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회사


제 1 장 미국 종교의 창조적인 세력(힘)


★ 서론의 의도 : 종교 단체들에 대한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종교는 다른 기독교 국가의 어느 국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종교적 패턴을 보여주고 있으며, 3백여개 이상의 기독교 교파(denominations)가 존재한다고 밝히고 있다. → 그와 같은 표면상의 혼란에 책임을 질 세력(forces)은 무엇인가? → 미국 종교의 역사속에 나타난 독특한 경향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몇가지 이해할만한 요소들을 지적하고, 가능한한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이해를 가져올 마력적인 끈을 발견하는 것이 서론(1장)의 의도이다.

① 식민 시대의 미국 종교는 주로 종교적 급진주의자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거의 예외 없이 미국 식민지를 창설한 지도자들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견해에 있어서 자유주의적이고 심지어는 급진주의적이었다. → 정치적, 종교(교리)적 자유를 소유함.

② 미국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대륙의 정복이고, 미국 교회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그들의 사업을 계속해서 이동하는 인구를 따라, 광대하게 뻗은 대륙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확장하였다는데 있다.

③ 흑인 노예제도는 미국 교회 분열에 가장 중요하고도 광범위하게 미쳤으며, 교회내에서 그 쓰라린 논쟁의 영향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

④ 18세기 30년대까지는 인구의 적은 percentage만이 식민지 교회의 구성원이었다. → 신앙부흥운동(revivalism)

⑤ 국가와 교회의 관계 : 민족주의(Nationalism) - 1784년과 1800년 사이에 감리교도들, 개혁파 성공회, 장로교인들, 로마 가톨릭과 개혁 교회들은 구세계(Old World, 유럽)의 세력을 제어하고, 자신들의 교회간의 조직을 국가화 하는데 종사하였다. → 미국 성서공회, 미국 소책자협회 등.


제 2 장 유럽적 배경


⑴ England

☞헨리 8세 → 영국 국교회 성립. ☞에드워드 6세 → 개신교 || 예배형태를 개신교 형태로 바꿈, 설교의 중요성, ‘목사’ 용어. ☞피의 메리 → 로마 가톨릭 || 개신교도는 관직에서 추방 → 스위스, 남독일로 탈출. ☞엘리자베스(1533-1603) → 개신교 || 영국 개신교도들이 귀국 → 극단적 프로테스탄스 개념 유입 → 영국 교회는 청교도적 의미로 변화될뻔 하였으나, 옛 중세적 의식이 승리를 함 → 엘리자베스가 죽을때까지 성공회(the Anglican)은 국가교회(national church)가 됨. ☞ 1642년까지 영국에서 청교도주의가 성공적이었다 → 성공회교도들은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와 케롤라이나즈 여러 주를 향해 떠나기 시작함.

·가톨릭 : 국교회로 향한 이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민의 애정과 충성을 얻지 못하였다. 부유층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영국을 떠난 가톨릭 교도들은 거의 없었다.

·청교도 : 영국이 미국을 식민지화하는 견지에서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진 것은 새로이 설립된 교회를 불만스럽게 여기던 영국인들은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국교회를 파괴하거나 분열시킬 의욕은 없었다. 그들을 지배하던 이념은 한 통일된 국교회로서 예배형식, 조직, 교리가 하나로 될 단일교회였다. 이들이 Separatists → 엘리자베스 통치 말기까지 이들은 망명을 당하였거나, 침묵을 당하였다. 네덜란드(Holland)에서 10년간의 망명생활에 낙심되어, 1620년에 그들의 적은 그룹이 Mayflower를 타고 미국에 첫 번 청교도 식민지를 창설.

·Quakers : 조지 폭스가 1647년 새로운 종교개혁의 한 사도가 됨 → 각 개인의 내적 존재 내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조명이 있으며, 사제 혹은 목사가 필요 없다. 종교는 인간의 영혼 내에서 시작되는 그 무엇이며, 서책, 신조, 혹은 기관들과는 제1차적인 관련이 없다. → Quakers → 1667년 윌리엄 펜 2세에 의해서 미국에 퀘이커 공화국 건설.

⑵ Scotch-Irish [이들의 도래는 미국에 있어서 장로교의 진정한 시작을 의미함]

※ 미국식민지의 장로교 제도의 원인

① 1535년에 스코틀랜드는 두 종교당(가톨릭과 개신교)으로 분열됨 → 스코틀랜드의 개혁자들은 영국교회의 형태를 닮은 교회정부의 제도를 좋아했으나, John Knox의 출현으로 칼빈주의 편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장로교 제도가 그 결과였다. ② 스코틀랜드의 북아일랜드 식민지화.

※ 미국으로의 이민 → Scotch-Irish계 이민의 흐름은 18세기의 첫 25년 사이에 시작됨. 대체로 경제적 원인들에 기인함

⑶ 네덜란드

루터, 츠빙글리, 칼빈 모두가 네덜란드에 그들의 추종자들을 가졌으나, 결국 칼빈주의 영향이 보다 강하게 되어 네덜란드 교회는 교리와 훈련이 칼빈주의적이 되었다.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제도는 민간정부와 가까이 관련되어 있었다. → 동·서네덜란드 무역회사들은 식민제국의 기초를 놓고 있었다.

⑷ 독 일

30년전쟁 → 가톨릭, 루터교, 개혁파 교도들도 독일 퀘이커와 Dunkers, Mennonites 등 소교파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았다. 이러한 종교적 박해, 편협한 통치자들의 전제, 파괴적 전쟁들, 그리고 경제적 불경기가 독일이민을 미국으로 향하게 한 배경을 이룸.

⑸ 프 랑 스

루이14세에 의해 낭트칙령(1598)이 1685년 폐지된후 개신교도 다수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네덜란드 식민지로 갔고, 메사츄세츠로부터,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이르기까지 미국에 있던 모든 식민지들이 환영의 손을 뻗음.


3. 미국에 세워진 영국 국교회


⑴ 버지니아 : 미국에 세워진 영국 국교회의 시작은 버지니아에서 시작되었다. Virginia Company가 설립되면서 가속화되기 시작했지만, 1624년 6월 16일 버지니아 회사는 종말에 이르렀다. 식민지의 지배는 직접 왕의 장중으로 넘어갔다. 이 행동의 이유는 회사가 기독교 종교를 선전하고 무역을 증진하고 제국을 확대시키는데 적절하지 못하게 처리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참 이유는 회사가 왕이 지명한 자를 직위에 임명하는 것을 거절한 까닭임이 틀림없다. → 버지니아교회는 세속적 권리하에 완전히 지배됨 → 영국내란(1642-1649)과 공화정(1649-1660) 기간 동안에 버지아아는 크게 소란하였다. 종교는 부진상태였고 또 왕정복고 시대에는 목사를 가진 교구들이 매우 적었다. 17세기 말에 버지니아인들의 교회원 수는 20명에 1명 정도로 본다. 명백한 사실은 교회가 하부계급들에 미치지 아니하였고 또 인구의 대다수가 종교에 흥미가 적었다. 같은 시기에 영국과 식민지에서 함께 종교가 부진상태에 있었다. 국교회는 죽은 것처럼 마비 상태로 되었고, 어떠한 능력도 그것을 일깨울 수 없을 것 같았다. 버지니아 식민교회의 한 치명적 약점은 영적 관리의 결핍이었다. 이것은 독립이 쟁취되고, 또 감독이 미국을 위하여 임명될때까지도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⑵ 메릴랜드 : 메릴랜드의 식민지에 국교회가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에 가까워서였다.

※ 1701년 ‘외지복음전파협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의 창설은 미국 식민지에서 뿐 아니라 전세계를 통하여 영국국교회의 장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조직당시에 있어서 국교회는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외의 식민지에서는 시작해 보지도 못하였다. 보스턴에 있는 King's Chapel은 메사츄세츠의 왕명지사의 영향으로 1688년에 시작되었는데, 청교도 식민지들에 있는 유일한 성공회교회였다.


4. 청교도 식민지 : 미국회중교회의 시작


⑴ Plymouth의 정착민들(Pilgrim Fathers) : 1620년 Mayflower를 타고 북미 Plymouth땅에 정작한 영국 청교도들 - Separatists로써 영국국교회를 거부하였다. || 플리머스의 정착민들은 미천하고 빈핍한 사람들.

⑵ The Puritans of Messahusettes Bay : 메사츄세츠 배이 식민자들은 1/5이 기독교인이었고 대다수는 중류계급, 소상인들, 농부, 혹은 기술공들이었다. 이들은 당초 영국국교회로부터 분리할 의도는 없었다. 이들은 영국국교회에 대한 충성을 공언하였다. → 회중교회가 성립 → Connecticut에 회중교회가 생기면서 메사츄세츠 교회들과는 다소 독립적으로 자기들의 독자적인 길을 가는 경향을 보였다. - 1701년 예일 대학의 창설

※ 17세기말경에 청교도들의 종교는 부흥과 회개에 공헌하지 못하는 설교형태로 비감정적인 것이 되었다. 청교도교들은 주장하기를 회개는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 하였다. 그러나 제2세대, 제3세대와 더불어 개종자들의 수가 감소함에 따라 점차로 하나님의 영의 재생시키는 영향을 받도록 하는 위치에 인간영혼을 두도록 사용될 일정한 “방편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런 방편들이란 계약을 지키며 하나님 예배에 출석하며, 도덕적 생활을 인도하며, 성경을 읽으며, 또 기도하는 것 등이었다. 이리하여 그 방편들의 사용에 더욱 더 의존하고, 하나님의 기적적 능력에 점점 적게 의존하게 되었다. 이것은 냉정하고 비감정적 종교엘 이끌었던 것이다. → Jonathan Edwards에 의해 Great Awakening이 일어날때의 미국의 상황이었다.


제 5 장 종교적 자유속에서 이루어진 제1차 실험


☞ Rhode Island and Maryland : 침례교도와 로마 가톨릭의 시작

·로드 아일랜드 - New England, 자유주의적 청교도들 || Roger Williams

·메릴랜드 - southern colony, 로마 가톨릭교도들 || Lord Baltimore

⑴ Roger Williams

1638년 Providence에 재세례를 받은 회원들로 구성된 한 교회가 형성되었다. Salem 교회의 한 회원이었던 홀리만(Holliman)씨가 윌리엄스에게 재세례를 주기 위해 선출되었다. 그리고 윌리엄스는 홀리만과 다른 10명에게 재세례를 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국에 첫째 침례교 교회가 형성되었다.

로드 아일랜드의 식민지는 결국 3요소로 구성되었는데, 그 첫 번째가 로저 윌리엄스의 Providence 식민지였다. 둘째 요소는 메사츄세츠에서 온 종교적 망명자들의 다른 단체로 구성되었다(Anne Hutchinson). 셋째 단체는 잘 교육 받았으나 호전적 개인인 골던(Samuel Gorton)에 영도를 받으며, Narragansett 만의 서해안에 한 식민지를 창설하였는데 Warwick라고 명명하였다. 식민지 기간에 중요한 침례교 중심지는 New England가 아니었고 중부 식민지들이었다. 그리고 특히 펜실베니아(Pennsylvania)와 뉴저지(New Jersey)가 중심지였다. 거기는 처음부터 상당한 정도의 종교적 자유가 허락되었었다. 필라델피아는 이 교회들 단체의 중심지였다. 1707년 ‘the first Baptist Association’이 필라데피아에서 5개 교회들의 대표들로서 회집되었다. 1742년 이 기구는 강력한 칼빈주의적 신앙고백을 채택하였는데 그것이 미국 침례교도들의 역사에 전환점으로 생각된다. 로저 윌리엄스와 미국 침례교도들의 미국에서의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의 시작에 대한 관계는 깊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전 미국 침례교도들의 5개 원칙들 가운데 그 첫째가 “국가와 교회의 완전한 분리”이다.

② Lord Baltimore : 종교적 관용의 원리를 구현하면서 미국에 설립되게 된 첫째 식민지가 한 가톨릭 신도인 Lord Baltimore에 의하여 창설되었고, 그 후 연약한 로마 가톨릭의 시작들은 미국에서 가톨릭의 방대한 확장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그것은 이후 2세기간 대체로 메릴랜드에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제 6 장 중부 식민지의 종교적 다양성 : Dutch Reformed, English Quakers


① Dutch Reformed : 중부식민지들은 처음부터 대혼합의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미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시대에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주의적 나라였다. 그리고 박해받는 종파들을 위한 피란처가 되었다. 네덜란드인, 스웨덴인, 웰슈, 영국 퀘이커, 그리고 몇 개의 독일인 단체들, 또 마지막으로 Scotch-Irish인들이 중부 식민지에로 이끌려 들어왔다. 수개의 초기 영국 식민지들처럼, New Netherlands의 Dutch colony는 Dutch West India로 알려진 무역회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 Manhattan, New Amsterdam.

② Quakers : George Fox가 영국에서(1647) 그의 새로운 종교개혁을 시작한 후 10년 이내에 그의 제자들이 미국에 출현하였다. 그리고 같은 세기말까지 영국치하의 모든 식민지에서 그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New England 청교도들이 퀘이커들의 도래를 진정한 위험으로 간주해야 했음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퀘이커들의 이념들과 의식들이 메사츄세츠의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둔하게 적대적이었다. “퀘이커 교도는 교회와 국간의 완전한 분리를 목표로 하였다” 그런데 “메사츄세츠 정부는 교회와 국가를 동일시한 고대의 유대나라 신정제를 본땄다. 퀘이커는 교리의 차이들에 관용적이었다 ; 칼빈주의자들은 이러한 관용을 치명적 죄라고 생각하였다.”

미국 초기 퀘이커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폭스의 방문이었다. 미국에서 퀘이커 활동의 중심지는 뉴저지와 델어웨어, 그리고 펜실베니아에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 위대한 퀘이커 실험은 뉴저지에서 그 시작을 가졌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 회중교회원들의 영향하에 다수의 스코틀랜드이 동부 뉴저지에로 건너왔다. 그들의 다수는 장로교도들이었다. 이렇게 하여 뉴저지에 장로교적 요소가 소개되었다. 다른 이민들이 New England에서 왔으며, 그리고 다수의 Scotch-Irish가 North Ireland에서 왔다. 그리고 후에 이들 칼빈주의적 요소는 연합하여 식민지에서 현저한 종교적 세력인 장로교를 이룩하였다.


*** 평 가 ***


필자는 Sweet의 글中에서 “교회와 국가”의 문제에 주목하였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미국 종교의 다양성을 다섯가지로 분류한다. 그 중에서 De Tocqueville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 나는 종교의 정신과 자유의 정신이 거의 언제나 반대방향으로 다리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나는 그들이 친밀히 연합되어 동일한 국가를 공동으로 통치하는 것을 보았다.”

사실 종교와 국가의 문제는 시대마다 다양한 양상을 보여왔다. 313년 밀라노 칙령이후 기독교는 로마국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성” 개념에 의해서 정리되었다. 이후 중세기에는 하나의 왕국으로 생각되었으나,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다시금 “두 도성” 개념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두 도성” 개념은 이후 개신교에 있어서 대립하거나 서로 보완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상이 “국가와 교회”에 대한 교회사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개신교회는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에 입각하여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는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의 경우이다. 프랑스 혁명이후 프랑스는 인간의 낙관론이 지배적이 되면서 인간의 이성의 존엄성을 극도로 강조한 반면, 미국은 독립혁명이후 침체에 빠졌던 신앙이 revivalism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미국교회의 역사속에서 다양한 국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교회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할 수 있다.


제 7 장 중부식민지에서의 종교적 다양성 : 독일 단체들


Mennonites : 필라델피아의 10마일 북쪽에 있는 Germantown에 정착, 1708년에 최초의 교회 설립, 혁명이전에 미국에서 아마 최대의 메노나이츠 사회는 지금의 랑캐스터 군에 있었다. 스위스인들로 구성됨 || 메노나이츠는 종교개혁의 재세례파의 직접적인 후예들, 유아세례를 거부, 기독자들은 행정장관의 관직을 가질 수 없으며, 그러나 기독인은 그의 통치자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세상에서 분리되어 살아야 한다. || 많은 점에서 퀘이커 교도들과 비슷.

Taufers or Dunkers(German Baptists) : 펜실바니아에 나타남(18세기초), Peter Becker가 1719년에 제1차 정착민들을 인도하기 시작, 수년내에 메릴랜드와 버지니아로 이주 || Conrad Beissel → 펜실바니아의 랭카스터 군에 있는 “Ephrata 공동체”의 창설자 - 결혼생활 반대, 전쟁반대 → 식민지 시대에 가장 중요한 Dunker 지도자는 Christopher Saur였다 - 독일어 성경 출판.

Schwenkfeld : 펜실바니아에 정착, 反루터적·反가톨릭적.

Zinzendorf : 모라비안의 미국이민을 책임진 사람, 양친은 Jakob Spener || 모라비안이 미국에 이민 오게 된 중요한 동기는 독일인 정착자들과 인디언 양자들 간에 선교사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는 Herrnhut가 대외국 선교의 중심지였다.

대부분 1727년부터 1745년까지 특별히 펜실바니아에 몰려온 독일인 이민들의 거대한 수는 목사들, 혹은 교사들 없이 왔다. 최초의 독일인 개혁교회가 1719년에 Germantown에 건립되었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정착된 목사가 없었다. → 1725년부터 그 세기 중엽까지 수명의 독일개혁파 목사들이 식민지에로 왔다.(1730년 John Peter Miller의 도착-독립선언문을 수개의 유럽대륙 언어로 번역하는데 종사)

독일 개혁교회의 형성기 동안에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Michael Schlatter이다. 그의 주요 사명은 미국의 교회들을 하나의 총회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식민지들에는 다수의 독립된 개혁파 교회들이 발달하였지만 독일 개혁파 교회는 그 조직형태가 장로교적이었다.

Lutherans : 뉴욕에서 형성, 초기 독일인 루터교도들은 일반적으로 목사들이나 교사들이 없었다 → 1742년 Muhlenberg의 도래는 미국 루터교 역사에 신기원의 시작을 표기함 ← 수개의 독일인 종교단체들을 한 교회로 결합하기 위해 미국에 파송 || 식민지 미국에서 가장 유능한 루터교 목사들은 뮤렌버그와 폰 랭글 같은 경건주의자들이었다.


제 8 장 식민지의 장로교도들


식민지의 장로교는 두 가지 주요한 근거에서 생겨났다. 첫째 영국 청교도주의의 장로교 형태로부터 17세기의 대청교도 이민 때 New England를 통해 식민지들에 이식되었다. 둘째, 약간은 스코틀랜드에서 직접 왔지만 18세기의 Scotch-Irish 대이민 때, 주로 북아일랜드를 통하여 미국에 왔다. 그러나 주요한 장로교인의 식민지 지도자는 제2, 제3세대 New England Puritanism에서 왔다.

영국 장로교는 장로교인들과 회중교인들의 두 개의 판이한 단체로 깨어졌다. 분열이 발생한 후에도 장로교인들과 회중교회인들은 대부분의 교리적 문제들에 관해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를 구성하는 자와 또 교회정책에 관한 개념에 차이가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 요소들 모두가 Scotch-Irish 식민자들을 미국에 데리고 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북부 아일랜드에서 식민지에로의 이민은 18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세기의 중엽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1714년에서 1720년 사이에 대체로 보스턴항을 통하여 왔었다. 그들은 New England 청교도들과 공통된 칼빈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정착지들이 남부 뉴 헴프셔와 지금의 버몬트와 매인주, 그리고 중부 메사츄세츠에 설립되었다 → Scotch-Irish는 그들이 New England 청교도들과 잘 혼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여, 1720년 후로 그들은 뉴욕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부 펜실바니아로 향하였다. 그리고 점차 남쪽으로 서부 메릴랜드, 버지니아, 캐롤라이나와 조지아로 옮겨갔다.

Francis Makemie : 미국장로교의 아버지, Scotch-Irish인이었다. 중부 식민지들에게 Scotch-Irish 정착민의 대이민이 장로교인들의 수를 크게 증가시켰기 때문에 1716년에 필라델피아 노회를 4개 노회로 나누어 한 대회를 조직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새로 조직된 것은 Long Ireland노회(동부와 뉴저지), 필라델피아 노회(동부 펜실바니아와 서부 뉴저지), 뉴캐슬 노회(델어웨어), 스노우힐 노회(버지니아와 매릴랜드)

미국장로교에게 한 중대한 사건은 대회가 1729년 채택법(Adopting Act)을 통과한 사실이다. 이것은 모든 목사들과 유자격 취임 목사들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동의해야 한다는 것, 그 법률 조뭄의 목적은 아르미니안주의, 소시누스주의 자연신교, 자유주의사상 등 그토록 많이 유행하여 자라난 교리속에 있는 유해하고 또 위험한 요소에 대항하여 미국 장로교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제 9 장 New England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은 New England인들에게 고민을 주는 세력들로 차 있었다. 첫째, 무엇보다도 거의 계속적인 전쟁시기(영·프전쟁, 스페인 계승권 전쟁, 오스트리아 계승권 전쟁, 7년전쟁)였다. 둘째, New England 개척지방은 항상 인디언 약탈의 위험 속에 놓여 있었다 → 1660년부터 세기 말까지 계속 New England 식민지들의 정치적 신분은 불분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적, 도덕적 사무들을 희생하여 청교도 지도자들의 주의를 빼앗았다 → New England 종교적 열성은 17세기 말까지 상당히 냉각되었다. 제2, 제3세대 청교도들은 그의 아버지와 조부들보다 훨씬 적게 “종교적”이었다. 목사들의 대다수는 아직도 이론적으로 칼빈주의적 회개의 교리를 주장하였다. 즉 회개는 하나님만의 역사로 된다 → 그러나 많은 목사들이 이제는 인정하기를, 성령이 재생시키는 역사를 받는 자리에 인간 영혼을 두게 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어떤 “수단들”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책임에 점점 강조를 더하게 되는 새로운 회개의 교리가 전개되고 있었다. 회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란 교리, 그것은 18세기의 40년대에 중부 메사츄세츠에서 시작된 대부흥(Great Revival)의 대체적 원인이 되었다.

Jonathan Edwards : 대부흥 운동의 중심인물, ‘이신칭의’에 관한 일련의 설교를 하고 있는 동안 1734년 12월에 부흥이 시작되었다. 그 설교들은 칼빈주의자들이 경계하던 아르미니안주의에로 점차 기울어지는 경향과 만날 의도로 행해졌다. Northhampton에서 부흥의 첫해 동안에 젊고 늙은이들 사이에 삼백 명 이상이 회개하였다 → 다음 수년을 통하여 서로 독립적으로 New England의 여러 부분에서 부흥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커네티컷 계곡에서 성하였으며 1740년까지 그 운동은 New England 전반을 통하여 일반화되었다. 한편, 뉴저지에 있는 장로교인들 사이에 비슷한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Tennent 가족, 특별히 길버트 태넌트의 열심있는 설교로서 된 것이었다. 이 부흥은 New England의 대부흥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시작된 것같이 보인다.

1737-1738년에 에드워드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이야기”(Narrative of the Surprizing Work of God)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곧 대서양의 양측에서 읽혀지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웨슬리 형제와 휫필드의 설교하에 감리교의 부흥이 영국에서 곧 시작되었다 → 이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부흥운동을 일으킴.

New England 부흥의 중대한 의의 : ① New England 목사들을 두 그룹으로 분할하였다. 한편은 부흥의 운동자체와 그 방편들을 지지하였고, 다른 한편은 이것을 정죄하고 그 결과를 다만 임시적인 것으로 보아 버렸다. ② 대부흥 운동에 이어서 교리논쟁이 일어남 - 회중교회를 정통파와 자유주의파 혹은 유니태리언으로 분열하도록 하였다. 자유주의파는 구원에 인간적 방편의 사용을 강조하는 경향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에서 읽혀지기 시작하고 있던 작품들의 영국인 저자들 간에는 점차로 아르미니안주의적 견해의 풍조를 띠고 있었다. 이 자유주의파의 정반대측에는 에드워드와 그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New England 신학이라고 알려진 학파의 창설자들이다. 에드워즈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자기의 마음의 선택에 따라서 행동할 능력이 있다. 그러나 성향의 기원 때문에 인간은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 이론은 인간의 자유선택과 도덕적 책임을 위한 여지를 남겨 놓았다. 물론 에드워즈가 아르미니안 학파에 반대하여 칼빈주의를 옹호하였으나, 그는 역사적 칼빈주의에서 약간 떠나 있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주권을 완강히 주장하였으나, 동시에 또 확신하기를 인간의 책임에 보다 큰 무게를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대부흥후 50년간은 전 New England를 통하여 종교적, 도덕적으로 무관심의 시기로써 영적으로 침체기의 하나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심각한 교리적 분쟁이 물론 그 원인들의 하나였으며 그밖에 다른 원인들로선 미국혁명을 포함한 두 전쟁과 오랜동안의 대정치적 불안정이 있었다.


제 10 장 중부와 남부 식민지에서의 대부흥


New England에서는 회중교회가 주로 크게 영향받은 교파였다. 중부 식민지들에서는 독일인 분파들과 중부 뉴저지의 화란개혁교회들에서 시작되었지만, 대체로 장로교인들의 운동이었다. 남부 식민지에서는, 특히 버지니아에 있는 장로교인들에서 첫 번 부흥이 일어났고, 두 번째로는 대체로 침례교 운동으로 나타났고, 계속하여 셋째로 감리교 운동이 일어났다.

☞ 중부식민지의 부흥

식민지 펜실바니아, 뉴저지 및 뉴욕 등에서는 인종적, 종교적인 많은 다양성을 볼 수가 있었다. 많은 독일인 식민자들은 수개의 종교적 종파를 대표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경건파인들이었다. 따라서 간접적이긴 하지만, 펜실바니아 독일인들의 경건주의적 강조는 중부 식민지에 일어난 대부흥 운동의 근원들의 하나이기도 했다.

프래링하이젠의 영향하에 시작된 화란 개혁교회들간의 부흥.

장로교 목사 길버트 태넌트는 화란 개혁교회에서 훨씬 더 큰 의의를 가지고 장로교인들간에 부흥운동의 중심이며 심장부가 됨. → 보수적인 목사들의 부흥운동에 대한 심한 반대가 있었다. 1741년 장로교인들의 부흥반대당이 총회에서 출현하였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미국장로교회는 1749년 뉴욕대회때 대부흥운동에 기인한 분파운동이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에 두 개의 상이한 장로교파가 발생한 것은 대부흥 기간에 된 일이었다. 이들은 “계약론자들”(Covenants)로 알려진 가장 보수적인 Scotch와 Ireland 그룹들을 대표하는 “개혁파와 준개혁파”(The Reformed, the Association Reformed)였다.

화란교회도 두 파당으로 분열하였는데, 그 하나는 홀란드 노회의 완전한 지배하에 머물면서 목회사명을 위하여 화란에 계속 의존하기를 바라는 파이며, 다른 한 파는 미국교회를 위해 독립적으로 목회생활을 하도록 훈련된 미국인 훈련을 주장하였다.

☞남부 식민지의 부흥운동

남부지방에 장로교의 최대의 팽창은 다른 근원, 즉 중부 버지니아에 있는 하노버 군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하노버 군은 남부 장로교의 부흥 중심지가 됨. → 버지니아에서의 장로교 부흥은 종교적인 의의 이상의 것이 있었다. 진실로 그것은 “버지니아에 정치적 및 종교적 대변동을 가져오게 될 첫 번째 군중 운동이었다. 특권 계급 내에 첫 번째 불화” 그러나 이 운동은 침례교와 감리교가 주요한 역할을 행하게 될 다음 두 차례의 부흥의 상황으로부터 더욱 위대한 원동력을 얻게 되었다.

침례교는 New England 부흥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회중교회파에게서 너무나 가혹한 취급을 받았으므로 이 운동에 합세할 흥미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침례교파는 다수의 New England 회중교회들 내에 곧 나타난 분열과 분쟁을 통하여 부흥으로부터 간접적으로 큰 유익을 거두었다.

1766년 엠버리(Philip Embury)가 뉴욕에 있는 그의 가정에서 집회를 가지기 시작하였을 때 미국 식민지에서는 처음으로 조직된 감리교가 나타났다.


제 11 장 미국 식민지들에서의 선교사업과 자선사업


영국이 식민지화를 시작하였을 때 미국에 있던 스페인 식민제국은 백년 이상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 선교사들의 노력을 통하여 수천 명의 원주민들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기독교를 수락하였다 → 식민사업이 야만인들에게 기독교 종교를 가져옴(제국주의적임) → 종교는 식민지 사업을 지지하도록 종교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을 끌기 위한 가식이며 유혹자로 사용되었음. 그러나 동시에 식민지화 사업에서 지도자들의 많은 부분에는 물론 진정한 선교적 흥미가 있었음은 사실이다.

New England 청교도들은 시초부터 인디언 개종에 대하여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것 같이 보인다 → 초기 New England에서의 인디언 기독교화 사업은 일반적으로 엘리오트(John Eliot)의 이름에 모임. 그의 현저한 업적들의 하나는 메사츄세츠의 인디언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이었다 → 토마스 매이휴(Thomas Mayhew)가 마르다의 포도원 섬에 있던 인디언에게 유사한 사업을 시작하였다. ‘New England 복음전도협회’ 역시 이 섬에서의 인디언 사업에 약간의 원조를 주었다 → 그러나 킹필립전쟁(1675-1676)은 New England의 인디언 선교사업에 중대한 타격을 주었다 → 인디언 선교사업에 대하여 새로이 일으켜진 흥미는 서부 메사츄세츠에 있는 한 적은 종족 하우사토닉 인디언에 대한 사업으로 잘 설명된다. 이것은 전 예일대학 사강사인 ‘서전트 목사’가 1734년 시작한 것이었다 → 대부흥 후 모든 인디언 선교의 선교사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졌던 이는 아마도 브레이너드이다. 그는 1744년 뉴욕의 뉴사이드 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후 뉴저지에 있는 인디언 사업을 인수하였다 → 대부흥운동 뒤 수년간 장로교인들은 6개 종족들에 대한 선교사업에 큰 흥미를 가지기 시작함.

전식민지 시대를 통하여 가장 성공적인 개신교 선교사업은 분명히 모라비안이 행한 사업이었다. 미국에서 첫 번째 모라비안 선교사는 랜치(Ranch)였다. 그는 1740년 뉴욕의 인디언에게 일을 시작하였다 → 그러나 프랑스-인디언 전쟁의 발발은 모라비안 선교사들과 그들의 인디언 개종자들에게 무서운 고난을 가져왔다 → 프랑스인들이 영국인들보다 더 위대한 영향력을 미국의 인디언에게 끼쳤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바이다.

미국 식민지들에 있는 분파 교회들 중에 퀘이커파가 교회원으로서 노예를 소유할 권리를 질문하게 된 유일한 단체였다. 다른 교회들에서는 노예취급에 관하여 일률적인 시행률이 없었다. 교직자들은 가끔 노예소유자였으며, 어떤 예로서는 노예들을 기본재산의 형태로 수령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식민시대 말기에 미국에 있던 흑인의 도덕적, 종교적 조건은 매우 좋지 못하였다 → 식민지의 대각성들의 직각적인 부산물의 하나는 새로운 사회적 의식과 넓은 인도주의의 일어남이었다. 그것은 빈자와 재난과 고통의 완화에 대한 대관심에 명백히 나타나 있었다.


제 12 장 독립전쟁과 미국교회


부흥동안에 비로소 미국 백성들은 하나의 공통된 지적, 그리고 감정적 흥미를 발견하였다 : 처음으로 식민지간에 걸친 지도자들이 출현하옇ㅆ다. 그리고 그들이 정치적, 교파적, 인종적 경계선을 분쇄하였다. 그것은 한 식민지에서 다른 식민지에로 공통된 미국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 백성의 운동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원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대부흥은 혁명에로 향하는 길을 준비하는데 중요한 공헌 요소들의 하나라고 생각되어질 수 있다.

“미국의 종교적 기질은 혁명의 중요한 원인들의 하나이다” → 종교적 자유를 소유함은 자연히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국에로 이끌어 갔다.

☞ 영국국교회 : 미국 혁명때 국교회를 단순히 이 편이거나 혹은 다른 편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공회가 많이 분열을 하였던 것이다. New England에서는 교직자와 평신도가 대체로 충성파였다. 남부 식민지들, 특히 버지니아와 메릴랜드 등은 강렬히 미국 편이었다. 한편 중부식민지들에선 거의 균등히 양분되었다.

☞ 회중교회 : 혁명전쟁이 시작되던 여러 해 전에 미국혁명의 전체적 정치철학이 출발됨

☞ 장로교회 : 혁명초기에 식민지들에 있던 장로교인들은 대체로 Scotch-Irish였고 또 북부 Ireland에서 가장 최근에 이민온 사람들을 대표하였다. 그들은 이민하게 한 원한 때문에 영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전식민지드을 통하여 모든 곳에 있던 이들 정착민들은 자유 문제의 강력한 지지자들이었다.

☞ 화란교회 : 이들의 주요한 교회들이 허드슨 계곡과 뉴욕 등 전쟁동안에 영국군이 가장 활동적이던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거의 장로교도들만치 일치하여 혁명을 지지하였다.

☞ 침례교회 : 이들은 혁명에 가담하였는데, 성공회로부터 가장 심한 곤란을 받았고, 정부의 계약론을 주장했고, 미국의 구출이 침례교도로 하여금 그들의 침해된 권리들을 다시 찾게 할 것이기 때문에 - 국교분리의 원리를 증진시킴.

☞ 감리교회 : 미국 혁명전쟁 동안에 웨슬레가 충실한 왕당파이며, 또 조지 3세와 그 장관들의 정책에 충성된 지지자였다. 그러나 후에 웨슬레는 미국전쟁을 지지하는 다른 소책자를 저술함.

☞ 천주교 : 메릴랜드와 펜실바니아의 천주교도들은 일치단결하여 독립투쟁에 가담하여, 전 미국을 통하여 천주교에 대한 태도의 급진적 변화를 초래함.

☞ 퀘이커, 매노나이츠, 모라비안 : 주로 펜실바니아에 위치하였는데, 이들은 독립전쟁사에서 비극적인 일장을 이루었다.


제 13 장 미국 교회의 토착화


New England와 버지니아 주에서 개전과 더불어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위한 선동이 증가되기 시작함. 성공회가 법률로서 설립되었던 대부분의 식민지에서는 국교폐지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 종교적 자유는 버지니아에서 승리하여 곧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미국 교회들의 몇 개는 독립 이전에 유럽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성공회인들은 런던 감독에 순종, 천주교도들은 런던의 교황대리사교에게, 감리교도들은 웨슬리의 지배하에, 독일과 화란 개혁교회들은 암스텔담 노회와 연관을 가짐. 그러나 장로교, 퀘이커, 루터교는 유럽과 특별한 유대관계를 가지지 않음. 물론 회중교회와 침례교회는 신학적으로 독립된 토착 미국 교회들이다.

☞ 감리교 : 전국 조직을 가지게 된 첫 번째 미국 종교단체, 혁명의 종결 때 미국의 감리교는 영국의 감리교와 함께 아직도 성공회의 일부였다. 그러나 전쟁 동안 성공회는 분열되고 또 너무나 많은 교직자들이 달아났으므로 성장하는 감리교 단체는 교회의 성례를 유지할 길이 없었다. 전쟁후 웨슬레는 감리교 신학의 틀을 마련함, 디킨스의 제안으로 ‘감리교 성공회’라 칭하는 성공회 교회를 형성하기로 합의함.

☞ 성공회 : 혁명의 결과로서 가장 심하게 고난을 당함.

☞ 장로교 : 독립한 미국의 새로운 문제들을 대처하는데 매우 잘 적응함, 그들은 거의 완전한 통일성을 가지고 혁명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미국정신에 감염되었고 미국에서 교육받은 유능한 지도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 화란 개혁교회 : 1784-1792년 사이에 헌법이 형성됨. 독일 개혁파 단체는 그들의 구세계와의 연결을 깨뜨리는데 속도가 느리었다. 왜냐하면 지도력의 결핍과 그들의 목사들의 대다수는 아직도 화란 당국으로부터 재정적 원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 모라비안 : 전쟁 종말과 그후 여러 해 동안 독일에 있는 치리회의 지배와 예배때 독일어 사용의 계속으로 말미암아 방해를 받았다. 모라비안 교회는 혁명 후 기간에 나타났던 바와 같이 미국에서 일어나는 국가주의 정신에 저항하는 어리석은 행동의 가장 좋은 실례이다.

☞ 퀘이커 : 영국에 있는 모교회와의 연결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이것은 영적인 권장과 충고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 천주교 : 혁명말기에 미합중국에 있던 천주교도들 대다수는 메릴랜드와 펜실바니아에 살고 있었다. 혁명전쟁의 종말과 더불어 런던의 법황 대리사교는 선언하기를 그는 앞으로 미국에서 사법권을 행사하지 아니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즉시 케롤의 영도하에 미국 신부들이 운동을 개시하여 미국천주교회 조직을 형성하였다.

☞ 회중교회 : 회중교회는 순수한 민주주의를 강조하였으나, 중앙집권화는 하지 못함.

☞ 침례교 : 현저한 국가주의 정신이 발달 - 각 교회집의 완전한 독립이란 침례교 이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까닭은 그들이 종교적 자유 및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위한 투쟁에 지도적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제 14 장 인구의 서부 이동과 대중교회의 발생


혁명을 종결지은 협정은 미합중국의 서쪽경계를 미시시피 강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1·2·3·4차의 인구조사를 보면 정착민들의 인구가 서부로 대거 이동함. 이 시기는 미국 교회 역사상에서 중대한 시대였다. 왜냐하면 미국종교의 장래는 물론이고 국가의 장래는 대체로 조직된 종교가 새로운 서부의 문제를 대처하던 그 방법에 따라서 결정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 국가주의 시대가 시작될 때에 모든 미국교회들 가운데 장로교회는 서부로 직접 전진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 침례교 : 사실상 침례교도들이 대개의 경우에 서부 정착지 현장에서 첫째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도자들이 백성들과 더불어 왔으며 한 교회의 형성은 비교적 간단한 문제였다. 실제로 모든 초기 개척지구 침례교회들은 강이나 계곡, 개천 또는 내들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개척지구 정착지들이 개천을 따라서 위치하였음을 의미함.

☞ 감리교 : 서부로 이동하는 인구를 따라서, 특히 초기 연간에 옮겨간 미국교회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교회는 감리교였다. 조직과 교리 양면에 있어서 그들은 개척지구에 잘 적합하였다. 모든 초기의 감리교 전도자들은 순회전도자들이었다. 이들의 설교는 역시 개척자들이 충심으로 수락하도록 잘 적응되었다. 그것은 칼빈주의적 장로교도들이나 혹은 보다 완만한 칼빈주의적 침례교도들이 설교한 예정론과 제한 속죄의 교리에 반대되는 자유은혜와 자유의지의 복음이었다. 즉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운명의 주인들이라는 것이다.

☞ 특권가지 교회들 : 식민지 기간의 가장 특권가진 두 교파들, 즉 성공회와 회중교회파는 인구의 서부이동이 창조해낸 문제들을 적절하게 취급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양자는 미국교회들 사이에는 적어도 숫자상의 지위를 상실하여싿.

☞ 천주교회 : 새로운 서부의 정착민들 가운데는 초기에 소량의 천주교도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메릴랜드에서 왔는데 가끔 순회하는 신부들이 그들을 방문하였다.

*** 평 가 ***

필자는 지난주 평가에서 “교회와 국가”의 문제를 주목하겠다고 했다. 이제 그 문제의 실제 상황들을 이번주에 보는 듯 하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대부흥 운동”과 “미국 독립혁명” 부분이다. 대부흥 운동은 스위트가 지적한대로 미국독립혁명의 정신적 결과를 야기했다. 미국의 정착민들 사이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공동의식이 쌓이게 됨으로써 다음에 올 혁명운동에 하나의 끈을 형성하였다. 종교에 의해 미국은 정치적, 교파적, 인종적 경계선을 뛰어넘어 미국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비록 일체되었지만, 당시 미국의 경우에는 종교가 미국의 정신에 건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역설적이지만 미국의 식민화 과정에서 종교는 분명 제국주의적 색체가 강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의 경우를 보아도 분명하다. 한 예로 스리랑카는 가톨릭이 200년간 지배하면서 종교적 강요를 함으로써, 지금에 와서는 어떠한 선교도 그들에게 효과가 없다는 것이 선교사들의 결론이다. 아무리 제국주의적 색체를 띈 것이 의도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서구의 기독교는 이런 점에 미국의 인디언들에게 적대적 세력이며, 기독교가 그들의 눈에는 오히려 “사탄”적인 악마로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한편 대부흥 운동의 영향으로 야기된 ‘교회 분열’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려는 아르미니안주의 경향과 예정론을 주장하는 칼빈주의 경향이 대립하면서 미국의 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사실 ‘은총과 자유의지’ 문제는 고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종교개혁때는 루터와 에라스무스에게로 이어졌으며, 후에는 바르트와 부르너에게로 이어진 장구한 신학적 논쟁의 역사를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현재의 침례교와 감리교, 성결교등의 신학적 근거는 분명 칼빈주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오히려 아르미니안주의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17세기적 교파논리에 의해 흑·백을 나누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얼마만큼 강조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세가지의 측면을 필자는 지적하였는데, 이 세경우가 우리 한국에서도 강하게 내재해 있는 듯 하다. 교회분열,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 교회가 국가에 종속된 경우. 이 문제는 엮시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제15장 2차 대부흥운동과 개척지방의 교회분열


영국과 프랑스에서 자연신교가 유입됨으로 혁명말 부터 1812년 까지 미국교회는 ‘영적 생명의 중단기’였다. 이성의 시대가 도래하여 1782년 프린스턴 대학에서는 기독자로 고백하는 학생이 2명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무신론적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Ⅰ. 미국의 종교부흥

종교부흥의 원인은 복음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감리교에서부터 시작된다. 1789년 버지니아인 리이(Jesse Lee)는 첫 번째 감리교 순회전도자로 많은 사람을 회심시켰으며 1796년에는 신영주 감리교 대회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 예일대는 1795년 드와르 학장시기에 도덕성 회복과 종교운동이 부흥하였다. 1802년은 1/3학생이 신앙고백을 하였고 비슷하게 다트머스 대학, 윌리엄스 대학, 엠허스트 대학등이 종교적 부흥을 경험했으며 신학교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Ⅱ. 서부의 제2차 대부흥

서부 부흥의 지도자는 맥그래디(McGready)이다. 그는 통나무대학을 졸업하고 레드스톤 노회에 소속되어 케롤라이나 주에서 전도하다가 추방된다. 켄터키 주의 로건 군에서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그의 설득적인 설교 때문에 서부에서 대 부흥이 일어났고 이를 가리켜 ‘컴버랜드 부흥 혹은 로건군의 부흥’이라고 부른다. 이 부흥은 1800년에 절정에 이르렀고 켄터티, 테네시, 남부케롤라이나, 펜실바니아, 오하이오 중북부로 부흥의 불길이 번졌다. 1801년 캐인리지 성례대회때는 1만에서 2만5천명의 성도가 모였다. 1803년에는 오하이오 장로교가 부흥하기 시작하였고 부흥의 영향은 도덕생활 개선으로 이어졌다. 1800-1803년 사이에는 켄터키에 있는 침례교회만도 일 만명 이상의 성도가 증가했다.


Ⅲ. 장로교의 분열

19세기 장로교 분열은 두차례로 첫 번째는 컴버랜드 장로교의 분열이고 두 번째는 켄터키 새빛(New Light)분파의 분열이었다. 컴버랜드의 분열의 원인은 평신도를 목회자로 세우는 부적격한 목회자에의 안수 문제로 일어나서 1810년 부흥주의자들 단독으로 노회를 형성하여 1829년까지 18개 노회로 성장하였다. New Light파의 분열의 원인은 스톤 목사의 선택과 예정교리 때문이었다. 그는 칼빈주의 체제를 거부하였고 죄인들의 능력에 주요 강조점을 두었다. 결국 1803년 켄터키 대회 때 스톤목사의 면허는 취소되었고 동조자 5섯명의 목사와 함께 ‘스프링필드 노회’를 형성하였다가 잘못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인 교회’라는 이름으로 재설립하여 ‘성경만이 유일한 근거’로 내세웠다.


Ⅳ. 19세기 초의 종교 단체들

①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형제(United Brethren in Christ)

독일 개혁파 선교사 오터바인인 창설자, 경건주의강조, 내적 영적 설교, 메노나이트 선교사 보엠과 첩촉후 연합 시도-실패-새 공동체 창설, 1800년 “그리스도와 연합된 형제회”, 오하이오, 인디에나, 일리노이에 정착.

②복음주의 협회(Evangelical Association)

올브라이트가 창설. 연합 형제단과 복음주의협회는 서쪽으로 팽창, 현70만명의 회원, 현재는 복음주의연합 형제단(Evangelical United Brethren Church)으로 연합.


Ⅴ. 삼위일체 논쟁

대부흥운동직후에 발생, 1783년 성공회 King's Chaples은 미국의 첫 유내테리안 교회, 1805년 ‘웨어’ 하버드 대 교수 취임, 그러나 정통파의 반대로 삼년후 안도버 신학교(Andover Theological Seminary)를 설립- 각 교수는 정기적으로 신학교 신조에 서명, 보스턴 14개 유니테리안 교회 형성, 한편 찬닝의 설교(정통파 분노)-결국 정통파와 유니케리안의 분리.


제16장 교회 조직의 시대와 현대 선교활동의 시작


Ⅰ.교회의 조직

18세기 후반 이방인 선교에 집중, 1792년 케리 인도선교, 1795년 London Mission Society가 장로교회, 조합교회, 국교회를 중심으로 형성(지역적, 이방인 선교중심, 초교파적 성격), 1796년 뉴욕 선교협회(New York Missionary Society)가 장로교, 개혁파, 침례교 중심으로 형성(인디언 복음선교), 1798년 커네티컷 선교협회(Missionary Society of Connecticut)조직.

*선교 정기간행물 발간- 1800년 커네티컷 복음주의 잡지, 1803년 메사추세츠 선교잡지+ 1805년 파노프리스트지( 1820년 Missionary Herald지)

*장로교의 선교조직- 1799년 총회에서 시작, 1802년 실행위원 임명,1802년 피츠버그 대회(선교협회조직), 1805-1809년 총회 선교지 발간.

*침례교의 선교조직- 1802년 메사추세츠 선교회조직(펜실바니아, 뉴욕에도)

*감리교회의 선교조직-성격상 선교적 분위기에 있었던 감리교는 타교단 보다 늦게 조직


Ⅱ. 이방인 선교

1807년 모리슨(중국), 1810년 안도버 신학교 밀즈의 노력으로 ‘미국 외지 선교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가 형성, 1812 메사추세츠 살렘에서 5명의 선교사를 인도에 파송, 침례교의 외국인 선교조직 형성(1814년 필라델피아 33대표 소집


Ⅲ. 침례교의 인디언 선교사업

1820년 맥코이(포트웨인 선교), 1822년 미시간에 케리 선교부 설치, 외지선교위원회에서 1817년 첫 번째 선교사를 테네시 체로키 종족에게 파송, 1830년 8개 선교지부로 성장, 1822 브래이너트 선교지부. 미국 외지 선교위원회(초교파적, 하와이 군도 선교, 30년-694명 선교사 파송)


Ⅳ.미국 내지 선교협회

내지 선교회는 장로교와 조합교회로 구성되어 1835년 719명의 선교사와 관리인이 봉사, 1855년 1032명의 선교사 채용하는 단체, 선교 사업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예로서는 1828년 예일신학교에서 11명의 학생이 ‘일리노이단’을 구성하여 일리노이에서 교사와 목사로 봉사할 것 약속-아이오와 대학, 그리넬 대학 설립


Ⅴ. 선교회의 관계조직

1815년 미국교회협회 설립, 1818-1840사이 조합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화란개혁파 교회, 유니태리안 교회들- 25개 신학교 설립, 1805년 하버드 대학 신학부 설립, 1822년 예일대학 신학부, 1824년 버지니아에 장로교 유니온 신학교, 서부에 있어서 일반교육-1847년 대니슨 대학교, 1815년 셔틀레프 대학, 1820년 콜비대학, 1834년 알래가니 대학.


Ⅵ. 기독교 문서선교

1816년 뉴욕에 미국 성서협회(American Bible Society), 1825년 미국 소책자 협회형성, 교파적 출판사- 1789년 메토디스트 Book Concern이 가장 오래됨, 1824년 미국 침례교 출판사 협회조직, 1786년 감리교에서 Sunday School 도입- 1824년 미국주일학교 연합회(American Sunday School Union)조직


Ⅶ. 반선교적 결의들

1830년 일리노이 애플 크리크 침례교 협의회- 반선교적 결의 채택(선교활동 금지시킴), 1832년 슈가크리크 협의회, 1846년 68000명의 반선교적 침례교도 연합-주동자; 테일러, 켐벨, 파커. 침례교가 선교를 반대하는 주요 이유는 권위의 중앙 집권화와 유급혹회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회집회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면서 협의회들이 직원들과 유급비서를 가지고 사람들을 파송하는 권위를 가지는 것은 침례교의 원칙에서 벗어난다고 주장. 이러한 반선교주의의 교리적 기초는 과도한 칼빈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제 17장 불안정한 30년대와 40년대의 종교

연방법 채택-1830; 국가주의 시대(era of nationalism)/ 1830-남북전쟁; 지방주의 시대(era of sectionalism) 이라 한다. 이 시기의 특징- 각교파별 우위 주장, 1801년 장로교와 조합교회 합동계획안 무산, 민주주의 발흥, 미국의 산업혁명 진행(새로운 이민유입, 정치, 경제, 사회의 균형 무너짐), 기회의 시기-따라서 개인주의 도래, 감동주의 유행.

Ⅰ. 장로교의 분열

분열의 원인은 합동계획의 공작과 미국 내지 선교협회의 운영의 결과. 합동계획 교회는 조합교회와 장로교회원으로 구성; 분열의 시작 1828년 테일러의 설교에서 칼빈주의 배격-1836년 장로교 전킨 목사가 이단 판정. New School파 1836년 유니온 신학교 설립하자 프린스턴 신학교가 Old School입장 취함, 1837년 총회때 분열(4개 대회 533교회 10만 회원 분리)/ 장로교 내 노예제도 찬반으로 분열(old- 찬성, new-반대)

Ⅱ. 성공회

고교회와 저교회의 경쟁(저교회의 지도자; 윌리암 화이트 / 고교회의 지도자 호바트), 이외에도 이 시기에 뛰어난 지도자로는 열심있는 저교회 회원 그리스볼트, 복음주의자 무어, 교회 개척 부대의 이상적 지도자 체이스가 있다. ①호바트의 사업-뉴욕에서 28명의 교직자를 127명으로 부흥시킴, 성공회 소책자 협회, 주일학교 협회, 성서협회, 선교협회등 조직. ② 그리스 볼트 감독- 5개 교구로 발전 ③무어- 버지니아 감독, 5명의 목사에서 170 교회와 100명의 목사로 부흥 ④체이스 감독케년 대학 설립, 1835년 일리노이 선교부 감독.

1835년 고교회와 저교회는 분리( 고교회는 Anglo-Catholic이라 함), 개신교 성공회(1833년 옥스퍼드 운동과 합류)경쟁, 뮤랜버그- 전쟁 종식과 통합시도자(복음주의적 천주교도), 1847년 뉴욕에 옴, 1853년 연차 총회때 고교회와 저교회 연합.

Ⅲ. 루터교회

영어를 사용하는 루터교(신앙에 있어서 자유주의), 독어를 사용한 루터교( 아우구스브르커 신앙고백 강조), 자유주의자들의 지도자-슈먹커와 헨리. 1830-1870년 루터교도 증가(남북 전쟁 직전 독일인 1백만명이 이민유입-미국 루터란 들과 마찰). 보수적 루터교 대회들; 1846 미즈리대회, 1845 버팔로 대회, 1854 아이오와 대회. 극단적 보수주의 지도자 월터, 1844 ‘루터교도’지 발간. 한편 노르웨이와 스웨덴 인들이 이민와서 보수주의 루터교도와 연합.

Ⅳ. 독일개혁교회 분쟁

언어분쟁(필라델피아에서 심함), 메르세르스버그 신학 분쟁(1825년 설립, 메르세르버그로 이동, 1840년 네빈 박사와 샤프 박사의 가르침에 대하여 일어난 분쟁)

Ⅴ. 로마 가톨릭의 성장

1830-독립전쟁기 동안 아일랜드인과 독일인 이민, 대체로 천주교도, 로마 가톨릭의 선교협회들- 1822년 프랑스의 해외 포교성(Lyon Propaganda)과 1829년 오스트리아의 리오폴드 협회(Leopold Society)형성- 이들은 막대한 예산으로 선교지원, 1805년 제슈잇 부흥 같은 시기에 자선자매 수도회와 기타 선교부의 설립으로 부흥맞음, 지도자들- 잉글랜드 감독과 휴즈 감독. 잉글랜드는 전도여행, 요리문답 준비, 서적협회 설립/ 휴즈 감독의 논쟁2- 평의원 제도(평의원들과 감독 사이의 분쟁)와 공립소학교 문제(공립학교 자금을 교회학교에 분배하는 것을 반대)/ 토착 미국인 1837년 이민법과 귀화법을 강화하여 반천주교 운동 벌였으나 실패- 1830년대 60만명의 천주교에서 1850-350만명으로 성장.

Ⅵ. 비정상적 종교운동들-몰몬교

몰몬교, 밀러라이트 운동, 강신술, 공산주의 *몰몬교- 중서부 뉴욕에서 발생, 창설자; 스미스, 1827년 9월 몰몬경 발굴, 1830년 몰몬경을 팔미라에서 출판, 1830년 파에트에 몰몬교회 형성, 첫 번째 몰몬교 본부 1831-1837년 오하이오의 커트랜드(지도자 영 배출), 두 번째 1840-1846년 일리노이 나우부(1843년 스미스의 일부다처제 용인후 나우부 공동체 몰락), 1846년 나우부에서 Great 솔트레이트 계곡으로 이주.

Ⅶ. 밀러나이트 운동

윌리암 밀러(언제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여 세상의 종말을 이룰 것인가 정밀한 시간을 설정하는 것에 관심)- 1843년 3월 21일 재림일, 1845년 재림 조직 재형성, 1861년 재림기독교협회 조직, 1866년 하나님의 교회 형성.

Ⅷ. 심령술

1837년 케이커 중 심령술 현상 시작됨, 1847년 폭스 자매, 1857년 67개의 책자와 잡지가 프랙티칼 크리스찬지에 소개됨, 전국에 퍼짐, 지도자; 데이비스.

Ⅸ. 공산주의

공산주의 공동체들: *랍파이트 공동체(라프는 1803년 이민-펜실바니아 정착-오니케슈강 하류에 뉴하모니 공동체 형성- 오하이오 강둑지대로 이동(이코노미)로 개칭), *오네이다 공동체(1847년 노이즈는 오네이다 공동체 설립- 완전한 인격론 주장, 1847년 ‘복합결혼제’실시-1879년 폐지), *브루크 팜 공동체(1841년 부르크 협회 탄생- 1832년 유니테리안 분파에서 1836년 초월자 클럽으로 성장).

Ⅹ. 찰스 피니

1820년 개종후 ‘자유롭고 완전한 구원’의 복음 전파, 부흥운동이 가장 성공한 지역에서는 절제, 노예제도 반대가 일어남

제18장 노예제 분쟁과 분파 운동

Ⅰ. 노예제도의 생성

인디언 전쟁후 인디언 노예 생김- 흑인 노예로 까지 이어짐, 칼빈주의(노예제 인정), 18세기 로드아일랜드와 뉴 잉글랜드는 노예거래의 중심지로 변함. 노예항해(1562, 1672 왕실 아프리카 공사 조직되어 노예무역 종사,1679년 개인적 노예무역 허가 이때부터 미국으로 노예유입), 노예 무역 거래(술).

노예제 반대- 홉킨스, 1776 노예반대 출판물 제작, 이 시기 오직 성공회 소속 복음전도협회(SPG)만이 노예와 흑인을 위한 종교적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음. 가장 큰 노예반대 세력은 퀘이커. 1711 펜실바니아 주 체스터 계기대회 시 ‘흑인노예제 완전 금지 각서’가 통과 → 노예제도 반대 주장자들-레이, 사우스바이, 샌다포드, 베네재트, 울만. 1758-1776년 필라델피아 연차대회시 노예소유의 완전제거 이룩. 한편 남부에서는 많은 장애가 발생.

Ⅱ. 노예제도 폐지

*노예제도 폐지론의 동기들-복음주의 부흥운동과 자유주의 이념 → 자유주의 이념 헌장들- 독립선언서, 버지니아 권리선언서,(주장자들-요한 웨슬레, 아담 스미스, 벌크, 폭스, 핏트)

*노예제도 반대협회- 1775년 필라델피아 대회(약간의 주를 제외하고는 모든 주들에서 노예제도 폐지 주장함). 1795년 메릴랜드 흑인침례교도는 17,644명, 1800년 흑인감리교도는 15,688명, 그러나 남부 주들에서 점차 노예해방 반대의사 제기됨. 1796년 노예해방법 채택, 1789년 버지니아 침례교 총회시 노예해방 결의, 1792년 입헌적 연차 총회때 노예제도 반대 투표. 1807년 노예제 반대 협의체 형성(인도주의 협의회의 벗)이라 명함-“테렌트의 규정”(노예제 반대 규정)채택, 장로교와 침례교에서는 1787년 필라델피아 대회에서 노예제 반대운동 공표. 1816년 ‘재미 자유 흑인이민을 위한 미국협의회’에서 자유흑인들을 국내에서 아프리카로 옮겨주는 일을 실시.

*1790-1830년 제1차 노예제도 반대 운동 마감

Ⅲ. 제2차 노예제도 반대 운동

*1791-1860년대까지 남부에서는 목화생산 급증, 한편 1830-1860 노예제 운영이 활기

*노예제 반대 지도체제 형성- 북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노예폐지주의 복음’ 주장(게리슨, 필립스, 윗티어), 1833년 미국노예제 반대협회 조직, 신영주, 중부제주, 북부오하이오, 남부미시간.

*노예제 반대협회회들- 1836년 매인 침례교 협회, 1853년 감리교 성공회의 신영주와 뉴헴프셔 대회

*남부의 노예제 주장- 1833 프리멘 박사 외 다수 목사 노예제 주장

1832년 레인신학교(노예제 폐지운동에 가담), 노예폐지론 통과지역- 북부오하이오, 남부 미시간, 노예폐지론자중 지사(오하이오의 체이스)

Ⅳ. 교회의 분열

*침례교의 분열- 전체적 침례교의 조직; 1814(‘외국선교를 위한 미합중국 침례교 전체대회’); 1832(‘침례교 국내선교협회’)형성, 그러나 1841년 침례교대회시 노예문제로 남북이 대립, 1844 침례교 내에 노예제 반대동요가 증가, 1844,4월 노예문제 최종결정(조지아 침례교대회)-남부 협의회들의 국내선교위원회로부터 철수. 1844년 가을 알라바마 침례교대회에서는 노예보유 선교사 파송거부, *1845년 조지아 오거스타 연차대회에서 8개의 노예보유제주모임에서 북부형제들과 분리.

*감리교 성공회 교회- 감독들; 노예제 관한 논쟁저지 및 만류, 1836년 신시내티 대회시 노예제 폐지론 정죄함, 1840년 전체회의에서 게리슨당의 내분으로 노예제반대협회가 형성, 1843년 메사츄세츠 안도버 대회시 웨슬레 감리교파 6천명신도와 함께 뉴욕의 우티카에서 새로운 출발; 이들은 노예제를 반대하고 술취하는 것을 금지, 1845년 켄터키 루이빌에서 남부대표들회집하여 남부교회대회를 형성하고 ‘남부 감리교 성공회 교회’로 개칭,

1846년 총회-노예제도 잘못 성명, 1847년 과격한 노예제 반대 교회들의 분리(자유장로교대회 형성), 1849총회에서 노예제 강경하게 정죄, 1857년 총회에서 노예제 반대.

남부 총회 구성- 구학파입장(노예제 인정)-1850년 돈웰이 노예제 동조,(동시에 구학파 내에서도 노예제 반대자 상존)

Ⅴ. 장로교와 감리교회

서북 태평양 지역에 제일차 개신교 선교회 설립, *감리교-오래곤 지방 4명의 인디언족 추장이 선교요청, 1833년 재이슨 리가 오래곤 지방으로 선교, 그후 10년 동안 감리교회가 윌라매트 계곡에 정착됨, *장로교- 휘트만을 지도자로 1836년 미국선교위원회는 선교사를 오래곤 지방에 파송, 1847년 순교.

Ⅵ. 평신도 운동

1857년 공황과 더불어 뉴욕의 북화란인 교회의 다락방에서 시작, 오순절 모임, 1858년 매일 20개의 다른 곳에서 연합기도회가 개최(부흥함), 기독청년협회 YMCA가 많이 도움- 결과; 평신도 지도자 육성(시카코의 무디, 필라델피아의 워너메이커). 1858년 이들은 주일학교를 시작, *미국 기독인 위원회(United States Christian Commission)와 미국 위생위원회(US Sanitary Commission)을 설립함, 4개월 이내에 십만명의 결신자, 전국적으로 1백만명의 결신자 얻음

제 19 장 남북부 교회와 남북전쟁

미국의 각 주들을 묶어 매는 노끈은 매우 다양했다. 어떤 것은 영적이거나 혹은 교회적이며, 어떤 것은 정치적이고 다른 것은 사회적이었다. 이 끈들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종교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끊어지기 시작하였다. 강력한 감리교 성공회 교회 안에서 “그들을 묶어매는 많고 또 강한 유대들은 모두 끊어졌으며 또 그 연합은 없어졌다.” “다음에 끊어진 줄은 침례교회의 줄이다. 이것은 교파들 가운데 가장 크고 또 가장 존경할 만한 것의 하나이다.” 장로교의 줄은 아직도 완전히 끊어지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 끈들의 얼마는 허물어졌다. 성공회 교회는 “네 개의 대개신교 교파들 가운데 끊어지지 아니하고 완전한 유일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줄들을 끊는 것은 노예제 논의의 폭발적 힘이었다. 실로 교회 내의 분열이 제일차적 지방 파괴였을 뿐 아니라 최종적 파괴의 주요원인이었다.

Ⅰ 노예제 폐지론을 지지한 교회들

*구학파 장로교회는 노예제도 폐지론을 지지하고 강화할 의무를 선포하고 결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 그러나 뉴욕에 있는 브릭 장로교회의 가디너 박사는 노예제 폐지를 거부하였는데, 그는 노예제 논쟁 동안에 극단적 보수파에 속하였다 : “이 전체적 반역, 반항, 무정부상태, 사기행위, 그리고 난폭행위는 전적으로 자연종교의 명령과 도덕성에 위배된다. 그리고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정죄되는 것이다.”

*감리교회는 노예제 논쟁에 전적인 충성을 보였다 : 감리교회는 하나님과 인도주의를 위하여 수천명의 신도들과 목사들을 북군부대에 파송하였으며, 잔인하고 사악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모든 적절한 수단을 제공하겠다고 서약할 정도였다.

*침례교회는 정부를 위임받은 사람들을 지원하고 동정을 제공하는 것이 기독자 시민으로서 그들의 의무이며 권리라 하였다. 그들은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언하는 대통령의 선포를 충심으로 승인하였다.

Ⅱ 노예제 폐지론을 거부한 교회들

1861년 여름 남부연방(Confederate State)의 구학파 대회들과 노회들의 대표들이 조지아의 어거스타에 회집하였다. 그래서 거기서 미주 남부연방 내의 장로교회를 형성하였다. → 제 1대 회장으로 캐롤라이나의 팔머(Benjamin M. Palmer)를 선출하였는데, 그는 장로교 분열의 선동자였다. “우리는 감히 주장하거니와 만약 인간들이 그들의 결론을 성경에서 끌어온다면, 인간의 두뇌로서는 군왕제, 귀족제, 혹은 기근을 거부할 수 없음 같이 노예제도를 죄악으로서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남부 침례교회 대회는 1861년에 “연방정부로부터 분리할 때 남부는 단계들을 심중히 고려한 후에 공정하고도 우호적인 조정을 바랬을 뿐인데 그것을 워싱턴에 있는 행정부는 무례하게 거절하였다”고 하며 남부연방정부(Confederate States of America)가 형성되는 것이 승인되도록 결의하였다.

*모든 미국교회들 가운데 개혁파 성공회 교회처럼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미묘한 사태를 더욱 지혜있게 취급한 교회는 없다. 이것은 대체로 성공회 교회가 전쟁이전에 노예제도 문제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한 바 없음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들은 남부와 북부단체로 분열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목화생산주들의 분리가 있은 후 이들 여러 주로부터 오는 대표들로 구성된 대회의가 1861년 알라바마의 몽고매리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남부연방정부의 형성으로 분리된 주 내의 독립된 교구들의 조직이 필요하게 되어, 남부연방 내의 개신교 성공회(Protestant Episcopal Church)가 조직되었다. 한편, 합중국 개신교 성공회는 남방형제들의 분리를 결코 승인하지 아니하였다. 다행히, 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교회의 통일은 회복되었다.

Ⅲ 군목에 관하여

군대 내에 군목의 필요성은 일찍이 국방성에서 인정하였다. 군목에 임명을 받기 위하여서는 그의 교파 내에서 좋은 실력을 가진 정식으로 안수받은 목사일 것이며, 그리고 그의 임관을 위하여 그의 교파에 속하는 5명 이상의 자격있는 목사로부터, 혹은 인허받은 교회적 단체로부터 추천서를 받은 자야만 했다.

남부연방군 내의 종교활동은 북군 진영에서 보다 더욱 현저하였다. 리이와 잭슨 양 장군은 종교적으로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병사들을 돌보는 군목들의 사업에 큰 권면을 주기도 하였다.

Ⅳ 교회단체들의 협력

교회들은 군인들과 항해사들을 위해 일하는 많은 조직들을 지원함으로써 협력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은 기독인 위원회, 미국성서공회, 소책자협회였다. 기독인 위원회(Christian Commission)은 1861년 뉴욕에서 형성되어 연방정부가 마련하지 아니한 위안과 공급물 등을 군대들에게 지원하였다. 미국성서공회는 전쟁 동안 특별히 활동적이었는데, 남군과 북군 양 진영에 성경과 복음서들을 배포하였다. 전쟁기간동안 소책자협회는 역시 놀랍게 활동적이어서 여러 천권의 소책자들을 인쇄하여 군인들에게 배포하였다.

Ⅴ 해방노예 협회

전쟁말기에는 각 교파들이 자기들의 해방노예 협회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오하이오의 연합장로교회는 1863년에 피해방 노예협회를 형성하였다. 한편 동년에 침례교, 연합 형제파, 그리고 개혁파 장로교 등이 자기들의 협회들을 형성하였다. 1865년 전체 연차대회에서 개신교 성공회는 피해방 노예원조협회를 형성하였다. 감리교 성공회 교회는 1866년까지 계속하여 지방의 피해방 노예협회들과 협력을 해오다가 그들 자신의 피해방 노예원조협회를 역시 형성하게 된다. 흑인들에 대한 사업은 곧 교회의 커다란 자선사업의 하나가 되었다.

Ⅵ 북부교회의 남부교회에로의 진출 문제

약간의 불행한 결과들을 남겨놓은 바 있는 북부의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측의 종교적 활동의 한 형태는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이 남부에로 진출하려고 계획한 일이었다. 전쟁의 자연적인 결과로서, 남부연방 전체를 통하여 많은 지방들은 곧 목사없이 버려지고 따라서 정식 기독교 예배가 폐지되었다. 그러한 형편에서 북부에서는 선교사들을 남부에 파송하여 이러한 버려진 분야를 접수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었음이 당연한 현상이었다. 북부감리교 감독들에게는 남부감리교 성공회에 대한 사법권이 부여되었다. 1864년에는 남부에 있던 남부 침례교파의 모든 교회들은 미국 침례교 국내 선교회에 인계하도록 명령되었고, 비슷한 명령들이 연합장로교회와 준개혁 장로교회와 구파와 신파 장로교회 단체에게도 함께 전달되었다.

북부교회들 측에서 남부에로 진출하는 이 행동은 남부 측으로부터 큰 분노를 일으키게 하였다. 1864년 루이빌 노회는 내지선교부가 국방성으로부터 명령을 받은데 대하여 항의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Ⅶ 해외사절

전쟁 동안에 미국정부는 어떤 교회지도자들로 하여금 비공식 대표로서 해외에 나가서, 비판적이 되기 쉬운 구라파인들에게 연방정부의 정책을 설명하도록 요구하였다. 1863년 비처는 영국을 여해하며 노예제 폐지 문제에 대한 지지를 얻었다. 1861년 뉴욕의 휴스는 프랑스에 파송되었다. 감리교 목사 멕클린토크 박사는 파리에 파송되었다. 감리교 성공회 교회의 심프슨 감독은 링컨 대통령과 긴밀한 친구로써, 국내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Ⅷ 교회의 자선사업

남북전쟁 동안에 미합중국 내에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큰 규모의 자선사업들이 일어났다. 국내 및 외지선교부와 성경 및 소책자협회, 그리고 빈민과 고아구제를 위한 기부금의 증가가 현저하였다. 부자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모든 선한 일에 희사를 하였다. 전쟁기간을 통하여 감리교 성공회 교회의 모든 자선 사업들은 쉴새없는 증가를 보여 주었다. 개신교 성공회, 그리고 구파 및 신파 장로교회는 최소한 전쟁전 정도의 활동상황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모든 이러한 증가된 기부금에도 불구하고 생명있는 종교와 도덕의 문제는 전쟁의 결과로서 큰 곤란을 당하였다. 교회들의 회원은 전쟁 동안 일반적으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전쟁 종식기에 종교적 형편은 국내 여려 부면에서 약간의 진전을 표시하였다. 메사츄세츠, 미시간, 뉴저지, 그리고 기타 주 등에서 부흥의 소식이 전하여 왔다.

제 20 장 재건시기의 교회

Ⅰ 종교적 열심의 소산인 남북전쟁

북부 및 남부의 교회들이 남북전쟁을 주로 도덕적, 종교적 투쟁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근대사의 어느 전쟁보다 더욱 강력하게 종교적 열심에 호소하였다.

Ⅱ 흑인교회의 조직

전쟁 동안에 북부의 교회들이 남부에서 시작한 선교사업은 재건기간 동안 증가되는 세력을 가지고 힘있게 추진되었다. 피해방자 원조협회는 곧 남부의 지방마다에서 다수의 흑인학교들을 건설하였다. 장로교회와 조합교회 협회들은 특별히 그들의 교육사업에 적극적이었다. 감리교 성공회는 그들의 피해방자 원조협회를 통하여 많은 학교들을 운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869년까지 과거의 노예보유주들 내에 10개의 새로운 연차대회를 형성하였고 흑인과 백인간에 많은 일을 하였다.

남부의 교회들은 크게 분산도니 상태에 있었지만, 그들의 전 노예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였다. 남부의 감리교 성공회 교회도 마찬가지로 흑인들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1866년까지 그들의 흑인회원들을 위한 계획을 작성하였다. 흑인들은 그들 자신의 계기대회를 가지면서 분리된 관리회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흑인들에게도 설교권을 인허하였으며, 정당한 조건이 구비된 곳에는 흑인교구가 조직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1870년, 흑인감리교 성공회 교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흑인들을 위한 남방의 교회들의 노력은 다소간 허사로 돌아갔다. 많은 경우에 흑인들은 남방의 교회들의 의도에 대해서 의심짙게 보았다. 그들은 그 교회 내에서 과거의 그들의 백인 주인들 감시하에 예배하였으며 그 결과 옛 남부교회들의 흑인회원수는 급속히 감소되었다. 남부장로교회의 흑인회원수는 전쟁 후 수년 내에 70%가 감소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다수는 독립흑인교회로 가버렸다.

전쟁종결시 흑인들은 종교와 교육에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흑인의 교회들과 학교들은 불근신한 정치가들에 의해 곧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종교는 정치적 사상으로 가미되었으며 또 정치적 사상은 종교적 확신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

흑인교회의 부족은 불가피하였다. 가끔 그들의 교회들 내에는 예배가 오락에 종속하였는데, 대체로 그 까닭은 흑인들에게 사회적 시설의 부족때문이었다. 매우 가끔 흑인교회는 평신도와 교역자들이 함께 경제적 및 성적 도덕의 이완상태를 볼 수 있었다.

Ⅲ 부 패

공적 및 사적 생활에 있어서의 행위의 수준의 저하는 남북전쟁의 볼행한 결과의 하나였다. 정치에는 전반적 부패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선거를 구매하기 위한 금력의 사용은 정치적 부패의 많은 형태들의 하나이었을 뿐이다. 사업계의 부패는 정부 내에서 더 심했다. 위탁금소비, 맹목적 채권판매, 유류투기, 사기성의 철도공사 등은 부정직한 투기사들이 불굴한 사람을 약탈하는 방법들의 일부였다. 실업경쟁자들의 무법한 파괴방법들은 보통이었다.

Ⅳ 이 민

이민은 주정(酒精) 교통의 조속한 신장의 원인이 되는 요소들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곧 술을 통한 수익이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1865년에서 1884년 사이에 7백만 명 이상의 이민들이 합중국의 항구들에 들어왔다. 그들의 거의 반 이상이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왔다. 이 이민들은 대부분 가톨릭, 루터교, 혹은 합리주의자였다. 그리고 미국 개신교에 대한 그 영향력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루터교인과 가톨릭이 함께 그들과 더불어 “대륙의 안식일”을 가져왔다.

Ⅴ Y.M.C.A 와 무디

급속히 성장하는 도시들에 의해 발생된 새로운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심각한 노력이 청년기독자협회(Y.M.C.A) 등의 초교파적 조직에 있는 평신도에 의해 행해졌다. 한편, 전후시기의 가장 효과적 복음전도자는 평신도 무디(Dwight L. Moody)였다. 그는 시카고 시에서 종교적 일꾼으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1865년에 시카고에 와서 플리머스 교회에 가입하여, 그 도시의 가장 빈곤한 구역들의 하나에 한 주일학교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한 영향력있는 시카고 상인을 그 교장이 되도록 설득하였다. 1860년 그는 사업을 단념하고 시의 선교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남북전쟁 동안 병사들을 봉사하는데 일하였다. 무디는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탁월한 전도자였다. 그의 설교는 간단하였다. 그러나 확신과 중심점으로 차 있었다. 그는 간절한 동정심과 개인에 대한 통찰력과 위대한 실제적 기술과 기지를 가지고 있었다.

Ⅵ 서부로의 이동

남북전쟁 동안과 전후에 인구는 계속하여 서부에로 이동하였다. 1861년 켄사스가 연방정부에 가입되었다. 그리고 전쟁종식 2년 후 네브라스카가 한 주가 되었다. 60년과 70년대의 대광산업 유행으로 점차 더 많은 수의 백성들을 록키산맥 지방으로 몰려왔다. 그리고 그것이 1876년까지에는 콜로라도를 주로 승격하게 하였다.

Ⅶ 서부 인디언들의 동요

정착민들을 미즈리 관통지방으로 이거시키고, 대륙횡단 철도들을 건설함으로 된 불행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 서부 인디언들 가운데 조성된 동요였다. 군대가 서부로 이동하는 정착민들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디언족 선교를 특별히 곤란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다수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생명을 위하여 도주하여야만 하였고, 그리고 인디언족의 종교적 및 경제적 조건은 악한 형편에서 극악에로 급속하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Ⅷ 디사이플 파

1869년까지 구학파와 새학파 장로교 사이의 분열의 원인들은 대체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년에 두 단체의 재통합이 다행히 완성되었다. 남북전쟁 후 연간은 회중교회파 내에 교파적 부흥의 시기를 이룩하였다. 이 운동은 전쟁 전에 개시되었다. 감리교와 침례교의 새로운 서부에서의 강력한 경쟁자는 디사이플 파였다. 이 파는 1883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교회들에 대여하기 위하여 교회확장 자금을 설립하였다.

Ⅸ 전후의 가톨릭과 루터교, 유대인

전후 이민으로부터 가장 큰 유익을 본 교회들은 가톨릭과 루터교회였다. 미국 루터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 한 가지는 재건시기에 거대한 스칸디나비아인 이민단이 미국 내에 들어온 일이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의 루터교 단체는 그들이 옴으로써 제기된 문제들을완전히 해결하여 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대다수는 교회에서 떠나버렸다. 미국 루터교회측으로서 그 커다란 기회를 충분히 포착하는데 실패한 것은, 1860년에서 1870년 사이는 미국 루터교회 내의 분열기였다는 사실에 일부분의 원인으 찾을 수 있다.

1873년 제1차 유대인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을 형성하였다. 1830년과 1848년의 대이민때에 다수의 독일계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왔다. 이것이 곧 새롭고 또 공격적인 지도체제를 산출하였다. 그것으로부터 대체로 유대인 연맹과 개혁운동이 나왔었다.

Ⅹ 미국교희의 변화

남북전쟁이 종식될 무렵에 미국 내의 대교회들은 철저히 정통이며 보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곧 종교적 사상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게 될 어떤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한 세력은 회중교회 목사 브슈넬이 행한 것이었다. 그는 설교와 저술을 통하여서 새로운 종교적 사상과 경험의 고집자가 되었다. 미국의 부흥운동은 대체로 기독교적 성장의 법을 무시하였다. 그래서 브슈넬은 그의 소책자『기독교적 양육』에서 의식적으로 감정적 경험을 주장하는 부흥주의적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교회가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의 원리 때문에 고통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 기간에 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창조기사와 충돌되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미국 내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관한 한에 있어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19세기 말기 동안에 교회는 즉시 소위 “고등비평”에 관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자유파와 보수파의 양그룹으로 분열되었다. 성경의 개정은 자연적으로 신조의 개정과 관한 토론에로 이끌었는데 특별히 장로교인들 사이에서 격렬하였으며, 보수주의를 향하는 결정적 반응을 일으켰다.

** 평 가 **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미국교회는 이전과는 다른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첫째는 흑인문제요, 둘째는 이신론의 등장과 함께 온 소위 성경의 고등비평의 문제였다. 흑인문제는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의 내면속에 자리하고 있는 문제로서 그 심각성이 매우 크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공회의 입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흑인문제에 대해서 다소 중도적 입장을 취한 듯 하다. 이들은 분열이 되지 않았다. 나머지 교파들은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여 남북전쟁을 종교전쟁으로 확대시켰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종교 아니 기독교는 시대 정신을 이끌어야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여서는 않된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시대의 아픔을 걸머지셨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교회의 입장 관계를 오늘의 시대로 바꾸어 보자. 과연 교회는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어느 한편을 지지하는 것이 타당한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소수의 교회들만을 제외하고는 입장표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교회의 모습은 시대정신을 선도할 수 없다. 현실적인 이유로 현재의 교회는 분명 기득권자들의 소굴이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도 동일한 현실적 문제로 교회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는 당시 교회들의 외침 즉 “인간의 자유”는 오늘날 교회가 이룩한 위대한 결실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귀중한 본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교회 역시 현재의 상황속에서 교회를 개혁시켜야 할 중대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러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이다.

미국교회사 역사신학1 이 상 조

제 21 장 교회와 변화하는 경제질서

Ⅰ. 미국교회의 재정적 증가

1880년경부터 세기 말까지, 그리고 그후 사이에 미국 내에 있는 조직된 종교에 가장 의의깊은 단일 영향력은 국내에서의 굉장한 재부의 증가였다 → 종교의 미성숙에서 탈피, 교회건축의 시대 도래, 교육적 증진의 시기가 닥침, 교파대학의 유행 ||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낡은 야영집회가 첫째 하계강습회로, 그리고 후에는 중류계급 하기피서 등으로 변형됨 || 모든 복음주의적 교회들의 집회때의 주요한 기술이었으며, 개척지방에서 특이한 필요물이었던 부흥회의 일반적 전형은 세기 말과 그 이후까지도 여전히 광범위하게 계승되고 있었다 → 드와이트 L. 무디, 차프만, 토레이, 선디 → 선디의 술과 고급주점에 대한 공개적 비난은 복음운동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고, 선디의 영향력은 미국금주운동에 깊은 관련이 있다. 미국의 부흥역사상 실제로 모든 탁월한 개인부흥가들은 조나단 에드워드로부터 빌리 선디까지, 회중교인이거나 장로교인이었다.

Ⅱ. 정치적·경제적 기관들의 강화

남북전쟁 이래 미합중국의 발전에 공헌한 특출한 요인은 정치적 및 경제적 기관들의 강화에로 향하는 경향을 띰 → 거대한 사업조직들의 지도자였던 사람들의 다수는 충실한 교인들임 → 쿠크(성공회), 록펠러(침례교인), 멕코믹(장로교인), 스위프쯔(감리교인) || 한편 필립 D. 아몰, 제임스, 힐, 몰간, 밴더빌쯔는 큰 재산을 교회교육기관에 바침. (카네기는 신앙에 회의주의에 물들었다)

Ⅲ. 교육에 대한 평신도들의 기부

교회의 사업행정이 점점 더 평신도들의 손에 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파대학들에 있어서도 더욱더 그러하였다. 재산가들은 이미 설립된 교육기관들에 관대한 희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혹은 신설 단과대학과 종합대학교들을 창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Ⅳ. 평신도의 위상강화와 “거룩함”의 문제

큰 교파들은 점점 더 사업적 방법으로 지배되었고 부유한 사람들이 지배하였으며, 예배는 더욱 형식화하는 경향이었고 또 목사들과 성가대원들은 예복을 갖추고 또 예배석은 푹신한 안락방석이 놓여졌다. || 재산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더 부적절하게 느끼게 되고, “마음의 종교”는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불평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 “거룩함”의 문제가 교회를 동요시킴 → “제2차 축복”의 교리는 물질적 축복이 빈약한 사람들에 의해서 빈번히 주장됨 → 1880년과1926년 사이에 최소한 25개의 성결교와 오순절파 단체들이 생겨났다. 중서부 지방에 가장 많이 생겼는데, 그 곳에서 주동적 선동자인 감리교적 단체들이 가장 수가 많았다. || 농촌교회들이 감소함.

Ⅴ. 노동운동

조직된 노동운동은 큰 회사들의 발생과 더불어 불가피적으로 수반되었다. 미합중국에서 노동조직의 역사는 1869년 필라델피아에서 ‘노동기사연맹’(Knights of Labor)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됨 → 1890년 이후 노동기사 연맹이 쇠퇴하고, 1881년에 조직된 ‘미국노동조합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이 대체됨 : 1886년 5월 1일에 “헤이마케트 폭동” 발생 - 노동분쟁의 절정 || 일련의 노동분쟁은 일반적으로 교회원들의 큰 비율을 차지하는 중류층 시민들의 가혹한 비난을 받았다. 분쟁에 관련된 거대한 손실이 그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청교도적인 절제관념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재산의 파괴와 생명의 손실에 대하여 자본가들보다 오히려 노동자들을 비난함 || 모든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그 연간을 통하여, 개인구원에 주요 강조점을 두었었다. 교회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개인들을 죄와 영적사망에서 구출하는 것이 교회의 주요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종교의 개념이 넓혀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구원의 개념에 변화가 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 → 개인의 죄만이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죄에 대해서도 어떤 대책이 취해져야 한다. 사회복음 강조.

Ⅵ. 외국선교

19세기의 마지막 10년을 통하여, 그리고 20세기 초년 동안 계속적으로 개신교회와 천주교회가 함께 모든 미국교회들 사이에서 외국선교에 대한 흥미가 증가되었다. 이러한 증가되는 외국선교에 대한 흥미 속에 있는 요인들의 하나는 ‘스페인-미국 전쟁’이었고, 또 그 결과로서 북미합중국이 채택한 새로운 제국주의적 정책이었다. || 교파상호간의 이해와 협력을 조장하는데 있어서 선교문제보다도 더 영향력을 가진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 선교사업을 위한 가장 광범위하고 또 효과적인 초교파적 기관들의 하는 학생의용운동이었다.

Ⅶ. 내지선교

1880년 미합중국은 여전히 많은 내지선교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 책슨 - 장로교 내지선교회 후원으로 1870년에서 1882년 사이에 록키산맥 지방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셀던 잭슨의 생애에서 가장 통쾌한 부분은 알라스카에서 수행한 사업(알라스카에 레인디어 사슴을 도입하여 에스키모인들을 굶주림에서 구원함)이었다. 침례교회와 사도파교회는 대체로 그들의 자비량으로 하는 평신도 봉사로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감리교회는 순회전도 제도를 잘 이용하였다. 특별히 조합교회는 미국 내지선교회를 통하여 그 새 땅에 문자 그대로 돈을 들어부었다.

Ⅷ. 동방 정통교회

동방 정통교회의 모든 여러 지교히들의 대표가 미국 땅에 옮겨 심어졌다. 동방희랍 정통교회들이 합중국 내에서 제2차 대전 동안과 종전 후에 계속하여 중요성을 더해감 ㉠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통교회는 러시아 정통교회(러시아의 알라스카 점령때부터 시작됨) →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미국에 있는 러시아교회에 새롭고 또 심각한 문제들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그것이 완전한 자치권을 이루게 되었다. ㉡ 재미 러시아 정통교회에 숫자상으로 다음가는 교회는 희랍정통교회였다. ㉢ 다른 재미 동방 정통교회들은 시베리아인, 시리아인, 루마니아인, 알바니아인, 불가리아인, 그리고 우크라이나인 등이다. ㉣ 근년에 로마 천주교회에서 분립한 또 다른 유니아트 단체는 미합중국카파도 러시안 희랍 천주교 정통 기독교회이다. 그들은 본래 헝가리의 일부지방으로부터 왔다. 그들의 종교는 동방정통교회였다. ㉤ 3개의 토착 미국정통교회가 있다. ㄱ. 성동방 천주교 및 사도적 교회, ㄴ. 미국성정통교회, ㄷ. 미국 성정통천주교 동방교회

Ⅸ. 유대인

대부분의 초기 미국 유대인들은 스페인계, 혹은 포르투갈계였다. 남북전쟁이 지난 후에 미국태생 유대인의 신세대가 일어났다. 1848년 독일혁명의 실패 후 독일계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낡은 유대계 미국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독일인 교회회중을 형성하였다 ← 미국 유대교의 종교적 통일에 있어서 첫 번째 분열 || 1843년 브나이 브리드의 독립교단이 재미 모든 유대인들을 연합하기 위해 형성됨 → 비록 그들의 종교적 견해는 크게 차이가 있었지만 사회적, 문화적 및 자선적 목적을 위해 단합함. || 미국 유대교에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개혁운동의 출현이다. 1885년 피츠버그에서 열린 랍비회의에서 한 개혁파 유대교의 강령이 채택되었다. 이 강령은 탈무드의 규칙보다 오히려 구약성경을 교육하도록 강조, 팔래스틴으로 복귀한다는 관념을 거부, 인격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거부, 히브리어를 영어로 대치, 현대 세계 속에서 유대인의 사명은 세계의 인민들 사이에 경건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주장함. || 비스마르크 치하에서 최고위층에서 반유대주의가 싹트기 시작함 → 구라파에서 일어나는 반유대주의의 새로운 물결 때문에 합중국으로 향하는 유대인의 이민은 큰 홍수로 증가됨. 시온주의가 일어난 것은 구라파에서 이 유대인 박해 기간 동안에 된 일이었다. 그것은 전세계의 집없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팔레스틴을 고국으로 회복하려는 계획이었다. || 시온주의에 대한 반대가 서구라파와 미국, 특별히 개혁파 유대인들 간에서 발전함 → 많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동화되기를 바라는 까닭에 시온주의를 반대함 → 시온주의자들, 반시온주의자들, 그리고 비시온주의자들로 3부분으로 분열됨. || 재미 유대교는 개혁파, 보수파, 정통파 등 3개의 현저한 종교단체로 분열됨.

제 22 장 교회와 도시성장

Ⅰ. 도시 성장

도시의 성장은 농촌지방으로부터 인구의 유입 때문에 된 것만은 아니다. 80년대 동안에 독일인과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등 동구라파로부터의 거대한 이민군과 일반적으로 “새로운 이민군”으로 지칭되는 러시아와 폴란드계 유대인과 이태리인, 희랍인 및 여타의 동구라파인들의 유입, 그리고 꾸준히 계속되는 독일인과 애란인 이민들이 도시의 인구를 팽창하게 하였다. || 농촌지대로부터의 인구의 이동은 무수한 농촌교회 생활을 위태롭게 하였다. || 이 시기의 도시에 현저히 나타난 점은 안식일의 세속화였다. || 합중국의 도시에 천주교인수의 급속한 증가는 개신교 세력에 대한 도전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변화된 상황에 대처할 목적으로 도시에서는 기관화된 교회같은 교회조직의 새로운 형태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미국에 구세군이 들어왔다.

Ⅱ. 기관화된 교회

기관교회 관념의 창시자는 뮤렌버그(성공회 교직자) || 기관적 교회들 가운데 가장 현저히 성공한 것중의 하나는 뉴욕에 있는 세인트 조지 성공회 교회였다. || 기관교회 관념의 가장 최근 발달은 1907년 보스턴에 있는 몰간기념 감리교회에 그 기원을 가진 ‘굳 윌 인더스트리즈’이다 ← 사회의 폐물로서 버려진 인간을 활용하는데 사용. || 영국에서 구세군이 창설된 후(1878) 두 해만에 래일턴 변무관과 7명의 여자 장교들의 인솔하에 미국에 나타났다 → 교리적으로는 구세군은 근본주의적 강조를 하는 정통적 기독교이고 교파구별은 없다. 그리고 주로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재건해주고 회개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타락한 여성의 구제는 구세군 사업의 가장 성공적 양상이다. 그리고 선을 위한 그 전체적 영향력은 수만 명의 지원과 존경을 받아왔다.

Ⅲ. 기독교 과학(Christian Science Church), 접신학, 기독교 가톨릭 시온사도교회

기독교 과학교회로 잘 알려진 ‘그리스도 교회’의 탄생 : 에디 부인이 창시자 - “물질은 진정한 실재가 아니다. 그리고 악, 병, 죄, 혹은 죽음조차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질병은 오직 정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 조직된 기독교 과학 교파는 메사츄세츠의 린 시에서 시작됨 → 기독교 과학교회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치료하적 심리학의 견지에서 그것의 유용함을 입증하였다 → 기독교 과학교파의 분열 : 스태트슨 부인이 주동자.

접신학은 동방의 “고대 지혜종교의 보호자요, 또 보존자들의 사자들”에 의하여 미국에 가져왔던 것이다. 그 주요 사자는 블라바트스키였다 → ‘접신학협회(Theosophical Society)’를 형성 : “인종과 피부색, 성, 계급, 혹은 교리의 차별없이 우주적 형제관계를 추구하고, 또 고대 경전의 연구를 추진하고 또 ‘감추인 자연의 신비들’과 사람 속에 잠재하는 정신적 및 영적 능력을 조사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우이(John Alexander Dowie)에 의해 “기독교 가톨릭 시온사도교회” 창설 : 담배와 술을 금지, 의사는 그의 사악한 개업을 할 수 없었다. 약방도 동등한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돼지고기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Ⅳ. 천주교, 유대교, 몰몬교

모든 미국의 종교단체들 가운데 로마 천주교회는 1880년부터 단연 최대 다수를 이룩함 → 80년대 동안 로마 천주교인들의 이민으로 ‘미국보호협회’라고 알려진 반가톨릭 운동들이 발전하게 됨 → 미국의 가톨릭 정신의 기이한 형태가 발생 : 합중국 내에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황과 더불어 타협하기를 즐겨하는 것, 그래서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인정하려 하고 법률 앞에 모든 교회의 평등을 용납하려 하고 공립학교를 승인하기까지 하려고 했다.

로마 가톨릭 다음으로 이민으로부터 가장 유익을 본 종교단체는 ‘유대교’였다. 70년대 후기와 전 80년대를 통하여 폴란드, 오스트리아-헝가리, 루마니아, 그리고 러시아에 있었던 잔인한 반유대인 박해(이것은 대체로 유대인의 재산에 대한 탐욕으로 생긴 것)가 유대인들을 합중국으로 향하게 함.

지난 수십년 동안에 합중국 내의 또 하나의 신속히 자라나는 종교단체는 ‘말일성도교, 혹은 몰몬교’이다 : 병자와 빈민을 돌봐주고 교육과 오락을 마련하고, 그리고 백성의 경제생활에 긴밀하게 동조한다. 몰몬교도들은 유타 주 내에서 인구의 4/5를 이룬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 관계에 있어서는 결코 단일체는 아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가톨릭교도들과 유대교인들도 마찬가지다.

Ⅴ. 전도자들

미국 설교강단 역사상 19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처럼 그렇게 많은 탁월한 전도자들을 가진 기간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 비처, 아보트, 탈마지, 버렐, 헨슨, 심프슨, 골든, 브루크스.

Ⅵ. 종교교육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에서 큰 비율로 성장한 한 운동은 종교교육이었다. 이것은 금세기 초 미국의 탁월한 개신교 지도자들의 한 무리가 공립학교 내에 종교교육을 성략함으로부터 일어나는 증가된 위험을 인정하기 시작하였을 때 시작되었다 → 개신교회들은 그들의 주일하교 사업에 있어서 협동을 배웠다. 초교파적 조직인 미국 주일학교 연합회가 1824년에 형성되어 있었고, 초교파적 주일학교 대회들이 그때 이후로 때때로 열리고 있었다. 1872년 제5차 전국 주일학교 대회는 통일주일학교 공과제를 채택하였다 → 1903년 사카고 대학교 총장 하퍼는 대학교 내의 그의 동료 몇사람과 국내의 종교지도자들 가운데 유력한 사람들과 더불어 청년을 위한 종교적 및 도덕적 교육을 증진하기 위한 전국적 조직을 형성하도록 시카고에서 한 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계획은 성공적으로 성취되어 종교교육협회가 조직되었다 → 1922년 초교파적 종교교육 위원회가 형성되었는데, 그 목적은 개신교 교회들간에 보다 큰 교육적 협력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제 23 장 제 1 차 세계대전 : 번영과 불경기

아트킨스(Gaius Glenn Atkins)는 그의 저서 “우리들 시대의 종교”에서 제일차 세계대전 이전 15년간의 미국 교회들을 “국내와 국외에서 개혁운동을 행하는 교회”로 특징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전쟁 이전 연간에만 그런 경향이 아니라, 전쟁기간 전체를 통하여 미국 교회들에 적용될 수 있고 또 전쟁 후 짧은 기간 동안도 적용된다. 사실상 만일 교회들이 벌써 인간과 종교전진운동, 금주운동, 평신도 선교운동, 세계학생기독자연합회, 학생의용운동, 교회통일과 세계평화운동 등의 사업들을 증진하는데 개혁정신에 감염되어 있지 않았다면, 미국 교회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평화의 계획을 가지고 전쟁자체에 대해 그렇게 열심있는 지원자가 되지 아니하였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을 싸우는 지원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결국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평화를 이루고 또 독일의 독재정치에 대항하는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모든 전쟁을 종결시킬 많은 확률이 있는 만치,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고 혹은 전쟁 이전 연간의 모든 월등한 개신교 교회지도자들이 열렬하게 지원하던 방법으로서 세계와 미국에서 기독교가 승리하게 할 확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을 고한 뒤 특별히 영어 사용하는 세계에는 절대평화주의의 유능한 주창자들이 상당한 수가 일어났다. 그들의 이 입장은 그들이 생각한 바 예수의 결정적 평화주의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의의가 깊은 다른 하나의 사실은 미서전쟁의 종식이래로 미국의 기독자 시민들은 더욱더 국제적인 정신으로 되어갔다는 것이다. 개신교 교회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외국선교에대한 취미가 지배적인 흥미였다. 역동적 개성과 기독교의 신속한 세계승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모트와 스피어는 대학과 대학교 단체들 앞에서 인기있는 연사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 대학들에 있는 젊은 남녀로서 YMCA, 혹은 YWCA하에, 혹은 어떤 교회 이사회의 후원하에 외지 기독교 봉사의 어떤 형태로든지 헌신하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전체 대학사회 어디에 가든지 학생자원단체들이 번창하였다. 극동에 있어서의 모트의 영향력과 광범위한 지식이 매우 잘 공인되었음으로 윌슨 대통령은 그에게 주중국 미국대사직을 수락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초청을 모트는 거절하였는데, 그것은 분명히 그가 세계의 비기독자 백성들에게 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24 장 폭풍의 10년을 지나서 세기 중엽에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환멸기 동안에 전쟁연간의 관념론을 경시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이란 구절을 언급하여 “민주주의를 위하여 안전한 세계를 만드는 것”을 계획적 사기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의 사실은 어떠냐 하면 잘못된 것은 전쟁연간의 관념론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 후 연간에 있어서 어떤 관념론의 결핍이었다. 진실로 전쟁연간의 관념론은 당시에도 타당하였던 것처럼 오늘도 타당하다. 전쟁의 이상들이 하나도 성취됨이 없음은 전쟁지도 체제때문이 아니었고 오히려 전쟁종식 직시로 지배권을 얻게 된 미국의 지도체제의 형태 때문이었다.

192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시까지 한 강력한 평화운동이 영어사용하는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거의 즉시로 다수의 저명한 미국의 종교 지도자들은 베옷을 입고 또 재를 쓰고 그들의 제1차 대전 참여를 회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어떤 전쟁에도 참여하지 아니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서 다시금 미국교회는 전쟁이란 사실을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의 전쟁참여 문제는 국민 앞과 교회 내에서 함께 신속하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특히 진주만 사건은 대부분의 사회복음 형태의 미국평화주의자들을 싫어하는 전쟁참가자로 변형시켜 버렸다. 진주만 폭격 이후 더 크리스찬 센추리지는 선포하기를, “우리가 전쟁을 시작하게 됨은 이제 불필요한 필연성이 되었다”고 하였다. 진주만 폭격 이전에 강경한 전쟁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교회단체들이, 이제는 만약 어떤 공의롭고 또 지속적인 평화가 존재하려면 추축국의 패배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과 전쟁 후에 미국 교회는 공중여론을 형성하는데 탁월한 역할을 행하였다. 교회신문과 공식 교회단체들의 많은 발언들은 세계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각성된 흥미를 입증한다. 미합중국이 전쟁에 참가한 지 얼마 후, 미국 그리스도 교회연합 평의회는 공의롭고 또 영속적 평화를 위한 근거들을 연구하기 위한 한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1948년 8월 22일에서 9월 4일 사이에 40개국으로부터 135개 교회단체의 대표자들이 암스텔담에 회집하여 세계교회 평의회를 형성하였다. 세계기독교 공동체 건설을 지향하는 그 운동은 19세기의 두 개의 커다란 영향력에서 발생하였다. 첫째는, 세계의 모든 모퉁이까지 이르는 거대한 기독교의 선교팽창이었다. 둘째는, 기독교 백성들의 비점령지역에로의 이주였다.


☞ 평 가


전쟁에 대해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것은 미국 교회사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제기이다. 미국의 시작은 전쟁에서 시작하였고, 그 현장에 교회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전쟁을 방관했는가? 아니면, 전쟁을 적극 지지했는가? 아니면 전쟁에 대해 반대하였는가? 미국의 역사는 전쟁을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 어찌보면, “하나님은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분”이라는 관념에 위배되는 행동을 교회가 몸소 앞장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역사속에서 하나님은 역사를 변혁시키는 주체이다. 역사가 인간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향할때는 과감히 거부해야 한다. 방관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다. 미국의 역사는 역사주체로서의 하나님의 섭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 향할 때 교회는 과감히 거부했다. 오늘날에에도 다분히 정치적인 동기가 있긴 하지만, 미국의 의회 뒤에는 각 교회의 지도자들이 로비스트로 깔려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고백하는 신조와 위배되게 의회가 움직이면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긍정적인 측면이란 바로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우고, 실현해가는 전달자로서의 인간과 교회의 역할을 미국교회가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신학 이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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