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과 음악, 합창, 감사

A. 음악과 찬양

Ⅰ.
音樂은 人間의 깊은 內部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音標化해서 만들어진 것을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느끼고 즐기는 것은 아니다. 느끼고 즐기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질서 속에 음표화 하여 나타내게 된다. 소리의 근본은 울림에 있고 그 울림은 질서(고른음)와 무질서(시끄러운 음)의 운동에서 시작하여 음악이라는 매개체 속에서 표현되어진다.


바로 음악은 질서(고른음)와 무질서(시끄러운 음)라는 요소가 적당히 결합되어져 표현되어지나 분명 그 질서 속에는 또 다른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이루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선율과 리듬이다. 이 선율은 질서 속에서 리듬과 함께 배합되어져 표현되어지는데 선율의 질서는 정적인 요소(선율) 속에 동적인 요소(리듬)를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것은 음악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가 되어 이 두 요소는 주·종의 관계에 있으나 함께 공존하여서 우리의 사고와 기억에서 선율을 느끼고 노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종의 관계에 있다하더라도 엄격한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협동적이고 필요로 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관계 속에서의 선율은 리듬의 흐름이 필연적인 것이다. 

 
이렇듯 음악은 이러한 질서 속에서 창조되어지고 전달되어질 때 음악으로써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주·종의 관계에서 벗어 날 때 즉, 질서가 바뀌어 나타나게 되면 가치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음악이 가지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音樂이 아닌 音惡으로써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질서가 바뀐 음악이 요즈음 너무나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여 말한다면 요즈음 음악은 이질서가 바뀌어져 동적인 요소에 정적을 포함하는 음악이 세상음악에 나타나고 이러한 요소들이 교회음악에도 파고 들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음악이 세속화가 되어지고 있다. 다시 말한다면 근본적인 질서가 없는 음악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음악은 선별하여 청취하고 표현되어져야 한다.

Ⅱ.
우리가 흔히 병을 놓고 예를 많이 든다. 병에다 어떤 내용물을 넣느냐에 따라 병의 사용과 이름은 달라진다. 이렇듯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도 무엇을 추구하고 삶의 가치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따라 사람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의 방향은 결정되어 표현하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발견되어야 하며 나타내져야 한다. 또 이런 모습이 되도록 생활하여야 한다. 이런 자의 모습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의미의 소리가 형성되어질 때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뜻이 우리에게서 나타내고자 하는 진정한 소리의 울림은 만들어지고 나타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질서의 회복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질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질서 속에서 창조하시고 또 인간을 창조하신 그 뜻을 이해하는데서 있을 것이다. 이사야 43장과 에베소서 6장 1-12절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노래하고 그를 선전하게 하려는 그 뜻, 그 소리의 울림이 질서로 표현되어지기 위한 성령의 열매 맺는 성도의 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Ⅲ.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창조하였던 음악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질되어 왔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질서가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 질서 속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작용함으로써 음악을 통해 물질의 변화와 나아가서는 우리의 마음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 사람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즉, 영의 소리요 영의 호소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의 깊은 내면에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향해 울려지는 영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영의 소리가 음악적인 질서 속에서 표현되어질 때 그 소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같게 된다. 이 가능성이 찬양으로 나타내어져야 한다.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고 또 음악을 만드셨고 그 것에 영을 불어 넣으셨기 때문이다. 

 
무질서한 음악을 듣게 됨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어떨까?
요즈음 이 사회는 혼탁한 사회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많다. 정상이 비정상이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을 하는 세상 윤리 도덕이 무너져가고 자기 중심적인 세상으로 돌변하는 세상 어느 철학자가 얘기했듯이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을 증명하기 위해 이 지구를 돌아 다녀 보았더니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라 점점 광기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한 말처럼 점점 무질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다. 인간의 감각의 한계는 이미 포화 상태가 되어버렸고 더 이상의 자극을 받기에는 핵 폭탄과 같은 자극을 받지 않으면 감각을 발휘하기에는 무감각한 상태가 되어버리지는 않은 지 우리의 감각과 감정을 점검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바로 질서가 바뀐 음악을 반복적으로 듣게 되므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음악을 통해 물질의 변화와 나아가서는 우리의 마음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되어지고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음악은 선별되어져야 한다.
교회가 사회와 똑 같다면 교회의 역할은 진정 어디에다 두어야 할까? 교회는 사탄과 싸워 이길 능력을 키워주어 이 사회의 혼란을 질서 있게 바로 잡아가도록 영적인 훈련을 교육하는 훈련장이어야 한다. 또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양에 음악의 사용은 혼돈하고 무가치한 무질서보다는 질서의 음악으로 드리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깨달아야 하며 찬양의 이유를 알아야 하며 이러한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음악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한 도구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B. 찬양과 합창

I.
우리가 창조된 것은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함에 있다.(사 43 : 21)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며 성경 소요리 문답 1번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업적을 기리며 찬양 드리는 일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전도하는 것, 교육하는 것, 봉사, 구제하는 것, 찬송을 부르는 일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결국 그를 찬양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계 5 : 9 - 14, 14장)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해야 하는 목적이 있듯이 노래하는 자들이 합창으로 찬양을 드림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하고 어떻게 그 목적을 달성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합창은 소리의 울림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소리의 울림은 목적을 지향하여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이 소리의 울림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표현 될 때 정신적인 긴장을 진정시켜주고 (삼상 16 : 14 - 17) 사람들의 마음을 정서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이 성도들에게 흐르게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인격에 하나님의 인격이 있기에 (창 1 : 27, 2 : 7, 골 3 :10) 합창에 의해 표현되는 아름다움은 하나님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으로 추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합창하는 사람들이 노래할 때에 나타나는 신체적인 움직임, 정신적인 움직임의 모든 것은 아름다움의 표현에 도움이 되도록 하여야 하고 나아가서는 합창의 과정 전체가 아름다움의 표현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지휘자, 노래하는 자(찬양대원), 듣는 이(성도)의 관계가 올바르게 유지되어야 한다. 이는 합창단(성가대)이 합창을 하는 것은 지휘자의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표현되어 성도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영향을 받으면 다시 하나님에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게 되는 일 - 아멘으로 화답하는 일(대상 16 : 36)- 에 동참하는 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이 서로 상대적인 관계에 있고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인격이, 인격들의 만남에서 합창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전달과 반응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양의 한 수단으로서, 중요한 가치와 역할을 얻을 수 있다. 그러기에 합창을 하기 위해선 이해와 양보하는 마음, 협동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위해 희생할 줄 알고 헌신하고자 하는 신앙 자세에서 이룩될 수 있다고 믿으며 이럴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오게 되며 음악적인 아름다움에 수반되는 상대적인 아름다움이 더 한층 나타나 최상과 최선의 하나님에로의 아름다움이 되리라고 본다.

Ⅱ.
결국 합창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름다움의 표현'이고 또한 그 아름다움은 정서의 긴장과 이완에 있다고 본다. 이 긴장과 이완을 표현 할 수 없다면 합창으로서 나아가서는 음악으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긴장과 이완을 위해 음악적인 상식을 떠나서 정신적인 표현이 있어야 한다. 이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영혼-마음 정신)자세에서 얻을 수 있다. 

 
음악은 인간을 떠나서는 생각 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정신이 건강하여야 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이는 하나의 곡을 어떤 마음의 자세와 어떤 환경에 따라 슬프게, 또는 즐겁고 기쁘게 부를 수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런 자세가 없다면 우리는 상상력 - 음악에서 감정을 느끼는 힘 -, 그리고 '음악' 그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음악은 인간의 정신 속에서 탄생하고 인간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음악으로서의 가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음악이 인간을 떠나서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각 할 수 없다. 결국 음악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찬양과 음악, 즉 합창으로서의 찬양은 하나님에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최상 최고의 방법이며 하나님이 없는 음악은 생각 할 수 없을 것이다. 

 
역대 상에서는 지도자 288인을 세워 훈련받은 4000명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였고. 또, 계시록에서는 14만 4000이 부르는 대 합창은 오로지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만을 찬양하는 대 합창을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예배에서 찬양이든, 아니면 어떤 형태의 찬양이든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궁극적인 찬양의 수단은 원칙적으로 찬양대에서 부르는 합창의 찬양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기 때문에 찬양대는 합창단으로서의 역할의 기능을 갖게 되지만 일반적인 합창단과는 달리 찬양대는 선택된 사람들에 의해 조직된 음악적 기관(신명기 18 : 1, 역대상 25 :)이요 아름다움을 표현하도록 하나님의 인격이 있는 성도들에게서 위임받은 기관이기 때문에 인격적이며 상호적인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인격이 있는 우리(찬양대원: 노래하는 자)가 성령의 도우심과 역사 속에서 그 뜻은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빌리면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 :15)"고 말하고 있다.


C. 감사와 찬양

1.
믿음의 결과는 찬양이고 찬양의 결과는 감사이다. 이 것을 다시 감사의 결과는 찬양이고 찬양의 결과는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감사할 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찬양이 우러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찬양 생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성경을 통하여 보면 하나님은 감사를 원하시고 계신다. 또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 받아야 할 마땅한 일이다(살전 5:18). 감사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주된 특징이다.(계 4:9;7:12;11:17)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고전1:4;골4:2), 어떤 상황에서도(빌4:6)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골3:17) 감사해야 한다. 감사를 소흘히 하는 일은 언제나 죄스러운 것이다.(눅 17:16; 롬1:21) 또한 감사는 죄에 대한 해독제와 같은 것이다(엡5:4) 

 2.
감사에 대해 구약과 신약을 통해 알아보면
구약의 경우 시편에는 '감사하며 찬송(찬양, 노래)하며'의 성경구절이 수십 번이나 나온다. 이렇듯 시편에서 특별한 기조를 이루고 있다. 감사와 찬송은 많은 연관이 있음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윗 왕은 일정한 레위 사람들을 세워 하나님을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려 했다'(대상 16:4,41;23:30) 감사의 행위는 이스라엘 신앙과는 뗄 수 없는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시편 42:4절을 보면 시온으로 가는 축제 행렬은 '기쁨과 찬송의 소리'로 공기를 뒤흔들었다고 표현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감사할 때 그 동기는 반드시 굳건한 믿음 위에서였다. 이 믿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여호와의 의로움과 성실함을 증명하는 힘찬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언약에 의한 사랑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감사로 응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감사는 언약의 율법을 순종하고자 하는 뜻을 잉태하는 모태이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감사는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감정이며 믿음의 호소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고 그의 행동에서 나오는 은혜를 받아들이며 영혼 속에서 그 은혜를 살찌게 하고, 세상에서 그것들을 증거 하라는 부름이기도 했다.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 주어졌고 복은 그의 능력을 통해서(골3:17), 그의 이름(엡5:20)으로만 베풀어 질 수 있었다. 감사가 있는 곳에서만이 참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다. 기도함으로써 감사했고(골4:2;빌4:6;딤전2:1), 감사를 잘하여 복음을 증거 했고(고전14:16-17)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살전5:18).


3.
감사는 역사 안에 일어난 것, 즉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유일하고도 정당한 반응이다. 따라서 감사는 신앙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은 남을 이해하지 않고는 일어날수 없다. 또 감사한다는 것은 바로 찬양을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그의 섭리와, 그의 이름으로, 그의 능하심으로, 그의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피조물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찬양이나 감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지 않고서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한다 하면서 감사할 줄을 모른다면 외식하는 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찬양이라 할 수 없다. 

 
감사한다는 것은 바로 찬양의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의 생활 그 자체가 곧 찬양의 생활임을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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