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방교회, 왜 분열되었을까?



글 / 박찬희 목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둥교회)


교회는 크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뉜다. 동방교회는 그리이스,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틴, 이집트, 아르메니아, 이디오피아, 러시아등에 위치한 교회들이다(동방교회는 칼케돈신조를 받아들이는 동방정교회와 수용을 거부하는 동방교회(콥틱 등)로 나눠진다). 서방교회는 유럽과 미주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카톨릭과 개신교회(성공회 포함)가 이에 속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054년에 동서방교회가 공식적으로 분열된 이후 양자간에는 오랫동안 소원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최근 양자의(동방정교회와 카톨릭, 동방정교회와 개신교) 대화가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동서방교회가 분열에 이르게 된 데는 여러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이유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 수도이전 문제가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서로마지역인 로마에서 동로마지역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수도이전은 정치적 종교적 분열의 한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분열의 여지는 이미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로마는 둘로 분리되어 통치되었다. 장자 아르카디우스(Arcadius)가 동로마를 차지하고 차남 호노리우스(Honorius)가 서로마지역을 다스렸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교황의 권위가 확대되었다. 반면 동로마는 황제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둘째, 교회의 지리, 문화적 배경이 다른데서 기인하였다.

동방교회는 헬라문화권으로 사변적이었고 교리논쟁이 많았다. 그 이유는 헬라어가 가진 특징 때문이다. 헬라어는 매우 세분화되어 있다. 단어의 표현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따라서 어느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신학적 입장이 완전히 다르게 되는 경우도 많다.(아리우스 논쟁이 대표적) 따라서 사변적일 수 밖에 없다. 반면 서방지역은 로마의 법체계에 기준한 명료성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라틴 문화권에 속한 서방교회는 상대적으로 보다 실제적이며 덜 사변적이었다.

 

셋째, 성상(聖像) 사용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동방교회는 입체적인 형상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성화나 모자이크 같은 2차원의 성화상은 허용했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성상을 존중하고 널리 사용하였다.

 

넷째, 신학적 이유로서 휠리오크베(Filioque)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은 성령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에 대한 견해차이에서 시작된 것이다. 휠리오크베라는 단어는 '그리고 아들로부터(and from the son)'를 뜻하는 라틴어이다.

원래 325년(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추인된) 니케아 신조에서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세계공의회가 결정했으나 서방교회는 여기에 성령이 성자로부터도 나온다고 추가하였다. 동방교회는 공의회를 통하여 결정된 신조에 휠리오케를 첨가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서방교회를 이단이라고 정죄했다.

 

다섯째, 사소한 관습의 차이가 있었다.

동방교회는 결혼한 자가 성직자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물론 신부가 된 후에는 결혼할 수 없다. 또한 결혼한 신부는 주교가 될 수 없었다). 또한 동방교회 성직자들을 보면 외형상 한 특징이 있는데 수염을 길게 기른 것이다. 반면에 서방교회는 성직자의 결혼을 완전히 금지할 뿐 아니라 턱수염을 깎을 수 있었다. 이런 사소한 관습의 차이도 서로간에 이질감을 갖게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여섯째, 분열의 결정적 사건으로 포티우스(Photius) 사건을 들 수 있다.

동로마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이그나시우스(Ignasius)를 파면하고 포티우스를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런데 로마황제 니콜라스 1세는 슬라브족 선교운동을 강화하면서 교세를 확장하는 포티우스를 정죄하였다. 이에 포티우스도 교황을 정죄함으로써 서로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일곱째, 정치적 문제이다.

11세기에 노르만족이 동로마를 침략했을 때 동로마는 서로마의 교황 레오 9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도움을 준다면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의 수장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레오 9세가 전쟁에서 패하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세룰라리우스(Cerularius 1043-58)는 로마의 정치적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고 로마가 영예에 있어서만 수위권을 갖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교황사절단인 훔베르트(Humbert)가 1054년에 소피아성당 제단에 교황의 파문장을 놓고 가자 세룰라리우스는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대주교의 지지를 받고 교황에게 파문장을 보냄으로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각자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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