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무엇인가?

 

주경식 교수(호주비전국제대학 Director) 전) 웨슬리대학 ·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1. 구원론의 어려움


성경의 주제를 여러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지만 중요한 주제 중 한 가지는 “인간 의 구원”이다. 인간의 구원 역사를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에게 구원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선뜻 쉽게 “구원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구원이라는 개념이 쉽 지 않음에도 있을 수 있지만, 구원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구원과 연결하 여 설명해야 할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으로 창조와 타락 그리고 신론과 기독론등 연 결되어 있는 많은 주제들을 함께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개신교 조직신학에서의 구원론이라 함은 성령의 사역에 집중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학자에 따라 “성령론”을 따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개신교 성령론은 구원론에 포함시켜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독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기반으로, 우리를 위하여 객관적으로 성취 하신 구속사역에 대해 다루는 것이라면,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객관적으로 성취하신 구속사역을 성령께서 주관적으로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원론을 하나님의 경륜적인 차원에서 살펴본 다면, 인간의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협력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작정하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속죄사역을 완수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인간들에게 적용하심으로 실제적으로 구원 을 가져오게 하심으로 인간의 구원은 삼위하나님 모두의 협력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에서는 성령론을 따로 구분하여 다루지 않고 구원론 에서 다루는 이유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신자 개인에게 주관화하여 적용시키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 승룡교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건을 역사하시어 모든 신자에게 주관화시키는 사역을 하 신다. 따라서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모든 주된 요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발생된다고 해 서 놀랄 이유가 전혀 없다.


웨스트 민트터 신앙고백서도 “성령은 구원의 적용을 이루시는 유일한 동인이시다”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속사역을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구원론에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지만 사실 구원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리스도의 사역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칼빈도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된 사역은 무가치 하다고 강조한다.
우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떨어져 있 는한, 인류의 구원을 위 해서 그가 고난 당하시며 행하신 일은 모두 가 우리에게 무용,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조명하는 과거(past)와 관계되어 있다면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객관적 사역을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현재(present)와 관계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개혁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사역을 현재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바로 우리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주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객관적인 구속사역을 성령께서 주관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과정을 탐구하는 성령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그럼 개신교의 구원론이란 무엇인가?


다시 돌아와서 그럼 구원론이란 무엇인가? 신학적 주제로서 구원론은 일차적으로 구원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인간이 획득하고 완성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연구이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의 구원을 다루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객관적 사실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과정들을 살펴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독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객관적인 속죄 사역을 다루는 것이라면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사역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론은 조직신학에서 항상 기독론 다음에 다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와 화해 사역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 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에 기독론 없이는 구원론이 먼저 올 수 없는 것이다.


3. 객관적 구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 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로마서 5:9-10).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속죄사역, 즉 객관적인 구원사건이다. 조직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객관적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객관적인 구원 사건을 성령께서 주관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적용하는 과정을 구원론에서 세분하여 다룬다.


4. 구원의 서정 (Order of Salvation)


다시 강조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직신학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객관적인 구원사건을 성령께서 우리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소위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이라고 부르는 구원의 순서 또는 단계들을 다룬다.


학자들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보통 개혁주의 구원론의 순서로는 부르심(소명)–거듭남(중생)-회개(회심)-믿음(신앙)–칭의-성도의 견인-성화-영화의 순으로 나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구원의 순서가 시간상의 순 서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순서로 이해해야 한다. 안토니 후크마(Anthony A. Hoekema)가 지적한 대로, “구원의 서정에 나타나는 여러 단계들은 전자가 후자를 대치하는 일련의 연속적 단계가 아니라, 그것이 시작된 후에 동시적으로 함께 진행 되는 구원 과정의 다양한 측면들로 이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헨리 티슨(Henry C. Thiessen) 역시 회개, 칭의,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 입양 등에는 시간적인 순서가 없고 이 모든 사건은 동시에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좀 더 쉽게 풀이하면, 우리의 구원이 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견인–성화의 시간적인 순서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이 시작 된 후에 부르심–중생–회심–신앙–칭의–견인-성화가 동시적으로 함께 진행되기에 구원의 순서가 논리적인 순서이지 시간적인 순서는 아닌 것이다. 다음은 구원론에 있어 구체적으로 부르심(소명)이 무엇인지 부터 살펴보게 될 것이다.


4.1 부르심(소명, Calling)
일반적으로 부르심(소명)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 표현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객관적 구원사역,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우리 인간 이 받을 수 있도록 죄인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부르심, 즉 소명(calling)이라고 한다. 이 부르심은 외적인 부르심도 있고 내적인 부르심도 있다. 성령께서는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 양쪽에서 다같이 역사하신다. 또한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 양쪽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부르심의 도구로 사용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외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나, 내적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임한다고 보는 것이 개혁주의적 관점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복음적 부르심, 즉 말씀이 전하여 지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효과적이 아닌 것으로 본다. 오히려 성령께서 말씀을 인간의 심령에 구원적으로 적용시키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 효과적이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개혁주의에서는 부르심을 일반적인 부르심과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4.1.1 외적 부르심(External Calling)
외적인 부르심은 복음이 만민에게 차별 없이 전파되는 것으로 성령의 특별한 역사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일반적인 부르심, 외적인 부르심과 효과적인, 내적인 부르심을 구분하고 있는 용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 죄를 받으리라(막 16:15).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 되지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러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반적인 복음전파는 외적인 부르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계급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제한되지 않고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는 아무 차별 없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의인과 악인, 선민과 버림받은 자에게 다 같이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이런 외적인 부르심에 대해 부르심은 받았으나 오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마 22:2-14; 눅 14:16-24)과 복음이 전해졌지만 배척받은 것(요 3:36; 행 13:46; 살후 1:8)을 묘사하고 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28:19; 막 16:15)을 통해 외적인 부르심을 증거한다.


4.1.2 내적인 부르심(Internal Calling), 효과적인 부르심(Effectual Calling)
내적인 부르심은 외적인 부르심을 통하여 전해진 말씀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진정한 부르심을 받은 죄인의 마음속에서 효력을 발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다. 다시말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와 신앙으로 응답하도록 하시며 확실히 그렇게 되어지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적인 부 르심을 다른 말로 효과적인 부르심(Effectual Calling)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적인 부르심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구원적으로 적용되는 부르심이다(고전 1:23-24). 그러므로 이것은 능력있는 부르심이며 구원 에 이르게 하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행 13:48; 고전 1:23, 24). 이것은 또한 후회가 없는 부르심이며, 변하지 않으며, 취소되지 않는 부르심이다(롬 11:29).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확실히 구원받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1.3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이처럼 효과적인 부르심은 구속받지 않은 자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를 진정한 구세 주로 보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특별하신 역사이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의대로 살며 방황하고 또 그리스도를 거부했었다. 그러나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하여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부르심에 따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깨달은 자들이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실 구속 받지 않은 자는 영적으로 소경이며 죽은 자이며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할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멸망속에 갇혀 소망 이 끊어진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을 우리로 받고 하나님과 화목 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자기 뜻과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러한 부르심은 우리가 잘나서 부르신 것도 아니고 지혜가 많아서 부르신 것이 아니다.
형제들아 너희 부르심을 생각하여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 택하사, ···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30).
이상을 볼 때 하나님의 부르심은 분명히 큰 은혜이고 무한하신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성경과 역사, 그리고 실제 우리 삶을 통해 볼 때 인류의 많은 사람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주님도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 14)”라고 말씀하시며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 을 열어 자신의 실존과 죄를 인지하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주이신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전적인 역사에 감사하며 부르심을 입은 부르심에 합당하게(엡 4:1) 살아야 할 것이다.


4.2 거듭남, 중생 (重生, Regeneration, Reborn, Re-new, Re-creation)
4.2.1 중생(重生, Regeneration)의 필요성

구원의 순서에 따른 구원론의 두번째는 거듭남, 중생이다. 중생은 사실 부르심(소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루이스 벌코프는 부르심(소명)과 중생사이의 순 서를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말씀전파에서 벌어지는 외적 소명은 중생 보다 먼저 오게 되거나 동시에 오게 된다. 말씀 전파를 통하여 성령께서 인간내적 성향에 영향을 주는 것이 효과적인 부르심인 것이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중생을 통하여 죄인은 하나님의 소명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됨으로 인간 영혼의 성향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과 효과적인 소명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부르심은 인간의식을 대상으로 하고 인간 밖으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면 중생은 인간의 잠재의식속에서 발생하고 인간의 어떠한 태도와도 독립되어 있으며, 인간안에서 발생한다는 차원에서 부르심(소명)과 구별된다.
중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변화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와 타락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새로운 출생, 즉 영적인 출생을 필요로 한다. 성경을 보면 특별히 로마서 3:9-20에 보면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은 어떤 한 부분만의 수정이나 개량을 통해서 고쳐질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근본적인 변화나 새로운 출생이 필요한 존재인 것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즉 영혼의 성향 전체가 변화되고 전환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남, 중생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설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4.2.2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남을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 거듭 중(重), 날 생(生), 즉 중생(重生)이다. 한자어 표현의 의미는 거듭해서 태어난다, 반복해서 태어난다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중에 찾아온 관원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의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이에 놀란 니고데모는 그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라고 반문한다. 이에 예수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5)”라고 대답한다.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주석학자들은 “물과 성령”을 다 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해한다. 물과 성령을 똑같이 성령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거듭나는 역사는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 새로운 출생의 역사이다. 사실 우리말 성경에는 “거듭남”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거듭남”의 희랍어의 의미는 “위로부터, 처음부터, 새로” 등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아니하면”의 정확한 의미는 “위로부터 다시 나지 아니하면”의 의미이다. “위로부터” 다시 말해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중생은 인간의 노력이나 계획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나는 것”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후 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4.2.3 중생(重生)의 신비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라는 예수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중생의 개념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람은 꽃과 잎사귀들을 흔들고 그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린다. 그러나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도 이와 같다. 바람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도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의 거듭나는 과정과 거듭난 확실한 시간이나 장소를 분명히 대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생은 성령의 주도적인 신비한 사역이다.
그러나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결과를 드러낸다. 이와 같이 영혼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도 그 구원하는 능력을 체험한 모든 사람의 행위 가운데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거기에는 변화가 수반된다. 회개와 거듭남은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신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죄를 사랑하고 악을 추구하는 마음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함으로 영혼이 거룩한 사랑에 빠지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그래서 벌코프는 중생의 정의를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속에 뿌리시고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Regeneration is that asct of God by which the principle of the new life is implanted in man, and the govering disposition of the soul is ade holy)”라고 정의한다.


4.2.4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중생은 초자연적 현상이다.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 3:9)”라고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생은 분명한 성령의 사역이다. 이것은 성령이 인간의 심령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여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중생에는 인간의 어떤 협력도 필요하지 않다. 성령의 직접적이고 독자적인 사역이다(겔 11:19; 요 1:13; 행 16:14; 롬 9:16; 빌 2:13). 구원이 성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시작되었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객관적인 구원사역이지만 신자들의 삶과 영혼에 주관적으로 적용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다르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객관적인 구원사건을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오직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도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다음호에 계속)



구원이란 무엇인가?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의 구원에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도 구원을 받는 데 있다.

그러면 이 구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구원은 누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또 이 구원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제 이 문제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구원의 의미


구원이라는 용어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매우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 의미는 예수님의 이름에서 잘 나타난다. 가리브엘 천사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장차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다(마 1:21). 그리고 그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일 것이라고 밝혀 주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고 죄의 결과에서부터 해방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의 결과인 죄책과 죄의 오염에서부터 해방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죄는 사람들에게 죄책과 오염을 안겨 주었다. 여기서 죄책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람이 육체적이고 영적인 죽음과 더불어서 영원한 지옥의 저주에 이르게 된 것을 말한다.

 

죄책과 오염은 서로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죄책은 법률적인 것이고, 오염은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죄책은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감옥에서 형을 사는 것과 같다. 형기가 끝나면 그 죄에 대해서 더이상 법률적인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하지만 감옥에서 형을 사는 사람은 선하게 교화되기 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오염이 되어지기가 더 쉽다. 그래서 형기를 마치고 난 이후에는 그 삶이 더욱 간교한 죄를 가중시키기 쉬운 상태가 되어지는 일이 많다. 오염은 이러한 상태에 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러한 죄책과 오염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즉 구원은 죄의 책임인 죽음에서부터 해방이 되어 생명으로 옮겨지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죄로 오염된 옛사람에서 해방되어 날마다 새사람을 입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모든 육체의 연약함과 유혹을 견디어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위험이나 재난, 또는 육체의 질병이나 경제적인 가난 등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구원의 모든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큰 오해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는 에녹보다도 형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을 먼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난이나 죽음에서 기이한 방법으로 살아난 사람만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오히려 주를 위해 굶주리고 헐벗음을 당한 자나 목베임을 당한 순교자들을 더 높이 찬양한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죄와 관련이 되어있다.


 

구원의 의미에 대한 세 가지 구분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해방은 한 순간에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법률적인 해방은 법률적 선언이 주어지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실제적인 해방은 오랜 시간, 또는 일평생을 두고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구원은 그 시간적 적용에 있어서 다음 세 가지 의미로 구별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성취된 구원


성경에는 구원을 이미 성취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구원을 과거형으로 말한다. 사도 요한은 구원의 결과인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였다(요 5:24). 그리고 사도 바울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엡 2:8).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에 그 즉시로 거듭나게 된다(엡 2:1).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롬 3:30).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에게 즉시로 양자의 영을 주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신다(롬 8:15). 성경은 이러한 중생과 칭의와 양자됨을 가리켜서 과거형의 구원으로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이미 성취된 구원이다.


 

현재 진행중인 구원


성경에는 구원을 현재에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과거형과 함께, 현재진행형으로도 말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히브리서의 저자도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사용해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하였다(히 10:39).

 

중생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생활이 순간적으로 다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후폐한 옛사람의 구습을 없애고 거룩한 새사람의 모습을 가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싸움이 필요하다.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이 싸움이 날마다 계속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싸움과 관련하여 말씀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고전 15:31). 성경은 성도가 걷는 이 성화와 견인의 과정을 현재진행형의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진행중인 구원이다.


 

장차 완성될 구원


성경에는 구원을 미래에 완성되어질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사도 야고보는 이미 믿음 가운데 있는 성도를 향하여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다(약 1:21). 과거와 현재진행형의 구원을 말했던 사도 바울은 또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다(빌 2:12).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죄의 모든 결과들과 사탄의 유혹에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은 육체의 장막을 벗을 때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 성경은 성도가 장차 누리게 될 영화로운 상태를 미래형의 구원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장차 완성될 구원이다.

 

구원을 현재 진행중이거나 장차 완성될 의미에서 본다면,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지금 받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하거나, "장차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구원이나 장차 완성될 구원은 과거에 성취된 구원의 기초 위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성취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현재와 미래의 구원도 받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확신 속에서 어느 경우의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대답을 할 수가 있다. "예,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적용 사역으로서의 구원


구원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다(엡 2:8). 여기서 하나님이라 함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가장 막중한 일인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삼위 하나님은 일체가 되시기 때문에, 그 존재나 사역에서 서로 분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삼위의 인격은 각각 독립이 되어 있으므로 그 존재나 사역에서 일정한 순서가 구분이 있다. 성부께서는 창세전에 구원을 계획하셨다. 성자께서는 이 땅에 성육신을 하시어, 성부의 구원 계획에 따른 내용들을 객관적으로 단번에 성취하셨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자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을 그를 믿는 각 개인에게 현실적으로 적용을 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예수룰 믿을 때에 우리 속에서 주관적으로 일어나는 구원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은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하지만 그 대상과 목적에 따라서 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임하여 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는 사역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보통사역과 특별사역이라고 부른다.


 

보통사역


성령의 보통사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 생명을 잉태케 하시고, 유지하게 하신다(마 1:18). 생명은 우연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힘만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존중히 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주신 성령께서 근심을 하지 않으시도록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을 포기하거나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가 되어진다.

 

?. 각종의 재능들을 부여해 주신다(추 31:2)-성경구절 확인. 어떤 사람에게는 노래를 잘 하는 재능을 주신다. 다른 사람에게는 운동을 잘 하는 재능을 주신다. 또 바느질, 무용, 그림, 글씨 등을 잘 하는 재능도 주신다. 그래서 이 재능들이 서로 어울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도록 하신다. 모든 사람은 성령께서 부여해 주신 바 자기 나름대로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주어진 남다른 재능이 무엇인지를 가급적 빨리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그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무시를 해버린다면, 한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 놓았던 사람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려지고 말 것이다.

 

?. 도덕질서를 유지케 하신다(롬 2:14-15). 사람의 양심이나 역사의 교훈이나 행정관리의 힘이나 특별하신 섭리 등을 방편으로 사용하여서 선을 증진케 하고 악을 억제케 하신다. 그리고 종교성을 자극하여 종교적 활동이 가능하게도 하신다(행 17:22). 이러한 성령의 사역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는 죄가 관영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나마 윤리와 도덕이 지켜지고 있다.


 

특별사역


특별사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 그리스도를 자기의 참 구주로 믿을 수 있도록 세례를 베풀어주신다(마 3:11).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속사람에게 베푸시는 불세례가 있어야 한다.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 즉 불세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음에 대한 외면적인 표로 행해지는 것이다. 이 성령의 세례는 여러 차례 또는 수시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물세례의 경우처럼 일생에 단 한 번 받는다. 성령께서 주시는 세례는 그 효력이 약해지거나 취소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 믿는 사람들의 심령을 충만케 하신다. 구원함을 받는 사람은 그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구원에 합당한 열매인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깨어 죄를 대적하면서 날마다 더욱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 일이 가능하도록 충만함을 주신다. 성경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하신 일이 없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은 명령한다(엡 5:18).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은 믿음의 간구와 회개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은 약화 또는 소멸이 되어질 수가 있다(살전 5:19).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기도가 필요하다.

 

?. 충만함과 함께 각종 영적 은사들을 주신다(고전 12장).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언, 방언, 통역, 영분별, 병고침 등의 신령한 은사가 수반될 수 있다. 이 은사들은 사람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그리고 다양한 수준으로 주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둘 이상의 은사가 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은사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진 은사만을 높게 보고 다른 사람이 가진 은사를 소홀하게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영적인 은사가 있어야만 성령충만에 이르거나 성령충만을 유지하게 된다고 하는 것도 역시 잘못이다.

 

?. 믿는 사람 안에서 내주(內住)를 하신다. 믿는 사람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고전 6:19).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 안에서 내주 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치고 보증하신다(고후 1:22). 힘들고 어려워 할 때에는 도움을 주시고 새 힘을 얻게 하신다(롬 8:26).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를 때나 오묘한 것을 만날 때는 깨달음을 주사 하나님의 신비함이라도 통달케 하신다(고전 2:10).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기도 하신다(롬 8:16).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셨다(요 15:26). 보혜사란 옆에서 속삭여 주는 자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을 행함은 주의 손이 나를 안보함이요,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고 찬송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믿는 사람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신다(롬 8:27). 믿는 사람이 연약해 있을 때나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롬 8:28).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다(롬 8:28).

 


구원의 기초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 선행, 기도, 예물, 공로 등 그 무엇이라도 구원의 기초가 되지 못한다. 이것들은 구원을 받았기에 생겨나는 결과이다. 심지어는 믿음마저도 구원의 기초가 되지 못한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엡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15: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우리를 가리켜서,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했다(엡 2:10). 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이나 말이나 지식의 풍성함을 누린다고 했다(고전 1:5).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도 하고 부활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살전 4:16, 고전 15:22). 또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도 받는다고 했다(롬 8:17).

 

구원이란 마귀의 자식이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지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의 죽으심과 함께 의를 위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의 부활과 함께 새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의 고난과 함께 의를 위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의 영광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그의 순종과 함께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는 것이다. 그의 승리와 함께 율법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아져야 한다. 생각, 목표, 취미, 관심, 생활방식, 등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같아야 한다. 그러기에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을 갖추어 가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와 조직에 가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개인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제도나 생활방식의 변화보다는 심령 즉 인격의 변화가 우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어떤 사이비 주장자들이 내세우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행동양식을 보여야 하거나 특이한 신비체험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특정 집단에 가담하거나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도 없다. 제도나 생활의 개혁보다는 심령의 변화에 집중해야 한다. 심령이 변화되면 그 생각이나 취미가 예수님과 같아지게 되고, 따라서 육신을 즐겁게 하는 술을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는 경우가 이를 잘 입증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시는 사실이 성경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로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요(요 17:21), 아담과 그 후손(롬 5:12), 남편과 아내(엡 5:22), 머리와 지체(고전 12:12), 목자와 양(요 10:14), 포도나무와 그 가지(요 15:5), 건물과 모퉁이의 머리들(엡 2:20) 등이다. 이 모두가 서로 분리가 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구원은 우리의 모든 인격과 생활이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 완전하게 해방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하여서 선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 선물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여서, 이 엄청난 선물을 값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동시에 그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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