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분열과 새 교단의 탄생


서론

  

1950년대는 민족적으로는 6.25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 한국 장로교회는 1951년에 고려파가, 1953년에는 기장이, 1959년에는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교회분열의 배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실에 입각한 역사적 평가할 수 있을 때 한국교회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 

고신의 분열은 신사참배와 교회의 순수성 문제였고, 기장의 분열은 분명히 신학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통합과 합동의 분열은 그 원인에 대해 이견이 존재한다.

 

합동 측은 가장 큰 원인을 에큐메니칼과 반에큐메니칼 사이의 신학적 대립으로 본다.

반면 통합 측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장로교신학교 공금사기사건과 그로 인한 박형룡 지지 세력의 교권 지키기가 그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합동 측은 교회 분열이 신학적 보수성과 명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강조하지만,

통합측은 이러한 논쟁은 박형룡 박사를 옹호하는 과정에서 에큐메니칼 논쟁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외에도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의 분열이 일어났다.

 

        한국교회 분열도표
 

 

분열차수 및 시기

분열내용 

주요쟁점

장로교 

1차   1952 

 고신의 분립

신사참배 

2차  1953 

 기장의 분립

신학적 진보 

3차  1959 

 통합 . 합동

교권, 에큐메니칼 논쟁  

감리교 

1차 1946-49

 재건파, 복흥파

일제잔재 청산, 교권 

 2차 1954-59 

총리원, 호헌파 

감독선출 

3차 1974-78

 총리원, 갱신총회

감독선출 

성결교

1961

기독교대한성결회, 

예수교대한성결회 

국제연합기구

(NCC, NAE, ICCC) 

침례교

1959-68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총회와 선교부의 갈등

 

 

 












1. 장로교회의 분열

  

1) 예수교장로회(고신)의 분열  

(1) 고려신학교의 설립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항상 신학교와 연관되어 있었다. 

첫 번째 장로교회의 분열은 신사참배로 인한 교회의 거룩성 문제와 신학교육에 대한 이해 차이에서 왔다.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등 출옥성도들은 신사참배 굴복의 주요 원인을 신학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근본주의 신앙을 수호하고 지키는 것이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한다고 확신했다.

특히 김재준, 송창근, 윤인구 등이 이끄는 조선신학교를 인정할 수 없었다.

 

1946년 5월 20일 한상동, 박윤선, 주남선, 손양원 등은 진해에서 '신학교 기성회'를 조직했고 9월에 부산진 일신여학교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다.

(교장: 박윤선, 이사장: 한상동, 교수: 박윤선, 한상동, 한동명, 한부선)

  

(2) 박형룡 목사와 한상동 목사의 견해 차이

1947년 한상동 목사는 송상석 목사를 만주로 보내 봉천신학교의 박형룡 박사를 설득하여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도록 했다.

박형룡은 10월에 부산에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장로교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전체 장로교의 신학을 책임지고 싶어 했던 박형룡 박사는 한상동 목사와 견해 차이를 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고려파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양낙홍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한상동 목사의 고신 측은 고려신학교를 독립적으로 총회간섭 없이 운영하고 싶어 했다. 
  2. 그들은 의식적으로 독립교단을 만들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3. 독립적인 신학교를 운영은 그 자체가 교단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4. 그들은 설사 교회가 분열된다고 해도 신학교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려신학교 1947


박형룡 박사의 교장취임(1947)

 

1948년 제34차 총회(새문안교회)는 고려신학교 입학지원자들에게 노회가 추천서를 주지 않기로 결의했고,

제49회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 인준을 취소했다.

 

제34차 총회 1948년

  

(3) 경남노회의 분열: 경남법통노회 vs 경남노회

사실 경남노회는 출옥성도들과 신사참배자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교권은 신사참배자들에게 있었으나 경남교회의 대부분 성도들은 출옥성도들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재건노회는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경남노회 안에서 김길창 목사 등 친일파들이 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고려신학교 인준은 총회의 소관이라고 선언하고 신학교 학생추천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결국 경남노회 한상동 목사 등 고신 측(경남법통 노회)과 김길창 측(경남노회)이 분열되었다.

양쪽은 각자의 총대 명단을 총회에 제출했다. 1950년 4월 총회에서는 싸움이 일어났고 경찰이 동원되어 총을 겨누고 싸움을 말렸다.

1950년 가을 총회는 전쟁으로 모이지를 못했다. 1951년 부산에서 속개된 총회는 경남노회 측 총대를 받기로 가결함으로 사실 고신 측을 총회에서 축출했다.

  

(4) 토의사항

최초의 장로교회 분열을 두고 양쪽의 평가는 서로 다르다.

고신 측에서는 신사 참배자들이 출옥성도들을 몰아내고 김길창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평가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출옥성도들이 배타적으로 자신들의 의(義)에 기초한 교회의 순결성을 주장하고 총회와는 무관한 신학교를 운영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신 측은 미국의 근본주의자 메이첸 측 선교사 한부선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메이첸은 미국장로교회서 분열하여 정통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따라서 미국선교사들은 메이첸과 관련된 고신 측에 대해서는 불편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2) 기독교장로회의 분열

  

(1) 조선신학교의 배제와 총회신학교의 설립

1947년 조선신학교에 다니던 학생 51명은 교수 김재준 목사가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친다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들은 “신학은 보수주의 정통주의가 되어야 한다.” “교권을 강화하여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들은 이북에서 월남한 신학생들이었기 때문에 남쪽의 신학 전통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박형룡은 김재준의 교수의 신학에 대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과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고등비평은 피차 양립할 수 없다”는 해석을 내렸다.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로 온 박형룡 박사는 월남한 서북 장로교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1948년 5월 남산의 기독교박물관에서 신학교를 개교했다. 고신 학생들의 상당수가 그를 따라왔고, 과거 평양장로회 신학교 재학생들이 몰려왔다.

1948년 6월에 개교한 학교는 한 달 반 만에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들은 이미 조선신학교과 고려신학교에서 3년 수업을 거의 마친 학생들이었다.

 

조선신학교는 사실 유일한 장로교 총회 신학교였으나 조선신학교의 학풍을 싫어한 여러 노회들이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을 헌의하였다.

결국 1949년 4월 총회는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을 가결했다.

이로써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는 양쪽 다 총회 직영신학교가 되었고 갈등이 일어났다. 

한경직 목사의 중재로 합동위원들이 합동 안을 제시하였다. 


  • 양 교는 합동하고 중요과목은 선교사가 맡고 나머지는 한인 교수가 맡는다. 
  • 양 신학교의 직원, 교수진은 백지로 돌린다. 

사실상 이 주장은 조선신학교의 해체를 의미하였다.

  

1951년 봄 6.25 전쟁 중에 열린 총회의 주요 안건은 신학교 문제였다.

결국 총회는 두 신학교의 총회직영을 취소하고 총회직영 신학교를 따로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총회의 결의와 남북장로회 선교부의 지원으로 1951년 9월 '총회신학교'가 대구에서 출발했다.

(교장: 감부열, 교수: 박형룡, 한경직, 권세열, 명신홍, 김치선, 계일승). 

 

1953년에 박형룡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보수주의 계열이 다시 신학교육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조선신학교 측은 총회의 결의에 따르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분명 조선신학교를 해체시키려는 거대한 음모였다.

또한 양신학교를 합동한다는 총회의 결의는 각 노회의 수의과정(각 노회에서 투표하여 그 비율로 총회결의를 재확인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총회가 직결한 것으로 헌법 위반이고 비법(非法)이었다.

 

1952년에 총회는 경기노회에 명하여 김재준의 목사 직을 면직하도록 결의했다.

그러나 목사 파면 안건은 노회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의를 한 것은 장로교 규칙상 월권(越權)이었다. 

경기노회가 이를 거부하자 1952년 4월 제37회 총회는 김재준 교수를 제명하고 한국신학대학 졸업생에게 목사안수를 주지 않는다는 결의를 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불과 8표 차이로 통과했는데 한국인 총대는 111명(89.5%)이었고 선교사 총대는 12명(10.5%)이었다.

이때 미국선교사들의 투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선교사들의 명단은 권세열, 감의도, 옥호열, 허일, 조요셉 , 조합하, 보이열, 타요한, 감부열, 우배리, 라이온, 라예인(호주선교사)이었고

호주선교사를 제외한 미국선교사들은 박형룡 목사를 지지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경기노회는 1952년 5월 13일 전필순, 유호준 목사를 중심으로 총회의 결의에 대해 불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1953년 4월 25일 제38회 총회는 김재준의 목사직 박탈과 조선신학교 졸업생들에게 교역자 자격을 주지 않기로 다시 밝혔다.

이것이 1953년 기장과 예장의 분열을 가져왔다.

 

제38회 총회 (1953)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첫째는 1930년대부터 이어지는 박형룡과 김재준으로 대표되는 신학적 갈등의 표현이었다. 

조선신학교는 교육이념에 있어서 개혁신학의 주류에 입각했지만 세계교회의 각양 신학사상을 강의했고,

성경해석에서 역사학적 문서학적 비판방법을 도입하였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동조하였다.

이런 사상은 당시 장로교회 안에서 수용되기 어려웠고 선교사들에 의해서도 허용되지 않았던 영역이었다.

 

둘째, 선교사들과 서북세력이 없는 동안 조선신학교는 남부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재입국하고 월남 성도들이 많아지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1952년 4월 29일 대구서문교회 총회는 김윤찬 목사를 중심으로 10개 이북노회에 75명의 총대권을 인정했다.

1952-53년 월남한 장로교인들은 무지역 이북노회(평양, 평북, 함해, 용천)를 형성해서 총회에서 40%의 총대권을 획득했는데

이것은 실재 교인 수에 비례해서 엄청난 과대표이며 그 자체로 교권 주도세력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들은 박형룡 목사를 중심으로 결합했고 조선신학교의 김재준을 정죄했다. 

 

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은 1954년 6월 10일 서울동자동 한국신학대학에서 9개 노회 대표 47명이 모여 새총회를 발진하였다.

(교회 568개, 목사 291명, 교인 21,917명). 모토는 복음의 자유, 양심의 자유, 노예적 의존사상의 배격, 에큐메니칼 세계교회 갱신의 철저한 목표를 향해

분열이 아닌 갱신을 택한다고 선언하였다. 그 명칭은 대한기독교장로회 였다. 캐나다 선교회는 기장과 선교협력관계를 유지했다.


3) 예수교장로회(통합)과 예수교장로회(합동)  

(1)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신학적 대립  

한국장로교회는 1948년 암스텔담에서 WCC가 창립될 당시부터 회원교회로서 김관식 목사를 대표로 파송했다.

감리교회도 창립회원이 되었다. 1954년 제2차 WCC 총회가 미국의 에반스턴에서 열릴 때 장로교 총회는 한경직 목사와 김현정 목사를 대표로 내정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한경직 목사에게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그 당시 이승만 정권은 WCC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미국의 국제기독교협의회(ICCC)가 WCC에 대해 용공혐의를 씌워 반WCC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승만 박사는 그 영향을 받았다.

둘째, WCC는 한국전쟁에 휴전입장을 표명했는데 그것은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 배치되었다. 

셋째, 한경진 목사는 이승만 박사로부터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로 의심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부터 이승만 박사는 안창호의 흥사단과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집권 이후 흥사단은 철저하게 권력에서 배제시켰다. 

결국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명신홍 목사가 대표로 참석했고, 기독교연합회(NCC) 총무였던 유호준 목사도 연합기관 옵서버로 참석했다. 

 

장로교 일부에서는 WCC는 용공, 신신학, 교파통합운동이라고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장로교회의 대다수는 WCC가 단일교회를 추구하지 않으며, 회원교단 간에 친선과 협조를 통해 복음증거와 봉사를 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여 이 운동에 참여했다. 

  

WCC운동에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들은 누구였던가?

그들은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을 비난했던 51명과 그 외 10여명이 포함된 “복음동지회”였다.

이들은 1952년 7월 “복음주의협의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의 한국지부를 조직하고 12월에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의 고문은 박형룡 박사였다. 1958년 제43회 총회 때는 총회임원의 상당수가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이 조직은 강력한 정치조직으로 성장한 것이다.

 

 

NAE 주최 전국목사구국기도회 (1956) 

  

한국의 NAE인사들은 미국의 근본주의자이며 극우 반공주의자인 칼 매킨타이어(Dr. Carl McIntyre)가 세운 국제기독교회협의회(ICCC)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실 미국의 NAE는 근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고 신복음주의를 주창했던 해롤드 오켕가(Harold Ockenga)와 빌리그래함이 중심이 되어 세운 기구였다.

그러나 한국의 NAE 인사들은 역설적으로 근본주의 단체인 ICCC와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NAE의 신학적 관점을 모르고 있었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칼 매킨타이어 박사 1906-2002

 

ICCC 암스테르담 창립총회 

 

이들의 반WCC 주장의 이론적 근거는 ICCC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들이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용공, 교파단일화운동, 신신학, 반복음주의, 인본주의라고 비판한 것은 대부분 ICCC의 주장에서 빌어 온 것이었다.

실재로 그 당시 국내의 인사들 가운데 국제 에큐메니칼 운동의 내용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ICCC주최 반공강연회(1959)

 

WCC는 한국전쟁을 남침으로 규정하고 UN군 파견을 촉구하여 사회주의권 교회들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WCC 헌장은 “교회들의 친교”를 목표로 하며 단일교회를 지향하지 않는다.

분단과 전쟁, 정부의 반공정책 하에 있는 국내 교회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해할 신학적인 폭이 없었다.

특히 전쟁 중에 많은 이북의 교인들이 남하하면서 반공과 신앙이 하나로 묶여진 상황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용공으로 몰아간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2) 박형룡 박사 3천만환 공금사기사건 

장로교 3차 분열의 배경에는 장로회 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 공금사기사건이 있었다.

1957년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부지를 불하 받도록 해주겠다는 박호근이라는 인물에게 속아 3000만환을 지촐했으나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교장 박형룡은 궁지에 몰렸다. 그는 도의책 책임을 지고 교장직을 물러나고 집을 팔아 얼마라도 변제하는 방식을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기오, 박찬목 등 소장파(한국 NAE측) 등은 교장은 책임이 없고 교장직 사임이나 사택 매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박형룡 박사를 두둔했다.

 

1958년 3월 7일 이사회에서 박 교장의 사표가 수리되었고 그는 명예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사회의 일부는 박교장의 인퇴가 신학교에서 정통주의가 무너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박형룡 박사를 지지하는 인사들의 정치적인 지위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총회 안에서는 박형룡 박사의 복권을 위해 다수의 총대표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 반면 에큐메니칼 측에서는 이것을 막기 위해 다수 총대를 확보하려고 했다.

 

1958년 “3천만환사건”이 터지기 전 박형룡 박사는 WCC에 대해 두 가지 근거로 비판하였다.

첫째, WCC는 모든 교파를 포괄하고 교리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결국 자유주의자들(사회복음주의, 바르트주의, 성공회 가톨릭주의, 현대주의)의 지도를 받게 된다.

둘째, 궁극적으로 세계교회의 조직적 통일을 원하는 초교파운동이다. 따라서 복음주의에 입각해서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보수하려는 교회는 세 가지 대응방식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첫째, 친선교우(親善交友)의 사업에만 동행하거나

둘째, 전혀 참여하지 않고 외부에서 보수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따로히 전개하거나, 

셋째, 아무 에큐메니칼운동에서 참여하지 않고 고립독행(孤立獨行)함

  

그러나 그는 결론에서 한국장로교회는

 “세계적 교회친교의 중요함을 생각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지만 “교리상 경계와 비타협의 태도”를 취할 것이며,

장차 “교파합동의 계획이 구체화”되면 단연 탈퇴해야 한다고 말한다.1

 

즉 박형룡 박사는 “3천만환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WCC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탈퇴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 점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교단분열의 직접 원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3) 경기노회 총대사건 

당시 경기노회는 가장 영향력이 크고 총대 수가 많은 노회였다.

1959년 5월 12일 경기노회에서는 에큐메니칼 측과 반에큐메니칼 즉 사이에 총대 선정의 문제로 치열한 갈등이 일어났다.


경북노회의 예를 들면  

“1959년 봄 노회가 열려 44회 총회 고지 점령을 위해 자파총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선거운동이 전개되었는데 ….

경북노회는 이때 NAE파들을 중심으로 에큐메니칼 측 표를 잠식하기 위해 WCC의 용공문제를 들로 일어나 이를 최대의 무기로 삼았다.

그들을 아예 신신학이요, 용공주의자로 몰아붙였다.”   

 

경기노회의 경우는 더 치열했다.

투표결과 총대 28명중 NAE측 18명, 에큐메니칼 측 10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황금천 목사의 경우 당선이 되었는데도 이름이 누락되어 부정개표의 시비가 생겼다.

임시노회에서는 정기노회의 총대 선거를 무효화하고 새로운 총대를 선출하였으나

NAE측이 임시노회에 참석하지 않아서 대부분 총대가 에큐메니칼으로 선출되었다.

 

여기서 임시노회 측은 노회법상 정기노회에서만 총대를 선출한다는 원칙을 어겼다.

그러나 NAE측은 임시노회를 열기로 합의하고 고의적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은 총회에 가서 투표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9년 9월 제44회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에서 열렸을 때, 경기노회에서는 양쪽의 총대명단을 접수했다.

결국 총회는 양쪽을 놓고 전체 투표한 결과 124대 119, 기권5표로 임시노회 측 총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NAE측은 그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뒤바꾸기 위해 무리 수를 두다가 총회 장소는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제44차 총회 환영아치 대전중앙교회 (1959.9.24-28)


제44회 총회 1959 통합 합동분리

 

 

 1959년 9월 29일 에큐메니칼 측 149명의 총대들과 선교사들은 연동교회에 모여 총회를 속회했다.

그해 11월 24일 NAE측은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했다.

그 후 양쪽을 화합하려는 중재안은 실패로 돌아갔고 연동 측은 1960년 2월 17일에 통합총회를 개회했다.

 

총회통합을 위한 평화안(1959.11)

 

연동교회통합총회(1960) 


승동교회 합동총회 (1960) 

  

(4) 한경직 목사와 박형룡 목사 

양낙홍 교수는 교단분열의 배경에 박형룡과 한경직으로 대변되는 미국신학의 갈등이었다고 본다.

박형룡은 미국의 NAE(신복음주의)까지도 “이단”적으로 보는 근본주의자였다.

반면, 한경직은 조선신학교 이사진에 참여했고 김재준과도 친분을 유지했던 “온건한 신정통주의적 보수주의자”였다.

NAE측은 박형룡을 필사적으로 변호하는 과정에서 NCC측의 거두로 한경직을 지목하였다. 

 

양낙홍은 경기노회 총대사건에서 회의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은 NAE측에 대해 선교사들이 반발감을 가지면서,

1959년 9월에 모인 연동 측 총회를 합법으로 인정했고, 11월에 모이기로 예정된 승동 측 총회의 정통성을 미연에 부인해버렸다고 본다.

  

(5) 선교사들의 영향력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교회는 세계 에큐메니칼 질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미국의 주류교회들과 NCC는 진보적 노선으로 경도되었다.

한국의 장로교ㆍ감리교 선교사들은 내용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본국의 노선은 에큐메니칼 노선이었다.

그들은 한국 장로교의 분열이 구체화되자 반(反) WCC 세력에 대해 냉담한 반대 입장을 표현했다. 

1959년 총회에서 “에큐메니칼파”와 “NAE파”의 총대는 각각 124명과 119명으로 표차는 5표에 불과했다.

당시 선교사 총대는 18명이었다. 선교사들의 표는 캐스팅 보트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장로교 선교사 출신 중에는 마삼락(Samuel Moffet)과 같은 적극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지자도 있었다.

고신의 분열과 기장의 분열 과정에서도 미국 선교사들이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6) 장로회신학교와 총회신학교의 대립 

연동 측은 남산의 신학교에서 기물을 옮기려 하였으나 NAE측 학생들의 제지로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다만 학적부는 우여곡절 끝에 장로회신학교에서 소유하게 되었다.

장신대는 태능에 토지를 매입했으나 그것은 서울여자대학에 매도하고 광장동에 학교를 건립하였다.

총신 측은 ICCC 매킨타이어에게 10만불을 받아 한강로에 4층 빌딩을 구입하여 수업을 하다가 5년 후에 사당동의 현 총신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7) 통합을 위한 노력 

총회, 신학교가 양분되면서, 노회, 각 교회도 양분되어 전국교회가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한 가족들 안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당시 총신 측에서 통합 측을 용공으로 매도한 것은 너무 비신사적이었다.

한국정치사 속에서 반대파를 이념공세로 제거하는 비극이 만연했는데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재산문제로 인해 교인들끼리 법정에 섰고, 설교하는 목사에게 똥물을 끼얹는 사건도 일어났다.  

 

갈라진 교단을 하나로 회복하자는 중도파들의 견해가 있었다.

따라서 연동 측은 1960년 WCC 탈퇴를 전제로 하는 통합 안을 제시했으나 승동 측은 계일승 씨의 교장서리 취소,

이사장 안두화 파면, 교수 계일승, 김윤국, 박창환을 파면할 것 등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들을 제시했다. 

 

통합은 1969년 수송교회 김용준 목사의 발의로 경기노회가 WCC 재가입을 총회에 헌의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고

1975년 11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WCC 총회에 김윤식목사, 노정현장로, 김형태 목사가 참석했다.

이러한 공백은 통합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상당히 후퇴시켰다.

한편 기장은 1954년 에반스톤 총회에 가입신청서를 냈고 1961년 뉴델리총회에 정식회원으로 참가했다.   

 

(8) 합동 측과 고려파의 합동실패 

1960년 연동 측과 결별한 승동 측은 10년 전에 갈라진 고신 파와 합동하자는 여론이 높았다.

신학적으로 같은 근본주의 노선이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커 보였다.

총회가 하나가 된 이후, 신학교도 하나가 되어야 했으나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가 부산에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타협안으로 고신은 총회신학교의 분교로 하고 별과 3년생은 서울 본교에 와서 수업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경남노회 명칭문제, 고신 측의 율법주의적 도덕성, 이근삼 교수 채용 문제에 대한 이견 등으로 고신측은 환원하고 말았다. 

고신교단 600교회 중에서 200교회가 합동 측에 잔류했다. 잔류파의 재산을 재판을 통해 찾아오자는

“고소 측”(송상석 목사)과 세상 법정에 고소할 수 없다는 “반고소파”(석원태 목사)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어느 시대든지 주관과 독선적인 사상이 강한 집단이나 신학적이 훈련과 성서의 바른 이해가 부족한 집단에는

외부와의 단절은 물론 자체 내에서도 분열, 분쟁이 쉽게 일어나기 마련이다."5  

  

(9) 합동내부의 분열 

고신 측이 환원한 이후 합동 측의 교권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호남 출신들이 장악했다.

이 그룹은 1963년 이후 12년 동안 합동 측을 주도했고 거두는 정규오 목사였다.

소외되어 있던 중부 영남권은 이영수 목사를 중심으로 뭉쳐 교권 장악에 성공했고 17년 동안 교권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1979년 64회 총회는 주류 비주류의 분열이 생겼다.

당시 이영수 목사 즉 중부 영남 세력에 의해 교권에서 소외된 비주류 측은 64회 총회에서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합동보수'라는 교단을 세웠다.

 

2년 후 '합동 보수'는 호남 계의 '개혁 측'과 이북 및 호남 일부로 구성된 '합동 보수 측'으로 양분된다.

그 후 합동 비주류 안에서는 분열을 거듭해 80개가 넘는 수많은 장로교단을 형성하였다.

합동 비주류 계열의 분열은 철저하게 지방색과 교권을 둘러싼 다툼에 의한 것이었다.


1. 박형룡,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 <신학지남> (1958. 6.)
2. 김요나, 총신90년사, 374쪽
3. 양낙홍, “1959년 한국장로교의 분열과정,”《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3호, 2005, 115-157쪽 
4.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382쪽 
5. 최훈, 한국재건교회사, 153쪽.



2. 감리교회의 분열과 재결합

  

감리교는 세 차례 분열을 겪었다.

 

(1) 1940년대 재건파 vs 복흥파 

http://jbjoon63.blog.me/30101725792?Redirect=Log

감리교의 재건을 볼 것

  

(2) 1950년대 총리원 vs 호헌파 

재건파 류형기 목사는 1950년 총리원 원장 대리로 부임해서 1951-58년 동안 장기간 감독직에 재직하면서 재건파를 확고한 교권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는 1950년대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 감리교회로부터 재정 지원을 이끌어낼 적임자였기 때문에 1954년에 감독으로 재인준 되었다. 

 

반면 '호헌파' 측에서는 류형기 목사가 교회 헌법에 명시한 대로 정회원으로 6년 이상을 시무하지 않았고,

또 2년제로 되어있는 감독의  임기를 변경하여 4년으로 중임한 것을 불법으로 규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1955년 3월에 총회를 분립했다. 이것은 사실 남북 대결 구도였다. 

 

그러나 감리교회는 1959년에 교단통합을 이루었다. 1966년 경 감리교 안에서는 호헌파, 성화파(월남세력), 정동파(소수파) 삼파 정치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당시 111번의 감독투표를 했지만 감독을 뽑지 못했다. 

 

총리원 호헌파의 합동 (1959)

 

(3) 1970년대 총리원 vs 갱신총회 

1970년 '성화파'(월남교역자들)의 윤창덕 목사가 감독으로 선출되자 불만을 품은 인사들이 총회를 탈퇴하여 1971년에 경기연회(75년에 연합총회)를 구성했다. 

 

1974년 제12회 총회에서 '호헌파'의 김창희와 '성화파'의 홍현설이 감독 선거에 나셨고, 25번을 투표해서 김창희가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총대 42명이 교단 정화를 주장하고 퇴장하여 '기독교대한감리회'(갱신총회)를 조직했다(대표 감독 마경일). 

 

총회가 둘로 분열되자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일부 교회들은 중립을 선언했고,

선교사들도 중립을 선언하고 선교비 지원을 중단하였다. 

 

그 결과 감리교회는 총리원, 연합총회, 갱신총회, 중립파 등으로 4파가 생겼났다. 

1975년 11월 총리원 외 3개 파는 통합총회를 구성했다.

그후 1978년 총리원과 통합총회는 재통합하여 단일교단을 만들었다.

 

감리교회는 장로교회와 달리 비교적 쉽게 재연합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논쟁이 없었고 신학적 갈등도 크지 않았고, 갈등의 핵심은 교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3. 성결교회와 침례교의 분열

  

(1) 성결교회의 분열  

1946년 성결교회는 타교단들과의 연합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조선기독교연합회'(후에 한국기독교연합회, NCCK)에 가입했다. 1955년 제10회 성결교 총회는 NAE에 가입을 하고 넓은 대외활동도 하게 되었다.

 

6.25 전쟁 이후 방대한 구호 물자가 배급되면서 성결교 안에서 에큐메니칼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 사업을 중요시 했다. 반면 NAE 지지자들은 WCC를 용공으로 비난하고 복음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양쪽의 긴장이 심해지자 NCC와 NAE 동시 탈퇴 안이 거론되었고, 1960년 총회는 '탈퇴 보류'를 결정했다. 1961년 총회에서도 탈퇴를 거론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총회 결정에 불만을 품은 NAE계 19명의 대의원들은 '복음진리수호동지회'를 결성하고 5월에는 '성결교회보수동지회'로 개칭하고 '보수총회'를 세웠다. 기존 총회는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임시총회를 통해 NCC, NAE 양기관의 탈퇴를 결의하고 통합을 논의했으나 '보수총회'는 기존 임원의 전원사퇴, NCC 산하 단체들로부터도 완전 탈퇴를 요구했다. '보수총회'는 재정을 얻기 위해 ICCC에 가입했고, 재연합은 불가능해졌다. 1962년 보수총회는 “예수교대한성결회”(예성)로 개칭했다. (기성: 474교회 96,405명, 예성: 257교회, 교인 50,130명) 

 

(2) 침례교회의 분열와 재결합  

한국의 동아기독교는 1947년 미국 남침례교회와 유대관계를 체결했고, 1949년 “침례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침례교단은 펜윅(Malcolm Fenwick)의 “동아기독교” 맥을 잇는 주류 안대벽과 타 교단에서 영입된 비주류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1958년 미국 남침례회 선교회는 총회장을 마치고 전도부장이 된 안대벽에게 불신임을 통보했다.

주류 측은 침례교 선교회가 한민족을 무시한다고 했고, 선교회와 비주류는 총회 실행위원회가 침례교의 회중주의를 위반했다고 비판했다.

 

1959년 비주류 측은 “기독교한국침례회”(대전총회)로 이름을 붙였고, 주류 측은 “한국기독교침례회”(포항총회)로 명칭을 붙였다.

비주류 측은 남침례회 선교부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으나 주류 측은 ICCC에 가입하여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1965년 이후 침례교신학교 출신 교역자들은 침례교 정체성을 내세워 전입파를 견제하고 선교사들의 독주를 비판하며,

포항총회의 동문들과 연계하여 재결합을 추진했다.

1968년 4월 두 교단은 통합하여 “한국침례회연맹”이 되었고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개칭하였다.

   

4. 새로운 교단의 등장

  

해방이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다수를 이루었고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 등 군소교파가 활동했고, 안식교와 여호와증인 등 신흥종파가 들어왔다.  해방이후에는 오순절교회, 루터교, 나사렛교회, 퀘이커, 몰몬등과 같은 새로운 교단이 미국을 통해 들어왔다.

 

나사렛 교단-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성결-오순절 운동에서 출현하였다. 1948년 정남수가 한국의 성결교회 일부와 미국나사렛교단을 연결시켰고, 1954년 미국선교사 오웬스(D Owens)가 내한하여 나사렛 신학원을 세웠고 1955년에 교단을 출범시켰다. 

  

(1) 오순절교단 

1952년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1914년 백인들이 인종문제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분리하여 세운) 출신 선교사 체스넛이 내한하여 소수의 오순절계 교회들을 조직하였다. 

1953년 체스넛, 허홍, 박성산, 배부근 등이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로 교단을 출범했다.

 

박성산과 배부근 (1932)

 

1953년 그들은 순복음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그 신학교 출신 조용기와 최자실이 교회를 개척하여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성장했다.

오순절교단은 성령세례, 신유, 전천년주의 예수재림, 물질축복을 강조하면서 급성장했다. 1980년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예수교대한하나님의 성회”를 조직하였다. 

1991년 기하성과 예하성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 통합하였고, 1996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회원 교단으로 가입하였다.

  

(2) 루터교

1958년 미국 루터교 미조리 시노드(주류와는 달리 성경무오설을 믿으며 보수적인)에서 바틀링, 도루우 등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루터교회는 루터란아워 방송선교와 컨콜디아출판사를 통한 출판사업, 베델성서연구와 기독교통신강좌를 통해 선교하였다. 

 

1971. 한국루터교선교회출범

1980 “기독교한국루터교회” 약 40여 개의 교회가 형성되었다.

  

(3) 퀘이커(친우회 Society of Friends)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소종파운동으로 전후 구호사업에 영미 계통의 퀘이커들이 참여하였다.

1959년 미국인 미첼의 집에서 한국인 첫모임이 시작되었고 이윤구, 공병우, 함석헌 등이 그 초기 멤버였다.



출제 예상문제


12장 교단분열과 새 교단의 탄생

 

1. 한국교회 분열의 원인과 거리가 먼 것을 찾아라 (6) 

  ① 해방 후 일제잔재 청산(회개문제)

  ② 지역적 배경과 인맥

  ③ 신학노선 차이

  ④ 해외 교회 및 선교부와 관계

  ⑤ 교권 다툼

  ⑥ 교회의 사회봉사

 

2. 한국장로교분열의 연도를 이해하라

   ① 고신(52)  기장(53)  통합과 합동 분열(59)

 

3. 경남의 출옥성도들과 관련 없는 것? (4) 경남법통노회는 출옥성도들이 중심이었다.

  ① 목회자들의 회개와 자숙요구  고려신학교의 개교  ③ 메이첸 선교사들과 관계 ④ 경남법통노회 거부

 

4 기독교장로교의 분열의 원인으로 옳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4) 선교사들은 박형룡을 지지했다. 

  ① 조선신학교에 대한 거부감 

  ② 김재준 교수에 대한 제명

  ③ 박형룡과 김재준의 갈등

  ④ 선교사들의 김재준 지지


5. 기독교장로회 분립과정을 순서대로 나열하세요 (1-3-2)

  ① 조선신학생 51명의 총회진정서 제출 

  ② 김재준 교수의 면직 

  ③ 새로운 총회신학교 설립 

 

6. 감리교회는 교회분열이 치료되지만 장로교회가 치유되기 어려운 이유는?

   감리교회와는 달린 장로교회는 신사참배와 신학적 갈등으로 분열되었다.

 

7. 장로교회가 화해와 재결합을 위한 "신사참배취소성명"(1954)의 내용에서 실현하지 못한 것은? (3)

  ① 신사참배 취소성명 전국교회 공포

  ② 총회 기간에 통회자복

  ③ 신사참배 주동자들을 심사, 해당 노회에 통지해 처벌하도록 할 것, 

  ④ 유가족을 위해 전국 교회가 연보해 위문금을드릴것, 

  ⑤ 6월 첫 주일 통회주일, 전국교회가 금식통회

 

8. 승동과 연동이 분열된 이후 교단재연합을 위한 시도가 실패한 이유는?  (2)

  ① 연동 측이 WCC 탈퇴를 거부해서 

  ② 승동 측이 WCC뿐만 아니라 모든 에큐메니칼 기구에서 탈퇴를 요구해서

 

9. 미국의 극우반공주의자이며 근본주의자인 매킨타이어가 WCC를 반대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는? ICCC

 

10. 통합측 총회가 WCC 재가입을 결정한 해는 언제인가? 1969년 


11. 강신명 목사의 밀알사상(1963)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무엇이고 강신명은 서울장신대를 통해 어떤 지도자 상을 키우려 했는가? 

강신명 목사는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을 통해 내가 아니면 보수정통을 지킬 수 없다고 하는 생각, 1960 4.19를 통해 내가 아니면 통일을 할 수 없다는 이승만 권력의 생각, 1963년 내가 아니면 근대화를 할 수 없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집권을 보면서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한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다는 밀알 사상을 서울장신대학교의 표어로 삼았다. 강신명 목사는 밀알 인재상을 통해 섬김을 통해 교회와 국가를 바로 세우는 평신도지도자와 목회자를 길러내려고 했다.

 

서술형

 

12. 통합과 합동의 분열의 원인 세 가지를 쓰고 그 과정을 논술하라?

1) 1954년 에반스턴 WCC총회 이후 총회 안에서 에큐메니칼 신학에 대한 갈등

2) 1958년 박형룡 박사의 3000만환 사기사건과 교장직 인퇴

3) 경기노회 총대결정과정에서 일어난 총회 안의 분란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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