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나타난 구원론
서 론
1. 연구목적
성경은 사람의 책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책이다. 때문에 성경연구의 기술이 요구되며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의 의도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정황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하나님의 그 오묘하신 구원의 계획을 기뻐해야 한다.
구원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요 핵심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 역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요3: 16)다. 또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구원(마1: 21)하시기 위해서다. 성경의 기록 목적 역시 그를 통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또한 구원이란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있는지 신약성경의 각 권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의 어원과 구원이란 용어와 개념들을 알아 가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구속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 대한계획을 점진적으로 진행시켜 가신다는 사실을 계시하고있다.
죠지 래드(George Ladd)에 의하면 전체 성경은 가장 적절하게 불리워 지는바 구속사의 관점 안에서만 통일성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개인적으로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 즉 역사 안에 사는 인간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 찾아오신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며 해석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역사자체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로마서1-8장까지는 개인의 구원에 중점을 두고 있다면, 로마서9-11장은 인류 구원사를 설명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9-11장은 이방인과 유태인의 구원이 각각 역사적으로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목적이며, 또한 이 구원의 복음을 받고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를 연구해 나가는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범위 및 방법
구원론이란 인간의 핵심적인 필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상당한 관심을 갖게하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에 대한 핵심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구원이란
단어의 용어와 해설을 신약을 중심으로 다루었으며 특히 4복음서와 야고보서, 베드로서에 나타난 구원의 특징적인 언어들을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 상황에 구원이란 뜻은 무엇을 두고 했는지를 다룰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중심으로 해서 연구를 해 나갈 것이며, 또한 구원이 현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성도들이 바라 보아야하는 목표가 무엇인가를 각 부분마다 이야기 해 나갈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 분의 기뻐하심에 있으며 그분의 목적, 그분의 선택, 예정, 사람의 창조가 들어있는 그분의 거룩한 경륜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하신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구원이란 ?인류를 죄악과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내고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용어로 전해졌고 구전과 문서화 단계를 거치면서 책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연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성경적인 관점에서 시작하고자한다. 이유는 성경 안에서만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셨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말은 필요와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즉, 각기 다른 상황에 맞는 용어나 개념들을 선택해서구원의 본질을 전달할 수 있고, 다양한 용어와 개념을 종합해서 구원의 본질을 오늘 우리들이 올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실제 삶 속에서 풍부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구원 일반적으로 쓰는 말과 종교적으로 쓰는 말, 그리고 성경에서 사용하는 말 사이에는 개념적인 차이가 있다.
성경적 구원의 개념에 있어서는 신구약성경에서의 어원적 의미와 사상을 고찰한 후 기독교적 구원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나와 있는 구원관을 연구해 나가고자 한다.
제1장 구약에 나타난 구원 개념 이해
1. 인간 죄의 보편성
전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에게 죄는 보편적 현상이다. Louis Berkhof, 「기독교 신학 개론」, 신윤복 역(서울: 은성문화사, 1978), p. 137.
죄의 통치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은 죄의 세력 아래 있다. 그러므로 의인은 아무도 없다.? David Steele and Cyrtis C. Thonas,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김남식 역 (서울: 한국성서협회, 1975), p. 40.
전 인류는 아담 안에서 타락하고, 아담의 죄가 직접 전가됨으로 인하여 죄인이 되었다(롬5: 12-17).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가 나타나고(시51: 5),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다(엡2: 3). 성경은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 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한다(롬3: 23).
인간의 죄는 원죄와 본죄로 구별되는데, 원죄(原罪)란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출생하는 죄적 신분과 상태를 말한다. 원죄는 “죄책”과 “오염”, 두 요소로 구성되는데, 죄책은 죄에 대한 책임으로서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형벌 받을 죄상을 의미하며, 오염은 죄책의 결과로 오는 생득적 부패, 원의의 흠결, 적극적 악의 임재 등을 의미한다.
죄와 그 결과로 인해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혹 현실의 삶 속에서 법적 하자가 없는 사람은 물론 윤리 도덕적으로 성현(聖賢)이라고 추앙 받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과 하나님의 말씀의 법 아래서 죄 없는 사람이 없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 2, 3). 인간은 예외 없이 죄인이므로, 각 사람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문호, 「기초 교의신학: 구원론」(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3), pp. 44-45. 아더 핑크는 이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의 구원,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 죄의 현존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4중적으로 지적, 제시하였다. Arthur W. Pink, 「구원의 교리」, 윤종훈 역(서울: 도서출판 풍만, 1989), pp. 187-239.
죄는 필연이 형벌을 초래한다. 이 형벌은 죄인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당하는 것이다(욥15: 20; 잠24: 16; 사3: 11, 57: 20, 21; 롬2: 9).
2. 인간 구원의 필요성
죄에 빠진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은 죄인들의 아버지가 되기 위혀여 죄인들을 찾으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할 것을 권고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구원받아야 할 대상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성경에서 제시하는 영적 영역의 구원은 구체적으로 죄로부터의 구원(마1: 21; 딤전1: 15)과, 형벌적 사망으로부터의 구원(롬5: 9; 살전5: 9), 그리고 영혼의 구원(벧전1: 9), 장차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서의 구원(눅13: 23) 등이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구원은 어떤 사람에게는 필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보편적인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죄인이다. 타락의 의미는 인간의 최초의 의(義) 및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애정의 결여와 인간의 도덕적 성질의 부패 및 악을 향한 경향이다. 모든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성경의 가르침은 타락의 보편성을 말해 준다. Henry C. Thiessen, 「조직신학강론」, 권혁봉 역(서울: 생명의말씀사, 1992), p. 425.
인간은 본래 성삼위 하나님의 직접적인 특별 동작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박형룡 「교의신학: 인죄론」(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1), pp. 103-106.
또 신체와 형상을 가진 존재로, 그리고 여타 만물보다 우월한 지위와 영장(靈長)으로 창조되었다(창1: 27, 28, 2: 7). 그러나 인간은 이 영광스러운 지위를 박탈당하고 낙원의 축복된 삶도 상실하고 만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범죄는 인류의 시조요 모든 후손의 대표자로서의 범죄였다. 하나님의 도덕적 신형상 곧 원의(原義)를 상실(엡4: 24 참조), 이로 인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죄책에 시달림(창3: 8), 사망과 고통(영적 사망, 질병과 고통, 육체적 사망, 영원적 사망)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자연이 저주를 받고 환경의 악화가 초래되었다(창3: 17, 18, 23, 24). Ibid., pp. 163-69.
이러한 인간의 타락은 필연적으로 구원을 필요로 한다. 타락과 그 결과로부터의 구조 및 타락 전 상태로의 회복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실, 구원자체가 이 타락을 전제한 개념이다. 최홍석, 「구원의 의미와 구원의 확신」(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3), p.19.
3. 인간 구원의 개념
구약성경에서의 나타난 인간의 구원의 개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한글 개혁 구약에서?구원?이라고 한 용어는 여러 가지 히브리어들을 번역한 용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는 구속하다와 구속이라는 단어들이 히브리인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었던 하나님의 능력있는 행동에 적용되고 있다(예로 신7: 8; 대상17: 21참조). 그 히브리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에샤)를 어근으로 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파생어들과 함께 353회나 나온다. 「구약 원어 신학 사전」 제1권(서울: 요단출판사, 1986), p. 514.
동사로서는 Nipal(보통 재귀 및 수동태)과 Hiphil(능동 사역태)로 쓰여지고, 명사로는 (에샤), (예수아)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원적 의미는 넓게 한다,풍성하게 한다,자애 없이 발전한다 등이며, 여기서는 전의(轉義)하여 해방(삿2: 16, 8: 22), 번영(욥30: 15; 시12: 5, 6), 싸움에서의 승리(신33: 29; 삼상14: 45; 삼하8: 14)등의 의미를 갖는다. 고영민(편), 「성서원어 대사전」(서울: 기독교문사, 1993), p. 64.
즉, 넓은 환경 속이나 평안한 가운데서 안심하고 있는 것, 혹은 얽매인 것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위클리프 성경 사전」 제1권(서울: 지평서원, 1987), p. 110.
특히 이 원형에서?구하여 주옵소서 라는 뜻의 호산나(σαννα, 시118: 25; 요12: 13)라는 말과 또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란 뜻의 여호수아(70인 역에서는 Ιησο)와 이사야
호세아 등의 고유명사가 파생되었다. 「성서 어휘 사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pp. 31-32.
집단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약에서의 구원은 어떤 개인에 대한 것보다 집단 혹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더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각 개인은 집단(이스라엘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구원은 인간 가운데 내재하지 않으며, 또 구원되는 조건도 인간에게는 없다(신9: 4-6; 시8: 4; 사45: 21). 구원은 오직 여호와의 것이다.
신약성서의 구원 개념에 있어서 구원론이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개인들의 삶에 적용하는 내용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론이라는 것은 인간의 핵심적인 필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상당히 관심을 갖게 하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고 천국을 선물로 주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며, 그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을 나타내는 말은 주로 헬라어 동사 σωζω와 명사 σωτηρ α인데 Gerhart Kittel, 「신약성서 신학사전」, 번역위원회 역(서울: 요단출판사, 1980), p. 1258.
약 150회 이상이σωξω이, σωτηρ α가 45회쓰였다. σωξω는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구원뿐만 아니라 영원한 의미에서의 구원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곧 위험이나 질병이나 죽음에서의 해방 및 보존(마9: 22, 14: 30; 눅8: 50 18: 10; 행27: 20, 31, 34; 히5: 7), 그리고 안전, 건강 더 나아가 승리(계12:10, 19: 1)를 의미한다.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영적 구원에 있어서 구약에서의 구원이 대부분 생활 가운데서의 현실적, 육체적 구원인 반면 신약에서 제시하는 구원은 주로 죄와 그 결과로부터의 구원 즉 전인적인 구원이다. 구원에 대한 신약의 주요 개념은 죄로부터, 그리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징벌로부터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다(마1: 21; 눅1: 77; 행2: 24; 롬5: 9; 살전1: 10).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의 눈에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예수의 죽음은 구원 메시지가 됨으로서 신약의 주제가 되었다. 또한 이 구원은 최후 심판으로부터의 면제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대의 영생에 참여하는 특권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종말론적 구원에 대하여 신약의 성도들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종말적인 구원을 지향하고 대망 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매우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신약의 성도들은 이미 현재적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몸의 구속 곧 메시아의 재림으로 인해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을 고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 의도의 목적은 악과 죄악으로 인해 혼란해진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제 2 장 복음서에 나타난 구원관
1. 마태복음의 구원이해
마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째, 예수는 메시야이다. 마태는 예수를 메시아라고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마16: 16). 예수님의 사역의 의미는 신적 계시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인간들 사이에서의 하나님나라의 임재와 그 능력은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침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발표했으며,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셨다.
마태복음에서 우리가 먼저 대하게 되는 것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구조를 보면 신중하게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마태복음 7장28절, 13장35절, 19장1절, 26장1절에 반복되어 나오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는 예수께서 특별한 주제(제자도, 전도, 비유, 인간관계, 미래)에 대해 하신 말씀을 신중하게 편집한 마태복음5-7장, 10장, 13장, 18장, 24-25장에 나오는 주요한 다섯 강화를 구분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훨씬 더 주요한 것은 마태복음을 가로지르는 명백한 극적 진행으로서, 마태복음 1장1절부터 4장16절에서는 메시아 예수님을 소개하고, 마태복음 4장 17절부터16장 20절에서는 호응과 적대가 동시에 자라나는 가운데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공적 사역을 기술하고, 조지 엘든 래드「신약신학」, 엄성옥? 한철흠 역(서울: 은성, 1974), p. 269.
마태복음 16장 21절에서 18장 35절에서는 제자들에게 주신 사적인 가르침을 통해, 죽기까지 거부당하는 가운데 숨어있는 메시아 사명의 참 목적을 밝힌다. 마태복음 19장 1절에서 25장 46절에서는 예루살렘으로의(유일한) 방문중에 이스라엘의 고식적 지도부와 메시아께서 대면하는 것을 묘사하고(23장에서는 마지막 공식 발언이 나오는데, 이는 예수님의 호소를 뿌리치고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마침내 거부하시는 것이 표현되어있다). 마태복음26장 1절부터 28장 20절에서는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는 고난과 죽음과 부활로 결론을 맺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기독론에 있어서도 누가복음보다 더 명확하게?비밀?이란 주제를 여전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제자들이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더 공공연하게 주 라는 칭호를 규칙적으로 사용한다. Ibid., p. 271.
또한 마태복음은 극적인 구성을 통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불신의 직면한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제시했다. 둘째,천국이다. 예수의 왕직의 장엄함은 우리에게 메시야 왕국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마태가 소개한 많은 자료들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천국이 얼마나 핵심적인 주제가 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예수의 천국복음의 전파를 마태가 인용한 거의 바로 다음에 산상수훈이 이어진다. 산상수훈은 실로 천국의 대헌장을 제정한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천국의 윤리 기준은 바리새인들이 왜곡되게 해석한 모세 율법을 훨씬 능가한다. 어떠한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도 마태는 예수께서 베푸신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성격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예수는 그의 나라의 영적인 성격을 생생하게 묘사하셨다. 천국의 말씀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열매 맺기까지 자라나야 한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기쁨은 이 말씀의 기운을 막는 경향이 있다. 천국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자라나는 실재다.
천국의 가치는 밭에 감추인 보화, 또는 매우 값비싼 진주를 발견한 상인에 비유할 수 있다(마13: 1-51). 또 다른 비유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마음을 설명하고 우리도 같은 용서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씀하셨다(마18: 23-35).
천국 비유에서 마태는 예수께서 열어놓으신 천국에 관하여 분명한 시간성을 주목하였다. 인자의 왕국인 천국에는 현재성, 일시적인 성격이 있다. 이 현재의 시대가 인자의 재림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마태는 또한 천국과 관련하여 교회의 장래를 전망하신 예수의 교훈을 기록하였다. 그의 세대의 모든 사람이 죽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가 열릴 것이라는 예수의 기대는 다음과 같은 예언을 통하여 확증된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런 일들이 다 일어날 것이다(막13: 30).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도시를 다 다니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마10: 23).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예수가 시간적으로 매우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도래의 정확한 기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강조했다. 즉,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요구했다(마6: 10). 마태복음에서 천국 설교가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마태복음의 저자 자신이 자기의 복음을 천국복음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4: 23, 9: 35, 24: 14, 26: 13),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예수의 선구자 침례요한의 설교(마3: 2)와 예수 자신의 설교(마4: 17)와 예수의 후계자들인 제자들의 설교(마10: 7)가 모두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으로 통일되어있다는 점에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셋째,성취이다. 마태복음의 신학적 시각을 가장 잘 나타내는 하나의 단어는 성취이다. 마태복음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관용표현인?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한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혹은 비슷한 말씀(마1: 22, 2: 15, 18, 23, 4: 14, 8: 17, 12: 17, 13: 35, 21: 4, 27: 9, 13: 14, 26: 54, 56을 비교하라)에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른바 관용 인용문들은 이야기에 대한 마태 자신의 설명으로, 구약의 계시와 예수님의 이야기를 잇는 연결 고리들을 인식하여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게 하는 그의 풍성한 지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명확한 예언들을 공식적으로 인용하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마태복음에서는 구약에 대한 풍부한 암시가 들어 있으며, 그 중 많은 부분은, 이스라엘의 과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활동의 주요한 국면들과 예수님 사이에 예표론적 관계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에 관련해 주목을 끄는 예는 마태복음12장에서 세 번 반복된 관용표현 안에 있다. 성전, 요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12: 6, 41, 42). 마12: 3-4에 나오는 진설병 논쟁에 같은 사상이 암시되어 있다: “다윗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넷째,?소망?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역할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일곱 번씩이나 다윗의 아들로 불려진 것이나(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각각 두 번씩만), 마태복음의 첫 이야기 장면이,다윗의 아들(마1: 20) 요셉이 어떻게 예수님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도록 설득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예표인데 마태복음 1장과 2장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또 다른 예표론적 주제는, 모세가 바로 에게 쫓겼던 것처럼 헤롯에게 쫓기는 새로운 모세로 예수님을 본 것이다. 출4: 19를 연상시키는 마2: 20을 참조하라.
마태복음 전체가?그리스도의 모세 오경?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서 모세 같은 선지자의 새로운 법을 제시한다는 베이컨(Bacon)의 생각은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마태복음 17장 1-8절에 나오는 변화산 장면(물론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과 산상설교를 시작하는 부분(마5: 1-2)에서는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제시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였는데 후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전수한 것이 성취되었음을 암시한다.
2. 마가복음의 구원 이해
마가복음의 기록장소와 시기는 마가 교회의 상황을 파악해보면 어렵지 않다. 로마의 역사가 였던 키투(Tacitus)의 「연감」(Annals)과 설피시우스 세베루스(Sulpicius Severus)의 「연대기」(Chronicle) 그 당시 로마의 역사에 관한 부문은 C. K. Barret, The New Testament Background: Selected Documents (New York: Harper & Brothers, 1961), pp. 15-19에 포함되 있다.
는 주후 60-70년 사이에 로마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직면했던 역사적 상황에 관해 중요한 자료를 재공하고 있다. 또한 마가복음 자체가 마가 시대 교회의 상황을 밝혀 주는 자료들을 보여준다. 이미 씨뿌리는 자의 비유해석(막13: 20) 가운데서 마가 시대의 교회가 핍박과 고난 가운데 처해 있던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분명한 암시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막8: 34)이란 언급을 통해서도 마가의 교회가 고난의 교회(ecclesia pressa)였음을 볼 수가 있다.
마가복음서의 원 줄거리는 마가복음 14장과 15장에 걸친 수난설화(passion narrative)이다. 여기에다 마가는 다른 설화들을 삽입시켜 편집을 했다. 수난설화들은 가버나움에서 생긴일(막1: 1-45), 논쟁설화(막2: 1-3: 6), 비유설화(막4: 1-34), 기적설화(막4: 35- 5: 43), 십자가의 길(막8: 27- 10: 45), 예루살렘의 논쟁설화(막11: 27- 12: 40), 묵시의 말씀(막1: 31- 37)의 순서로 편집을 하면서, 마가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이라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는 말로서 마가는 예수의 사역을 소개하였다. 마가는 예수의 중요 사건을 기록하여 교회에 익숙하여 있는 어록(語錄, Logia)을 보충하려고 하였다. 전경연 외,「신약성서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p. 41.
마가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자들의 특권과 실패, 예수와 함께한 체험, 특히 예수께서 그들에게 주신 가르침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와 같은 제자들의 둔함을 기회로 예수께서는 그들의 틀린 생각들을 고치시기 위해 적극적으로 가르치셨다. 마가는 제자들을 우리가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격과 비난의 대상, 즉 경계의 본보기로 제시하고 있다. 위든(T. J. Weeden) 은 이러한 관찰을, 마가가 의도적으로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대적?역할을 하게 했다는 견해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마가는 여기에 한가지를 더 말하고 있는데 마가복음의 마지막 결론 구절(막16: 8)에서도 제자들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가하고 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고 그가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는 점을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하라는 천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들은 여인들은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마가는 의도적으로 여인들의 침묵을 통해서 즉 천사의 명령에 대한 여인들의 불복종을 통해서 제자들과 베드로가 빈 무덤과 예수 부활에 대한 천사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고 예수가 다시 갈릴리에 나타실 것이라는 소식도 듣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의 둔함과 실패와 대조해서, 마가복음에서는 또한 제자들의 특권과, 예수님의 제자들과 외인에 대한 근본적인 구별(막4: 11)에 대해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마가는 본질적으로 열정적인 이야기 작가이다. 나머지 복음서들과 비교해서 마가복음은 사색적 신학이 아닌, 행동과 극적인충돌과 놀라운 기적에 관한 책이다. 그 다음에 마가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 14-15)는 예수 자신의 말씀으로 이어나갔다. 마가는 예수의 주되심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 하였다. 예수의 최초 선포를 보더라도 분명히 예수께서 다가올 메시야 시대에 관한 선지자의 예언들을 인용하신 가운데 자신의 사역을 가르치셨다. 메시야가 오시므로 천국이 가까웠다. 마가복음 서문에서 복음이란 단어가 세 번 사용된 것을 주목하여 보면(막1: 14-15) 마가의 메시지의 핵심이 더욱 분명해 진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마가복음의 핵심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가복음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인데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마가복음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그 전환점의 준비작업으로서 벳세다 소경 치료설화이다(막8: 22-26). 그래서 흔히 그 설화를 가리켜 베드로 신앙고백의 서론적, 예비적 서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가복음 중심에는 적어도 두 가지 큰 목적이 있다고 본다. 그 첫째는 예수께서 이사야가 말한 여호와의 종의 사역을 성취하셨음을 밝히는 것이다(막1: 2-3). 둘째는 첫째목적과 관련 있는 것으로 여호와의 종 예수의 삶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수난으로 이끌어졌다고 증거 하는 것이었다. 마가는 직접적으로 선지자 말라기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므로 서 이 복음의 뿌리를 밝혔다. 마가는 예수를 여호와의 종?으로 계시한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과 멸시를 당해야 하리라는 구약의 예언들을 인용하셨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주를 사람들에게 멸시 당하고 거절당한 자, 곧 내어쫓는 장면에서 자신과 사탄의 대결을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강한 자로부터 구출된 먹이, 독재자에게서 해방된 포로들, 큰 자와 함께 분 깃을 나누고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수의 집중적인 설명은 분명히 이사야53장의 고난 받는 종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마가는 종이라는 주제에 맞게 그리스도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마가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가계(家系), 출생, 그리고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종에게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주된 관심사는 종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지, 그가 어디로부터 왔는가가 아니다. 그러나 사도행전4장 27절의 기도 형식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도 표현되며 또 예수의 동일한 칭호가 사도행전3장 13절, 16절, 4장 30절에도 나오지만 신약성서의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가 유대 묵시문학 안에서는 때때로 메시야를 위해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이 이후에 나의 종 메시야가 죽을 것이다. 이 칭호는 그것의 일차적인 어의(語意)에 따라서 원시 공동체에서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순종하는 종으로서의 지상의 인간 예수의 오심을 특징짓고 있으며 부활하신 분의 품격을 특징짓지 않는다. 둘째, 고난 중심의 전개방식이다. 마가가 기록한 시기는 네로의 박해로 말미암아 위기가 시작된 때였다. 이 때문에 마가복음8장 31절에서 마가복음9장 1절과 같은 문단은 매우 실제적인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이 문단은 다가올 고난에 대한 예수의 선언으로 시작하여 다음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8: 34, 35, 38).
예수 생애의 사건들에 대한 마가의 이야기에는 고난과 죽으심에서 절정에 이르는 예수의 핍박에 대한 많은 언급들이 있다. 막2: 10, 8: 31, 9: 9, 12; 10.
마가는 예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셨다는 사실, 즉 그가 구원하실 능력이 있는 분임에 대한 가장 위대한 증거로서 그의 복음서를 끝내고 있다. 그는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나타난 사건과 주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선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3. 누가복음의 구원 이해
누가는 다음과 같이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누가는 그의 저작 목적을 사실대로 밝힘으로서 복음서를 시작하였다. 첫째, 기독교 신앙의 기초로서 누가는 아마도 헬라친구인 데오빌레에게 관심을 가지고 진리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확실한 것들을 알게 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헬라인의 생각에는 의심스러운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비이성적이며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누가는 이러한 문제의 성격을 감지하고 만족할 만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일에 착수했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사실들을 증거할 권한이 없었던 누가는 역사가의 방법, 이를테면 목격자와 말씀의 사역자의 증거에 기초한 모든 사실들의 과정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추적하는 방법을 따랐다. 누가는 예수 탄생 시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 예언들로 시작하였다. 또한 예수 재림의 지연에 대한 신앙적 위기에 대한 문제인데 이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은 콘첼만(H. Conzelmann)이다. 김득중,「복음서신학」(서울: 컨콜디아사, 1985), p. 200.
그리고 누가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신 예수의 생애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예수 생애의 대부분은 사람들과의 빈번한 접촉을 갖는 일이었고 그 때의 예수의 인간적인 멋, 사람들에 대한 관심, 연약하고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 부한 자와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토론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의 성품이 어떠한 가를 증명해 준다. 이 예수의 생애의 사건들이 확실한 부분을 차지하며, 세상 역사와 중요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알리는 일은 이러한 역사적인 목적에 합당한 일이다. 누가의 지배적인 관심은 분명히 구원 드라마에 나타나 있는 옛 언약과 새 언약 간의 연속성이다. 둘째,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이다. 이 주제가 마리아의 찬송 서막,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누가복음 1장 46절부터47절에서 드러난다. 마리아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자신의 구주라고 생각한 것이 중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가랴도 예언의 영을 받아,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이 키셨으니 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가랴는 자기의 아이(침례요한)가 주 앞에 앞서 갈 자로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위 백서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구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눅1: 76-78). 이 구원 중심의 예수 사역이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의 메시지에서 또 다시 강조된다.
천사는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선포했다(눅2: 11). 제사함을 위한 회개의 침례를 집중적으로 전한 침례 요한의 전파를 다룸으로서 누가는 이 구원의 주제를 이끌어갔다. 누가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서 그의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이사야서의 인용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씀으로 마무리지었다(눅3: 6).
예수의 구속 사역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했다. 그 중 하나가 병 고치는 일이었다. 그 예로는 중풍병자를 고친 일, 백부장의 아들을 고친 일, 그리고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일 등이다. 누가 또한 구속 사역의 일부에 속하는 예수의 의미 깊은 가르침을 소개하였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주의 깊게 보라. 그리고 말씀이 마음에 뿌려졌지만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자도 있다는 예수의 설명을 주목해 보라(눅8: 12). 그러나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도 있었다(눅8: 15).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을 때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이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라며 중얼거렸다(눅15: 2). 이에 예수께서 잃어버린 죄인들의 구원을 주제로 하는 누가만이 기록한 세 가지 이야기로 대답하였다. 잃은 양, 잃은 동전, 탕자의 비유는 누가만이 기록한 것으로 이 세 가지는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가장 알기 쉽게 묘사하였다. 예수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즉,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분명한 보상을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15: 29, 30). 영생은 구원의 의미를 가장 풍요롭게 나타낸 동의어이다. 셋째,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이다(눅4: 16-30).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는 누가 문서의 주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유대인들은 항상 그들의 기도 가운데 자신들이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곤 했으며 또 이방인들을 개와 같이 여기기도 하였다(cf. 막7: 27). 그리고 자기들은 참감람나무라고 생각하면서 이방인들은 돌 감람나무라고 천시하기도 하였다(cf. 롬11: 17). 이런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가 있었을까? 또 실제로 그런 통일이 가능할까? 그런데 누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에 관한 평화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즉 사도행전 10장 34절부터 36절에서 누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가리시지 않는 분이어서…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으신다…하나님은 만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마가는 자기의 복음을?the gospel of God?(막1: 14) 또는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막1: 1)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태는 the gospel of the Kingdom(마4: 23, 9: 35, 24: 14)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누가는 주로?gospel?의 동사형을 사용한다. 따라서 행10: 36에서도 엄밀하게는 the gospel of peace 가 아니라 evangelize 또는 preach peace 이다. 누가가 어는 복음기자보다도 peace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마가엔 그 단어가 사용된 적 없고, 마태에는 오직 4번, 누가에선 14번 사용되었다). 누가는 peace를 복음서 설화 가운데서 구조적으로 전략적인 위치에서 사용하고 있는 점이 중요하다. 첫째로 유아기설화에서 3번(눅1: 79, 2:14, 29)사용되어 평화에 대한 기대감을 일으키고, 두 번째로는 누가의 특수자료 가운데서 (눅10: 5-6, 19:38, 42) 평화가 선포되고, 세 번째로는 예수의 부활이 ?평화?의 인사를 가져다 주고 있다.
다섯째, 복음의 보편성?이다. 구원이 먼저는 유대인에게 주어질 것이나 그들이 배척할 때는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누가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요한 일부이다(행13: 46-47).
누가 문서에서?여행?은 중요한 주제를 이루고 있다. 이 주제는 복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을 드라마 화하고 있다. 시므온은 이 구원이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라고 하였다(눅2: 31, 32). 이 구원의 보편주의(universalism)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 바이다. 이사야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함과 같으니라 고 예언하였다(눅3: 6). 누가는 복음의 보편성을 마음에 두고 예수의 조상을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담까지, 심지어 하나님까지 추적해 올라갔다고 보는 것은 단순한 억측이 아니다(눅3: 23-28). 누가는 이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았던 한 사람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고 말하자 예수께서 하나님의 초청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부를 비유 형식을 통하여 생생하게 묘사하셨다(눅14: 15). 이 비유는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칫상에 앉아있는 반면 초청 받은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쫓힘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말씀의 그리스도의 대위임을 인용한 것은 매우 타당하다(눅24: 47). 이와 같이 누가는 누가복음의 역사적인 사실을 세상의 역사와 연관시켰다.
4. 요한복음의 구원 이해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메시지는 요한이 그 기록 목적을 공적으로 피력한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요20: 31). 요한은 또한 믿음의 중심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다. 믿음의 결과, 이를테면 생명을 선포하는 것 또한 요한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요한의 문서가 성령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요한복음의 본문을 통해 어느 정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몇 가지 중요한 본문만을 예로 들어 본다면, 요한은 성령으로 나야만 “물과 성령으로”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water and란 문구는 본래의 일부가 아니라 후대 교회 편집자의 삽입이라는 설이 있다.
둘째, 하나님의 자녀 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의 보살핌의 특별한 대상으로서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은 도덕적-종교적 용도이며, 사람들과 이스라엘 민족 모두에게 적용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민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의 대상, 맏아들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다. 구약성경에서는 거듭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들 됨으로 묘사한다. 예를 들어, 신14: 1; 렘3: 19, 20; 호11: 1을 보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요3: 5)고 말하고 있는데, 성령으로 나는 것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강조하고 있는 성서 기자는 오직 요한 뿐이다. 그리고 오직 요한 만이 하나님은 영(Spirit)이시다(요4: 24)라고 강조하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도?영과 진리로?(in Spirit and truth)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요한은 첫째,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보스(G. Vos)는 하나님의 아들은 최소한 네 가지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 행위를 통해서 존재하므로, 생득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셋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거의 동일한 의미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눅3: 38). 부분적으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의 아들, 맏아들이라고 부른 출애굽기4장 22절의 의미인 듯하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말2: 10). 누가복음1장 35절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아마 이런 의미일 것이다. 왜냐 하면 그의 탄생은 몸 안에서 이루어진 성령의 직접적이고 창조적인 행위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신에 대해서 이 우주의 조성자요 창시자를 발견하는 것이 하나의 과업이었다. 그분을 발견했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그를 선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행한 연설에서도 이와 비슷한 신학이 발견된다. 그곳에서 바울은 진리를 예증하기 위해서 스토아주의의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행17: 28). 여기에는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 되심에 대한 신학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형제요 자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셨습니다(롬1: 3-4). 여기에서는 부활 이후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된 것이 시간적으로 다윗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통해서 특징지어진 예수의 지상적인 메시야 품격 다음으로 배열된다. 초기 원시 공동체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음을 누가복음1장 32-33절에서 밝혀진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 마리아에게 준 처녀 임신의 선포에 관한 분명히 후대의 이야기 틀에서 발견된다. 그는 위대한 분이 될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이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며 그는 영원히 야곱의 후손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며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이 약속은 전적으로 유대적으로 표현되었다.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보좌 위에서 영원한 나라를 받아야 하며 또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된 그러한 정치적인 군주로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분명히 받아야 한다. 이 맥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서 다윗의 후손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사무엘하7: 14에서는 다윗의 후손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된다. 내가 친히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역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된다는 약속이 지배적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도래하는 세상 심판자이다(요 5: 25). 그 결과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앙고백은 다음의 결정적인 요청이다. 누구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도 또한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요일4: 15, 5: 5, 10). 아들이라는 흔한 호칭은 자연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요3: 17; 요일4: 14).
요한은 선언하였다.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요1: 18) 헨드릭슨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중요한 논평을 한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이라는 구절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항존하는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고 뛰어난 의미에서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는 완전히 아버지를 알고 계신다. W. Handrikson, New Testament Commentary Vol. I.(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63), p. 90.
그리스도 위에 성령이 임하시는 모습을 보며서 침례 요한은 말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보낸다(π μπειν, ποστ λλειν)는 말이 무려 40여 회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우선 하나님께서 일류에게 파송 하신 분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파송 받은 아들은 자연히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말하고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신다.
둘째,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이다. 요한은 아울러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를 소개하는데 큰 관심을 보였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the Son of Man)라고 여러 번 언급한데서 이러한 사실이 분명해진다. 나다나엘과의 대화에서 예수는 나다나엘의 믿음을 세워주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그리고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 13-15)는 말씀으로 예수께서 결론을 내렸다.
요한은 중요한 사건 때마다 말씀하신 예수의 위대한 자기 주장을 기록함으로서 예수의 자기 계시를 계속하여 소개하였다. 오천 명을 먹이신 때에 예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또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8: 1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11: 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 6). 내가 참 포도나무요(요15: 1).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 7). 이러한 자기 주장들은 사람들과 관계될 때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성품을 나타내 보여준다. 이 자기 주장들은 예수를 자기 계시자로 소개하는 요한의 독특한 메시지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앤드류 월스(Andrew S. Wall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한의 로고스 교리의 원천은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있다. 예수는 로고스에 의해서 해석될 것이 아니다. ?로고스는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만이 그 의미를 가질수 있다. 고했다. ?Logos?Baker's Dictionary of Theology(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60),
다음은 기원전 4세기말에 나타난 구브로 사람 제노(AD 336-264)에 의하여 시작된 스토아 철학이 주전 1세기에 이르러서는 주로 포시도니우스(Posidonius)의 영향으로 플라톤의 철학과 절충 종합된 사상으로 변하고 신 플라톤 사상의 선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요한복음과 스토아 철학의 관계는 주로 로고스 사상에 있다. 그래서 로고스는 스토아 철학의 우주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학파의 말에 의하면, 로고스는 우주 만물에 편만 하여 있으며, 로고스는 아주 섬세하여 감지할 수 없는 실체라는 것이다. 로고스라는 말은 첫째로 내재적 이지(reason), 즉 내적인 이성적 소유이고, 둘째로는 내적 사상의 외적표현, 곧 말(speach)을 의미한다. 로고스는 신성이 있으며 생물이나 무생물을 막론하고 모든 물체 속에 나타나 있다. 나아가서 로고스는 신이요 동시에 우주이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의 물리학은 결국 범신론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신적인 로고스의 정자(精子, λ Υοι σπερματιχο)는 특히 사람의 마음속에서 발견되며, 사람의 마음은 우주적 마음(universal mind)의 한 조각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사람이 이상적 생활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사람 속에와 또 주위에 있는 로고스를 따라서 사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과의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에도 로고스라는 말이 있을 뿐 아니라, 로고스는 각 사람을 비추는 빛(요1: 9)으로 되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스토아 철학에서도 각 사람이 다소를 막론하고 우주적인 이지(reason)를 받아 가졌다고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는?말?곧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자기 땅에 오셨다는 것(요1: 11) 또는 자기 양이 그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요10: 3 이하), 진리에 속하는 사람은 다 그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요18: 37), 그는 하나님의 흩어진 자식들을 모으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요11: 52),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람을 신이라고 불렀다는 것(요10: 35) 등을 깊이 검토해 볼 때 스토아 철학과 유사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로고스론이나 인간론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로고스가 참으로 자기 땅에 오신 것이 사실이지만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말은(요1: 11)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것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사람이 자기 속에 가진 로고스로 말미암아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 12)고 하였다. 이것도 역시 스토아적인 사상과 상반되는 것이다.
셋째, 믿음의 의미이다.
요한이 밝힌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보면 또 하나의 독특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믿음의 의미이다. 믿는 것과 관련해 요한이 특징적으로 사용한 두 단어는 표적들(seneia)과 일들(erga)이다. 이 두 단어는 모두 기적과 관련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대개 능력 있는 행동들?(dynameis) 또한 공관복음에서는 때때로 예수님의 기적들을?일들?로 부르며(마11: 2; 눅24: 19),기적에 대해 seminio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마12: 38-39, 16: 1-4; 눅23: 8). 그렇지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오는 기적은 상이한 역할을 한다 또한 요한은?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고 기록했는데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믿음을 설명하였다. 믿음의 기초 또는 근거이며, 믿음의 핵심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오, 믿음의 결과인 생명이다.
우리는 믿음의 근거 두 가지를 발견하지 못하고는 요한복음을 깊이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의 근거의 핵심은 각 개인이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행하사 그의 영광을 보여주신 표적이다.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신 말씀에 관한 매우 포괄적인 진술을 한 서문(요1:14, 15)에서 요한은 이 둘 중 첫 번째 것에 생각을 집중시켰다. 이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the Word)과 가장 인격적이고 친밀하게 접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체험을 발전시켜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1: 14)라고 말했다.
요한 뿐만 아니라 육신이 된 말씀을 증거한 모든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열두 제자를 뜻하지만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의 크신 일들을 보고, 그리고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졌던 무리들이 포함된다. 이 모든 체험이 예수를 아버지의 독생자로 믿는 믿음의 근거가 되었다. 이를 입증하는 방법으로서 요한은 또한 침례 요한의 증거를 소개하였다. 이 증거의 핵심은 예수의 영원한 선재(先在)에 입각한 신성이었다. 요한은 여기에다가 의미 있는 체험적인 설명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1: 16). 이와 같이 믿음의 근거를 중심 내용으로 다룬 최초의 진술에서 우리는 믿음의 핵심이 인격적인 체험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침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를 메시야라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예수와의 인격적인 체험이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 대한 증거를 소개한 몇 가지 사실을 기록하였다(요5: 30-47). 이 증거들의 최대의 목적은 믿음의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가 침례 요한의 증거였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인간에 불과하다고 하면서도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고 말하였다. 그 다음에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사 이루게 하신 예수 자신의 역사(役事)였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 이적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증거를 언급하셨다. 넷째,?믿음의 핵심이신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은 믿음의 핵심이신 그리스도를 아주 분명하게 증거한다. 체스터 레만,「성경신학 신약Ⅱ」, 김인환 역(서울: 1999), p. 91.
믿음은 한 인격과의 관계이다. 믿음은 막연하거나 공허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라고 말하였다(요6: 68, 69). 마지막으로 다섯째,?성령과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고찰해보면, 성령의 강력한 활동과 충만한 임재를 모든 생애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성육하신 사건부터가 성령의 사역인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이시고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이나 자연계에 나타나실 때에는 무형한 힘으로 나타나신다. 바람과 같이 무형하다(요3: 8). 성령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힘의 나타나심이다. 그러나 그가 사람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셨다. 성령도 역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각 사람에게 부어진다(행2: 33). 그리스도가 능력으로 활동하신 것도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다음이었다(막1: 10). 그 능력을 그리스도는 다시 제자들에게 주시어 악령을 제어하게 하셨고, 핍박을 앞에 두고도 항거할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마10: 19).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아버지께 구하여 또 다른 도우실 이?(보혜사즉 파라클레토스)를 그대들에게 주어 영원토록 그대들과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도우실 이는 희랍어로는 우선 법적 용어로서 변호하여 주는 사람을 가리킨다(요14: 16, 26, 16: 7-15). 심판의 마당에서 신자를 변호하시고 죄에 대하여서난 의에 대하여서난 심판에 대하여서나 세상을 책망해 주실 것이다(요16: 8-11). 마지막 심판 때에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 때에 성령으로 심판에서 신자를 건지실 것이다. 또 도우실 이는 부탁한다는
동사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하여 권고하시는 이시며(행2:40; 고전14: 3), 교회를 바로 지도하며 가르치는 진리의 영이다.
5. 야고보서의 구원이해
먼저 야고보서는 자신에 대해서?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라고말하고 있다. 교회 전승에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이 서신을 쓴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야고보 라는 동명 이인(同名 異人)이 여러명 나온다. 즉 세베대의 아들 중에 하나요, 12제자 가운데 한명인 야고보(막1: 19)와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막3: 18)그리고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막6: 3; 고전15: 7)와 사도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눅6: 16)등이다. 로버트슨(A. T. Rebertson)에 의하면?여기 정죄되고 있는 죄들은 초기 유대 기독교 신자들의 특징적인 죄목이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의 주인공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야고보서는 그 어떤 서신 서들 보다 가장 실제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행위를 실제적으로 안내하고 있는 안내서 라고 전해지고 있다. 야고보서 안에는 도덕적 교훈과 권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윤리를 말하고 있다. 바울과의 다른 점은 바울은 복음을 안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하지만 야고보는?복음을 밖으로 나타내라 고 말한다. 야고보는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야고보는 실제적인 신학적 문제를 하나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바울의 칭의 교리와 완전히 상충되는 것이다.
바울의 칭의 교리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행위가 없는 믿음을 근거로 해서 무죄를 선언하신다는 것이다(롬3: 20). 그러나 야고보는 반대의 입장을 말하는 것 처럼 보인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 14-18). 야고보는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 바울과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이라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 야고보는 반복하여 구약의 인물들을 모형으로 제시한다.
창세기15장 6절의 아브라함을 언급하면서 믿음에 의해 의(義)가 주어졌으나, 그 믿음의 한부분은 창세기22장 1절 이하에 주어진 행위에 의한 확증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야고보의 믿음은 정통 견해다. 또한 바울이 사용한 행함이라는 말은 율법의 형식으로 복종하는 유대적 행동 즉 선한 자랑을 인간에게 제공하는 행동을 말한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바울의 가르침과 야고보의 가르침이 서로 상반된다고 생각했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활 후 예루살렘의 감독이 되었다(행15: 13-21). 야고보는 이 서신을?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즉 성밖의 자들에게 써 보낸다고 말한다. 예수님 당시, 열 두 지파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유대인들만이 열 두 지파 라고 불려 질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참 이스라엘에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행26: 7). 레온하르트 고펠트,「모형론」, 최종태 역(서울: 새순출판사, 1987), p. 205.
그 열 두 지파는 ?각 민족 가운데 흩어져 있었다.?그러나 이 열 두 지파는 지리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구속사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들은 그들의 영원한 본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빌3: 20; 히13: 14). 야고보는 핍박받는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이 살아가면서 시련을 당하는 법이라고 가르치며, 축복과 상급이 이 모든 시련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 어려운 시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지혜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의로운 삶에는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우리를 지배하던 죄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긍휼이 따른다. 야고보의 구세주를 믿는 참된 신앙은 단지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상의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주제는 살아있는 믿음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야고보서4장 7절에서 10절은 권면을 하고 있는 부분이다(참조,순복하라, 대적하라 7절,). 이는 행동을 요구하는 강한 표현이다. 야고보의 이러한 표현은 사단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도망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즉 야고보는 시험의 원인이 인간의 내적 본성이라고 생각했으며, 마귀의 존재 또한 인정하면서 시험의 근원이라고 암시한다(약4: 7). 성도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죄를 짖도록 유혹 또한 받는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약2: 5)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6. 베드로서의 구원이해
베드로전서의 핵심 단어는 인내와 소망이다. 본서는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리고 교리에 대한 다양한 언급이 나타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벧전1: 1, 3, 2: 23)에서 삼위중 한 분 성령께서는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베드로는 성령의 사역을 말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임박한 박해에 처해있는 자시의 동료들에게 반영시킨다(벧후1: 19). 그러므로 서두에서는?하라?는 명령어가 많이 나타난다. 베드로는 예수의 죽으심으로 인한 그 허무했던 감정의 체험과 예수님께서 부활했을 때의 그의 소망은 산 것이 되었다. 베드로전서에 있어서 적당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관계에서의 교회의 구원이다. 베드로전서2장 4절에서 10절에 따르면 교회는 신령한 집이며, 거룩한 제사장이며,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베드로는 교회가 이스라엘과 모세 시대와 모형론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방식에 친밀한 것으로 말한다. 즉 이러한 모형론은 교회가 그들의 구원을 확신시키는 뛰어난 수단으로 사용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의 교회는 지금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이다(고전14: 25). 또한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 받으시는 곳이다(벧전2: 5).
이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준 약속은 베드로전서1장 7절과 베드로전서4장 13절에 보면 믿음을 지킨 연단 후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존귀와 영광을 받는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디모데후서4장 7절에서 8절에 보면 주의 재림을 사모하고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제사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 행해지는 육체적인 행위가 아니다. 베드로전서는 침례가 교회와 세상을 나누는 방식을 입증하기 위해 원시역사로부터 한 모형을 사용한다. 베드로는 교회에 침투하는 거짓 교사들의 문제가 있어왔던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독자들에게 그들을 경계하라고 주의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재림에 대한 증거를 부인하는 이단설에 대하여 베드로후서1장 16절에 보면?주 예수의 강림하심?의 교리가?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수영,「사도 베드로의 서신」(서울: 바울서신사, 1991), pp. 161-62.
따라서 베드로의 표현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론적이기 보다 상당히 실천적이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에서 책망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은 성경을 외곡해서 자기들의 목적에 맞도록 해석하는 사람들이다(벧후1: 20, 3: 16). 그들은 이 세상은 안정된 세상이므로 모든 일이 변화되는 것 없이 전과 같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성경을 많이 아는 신앙적 열성이 뜨거운 사람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이단으로 떨어진 경우가 많다. 그것은 성경을 억지로 잘못 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렌스키는?성경의 곡해는?멸망?을 보증한다. 성경을 조심할 지어다!?고 경고한다. R. C. H. Lenski,「성경주석 베드로전후서. 요한. 유다서」(서울: 백합출판사, 1976), pp. 291-92. 하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드로는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호세아6장 3절에서?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거짓 영들에게 속지 말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베드로를 괴롭힌 것은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는 이단들 때문이었다. 주의 날은 구약성서 예언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개념이다. 베드로의 예수 재림에 관한 묘사는 주의 날에 관한 구약성서의 묘사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주의 날은 갑자기 경고 없이 오는 것이다. 즉 죄인의 심판과 멸망이 닥쳐오는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벧후3: 9). 베드로후서 하나님은 인간이 시간을 계산하는 그 계산속에 계시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재림은 인간의 계산처럼 지연될 수도 안될 수도 있다. 재림의 지연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회개의 기회를 더 준다는 것이다(벧후3: 9). 베드로후서에는 전 성경의 영감성에 대한 결정적인 말씀이 하나 들어있는데 그것은 베드로후서2장 1절부터2절의 말씀이다. 그런면에서 베드로후서는 성경의 진리와 영지주의자들의?이야기?(myths)를 대조하고 있다(벧후1: 16). 이는 성경의 저자들이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제 3 장 바울서신에 나타난 구원관
1. 율법과 복음의 개념
유대교의 랍비로서 바울은 의심할 것도 없이, 율법이 지니는 중심적 위치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구약 성경을 성경으로(롬1: 2, 4: 3),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딤후3: 16) 간주했다.
조지 엘든 래드「신약신학」, 엄성옥 한철흠 역(서울: 은성, 1974), p. 481.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바울의 방법은 랍비 유대교의 전통에 해당한다. 구약의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 까지만 유효 하였다. 율법의 행위언약을 어김으로서 아담과 모든 피조물들은 다 죽었다(엡2: 5).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 율법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행위를 지켜야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율법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다. 로마서 2장 18절의 말씀을 보면?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라고 말씀한다. 즉 율법의 기능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되고 선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영적이며 신령한 법이다.
바울은 기독교인으로서 율법이 영적이며(롬7: 14),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선언했다(롬7: 1). 그는 율법의 신적 기원과 권위를 의심해 본 적이 결코 없었다. 유대인에게 있어 율법은 모두 문서화된 모세의 율법과 구전되는 조상의 유전?(갈1: 14)을 의미했다. 유대 랍비로서의 바울은 율법에 열심을 가졌던 것과 똑같이,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고양시키는 이 새로운 종교 운동을 근절시키는 데도 열심이었다. 유대교의 이론은 성문 율법 뿐만이 아니라 구전 전통을 모세까지 더듬어 올라갔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또한 유대주의자들은 메시아의 왕국에 들어오려는 자는 누구든지 할례를 받고 구약의 율법을 계속 준수함으로서 아브라함 가족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율법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토라에서의 계시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것이었다. 점진적 계시는 불필요하고 불가능했다. 생각해 보건대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스데반의 죽음에 관여하고 있었다(행8: 1). 후에 바울은 다메섹 길 위에서 예수를 만나므로 해서 진정한 자유 즉, 복음을 알게 됨으로서 유대교의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바울은 영생의 수확을 얻으려면 자아만족을 위한 육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준 생명의 성령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의 반대파들 즉,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자들은 이러한 영적인 것보다도 육신을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주장한다.
갈라디아인들은 자신들을 율법아래 놓고 유대교의 성일들을 지키려 함으로서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위해 하신 일을 무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분명한 율법의 목적은?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롬7: 7)라는 말씀이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율법은 계약법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킷텔, G. 외, 「신약성서 신학사전」, 번역위원회 역(서울: 요단출판사, 1986), p. 526.
히브리서10장 10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제로 우리 죄를 속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구원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지금은 구약시대와 같이 율법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대속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가를 우리는 율법과 그 제사법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있을 때 영생 또한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생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시대는 끝이 난 것으로 선언했다.
2. 하나님의 의 개념
바울은?하나님의 의?개념을 비교적 드물게 사용하고 있으나(롬1: 17, 3: 5, 21-22, 25-26, 10: 3; 고후5: 21; 빌3: 9 은 다르다) 언제나 하나의 규정된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그 개념의 의미는 단순한 용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의인론의 맥락 안에서 그 합성어의 사용을 고찰하여 볼 때 이러한 합성어의 전승된 의미에서만 생긴다. 머레이(John Murray)도 칭의의 교리에 의해 대답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거나 궁극적인 문제는 없다고 단언한다.
하나님의 의라는 합성어는 묵시문학적 유대교에서 그의 계약을 의롭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진술이다.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를 요청하거나 참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행동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는 오히려 나타났다(롬3: 21-22, 26-27). 이러한 진술을 근거로 하여 먼저하나님의 의?는 현재에 나타나게 된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이 행동은 선포되어질 뿐만 아니라 일어나며 그러므로 선포되어진다(참조, 롬10: 8-10; 고전1: 23-24, 30; 골1: 22-23). 더 나아가서 이러한 신의 행동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 의롭다 하셨음?이 분명하다. 의의 일반 헬라어 용법 즉, συνη로 끝나는 단어들은 추상적인 사상과 함께 발전한다. 특히 이 단어는 하나의 덕목으로서 나타난다. 즉 법을 준수하고 의무를 시행하는 시민의 미덕, 미덕 그 자체, 기본적 미덕들 중의 하나 등을 의미한다. 법적인 개념에서는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할당한다는 개념을 내포하는 분배적 정의를 의미한다.
그리고 구약성서(LXX)용법에서는 구약에서 의라는 개념은 자주 법정 적인 문맥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로운 사람이란 심판관에 의해서 죄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고 선언 받은 사람이다. 또한 칭의는 하나님의 율법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이 용어는 사실상 윤리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다. 구약의 (쨔다크) 라는 동사는 일정한 규범에 맞게 사는 것을 뜻하나 히필형 에서는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 혹은 칭의 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 사법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을 의미한다(사 50: 8f). 이에 대한 인간의 의는 하나님의 뜻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사5: 7). 신약성서 용법으로는 칭의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의 기원과 전제조건법은 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의의 법이다(롬9: 31). 의를 행하는 자는 그 의로 산다(롬10: 5). 율법에 의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갈2: 21).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얻어진다(딛3: 5).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미와 그의 칭의 즉, 하나님은「의」의 속격이며 소유하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언급한다. 인류전체가 대상이다(롬 1: 3).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이다(고전1: 30). 하나님은 의인 동시에 이를 실증하신다(롬3: 25). 지금 증여되고 분배되어 있다(롬3: 24, 25, 5: 1, 8: 30, 9: 3; 고전 6: 11). 선물이다(롬5: 17). 소망의 대상이다(갈5: 5).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롬5: 17, 21). 의로 통하는 순종이 있다(롬6: 16).
셋째, 의로운 심판과 통치(rule)의?의?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행17: 31; 계19: 11). 공동체를 인도하는데 있어서의 의(벧후1: 1). 통치자나 왕의 의(히11: 33).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행위로서의?의?를 말하며,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마6: 33). 박해를 초래한다(마5: 10) 경건의 실천을 포함한다(마6: 11). 침례 요한은 의의 길로서 왔다(마21: 32). 누가복음 메시야에 대한 기대에서 의와 거룩함이 결합되었다(눅1: 75).
베드로전 후서에서는 용서는 의의 삶의 전체조건이다(벧전2: 24). 고난받는 것은 의를 위해서이다(벧전3: 14). 노아는 의를 위해 고난받은 대표적 존재이다(벧후2: 5). 방탕자들은 의의 도를 떠났다(벧후2: 21). 새 세상은 의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벧후3: 13). 신약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로운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고려되어있다.
의롭다함을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논쟁적인 맥락에서 신적인 의인(義認)에 관한 이 복음을 가장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소위 로마서의 주제(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헬라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한 성경 말씀과 같습니다?, 롬1: 16, 17)는 그의 근본적인 상론(詳論)을 로마서3: 21-30에서 찾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과는 별도로……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 란 무엇인가? 신약에서의(Righteousness)라는 개념의 용법은 계약관계를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하면 계약을 체결하려는 자가 있고 계약에 참여하려는 자가 있어야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계약 요청에 참여하는 자를 의롭다고 부르는 것이다.
이 거룩한 하나님과의 인간 사이의 계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체결되는 것인데 인간 편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계약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약에 대한 유일한 수단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먼저 하나님은 은총 속에서 인간들과 교제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계약을 맺으셨다. 출애굽기24장, 신명기7: 7이하 참조.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로 약속하셨으며(그들을 구원하기로 약속함)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이 계약이 파기되었다. 이 경우에 하나님만이 파기된 계약을 다시 맺을 수 있다.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과 계약적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준수를 통해 계약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죄로 인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무력하게 되었다. 죄인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계약관계를 재정립하셔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계약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울이 확실하게 내세웠던 로마서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는 기록하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롬1: 16, 17). 구체적으로 구원을 효력 적으로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그의 위력이다. 의인은 바로 이 능력을 통하여 살게 된다. 이 구원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보여준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내시는 것은 그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매우 의미 심장한 구절을 인용한다. 즉?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구원이라는 단어의 전체 의미를 종합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 전체는 이 구원의 드러나는 모습을 구성하고 있다. 가장 전반적이고 종합적인 모습으로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계시하고 있다.
바울 서신들에 관한 모든 주석들은 이 중요한 단어들을 주석 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였다.
이들은 고전적 헬라어 서적들이나 혹은 70인경에서도 매우 자주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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