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제를 자주 일으키는 9가지 공통요소



서론 

목회자들이 내놓기 꺼려 하는 사안이 바로 자기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목회가 어렵고 교회 안에 크고 작은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남이 아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리더십이 망가지는 느낌이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한 교회의 문제는 다른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반사 이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보이게 보이지 않게 남의 교회 문제를 즐기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외부 사람이 집안 일에 대하여 어쩌쿵 저렇쿵 소문이 나는 것이 한 교회를 담임 하고 있는 목회자에게는 그리 기분 좋은 사안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교회 문제가 일어나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 아니든 언급 되는 모든 말들은 상대편을 비난하는 일에나 지지하거나 동정하는 사람들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 되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 문제는 감춘다고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문제가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 때는 이미 늦다.[1] 해결하기 그만큼 힘들어지거나 좋은 해결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갈등은 불과 같다. 그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문제가 일어나면 그 문제가 일어나는 초기에 불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화재가 일어나게 되고 그 불길을 잡지 않으면 언젠가 타고 재만 남는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교회 분쟁의 한 복판에 있었다. 아픈 경험이만 그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성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오래 동안 교회 분쟁에 대해서 연구하고 관찰 해 온바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 문제들을 상담하고 또 행정적으로 도와 주어야 하는 위치에서 수년 동안 봉사해 오고 있다. 그 동안에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언하거나 혹은 직접 수습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또 조정적 처리 과정에 깊숙이 관여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회 문제가 잘 일어나는 부분들을 몇 가지 관찰 할 수 있었다. 이미 필자가 연구한 경험을 책으로 내 놓았기 때문에 이리 저리 연락하여 전화를 걸어오는 일이 빈번했다. 어떤 때는 익명으로 어떤 때는 실명으로 연락이 왔다. 그러나 연락이 오는 대부분은 해결하기 힘든 과정으로 옮겨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사회와 같이 잘 준비 된 기관을 통해서 예방 교육과 중재 훈련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관찰을 통하여 얻어진 경험과 이론적인 연구를 통하여 간단하나마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본론에서 논의 하고자 하는 문제들은 일반적으로 목회를 해 온 목회자들에게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일 수 있다.  목회를 오래 한 목회자 일수록 그러한 일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단편적으로 알고 혼자 만이 아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때문에 이러한 목회 현장의 경험들을 정리하여 보는 것은 목회자들이나 일반 평신도 지도자들에게도 좋은 자료로 활용 될 수 있으리라 생각 된다.  아울러 교역자나 평신도들이나 함께 지혜를 모아 문제를 해결해 나가므로 서 목회자의 사역이 갈등해결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낭비 하기 보다 본래의 사명에 정진 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게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아무튼 본론을 통해서 교회 문제를 잘 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기로 한다. 
 

용어의 정의 

본론을 전개 하기 전에 용어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  흔히 우리는 문제가 있다는 말과 갈등이 있다는 말을 섞어 쓴다.  이 양자는 같이 쓰이기도 하고 구분하여 쓰일 때도 있다.  이 두 단어는 구분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문제(Problem)”란 일의 처리 과정에서 “수단,” “방법,” “목적,”에 대한 의견차이(disagree)이다.[2]. 때문에 이 의견 차이가 해결이 되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사안이다.

그러나 갈등(Conflict)은 그렇지 않다. 갈등은 문제를 대하는 감정이다. 갈등은 “문제”에서 상대방을 적으로 보거나 상대방을 문제와 동일시하는 감정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문제의 해결은 쉽지 않고 상대방을 없애는 것이 곧 문제의 해결로 발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갈등은 문제를 상대방과 동일시하는 단계이다.  거듭 말하지만 문제의 해결은 상대방을 없애거나 파괴하는 것으로 발전한 단계를 의미 한다.    

갈등으로 심화 되면 폭발 수 있다. 그 힘은 다이너마이트 같아서 어떤 일이 벌어질 찌 예측을 할 수 있다. 심지어 죽이는 것도 불사 한다.  그러면 갈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갈등을 없앨 수는 없는 것일까? 갈등은 없앨 수가 없다. 갈등은 인류와 더불어 공존해온 정서이기 때문이며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만 갈등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갈등이 주는 유익도 있기 때문이다.[3] 심지어는 갈등은 교회 일이 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갈등이 없이는 교회 발전이 없으며 갈등은 교회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 하는 사람까지 있다.[4] 그래서 갈등은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갈등은 없앨 수 없기 때문에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논거이다. 본론에서는 우선 문제를 제시는 것으로 제한 하려고 한다. 그 가운데에서 교회 안에서 빈번히 일어날 수 있는 목회자와 교인들 더 축소 한다면 일반 평신도 지도자들과의 사이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사안을 밝혀 보고자 한다.  그리고 용어에 있어서 “문제”는 곧 “갈등”으로 발전 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같이 사용 하는 것을 전제로 논 하고자 한다. 
 

논의의 한계 

교회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요인은 어디에나 있고 다양하다. 이에 대한 이론도 많이 있고, 사례 연구도 많이 있다.  그 모든 이론들이나 사례들을 여기에 모두 담을 수 없다.  보통 갈등 이론에서 갈등하면 세 가지로 구분한.[5] 첫째로 대내적 갈등(Intrapersonal Conflict), 둘째는 대인적 갈등(Interpersonal Conflict), 그리고 셋째로 본질적 갈등(Substantial Conflict) 혹은 집단 갈등(Group Conflict)으로 나눈다.  또 지도자와 집단과의 갈등은 임무 갈등(Role Conflict)이라고 해서 “한 사람 대 집단”간의 갈등 관계를 말하기도 하며 그 외에도 갈등의 학자에 따라서 많이 있다.

그럴 경우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은 이 세가지가 다 포함 될 수 있으나 사안이 교회 전체의 문제로 번져 나갈 수 있는 갈등은 “대인 갈등”과 “집단갈등”이라 할 수 있겠다.  목회자를 가운데 두고 네 편 내편으로 나뉘거나 아니면 목회자편과 비목회자 편으로 나누어 싸울 수 있기 때문에 대인갈등과 집단 갈등의 범주 내에서 논의해야 하여야 할 것이다.  이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들은 무엇인가? 다양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목회자와 교인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데 국한 시키려 한다.

갈등이란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안이다. 그 인간 관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에 대한 원인 분석도 매우 많다. 그러나 목회자와 일반 교인들 사이의 문제에 초점을 둔다면 유형적으로 분류 하여 (1) 인물 중심의 갈등(Person centered Conflict) (2) 원칙 중심의 갈등(Principle centered confkcit) (3) 문제 중심의 갈등(Issue centered conflict)으로[6] 분류할 수 있다. 목회자와 교인들간의 어떤 문제가 이슈가 되느냐? 위의 세가지 유형 가운데 하나에 해당 될 수 있다.  

따라서 목회자와 교인간의 갈등은 그것이 일부이든 전부이든 아니면 목회자화 함께 한 그룹과 그 반대 구름이든 목회자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국한 시켜 논의 하려는 이유는 어떠한 갈등이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결국 그 책임을 논할 때에는 목회자에게 그 화살이 돌아가게 되므로 본론에서는 “인물 중심”의 카테고리 안에서 논의 하되 사안에 따라서는 원칙 중심 갈등이나 문제 중심의 갈등을 고려 하면서 보고자 한다. 말하자면 목회자와 교인들간의 갈등으로 국한시켜 논해 보자는 것이다.

또한 가지 제한은 본론은 일반 교회들이 참고 할 수는 있으나 어디서나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민 교회 및 대의 정치 체계를 갖춘 교회 혹은 회중 정치 체제를 가진 교회들을 주요 관심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론에 들어가 보자.
 

교회 문제를 자주 일으키는 아홉 가지 요소
 

첫째 목회자에게서 이성관계에 문제가 일어날 때 

목회자가 최소한 세 가지 문제만 없으면 그 목회는 성공한 목회라고 할 만큼 세가지 금기 사항이 전해 내려 온다.  그것은 “이성문제”“금전문제”“명예 문제”이다. 누가 한 말인지 불분명 하지만, 최소한 이 세 문제만 없으면 좋은 목사요, 자기 목사에 대하여 불평하는 평신도 지도들에게 이 세 가지에 허물이 없으면 사람은 다 똑 같은 것이니까 그 목사를 잘 모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 같다. 사실 “이성 문제”처럼 교회 안에 자주 등장하는 문제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최근 몇 년 간에 일어난 일들을 보자.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 혹은 대형 목회 목회자들이 여성 문제에 관련 되어 교회 문제로 비화 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바 있고, 강간 죄로 피소를 당한 이름 있는 목사들, 또 위자료를 주어 해결하였다거나 아니면, 사이비 교주와 더불어 목회자와 성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매스컴에 심심치 않게 나타난 바 있다.   이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는 목회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사안 가운데 하나이다. 목회자는 이성 문제에 있어서 깨끗해야 한다. 이 사안은 목회자라고 해서 면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끝 없는 자기 극기가 필요하다.  심지어 목회자에게 소위 말하는 “꽃 뱀”의 유혹까지 있다 하니 이 문제는 아무리 조심을 해도 지나치지 않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발생 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한 경우 교회는 지혜롭게 처리해 나가야 피해를 극소로 줄일 수 있다.  미국 교회의 경우 어떠한가?  미국 장로교회의 경우 총회나 대회 심지어 노회까지도 이 문제에 대한 윤리 규정이 있고 정책이 있다.  문제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도 있다.  일단 이러한 행위가 나타날 때 목회자를 쉬게 하고 완전한 조사가 끝날 때까지 사역을 중단 시킨다.  만일 사실로 판명이 될 때에는 사임시키고 상담 치료를 받게 한다.  그리고 피해자를 향한 처리 과정도 있으며 이 문제는 교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 문제에는 아주 엄격하게 적용 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대책이 별로 없을 뿐 더러 사임 하지 않고 계속 버티면서 싸우기 때문에 사회 문제로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기껏해야 교인들의 이동이 있고 그러한 소문 가운데서도 목회는 계속 되는 경우도 본다. 이성 문제에 관한 한 목회자는 교인들이 오해를 할 만큼 이상한 행동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심방 가는 일에도 사모와 가든지 아니면 나이 지긋한 권사님과 동행 하라고 배우지 않았는가?  이민 교회에서는 미국 사람들이 하는 가벼운 포옹(Hug)하는 문제도 필요할 때는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분별력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악수나 안수기도도 마찬가지다. 예배 후에 보통은 문 앞에 서서 교회 문을 나서는 교우들과 악수 하며 인사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여성 교우와 악수 하면서 손바닥을 가운데 손가락으로 긁었다고 해서 문제 된 일도 있다. 무슨 표시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이 문제가 된 예도 있다. 아예 악수를 안 할 수도 없지 너무 한다고 생각할 찌 모르나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신학교 목회 상담 시간에 담당 교수로부터 안수 기도를 할 때에 본인에게 물어 보고 승낙하면 하여야 한다고 배웠다. 교회라는 곳은 벼라 별 사람들이 다 오는 곳이니까 잘못하면 성추행으로 피소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낸 헌금을 도로 달라고 고소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안수 기도는 공개적이어야 하고 사사로이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선배들은 목회자가 명예 문제로 교회가 시끄러워 지면 그 직책을 사임하고, 금전 문제로 그 교회가 시끄러워지면, 그 교회를 사임하고, 여자 문제로 시끄러워 지면 인간을 사임하라고 까지 충고했다는 것을 목회자라면 누구든지 다 알고 있는 사항이다.  

    좌우간 이성 문제는 교회 문제가 일어나는 가장 민감한 사항이다. 그래서 교회가 분쟁에 휘말릴 경우 목회자에게 이성 문제가 있다는 식의 악선전으로 이 문제는 또한 목회자가 악용 당하기도 하는 사안이다.  그러니 항상 조심 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목회자가 재정에 지나치게 관여할 때 

재정 문제에 관하여 논의 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목사가 청빙을 받아 교회로 부임 할 때에 어떠한 생각으로 가게 되는 가에 대한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의견은 다르다.  목회자는 교회의 청빙을 받아 교회에 부임 할 때는 “소명”(called)으로 생각하나 아무리 주의 종으로 모시고 복종한다고 해도. 교인들은 목사를 “고용”(hired)한 것으로 생각한다.[7] 그래서 실제적으로 소명과 고용 사이에 항상 긴장이 있다. 자기가 개척하여 성장한 교회의 경우는 좀 다르긴 하나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목사를 “고용”한 것으로 생각한다. 목회자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 스스로를 고용 당한 사람으로 처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인들은 자기들 수준 이상의 사례를 받거나 책정할 경우 이를 환영 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목사는 가난해야 하는 것으로 안다.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교회의 돈은 목사가 다 가져 가는 것으로 오해 하기도 한 게이스도 있다. 목사가 교회의 재정을 마음대로 한다 혹은 교회 재정이 거의 다 목사 생활비로 들어간다는 식의 생각이 교인들에게 인식 돼 버리거나 목회자가 교회 재정을 자기 마음대로 쓴다고 하는 소리가 나오면 이미 교회는 시끄럽기 시작하는 징조이다. 이에 대하여 이론이 있을 수 있다. 목회자는 목회의 총 책임자이기 때문에 재정이 돌아 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주장과 목사는 목회만 하고 살림은 교인들에게 맡기라는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둘다 일리가 있다. 후자는 교인 입장에서 본 것이고 전자는 목회자 입장에서 본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 보다 어느 쪽의 행정이 하나님의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하는데 효과적인가의 선택에 따라서 하면 되지 않을까?  아무튼 교회 문제를 잘 일으키는 요인으로 볼 때에 재정 문제에 목회자가 관여 하는 것은 안 하는 것 보다 낳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뿐이 아니다. 목회자가 목회자가 자기 입으로 봉급을 올려 달라고 하거나 생활이 어렵다고 호소를 하면 은혜 없는 목사로 보기 시작하고 목사가 돈만 안다고 불평한다. 이점에서 볼 때 갈등을 최소화 하거나 예방하기 위해서는 미국 교회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 미국 교회의 경우를 보면 주류 교단에 속한 교회들은 비교적 목사의 사례비에 대하여 목사 자신이 직접 교회와 부딪치기 보다는 교단적으로 규정 되어 있다. 개 교회가 아닌 상회에서 이 문제를 전체적으로 다루며 지역에 따라 물가 상승, 교육비, 생활비 등을 고려하여 사례비의 최소 액과 최대 액의 기준을 정해 놓고 엄격하게 적용한다.

만일 상회가 정한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파 타임으로 일하게 한다. 아예 부임할 때에 청빙계약 (terms of call) 을 만들어 그대로 실행하고 해마다 사례비의 조정에 따라 다시 작성 되며 상회의 감독을 받는다. 다만 미국 교단에 속해 있는 한국 교회들만 이 사안을 잘 안지키는 경향이 있다. 미국 장로 교회의 경우 노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여름철에 모이는 노회의 한 회기는 아예 목회자의 사례(Compensation)을 다루는 회의를 한다. 목회자의 연금과 의료 보험, 그리고 그 지역의 생활비 등을 감안하여 각 교회 당회로 하여금 노회가 정한 기준을 지키도록 하며 지키지 않을 경우 청빙 계약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직접 당회나 교회 일반 신도들과 부딪치지 않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인들을 축소해 가는 조치 이므로 상대적으로 그 사안에 대해서는 문제가 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는 훌 타임과 파타임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적게 받든 많이 받든 풀 타임으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주는 대로 사는 것이 목회자의 길이고, 청빈한 것이 목회자의 덕으로 생각하는데 다행한 것은 생활이 어려우니까 사모가 나가서 일을 하거나 어떤 경우는 아예 목회자에게 세속 일을 파 타임으로라도 하여 생활 해 나가도록 호혜를 베풀기도 한다. 그러나 사나 죽으나 사모도 목사도 일하지 말고 양들의 젖만 먹으라고 강요하는 교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목회자가 사례가 적을 경우에 사례 문제로 인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는 목격하지 못했다. 항상 많이 주는데 문제가 있었다. 미안하기 때문이거나 목회자도 목회자 가족도 일하면서 교회의 재정에 보탬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회자가 사례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하면 문제는 복잡해 지기 시작하며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재정 문제는 목회자의 재정 관여가 아닌 다른 문제들로 인하여 교회 안의 리더십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많이 일어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특히 재정 집행에 대한 과정에서  재정은 투명성을 유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의 재정이란 남아 돌아도 문제 또 재정이 압박을 받아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남아 돌면 그 재정 때문에 헌신 생활이 약해 지기도 하고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혹은 무엇에 쓸 것인가 혹은 왜 남아 있는가 등등의 “의견차이” “과정””목적”등등에 대한 의견 차이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그 반대로 재정 압박이 오면 어떻게 하든 교회를 부흥시켜서 재원을 확보 하거나 아니면 희생 정신을 발휘하여 더 헌신적인 생활을 하여야 하거나 하는데 보통은 가장 지출이 많은 목회자의 사례를 깎으려 든다. 실지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목격했다. 목회자가 비참하게 되는 순간이다. 또한 이는 목회자를 내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되기도 한다. 목회자가 목회를 잘했으면 재정 압박이 안 올 터인데 목회를 잘못했으므로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모든 교회 안의 재정의 최고 결재권 자로 군림하는 목회자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그들이 사용하는 돈은 엄청나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러다가 횡령죄로 고소 당하고 유죄 판결을 받는 예를 보지 않는가? 과연 투명했다면 그러한 일을 당할까?

 
셋째 목회자의 이임과 취임의 과도기 과정이 순리적이지 못할 때 

원로 목회자 한 분이 목회자의 만남과 이별을 이렇게 표현한 일이 있다. 교회를 떠날 때에 첫째는 밀려 나가는 형, 둘째는 자기발로 걸어 나가는 형, 셋째로 들것에 실려 나가는 형이 있다고 했다. 목회자는 초청 받아 올 때에도 또 그 교회를 떠날 때에도 항상 조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간 지사이다. 친구로 만났다 원수로 헤어지거나 원수로 만났다 친구로 헤어지거나 한다.  목회자에게는 기쁨으로 왔다가 아픔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다. 만남과 이별에는 항상 분노와 슬픔이 있다. 북미에서 매 5 분마다 목회자 한 사람이 교회를 사임한다고 한다. 그것도 월요일 날 아침에 떠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주일날 제직회 혹은 당회에서 교회 리더싶들과 싸우다가 좌절하고 밤새 고민한 다음 떠나기로 결심하고 월요일 아침에 사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주일날 회의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목회자도 있었다. 교회 문제로 식사 중에 삼장 마비를 일으켜 유명을 달리한 목회자도 있었다. 월요일 아침은 목회자들에게 쉬는 날 뿐만이 아니라 우울한 날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미국 장로교에서는 목회자들을 위한 “월요일 아침”이라는 포켓용 잡지가 출간 되었고 “월요일 아침”이란 제목을 부친 것은 바로 마음이 우울한 “불루 먼데이”(Blue Monday)에 목회자들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의 잡지라고 한다.  이 잡지는 몇 년 전에 마지막 호를 내고 현재는 나오지 않는다.  월요일은 목회자에게 쉬면서 주일날 일들을 되돌아 보며 일주일을 준비하는 날이면서 가족과 함께 휴식하는 날이지만 정말 월요일을 월요일답게 지키는 목회자가 몇이나 될까?  주일날 마치지 못한 뒤치닥 거리 하는 날이기도 하면서, 주일날 속상한 일을 겪었으면 슬프고 외로운 날이기도 하다.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가?  목회자가 마음이 아파 슬피 울면서 떠나거나 아니면 교인들이 아쉬워하며 눈물로 환송하여 떠날 때나 목회자가 오고 가는 일은 교회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변화의 기간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떠날 때와 또 새 목사가 올 때에도 문제의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가령 밀레도에서의 바울처럼 장로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울면서 헤어지는 목회자가 몇이나 될까?[8] 대부분은 알게 모르게 견디기 힘들어서 떠나는 것이다.  목회자가 어디 가면 어쩌겠는가? 같은 목회를 할 텐데 구태어 이리저리 이사 다니는 것을 원하는 목회자는 드물 것이다.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고서야 목회자가 이동하는 것은 대부분 타의에 의해서다.  아쉬움의 눈물과 기도로 헤어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목회자들은 과연 몇 사람이나 경험하고 있는가?  빨리 나가 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등 떼밀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일이 다반사이다.  목회자가 좋은 곳으로 떠나도 문제 밀려 나가도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이 이 과도기 기간이 중요하다. 왜 그런가 하면 일단 목회자가 떠나면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은 이별 시에 겪는 심리적 현상이 일어난다.[9]  사람이 죽으면 “왜 그리 일찍 돌아 가셨나?” “내가 잘못해서 일찍 가셨다,” 혹은 “고생만 하시다 가셨다,” “돈이 없는 것이 원수이지,” 혹은 “고생만 하실 바에는 잘 가셨다고 애도하기도 하고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교역자가 떠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분노” “슬픔” “시원함“과 같은 복합된 감정들이 교인들을 지배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떠나면 교인들의 감정 가운데는 “우리를 버리고 저 좋은 곳으로 간다”는 식의 “분노”와 “고생만 하시다 가신다” 혹은 “그 목사 가서 속 시원하다”는 등의 “슬픔”과 “기쁨”이 같이 작용한다. 이런 복합적 감정이 회중 안에 공존 한다. 심한 경우 어떤 이들은 왜 목사님이 떠나게 되었는가를 비난 하는 “희생양”을 찾게 된다.  “누구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 혹은 그 집단은 비난을 받게 된다.  개인이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당회와 같은 리더싶들이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갈등이 조장 될 수 있다.  또 그 희생 양은 고립되기 시작하고, 자기나 일부 구릅이 공격을 받고 고립 되는 줄 알면 역 반응이 일어난다. 그런가 하면 목회자가 떠나 갈 때에 “난 아무개 때문에 갑니다.” 혹은 “아무 아무개들 때문입니다,”라는 말을 흘려 보낸다. 그렇게 해서 목회자가 떠난 원인이 교회 안에 누구 혹은 어떤 집단이라고 비난 하며 긴장과 갈등을 조성해 놓고 가는 목회자들도 보았다. 그리고 떠나서도 계속해서 간섭하며 말을 흘려 내 보내는 이들도 있다.  교회를 생각지 않고 자신의 서운함을 그런 식으로 풀어버린다.  그러면 계속해서 남아서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게 되어 문제가 항상 잠재 되어 기회만 오면 반격을 하게 된다.  그래서 급기야는 교회 문제로 비화 되어 그 후임을 모시는 문제에도 어려움이 생기게 되는 경우가 경우가 종종 있다. 목회자는 있어도 화해자로 떠나서도 화해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원로 목사가 떠날 때와 후임 목사가 부임 할 때에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문제는 중요한 사안 가운데 하나이다. 이 둘의 사이가 나쁘면 그것이 교회 문제로 비화 되거나 심한 경우 교회 분열을 가져 온다.  교단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은퇴할 시기가 가까워온 목회자는 당 회와 협의 하든 아니면 독단적이든 후임자를 생각하게 된다.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와의 관계가 원만하고 좋은 후보자를 고르거나 아니면 아예 지명하는 경우 조차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접지명(handpick)한 사람 조차도 전임 목사와 불화가 일어나 교회 분쟁을 일으키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봐 왔고 세상 법정에서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아예 자식을 데려다 놓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예 세 물림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또한 대형 교회의 경우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 된다.  모두들 성서적이라고 강변하며, 우리가 좋아서 그렇게 하는데 남들은 말 하지 말라는 식이다. 아무튼 모양도 아름답지 못하거니와 과연 신앙적이며 교회를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는 처사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 비지네 스나 사기업과 그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와의 관계가 아름다운 모습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오래 동안 힘든 목회 생활을 하고 애착이 가며 애정이 가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은퇴 하면서 명예롭지 못하게 되어 물러나면서도 불명예스럽게 교회를 떠나는 일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는 서로 협력하여야 피차 유익이지 서로 배척하면 피차 손해 볼 수 밖에 없는 관계이다. 설사 서로 배척하다가 갈라섰다 해도 목회 하는 평생 동안 두 사람 다에게 불명예와 아픔의 기억을 가져다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단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미국 장로교회의 경우 목사가 은퇴하면 교회에서부터 일정한 거리에서 거주하도록 권하며 담임 했던 교회도 출석하지 못하게 한다.  어떠한 경우든 상담, 결혼 주례, 혹은 장례 주례 등 모든 일은 현재의 담임 목사의 허락이 있거나 초청에 의하지 않으면 법으로 못하게 되어 있다.  평생을 두고 목회 해 온 교회에 못 오게 하는 것은 매정스러울지 모르지만 교회는 상처를 받지 않고 여전히 사역을 진행 할 수 있고 그리스도는 높아지게 되는 것이므로 더욱 현명한 일인지 모르겠다.

 은퇴 한 목회자가 강단 아래서 설교를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아무리 마음이 넓은 목사라 할 찌라도 신경이 쓰이고 교회가 평화로울 때는 몰라도 교인들과 접촉이 있다면 얼마나 불편 하겠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러다가 섭섭한 감정이 들면 자연히 후임 목사를 비난하게 되고 결국 오래 목회한 원로 목사와 친숙한 관계에 있었던 교인들은 말을 듣게 되어 있고 결국 교회는 문제에 휩싸이게 되며 심할 경우 아예 목사가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 버리게 되어 교회는 하나 더 생기는 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하나님은 그래도 손해 보시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름다운 일은 못 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를 하다 더 세우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넷째로 목회자가 인격자로서의 정직성을 상실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목회자의 인격이다. 교인들은 목사가 완벽에 가까운 인격자가 되어주길 바란다. 무엇 보다도 정직해야 한다. 교인들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으며 일단 교인들이 속임을 당할 경우 그 교회에서의 생명은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목사에 대한 인격적 기대, 그러한 기대가 무너질 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인격이란 목사의 품위, 스타일, 처신, 행동, 태도 등을 포함한다. 목회자에게서“목사답지 않다는 말이나“목사님이 그럴 수는 없다””혹은 목사가 형사 같다,”는 말 등이 흘러 나온다.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그러한 말이 나오는 것일까?  일반 교인들에게는 목회자는 이래야 한다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당장 목사 같지 않다고 불평한다.  목회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문제가 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이래야 된다는 처방 된 기대(Prescribed expectation)[10]는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교인들은 항상 목회자가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 이길 원한다. 말하자면 무골호인(no-bone-fish)가 되길 바란다. 개성이 강해도 충돌하기 쉽다. 그래서 목회자가 인격상 결함이 있으면 반드시 문제가 끊일 날이 없다.  그리고 그 문제는 결국 목회자와 교인간의 갈등으로 번지고 배척 당해 그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목사에게는 무슨 힘 보다 도 인격에서 나오는 힘이 가장 강하다. 그래야 교인들이 따른다. 순종 안 하면 망한다는 식으로 영적 공갈을 하여 교회 분위기를 잡아 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시적인 순종은 있을지 몰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따라서 목회자를 모시는 일은 아주 다양한 경로를 거쳐 소개를 받고, 추천을 받고, 가족 사항을 알아보고, 과거의 이력을 조회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미국 장로교회의 경우 그 과정은 아주 복잡하고 길다.[11]  교회가 공석일 경우 임시 목사를 세워 놓고 적게는 6개월에서 1 여 년 정도의 긴 과정을 거친다.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고, 한번 모시면 은퇴할 때까지 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미국 교회의 경우 한 사람의 목회자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많은 물질과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목회자를 만드는 목회 학 석사(Master of Divinity) 과정은 그래서 가장 장학금이 많다.

한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기회를 주고[12], 대학에 들어가고 나중에 신학교로 연결 시키는 프로그램들이 많다.  신학교에 들어가려면 당회의 추천을 받아 당회의 지도 아래 자질을 인정 받아야 하며 매년 보고가 노회로 가며 다시 노회에서는 3 년간 신학교 외의 훈련을 시키고, 심리 테스트 등 여러 단계를 거쳐가며 그 자질과 인품을 평가를 받고 마지막 단계에서 그 자질이 인정을 받으면 후보생이 되고 청빙을 받으면 비로소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그렇게 해도 문제가 많이 일어나는 데 비해서 우리 한국 교회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하루 아침에 소명을 받았다고 해서 신학교에 가고 서둘러 목사 안수를 받는다.  미국 신학교에 다니는 한국 신학 생들의 경우 미국 교단에서 안수 받는 일이 어렵고 시험이 까다롭자. 한국 계통의 교단에 가서 쉽게 받으려는 이들도 더러 나오는 것 같다. 꼭 대학을 나와 신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무디와 같은 사람은 학교에 가지 않은 사람이었는데도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었다. 그러나 우리가 다 무디는 될 수 없지 않은가? 훈련을 많이 받을수록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다섯째 회자의 리더싶 스타일이 독제적이고 폐쇄적일 때, 

흔히 말하기를 목회자가 너무 강하면 안 된다는 소리를 목회자 사회에서 듣는다. “그 친구 너무 강하더니 결국 그렇게 됐구먼,” 하는 말을 들을 때 보면 목회자에게 있어서 강성이미지는 목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강한 목회자 일수록 독재적 리더십 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리고 독재적 리더싶은 현대 교회에서 가장 좋지 않은 리더싶이다. 그럼에도 선호 하는 이유는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민주적 리더싶은 설득해야 하고 심방해야 하고, 이해 시켜야 하는 등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 된다. 그러나 독재적 리더싶은 싫으면 그만 두라는 식으로 밀어 부치기 때문에 가장 쉬운 지도력 가운데 하나이다.  간접적 독재적 리더싶을 행사하기도 한다. 자기 주변에 자기 좋은 사람으로 장벽을 치고 행정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교회를 운영 하는 행정 체계가 한 사람이 한 교회의 통제권을 쥐고 있거나 혹은 소수의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을 때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목회자가 세운 교회요, 그렇기 때문에 그 목회자를 따르는 사람들로 목회자를 옹호하고 있거나 목회자가 담장으로 사용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데 그 목회자를 옹립 하는 세력으로 구성 된 교회의 행정은 그들이 목회자를 옹립하는 꼭두각시 같은 추종자들로 구성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주인 어른”과 “관객”으로 구성 되든지 간에 문제가 일어날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아예 그런 줄 알고 교회를 출석하다가 그것이 싫어서 다른 교회로 옮겨 가거나 아니면 그 세력과 싸우다가 그 소수의 사람만 남겨 놓고 집단으로 교회를 옮겨 가거나 갈라져 다른 교회가 새로 탄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독재 스타일의 교회에는 집단으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수가 년 중 행사와 같이 일어난다.

    그러나 목회자가 세우지 않고 초빙 된 경우라면 어느 교회고 그 교회를 운영해 나가는 소수의 내 그룹이 있다. 이들은 직분이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 모든 교회 일에 영향력이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소위 개척 멤버(Founding Member)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현상을 본다.  이들과 부딪치는 불을 보는 것과 같이 앞길이 뻔하다.

   그러나 평신도 쪽에서도 이러한 폐쇄적인 파워 체계를 가질 수 있다. 소위 이 교회는 “아무개 교회” 혹은 “아무개네 식구들 교회”로 주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은 목회자를 제외 시키고 자기들끼리 할 수도 있다.  이런 세력 블록의 형성은 고참 순, 재정적 책임을 지는 몇 사람” 교회 다닌 햇수로 끼리끼리 모일 수 있다.

   목회자에 의해서 조종 되는 폐쇄적 파워 체계는 자기 자신들이 제외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강한 도전을 받게 되고 피차 방어적인 태세를 취한다. 상호간에 긴장이 있다. 그리고 상대방의 실수를 즐거워한다. 공격의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계 속에서 목사를 중심 한 파워 체계의 외 구릅은 내 구릅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 힘을 쓰게 되고 내 구릅은 방어하기 위해 급급하게 되어 결국은 한 집단의 인사이더 와 아웃 사이더 게임이 된다. 이러한 경우 목회자가 어느 쪽에 서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도 교회의 운명도 결정 된다. 
 

여섯째 목회자가 설교를 교회 문제 해결의 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목회자는 설교 하나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설교는 목회자의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것 다 잘 못해도 설교 하나만은 잘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 된다.  여기서 논의하고 싶은 것은 설교를 잘한다 못한다에 문제가 일어나는 일보다 많은 경험이 없는 혹은 경험이 있다 손 치러라도 차짖 잘못하면 설교를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문제가 깊어지면 깊어 질수록 문제와 관련 없는 설교를 하는 것이 문제를 더 확대 시키지 않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보통 교인들은 “설교로 깐다”고 한다. 심한 경우 목사에게 대들어서 “목사님 그것을 설교라고 합니까?”라고 항의한다.  아니면 설교 중에 퇴장하는 일이 일어나고, 과격한 경우 설교를 방해 하기까지 한다.  설교 중에 큰 기침을 한다던가, 종이에다 무엇을 가지고 낙서 한다든가, 딴전을 피우거나, 설교에 대한 간접 반응을 하게 된다.  설교를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고 문제는 만나서 대화로 풀던지 문제 해결 방법을 통해서 풀어가는 것이 문제를 더 복잡 하게 만들지 않은 지혜가 될 것이다.  설교로 풀으려고 할 때에 교인들은 “나보고 하는 소리구나” 혹은 “나를 내 쫓을려고 발악하는 구나”로 받아 들인다.  설교가 발악으로 들리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그 골치 아픈 사람이나 집단이 떠나면 좋은데 안 떠나고 목회자를 내 보낼 때까지 버티게 되며, 설교 내용을 매번 메모하여 두었다가 몇 날 몇시에 목사가 무슨 말을 했다고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판하며 공격의 빌미로 삼기 시작하면 그 설교는 이미 설교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고 무슨 말, 무슨 설교를 해도 트집을 잡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계속 갈등을 부채질 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설교로 갈등을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일곱째 목회자가 성급하게 종전의 것을 뜯어 고쳐 나갈 때 

   한 교회에 부임하면 한 삼년 동안은 있는 것을 변경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하라. 고칠 것이 있으면 그 이후에 서서히 진행 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습관에 익숙한 동물이다.  보수적이라 할까 변화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역사를 통해 도전을 많이 받아와서 그런지 모른다. 사회적인 도전이나 내적인 도전이나 도전을 막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통이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 하고 반문한다. 개혁 하는 교회라고 배웠어도 개혁에는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새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보수다”의 자세를 견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해 오던 일과 가지고 있던 사상에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고 그것으로 인해 입을 피해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개혁하는 과정에서 오는 부담과, 개혁으로 인해서 오는 미래가 불투명하지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보수적이다.

그러한 모습은 가장 간단한 일부터 시작한다.  목회자가 은퇴를 하거나 아니면 타지로 임지를 옮겼다. 새로 온 목회자가 개혁의 이름으로 주보를 뜯어 고치고 교회의 행정을 뜯어 고친다. 이럴 경우 대부분 저항을 받게 된다.  일단 교회에 부임하면 그 교회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전통 같은 것을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안들을 무식하고 서둘러 해 오던 것을 변경 시키면 반대에 부딪치고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많다.  고치더라도 서둘러서는 안 된다. 심지어 주보 하나 한 줄까지도 고치는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교인들이 새것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니면 서서히 고쳐나가야 하지 급작스런 변화는 문제의 소지가 된다.  그래서인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change)에는 갈등이 따른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13] 그것은 예배 순서를 바꾸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피아노를 어디에 놓느냐 그리고 교회를 지어야 하느냐 아니냐의 모든 변화에는 갈등이 따를 수 있다. 항상 변화를 가져올 때에 목회자는 문제로 비화 되는 것 까지도 염두에 두고 계획 실천하는 것이 현명하다. 말틴 마티(Martin Marty)의 말대로 역사의 발전은 그레이셔(Glacier) 법칙과 아블란치(avalanche) 법칙이 있다고 했다. 목회에도 적용 되는 말이다. 역사의 변화에서 빙하가 서서히 녺듯이 오는 변화가 있는가 하면 눈사태와 같이 갑자기 들어닥치는 변화가 있다고 했다. 목회의 변화는 글에이셔 법칙이 훨신 더 갈등을 덜 일으키게 한다
 

여덟째 목회자가 일반 평신도 리더십 과의 의사소통 라인이 두절 될 때 

의사 소통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잘 잘못 간에 의사 소통이 두절 되지 않고 있으면 문제는 덜 일어난다. 그러나 의사 소통이 잘 안 됐을 경우 불만이 일어나고 불신이 일어나며 오해를 낳게 된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서 한 교인이 한 장로에게 물었다.  목사님이 그러는데 교회 부흥회를 한다면서요?  그러나 미처 목회자가 이 장로에게 그런 이야기나 계획을 전달하지 못했을 경우 그 장로의 대답은 두 가지 일 것이다. “그래요? 목사님이 하시는 일이니 차차 알게 되겠죠”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소위 장로라고 세워 놨는데 나한테 얘기도 안하고 마음대로 한다는 생각을 하거나 무시 당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만을 토해 낼 것이다. “우리 목사님 하는 일이 항상 그 모양이야? 장로는 왜 세웠는지 모르겠어!” 이러한 반응이 나온 다면 그 장로에게 협조를 받기는커녕 언젠가는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의사 소통은 너무 잦아도 문제요, 너무 없어도 문제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과 소통” 및 “저 소통” 역시 문제라고 지적한다.[14]  너무 사사 건건이 말하다 보면 목사가 가볍다고 말을 들을 것이요, 너무 말을 하지 않으면 무시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을 안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 사람이 싫어지면 외면하고 말을 안하게 된다. 말을 안 하게 되면 오해를 낳고 오해는 계속해서 갈등을 심화 시키기 때문에 그런 때 일 수록 만나서 이야기 하는 것이 좋다. 
 

아홉째 목회자가 교회 안의 문제들을 방관 하거나 잘못 관리 할 때

세상 천지가 문제이다. 이 문제 때문에 세상이 발전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 가운데서 세상이 발전한다.  교회 안이라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교회도 세상에 터를 두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때문에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목회 일 수도 있고 행정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 되어가는 것을 볼 때 성취감도 얻게 되고 관계도 좋아진다.  때문에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하여 민감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교회의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교인끼리 문제가 있다고 가정하자. 자기들끼리 해결 할 수도 있고 자기들끼리 해결하지 못하면 누군가가 해 주어야 한다.  인간 관계는 얽혀 있어서 교회 안에 한 개인과 다른 g나 개인의 문제가 단 둘이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확대 되거나 얽힐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목회자는 본인이 할 수 없으면 평신도 리더 싶을 통해서 혹은 교회 안에 그런 문제를 전담하여 함께 처리해 나갈 수 있는 기구 같은 것을 두어서 혹은 당 회나 집사 회를 통해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교인들 간의 문제에 관여 할 때에 어느 편을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갈등이 발생할 경우 “권위의 힘”을 빌어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하기 때문에 ‘목사님도 그러더라,” 혹은 ‘사모님하고도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그 분도 동의 하더라,”하는 식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한 사람을 잃거나 양쪽 다를 잃거나 아니면 양쪽 다에게서 원망을 살 수 있다.  그러한 문제들이 사안이 큰 것이라면 급기야는 목회자 축출 운동으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결론 

문제 만을 나열 해 놓았다. 이외에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교회 안에서 잘 일어날 수 있는 문제가 달라지거나 더 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홉 가지로 요약한 이유는 그래도 빈번하다고 생각 되는 사안들을 선택한 것이다.  

   문제가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주어진 지면을 가지고 논 할 수 없다. 다만 “문제를 알면 답이 보인다”는 원리를 생각하면 위에서 논의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문제로 등장하지 않도록 피해가는 수 밖에 없다. 아니면 그 문제들을 최소화 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으며 더욱 더 좋은 방법은 교회 문제란 전염병과 같아서 사전에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전염병이 만연 되어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예방 조치는 가장 좋은 문제 해결 방법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때에는 해결 방법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기 때문에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자신이 해결하는 방법, 상호 간에 해결하는 방법, 제 3 자에 의해서 해결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단, 예방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또 갈등과 문제가 없는 곳은 없으니까 갈등을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최소화 하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갈등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갈등은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은 굉장한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를 부정적으로 파괴하는데 사용되지 않도록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어떤 목표로 행로를 바꾸어만 준다면 교회에 큰 역사가 일어나고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은 교회 일이 되게 하는 중요한 길이며, 갈등이 없이는 발전이 없다. 그러므로 앞서서 말했듯이 교회는 갈등 속에 자랐다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위기는 기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끝으로 이 분야에 대하여 더 깊이 연구하고자 한다면 이 관계의 연구소나 도서를 많이 읽고 웍샆이나 세미나에 참여하여 갈등 해결의 중재자 교육을 받으면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안내는 필자의 저서에서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참고하기 바란다.

 

참고 도서 :
 

1.       Hettenlocker, Keith Conflict and Caring, Grand Rapids : Zondervan Publishing, 1988

2.       Leas, Speed Church Fights: Managing Conflict in the Local Church.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3

3.       Malony, H. Newton Win-Win Relationships: 9 Strategies for Settling Personal Conflict without Waging War,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4.       조남홍, 교회싸움: 교회 내의 갈등과 그 관리론, 선교문화사: 서울, 199

 

Need to develop in conjunction of pastor’s leadership : 사모의 교회일 참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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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미 밖으로 알려져 캠페인을 벌리고 있는 단계는 전문가들에 따라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갈등을 좋게, 창조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 파괴적으로 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갈등의 단계를 지진과 같이 진도측정(Richter Scale)에 비유해 측정하는데 이 단계는 Code 6.0-6.9에 해당 되며 이 수준이 되면 갈등이 발생했을 때에 좋은 해결은 기대 못하는 수준이다.  자세한 것은 Sam Lenard, Mediation: The Book, (Evanston: Evanston Publishing Co. 1994)의 pp 38-42를 보라.

[2]H. Newton Malony, Win-Win Relationships: 9 Strategies for Settling Personal Conflict without Waging War,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6.

[3] Speed Leas & Paul Kittlaus, Church Fights: Managing Conflict in the Local Church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3), 35-41.

[4]Harvey Seiffert, “Keeping Church Controversy Creative (Philadelphia: Dept. of Church and Society, UPUSA, 1972) 4.

[5]Speed Leas & Paul Kittlaus, 32-35.

[6]Keith Huntenlocker, Conflict and Caring (Grand Rapids: Zondervan, 1988), 83-92.

 

[7]Rediger, Clergy Killer & Killer Clergy, 53.

[8]행 20:36-38

[9]이점에 대하여 PCUSA의 Manual, on Calling a Pastor, 10-12를 참고하라

[10]조남홍, 교회싸움: 교회 안의 갈등과 그 관리, (선교문화사: 서울), p. 128f

[11] PCUSA 의 “The call of Pastor”의 매뉴얼을 참고해 보라.

[12] 최근 미국 장로교회 신학교들의 경우 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신학교를 개방하고 체험하게 하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예를 들면 Burning Bush “같은 프로그램을 들 수 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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