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와 구속
* 다음의 글은 도서출판 "두루마리"에서 펴낸 「다시 보는 성경」에 있는 글입니다.
무단으로 복제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고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라는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피비린내를 자아내고, 성전을 "도살장"으로 바꾸어 버리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요구하므로 "푸주간 종교"(Religion of the Shambles)이며,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큰 반감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피와 우리 몸(생명)이 불가분의 관계이듯이, "그리스도의 피"와 성경도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성경에서 붉은 것과 관련된 단어를 빼 버린다면 성경은 죽은 책이 됩니다. 만일 붓에 붉은 잉크를 묻혀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자세히 읽어가면서 피를 말하고 있거나 피와 관련된 모든 구절들을 지워 버린다면, 남는 부분이 얼마 안된다는 것에 매우 놀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 성경은 아무 가치도 없는 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역사적인 부분들은 무의미하게 되고, 윤리적인 가르침은 무력해 질 것이며, 예언의 말씀들은 전혀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교리는 "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피가 없이는 "죄의 용서"도, "거듭남"도, "의롭게 됨"도, "거룩케 됨"도 "하늘"(천국)도, "옷을 씻음"도, "새 노래"도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려 28번이나 "어린양"이라 칭함을 받는 데, 이 칭호는 항상 그분의 속죄 사역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서 파를 제거해 버리면 속죄의 교리도 없어지고 맙니다.
I. 속죄(Atonement)
이 단어는 원래 "하나가 됨"(AT-ONE-MENT)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은 "둘이 되었고"(AT-TWO-MENT), 서로 간격이 벌어진 채 분리되었습니다. 속죄의 목적은 이 둘을 합쳐 다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은 법을 어긴 사람이나 혹은 그 대리자나 보증인에게 내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법은 아무 효력이 없게 되고 맙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그 형벌입니다. "속죄"란 정부의 행정부에 존재하는 예비규정으로, 법률 위반에 따른 형벌로부터 범법자를 사면하기 위해 공의롭고, 안전하며, 받아들일만한 근거 위에서 마련한 법률규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법"을 만드셨습니다. 그 "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시되, 동산의 각종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임의로 먹되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이에 대한 "형벌"은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창2:16:17).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 때, 그들은 그 "법"을 어겼고 또한 죽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을 통해 회복된 땅을 다시 채우시려 했던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창1:28).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어기지 않고서는 죽음의 "형벌"을 철회하실 수 없게 되셨고, 만일 자신의 말씀하신 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미래에도 아담과 하와는 그분의 말씀의 "참되심"을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아담과 이브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형벌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랑과 공의로 마련하신 대속자는 바로 자신의 아들 속에 계신 그분 자신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속사역은 즉시로 준비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받으신 것은 그로부터 400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러나 그 4000년 동안에 수소나 염소, 또는 흠없는 어린양이 히브리인들의 희생단(제단) 위에서 타면서 연기를 냈는데, 이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를 위한 사면이 없다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매 유월절마다 어린양의 피를 뿌린 것은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야 했던 분에 대한 암시였습니다(요1:29). 참된 희생물을 드릴 때가 이르자, 우리는 공의와 긍휼이 갈보리 언덕 위에 서서 변론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공의가 긍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4000년 전에 에덴 동산에서 이 세상의 죄를 위해 그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준 자가 어디 있느냐?" 그러자, 긍휼이 대답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올라오는 저 분을 보라." 그분께서 언덕 정상에 이르시자, 공의는 수천년 전에 언도했던 "채무증서"를 내보이며, 그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그 증서를 말소시켜 버리겠노라." 곧 희생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어린양"이 십자가의 희생단 위에 놓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가로대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셨을 때, 그분께서는 자신의 손안에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말소시켜야 할 그 "증서"를 쥐고 계셨습니다. 로마 군인이 그 손에 못을 박았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한 사도 바울의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또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어 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너희의 모든 범법들을 용서하사 그분과 함께 살리셨고, 우리를 고발하고 반대하는 손으로 쓴 규례들을 말소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사 제거하셨으며"(골2:13-14).
그 "채무증서"를 제하여 버리심으로 율법과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이 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이"가 되신 것입니다(롬3:26).
그러나 어떤 이들은 "무죄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질 수 있느냐?"라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오직 무죄한 사람이 죄 있는 사람과 결합하여 연대적으로 하나가 되어 그 죄인과 동일시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가난한 과부의 빚을 그 이웃의 백만장자에게 지게 하는 것은 공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함께 연대적으로 하나가 되어 그녀의 모든 의무를 떠맡는다면, 그는 그녀의 빚에 대해 공정하고도 합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으니, 이는 너희가 다른 분 곧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그분과 결혼하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으려 함이니라"(롬7:4).
이같은 연합을 통해 그분께서는 우리가 율법에게 빚지고 있는 모든 빚을 갚기 위한 "합법적인 해결책"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들에게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겪고 자신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24:25-26)라고 말씀하시면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이 겪으셔야 할 모든 고난의 당위성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는 단순히 "대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합하여 "연대적인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차없이 자신의 아들에게서 죄의 대가를 거둘 정도로 공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자로서 "우리 자신을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롬7:4). 다시 말해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들처럼 믿고 행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고"(롬8:1),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심판을 받았으며, 우리가 "죄"로 인해 받은 심판은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입니다.
속죄의 효능과 "대속적인" 특성은 강도 바라바의 이야기 속에 잘 예시되어 있습니다. 바라바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두 강도 사이에 서있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형벌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에게 그리스도와 바라바 둘 중 하나를 택할 권리를 갖게되자 그들은 그리스도를 택하였고, 그분은 바라바의 위치를 대신한 대속물로서 가운데 있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은 충족되었고, 바라바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만일 바라바가 그 날 갈보리로 가서 자신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보고 예수님을 죄에서 건져주신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였다면, 그는 속죄의 대속적인 특성을 이해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으로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으나 믿는 자가 된 후에는 다음과 같이 되었다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나무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는데, 이는 실제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형벌"은 결코 두 번 집행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무 위에서 자신의 몸에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셨다면(벧전2:24), 그 죄들은 더 이상 우리 위에 있지 않으며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나 우연이 아니라 미리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가 너희 조상에게서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생활방식에서 대속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의 피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한 가지 목적이 있었으며 갈보리와 십자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단순히 아버지를 증거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속죄의 범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속죄를 택함 받은 자들에게 만으로 제한시킵니다("제한된 속죄" 교리를 가르치는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을 지칭한 것임 - 역자 주). 이들은 속죄를 "상업상의 거래"와 같은 것으로 여기고, "너희는 값으로 사신 바 되었나니"(고전6:19-20)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합니다. 게다가 상업상의 거래에는 구매자와 판매자, 매매할 물건, 그리고 지불할 가격이 있어야 하므로, 하나님은 구매자이시고, 율법은 판매자이며, "택함 받은 자들"은 매매 물건이고, 그리스도의 피는 "구입한 가격"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상업상의 거래에서처럼 지불할 가격과 인도되어야 할 물품의 수량 및 품질에 대해서도 상호간의 이해관계가 있어야만 하므로, 속죄에 대한 이러한 "상업적인 견해"는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선택하시고자 하신 특정한 수의 사람들만을 구입하셨고, 또 정확히 그 숫자의 사람들만을 받을 것을 고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 100마리를 샀다면, 말들이 도착했을 때 정확히 100마리인지를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구입하고자 했던 것과 동일한 말인지 알아보고자 할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속죄를 "상업적인 견해"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가치를 택함 받은 자들에게만 제한시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몇몇 사람들만을 구원하시려고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치르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는 인류를 "죄의 저주"로부터 구속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위치에 두시려고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해물이시니, 우리의 죄들을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하심이라"(요일2:2). "화해"라는 말은 "화목케 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긍휼로써 온 세상을 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우리가 적이었을 때에, 그분의 아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은즉, 화해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더 그분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곧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 그분에 의하여 자기와 화해케 하셨느니라"(골1:20).
이로써 우리는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속죄가 온 인류를 위한 것이며, 온 인류를 구원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는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므로 이것이 "보편적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의 조건, 곧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일을 받아들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II. 구속(Redemption)
속죄와 구속이란 두 단어는 마치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사용됩니다. 이 두 가지 용어는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의 결과이지만, 시간과 행위와 관련하여 볼 때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구속이란 현재는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나 합법적으로 자신의 소유인 것을 되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소유물의 법률적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들은 후에 그분을 또한 신뢰하였으며, 그분 안에서 또한 믿은 후에 그 거룩하신 약속의 영으로 인치심을 받았나니, 이 영께서는 값주고 사신 소유물이 구속을 받고, 그분의 영광의 찬양이 되기까지, 우리 상속의 보증이 되시느니라"(엡1:13-14). 그러면 구속받아야할 소유물은 무엇입니까? 이것이야말로 바로 바울이 로마서 8:22-23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들뿐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를 소유한 우리 자신들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이로써 우리는 피조물과 인간에게 속한 어떤 것이 그들에게서 빠져나갔고 따라서 이것을 회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엇인지는 창세기 3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몸의 영원성과 땅의 상속권을 상실했습니다. 그 후 아담의 씨들이 받아야 할 모든 상속이 사탄의 수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스스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는 "친족"이 잃어버린 소유를 되찾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레25:23-24). 그리고 그 친족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으로 예비되었습니다. 친족이 되기 위해서 그분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처녀 탄생"으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속의 값을 치르셨는데, 그 구속의 값은 바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 자신의 피였습니다(벧전 1:18-2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때 값을 주고 사신 것을 아직까지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구속은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상당한 기간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구원의 날"이라고 부르며, 이 "구원의 날"은 지나간 1900년이 넘도록 오랫동안 연장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구속의 날"은 적어도 1000년 동안 지속될 것입니다. 또한 이 "구속의 날"은 죽어 있는 의로운 자들의 몸이 부활할 때로부터 시작하여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천년왕국 기간을 말함 - 역자 주).
몸의 구속
우리는 부활한 몸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감히 상상해 볼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셨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렴풋이 나마 그려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의 몸이 그분의 몸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2). 또한 바울은 부활에 대해 기록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한 몸이 어떠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는 것으로 뿌려지고 썩지 않는 것으로 일으켜지며"(고전15:42).
이것은 꾸밈이 없는 진실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썩어질 더러운 것으로 뿌려졌습니다. 바울은 이를 "천한 몸"이라고 불렀습니다(빌3:21). 이렇게 썩는 것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요? 그것은 죄가 구체화되고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썩지 아니하는 것으로 일으켜질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몸이 다시는 죽지 않을 몸과 결코 쇠하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무덤에서 나오며, 또 살아있는 성도들이 변화되어 영광의 옷을 입고서 공중으로 들여 올라가 자신들의 구속주를 만나는 날은 얼마나 기쁜 날이겠습니까?
2. "천한 것으로 뿌려지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일으켜지며"(고전15:43).
수많은 몸들이 추악함을 유발하는 죄로 말미암아 천한 것으로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이 모든 것을 변하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에 영광 가운데 일으켜지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몸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약한 것으로 뿌려지고 권능 있는 것으로 일으켜지며"(고전15:43).
죽은 몸은 약함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몸보다 더 무용지물인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 중 한 사람이 된다면, 그분께서는 이같이 생명도 없는 몸도 권능 있는 몸으로 일으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의 무덤을 헐어버림으로써 자신의 권능을 펼쳐 보이실 것이고, 부활한 몸은 새로운 시력과 청력과 기억력 등의 권능들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빛의 속도로 여행할 수 있고, 달려도 지치지 아니하며, 걸어도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4. "자연의 몸으로 뿌려지고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지나니"(고전15:44).
이 말은 우리의 "영적인 몸"이 영기성(靈氣性)으로 변화된 유령과 같은 구조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진 실질적인 몸이 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피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야말로 몸을 썩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한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과 같은 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부활한 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24:36-43). 지금 우리의 몸은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만, 그때에는 영적 세계의 법칙에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슬픔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뿐만이 아니라 황폐화된 피조계와 땅까지 구속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구속의 날"에는 이사야 11:6-8에 있는 바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 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람의 타락으로 인한 효과는 실로 광범위한 것이었습니다. 온 인류가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온 땅과 대기까지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너는 그것을 먹지 말라, 한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으니, 너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고, 너는 네 생애의 모든 날 동안 고통 중에 그것에서 나는 것을 먹으리라. 또 땅은 네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요."
여기서 우리는 "가시들"과 "엉겅퀴"들이 죄로 말미암은 결과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다른 성경구절들을 보면 동물도 고통을 받으며 땅도 죄로 인해 그 소산물을 내지 못합니다. 또한 죄로 저주받은 상태에서 영을 구속하실 분께서 가시로 된 관을 쓰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땅이 저주받은 상태에서 구속되고 땅의 외부표면은 불 침례를 통과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가시와 엉겅퀴들이 불로 태움을 받아 멸절되고, 모든 병균과 기생충, 죄의 결과로 인한 모든 것, 그리고 대기까지도 불로 정화되며, 또한 악한 영들도 제거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는 의가 거할 것이며, 그 위에는 하나님의 "구속받은 자"들의 본향인 "새 도시"가 놓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모든 부조화가 그치고 영원한 조화가 하나님의 전 우주에 걸쳐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아들이 죽으신 이 땅을 파멸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은 너무나 신성하고 거룩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십자가의 사역이 단지 인간의 혼의 구원만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몸의 구속과 더 나아가 땅의 구속까지도 포함해야 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