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영광스런 피조물이었으나 아담의 범죄로 죄인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죄성을 지니게 되었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고 죄로 향하던 인간의 마음과 삶의 방향이 의에로 향하는 변화를 말한다. 그것은 일회적 경험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구원에는 시작과 계속과 완성의 단계가 있다.  구원은 소명과 회심과 중생으로 시작하여 성화를 거처 영화로 종결된다.  이것이 구원의 순서요,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숙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를 닮도록 변화되는 역동적 과정이다. 


구원의 완성과 순서는 많은 논쟁과 논란이 된 문제다. 복음주의교회 내에도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대표적인 것이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입장이다. 이들은 회심과 중생의 순서, 예정, 온전한 성화의 완성시기 등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필자는 구원의 각 단계에 속한 요소와 특징을 교리적으로 정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성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아울러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는 주제에 대해서는 그 차이점과 논쟁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1.  회심과 중생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 속하는 주 요소는 회심, 중생, 칭의, 양자다.  회심과 중생이 주관적 요소라면,  칭의와 양자는 객관적 요소다.  전자는 신자가 내적, 영적 성질의 변화를 나타내는 반면, 후자는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의 변화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신자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소명으로부터 시작된다(마11:28)  소명은 구원에로의 초대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감동되는 성령의 영향을 말한다.  불신자가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여 삶의 방식과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것이 회심이다.  회심은 죄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은 신자의 생애에 있어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획 짓는 분기점이다.  


회심에는 두  요소가 있다. 회개와 신앙이 그것이다.  회개는 불신자가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요,  신앙은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이 지은 죄를 통회하고 돌아설 결심을 하는 것이라면,  신앙은 그리스도의 약속과 사역을 붙잡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매개물이다. 회개와 신앙은 동일한 사건의 두 국면이다. 이 둘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그 중 어느 것도 다른 하나 없이는 불완전하다. 신앙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회개는 신앙의 조건이다.  


회개와 신앙은 구원의 상태로 들어가는 출입구다. 회심이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회개와 신앙은 실상 인간의 영혼 위에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중생은 인간의 자연적 성향들의 근본적 변화를 말한다.  인간은 죄와 타락으로 본성이  부패되고 도덕적 성품이 오염되었다.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도덕적, 영적 변화가 중생이다.  육적 마음을 정복하고 영을 따라 살 수 있는 새 생명과 능력이 부여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후5:17).  중생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죄의 세력이 제거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육신의 연약성이 철저히 제거되고 죄성이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중생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초자연적 현상이요, 인간의 심령 속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영적 삶,  즉 성화의 시작에 불과하다.   


중생은 회심의 또 다른 국면으로 이해된다.  이 둘은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보는 관점에 따라 신자가 체험하는 근본적 변화가 회심과 중생으로 구별된다.  인간의 관점으로  본 것이 회심이라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 것이 중생이다. 


한편, 구원받은 신자는 심령상태가 변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는 것이다.  칭의와 양자가 그것이다.  칭의란 죄인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사법적, 선언적 행위다(행13:38-39, 롬3:24-26). 또한 그것은 죄책으로부터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의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의롭게 된다. 중생이 죄의 세력을 제거시키는 것이라면, 칭의는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의 행위인 동시에, 인간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로부터 하나님에게 열납되는 관계로의 변화다.  칭의의 유일한 조건은 신앙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  칭의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다. 루터에 따르면,  칭의는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교리요, 교회의 존폐를 결정하는 조항이다.   


양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되는 위치로부터 하나님께 용납되고 그의 사랑을 받는 자녀의 위치로 신분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양자됨은 신분과 상태변화 모두를 포함한다.  그것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법적 신분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선언적 행위다.  동시에 신자는 아들됨의 특권을 누리게 되며 하나님을 두려운 감독자가 아닌,  사랑하는 아버지로 신뢰하게  된다(요15:14-15,  갈3:26,  4:7).   


회심, 중생, 칭의, 양자는 구원의 시작을 나타내며,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한 사건의 다른 측면을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간적 순서로 구분될 수 없으며,  단지 논리적 순서로만 구분될 뿐이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는 회심과 중생의 순서, 중생과 인간의 역할 등에 대해 서로 입장을 달리한다.  칼빈주의자들은 중생이 회심 보다 먼저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은 아담의 범죄로 완전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에 의해 먼저 중생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회심하게 될 수 없다.  회개와 신앙은 인간의 능력에 속한 것이 아니다.  반면,  알미니안들은 회심이 중생 보다 먼저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회개하고 믿으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변화시킨다.  회심은 중생의 필수 조건이다. 

 
회심을 먼저로 보는 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교리와 조화되지 않으며,  중생을 먼저로  보는 것은 성경의 증거(행2:38, 16:31)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견해를 수정, 보완한 해석이 등장했다.  웨슬리는 완전 타락교리를 수용하면서도, 선행은총을 통해 인간본성의 타락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고 보았다.  선행은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역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 인간에게 회복된 능력을 말한다.  인간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선행은총에 의해 회심한 후에 중생하게 된다.  한편,  에릭슨은 하나님의 특별 소명 개념에 근거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특별소명은 선택된 사람들이 회개와 신앙으로 응답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말한다.  어느 누구도 복음의 일반적 소명에 응할 능력이 없지만, 선택된 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소명으로 역사하므로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게 된다.  이 회심의 결과 하나님은 그들을 중생시키신다.  특별 소명은 선행은총과 유사하지만, 두 가지 면에서 그것과 다르다.  선행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반면,  특별소명은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진다.  선행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에 자유롭게 응답하게 하는 것이며,  실제로 구원사건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반면, 특별소명은 그  대상자로 하여금 복음을 확실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한편,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는 중생과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도 해석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중생을 완전히 하나님의 행위로 정의하고 인간의 협력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반면, 알미니안들은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 행위가 아니며, 신적 영향력에 대한 인간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알미니안의 입장을수정하여 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주장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호응을 인정하면서도, 중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임을 강조한 것이다. 

 

2. 성화


중생과 칭의는 신자의 영적 삶의 시작에 불과하다.  신자는 칭의와 중생를 통해 법적 지위와 신분이 변하고 죄의 세력이 제거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러나 인간본성이 완전히 변화되는것은 아니다.  죄성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고 아직도 남아있다.  중생한 사람은 모든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며,  그의 마음 속에는 은혜와 죄가 공존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갈5:17)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신자는 중생 후에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법적 신분에 일치하는 수준까지 도덕적, 영적 상태가 성장해야 한다. 

 신자의 삶은 구원받은 후 정지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진보 과정에 있다.  이 성장 과정이 곧 성화다. 


성화란 신자를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계속적 역사를 말한다.  인간의 부패와 타락성이 제거되고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것은 도덕적  정결과 영적 성숙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는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 완전이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거나 죄를 짓지 않는 무죄적 완전, 또는 성장이나 발전의 여지가 없는 완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 완전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다(마19:17).  성화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대적 완전을 말한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며, 그리스도를 닮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성화되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본질적 표시는 아가페적 사랑이다. 값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성화는 초자연적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업적이나 개혁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또한 인간의 과제다. 인간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성화는 인간이 협력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말씀연구와 기도, 죄를 멀리하고 경건에 힘쓰는 것, 덕을 실천하고 육신의 일을 죽이는 것은 인간의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성화사역에 응답하는 것이요 협력하는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그런 삶을 살도록 권고하고 있다(롬8:13,  12:1-17,  빌2:12-13). 


성화는 신자의 삶의 시초인 중생과 칭의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초기 성화요, 그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온전한 성화다.  중생이 회개와 신앙을 통한 불신자의 순간적 체험이라면, 성화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는, 그 완성을 위해 전 생애가 요구되는 과정적 사건이다.  칭의에는 정도의 차이가 없으나 성화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법적 신분의 변화를,  후자는 사람의 상태와 성품의 실제 변화를 말한다. 


성화에 관해서도  많은 견해 차이가 있다. 성화의 개념은 물론, 그것이 점진적이냐  순간적이냐,  현세에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내세에서 이루어지는가 등이 논란이 된다.  모라비안 경건주의는 중생의 순간 완전히 성화되어 더 이상의 성장이 필요 없다고 하는 반면, 칼빈주의는 성화를 점진적 성장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웨슬리는 점진적 성장의 개념과 순간적 요소를 종합했다. 성화의 점진적 과정에 하나님의 직접적 역사에 의해 순간적 체험,  즉 온전한 성화가 있다.  그것을 그는  "제2의 축복",  "그리스도인의 완전"  또는 성령세례 등으로 불렀다. 


기독교 내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주제는 성화의 과정이 신자 생전에 완료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미완성으로 남는가 하는 문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모든 영혼이 완전상태로 회복되는 전진과정은 회심 때부터 시작하여 전 생애를 통해 진행되나 그 대부분은 육체의 죽음 이후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어떤 이는 성화를 이 세상에서 획득하지만, 어떤이는 내세에서 획득한다.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연옥사상이다.  한편 개신교의 입장은 완전주의와 비 완전주의 두 가지로 정리된다.  완전주의는 온전한 성화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신자가 죄를 짓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며  참으로 어떤 신자들은 그 상태에 도달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죄를 지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이 아니고 실제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완전주의자들은 알미니안적 경향이 있다.  웨슬리는 성화가 성령의 순간적 역사로 중생 후 완성된다고 믿었다. 반면, 비완전주의는 완전 성화를 현세에서는 성취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과  목표로 간주한다. 칼빈주의자들은 대개 비 완전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성화는 이생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고, 죽는 순간 또는 그 직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3.  영화


구원과정에 있어 마지막 단계는 영화다(롬8:29-30).  이는 성화의 최종 단계로 구원론과 종말론이 겹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생을 넘어 앞으로 올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화는 신자가 온전히 의롭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영적, 육적으로 온전해지는 것은 물론,  전 피조물의 세계가 새롭게 변화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현재 삶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제약들이 제거되는 것이다.  흠 없고 책망할 것  없는 축복의 상태가 영화다(골1:12).  그것은 재림 시,  신자의 육체적 부활과 더불어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이들은 부활하여 살아있는 신자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변화된다(살전5:16-17,빌:20-21).  영화는 신자들에게 아름답고 영광스런 삶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소망과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약속한다.   


요약하면, 신자의 영적 성숙은 회심, 중생, 칭의, 양자로 시작,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로 완성된다.  구원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성장을 거쳐 완성된다. 그것이 한마디로 성화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나, 인간의 협력 또한 필요하다. 


신자의 삶의 목표와 이상은 성화다.  이것은 교리나 구호 문제가 아니라 실천 문제다.  믿음만을 강조하여, 현재의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소홀히 하는 것은 신앙성장에 불균형을 초래한다. 구원의 완성인 영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화의 과정을 거처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벧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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