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음악의 역사적 배경

 

음악의 원 기원을 알지 못하고서는 음악의 목적이 온전히 달성될 수 없다.

또한 음악의 목적을 알아야 음악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 수 있게 되며, 음악이 바르게 연주되어야 음악의 본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이 원래의 목적대로 올바르게 연주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오락의 도구로, 혹은 어떤 욕망의 방법으로 사용되게 된다.8)



a.음악의 사전적 기원설


(1)다윈의 '자음도태설'
음악이란 성적 충동의 발원으로 동물의 음향에서 생겨났다고 하는 설.
음향통합=성적 충동에 기인
(2)스펜서, 헤르터의 '음악 언어설'
음악은 인간의 감정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음성의 고저 장단에서 기원되었다는 설.
음성통합=감정 변화에 기인
(3)발라세크의 '리듬 기원설'
(4)스톰프의 '신호 기원설'
위와 같은 음악에 대한 기원설은 너무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증명할 만한 자료가 없는 추상적인 것이다. 성경은 명확히 음악의 기원을 말해 주고 있다.9)




b.성경적 음악의 기원


(1)창조전 음악의 기원설
성경 에스겔1:24-25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에서 하나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세우시기 이전에 온 인류가 창조되기 이전에 인간이 아닌 어떤 영적인 존재를 당신이 필요에 의해서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그 영적인 존재를 천사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특수목적으로 창조하신 천사의 활동을 보면 음악이 그들의 특별한 직책이었음을 볼 수 있다. 천서들은 그들의 특이한 방법으로 특이한 소리로 신비한 음악, 극치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수종들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0)


엘 보스멘은 "태초로부터 하나님이 음악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했다. 에스겔28:13의 하반절에서 "네가 지음 받던 날에 너(천사장 루시퍼)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도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말은 소고와 비파를 연주할 수 있는 음악적 특수 달란트를 네가 지음을 받을 때 이미 네 속에 함께 넣어서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천사들의 속에 들어간 음악적 특수 기능과 재능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가? 그것은 천사를 창조하신 하나님 본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음악을 모르시는 분이 음악을 창출해서 천사들 속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음악의 절대적인 실체이신 것을 우주를 창조하시는 과정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 음악의 기본이 되는 리듬성 있게 음악적으로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 자체가 음악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는 네 찬송이시오, 네 하나님이시가 네가 목도한 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신10:21)"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음악의 절대적인 실체이시며 음악자체이신 것을 확신있게 선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음악의 기원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11)

(2)창조후 음악의 기원설
성경 창세기 4장 21절에서 "그(야발)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떤이는 학위 논문에서까지 흔히들 음악의 기원을 여기에 두고 논하기도 한다. 만일 음악의 기원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면 음악은 죄악의 산물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유발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여호와 앞을 떠난 가인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했으 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살인자의 자손이라는 죄의 산물로 인해서 사람들로부터 도외시 당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발이전에도 음악은 있었는데, 단지 유발이 기악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 뿐이지, 음악의 창시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



c.성경적 배경


야곱 당시에도 북, 수금, 등이 있었음을 성경(창31:27)을 통해 알 수 있으며, 현대 고고학이 입증하듯이 당시에도 성악과 현악, 관악, 타악 등을 포함한 기악이 그 종류대로 모습은 갖추고 있었다. 아담으로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 족장 시대에 있어서 그 기록 자체가 축약되어 있으며 나아가서 음악적인 기록은 매우 드물다. 그렇지만 성경 밖의 문화권에는 음악적으로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요셉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애굽에서 대 민족을 이루는 동안에 애굽의 음악을 배웠음을 시인하는 말이 된다.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너 애굽의 군병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 미리암과 함께 합창을 불렀다. 미리암이 소고를 잡고 나오니 모든 여인들이 그녀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며 함께 화답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였다. 이는 시적 구성으로 된 가사와 기악과 무용이 혼합된 종합예술 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의 노래와 함께 합창과 찬송가의 시작이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에 따른 출애굽과 더불어 시작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광야 40년간의 이스라엘의 음악은 나팔을 통한 전열의 행진, 통솔 등 군사용으로 쓰인 것 외에 특이한 사실은 교육용의 노래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 가르치게 한 사실이다(신32:1-43). 여리고를 정복할 때에는 7일간이나 나팔을 앞세워 불며 성 주위를 맴돌았다.13)


가나안 정복후에 사사들이 출연하던 신정시대에는 산당을 중심으로 한 선지 학교에서 선지자(랍비)들이 음악을 함께 연주하며 예언하였다(삼상10:5-6). 이 때에 선지자들은 이렇게 음악을 연주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황홀경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여 예언을 하였다. 이렇게 히브리 찬송은 그들의 역사의 직전에 따라 곡목이 수집되고 후대에 계승되어 발전되고 있음을 다윗 시대의 음악과 특히 시편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히브리 음악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실은 예배드릴때에 노래가 중요시 되어 대성가대를 조직한 일이다. 다윗은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로 약 사천명의 음악가와 성악가로 구성된 성가대를 세우고 아삽을 기악 지도자로 그나냐를 성악 지도자로 임명하였다(역대하15:16;16:4,37). 솔로몬 성전의 봉헌식 예배에서 장엄한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약 20만명의 나팔수와 20만명의 예복을 입은 합창대원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때로부터 성가는 그들의 학교에서 정규적으로 가르쳐졌으며 이 교육을 받은 자들은 모두 대가가 되었다.14)


그러나 이스라엘 왕조가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지자 성전은 훼파되었으며 음악가들도 포로가 되었다. 바벨론인들은 그 포로들의 음악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연주할 것을 권했지만 망국의 서러움 때문에 그들은 노래 부르기를 거부하였다. 그렇지만 포로 생활이 끝나고 귀환하자 성가를 다시 작곡하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흩어진 유대인(Dias-pora)들은 생활의 중심이 성전에서 회당으로, 제사에서 경전(The canon)으로, 제사장으로부터 랍비로 바뀌어졌다.15)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의 예배 음악은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큰 성가대에 의해 계속 되었다. 주로 남자와 소년들로 구성되었으며 간혹 여자도 끼여 있었다. 그 성가대원들은 모두 레위인이었으며 아주 정교하게 의식에서 연주했다. 이 때에는 각 요일마다 한 번씩 부르도록 지정되어 있는 시편이 있었다. (제1일은 24편, 제2일은 48편, 제3일은 82편, 제4일은 94편, 제5일은 81편, 제6일은 93편, 제7일은 92편)


그 밖의 시편들은 절기 등 특별한 행사를 위하여 지정되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이러한 시편가를 배워서 유월절 만찬 후에 부른 찬송은 아마도 할렐의 마지막 부분인 시편 95~98편, 이거나 혹은 시편 136편 이었을 것이다(마26:30). 당시의 음악은 구약의 히브리 음악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어느 관원의 딸이 죽어서 그 집에 들어 가셨을 때 거기서 피리부는 자와 훤화하는 자들을 만났다(마9:23)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구약의 욥기 30장 31절과 일치한다.16)


이와 함께 모든 성경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천상의 찬양 즉 천사들과 장로들과 구속받은 성도들의 찬양(사103:21,22;계14:2-5)등이 자주 나오는 점이다. 피로 값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늘과 땅,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막론하고 왕의 왕이신 어린양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17)



d.기독교음악의 형성


초대교회에서는 다윗 시대의 성전예배의 형식을 많이 따랐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예배에서의 음악은 교회역사의 시기에 따라 흥하기도 한다. 초대교회의 예배음악은 음운의 가사를 지닌 단성의 성악이 중심이었고, 유대교적인 것을 바탕으로 단지 문화 세계의 음악인 그리이스, 로마적인 음악과 접촉하면서 형성되어갔다. 특히 초대교회 에배음악에서 악기 사용과 찬송을 하는데 있어서 규제가 있었다. 초대교회 음악역사에서 예배시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18)


초대교회 문화가 희랍과 로마 문화의 심장부에 천천히 파고들자 옛 기성 문화의 붕괴를 두려워한 나머지 트라얀 노스는 앞장서서 잔악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박해로 자연히 교회는 지하 굴 무덤에서 예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는 로마 군인에게 발견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지도자들은 집회 장소를 수시로 변경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예배시에 있어서도 악기를 사용하거나 큰 소리로 찬송하는 것을 극히 삼가야 했다. 19)


초대교회에서는 예배시에 악기 사용을 회피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많은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서 악기를 연주함으로 예배 분위기를 소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20)

A.D.70년에 마지막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음악의 영광도 사라졌다. 그러나 수백년 이후 주후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는 밀라노 칙령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교회는 세력이 있는 특권층이 되었다. 교회당을 건축하고 예배의 형태도 정비하였으며 더불어 음악도 점차 수준을 더 하여 갔다. 교인들은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이 되어 성직자가 예배를 인도하면 평신도는 오로지 수동적으로 참가 하였으며 불행히도 성도의 자발적인 신앙의 표현인 회중의 찬송마저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16세기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약13세기 동안). 물론 찬양은 훈련된 성가대가 출연함으로서 도맡아 하였다. 또한 범람하는 이단적인 찬송을 막기 위하여 악기의 사용을 금하였고, 창작 찬송은 특별한 행사에서만 쓰인 정도였다. 교황 레오(440~461)는 수도원을 세우고 성가학교(Schola Canforum)를 설치하였다.21)


기독교 음악에 지대한 공헌을 한 교황 그레고리1세(590~604)는 수도하였던 579년 교황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7년간 파견되어 머므르면서 암부로스성가를 바탕으로 연구하였고, 교황 즉위후에는 암부로스성가를 중심으로 수정하고 보강하여 더욱 새롭게 음악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레고리 성가이다. 이 성가는 교송형식으로서 8개의 헬라 선법을 사용하였으면 경건하고 깊은 감돌을 준다. 그는 로마에 있는 성가 학교를 확대 강화하기 위하여 라테라노와 성 베드로 교회당 옆에 각각 건물을 세워서 성가대와 성직자의 공동 생활을 하도록 하고 나아가서 성가대원의 양성을 위하여 고아원에 배당하였다. 그레고리 성가는 7세기 말경 영국으로 전해졌고, 얼마후 8세기초에는 독일로 퍼져 나갔다. 샤를레망 대제의 통치하에서 로마 교회의 세력이 커지자 그레고리 성가는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나중에는 유럽으로 퍼져서 교회음악의 모범이 되었다. 22)


중세초기(8~10세기)에는 그레고리 성가가 발전하면서 한편 속창과 경시 또는 원시적인 다성 음악? 출연하였다. 그리고 로마네스크 시대(11, 12세기)에 이르러는 우수한 악전이 나와서 그레고리 성가는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당시 이 성가는 전 음계적이면서 율동적이었으며, 아주 차분한 정서를 자아냈고, 단성적이지만 독창이 아닌 제창으로 불렀다. 한데 지금까지 음악운동이 교회의 범주 내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소재를 다루어 왔는데 반하여, 중세 후기(13,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지금까지 다루지 못하였던 독립된 인간과 또한 자연의 아름다움 나아가서는 생의 쾌락을 다루는 신 예술(Ars Nova)이 등장 하였다. 이는 교회 음악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한편 다성 음악이 발전함으로 인하여 단순한 가창에서 복합 음악으로 다양하게 표현 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다.23)


e.개신교의 교회 음악


개신교(Protestant)라고 하면 보통 카톨릭 교회와 동방교회를 제외한 기독교를 총괄하여 일컫는다.

 이중에서도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와 루터 교회등은 예배 의식에 있어서 음악의 도입 방식이 카톨릭 교회와 유사하며,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성결교회 등만이 다르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카톨릭과 개신교의 역사적인 분기점이 되었고, 이것은 교회음악에도 영향을 끼쳤다. 처음에는 옛 선율에 독일어가사를 붙여 부르다가 루터 자신의 신념을 교회 음악에도 반영시키어 그의 지도하여 돌일어 회중 찬송 코랄이 만들어 졌다. 당시에 회중 찬송은 카톨릭과는 달리 개신교에서는 보편화되었으며, 개혁가들은 시적인 가사에 적당한 곡을 붙여서 일반 회중들이 쉽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더욱이 신앙적 자각을 하도록 의도하였다. 24) 당시 찬송의 형식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루터의 영향하에서는 여러 사람의 저자에 의하여 이루어진 종교시 등을 노래하는 형식을 취하였고, 칼빈의 영향하에서는 시편가(Psalmony) 즉, 시편의 성구를 가사로 노래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렇지만 루터가 회중 찬송에 끼친 영향은 칼빈이 시편가에 끼친 영향에 비해 절대적이었다. 개신교 음악은 찬송에 카톨릭교회처럼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 나라 말이나 지방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특별히 성직자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종교개혁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대중적이며, 종교적인 노래들을 사용하여 루터는 대중들의 신앙을 고취하고자 시도하였다. 또한 옛 라틴 찬송을 독일의 복음적인 찬송으로 사용하였다.


 루터는 칼빈과는 달리 카톨릭에 대하여 적극적인 배척을 하지 않았으며 예배 의식에 있어서도 폐지가 아닌 정화와 개혁이 그 목적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독일이세 개혁된 예배 찬송의 프로그램을 규정하였다. 여기서 그는 에배시에 라틴 음악의 사용을 장려하였다. 그러기에 17세기에 선교음악으로서의 특샏을 갖추기전에는 신교와 구교의 음악이 장소와 뜻을 달랐어도 독일내에서는 같은 소리를 내었다.25)

당대에 영국의 종교 개혁은 유럽 대륙의 독일, 프랑스, 스윗, 화란등과 같이 평민에 의한 것이 아닌 왕실에 의한 것이므로 혁명적인 성격이 강하지 않았다. 따라서 영국의 개혁자들은 별개의 교회를 세우거나 전통적인 교회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16세기 후반에는 교회에서 영어가 통용되고 이에 성가대의 시펴낙와 칸티클이 에배에 도입되었다. 당시 영국 개신교는 앤덤(Anthem)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예배 의식 자체가 앤덤의 작곡에 영감을 주었고, 예배의 품위를 위해서도 연주를 하게 되었다. 초기 성공회의 앤덤은 로마 카톨릭의 모테틈(Motet)와 같이 무반주였다. 성공회 예배의 앤덤은 반주 또는 무반주의 짧은 합창으로서 예배의식의 일부라기보다 기도서를 위해서 사용되었다. 라틴 모테트의 후신으로서 앤덤은 나중에 헨델에 의하여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26)


바로크 시대인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걸쳐서는 기보법의 발전과 악기 발달에 힘입어 기악 음악이 대단한 규모를 갖추었다. 따라서 교회음악도 기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예배만을 위해서가 아닌 특별한 연주 행사를 위해서 작곡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독일의 쉿츠와 바하, 영국의 퍼셀과 헨델 등이 있다. 이중에 바하는 세속음악사에는 물론 교회음악사에서도 매우 유명하였다.


바하의 음악은 크게 성악과 오르간음악으로 구분된다. 그는 295개가 넘는 칸타타와 130개 이상의 코랄 전주곡과 5곡의 수난곡과 세속음악을 작곡하였다. 바하의 교회음악은 깊고 지적이며, 장엄하여 듣는 이를 압도한다. 그의 오르간 작곡기법도 거의 완벽하며, 마태 수난곡은 전세계로 퍼져서 그의 명성을 더하였다. 기악곡이 늘어나면서 작곡가들의 관심은 관계조 전조할 때에 생기는 음색의 대조에 있었다. 전조할 때에 명확한 조성감을 갖기 위해서는 평균율의 체계가 요구되었다. 평균율이란 한 옥타브를 가능한 통일된 12개의 반음으로 정밀하게 나누어 놓은 것이다.


오랫동안 작곡가들은 평균율에 의한 작곡을 시도해 왔는데 결국 그의 평균율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과 푸가에서 바하는 평균율에 의한 완전한 가능성을 입중하였다. 헨델은 칸타타보다 더 규모가 큰 "메시아"같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였다. 그의 음악에는 합창의 효과적 안배와 인간의 기능적 한계에 대한 배려, 가사의 무드에 대한 민감성이 잘 나타나 있다.27)


이러한 거장들의 없적은 특출한 찬송작가들이 나오는 길을 닦아 놓았다. 이 작가 중 대표적인 인물은 영국 찬소악의 아버지인 왓츠, 웨슬레, 뉴우톤, 니일 등이다. 특히 왓츠는 시편을 문자적으로 부르는 것은 시대적으로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시대적 상황에서 기독교인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사상과 경험과 감정에 근거한 찬송을 불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영국 국교회 음악이 시편가에서 찬송가로 전환하는데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18세기 후반의 음악에 있어서 고전주의 시기는 기악과 오페라가 성행하였다. 이 시기는 인간과 인간의 개성 그리고 인간의 행복이 지대한 관심사인 계몽주의를 포함하고 있다. 이 사조는 교회를 전반적으로 공격하면서 철학, 과학 등의 세속적인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리하여 교회음악은 일반회중과 거리감이 있는 높은 예술성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교회 음악이 예배적인 특징을 잃어버리는 한편 세속 음악이 이제는 예술적으로 월등한 위치에 서게 되자 교회음악의 품위를 보존하고자 크렙스, 켈너 등 많은 음악가가 노력하였다.28)


19세기 들어서면서 교회음악의 특징은 전통음악의 답보와 복음찬송의 보급이었다. 이때 개신교는 부흥운동과 선교에 주력하며 교파의 분열로 통일성있는 발전을 할 수 없는 형편에 있기도 하였다. 유럽의 교회들이 전통적인 찬송을 답보하고 있을때에 미국의 청교도 후예들은 대중적인 찬송가를 대량 생산하였다. 교파별 찬송가가 출판되고 무디 등의 부흥 운도으로 복음찬송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20세기 미국에는 공동예배의 의의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으며, 합창과 오라토리오 협회가 생겼고 상당 수준의 오르가니스트 조합도 형성되어 장족의 발전을 가져왔음은 물론 내일의 교히음악에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현대는 전통적인 찬송과 대중적인 찬송이 교차되는 시기로서 개신교의 신앙과 예배에 적합하며 전통성있는 교회 음악을 확립하여 독특성 있게 발전시켜야 할 시기이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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