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교회의 무속화 현상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온 이후 토착화 과정에서 무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교 초기 한국의 무속이 기독교 전래에 일정 부분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 1백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의 무속화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 기독교 본질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무속화 위험수위 넘어

 

기독교와 한국의 무속에 대해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지적 가운데 하나는 한국의 교회들이 무속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지적은 물론 한국교회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 일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라 할지라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말씀을 배우고 전하며

주안에서 지체된 성도들 간에 교제를 나누며, 주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곳이다

그러나 오늘 일부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러한 정통 교회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오늘날 일부 무속화 된 교회의 교인들은 목사가 마치 무당인양 생각하고 목회자가 재난을 추방하고 복을 빌어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샤머니즘이 한국기독교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 김창주 목사는 “(무속화 된 일부 한국교회) 교인들은 일정한 자기 관할권이 있는 지역의 전속 무당인 단골무당이 한 달에 몇 차례씩 자기 단골 가정을 방문하는 것과 같이 교역자의 심방을 고대한다.”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는 것을 예배드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굿에 참여한 구경꾼 같은 태도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이기적인 신앙이 급기야는 교회분열의 원인이 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샤머니즘을 연구한 학자들은 또 무속이 교회에 끼치는 영향으로 카리스마적인 목회자를 곧잘 예를 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당은 종교적 신비체험을 가진 자로서 일단 강신무로 인정되면

그 권위는 신만큼이나 절대적이어서 모든 일이나 마을 행사 등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다.

 

특히 이 같은 현상은 고대의 제정일치 시대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났는데 한국교회에서도 일부 목회자들이 카리스마적이요

다혈적인 모습과 권위를 가지고 교회의 모든 일을 독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섬기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군림하고 다스리는 독선의 신적 권위자로 자처하는 모습은 민속신앙의 영향이라는 주장이다.

 

이들 학자뿐만 아니라 뜻 있는 목회자들은 한국교회가 무속화 되어 가는 것에 크게 염려하고 있다

이들이 염려하는 것 가운데 관심을 끄는 것은 한국교회의 대형집회와 부흥회이다

한국교회의 대형집회와 부흥회는 민속신앙의 부락제내지는 무당의 단골판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무당이 굿하듯이 부흥사를 불러다가 광신적인 집회를 여는 것은 기독교 푸닥거리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불의 사자’, ‘은사의 종’, ‘신유의 종으로 불리 우며 그 부흥회의 메시지가 회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 축복에 있으며, 부흥회의 목적이 회개운동이 아니라 교회건축 등 타목적에 이용됨은 민속신앙의 심성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일부 교회들의 기복신앙

 

한국 전통 신앙 가운데 특히 무속이 기독교에 끼친 악영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복사상을 꼽는다

기복신앙을 문제 삼는 이들은 대체적으로 무속의 기복사상이 종교를 주술적으로 변질시켜 많은 폐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공신력을 얻지 못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한국 교회가 기복사상의 늪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복을 바라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에서 기복신앙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바칠 헌금을 복 받기 위해 바치는 제물처럼 생각해서 많이 받치면 그만큼 많은 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교회출석이나 교역자 대접, 교회의 여러 가지 봉사가 다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의 감사, 감격의 표시라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얻기 위한 보상의 수단으로 드리게 하고 있다.”(이장식. '한국교회 어제와 오늘’)

 

특히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교회의 식구들의 복락을 비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대학입시를 위한 특별기도회일 것이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거의 모든 교회가 특별기도회를 갖는다. 심지어 ‘100일 기도회를 열기도 한다. 새벽기도회가 성황을 이루는 것도 바로 입시철인 11월이다. 신도들은 오직 자식의 합격을 위해서 매달리는 것이다. 개신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헌금 부분에서도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신광철. '기복주의’)

 

한국교회가 기복주의에 빠지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기복사상은 무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무속신앙의 기복사상은 철저히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특징이다. 무속신앙에는 정신적인 복의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후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무속의 기복사상이 그대로 기독교에 유입됐다는 것이다.

 

복을 위해서 신을 믿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물질적인 응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헌금하는 것 등이 바로 무속신앙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속의 기복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믿는 사람들이 복을 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의 기복사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복 빌기가 자기 자신에 치중해 있다는데 있다.

 

 

개인 영혼구원에 집착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개인화 되는 경향이 짙어만 가고 있다

도무지 다른 사람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내 자신, 내 가족, 내 교회만 잘되고 복 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타인을 위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정통적인 기독교의 신관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무속에서 신은 도무지 타인과 함께 하는 신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기독교도 철저하게 개인과 함께 하는 신이 되어가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신과의 관계를 수평적인 아닌 나와의 수직적이고 종적인 관계로 생각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는 개인 영혼구원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사고는 교회분열의 원인이 되고 배타적인 교회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비체험 지나치게 강조

 

무속이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교회 교인들 신앙양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무속적인 경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는 하나가 바로 신비체험이다. 일반적으로 무속신앙은 강신체험과 엑시타시를 근간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양태에는 이와 같은 무속적인 요소가 짙게 배여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신비체험과 에시타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성령의 사역과 은사가 크게 변질되었으며

마치 무당의 강신체험이나 신비체험 같은 간증이 교회에서 환영받게 되는 이상풍조가 생겨나게 됐다는 지적이다.

 

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서 성령체험을 했다고 하는 교인들의 대부분이 성령체험의 증거로

손끝이 떨리고, 진동이 오고, 몸이 화끈거리며, 불을 느끼고, 방언을 말하며

환상과 환청을 그 예로 들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무당의 강신체험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일부 교회에서는 이러한 체험이 있어야 은혜를 받은 것이며

감각적인 느낌을 가져야 성령을 체험한 것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무속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가운데 또 한 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비윤리성(非倫理性)이다

무속에는 한 마디로 말해 가치나 윤리성이 없다

한 가지 가치의 기준이 있다면 다다익선뿐이라는 것이 무속을 연구한 학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무속에서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존재하는데 선신(善神)은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신(惡神)은 재앙을 준다고 믿는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선신이라도 대접을 잘하지 않으면 재앙을 줄 수도 있고, 악신이라도 잘만 대접하면 복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무속에서 선악 악은 윤리적인 규범이 되지 못하고 다만 물질적인 축복이 선과 악을 구분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그 선신과 악신의 구별이 모호하다. 따라서 선과 악은 윤리적 규범이 못되고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국기독교는 선교 초기 한국의 전통신앙인 무속과 끝없는 싸움을 벌이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왔다.

런데 어느 사이 이 땅의 복음이 뿌려진 옥토에는 하나 둘씩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예배시간에는 열광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자신의 잘못을 잘도 회개하지만 예배 후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한국교회 일부교인들 중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옥황상제나 염라대왕같이

천상이나 혹은 사후에 가는 어떤 곳에 있는 신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기도나 찬송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무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일부 한국교회 교인들이 믿는 신은 기독교 본래의 성서적인 삼위일체 신관에서 많이 이탈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무속에 깊이 빠진 한국교회 일부 교인들의 신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관을 성서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각각 따로 생각하여 성부는 한국의 민족의식 속에 계속 전해져 내려 온 최고 신 개념인 하느님으로 보고, 성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해 주는 무당적 개념에서 이해하려고 하고, 성령은 이신하여 엑시타시를 경험하게 하는 샤머니즘적 신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이 땅에서 공신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루빨리 한국교회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속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양적인 성장에만 매달리지 말고 이제는 질적인 성장을 위해 고민해야할 것이다. (기독교 신문 )

 

 

일부 교회들 무속화 현상 2

 

기독교뿐만 아니라 한국에 들어와 있는 모든 종교는 무속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독교의 경우 무속화 현상이 기복신앙과 연결되어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기독교에 침투해 있는 무속적인 요소를 찾아내어 제거하고

기독교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속신앙이 갖고 있는 몰역사적이고 비윤리적인 측면을 알아보고

이것이 기독교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분석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하겠다.

 

 

뿌리 깊은 혼합주의

 

무속, 즉 샤머니즘은 한 마디로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규정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유교나 불교 등과 같은 우리의 전통 종교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무속은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라고 할 수 있는 단군신화에 이미 토테미즘 등과 같은 무속적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은 이를 잘 말해 준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우리 민족이 외래종교를 받아들이는 정신적 근저에 무속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나 유교의 경우,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속과 자연스럽게 융합, 일종의 혼합주의(Syncretism)의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불교가 지배종교였던 고려시대에 무속적인 색채가 진한 팔관회가 유행했던 것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정착된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오래 가뭄이 계속되면 왕이 직접 기우제를 올리곤 했던 것은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지배계층 역시 무속적 습성에 깊이 침잠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무속은 종교적인 현상이면서도 우리 민족 문화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근대 이후 이 땅에 전래된 기독교 역시 이와 같은 무속적인 문화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기독교가 무속적인 요소를 담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의 정서로 볼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가 이와 같은 무속적 심성을 개혁 내지 정복하고 건전한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기보다는, 그 심성에 영합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토착종교의 제의 형태나 신화 체제를 흡수하기는 했지만 유일신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야훼종교의 특수성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것과는 전혀 반대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인홀드 니버가 말한 이른바 문화 변혁자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라, 불건전한 문화에 영합하는 모습을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무속이 우리 민족의 가장 기초적인 종교적 심성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무속적인 요소를 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는, 한국 기독교의 모든 문제들이 바로 무속적인 요소들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속이라는 타 종교 자체를 무조건 비판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부분은, 무속이라는 부정적인 종교현상이 곧바로 한국 기독교의 부정적인 요소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한국 기독교는 무속과 영합하면서 무속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기독교에 옮겨다 놓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무속화 된 한국 기독교에 대해 비판을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기복신앙·보수성의 근원

 

그렇다면, 무속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무속을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신과의 교통이 가능하다는 샤먼(무당)이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주술이나 제의를 통해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가져오게 하는 종교현상을 일반적으로 무속, 혹은 무교(巫敎)라고 부른다고 보면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속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한다

무속의 목적은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부르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란 다산(多産)과 풍작(豊作) 등 한마디로 풍요로움이다

무속이 갖고 있는 부정적 요소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먼저 무속은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부름에 있어 모든 책임을 천지신명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의탁한다.

 

우리 모든 생활의 길흉화복은 우리가 개척해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천지신명 혹은 다른 신에 의해 운명적으로 지워지는 것이다

그 신적 존재를 잘 대접하면 길하고 잘못 대접하면 망한다

인간의 주체적인 책임이란 없다

말하자면, 윤리의식이 결여돼 있을 뿐만 아니라 운명에 대해 의타적이다.

 

또한, 역사는 자연의 순환에 의해 반복되는 결실을 그 정점으로 한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사람이나 육축이 후손을 많이 낳는 것과, 농사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얻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의 목표가 없다. 그저 현실에서 많은 것을 얻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역사의 진보는 없이 현실에 안주하며 평안하면 된다는 지독한 현실주의요 보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바르게 하려는 자기개혁의 노력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범신론(汎神論)을 근간으로 하는 무속적인 정서가 우리 민족에게 있었기에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속의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은 기독교 역시 무속과 같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현실적인 종교로 받아들인 측면이 강하다.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일부 목회자들은 대중들의 이러한 정서에 쉽게 영합, ‘샤먼과 비슷한 중재역할을 자임했다

심방이나 안수기도 등을 통해 복을 빌어준다든지, 부흥회 등을 통해 병 고침의 기적을 일으킨다고 자랑하는 것 등이 이와 같은 행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를 무속적인 정서의 바탕에서 받아들인 것은 대중의 몫이었겠지만

이를 극복하고 기독교의 참모습을 전해야 할 목회자들의 일부가 오히려 앞장서서 샤먼’, 즉 무당의 역할을 맡고 나선 것이다

다음으로, 현세에서의 풍요를 최고의 복으로 여기는 무속의 정서는 기독교를 물량주의로 물들게 했다.

 

즉 기독교를 믿는 목적을 물질적인 성공에 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서는 일반 교인이나 목회자나 마찬가지여서, 일반 교인들은 부자가 되는 것을

그리고 목회자들은 수만 명이 모이는 큰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을 최고의 축복으로 여기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의 물량주의가 단순히 무속적인 정서의 산물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감춰져 있던 ()에 대한 동경을 기독교가 부추긴 측면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특히, 부의 축적을 축복의 표상으로 떠받들어 가르친 많은 목회자들은 이러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무속이 갖고 있는 길과 흉(吉凶), 그리고 화와 복(禍福)의 단순한 이원론은 길함과 복 받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을 만들어냈다.


 

무분별한 미국제 방식

 

이는 선교 초기, 가난하고 나라까지 잃은 우리 민족과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복 받은 서양 제국을 비교하게 만들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하나님을 믿어 복을 받은 나라 미국에 대해서는 무조건 좋게 받아들이는 풍토를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심어 줬다.

 

그리고 이 같은 풍토로 인해, 한국의 기독교는 오랫동안 친미 반공의 보루에 서게 됐으며, 더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제국의 타락한 자본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한국 기독교의 물량주의는 타락한 자본주의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무속의 역사의식이다

한 마디로 무속은 순환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순환적 역사의 목표는 자연의 순환에 따라 반복되는 현실에서의 풍요로움이다. 이 같은 무속의 역사관은 보수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방식과 맞닿아 있다.

 

즉 뚜렷한 역사의 목표의식을 갖기보다는 현실에서 풍요를 누리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 풍요롭다면, 역사가 발전할 필요도 없고, 현실을 개혁할 필요는 더군다나 없다고 생각한다. 묘하게도, 이 같은 사고방식은, ‘현상유지에 안주하려 해 온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기독교계의 역사인식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뚜렷한 목적을 지닌 기독교의 직선적인 역사의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권력’ (현세의 복)을 축으로 하는 보수성과 현실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의 무속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속의 비종교화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차피 무속이 우리 민족의 기본적인 종교적 심성이라면, 굳이 이를 무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만 무속이 갖고 있는 사고체계가 기독교의 본질과는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학자들이 무속의 비종교화를 제기한다.

 

즉 무속의 종교적인 색채를 기독교에서 제거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속의 길흉화복과 기복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면, 기독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으므로, 역사의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목적도 부와 명예, 혹은 권력과 같은 현세적인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데 있으며, 따라서 기독교인은 성경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속은 아예 없어져 버려야 할 과거의 유산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무속이 우리 민족 문화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문화현상으로서의 무속을 기독교가 수용하는 방안도 검토될 필요가 있다. 종교적 색채를 배제한 무속의 문화적 측면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무속이 지닌 오락성공동체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추수감사 제의 등을 지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음악과 춤을 즐겼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 같은 의식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엮어 주는 하나의 끈 구실을 했다. 기독교는 이와 같은 문화적 전통을 받아들여 종교가 아닌 제의의 축제성곧 놀이문화로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제의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교회로서 지역사회 공동체의 연대감을 창출해 내는 대동놀이 프로그램 등을 교회가 창조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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