 형식은 수직적인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수평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이 혼합되어 나타난다고 해도 그 특징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럼 나름대로 모범적인 것을 생각해보면 아래와 같이 나타날 수 있다. (순서는 변동해도 됨)

 

* 침례(아침에 의식을 거행=처음 믿기로 작정된 자들에게 믿음의 고백으로 침례를 준다)

* 예배(낮 예배= 부름, 신앙고백, 감사 찬송, 찬미가, 시와 신령한 노래에 대한 화답 축도)

* 집회(오후 집회= 은혜 복음송, 간증, 말씀 강론, 기도로 마침)

* 만찬(저녁식사 시간에 기도, 떡과 포도주에 대한 의미를 말씀으로 설명하고 식사를 행한다)

 

이렇게 주일에 성도들이 행한다면 거의 초대교회 전통을 회복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배와 집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예배는 올라가는 특징이 있다.

즉 위로 드리는 의미의 것들이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것과 같다. (성령으로)

집회는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오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위로부터 받고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는 간증과 복음송으로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즉 은혜를 받는 것이다.

예배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예배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모든 성도의 본분이다.

예배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며 누구나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령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찬송으로 감사의 고백으로 기도로 나아가는 시간이 예배라고 본다.

 

그러면 집회는 무엇인가?

집회의 대상은 믿는 자에게만 그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전도 집회와 같은 전도 부흥 집회도 있다.

부흥사경회는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을 일차적으로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많이 도입되고 있고, 전도 부흥 집회는 사경회와 달리 교회 안 그리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모이는 것 같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고 가르치는 목적으로 모이는 것을 우리는 집회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와 집회가 구분이 안 되는 것은 예배가 그만큼 실종된 것이며,

너무 정형화된 예배로 나아감으로 실질적인 영적 은혜의 나아감이

약화 된 것이다.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은 찬송과 감사와 시와 찬미와 여러 가지 신자의 기도들이 예배로 나타난다.

이러한 것과 달리 오늘날 교회는 거의 수평적인 복음송으로(집회용) 수직적인 찬송으로 나아가는 형식이 거의 실종되다시피 된 것이다.

수직적인 찬송은 하나님께 향한다는 것이다. 찬송의 가사도 그렇고 곡도 그렇게 나타나야 한다.(자세도 일어나서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의 모습은 현대 교회의 모습에서 거의 실종되고 은혜받는 목적으로 모이는 집회 중심의 모습이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목적이 아닌 은혜를 받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예배순서는 점점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야 되는 사람 중심의 교회로 나타난 것이다.

 

예배의 실종은 사람들의 대중적인 것이 예배에 개입되기 시작한다.

특히 청소년 예배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와 인기 있는 사람들의 노래는 예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순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폐해는 예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수직적인 것을 수평적인 은혜로 바꾸어 버리고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 예배가 성공하고 은혜를 느끼지 못하면 예배가 실패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 것이다.

 

예배의 찬송은 사실 경건한 마음으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집회용과 대부분 구분된다는 것이다.

집회용은 아무 데서나 할 수도 있는 은혜의 노래이지만 찬송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받으시는 것으로 그 목적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찬송의 실종으로 마치 은혜의 복음송이 찬송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찬송은 찬송이며 은혜 송은 은혜 송이다. 예배는 예배이며 집회는 집회이다. 만찬은 만찬이며 예배는 예배이다.

 

이와 같이 어느 정도 구분이 되어야 신자의 신앙이 예배의 모습으로 또는 집회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배는 사실 은혜를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닌 은혜로 구원에 들어온 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는 것이 참 예배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집회는 모든 사람이 모여서 할 수 없다.

특정인을 정할 수 있고 또 목적에 따라서 성격과 내용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가능하다.

예배는 오직 드리는 것이 목적이며 우리가 정성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배는 예배답게 드려야 된다는 것이다. 모든 교회들이 공적으로 드려야 되는 것이 예배이다.

그러나 집회는 교회 지도자의 요구에 의해서 그 순서나 대상이 결정되는 특징이 있다. (계층)

 

그러므로 예배와 집회는 어느 정도 구분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예배와 집회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

예배로 드리고 집회로 은혜를 얻는 이러한 일은 교회에서 항상 유기적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 즉 무우 자르듯이 갈라놓는 것도 문제이다.

모범적인 교회는 세례와 만찬과 그리고 예배와 집회(강론)가 잘 조화되고 드러나야 된다.

 

세례는 예배가 아닌 믿음으로 출발한다는 의식이다.

만찬도 그리스도로 모인 것을 확인하고 그의 죽음으로 구원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예배와 집회는 교회에서 우리가 드리고 받는 귀중한 시간이다.

 

이렇게 예배와 집회가 분리가 아닌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약간 예배와 집회를 바꾸어서 행할 수도 있다.

주일에 모일 때에 먼저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세례를 주고 그 다음에 교회 구성원들이 모여서 집회를 통해서 은혜를 얻고(말씀) 그 다음에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마지막에 만찬으로 함께 식사하면서 주님을 기념하는 만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떻겠는가?

 

이러한 일이 주일에 이루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닌 주님이 부활한 주일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세례와 말씀의 강론과 예배와 만찬이 교회에서 나타나는 신자의 신앙 행위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오늘날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의 회복과 말씀의 풍성한 꼴과 그리고 만찬으로 주님을 기억하는 살아 숨 쉬는 영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참으로 살아나는 교회가 되려면 성경에서 보여준 모습을 연구하여서 모일 때에 만찬이 있고 감사가 있고 찬송이 있고 신령한 노래가 있고 그리고

말씀의 꼴이 풍성하게 있어서 지교회에 잘 적용시키는 것이 현대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으로 생각한다.

 

[추가]

 

예배가 나아가는 것과 드리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있다면 경배와 찬양이다.

물론 곡이 조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가사는 분명히 예배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일예배를 경배와 찬양으로 드리고 강론은 오후에 집회로 모인다면 어떻겠는가?

전통적인 사고로 본다면 파격적인 것이지만 오늘날 예배의 정형화된 의식을 타개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필요한 과제이다.

경배와 찬송과 같은 문화가 예배로 나타나려면 찬송과 가사에 대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록 음악과 같은 노래로 경배와 찬양을 한다는 것은 수용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예배에 맞는 정서적인 곡이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것이다.

무분별한 곡과 가사의 수용보다는 전문적인 교수들의 자문으로 시대에 맞는 찬송과 가사가 개발되어야 된다고 본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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