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역사 

  

성전의 역사를 인식하려면 먼저 성전의 기원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럴 때 역사적 과정의 참된 의미를 볼 수 있다.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이 건축한 것이다. 다윗은 재료를 예비하였고 솔로몬이 건축을 집행했다. 그러나 성전의 기원은 다윗과 솔로몬이 아니다. 성전의 기원은 그들보다 더 앞서 시기에 시작되었다.

 

성전의 기원

 

성전의 기원은 장막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성전과 장막은 비록 다르다할지라도 중심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한 처소를 얻기 위하여 사람 안에서 사람과 연결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얻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아담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족속에게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한 무리의 사람을 선택하시고 부르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족속을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림인 아담은 실패했다. 하나님은 부름 받은 아브라함을 통해 족속을 전환하셨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 족속이 아닌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로 전환되었다. 아벨 이후에 하나님의 일의 목표는 아담의 후손에게 있지 않고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있었다.

 

창세기 11장 끝부분에서 부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 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들 가운에 한 처소를 얻어 그들과 함께 거하시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 위에서 그분의 처소를 얻으시는 것은 쉽지 않다. 창세기 18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해 그의 장막 안에 들어가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세운 장막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떡과 송아지 요리를 진설했다(6-8절). 이것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소제와 제물의 그림자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서 새로운 시작을 가지셨음을 보여준다. 그분은 기회를 얻어 그분의 목표에 이르고자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장막 안에 들어오셔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고 드시고 교통하셨다. 이런 광경은 아담과 노아에게서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아벨과 에녹에게도 없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17:24), 하나님에게서 공과를 배우고 다룸 받아 천연적인 옛 창조를 벗은 후에 비로소 하나님은 그와 함께 드시고 그와 함께 거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셔서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실 때, 그분은 원래 그분의 선민 전체가 제사장 나라로 그분 앞에 살기를 원하셨다(출 19:4-6).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세상에서 분별하셔서 그분 자신에게 돌이키게 하시며 그분과 직접적인 교통을 하기 원하셨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장막을 세우시고 그분께서 능히 거주하실 수 있게 하셨다(25:8). 표면적으로 장막은 하나님의처소이다. 장막은 하나의표징과상징이며, 그 실재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의상황이 정상적일 때 그들 중의 장막이 정상이었다. 그들의 상황이 비정상적일 때 장막의 상활 또한 그러했다. 장막의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참된 처소이다. 언약궤는 하나님을 표징하고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을 표징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일 때, 하나님의 언약궤는 장막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하나님 앞에서 비정상적일 때, 언약궤는 장막을 떠났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셨음을 표명한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탈취 당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삼상 4:22)라고 말했다. 언약궤가 장막을 떠났을 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셨다. 성전이나 장막의 기본적인 근원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그분의 처소로 얻으시는 것이다. 한 무리의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의 처소는 근거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성전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얻으시는데 있다.

 

구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얻으실 때 제사장을 가리키는 것과 왕을 가리키는 두 단계의 의미를 가진다. 제사장 시기에는 단지 장막만 있었고 성전은 없었다. 왕들의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성전이 있게 되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리키고 왕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통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사람을 얻으실 때는 장막만 있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다스릴 정도에 이를 때에는 성전도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장막과 성전은 한 가지 일의 두 방면이자 두 시기이다.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처소이지만 그중 하나는 움직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정된 것이다. 하나는 견고하지 않고, 다른 하나는 견고하다. 이것은 장막의 시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얻으시는 것에 깊이와 견고함이 부족하며, 단지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경지에 이르렀을 뿐, 아직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다스리시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다윗이 언약궤를 맞으러 나왔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찬미하고 경배했다. 그의 찬미와 경배는 제사장과 왕을 대표한다(삼하 6:12-15). 그때에 다윗은 왕이었으나 제사장들만이 입을 수 있는 에봇을 입었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제사장이었다. 구약의 규율에 따르면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나오며 왕은 유다지파에서 나오는데, 둘을 함께 둘 수 없었다(참조 대하 26:16-19). 만일 왕이 성전 안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면 제사의 율을 위반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다윗이 언약궤를 맞으러 나올 때 그는 왕이면서 에봇을 입었다. 그날 왕과 제사장은 하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얻으실 때 하나님과 교통할 뿐 아니라 사람 가운데 하나님께서 권위가 되는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얻으실 때 땅에서의 처소를 얻으실 뿐 아니라 그분의 보좌를 사람 가운데 세우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전의 기원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사람이고, 둘째는 교통이며, 셋째는 권위이다.

 

사람의 면은 반드시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교통의 면은 아론으로 되돌아가야 하며, 권위의 면은 다윗을 언급해야한다. 그러므로 성전의 기원을 말하려면 사실 구약 전체를 사용해 증명해야 한다. 아담에서부터 아브라함까지, 땅위에 사람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얻으신 사람이 있다. 창조된 사람이 실패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자 부름 받은 사람이 그 부족을 보충했다. 하나님께서 얻으신 부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다. 또 그들은 에봇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말씀하시게 하고, 그분의 뜻을 나타내시게 하며, 그분의 빛을 비춰내시게 했다. 이것이 제사장 직분일 뿐 아니라 또한 아론 자손의 이야기이다.

아론의 제사장 직분은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직분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본래 아담 족속이 모두 그분 앞에서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담이 그의 위치를 잃은 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러 아담의 빈자리를 채우셨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전체에게 제사장의 나라가 되리 말씀하셨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이다(출 19:4-6).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 역시 실패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대신했다. 아론에 이르러 하나님은 땅에서 한 무리의 사람을 얻으셨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말하고, 하나님께 그분의 관점을 나타내시게 하시고, 우주 가운데 그분의 뜻을 집해하실 기회를 갖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제사장이다.

 

장막 시기에는 단지 제사장이 있어서 하나님과 교통하였으나 권위는 없었다. 즉, 왕의 직분은 아직 없었다. 제사장 체계가 하락한 후 에봇은 제사장에게서 사무엘에게 돌려지게 되었다. 사무엘은 제사장이 아니었고 나실인이었다. 나실인은 자원하여 헌신한 사람이다. 나실인의 원칙은 사람과 하나님의 동역으로 하나님으로 그의 모든 것을 얻으시게 하는 것이다(민 6:1-21). 아론은 선택되어 부름 받은 사람이고, 나실인은 자원하여 헌신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부름은 사람의 동역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부름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 동역하려하지 않는다면 자원하여 헌신한 사람이 대신하게 된다. 엘리 시대에는 제사장이 하락했으나 나실인 사무엘이 있었다. 그래서 에봇은 하나님과 동역하기 원하는 사무엘에게 돌아갔다. 사무엘에서부터 권위가 돌아왔는데, 그 권위는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 왕이 산출되었다(삼상 16:12-13). 다윗이 언약궤를 맞으러 나온 날, 에봇이 그에게 돌아갔다(삼하 6:;12-15). 그러므로 그날에 다윗은 언약궤 앞에 서서 삼중의 대표가 되었다. 첫째, 그는 사람을 대표했다. 둘째로 교통을 대표했다. 셋째로 그는 권위를 대표했다. 그는 에봇을 입은 사람으로서 권위가 있는 왕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께 얻어졌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의 신분과 제사장의 직분과 왕의 직분을 갖고 있었다. 이로써 성전이 산출될 수 있었다. 이것이 곧 성전의 기원이다. 이 땅에 사람이 있고 사람과 하나님의 교통이 있으며 하나님의 권위가 있을 때 그분은 사람 가운데 견고한 처소를 산출하실 수 있다.

 

표면적으로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이 지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성전의기원은 그들에게 있지 않고 “사람‘과 ”교통“과 ”권위“에 있었다. 만일 이 땅에 하나님께서 얻으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이 땅에는 성전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교회의 기원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오늘날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얻으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께 다스리시게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세 가지가 다 구비된다면 교회는 근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지방에 교회가 세워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 지방에 하나님께서 얻으신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보좌가 있는지에 달려있다. 만일 이세가지 문제에 대해 모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그 지방에는 견고한 교회가 산출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중 하나라도 긍정적인 답이 없다면 그 지방에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전 건축은 땅에서, 하나님께서 얻으신 한 무리의 에봇을 입은 사람들이 그분과 교통하여, 그분을 대신해 권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하나님은 사람 가운데 그분의 보좌를 세우시고, 이 땅에서 그분의 처소를 얻으시며, 그분의 영광이 그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솔로몬이 전을 바친 날, 이런 영광스러운 광경이 있었다(왕상 8:10-11). 오순절 날 역시 이광경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백이십 명을 얻으셨고, 그들은 하나님과 교통했으며, 그분의 권위가 나타남으로써 교회가 산출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으로 그곳을 충만케하셨다(행 2장).

 

교회는 교리나 조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다. 당신과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얻어졌는가에 따라, 하나님과 얼마나 깊이 교통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권위가 얼마나 나타나는 가에 따라, 교회의 기원이 결정된다. 오순절 날에 제자들에게 능력이 있었던 것은 기도하는 다락방이 그들의 제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백이십 명의 각 사람은 제단 위에 자신을 드려 하나님께 그들을 얻으시게 했고, 하나님과 교통했으며, 하나님께 다스리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처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지지실 때 우리는 자신이 복종하기 원하는지, 하나님께서 다스리도록 얻으시기를 원하시는 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옮겨 부어지신 것은 우리가 조금 눈물을 흘리고 며칠 금식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우리 속을 만지실 때, 우리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지시는 부분을 그분께 기꺼이 내어놓고자 할 때, 성령은 우리에게 옮겨 부어지시고 우리를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성전 건축은 전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지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분께서 권위가 되시느냐에 따른 것이다. 성전의 기원에는 아담이 필요할 뿐 아니라 또한 아론이 필요하도 그 위에 다윗이 더해져야 한다. 아담 위에 아론이 있고 다윗이 있을 때, 하나님의전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 가운데 있게 된다.

 

성전이 황폐케 됨

 

솔로몬이 성전을 하나님께 바친 그날 성전의 역사는 고봉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후 오래지 않아 성전에 문제가 생겼다. 성전 안에서 실지로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성전의 실재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그 원인은 먼저 하나님께 다스리시도록 하지 않은 데 있고, 다음에는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으며 우상을 숭배한 것에 있다. 그 후에 그들은 이집트로 내려가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본래 이집트에서 분별되어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떠나 옛 지방으로 돌아갔다. 또한 그들의 제사장은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게 하지 않았다. 이러므로 실제적인 의미에서 성전은 이미 사라진 것이다. 이때 상징 역시 아무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방인을 일으키시고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도록 허락하셨다(대하 36:17-19). 이 땅에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게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므로 성전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성전 역사의 과정이다.

 

오늘날 이 땅에서 교회의 상황도 이러하다. 만일 하나님께 얻어지고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배우며 그분께서 다스리시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있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우상을 숭배하고, 이집트에 내려가 세상으로 돌아간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을 거절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한쪽에 두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한다면, 교회는 자연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께 얻어진 한 무리의 사라들이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이며, 그분께 권위를 드린 사람들이다. 이 세 가지가 있을 때 교회가 있게 된다. 하나라도 잃으면 집회소는 있을지 몰라도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사람에게 건축하게 하신 성전을, 왜 오래지 않아 이방의 군대의 손에 훼파되도록 하셨는가에 대해 의아해 할 수도 있다. 사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일 뿐 아니라 , 하나님은 실재가 없는 공허한 것을 싫어하신다는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성전의 실재가 이미 상실되었으므로 성전의 상징 또한 파괴되어야 했다. 만일 성전의 기원의 세 가지 요인이 없다면, 하나님의 성전은 이 땅에서 존재의 필요성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성전이 훼파되었을 뿐 아니라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기구들 역시 바벨론에 약탈되었으며, 심지어 우상의 신당에 놓이게 되었다(참조 스 1:7). 여기서의 약탈은 엘리 시대의 황폐합보다 더 심각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을 바벨 곧 바벨론에서 불러내실 때, 그분은 처소를 얻기 원하셨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 백성은 먼 곳으로 다시 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이미 바벨에 있었다. 처음에는 비록 그들의 몸이 그곳에 가지 않았지만 그들의 상태는 이미 바벨로 돌아가 있었다. 하나님은 안과 밖이 일치되지 않는 것을 원치 않으시므로 사람 손에 그들을 붙이시고 바벨론에 사로잡히게 하셨다. 사실 그들의 내적인 상황이 이미 바벨론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외적으로 그들을 바벨론으로 옮기셨다(대하 36:17-20).

 

바벨론과 이집트는 모두 세상을 가리키는데, 바벨은 우상의 세상을 가리키고, 이집트는 생활의 세상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내려와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이스라엘백성이 이집트에서 부름 받아 나온 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바벨에서 부름 받아 나온 것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이므로 하나님의 성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이 바벨론으로 돌아감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을 성전 기구와 함께 바벨론으로 옮기셨고, 외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셨다. 그들의 마음이 우상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우상의 땅으로 옮기셨다. 이것이 교회의 발자취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분별되어 하나님께 얻어지고 하나님과 교통하여 그분께 다스리시게 하는 한 무리를 가리킨다. 교회가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이집트로 내려가 바벨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세상으로 가는 것을 내버려 두시는데, 그럴 때 교회는 황폐해진다. 이것은 성전의 훼파됨에서 볼 수 있다.

 

성전의 회복

 

성전 회복의 관건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교통,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내어드리는 것에 있다. 그러나 성전이 훼파될 때에도 사로 잡혀간 사람 중에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먼저 사로잡혀 간 사람들 가운에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얻었다. 그들은 황폐한 상황 중에 하나님께서 얻으신 사람들이다. 다니엘서의 기록은 모든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극도의 황폐함 중에, 이 땅에서 하나님께 조금의 여지도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 소수의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바벨론에 있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들은 우상 앞에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황폐함 가운데에서 여전히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 후에 있는 성전 회복과 절대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마주치는 것이 모두 우상이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접촉했다. 그들은 마귀 편에 서 있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 있었고 하나님께 얻은바 되었다(단 1:8 참조, 3:16-18, 23-28, 6:10, 16-23, 9:20).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얻어져 하나님 앞에 살고 기도하였기 때문에 후에 제사장 에스라가 대표하는 “교통”을 가져올 수 있었다. 제사장 에스라가 등장했을 때 성전은 회복되었다(스 7장).

 

에스라가 성전을 회복했을 때 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이다. 에스라는 율법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모세보다 더 많이 아는 부분이 있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통이 회복되었다(스 7:6, 10, 느 8:8-12). 그러나 그때에 성전은 있었으나 성은 없었다. 성전은 견고함이 부족하고 보호도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 땅의 총독 느헤미야를 얻으셔야 했다. 당시 유대에는 왕도 없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위해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돌아와 성을 회복했다. 성이 회복되자 성전은 보호가 있게 되고 외벽이 있음으로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성전의 회복은 하나님께 얻어지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성전이 파괴된 원칙은 성전의 기원에 근거하고, 성전이 회복 되는 원칙도 성전의 기원에 근거한다. 이 관건은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지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께 다스리게 하는데 있다. 다니엘과그의세친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았던 것처럼 교회의 역사에서 볼 때, 종교개혁 당신 마르틴 루터는 먼저 하나님께 얻어졌다. 그 후 종교 개혁을 통해 제사장이 예표하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전(殿)은 회복되었으나 성(城)은 회복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성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신교의 외적인 회복과 같이 여전히 견고함이 부족했다.

 

계시록 3장에서 주님은 사데 교회에게 주신 편지 중에서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2상절).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가 부족하므로 너무 약하고 견고하지 못했던 개신교의회복을 나타낸다. 그들이 하나님께 얻어지고 그분과의 교통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의 실재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나님의 주권을 보고 하나님께 다스리도록 하는 사람들이 회복 한 것만이 견고하다. 우리 각 개인의 영적인 상황이 이러하며, 교회의 원칙도 동일하다. 사람이 하나님께 얻어지고 그분과 교통하며 하나님께 다스리시게 할 때, 비로소 이 땅에 교회가 있고 하나님의 처소가 있다.

 

예표의 결론

 

앞에서 언급한 예표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중 일곱 여인과 하나의 집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위치는 여자일 뿐 아니라 집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두 가지 칭호가 있는데, 그것은 여자와 집이다. 여자를 말할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배필임을 가리키고, 집을 말할 때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처소임을 가리다. 그러므로 열 개의 예표가운데 먼저 강조되는 것은 배필이고 그 다음이 처소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이것을 더 분명히 보게 된다. 에베소서 5장은 교회가 하나님의 배필임을 말하고(32절), 2장은 교회가 하나님의 처소임을 말한다(21-2절). 계시록은 우리에게 완전한 그림을 보여준다. 새 예루살렘은 한 성(城)인데, 이 성은 또한 어린양의 아내이며 그리스도의 배필이다(21:2-3). 이 성은 사람 가운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으로서 하나님의 처소이다. 여자는 생명과 위치를 말하고, 집 혹은 처소는 기능을 말한다. 일곱 여인이 예표하는 교회는 생명과 위치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장막과 성전으로 예표된 교회는 기능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분의 영광을 표현하시며, 그분의 권위가 통행하는 그분의 처소를 얻으시는 것이다.

 

교회의 기능은 교회의 생명과 위치에 근거한다.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교회의 위치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 아래 그분께 속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교회에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생명이 있고, 하나님께 속한 위치가 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그분과 연결되고, 하나님께서 안에 거하시게 하고, 그분을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통행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를 예표하는 일곱 여인이 있다. 하와는 교회의 산출과 본성을 예표하고, 리브가는 교회가 세상에서 선택되어 나왔음을 예표한다. 아스낫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상에서 얻으신 것을 예표하고, 십보라는 광야 가운에 있는 교회를 예표한다. 룻은 교회가 구속받았음을 예표하고, 아비가일은 고난 중에 싸우는 교회를 예표한다. 술람미는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을 예표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활과 영광 안에 있는 교회의 광경이다. 우리가 일곱 여인이 예표하는 의미에 더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장막과 성전을 추가해서 본다면, 교회에 대한 상당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즉 교회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산출되었으며, 또 교회의 본성은 무엇이고, 교회가 어떠한 과정을 거쳤으며, 어떤 일을 하였는가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일곱 여인이 예표하는 여러 방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리브가가 먼 지방에서 왔듯이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하다. 십보라는 광야에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 있었다. 룻이 구속을 입은 자이듯 이스라엘 백성 역시 구속을 입은 자들이다. 아비가일이 전쟁을 했듯이 이스라엘 백성 또한 전쟁을 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예표는 앞에서 언급한 여자들의 예표이며, 뒤에 언급한 거처에 관한 예표와 연결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 면으로 여자이고, 다른 면으로 한 성이다. 한 면으로 배필이여 다른 면으로 처소이다. 이 커다란 두 개의 예표가 모두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다. 구약의 예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배필이요 또한 하나님의 처소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있으며, 하나님의거처가 그 가운에 있다.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하나님께 유용하다. 이것의 완결은 바로 하나님의 배필이 되는 한 여자와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한 성 곧 새 예루살렘이다.




 

제16장

교회에 관한 예표(10) - 성전(2)

 

건축의 방법

 

청사진

 

모세는 장막을 건축할 때 산 위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식양대로 했다. 이 식양은 사람의 의견이나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의 계시에서 나온 것이다(출 25:40, 39:42-43상, 히 8:5). 성전의 건축도 같은 원칙 아래 있다. 역대상 28장은 다윗이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통해 건축의 청사진을 받았다고 말한다(11-19절). 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셨지만, 성전의 청사진은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결코 사람이 규정하도록 허락하시지 않았다.

 

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은 장막의 청사진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다. 성전을 건축할 때는 성전의 청사진을 다윗에게 계시하셨다. 솔로몬은 비록 성전을 건축한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는 간접적으로 성전 건축의 청사진을 얻었다.

 

우리는 이미 솔로몬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다윗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 건축의 청사진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계시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 땅에서 고난을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계시한 것이다. 성전 건축의 청사진은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이 가져왔다. 교회 건축의 청사진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계시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이 땅에서 계시며 고난을 통과하고 계실 때, 이미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그리스도는 이미 교회 건축의 원칙을 계시하셨다. 이 간단한 말에서 우리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다.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로마천주교는 마태복음 16장에 대하여 줄곧 자신들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 로마 천주교에 아직 교회가 없을 때에도 그들은 교회의 청사진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강하게 논쟁했다. 지금까지도 마태복음 16장에 계시된 교회건축에 대한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는 각각 다른 이해를 갖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각자의 이해를 따라 자신들이 교회를 세우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땅에서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해 마태복음 16장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 16장을 일일이 해석할 뜻이 없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성도들에게, 주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이미 교회의 청사진을 계시하셨다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계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 예표와 일치한다. 성전 건축의 청사진은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이 가져왔다. 비록 성전 건축의 청사진을 다윗이 가져왔으나 그 청사진의 집행은 솔로몬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다윗은 청사진을 가져왔고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다. 이것은 이 땅에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청사진을 우리에게 계시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청사진을 우리를 통해 집행하신다는 뜻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우리는 하나의 계시를 보고,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 계신에 따른 집행을 본다. 계시된 것은 다윗이 예표한 그리스도요, 집행된 것은 솔로몬이 예표한 그리스도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지를 반드시주의 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계시하시고, 부활 안에서 집행하실 것이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부활 안에 살면서 부활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지위를 가지시게 할 때, 마태복음 16장에 계시된 청사진은 성취될 것이다. 오직 우리가 부활 안에 살 때만이 교회의 청사진은 우리에게 집행될 수 있다.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의 논쟁은 모두 교리적 논쟁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긍휼을 입어 교회의건축이 교리적인 연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이해해야한다. 우리가 자신 안에 산다면 우리는 여전히 타고난 사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태복음 16장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더라고 성전의 청사진은 다만 이론적인 것일 것이며, 집행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반재로 만일 우리가 부활 안에 살고 하나님의 다룸을 받아들이며, 자아를 거절하기를 배우고 부활의 그리스도를 인식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지위를 얻게 한다면, 마태복음 16장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더라고 우리의 영적인 상황은 그것에 부합할 것이다.

 

역대로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는 마태복음 16장에 있는 베드로의 위치에 관하여 끊임없이 논쟁해왔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끝이 없고 결과가 없다. 만일 기꺼이 자신의 육체를 심판하고 자아를 처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교황이나 대주교가 생길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권위가 있고 하나님의 집에 질서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자신의 타고난 것과 자아와 육체와 혈기 안에서는 교회의 권위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세상의 조직이 아니므로 결코 교리적으로 교회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어떤 권위와 지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결정할 수 없다. 만일 교리적인 관점에 근거하여 이 문제를 다룬다면 교회는 상당히 많은 문제가 생길 것이다. 교회의 청사진은 교리에 있지 않고 부활 안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마태복음 16장이 계시이며, 사도행전 2장은 그에 대한 집행임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사도행전 2장에서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부활 안에 있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 각자의 자신을 거절하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그들 안에 상당한 지위를 갖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도 마태복음 16장을 잊어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서 나타낸 광경은 마태복음 16장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들 안에 들어오셔서 한마음 한뜻으로 열흘 동안 기도하게 하셨다. 그들이 부활의 영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오순절 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이 땅에 교회를 산출하셨고 이로서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이 성취하였다.

 

비록 개신교가 마태복음 16장을 교리적으로는 로마천주교보다 정확하게 이해했지만, 원칙적으로는 거의 다를 바가 없다. 로마 천주교는 원칙적으로 “사람”이 그리스도를 대신했다. 개신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반드시 교회의 청사진이 부활 안에서만 집행되고 성취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우리 가운데 권위와 권위의 순서에 관한 어떠함이 있지만, 우리는 결코 이에 대한 이론이나 안배에 머물지 말고 반드시 부활 안에 살아야 한다. 모든 권위가 되는 형제나 자매는 권위가 될 때 반드시 강하게 이렇게 자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자신 안에서 권위가 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가 되는가? 내 자신의 기질 안에서 권위가 되는가, 부활의 영 안에서 권위가 되는가?” 우리가 만일 부활 하신 그리스도 안에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지위가 없으시며 교회의 청사진은 우리 가운데서 다른 모양으로 변할 것이다.

 

예를 들면, 각지에 있는 교회 안에 장로가 있고, 진리의 빛에 따르면 그들은 교회의 권위이다. 형제자매들은 마땅히 장로에게 순복해야 한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옳은 것이고 마태복음 16장의 계시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이런 장로들이 고관처럼 성도들을 대한다면 사람들은 영 안에 안식이 없고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교리적으로는 맞을지라도 사람이 틀린 것이다. 계시는 맞을지 몰라도 그 생명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 계시된 성전 건축의 청사진은 있으나 솔로몬과 같은 실제의 성전 건축을 없는 것과 같다. 마태복음 16장의 교리는 있으나 사도행전의 사실이 없는 것이다.

 

어떤 때 형제자매들의 순복은 학생들이 교장 선생님께 순종하는 것과 같이 편안하지 않은 느낌을 주고 보기에 부자연스럽다. 교장 선생님이 오지 않으면 학생들은 마치 생쥐같이 분주하다가 교장 선생님이 오면 그들은 고양이를 본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은 교리 안에서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다. 완전히 세상의 분위기와 같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틀렸다고 할 수 없으나, 생명 안에서 말하면 큰 문제 일 수 있다.

 

우리 각 사람은 모두 자신을 거절하고 부활의 영 안에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나는 연장한 형제님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살 뿐 아니라 그들이 없더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산다. 나는 규율에 의해 그들에게 순복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의해 순복한다. 또한 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활의 영 안에서 순복한다. 형제자매들도 응당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장로들은 교회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만일 순복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법이고, 교리적이다. 우리가 교리에 따라서만 행하고 부활의 영 안에 살지 않는다면 별 유익이 없을 것이다. 다윗이 본 계시를 솔로몬이 집행했다. 성경 안에 있는 교회에 관한 계시는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영 안에서 성취하셨다.

 

교회 가운데 부활의 영이 없다면 교회는 분명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릴 것이다. 교회의 청사진은 전적으로 부활의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활의 영이 있을 때 교회도 있다. 교회의 청사진은 간단히 말해서 부활의 영이다. 우리가 언제든지 부활의 영 안에서 살 때,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실지로 우리에게 성취될 것이다. 다윗의 성전 건축의 청사진이 우리에게 실현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어려움은 우리에게 다윗의 청사진은 있으나 솔로몬의 집행이 없는 것임을 인정한다. 우리에게 계시와 교리는 있으나 부활의 영의 표현이 부족하다.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에서는 성도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는데, 그 논쟁은 다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어떤 형제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안디옥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형제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예루살렘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의 원칙도 맞고 안디옥의 원칙도 맞다. 이 두 원칙은 다윗이 가져온 청사진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이 청사진을 집행하느냐이다. 사람인가, 성령인가? 혈기에 의해서인가, 그리스도에 의해서인가? 우리 모두는 철저하게 교리를 알아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의 부활이 영께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파쇄 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를 방법으로 삼을 수 없고 성경적 근거를 보장으로 삼을 수 없다. 예루살렘의 노선은 맞지만 사람이 틀리고 그 사람의 생명이 틀리다면 그 교리가 그 사람에게 실재가 될 수 없다. 즉 청사진이 그 사람에게서 성취될 수 없다. 성경에 계시된 예표는 다윗의 청사진을 가져왔고, 반드시 솔로몬이 집행함을 보여준다. 모든 성경의 계시는 부활의 영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우리가 부활의 영 안에 살 때에 우리가주님을 섬기는 일에서 혹은 교회 생활 안에서 비로소 논쟁이 없게 되고 영적인 실재가 있게 된다.

 

지난 20여 년간 우리 가운데 대체적으로 형제들 사이에 별로 논쟁이 없었다. 그 이유는 형제들이 긍휼을 입어 부활의 생명을 조금 만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다. 우리는 옳은 교리를 가지고 논쟁할 수 있지만 만일 우리가 틀린 사람이라면, 교리적으로 맞을지 몰라도 잘못된 것이다. 안에서 빛 비춤을 받을 때, 우리는 교리가 틀린 것이 아니라 사람인 우리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여전히 자신 안에서 말했고 육체 안에서 일했으며 아직 파쇄 되지 않았고 영 안에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자신에게만 지위를 주고 그리스도에게 지위를 주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이요 그리스도가 아님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서 말씀이 한 줄기의 빛으로 우리를 비출 때, 우리 밖에 있는 교리상의 논쟁은 완전히 해체될 것이다. 이럴 때 논쟁하려고해도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이미 해체되었고 이미 파쇄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교회의 청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참된 교회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성령의 권위 아래 순복한다면 논쟁하려 할 때 자아와 육체를 느끼며 자신을 내려놓기를 원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 저는 교리를 말할 수 있으나 저 자신이 틀렸으므로 여기서 멈추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소극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교회의 청사진은 우리 안에서 표현될 것이다. 이것이 솔로몬이 다윗의 계시를 실행해 낸 것이며, 또한 주님께서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 마태복음 16장의 실재가 충분히 나타날 것이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그저 자신의 교리에 대한 관점만을 지지하고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논쟁하고 변론한다면, 논쟁하는 교리는 맞다할지라도 이것은 그리스도 위에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논쟁하는 사람 위에 건축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를 로마천주교가 말하는 베드로가 되게 할 것이다.

 

교회 건축의 참된 청사진은 부활 안에서 온전케 되며, 다윗이 가져왔으나 솔로몬이 집행한 것이다. 교회 건축에서 한 사람도 자신의 의견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방법은 다윗의 식양에 근거한 것이다. 다윗의 식양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 사람의 의견이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봉사하고 교회 건축에 참여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의견을 내려놓고 영 안에서 계시를 얻으며 하나님에게서 건축의 청사진을 얻는 것을 배워야한다.

 

헌신

 

성전 건축의 재료는 다윗이 예비했다. 역대상 29장에서 다윗은 “성전을 위하여 준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 내가 사유한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3절, 5하절)라고 말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재료를 예비했다. 이것은 다윗의 헌신이었다. 다윗이준비한 모든 재료는 대부분 그가 드린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헌신할 것을 호소했고 그들은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면전에서 헌신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 건축의 헌신에 관한 의미는 물질적인 것만 드리면 된다는 일반적인 이해와는 다르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즉, 교회의 건축에는 사람의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 건축을 위해서 물질적인 헌신이 필요할 뿐 아니라 사람의 헌신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책임형제들이 어느 지방에 집회의 필요를 느끼고, 그곳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로 의논한 뒤에 한 형제를 봉사하도록 했다고 하자. 그 형제가 형제들이 위탁했기 때문에 할 수없이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조직적인 기독교 안에서 그들의 상황은 이것보다 더 심하다. 그들은 먼저 예배당을 설립하고 신학교에 가서 졸업생들 중 유능한 사람을 찾는다. 신학교에서 허락하면 졸업 후 그 신학생을 담임 교역자로 보낸다. 여기서는 근본적으로 헌신에 대한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는 것은 성전건축의 방법이 아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방법은 성전을 건축하는 모든 사람이 헌신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다. 만일 한 지방에 필요가 있다면 몇 명의 형제자매들이 주님 앞에서 그 부담을 받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고 필요에 응해야만 한다. 이렇게 자신을 헌신할 때에 비로소 성전 건축의 원칙에 따른 헌신이다.

 

교회 건축의 원칙은 바로 사람의 헌신이다. 사람의 헌신이 없으면 교회의 건축은 성취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헌신은 재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매우 작은 부분이며, 대부분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느냐이다. 다윗이 성전 건축의 재료를 예비할 때, 그는 이스라엘을 향해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대상 29:5하)라고 선포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갈망이 성전을 건축하는 데 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이 일에 참여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윗이 선포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헌신했다(6-9절). 그러므로 교회 건축은 한 면으로 부활 안에서이고, 또 다른 한 면으로 헌신 안에서 이다. 만일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가 강하게 헌신한다면, 그 지방 교회의 건축은 매우 깊을 것이며, 그 헌신이 강할 때 그 건축은 견고할 것이다.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의 헌신이 약할 때, 그 지방교회는 분명 약할 것이고, 헌신이 적을 때 교회는 분명 얕고 가벼울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우리는 결코 사람의 방법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일을 잘하는 사람을 교회 안으로 에려오고자 하거나 사람들을 잘 대하는 사람을 인도자로 삼아 교회를 건축하고자 한다면, 어느 날 비바람이 몰아칠 때 우리가 건축한 것은 모두 무너질 것이다. 참된 교회 건축은 어떤 형제가 오거나 어떤 자매가 와서 하는 것이 아니다. 형제자매가 부담 안에서 철저한 헌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헌신이 있을 때 건축이 있으며, 헌신이 없으면 건축이 없다. 성전을 건축하는 방법은 헌신 안에 있으며 우리가 동분서주하며 사람을 찾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지방에서 일을 하여 교회를 세우든지 사람의 손으로 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스러우신지, 얼마나 영광스러우신지, 얼마나 헌신할 가치가 있는 분이신지를 사람들이 보게 해야 한다.주님은 우리가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다. 마리아가 향유를 주님의 머리 위에 다 쏟아 부은 것처럼 (마 26:7) 우리도 자신의 목숨을 다하여 헌신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건축이다.

 

우리는 자주 “이 형제님은 정말 인재야, 만일 우리 가운데 있다면 얼마나 유용할까? 다른 사람에게 간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야.”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은 맞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만일 우리 가운데 재능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분쟁과 의견의 용도로 쓰이게 될까 두렵다. 모든 것은 같은 종류끼리 어울린다.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을 찾는다. 만일 우리가 재능 있는 사람을 구한다면, 자연스럽게 재능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오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헌신하는 것을 배운다면 참되게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1949년에 우리가 대만에서 주님을 위해 일할 때, 많은 기독교의 교우들이 우리에게 와서 예배를 드렸다. 그때는 복음을 들으려는 사람보다도 단지 예배를 보려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주님 앞에서 사람들에게 강한 말을 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여기서 우리는 무슨 일을 확장하려는 뜻이 없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제한할 생각도 없습니다. 주님만을 원하는 마음으로 이 집회에 오시기 바랍니다. 식당으로 예를 들자면, 우리는 백반이나 만토우는 팔지만 그 이외의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단순하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의 진리를 말할 뿐입니다. 이것을 먹고 싶은 사람은 오십시오. 이것을 먹고 싶지 않으면 다른 곳에 가셔도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고, 우리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교회 건축이 다른 데 있지 않고 헌신에 있음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각지에서 봉사할 때, 만일 주님의 사랑스러움과 영광과 존귀함을 사람에게 전달하여 사람의 마음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한 것은 모두 헛되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방법으로 사람들과 즐기고 어울리며 그들에게 호소한다면, 그것은 성전을 건축하는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문을 닫고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앙망해야 한다. 밖에서 분주해서는 안 되며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에게 주님의 영광스러움과 주님의 사랑스러움과 주님의 존귀함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 영광스럽고 존귀한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것을 얻을 자격이 있으시다. 우리는 사람에게 열심을 내라고 권할 필요가 없고 주님을 사랑하도록 끌어당길 필요도 없다. 만일 우리들의 봉사가 사람의 권면이나 연결이나 관계에 의한 것이라면 주님 앞에 완전히 끝난 것이다. 우리와 함께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주님의 영광스러움과 주님의 사랑스러움과 주님의 존귀함을 보아야 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나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 붓습니다. 나의 피와 목숨을 모두 주님께 부으며 나의 모든 것을 당신의 발아래 둡니다.“ 이러한 봉사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봉사라고 할 수 있다. 교회 건축의 길은 바로 헌신이다.

 

우리는 영에 속한 일은 주님의 인도아래 교통이 필요하고, 시간을 들여 사람들을 접촉해야하며, 은혜를 사람들에게 분배해야 함을 절대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매번 사람과의 접촉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교제한다면, 이것은 주님께 죄를 짓는 것이며 책망 받을 것이다. 어떤 형제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와 가까운 사람을 청해 그를 만나도록 제안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혹 어떤 자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그녀와 매우 친숙한 사람을 청해 그녀를 만나도록 제안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길은 헌신이므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소서! 사람들이 당신의 영광을 느끼게 하소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주님의 영광은 지성소 안에서 나타날 것이며,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느끼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기를 원할 것이다.

 

교회 건축은 다만 교제나 친목이나 어떠한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건축에는 헌신이 필요하다. 만일 사람의 권면이나 연결로 어떤 사람이 우리 가운데 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도록 기도해야하며,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을 그분 앞에 다 쏟아 붓기를 기도해야한다. 각지에서 우리는 반드시 사람을 헌신 안으로 이끌어주는 일을 해야 한다. 이럴 때 비로소 교회가 참되게 건축된다. 예를 들어 교회의 애찬에 만일 조금이라도 억지가 있다면 성도들이 비록 애찬에 왔더라도 아마 곧 마음이 식게 될 것이다. 억지로 끌려온 사람이 헌신을 거치지 않을 때 오래 지속 되지 못한다.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헌신을 주의해야한다. 교회를 건축하는 방법은 바로헌신이다. 이외에 어떤 방법도 사용할 수 없다.

 

소리가 없음

 

성전 건축에서 먼저 필요한 것은 청사진이고, 그 다음은 헌신이며, 그 후에는 어떤 소리도 없어야 한다. 성전 건축에 사용되는 모든 돌은 원칙적으로 산에서 다듬어지고 처리 받아야 한다(왕상 5:15-18). 처리되고 다음어진 돌들을 하나씩 쌓아 올릴 때 건축은 완성된다. 다시 갈고 망치로 칠 필요 없이, 어떠한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지어진다.

 

교회 안에서 건축되고 기능을 나타낼 수 있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다룸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장로는 반드시 장로가 되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다룸을 받아야 한다. 어떤 형제가 나이가 있고, 지식과 재능이 있고, 도덕과 명성이 있다고 해서 장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좋은 돌일 수 있지만 그의 모서리는 아직 하나님의 다룸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장로가 된다면 교회 안에는 망치와 도끼 소리로 가득할 것이다. 교회 건축의 비결은 소리가 없는데 있다. 어떤 교회 안에 소리가 없다면 이 교회는 매우 강하고 건강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만일 하나님께 다룸을 받지 않았다면 장로나 집사의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원칙적으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은 모두 다듬어진 돌이어야 한다. 만일 구원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다른 단체에서 온지 얼마 안 된 형제가 교회 안에 들어와 함부로 비평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할 때, 책임형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유일한 방법은 소리를 내지 않고, 그로 가게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말한 후 모두 소리 없이 입을 닫는다면, 두주가 지나지 않아 그의 소리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형제가 말한 후에 다른 사람이 거기에 반응 한다면 말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다. 이럴 때 교회는 약해진다.

 

하나님께 다룸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소리가 없고, 다른 사람들의 질책을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들의 비평을 감수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 안에서의 파쇄가 충분하지 않고, 배움이 깊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즉시 흥분하여 목에 힘줄을 세우고 그를 반박하며 그와 싸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참되게 공과를 배운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과 변론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즉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능히 그의 도움을 받으려 할 것이다. 그의 영의인도를 따라 힘을 다해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만일 그가 속으로 다른 사람이 변론하고 반대하며 비평하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즉시 하고자 하는 말들을 거두고 잠잠할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배움이 있는 사람이며, 산에서 뜨여지는 과정을 거쳐 망치로 다음어진 사람이다.

 

교회건축에는 소리가 없어야 한다. 교회의 모든 봉사 안에는 다만 찬미와 감사와 찬양만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전 안에서 있어야 하는 소리이다. 한 손만으로는 박수소리가 나지 않는다. 어떤 집회에서 어떤 형제가 손을 펼칠 때, 다른 형제가 손을 펼쳐야 비로소 소리가 난다. 간혹 떡떼는 집회에서 눈가가 일어나서 다른 사람이 한 기도를 뒤집어엎는 기도를 하는 것을 듣게 될 때가 있다. 이런 것은 모두 참된 건축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 건축은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누군가의 비평가 쟁론과 반대를 듣게 될 때, 조금도 소리를 내지 말고, 즉시 우리 존재를 지성소, 곧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우리에게 소리가 나지 않을 때가 다른 사람에게 소리가 나지 않을 때이고, 우리에게서 소리가 날 때가 다른 사람의 소리가 우리보다 더 크게 울릴 때인 것이다. 성전에서는 치고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는 안 된다. 성전에서는 조금의 소리도 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철저한 공과를 배워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성전 건축, 즉 교회 건축을 위해 모든 사람은 부활 안에 살아야 하고, 헌신의 생활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다룸을 받아야만 한다.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부활과 헌신과 다룸이 교회 건축의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안에서 살고 우리의 모든 것을 거절해야만 하며, 헌신의 생활을 살고, 하나님의 모든 다룸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고, 하나님의 손에 복종하였으며, 하나님의 다룸을 받아들였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봉사와 우리의 생활이 모두 부활 안에 있고 하나님의 다룸을 받아들이며, 헌신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교회 건축의 길이다.



 

제15장

교회에 관한 예표(9) - 성전(1)

 

성전

 

성전과 장막은 한 가지 사물의 양면으로서 두 시기에 걸쳐 나타났는데, 광야 시기에는 장막이었고, 가나안에 이르러서는 성전이었다. 나그네의 시기에는 장막이었고, 정착 시기에는 성전이었다. 움직일 때는 장막이었고, 고정되어 있을 때에는 성전이었다. 장막이 교회를 예표하듯이 성전도 교회를 예표한다. 장막이 예표하는 모든 것은 성전 안으로 가져와야 했다. 그러나 예언에 관한 어떤 항목들은 장막에서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전으로 보충해야 한다. 또한 예언에 관한 어떤 항목들이 성전 안에서는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막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다. 장막에 성전이 더해지고, 성전에 장막을 더해서 이 둘을 함께 둘 때만이 교회를 더 완전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장막과 성전이 예표하는 몇 가지를 보기로 하자.

 

첫째, 장막은 주 예수님을 예표하고, 성전 역시 주 예수님을 예표한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주 예수님은“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에 유대인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중에야 제자들이 비로소 주님께서 그분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을 깨달았다. 주 예수님 자신은 바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유대인은 이방인의 손으로 주 예수님의 몸을 헐어버렸다. 그러나 그분은 삼 일 만에 부활하셨고(21-22절), 이것은 주 예수님 자신이 바로 성전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둘째, 장막은 교회를 예표하며, 성전도 교회를 예표한다. 장막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처소이고, 성전 역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처소이다.

 

셋째, 장막이 성도 개개인을 예표할 뿐 아니라 성전도 그러하다. 고린도전서 6장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요, 또한 하나님의 전임을 말하고 있다(19절). 장막은 세부분, 곧 바깥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뉜다. 성전 역시 세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이 몸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넷째, 장막은 새 예루살렘을 예표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전은 새 예루살렘으로 확대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전(殿)이 없는데, 왜냐하면 전이 성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계 21:22). 오늘날의 하나님의 처소는 영원 안에서 하나의전이 아니라 한 성으로 확장될 것이다.

 

성전이 교회를 예표하는 것에 관해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그것은 어떠한 사람이 전을 건축하고, 어떤 재료를 쓰며, 어떻게 건축하느냐 하는 것이다.

 

건축하는 사람

 

다윗

 

성전을 건축한 사람은 다윗과 솔로몬이다. 다윗과 솔로몬은 모두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다윗은 고난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솔로몬은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성전은 이 두 사람에 의해 완성되었다. 비록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으니 그 건축에서 다윗을 제외시킬 수는 없다. 다윗이 성전 건축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갈망

 

다윗은 하나님께서 거처를 얻으실 수 있도록, 그분께서 안식 하실 수 있는 곳을 건축하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갈망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갈망을 예표한다. 우리는 사무엘하 7장과 시편 132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그분께서 안식하실 곳을 구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다윗이 그러한 갈망을 갖고 또 그것을 위해 서원하였던 것은 당시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약궤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한다. 언약궤가 거할 곳이 없다면 이 땅에 하나님의 처소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마음 안에 하나의 갈망을 갖고 계셨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위해 처소를 얻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거처를 얻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안식하실 곳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교회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거처이므로 교회가 없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 거처가 없으시다. 교회가 없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 안식할 곳이 없으시다.

 

예비

 

비록 다윗에게 이러한 원함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가 건축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다윗이 전쟁을 많이하고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대상 22:6-7). 예표에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 계시고, 아직 영광 안에 들어가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전을 건축하실 수 없음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가운데 계실 때 교회는 산출될 길이 없었다. 하나님의 정하심으로 다윗은 성전을 건축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예비 작업을 했다.

 

(1) 재료

 

역대상 22장은 다윗이 어떻게 재료를 준비했는지 보여준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준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14절)라고 말한다. 이것을 볼 때 성전 건축을 위한 모든 재료들은 다윗이 고난 중에 준비한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건축하는 모든 재료들은 그리스도께서 환난 중에 예비하신 것임을 예표한다.

 

(2) 터

 

다윗은 재료만이 아니라 성전을 건축을 하기 위한 터도 준비했다. 이 터는 바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다(대상 21:18-30). 솔로몬의 시대에 그는 다만 건축할 뿐이었다. 이것은 교회를 건축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 즉 재료뿐 아니라 땅도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 예비하셨음을 말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안에 들어가신 후에는 오직 건축이 필요할 뿐이다. 다윗은 솔로몬에게자신이 예비한 재료에 부족함이 없지만, 부복할 경우 더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22:14). 그러나 사실 거의 모든 재료는 다윗의 때에 이미 다 예비되었다. 이와 같이 무릇 교회 건축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고난 중에 예비하셨다.

 

솔로몬

 

예표상으로 솔로몬과 다윗은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가리킨다. 다윗은 고난 중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솔로몬은 영광 안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영광을 얻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성전을 건축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안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교회를 산출하셨음을 의미한다. 복음서 끝부분에서 그리스도는 영광을 얻으셨다(마 28장, 막 16:6-20, 눅 24;46-51, 요 20:19-31). 그리고 사도행전의 시작에 교회가 산출된다. 교회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산출되었다. 그날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보좌에 오른 것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높이 올려지고 영광을 얻은 것으로서, 이것은 절대적으로 성전 건축과 연관된다. 그리스도께서 높이 올려지고 영광을 얻으심도 교회의 산출과 건축에 절대적으로 연결되었다.

 

성전을 지음

 

솔로몬은 왕이 되자마다 곧 성전 거축을 시작했다(왕상 6장).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 곧 교회가 산출됨을 예표된다.

 


언약궤를 성전에 들여옴

 

솔로몬이전을 다 지은 후,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전 안으로 옮겨왔다. 성전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다(왕상 8:6, 10).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처소를 얻으실 때, 그분의 영광이 그 가운데 충만함을 말한다. 성전을 건축할 때 하나님은 처소를 갖게 되시며, 그분의 영광은 완전히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오순절 날을 예표하는데, 교회가 이 땅에서 산출된 그날,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에서 표현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충만하게 되었다.

 

건축재료

 

재료를 예비함과 얻음

 

성전의 건축 재료중 어떤 것은 다윗이, 어떤 것은 솔로몬이 예비했다. 우리가 만일 열왕기상 5장과 6장, 역대상 22장과 28장과 29장을 자세히 읽어본다면, 성전을 건축한 대부분의 재료를 다윗이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다윗과 솔로몬을 더할 때 비로소 한 분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예표할 수 있다.다윗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면을 예표하는데, 그가 예비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얻은 것을 예표한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면을 예표하는데, 그가 예비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얻은 것을 예표한다. 이와 같이 교회의 재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산출되었다. 대부분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초로 하고 일부분만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를 둔다.

 

재료의 종류

 

우리가 만일 구약의 기록들을 살펴본다면, 성전 건축 재료의 가장 중요한 것을 나무와 돌이고, 이외에 금과 은과 동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나무

 

열왕기 5장과 6장은 성전 건축에 사용된 나무가 주로 두 가지 종류였음을 알려준다. 하나는 백향목이고, 다른 하나는 잣나무이다(5:6, 8-10, 6:9, 15-20, 34).

 

(1) 백향목

 

성전 건축에 사용된 백향목은 레바논 산에서 자라는 커다란 나무이다(5:6).그것은 구약 시대에 귀한 나무의 일종으로 당시 성전 안에 사용되었던 재료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거의 백향목으로 만들어졌다. 백향목의 영적 의미는 부활이다.

 

(2) 잣나무

 

잣나무는 측백나무 혹은 노송나무이다. 노송나무는 오래 살기 때문에 고대 중국인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로 묘지에 노송나무를 심는 관습이 있었다. 유대인 역시 묘지에 노송나무를 심었다. 그러므로 송백(松柏)류의 나무는 죽음을 거친 것을 예표한다. 회막 안의 모든 기구들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인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잣나무 혹은 노송나무는 죽음을 거친 사람을 가리키고, 백향목은 부활을 가리킨다.

 

회막은 대부분 금과 나무를 사용해 만들었는데, 금은 신성을 가리키고 나무는 인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구성체임을 의미한다. 성전의 건축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원칙에 따른다. 그중 상당 부분이 나무의 측면에 비중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교회 안에서 사람의성분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교회 안에는 타고난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활의 면에서 교회 안에는 사람의 성분이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의 성분으로 충만하다. 만일 교회 안에 사람이 없다면 교회는 재료가 없는 것이요, 교회를 세우고 건축할 길이 없게 된다. 교회는 참으로 구약의 성전과 같다. 대부분의 재료가 잣나무와 백향목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죽음과 부활을 거친 사람을 상징한다. 교회 안의 사람은 천연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잣나무와 백향목과 같이 죽음과 부활을 거친 사람이어야 한다.

 

처음에 주님을 섬길 때,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일이든 죽음과부활의 체험을 가져야 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는 체험을 가져야 했다. 사실 나는 교리적으로는 분명했지만, 주관적인 체험으로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을 것인데, 이것이 하나의 어려움이다. 그러나 몇 년간의 체험을 거쳐나는 깊은 인식이 생겼다. 예를 들면 어떤 성도들은 재능이 잇는 사람들이교회 안에서 매우 유용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또한 어떤 이는 사업을 경영하고 공장을 열고 교육에 종사하고 큰일을 해본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교회 안에 들어오면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은 일견 매우 옳은 것 같지만, 체험과 빛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원칙이 매우 천연적인 것이며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비록 사람이 교회 건축의 재료이긴 하지만, 이 사람은 천연적인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성전 안에서 백향목과 잣나무 외에 다른 나무가 없는 것은, 사람의 천연적인 재능을 교회 안에 조금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교회 안에는 천연적인 거의 없어야 한다. 어떤 재능이든 천연적인 것이라면 교회 안에 가져 오지 말아야 한다. 언제든지 사람이 천연적인 재능을 교회 안에 가져올 때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오직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것만이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죽음과 부활을 거친 재능임을 분별할 수 있는가? 천연적인 재능과 죽음과 부활을 거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론적으로 많이 말할 필요가 없이, 체험적으로 반드시 인식해야만 하는데, 먼저 사람의 천연적인 재능은 교만을 함께 수반한다. 우리가 천연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를 교만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행한 어떤 일로 교만해졌다면 그것은 천연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형제자매가 집회소의 유리를 깨끗하게 닦는다고 하자. 그가 속으로 자신이 일을 가장 잘한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그에게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생각은 그가 매우 천연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대단히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의 말에 교만은 없다. 바울은 고린도인의 박해 때문에 부득불 자랑했다. 그러므로 그의 자랑은 부활의 자랑이며 영 안에서의 자랑이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읽을 때 거기에 솔직 담백하며 영 안에 깨끗하고 혈기와 육체가 없는 한 사람을 보게 된다. 우리가 거기에서 만진 것은 모두 정결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자랑이 사람에게 부정과 혈기와 육체를 느끼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천연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둘째로 천연적인 재능이나 장점은 자신을 의지하게 한다.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바로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때, 자신을 의지하고 확신함으로써 자신의 수중에 있는 모든 일이 능히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천연적인 성분이 있음을 증명한다. 대개 천연적인 것은 모두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와 같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하나님을 의지하려하지 않는다. 무릇 죽음과 부활을 거친 것은 모두 생명나무와 같다. 감히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확신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셋째, 대개 천여적인 재능과 장점은 모두가 임시적인 것이다. 시험과 공격과 강한 반대가 올 때, 그것은 서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만일 천연적인 재능을 의지해 교회 안에서 봉사한다면, 어느 날 형제자매들의 비평을 들을 때 곧 내려 놓게 될 것이며, 장로들이 자신을 다룰 때 낙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봉사하다가 낙심하여 내려놓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봉사가 상당히 천연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무릇 죽음과 부활을 거친 것만이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것만일 반대와 비평과 공격을 이겨낼 수 있다. 죽음과 부활만이 이러한 소멸되는 체험 후에도 서 있을 수 있다.

 

넷째, 대개 천연적인 재능으로 섬기는 사람은 보상을 바라며,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형제자매가 교회 안에서 봉사할 때 사람의 감탄과 높임과 칭찬을 듣고자 한다면, 그것이 바로 보상을 구하는 것이다. 어떤 형제자매는 한 가지 일을 한 후, 책임 형제의 감탄과 칭찬을 바라고 보상을 바란다. 만일 책임형제가 그들이 한 일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들은 냉담하게 뒤로 물러난다. 만일 조금이라도 칭찬 받으면 매우 흥분하여 더욱 일을 잘하려고 한다. 이것은 사람이 천연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다섯째 천연적인 재능은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하고, 사람 앞에서 일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어떤 성도가 천연적인 영역 안에 사는 지 아니면 죽음과 부활의 영역 안에 사는 지는 위에서 말할 것들로 측정해보고 대조해 보면 곧 알 수 있다.

 

반면에 죽음과 부활에서 나온 것은 교만이 없고 소위 성공했다는 느낌이 없다. 비록 그가 많은 일의 하고 상당히 일을 잘했더라고 그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였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으니라”(35절-36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양들은 우리가 언제 이러한 일들을 하였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마치 이런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느꼈다. 이것은 정상적이고 질병이 없는 사람이 비록 매 순간 호흡하고 있지만 호흡하는 느낌이 없는 것과 같다. 부활 안에 사는 사람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나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이 없다.

 

대개 어떤 일을 하고서 즉시 느낌이 있고 다른 사람의 칭찬을 얻고자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형제가 주님의 일을 위해 약간 헌금하고, 그 일에 대해 많은 느낌을 가졌다면, 그 헌금 속에는 분명 천연적인 성분이 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부활 안에서 했다면 모든 것을 다 허비하여도 느낌이 없었을 것이다. 형제자매를 돕는 일과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서 우리가 천연적이라면 느낌이 있을 것이고, 만일 부활 안에 있다면 다른 것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무릇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것은 모두 생명에서 나온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하게 여기는 느낌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이 건강하고 정상이며 혈액이 잘 통한다면, 특별한 느낌이 없을 것이다. 위(胃)에서 소화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매번 우리가 봉사할 때나 일을 처리할 때, 우리 안에서 일에 성공했다는 느낌이 있다면 우리가 천연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릇 부활에서 나온 것은 모두 오래 가며, 어떤 공격에도 견딜 수 있다.주님은 요한복음 2:19절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어떤 종류의 공격에 부딪쳐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4절에서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라고 말했다. 주님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으므로 부활하셨다. 부활은 어떠한 제한이나 묶임이나 압제를 받지 않는다. 반대로 압제를 받고 죽음에 묻힐수록 더욱 더 자라난다. 부활은 반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강해지고, 비평을 받으면 받을수록 활발해지며, 무시당하면 당할수록 번성한다.

 

무릇 부활에서 나온 것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생명에 속한 자연스러운 것에서 나온 것은 결과를 계산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사람의 비평을 관심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이나 교회의 봉사에서 모두 영적이며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다.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즉, 사람들의 감격이나 주어지는 대가에 대해서 바람이 없다. 그는 안의 안식과 기쁨을 구할 뿐, 밖의 것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연적인 사람은 당신이 그를 많이 칭찬하면 더욱 열심히 봉사한다. 왜냐하면 당신의 칭찬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조금이라도 그를 냉대하면 그는 아마도 뒤로 물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냉대가 그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기도할 때 다른 사람이 아멘하지 않으면 다시 기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아멘을 많이 해야만 그 다음의 기도의 소리가 더 분명하다. 사람들이 하는 “아멘‘이 그에게는 하나의 보상이며, 이것은 그가 천연적인 것 안에 살았음을 증명한다. 무릇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것은 칭찬이든 냉대든 영향을 받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무릇 부활한 것은 감추어진 것이다. 밝은 데서 행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감추어진 것이다. 부활 안에 있는 사람은 드러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육체에 속한 사람만이 드러나기를 좋아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한다. 교회 안에는 마땅히 천연적인 사람이 없어야 하며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사람만 있어야 한다. 봉사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재능을 보는 것에서 나와 잣나무와 백향목, 즉 죽음과 부활을 거친 사람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너무나 가련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헌금하고 수고하지만 누가 많이 드렸는지 기록하여 비교한다. 이것은 대부분 자신의 명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잣나무나 백향목이 아니다. 완전히 천연적이며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지 않은 것이다.

 

성전은 오직 잣나무와 백향목으로 건축하였는데, 이것은 교회가 죽고 부활한 사람만을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장로 실과집사실과복음 서원에는 다른 재료가 없고 오직 잣나무와 백향목만 있어야 한다. 무릇 천연적인 것은 교회에 가져오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강하지 못한 것은 교회 가운데 잣나무와 백향목 외에 다른 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건축하는 재료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의 예표는 우리에게 교회 가운데 다른 잡다한 나무가 필요 없고, 오직 잣나무와 백향목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 안에는 다른 종류의 재료가 필요 없고, 오직 죽음과 부활한 사람만이 재료가 되어야 한다.

 

 

성전 건축의 재료는 나무 외에는 대부분이 돌이다(왕상 5:15-18). 돌은 원래 산에서 채굴하는 것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낸다(6:7). 이것은 교회 건축에 사용되는 재료들은 본래 세상에서 찾아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베드로전서 2장은 “사람에게는 버린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4-5절)라고 말한다.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은 다 산 돌이어야 한다. 베드로의 이름은 바로 “돌”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절)라고 말씀하셨다. 예전에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건축하셔야 한다는 계시를 주신 후에 베드로의 이름을 바뀌었다. 이것은 예전에 베드로는 교회를 건축할 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교회를 건축할 하나의 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구원받고 교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모두 하나의 돌이다. 이 돌들은 원래 깊은 산중에 있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래 세상 가운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일군들이 우리를 찾아냈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주님의 일 안에서 일꾼들은 우리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것은 다듬는 일이다. 돌을 다듬는 것은 돌을 다루는 것이다. 교회 건축은 영에 속한 돌을 사용하는데, 한 면으로는 안의 생명이 필요하고 다른 한 면으로 밖의 일이 필요하다. 신약에서는 살아 있는 돌에 대해 말하지만(벧전 2:5), 구약에서는 다듬어진 돌에 대해 말한다(왕상 5:15, 17-18, 6:7). 교회를 건축하는데 사용하는 돌은 안으로 살아 있어야 하며, 밖으로는 다듬는 일을 거쳐야 한다. 돌이 내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사람이 거듭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듭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 다듬는 일을 하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형제자매는 교회 가운데 마치 산속에서 막 가져온 험악한 “거친 돌”과 같이 모서리가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상처를 받고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사람은 비록 안으로는 거듭났지만 밖으로는 하나님의 다듬는 일이 결핍되어 있다. 성전을 건축할 때에 모든 돌들은 다 예비되어 있었다. 예비하는 일은 산속에서 먼저 다듬고 윤을 내며 치수를 정해야 한다. 그리고 건축할 때가되면 다만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건축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보면, 교회 안에서 건축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다듬는 일을 거쳐야 함을 알 수 있다.

 

성전을 건축할 재료는 나무와 돌이다. 돌이든 나무이든 모두 하나님의 다듬는 일을 거쳐야 한다. 나무는 죽음과 부활의 원칙을 강조하고, 돌은 사람 안에 거듭남이 필요하고 밖으로는 다룸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교회 안의 사람은 죽고부활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다룸을 받은 사람이다. 무릇 다룸을 받지 않은 사람은 비록 거듭났으나 건축될 수 없다. 그들은 살아 있으나 천연적이고 거칠다. 그래서 마치 돌무더기와 같다. 채굴해 온 돌 일뿐 건축된 집의 돌은 아닌 것이다.

 

어떤 형제자매의 상태를 볼 때, 그들은 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다룸을 받지 않은 돌이다. 당신이 그들과 건축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신이 그들에게 자신을 두려고 해도 그들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멈추고 사람들과 동역하며 전쟁을 하고 언약궤를 함께 짊어질 수가 없다. 비록 그들이 이미 거듭났고 주님을 사랑하지만 다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온통 거친 모서리뿐이다. 그들이 일을 잘하고 융통성이 있지만 다만 손님이나 고문이나 참모와 같아서 당신과 함께 간증을 짊어지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 다룸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너무 둥글고 무책임해서사회에서 사람과 일에 대해 마치 뺀질뺀질한 돌과 같다. 그들을 어디에 두든 그들은 항상 굴러갈 수 있다. 당신이 아침에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한배하면 점심때가 되어 그들은 새어나간다. 그들은 입으로 “예 문제없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돌아서면 사라져버린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와서 동역하고 봉사하려고 한다면, 그들의 유들유들함은 네모반듯해지도록 다듬는 일이 많이 필요하다. 그럴 때에라야 그들은 정확하게 척량되어 다른 사람들과 연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 위에 더해질 때 그들도 능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위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그들은 그곳에서 안정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도역하며 함께 건축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재료의 예표에 있어서, 나무는 교회 건축의 재료가 죽음을 거쳐 부활한 것임을 말해주고, 돌은 건축 재료가 다룸을 받는 것임을 말해준다. 죽음을 거쳐 부활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교회를 건축하는 재료들이 아니다. 또한 죽음을 거쳐 부활하였지만 다룸을 받지 않은 것들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교회를 건축하는 재료들이 아니다. 오직 죽음을 거쳐 부활한 것과 다룸을 받은 것들만이 교회를 건축하는 재료들이 될 수 있다.

 

금속

 

(1) 금

 

성전 건축의 재료는 나무와 돌 외에도 금이 있다(왕상 6:20-21, 30, 5, 7:48-51). 재료의 예표에서 금은 교회 건축의 큰 원칙이다. 교회 안에 사람이 있고 또한 하나님이 계신다. 전을 짓는 데 사용되는 기구 중에 언약궤는 몰론 진설병 상과 향단 등은 모두 조각목에 금을 싼 것이다. 이것은 모든 재료가 인성에 신성을 더한 것임을 나타낸다. 교회는 신성과 인성의 구성체이다. 죽음과 부활이 있고 다룸 받은 사람이 있을 뿐 아니라 신성도 있다. 밖에서 볼 때 성전의 돌은 눈에 뛰지만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것은 다 금이고 또한 금의 분량도 아주 많다. 이것은 교회 안에 하나님의 성분이 상당히 많아야 함을 보여준다.

나무와 돌은 모두 사람의 성분을 가리키고 금은 하나님의 성분을 가리킨다. 돌과 나무에 금이 더해지는 것은 인성에 신성이 더해지고, 인성과 신성이 함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해진 것이 바로교회이다. 계시록에서 교회의 수는 일곱이다. 일곱 등대는 일곱 교회를 말한다(1:20). 칠(7)은 삼(3)과 사(4)를 더한 것으로 사는 피조물의 숫자이고 삼은 삼일 하나님의 숫자이다. 삼과 사를 더하면 칠이 된다. 이것은 사람 위에 하나님을 더한 것, 즉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바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거처이다.

 

(2) 은과 놋

 

성전 건축의 금속 재료 중 금 이외에 은과 놋이 있다(와상 7:15-45, 대상 28:14-17, 29:5, 참조 22:13). 성전 안에 은은 많이사용하지 않았으나 놋은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다. 장막처럼 놋은 성전 밖에서도 사용되었다. 장막의 바깥뜰에는 놋제단과 놋 물두멍이 있었다. 포장 아래에도 놋받침이 있었다(출 27:18-19, 38:17). 성전의 안뜰에 있는 놋 바다와 그 바다를 받치고 있는 열두 소는 전부 놋으로 만든 것이다(왕상 7:23-26).놋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심판을 받으신 것,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가리킨다. 은은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장막 안에서처럼 성전 안에도 은을 사용했다. 이것은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구속을 이루신 것에 근거한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성전 건축에 사용되는 재료인 놋과 은과 금과 나무와 돌은 교회 건축을 위한 재료들을 예표한다. 그것들은 십자가에서주님께서 받으신 심판과 십자가의 역사로 이루신 구속과 하나님 자신이 신성이 있고 또한 사람 곧 죽음을 거쳐 부활하고 다룸을 받은 사람을 포함한다. 이것들이 합해져 어우러질 때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




 

제14장

교회의 예표(8) - 장막(4)

 

포장

 

회막 뜰의 주위에는 하얀 세마포로 둘러쳐진 바깥 포장이 있다. 바깥 포장은 언제든지 헐고 수시로 다시 세울 수 있다. 그것은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집회소의 벽과 같지 않다. 바깥 포장에 관해 우리가 특별히 주의 해야 할 가치 있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놋받침과 은 가름대와 세마포이다.

 

놋받침

 

우리는 장막 아래 은 방침 있다는 것을 안다. 은 받침 이에는 금으로 싸인 조각목 널판이 세워져 있으며 널판 위에는 네층의 덮개가 있다. 장막의 포장은 놋받침과 은 가름대를 사용하여 세마포를 둘렀다. 이스라엘 백성은 먼저 회막 뜰의 주위에 널판을 하나하나 세운 후에 하얀 세마포의 막을 그 기둥 위에 걸쳤다. 기둥 아래는 놋받침이 있다(출 38:17, 29-31). 성경의 예표를 아는 사람들은 놋이 성경에서 심판을 예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놋 뱀을 장대 위에 단것을 주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것을 예표한다(민 21:9). 놋이 심판을 예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한 성경적인 근거는 민수기 16장에 있는 이백오십명의 고라 당과 관련된 놋향로이다. 이백오십명의 고라 당은 놋향로를 들고 하나님 앞에서 거역의 일을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그 후 그 놋향로들은 제단을 싸는 철판이 되었다(39절). 그러므로 놋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은 표시이자 상징이다.

 

우리는 예표에서 놋이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계시록 1장에서 주님 자신을 요한에게 나타내 보이실 때, 주님의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15절). 이것은 한 면으로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의 시험을 통과하신 것을 가리키고, 또 한 면으로는 주 예수님께서 교회 가운데심판을 집행하고 계심을 가리킨다. 주님의 발은 그분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발자취와 하였던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시험을 통과하신 것임을 가리킨다. 그분의 발은 단련을 통과했기 때문에 그분은 교회를 심판하실 수 있으시다. 놋이 상징하는 것이 심판이며, 장막 포장의 기반이 놋받침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위를 위해 받으신 심판이 바깥 포장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말해둔다.

 

은 가름대

 

놋 받침 위에는 은 가름대가 있다(출 38:17). 은은 구약에서 생명을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은 항상 구속을 말한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심판으로 견고한 구속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구속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심판에 근거한다. 놋받침의 기반 위에서 나타난 결과는 은 가름대가 예표하는 구속이다.

 

흰 세마포의 포장

 

은 가름대 위에는 포장이 쳐져 있다(출 27:9, 11-12, 14-15). 이 포장은 세마포로 만들어 졌다(38:16).이것은 주의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흰 세마포는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의로운 행실, 즉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사람의의를 예표한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가 집에 돌아와 했던 첫 번째 일은 옷을 갈아입는 것이었다(22절). 그가 입고 있던 옷은 매우 더러웠기 때문에 그를 만나 아버지는 즉시 그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옷으로 갈아 입혔다. 이것은 우리가주님 앞에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인 것을 가리킨다.

 

본래 우리의 행실과 생활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신분과 위치와 하나님의 영광과 어떠함과 완전히 조화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주 예수님을 우리의 의로서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요구와 영광과 부합할 수 있도록, 그분께서 우리의 가장 좋은 옷이 되신다는 뜻이다. 이로써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상태는 하나님의 신분과 위치와 조화되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바깥뜰 주위의 포장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포장에 대하여 우리는 이외에도 경계의 문제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포장은 경계, 즉 세상과 장막을 분별하는 가장 분명한 경계임을 보아야 한다. 이 포장 밖에 있는 것은 장막 안에 있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포장 안에 있는 것만이 장막에 참여할 수 있다. 이 포장은 교회의 경계를 예표한다. 우리는 교회의 경계를 어떻게 정해야 하고, 교회가 세상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신약에서 찾아낼 수 있지만,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에서 분명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세상 사람과 분별하는 경계는 바로 성도들의 깨끗한 상태이다. 이 깨끗한 상태는 하나님의 구속에서 나온 것이고, 하나님의 구속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심판에 근거한다. 우리는 장막의 그림에서 장막의 경계가 흰 천으로 둘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천은 은 가름대 위에 쳐져 있고, 극 은 가름대는 놋받침 위에 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는 경계는 교회가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은 상태인 깨끗한 상태인 것을 말한다. 이 상태는 하나님의 구속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심판의 근거한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신중해야한다. 놋 받침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것을 가리킨다. 그 심판에서 구속이 산출되었다. 그러므로 놋받침 위에 은 가름대가 있다. 구속에서 의롭다 함이 산출되기 때문에 은 가름대 위에 흰 세마포가 쳐져있다. 그러나 흰 세마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가 사람 앞에 나타날 수 있으며, 밖에 둘러쳐져 있어 다른 사람에 보일 수 있음을 가리킨다.

 

구약의 예표를 자세히 읽어 보면, 우리는 장막의 안팎이 모두 세마포인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장막 밖으로 나와 멀리서 장막을 볼 때 보게 되는 것이 세마포이다. 장막 안에 들어와 성소와 지성소에 이르면 보이는 덮개도 세마포이다. 그 위에는 청색, 자색, 홍색, 여러 가지 색의 실이 있고, 그룹이 수놓아져 있다. 장막 안의 첫 번째 층인 세마포는 우리가 주님의 구속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방면이다. 장막의 바깥 포장이 세마포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 세상 사람과 우리의 경계가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동료들 가운데서, 가정 안에서, 모든 친구와 친척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나타내는 의로움은 포장이 예표하는 흰 경계선이며, 이것은 교회와 세상 사이를 분별하는 경계이다. 그 흰 경계선은 하나님의 구속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구속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심판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하얀 세마포 포장이 은 가름대 위에 쳐져있고, 은 가름대는 놋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이 포장에 따르면 교회와 세상의 경계는 매우 분명하가. 이 포장과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놋받침과 은 가름대와 세마포 포장이다. 놋받침은 주님께서 심판받으신 것을 가리키고, 은 가름대는 주님의 구속을 가리키며, 세마포는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가리킨다. 심판과 구속과 의롭다 함은 교회와 세상 사람을 분별하는 경계이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심 심판을 받아들이고, 구속받고,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며, 경계선 밖에 있는 사람이다. 이 경계선은 교회와 세상 사람을 나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를 위해 받으신 심판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구속받고,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이 경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경계선 밖에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매우 분명하다.

 

각지 교회의 책임을 담당하는 형제들은 주님의 구속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받지 않은 사람을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 사람은 교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다. 그것은 장막에 포장이 없는 것과 같다. 장막에 포장이 없는 것은 경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일에 주의해야 한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의 많은 단체 안에는 그 포장이 없다. 그들은 포장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놋받침도 없애버렸다. 그것은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주님의 구속을 아직 받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아직 받지 않은 사람이 소위 말하는 기독교에 가입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상태이며 혼란한 상태이다.

 

우리가 주의하는 것은 하얀 세마포이다. 교회의 경계는 흰 세마포이다. 이 경계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부드럽고 깨끗하며, 아름답고 더러운 것이 없으며 저속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교리가 아니며,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위치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심판을 받으신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피가 우리를 구속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을 믿어야 한다. 또한 우리자신이 변한 것을 믿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의롭다 함은 우리에게 객관적인 교리만이 아니라 주관적인 체험이 된다.

 

참되게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일을 받아들인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사람에게는 분명 흰 세마포의 상태가 있다. 다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있는 의롭게 됨만 있고 야고보서에 있는 의롭게 된 증거가 없다면, 그 사람이 얻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있는 의롭게 됨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안에 있는 의롭게 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위의 의롭게 됨도 있을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의롭게 됨은 행위에서의 의롭게 됨일 뿐 아니라 또한 생활에서의 의롭게 됨이다.

 

죄가 많고 너무나 악하고 못된 짓만 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복음을 듣고 주님께서 그의 구주가 되심을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구속받았고 의롭다 함을 입었으며, 생활에 큰 변화가 있다. 죄로 가득한 사람이 주님의 구속을 받고,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으며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는데, 조금도 생활의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변화가 없다면 그이 믿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9장의 세리 삭개오는 주님을 만났을 때 변했다. 주님을 받아들였을 때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주님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절)라고 말했다. 이전에 그는 그에게 들어 온 것은 내놓으려하지 않아다. 그러나 지금 그는 불법적이었던 것을 가지고 나가서 처리할 뿐 아니라 자기 소유까지 힘을 다해 주려고 한다. 그 의 인생이 완전히 변했다. 이것은 의롭게 됨이 하나님 앞에서의 일일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의 일임을 보여준다. 의롭게 됨은 걸러서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포장으로서, 세상 사람은 저편에 있고 교회는 이편에 있다는 것을 간증한다. 교회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생활에서 뚜렷한 변화가 있는 흰 세마포이어야 한다.

 

어떤 성도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으며, 교회는 왜 그를 내쫓아야 하는가(고전 5:11-13). 왜냐하면 교회의 경계가 흰 세마포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더러운 것으로 흰 세마포를 더럽힌다면, 그는 구약의 나병 환자와 같이 불결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깨끗한 영역에서 내쫓아 다른 곳에서 다룸을 받게 해야 한다. 그의 나병이 깨끗해지면 다시 그 영역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구원받은 체험면의 교의(敎義)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체험은 종종 진리면의 교리를 증명한다. 주님을 영접하고도 사람 앞에서의 생활에 조금도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복음 자체는 하나님의 큰 능력이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또한 그것이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라면, 그 사람의 생활을 변하게 된다. 여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는데,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행위와 생활을 하얀 세마포와 같게 만든다. 전에 우리는 더러움이 가득했고 난폭했다.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므로 우리의 생활은 변했다. 우리가 나타내는 것은 깨끗한 것일 뿐 아니라 부드럽고 섬세한 것으로서 흰 세마포의 상태이다. 거친 것은 난폭한 것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그가 가장 온유하다 할지라도 그 안에 난폭한 것이 있다. 섬세하다는 것은 부드러운 것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항상 부드럽고 섬세하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날마다 동료들을 접촉한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인데 우리와 그들을 분별하는 경계선은 무엇인가? 이 경계는 당신과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간판이 아니라 당신과 내게 있는 횐 세마포이다. 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없다. 그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불법한 일을 할 수 있지만 당신과 나는 할 수 없다. 그들은 국가에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 있으나 당신과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들은 공공물을 마음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으나 당신과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와 세상 사람들의 경계선은 분명하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이 경계선이 아니라 당신에게 있는 흰 세마포의 향기가 경계선이다. 당신에게 있는 깨끗하고 부드러우며 섬세한 행실과 생활, 즉 당신이 입은 세마포가 경계선이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 곁에서 “그 사람은 교회 사람이라 우리와 다르다.”라고 증언할 것이다. 때로는 우리는 필요에 따라 연회에 간다. 거기에서 다른 사람은 마음대로 먹고 마시며 이야기하고 떠들 수 있으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거기에서 일종의 분별을 갖는다. 옆에 있는 사람은 “아아, 이 사람은 교회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경계의 실재이며 교회의 경계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받아들임으로 구속받고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의롭다 함이 우리에게 걸쳐져 있으며, 사람들 앞에도 걸쳐져 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데 되는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과 나에게 의롭다 함의 상태가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나와 당신의 생활로 증명된다. 이 그림에서 세마포의 포장이 예표하는 것은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휘장 안에 계시지만 휘장은 투명하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 포장은 완전히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광야에서 표류하다가 장막을 세울 때면 즉시주위와 분명한 경계선이 있었다. 그것이 흰 세마포로 만든 포장이다. 광야의 먼 곳에서도 사람들은 그곳에 하얀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것들은 색깔이 섞여있지만 그 포장은 하얗고 깨끗하다. 그 흰 경계선 안에 있는 것이 장막이다. 이것은 교회를 만난 사람이 깨끗하고 하얀, 부드럽고 섬세한 것이 교회라고 말하는 것을 예표한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그 교회가 합당한 교회인 것을 증명한다.

 

놋받침이나 은 가름대는 경계선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다만 깨끗한 세마포 포장만 경계선이다. 포장은 은 가름대 위에 쳐져 있지만 은 가름대의근거는 놋받침이다. 이것은 교회와 세상의 경계가 그들의 의롭게 된 상태임을 예표한다. 그리고 이 의롭게 됨은 구속에 근거하고, 구속은 심판에 근거하다. 흰 세마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을 예표할 뿐만 아니라, 더욱 세상 사람들 앞에 우리의 의롭다 함을 나타내어 우리와 세상의 경계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교회가 있는 곳에 포장의 경계선도 있어야 한다. 그 깨끗한 경계선 안에 있는 것이 교회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흰 세마포의 포장을 잃었다. 사회가 부패하였고, 세상 사람들이 타락했으며 소위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의 방법으로 경계선을 그을 수는 없기 때문에 항상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분의 구원의 큰 능력에서 우리가 떠나지 않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복음 자체는 하나님의 큰 능력이다. 우리는 복음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 큰 능력도 전해야 한다. 사람이 복음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여전히 큰 능력을 만져야 한다. 사람에게 침례를 줄때 우리는 그를 물속에 넣기만 하면 그가 교회 사람이 된다는 교리만 받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전하 복음에서 사람들이 큰 능력을 만질 수 있도록 주님의 긍휼을 구한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큰 능력이 그 사람 안에서 운행한다. 이 운행은 하나님 앞에서 그를 의롭게 할 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의롭다 함의 흰 세마포 옷을 입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롭다 함은 사람 앞에 입고 갈 수 있으며, 걸치고 진열하여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입은 사람이여 그에게 흰 세마포가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경계선이다.

 

나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교회의 경계선을 보기 바라는 강한 부담이 있다. 교회는 분별되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참여하는 사람도 반드시 분별된 사람이어야 한다. 분별하는 경계선이 없는 교회는 포장을 잃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들어간 사람은 반드시 거듭남을 통과한 사람이어야 하며, 변화된 사람이어야 한다.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3:5). 생활 가운데 우리는 농담을 피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장소에서는 농담을 한 마디도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도 경계선이 필요하다. 교회는 거듭남으로 인생과 행실이 바뀐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다.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 영역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

 

누가복음 15장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옷을 입힌 것을 말한다. 아직 거리가 먼데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본 아버지는 급히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고 뜨겁게 입을 맞춘다. 아들은 즉시 아버지께 죄를 자백했는데, 아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종에게 옷을 가져다가 그에게 입히라고 했다(20-22절). 그러므로 옷을 입는 것은 방에서도 뜰에서도 아닌 문 밖에서였다. 송아지는 집안에서 먹었다(23절). 그러므로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먼저 교회의 입구에서 헌옷을 벗고 새 옷을 입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은 침례를 받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도 그의 인생과 생활이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비록 침례를 받았지만 여전히 옛사람 그대로 옛 생활을 산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무릇 교회 안에서 침례를 받고 교회에게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모두 옷을 갈아입고 생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구속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지 말해주는 경계선이 포장인 것을 본다. 포장 안쪽은 바깥뜰이다. 바깥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포장이 사람에게 보여주는 그것이다. 여기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구속 받은 것과 다른 사람 앞에서 변화된 것이었으나 안에는 아직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없다. 이전에 더러웠던 사람이 이제는 깨끗하게 만 된 것이 아니라 인생도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외적인 변화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한 면으로 흰 세마포와 같이 사람 앞에 밖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바깥뜰의 제단과 물두멍이 예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깊이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뜰에서 성소로 들어가야 하고, 성소에서 다시 지성소로 들어가야 한다.

 

휘장

 

회막의 바깥 포장에서 바깥뜰로, 바깥뜰엣 성소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려면 휘장을 지나야 한다. 회막의 가장 바깥쪽인 둘레에는 포장이 쳐있고 안에는 휘장이 있다. 밖의 둘레에 있는 포장은 경계선이다. 안에 있는 휘장도 경계선이다. 포장이 경계선이고, 휘장 역시 경계선이다. 회막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나 경계는 오직 하나이다. 성소와 바깥뜰이 나누어져 있지만 터져있기 때문에 성소와 바깥뜰의 경계는 절대적이지 않다. 분리되었지만 단절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었지만 나누어지지 않았다. 나룰 수가 없다. 그러나 성소와 지성소는 다르다. 그것은 나누어져 있을 뿐 아니라 단절 되어 있어서 서로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회막은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다만 경계선은 하나이다. 그 경계선이 바로 휘장이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외적인 그리스도인에서 내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휘장을 통과해야 한다. 바깥뜰에 있든 성소에 있든 이것은 모두 외적인 그리스도인을 예표한다. 이런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고 손발을 씻고 등에 불을 피우고 상위에 진설병을 놓고 향단에서 향을 피워 올리는 모든 일을 할지라도 그는 외적인 그리스도인이다. 한 면으로 그는 흰 세마포의 경계선 안에 있지만 다른 면에서 그는 여전히 휘장 안에 있지 않다. 첫 번째 경계선을 그가 통과했으나 또 다른 경계선은 아직 통과하지 않았다. 그 경계선은 휘장이다. 그는 바깥뜰에 들어갔고, 심지어 성소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아직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히브리서 10장 20절은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육체“는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하는 ”육체“이다. 사람들은 항상 육체를 좋지 않은 것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사람이 되셨을 때 주님은 육체가 됐다. 그분은 우리와 외형에서 완전히 같았다. 장대 위에 달린 뱀과 그 밑에 있던 사람을 물렀던 뱀의 형상은 완전히 같다. 주님은 사람, 즉 육체가 되셨다. 히브리서ㅣ 10장에서 말하는 휘장은 바로 육체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타락한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

 

휘장은 육체, 곧 타락한 사람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 죄있는 육신의모양이 되셨다(롬 8:3). 그분 자신은 타락하신 적이 없으며 죄가 없으시다. 그러나 그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은 타락했고 죄가 있다. 그분에게는 육체가 아니지만 우리에게 육체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타락한 사람이라는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 성소와지성소의경계선인 휘장은 타락한 사람 즉 육체이다. 이 경계선과 밖에 있는 흰 세마포 포장은 다르다. 세마포 포장은 의를 불의와 분별시키고, 깨끗함을 더러움과 분별시키며, 흑암을 광명과 분별시키고, 부드럽고 섬세한 것을 거칠고 난폭한 것과 분별시키지만, 이것은 사람을 하나님과 분별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소 안의 경계인 휘장은 분별하는 문제가 아니라 찢어졌는가가 문제이다. 육체인 사람이 찢어 졌는가?

우리는 히브리서 10장을 객관적으로만 읽을 수 없다. 찢어진 휘장은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어지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없어지게 하신 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객관적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분은 찢어지셨으나 나는 과연 찢어졌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찢어지셨으나 우리는 아직 찢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여전히 휘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이 그 휘장이다. 아마 나는 구원받았고 이미 깨끗해 졌으며 부드럽고 섬세하며 큰 변화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육체인 그 휘장은 여전히 찢어지지 않았다. 휘장이 찢어지는 것은 좋고 나쁨이나 죄악이나 세상의 문제가 아니다. 휘장은 반드시 찢어져야 한다. 구약에서 휘장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휘장인 사람이 반드시 찢어져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경계가 제게 될 수 있다.

 

에베소서 2장은 막힌 담이 헐렸다고 말한다(14절).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던 막힌 담이 십자가로 헐렸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 말씀의 앞뒤 문장을 읽으면 막힌 담이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된다(14-16절). 율법의 규례에 따라서 유대인은 이방인과 왕래할 수 없다.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이 십자가에 의해 무너졌다. 그 담의 기반은 사람의 육체이다(15절). 율법은 담이고 육체는 담의 기반이다. 율법의 담은 육체의 기반위에 세워진다. 기반이 없으면 담이 없다. 그러므로 육체가 없으면 율법의 문제도 없다. 십자가가 율법의 기반인 육체를 제거하였기 때문에 담인 율법은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오늘날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은 아직 제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람 사이의 담도 여전히 있다. 이것은 죄악이나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이다. “동역자의 집”에 사는 형제자매들은 두세 명이 한 방을 사용하고 있는데, 밖으로 볼 때 의견이 없을 뿐 아니라 분쟁도 없고 어떤 불화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안에 여전히 막힌 담이 있기 때문에 서로 철저하게 교통할 수 없고 또한 서로 깊이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휘장이며 우리와 형제자매들 사이의 휘장인 것을 보여준다. 우리를 하나님 밖에 있게 하는 것은 죄악이나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형제자매들과 철저하게 교통할 수 없으며 더 깊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우리 자신은 휘장으로서 막힌 담이다.

 

포장의 분별은 행위가 깨끗한가, 더러운가와 관련된다. 의는 항상 행위와 관련되기 때문에 교회와 세상 사람의 경계는 의와 불의의 문제로서 세상 사람은 더럽혀졌고 교회는 깨끗하다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행사이다. 이것이 첫 번째 분별이다. 그러나 휘장의분별은 두 번째 분별로서 이것은 행위와 조금도 상관이 없으며 본성과 관련이 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그것은 찢어지는 것에 달려있다. 휘장이 찌어질 때 사람은 휘장 안에 있게 된다. 찢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여전히 휘장 밖에 있다. 포장 안에 있는 것은 의와 불의의 문제이고, 휘장 안에 있는 것은 거룩함과 속됨의 문제이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본성이요 또한 하나님 자신이다. 의는 영원히 행위의 문제이며 거룩함은 영원히 본질의문제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의는 하나님의 행사를 나타낸다. 그러나 거룩함은 하나님 자신이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교회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 그것은 교회는 의로우나 세상 사람은 불의하며, 교회는 깨끗하나 세상 사람은 더럽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생활과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안의본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비록 당신이 영화를 보지 않고 충을 추지 않으며, 세상 사람과 오락을 즐기지 않고 세속적인 습관이 없으며, 드러난 죄는 없을지 모르나, 당신은 여전히 자신 안에 사는 사람일 수이다. 당신은 공명정대한 사람으로서 세상 사람들 눈에 깨끗한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께서 당신에게 운행한 결과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전히 완전한 존재로 남아있을 수 있다. 당신은 첫 번째 경계선을 지났으나 여기에 당신과 하나님을 나누는 또 하나의 경계선이 있다. 그 경계선은 세상이 아니고 죄도 아닌 당신 자신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타락하거나 더럽혀진 사람이 아닌 구속받고 아주 달콤한 사람이다. 바로 이렇게 구속받고 달콤한 당신 자신이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경계선이 되었다.

 

휘장은 주 예수님께서 입으신 육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휘장은 염소 털로 짜지 않고, 덮개의 첫 번째 층과 같이 세마포 위에 청색과 자색과 홍색 실로 그룹을 수놓았다(출 36:35). 휘장이 찢어진 것은 좋은 사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사람이 파쇄 되고 찢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약 휘장이 덮개의 두 번째 층의 재료인 명소 털로 짠 것이라면. 찢어지신 분이 타락한 죄인이요, 부패한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유죄판결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깨끗한 사람이다. 우리 자신 또한 스스로 자신을 상당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상당히 좋은 사람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사상은 타락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창조된 사람이 파쇄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된 사람이 파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룹은 한 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고, 한 면으로 창조된 사람을 상징한다. 창조된 사람위에 있는 떠받쳐진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그룹이다. 이렇게 창조된 사람은 파쇄 되어야 한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혹은 화를 내었기 때문에 창조된 사람이 파쇄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된 사람은 파쇄 되어야 한다.

 

로마서 전반부는 의를 다루는데, 1장부터 5장까지는 행위에 관련된다. 1장에는 더러움이 가득하다. 만약 로마서 1장으로 어떤 사람을 묘사한다면, 그 사람은 쓰레기더미에서 꺼내온 옷을 입은, 더러움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3장에는 피가 나오고, 4장에는 의롭다 함이 나오며, 5장 전반부는 더러움이 조금도 없는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 앞에 합당하게 행하여 백 보좌 앞에 설 수 있는 사람, 백 보좌의 색과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5장에 있는 이 사람은 깨끗하며 하나님과 화목하여, 의와 불의의 문제도 해결되었다. 여기에 흰 경계선이 있다. 1장부터 5장까지는 흰 경계선 안에 있는 사람으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다. 1장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람은 흰 경계선 밖에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교회의 첫 번째 경계선 안으로 들어왔다.

 

로마서 후반부는 거룩함에 문제인데, 5장부터는 본성의 문제를 다룬다. 8장에서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된다(29절). 8장은 형상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영의 문제를 언급한다. 즉, 자신 안에 살지 않고 육체 안에 살지 않으며 영안에 살아야 하다고 말한다. 행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바꿔야 한다. 행위의 문제는 5장 11절 이전에 해결되었다. 이제 본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본성을 바꾸어야 한다. 이것은 옷을 갈아입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속에 있는 근원과 피를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속에 있는 근원을 바꾸는 것은 육체에서 영으로 돌이키는 것이고, 사람에게서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다.

 

8장의 후반부에서는 형상을 언급한다. 당신의 행위는 깨끗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형상은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깨끗한가, 깨끗하지 않은가 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았는가의 문제이다. 당신 자신에게서 나온 깨끗함인가, 아니면 그분에게서 나온 깨끗함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12장에서 우리는 몸을 본다. 몸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확대의 문제,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확대되어 나오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행위로는 교회가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확대만이 교회이다.

 

의와 불의는 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의 관점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거처가 없다. 다시 말해서세마포로 만들어진 포장은 분별하는 경계일 뿐 하나님의 거처는 아니다. 지성소에 들어와야 거처가 있고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할 수 있다. 흰 세마포 포장은 행위의 문제이며, 성소와 지성소에 이르러서야 본성의 문제가 있다. 이 본성은 우리와 하나님의 연합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이 임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려면 휘장인 우리는 반드시 찢어져야한다.

 

휘장은 다른 것이 아니라 창조되고 구속받은 사람인 우리를 가리킨다. 창조되고 구속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찢어져야 할 휘장이다. 찢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찢어질 때 우리와 하나님은 참으로 하나가 된다. 찢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범위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 안에, 즉 하나님 자신 안에 있게 된다. 이것은 아주 엄격한 경계이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이 너무나 적다. 사람들은 이것을 그다지 주의하지 않는다. 첫 번째 경계선을 주의하는 사람은 매우 많지만 두 번째 경계선을 주의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이것을 주의 하는 사람이 적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빛을 가진 사람도 많지 않다. 강단 위에서 전하는 메시지들은 대부분 첫 번째 경계선인 흰 포장만 맴돌 뿐, 두 번째 경계선이 휘장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다.

휘장은 당신 자신이다. 당신 자신이 경계선이다. 구속받지 않은 타락한 당신이 아니라, 창조되고 구속받은 당신이다. 창조되고 구속받은 사람인 당신이 당신과 당신 자신 사이의 휘장이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얼굴빛 밖에 있다. 여기에 휘장인 당신 자신이 있다. 이 휘장은 찢어져야 한다.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이 적기는 하지만 여전히 있다. 우리는 회막의 비율에서 바깥뜰은 넓기 때문에 바깥뜰에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안다. 성소의 크기는 지성소의 두 배이다. 한 곳은 십규빗이고 다른 한 곳은 이십 규빗으로 이십은 십의 두 배이다. 이것은 성소 안에는 사람이 많지만 바깥뜰에는 사람이 더 많고. 지성소 안에는 사람이 아주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성소에 안에 있으려면 타고난 생명이 파쇄 되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파쇄된 사람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는 이러한 사람이 참으로 적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임재를 만진다.

 

구약은 성소 안에서의 모든 움직임과 바깥뜰에서의 활동이 지성소의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성소 안에서의 상태가 올바르면 성소 안에서의 움직임과 바깥뜰 안에서의 활동이 옳다. 지성소 안에서의 상태가 잘못되면 성소와 바깥뜰에서도 잘못된다.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다. 우리 가운데 소수의 사람이 지성소 안에 있다면 우리의 움직임은 틀림없이 옳은 것이다. 우리 가운데 지성소 안에 있는 사람이 없고, 지성소 안에 있는 우리의 상태가 형편없다면, 우리의모든 외적인 움직임은 다 문제가 있을 것이다. 바깥뜰에서의 모든 활동은 성소에 근거하며, 더 깊이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다.

 

교회 안에서 지성소 안에 사는 사람이 적다면 교회의 외적인 움직임들은 아마 문제가 있을 것이다. 교회의 전체적인 움직임은 지성소 안에 있는 소수의 사람의 상태의 달려있다. 그 상태가 올바르면 외적인 활동이 옳을 것이고, 그 상태가 틀리면 외적인 활동도 틀리게 된다. 지성소는 교회의 핵심이며 중심이다. 복숭아를 예를 들면, 복숭아 안에 는 씨가 있고 ,씨 안에는 종핵(種核)이 있다. 복숭아의 생명은 복숭아씨의 종핵 안에 내포되어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생명은 지성소 안에 있다. 지성소 안에 사는 사람이 없다면 교회의 생명에 문제가 있으며, 교회의 외적인 움직임 또한 문제가 있게 된다.

 

회막 곧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면 두 경계선을 통과해야 한다. 첫 번째 경계선을 통과하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여전히 외적인 사람이다. 두 번째 경계선을 통과한 사람만이 내적인 사람이며 내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바깥뜰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성소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성소 안에 배설해 놓은 것은 볼 수 있게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성소는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바깥에 있는 것이다. 지성소에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숨겨져 있어 볼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두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소와 바깥 뜰 사이에 경계선이 있으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성소 안에 있는 사람과 바깥뜰에 있는 사람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 있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러나 또 하나의 경계선은 매우 엄격하다. 그것은 조금도 변경할 수 없는 경계선으로서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신 것을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변하지 않고 또 같을 수 있다. 사람이 답답하고 무미건조하게 기도할 수도 있고 강하게 힘 있게 기도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 자신은 똑같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자신이 휘장 이편에서 저편으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경계선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사람 자신이다.

 

세마포 포장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겉사람과 분리되어 회막 안에 있다. 그러나 회막 안에는 휘장이라는 경계가 또 있다. 휘장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하며 세마포로 짠 흰 포장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휘장 안에 있고, 어떤 사람은 휘장 밖에 있다. 휘장 밖에 있는 사람은 많으나 휘장 안에 있는 사람은 적다. 이방인의 위치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거쳐야 할 것은 세마포의 경계이고, 겉사람에서 속사람으로 전환되기 위해 거쳐야 할 것은 휘장의 경계이다. 우리가 이러한 예표를 읽을 때 우리 안에 깊이 새겨지는 그림이 있기 바란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무엇이고, 영적인 경계에 있어서 교회가 가져야할 분별이 무엇인지를 봄으로써 전진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 바란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어 우리 가운데 지성소에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도울 수 없으며, 나 또한 당신을 도울 수 없다. 이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고 사람은 할 수 없다. 휘장은 스스로 찢어지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휘장을 찢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찢어졌다는 것을 통해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보아야 한다(마 27:51). 당신이 나를 파쇄 할 수 없다. 당신이 나를 파쇄 할수록 나는 딱딱해진다. 나로 당신을 파쇄 할 수 없다. 내가 당신을 파쇄 할수록 당신은 고무처럼 변한다. 종종 우리가 어떤 형제를 다룰 때, 그 형제는 더욱 굳어진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할 수 없으며, 사람들 또한 우리를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욥과 같이 찢으실 것이다. 욥은 가장 좋은 휘장이었다. 우리는 휘장이 세마포로 만들어졌고, 하늘에 속한 색깔이 있으며, 구속받은 상태가 있고, 매우 존귀ㅏ다는 것을 안다. 욥이 그러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휘장을 찢으셨다. 찢어진 후에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다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말할 수 있었다. 찢어짐을 인하여 욥은 지성소에 들어갔고 하나님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서 사람은 도울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 자신의 교회를 위해 반드시 이일을 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의 책임은 그분께 이일을 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욥과 같은 사람에게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함부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이일을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욥과 같은 사람에게 찢는 일을 행하신다. 우리 가운에 파쇄될 수 있는 사람의 수만큼 지성소 안에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교회의 생명, 교회의 움직임은 모두 여기에 달려있다. 이것이 옳으면 외적인 움직임은 모두 옳다. 여기서 틀리면 외적인 움직임도 문제가 있다.

 

장막의 그림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시온을 돌면서 그곳을 둘러보고 그 망대를 세어볼 뿐이다(시 48:12).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장래에 성령께서 더욱 강한 빛을 주시리라고 믿는다. 우리가 생명 안에서 전진하고 성장할 때, 빛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며 그 빛은 우리를 비출 것이다.


 

제13장

교회의 예표(7) - 장막(3)

 

내용

 

회막의 참된 가치는 완전히 회막의 내용에 달려 있다. 이것은 한 가옥의 가치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달여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회막이 밖에서 안으로 세 층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회막의 내용도 세층으로 나뉜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안에서 밖, 지성소에서 바깥뜰이다. 그러나 사람의 측면으로는 밖에서 안으로 계수해야 하는데, 곧 바깥뜰에서 지성소이다.

 

바깥뜰

 

바깥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는 놋으로 된 제단, 즉 번제단이고, 다른 하나는 놋으로 된 물두멍이다. 사람이 회막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이 바로 제단이고, 두 번째 마주치는 것은 물두멍이다. 제단은 주님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물두멍은 성령의 씻음을 예표한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십자가요 둘째는 성령의 씻음이라는 뜻이다.

 

제단

 

회막 안에서 처음보이는 것은 제단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내용 중 첫째인 십자가를 예표한다. 우리 모두 이것에 대해 분명하겠지만 몇 가지 중점을 언급하겠다. 예표에는 세 가지 중점이 있다.

 

(1) 속죄의 장소

 

사람의 측면에서 제단을 속죄의 장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측면에서 제단의 첫째 중점은 속죄가 아니다. 속죄를 위한 제물은 모두 제단 위에서 죽임을 당하여, 모든 속죄에 피도 제단위에 뿌려진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속죄의 피를 흘리심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죄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용서받았다. 사람의 측면에서 볼 때 십자가의 첫 번째 의미는 바로 속죄이다.

 

(2) 헌신

 

제단은 또한 헌신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제단은 “번제단”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속죄 제단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레위기 1장에 의하면 번제물은 다섯 종류의 제물 중 첫 번째 제물이다(3절). 이것은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은 사람과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그분의 음식으로 삼으신다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거듭 그분께 한 가지 음식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이 바친 번제물이다. 속죄제는 하나님의 음식이 아니고, 번제물이 하나님을 위한 음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양식과 만족으로 위하는 것만 알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도 하나님의 음식이 되고 하나님의 만족이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음식과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가? 사람이 자원하여 자신을 번제단 위에 두는 데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것은 곧 번제를 드린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면, 설령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서 속죄제가 필요 없다 하더라도 번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번제 안에는 죄에 관한 사상이 없다. 이것은 피조물이 완전히 자신을 창조주의 손 안에 두는 것이요, 창조주의 음식이 되고 그분의 만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제는 제단이 예표하는 십자가의 첫 번째 의미인 속죄를 위한 것인데 반해, 번제는 제단이 예표하는 십자가의 두 번째 의미인 사람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사람의 측면에서 십자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우리의 죄를 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을 자원하여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를 얻으시는 것이다. 첫째 방면은 피를 체험하는 것으로 구속받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방면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으로 곧 헌신을 의미한다. 즉, 자원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를 끝내고 우리 존재를 끝낸다. 사람이 자신을 제단 위에 드려야 불이 내려와 깨끗이 태워 버린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면에서 볼 때 그분은 이미 우리를 끝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자신을 철저ㅈ히 죽음에 넘기고 하나님께 헌신할 때만이 “자아”를 끝낼 수 있다. 사람이 만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체험할 수 없다. 십자가의 체험이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려면 반드시 자원하여 자신을 죽음에 넘기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그러나 체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 사람에게 이루신 하나님의역사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얻으신 사람은 다 하나님께서 끝내신 사람이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죽음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며, 죽음이 하나님의 손이라는 것에 대해 분명하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자신을 죽음에 넘기는 것이다. 이것이 헌신의 의미이다. 범사에 자신을 죽음에 넘기지 않는 사람은 헌신해보지 않은 사람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은 모두 자신을 죽음에 넘긴 사람이고, 자신을 죽음의 땅에 넘긴 사람이다. 번제를 드릴 때 제사장이 번제 드리는 사람을 대신해서 제물을 죽이지 않고, 본인 스스로가 제물을 죽인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모두 스스로 자신을 죽음의 땅에 둔다는 것을 예표한다.

 

한 면으로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직접 제물을 죽이고 다른 한 면으로 하나님은 부로 제물을 다 태우신다. 우리는 제물을 드릴 때 직접 제물을 죽이고 드린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물을 받으시고 불로 다 태우신다.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다 태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신다는 뜻이다. 이 받음은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드신다는 뜨이고, 다 태우시는 것은 다 드신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자신을 죽음에 넣기는 일과 하나님의 태우시는 일 혹은 하나님의 누림인 이것은 모두 다 십자가의 체험이다. 사람이 자신을 죽음에 넘기는 일과 하나님의 태우시는 일 혹은 하나님의 누림인 이것은 모두 다 십자가의 체험이다. 이 체험의 목적을 사람을 끝내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얻으시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끝내셨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람을 끝내셨다는 의미는 그분께서 사람을 얻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얻으신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끝내신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끝내신 만큼 하나님은 당신을 더 얻으신다.

 

종교는 사람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해 위대한 사업을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참되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큰 인재가 되는 것이나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끝내고 자신을 죽음에 넘기며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게 하는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자신을 참되게 하나님께 드린 사람의 최종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는 향기 나는 제물이 되는 것이며, 사람 앞에서는 한 줌의 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재가 되는 순간이 바로 최후의 단계라는 것을 안다. 나무든 양이든 소든 한 벌의 옷이든 태워져 재가 되면 이미 다 끝난 것이다. 어떤 것이든 태워져 재가 되면 그것이 마지막이다. 한 사람이 총살되면 처리할 뒷일이 있겠지만 만일 당신이 그 사람을 불살라 재가 되게 한다면 그를 처리할 뒷일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재는 그 자체가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소든 양이든 일단 번제가 되면 그것이 최종단계이다. 제단 위에서 하나님은 그 제물을 끝내셔서 재가 되게 하신다. 바로 이러한 끝냄을 통해 하나님은 그 제물을 얻으신다. 이와 같이 사람을 끝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얻으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한 번도 스스로 소나 양의 무리가운데 한 마리를 골라 제단 위에 놓고 불로 태우지 않았다. 하나님은 한 번도 이런 일을 하지 않으셨다. 제물을 드리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다. 사람이 책임을 지고 소나 양을 바쳐야 한다. 사람이 제물을 바친 후에야 하나님은 태우시는 일을 하신다. 이것이 번제이다. 그러므로 번제의 의미는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내시고, 하나님 자신의 누림과 민족을 얻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끝내기 원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억지로 일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를 강제로 끌어다가 제단 위에 두실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달콤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달콤한 마음으로 자신을 드린 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태우신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에 관한 한 방면의 체험이다. 십자가의 피의 방면에 관한 체험은 구속을 받는 것이고 속죄를 위한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의 체험은 번제가 되는 것으로 헌신을 위한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만이 로마서 6장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재가 될 때 바로 그는 하나님께서 드시고 누리며 얻으시는 향기가 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최종 의미이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이 그분을 위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하신다. 사람의 발밑에 있는 땅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고, 머리위에 있는 하늘도 그분께서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필요한 빛과 수분과 공기와 식물 등 모든 것을 지으셨다. 사람에게 필요한 생명과 지혜와 능력 역시 그분께서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뜻이 조금도 없으셨다.

 

구약의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 오히려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그분의 집을 건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대상 17:4-5). 하나님은 본래 사람에게 이런 일을 하게하실 뜻이 없으셨다.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하셨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한다는 사상이나 관념은 종교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뜻을 갖고 계시는데, 즉 사람이 그분의 음식이 되고 그분께서 사람을 얻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얻어지는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제단은 사람의 죄를 처리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얻으신다. 이것은 속죄제와 번제의 두 가지 의미이다. 십자가는 사람의 죄를 처리하고 또한 하나님께 사람을 얻으시게 한다. 이것이 제단이 예표하는 두 번째이다.

 

(3) 모든 것을 포함함

 

어떤 사람들은 회막 안의 기구들의 치수의 크고 작음을 따라 제단 안에 놓일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제단은 회막 안의 물건을 수용할 수 있다. 이와ㅣ에 유대인의 역사 또한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행할 때 그들이 진군하기 전에는 회막 안의 기구들을 제단 안에 두었음을 말해준다. 우리가 그 물건들의 치수를 계산해 보면 그것이 믿을 만한 사실 인 것을 알 것이다.

사람이 회막에 와서 그 물건들을 접촉하려면 반드시먼저 제단을 지나야 한다. 이것이 제단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십자가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것의 근거임을 예표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는 모든 영적인 체험의 근거이다. 제단을 지나지 않고 성소와 지성소 안에 가서 물건들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마찬 가지로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영적인 체험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제단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처럼 십자가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속죄이고, 헌신이며, 또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물두멍

 

제단에서 앞으로 나아가면 물두멍이 있다. 물두멍은 정결하게 하는 곳이다(출 40:30-32). 회막 안에서 섬기는 사람은 모두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신약에서 이것은 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다(딛 3:5). 이러한 예표는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으며 피로 씻는 것이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과 발은 땅의 먼지, 즉 세상의 불결한 것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에 물로 씻어야 한다. 피로 씻는 것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죄이다. 피의 씻음은 유죄판결을 처리하는 것이고, 물은 더러움과 불결함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더러움은 피로 씻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몸의 더러움은 물로 씻어야 한다. 물로 씻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씻으시는 것을 예표한다. 성령은 우리가 세상을 접하면서 묻은 모든 더러움을 우리 안에서 씻으신다. 이 씻음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그 씻음이다. 주님은 “너희를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 15:3)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씻음은 속죄의 방면이 아니다.

 

예를 들어, 깨끗한 옷을 입은 아이에게 어머니는 “옷을 더럽히지 말라. 더럽히면 너는 엄마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런데 아이가 나가서 놀다가 그만 옷을 더럽혔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일이 발생한 것을 보아야 한다. 첫째, 이 아이는 어머니 앞에서 죄를 지었다. 어머니가 그의 죄를 책망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감히 어머니를 보지 못할 것이고, 그와 어머니 사이에 어려움이 있게 된다. 둘째, 그의 옷은 실지로 더러운 것으로 더럽혀졌다. 후에 아이의 형이 중재가 되어 아이를 어머니에게 데리고 가면, 아이가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때 어머니는 그를 용서해주고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나 그의 옷에는 더러운 것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 비록 그와 어머니 사이에 간격이 없어져서 같이 밥을 먹을 수 있고 즐거울 수 있으나 옷은 여전히 더럽다. 따라서 물로 씻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예를 들면, 오래 전에 어떤 형제는 구원받기 전에 국가 공공 기관에서 일했다. 그가 한번은 기관의 돈을 훔쳐서 몰래 침대와 책상과 의자를 사서 쓰면서 좋아했다. 구원 받은 후 그는 그것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훔치려던 의도나 행위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은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이전에 그 형제는 포장 밖의 흑암 가운데 생활하면서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포장 안의 공의와 정결한 영역 안으로 들어와서 즉시 훔친 것이 죄라고 느낀다. 그는 십자가 앞에 와서 하나님께 “하나님, 돈을 훔친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용서해주소서.”라고 말한다. 이 형제는 거기에서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구속을 받아들인다.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십자가가 위에서 이미 그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느낌을 주신다. 그때 그는 믿음으로 주님의 피가 그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음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갖는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는 제단의 피이다. 깨끗하게 씻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을 깨끗하게 씻음으로 양심에 더 이상 유죄판결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형제가 다시 성경을 읽을 때, 침대와 책상과 의자가 훔친 돈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더러움이여전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들은 피를 의지해 씻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피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죄인들을 이미 씻었지만, 침대와 책상과 의자의 더러움은 피로 씻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을 어떻게 씻어야 하는가? 물두멍을 통해서이다. 즉, 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의지해야한다. 성령은 그 사람 안에서 그를 괴롭힌다. 그가 기도할 때, 성령은 “그 물건들을 돌려주어라. 너의 것이 아닌 것을 깨끗하게 처리해야한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그 말씀을 따라 행한 후에 평안을 되찾는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당신이 다른 사람의 넥타이를 훔쳐서 넥타이 안에 새겨진 표시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착용했다 하자. 이제 구원받고 당신은 넥타이를 훔친 죄를 자백하고 피로 그 죄안을 씻었다. 그러나 당신이 다시 그 넥타이를 매려고 할 때, 당신에게 더러운 것이 있음을 느낀다. 이때 당신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서 성령의 움직임을 통해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를 씻으신다. 우리는 물로 더러운 것을 씻을 때, 즉시 깨끗하게 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때로는 힘들여서 비벼 빨아야 하고, 때로는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깨끗하게 씻어진다. 성령도 우리 안에서 그와 같다. 그분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넥타이를 돌려주도록 우리 안에 평강이 없게 하신다. 또한 진실하게 “지금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넥타이를 당신에게 돌려 드립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넥타이에 있었던 표시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배상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게 하신다. 이것이 물두멍이다. 그것은 피로 씻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있는 더러움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씻어진다.

 

우리가 십자가의 구속을 받아들일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죄의 문제는 모두 해결된다. 그 해결은 피의 씻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체험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여전히 땅에 속한 더러움이 있고, 우리 머릿속에는 아직도 더러운 생각이 있으며, 관념 안에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 있고 행동도 땅에 속한 더러움이 있고, 우리 머릿속에는 아직도 더러운 생각이 있으며, 관념 안에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 있고, 행동도 땅에 속한 더러움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에 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필요하다(딛3:5). 이것은 속죄와 무관하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더러움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보혈의 씻음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를 씻는 것이고, 성령의 씻음은 우리에게 있는 더러움을 씻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의 문제는 제단에서 해결하고, 더러움의 문제는 물두멍에서 해결한다.

 

세상 사람들은 단지 더러움만 볼 뿐 유죄 판결을 보지 못한다.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유죄판결만을 보고 더러움을 소홀히 한다. 그러나 성경은 두 방면이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제단과 피가 필요하고, 또 실지적으로 우리는 더럽혀졌기 때문에 물두멍과 물의 씻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마다 자신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더럽혀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피로 씻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를 처리해야하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의 더러움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일을 위해 기도하는데 십분만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을 기도하기 전에 우리는 피의 씻음을 구하고, 속이 새로워지는 것을 구하는데 이십 분이 필요하다. 제단과 물두멍에서 먼저 시간을 들이지 않고 성소나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여기에서 시간을 들이지 않고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성소나 지성소의 체험을 갖기가 어렵다.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은 제단에서 죄를 해결하고 물두멍에서 더러움을 씻는 것을 반드시 통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바깥뜰에서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을 접촉하려면, 반드시 그 두 곳을 지나야 한다. 때로는 먼저 물두멍에 가고 후에 제단에 가야 한다. 반드시먼저 제단에 간 후에 물두멍에 가야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종종 먼저 물두멍으로 간 후에 제단에 간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오늘 주님을 위해 말하려고 하는데, 어제 함께 사는 형제에게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하자. 주님은 당신에게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마 5:24)라고 말씀하신다.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 하는 것은 물두멍에 가서 씻는 것이다. 먼저 형제에게 가서 ”형제님, 어제 죄송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물두멍에 가서 씻는 것이다. 먼저 형제 앞에 가서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은 후에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말할 수 있으며, 성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이것이 먼저 물두멍을 지난 후에 다시 제단을 지나는 것이다.

 

제단과 물두멍에는 두 방면이 기능이 있다. 한 면으로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의 죄안을 씻고, 또 한 면으로는 사람의 더러움을 씻는다. 죄안이 깨끗하게 되는 것은 십자가인 제단에서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며,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는 것은 물두멍에서 성령의 빛 비춤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단과 물두멍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지만 동일한 놋은 아니다. 물두멍에 사용된 놋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다(출 38:8). 이것은 물두멍이 사람의 거울로서, 사람에게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게 하고 자신에게 있는 더러움을 보게 한다는 뜻이다. 제단의 표면을 싼 놋은 죄를 지은 사람의 향로로서, 심판을 거친 이백오십 개의 놋 향로로 만든 것이다(민 16:16-19). 그러므로 여기에는 심판의 의미가 있다. 제단에 는 심판의 즉 유죄 판결이 있고, 물두멍에는 빛 비춤이 있다. 빛 비춤이 있어야 사람의 더러움을 제할 수 있다. 유죄 판결이 있기 때문에 피가 필요하고, 더러움이 있기 때문에 물이 필요하다. 제단은 유죄 판결에 관계된 문제이고, 물두멍은 빛 비춤에 관한 문제이다.

 

제단에올 때 그 놋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또 물두멍에 오면 그 놋은 빛 비춤 받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오늘날 십자가 앞에 올 때, 그 십자가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심판을 받으셨는지 생각나게 한다. 성령께 올 때 성령은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고 자신의 본 모습과 더러움을 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회막, 즉 교회의 범위 안에는 첫째, 십자가의 구속이 있고, 둘째, 성령의 씻음이 있다. 십자가는 구속을 말하고 성령은 씻음을 말한다. 바깥뜰에 있는 사람이 계속 접촉하는 것은 이 두 가지이다. 이것은 갓 구원받은 사람 또는 구원 받는지 오래 되었으나 계속해서 자라지 않고, 그들 체험 가운데 접촉하는 것이 다만 십자가의 구속과 성령의 씻음 뿐인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영적 체험은 다만 그 정도이다. 그들은 다만 전에 마작을 좋아했고, 영화를 좋아했으나 지금은 그것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는 느낌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고백했더니 마음이 편해졌다고만 말 할 수 있다. 또 그들 안에 능력이 있어 이미 그것들을 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십자가의 구속과 성령의 씻음이다. 이것들은 모두 바깥뜰에서의 체험이다.

 

성소

 

바깥뜰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성소로 들어가게 된다. 성소 안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진설병이 놓인 상이다. 이것은 성소 북쪽에 있다(출 25:30). “진설병”이라는 말에는 진열해 놓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 떡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식 혹은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드러난 것이며 진열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성도가 있다고 하자. 그는 어는 날 주님의 보혈로 책망에서 벗어났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더러운 것이 성령의 씻음으로 깨끗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는 것을 배우고 주님과 교통하는 것을 배운다. 그는 성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 안에서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지 알게 된다. 그는 또한 자신이 더 이상 세상의 더러운 것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 안에서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 지를 간증할 수 있다. 또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안에 힘이 생기는 것처럼 생명의 능력이 어떻게 자신 안에서 힘을 주는지 간증할 수 있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이것을 간증하며, 또한 이 간증은 실지로 생명의 능력이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난 진설병의 체험은 낮은 것이다. 물론 물두멍의 체험보다는 더 깊고, 더 안에 있는 것이지만, 아직 깊은 체험은 아니다.

 

둘째는 금등대이다. 성소의 남쪽에는 금등대가 있다(출 25:31-39). 금등대의 빛은 비추어 나온 것이며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진설병은 진열해 놓은 것으로 생명의 능력을 말하고, 금등대는 비추어 나온 것으로 생명의 빛을 발한다. 이 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의 생명이 되심을 예표한다. 한 면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을 가리키고, 또 한 면을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춘다는 것들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 6:35)라고말씀하시며, 또한“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요 8:12)라고 말씀하신다.

 

셋째 향단이다. 향단은 성소의 서쪽에 있다(출 30:6). 향단의 향기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며, 진설병은 진열해 놓은 것이고, 빛은 비추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모두 감추어지지 않고 보이는 것이다. 향단은 하나님 앞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쁨이 되심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는 기쁨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능력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달려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빛은 빛이 되신 그리스도께 달려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쁨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능력이시고, 우리의 빛이시며, 우리의 기쁨이시다. 우리가 영적인 생활을 할 능력을 갖고, 앞에 있는 경주를 경주할 빛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는 성소 안에 있지만 모두 보이는 것들이다. 즉, 안에 있는 것이면서 또한 밖에 있는 것이다. 제단과 물두멍은 완전히 노출된 밖에 있다. 모든 제물은 제단 바깥쪽에 있으며, 놋으로 된 물두멍도 봉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완전히 드러난 곳에 있다. 성소에 오면 모두 노천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그러나 성소 안에 있는 세 가지, 즉 진열된 떡과 비추는 빛과 올라가는 향은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다.

 

우리는 앞에서 성소가 사람의 혼, 즉 겉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지적했다. 심리학은 사랑을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으로 나눈다. 밖으로 보이는 것은 형이하학으로서 겉사람이다. 안의 보이지 않는 것이 형이상학으로서 속사람이다. 혼은 안에 있고 몸은 밖에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성경과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비록 혼은 사람 안에 있지만 겉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속사람인가? 영이 우리의 속사람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영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소 안에 계시지 않고 지성소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가 예표하는 겉사람은 혼에 속한 사람이다. 구원 받은지 얼마 안 된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고 빛이시고 기쁨이심을 체험하는 것은 혼안에서, 흥분됨 안에서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혼 안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혼 안에 있는 것은 낮은 것이다. 성소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신 진설병으로, 빛이신 금등대로, 기쁨이신 향단으로 계신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깊은 것은 아니다.

 

지성소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분리하는 휘장이 있고, 휘장을 지나야 지성소에 이른다(출 26:33034, 히 9:3, 8). 휘장은 주 예수님께서 입으신 사람의 육체를 가리킨다. 사람이 파쇄되면 영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과 금등대와 향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시며, 생명의 빛이시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기쁘게 받아들여지게 하시는 분임을 가리킨다. 향단과 금등대와 진설병은 모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향단과 금등대와 진설병은 모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만이 그리스도자신이고 하나님 자신이다. 성소 안에 있는 세 가지 물건이지성소 안에서는 언약궤 안에 감추어져 있다. 진설병은 지성소 안에서 언약궤 안에 있는 감추어진 만나이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아니라 계시록 2장의 감추어진 만나이다. 금등대는 지성소 안의 언약궤 안에 있는 십계명의 돌 판이다. 시편 119편은 율법이 빛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빛을 거두어들이면 율법이고, 율법을 비추어 내면 빛이다. 생명의 빛은 생명의 법에서 비추어 나간 것이다. 율법은 감추어진 것이지만 빛을 밖은 비춘다. 금향단은 지성소에서는 언약궤 안에 있는 싹난 지팡이이다.

 

향단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근거이여 증거이다. 싹 난 지팡이는 아론의집이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근거이며 증거이다. 향단은 부활 안에 있으며, 싹 난 지팡이 또한 부활 안에 있다. 향단은 한 면에서 기쁘게 받으심 혹은 인정하심과 관련되고, 다른 면에서는 부활과 관련된다. 싹 난 지팡이도 한 면으로는 기쁘게 받으심 혹은 인정하심과 관련되고 한 편으로는 부활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을 거절하고 부활 안에 있는 사람만을 기쁘게 받으실 수 있다. 고라 당이 일어나서 말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지 않으셨고 인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인정하시는 것은 싹 난 지팡이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많은 행위를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께 기쁘게 받으시거나 인정하신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인정하시는 것은 향단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향단과 싹 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인정하시는 일에서 하나이다.

 

다른 면에서 향단은 부활이고 싹 난 지팡이 또한 부활이다. 오직 부활 안에 있는 것만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인정하신다. 우리가 자신 안에 산다면 고라 당(민 16장)과같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것이고, 거절하실 것이다. 우리가 아론과 모세와 같이 자신을 거절하고 부활 안에 산다면,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실 것이고 이정하실 것이다. 부활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언약궤 안에 있었다는 것은 성소 안의 기쁘게 받으시는 향단이 이미 언약궤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소 안에 있는 세 가지 물건은 지성소에 와서 모두 그리스도 안에 축소되었다. 지성소 안에서 그리스도는 감추어진 방식으로 모든 것이 되신다. 많든 적든 우리에게는 모두 이런 체험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진설병으로 체험하고, 어떤 사람은 감추어진 만나로 체험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금등대의 빛 비춤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도로 감추어진 법을 체험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기쁘게 받아지셨기 때문에 향단의 광경을 체험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기쁘게 받아들여지신 것은 싹난 지팡이이기 때문임을 체험한다.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만, 지성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숨겨져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는 십자가 있으며, 성령의 씻음이 있고, 또한 나타난 그리스도가 있으며 감추어진 그리스도가 있음을 알려준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각 방면의 인식과 체험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분량과 단계는 각각 다르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은 십자가의 구속과 성령의 씻음만을 체험한다. 이들은 바깥뜰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생명과 빛으로 체험하고, 능력과 기쁘게 받으심으로 체험한다. 그들은 흥분되어있고 살아 있으며, 밝고 신선하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달콤한 교통을 갖고 있다. 당신이 그들을 만날 때, 그들은 성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소수의 사람들은 성소 안에 있는 사람보다 내적으로 그리스도를 더 깊이 체험하고 더 알며 그리스도를 더 많이 얻는다. 그리스도는 그들 안에서 감추어진 만나이시며, 감추어진 율법이시고, 감추어진 기쁨이시다. 당신이 그들을 만질 때, 그들에게서 진설병을 볼 수 없고, 올라가는 향기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의 내면을 만질 때, 그들 안에 만나가 있으며 감추어진 율법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더 깊다. 그들 안에 권위가 있으며, 부활 생명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기쁨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영향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더 진보하여 지성소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러한 상태가 교회의 내용이다.

 

우리가 다만 신약만 읽고 구약을 읽지 않는다면 이렇게 분명하게 교회의 내용을 알 길이 없다. 교회에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는 이런 것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지성소는 시편의 제 4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체험에서 지성소는 하나님 자신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 90:1). 하나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시요, 우리의 지성소이시다. 다른 면에서 지성소는 우리의 영, 즉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는 곳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된 바로 그곳이 완전하고 영적인 지성소이다.

 

이때가 되면 우리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는 충만한 결실을 맺으신다. 이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하나님 편에서 지성소는 사람의 영이고, 사람 편에서는 사람이 체험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그분과 우리는 하나로 연결된다. 지성소 안에서는 언약궤가 중심이듯이 이러한 연결은 그리스도께서 중심이시다. 이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생명과 감추어진 빛과 감추어진 권위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모두 이 중심적인 분 안에 감추어져 있다.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은 모두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제 우리는 온전히 이분을 중심 삼을 정도로 하나님과 연결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내용이다.

성소와 지성소 안에 있는 세 가지 물건은 우리의 혼의 세부분과 영의 세부분과 특별히 관계가 있다. 성소 안에 있는 등대는 우리의 생각과 관련되고, 향단은 우리의 감정과 관계되며 진설병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사고가 분명한가의 여부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빛 비춤을 충분히 받았는가를 보면 된다. 사람의 감정이 안정적인가의 여부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진 상태를 보면 된다. 사람의 감정이 안정적인가의 여부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진 상태를 보면 된다. 또 사람의 의지가 견고한가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공급을 받았는가를 보면 된다. 성소 안에 있는 세 가지 물건과 우리의 혼의 세부분은 실제적으로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

 

지성소의 언약궤 안에 있는 세 가지 물건은 우리 영의 세 부분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 영의직감은 혼의 생각과 같이 우리에게 영적인 일을 분명하게 알게 하고 영적인 일을 느끼게 한다. 영의 양심은 혼의 감정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평안한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는 가는 모두 양심의 문제이다. 영안에서의 교통은 생명의 공급에서 비롯된다. 교통은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교통이라고 한다. 감추어진 만나의 강조점은 영안에서 교통이거, 싹 난 지팡이의 강조점은 영안에 있는 양심이며, 내적인 법의 강조점은 영안에서 있는 직감이다. 십계명을 새긴 돌판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것처럼 직감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한다. 싹 난 지팡이가 하나님께 기쁘게 받으시게 하는 것과 같이 영 안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갖게 한다. 만나가 사람을 공급하는 것은 영안에서의 교통을 더욱 강화한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성소 안에 있는 세 가지 물건이 혼의 세부분과 관계된다는 것과 지성소 안에 있는 세 가지 물건은 영의 세부분과 관계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만일 당신이 성소 안에 있는 영적인 분량을 가졌다면, 당신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 비춤을 받게 되고, 당신의 의지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강화되고 당신의 감정은 그리스도의 기쁘게 받으심을 통해 기쁨과 평안을 갖게 되다. 당신이 영 안에 살 때 당신이 직감이 하나님의 뜻을 만질 수 있는 것은 안에 있는 법에 달려 있다. 당신의 양심이 평안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기쁘게 받아들여지신 것에 달려있다. 당신 안에 교통이 있는 것은 숨겨진 생명의 공급에 달려 있다.

 

우리는 제단을 체험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하나님은 언약궤부터 시작하신다. 이모든 것은 제단, 즉 십자가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어느 측면에서 보든 물건들은 십자가의 모양으로 진열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모든 체험의 근거이며, 십자가는 모든 체험을 포함한다. 모든 체험은 십자가에서 나온다. 그러나 십자가는 사람에게 십자가 자체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한다. 십자가의 최종 목적을 사람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완전한 연결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람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중심삼은 우주적인 지성소가 된다. 우리의 체험은 참으로 이것을 확증할 수 있다.

 

 

제12장

교회의 예표(6) - 장막(2)

 

덮개

 

출애굽기 26장은 장막의 윗부분이 네 개의 층으로 덮인 것을 보여준다(1-14). 안에서부터 밖으로 첫 번째 층은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열 촉의 앙장이고, 두 번째 층은 염소 털로 만든 열한 촉의 앙장이고, 세 번째 층은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이고, 네 번째 층은 해달의 가죽이다.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앙장

 

첫 번째 층은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열 폭의 앙장이다(26:1-6, 36:1-13). 열 폭은 다섯 폭씩 나뉘는데, 오(5)는 책임의 숫자이다. 우리의 두 손에는 각각 다섯 손가락이 있고, 다섯 손가락 모두 책임을 지고 일을 한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두 부류로 나뉘는데, 다섯은 총명하고 나머지 다섯은 어리석다(2절). “이(2)”는 간증의 숫자이고, “오(5)”는 책임의 숫자이다. 그러므로 열 폭의 앙장을 각각 다섯 폭 씩 두 그룹으로 나눈 것은 사람이 간증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께 책임을 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앙장이다.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앙장 위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들을 수놓았다. 이것은신성과 인성이 함께 연합된 것을 가리킨다.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앙장은 신성과 연합된 인성을 가리킨다. 가는 베실은 하나님 앞에서의 예수님의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고운 가루가 하나님 앞에서의 계수님의 상태인 것과 같다. 고운 가루는 주 예수님의 부드럽고 섬세하심을 말한다(레 2:1-16). 가는 베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사람으로서의 정결함을 말한다.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람으로서의 정결함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그룹은 두 가지 의미이다. 구약에서는 그룹을 말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다. 어떤 곳에서는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 위에 있다고 말한다(겔 9:3).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 위에 달려있고 그룹이 책임을 진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룹을 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면에서 그룹은 네 생물의 일부분이다. 이사야서 6장의 스랍과 에스겔서 10장의 그룹을 더한 것이 계시록의 네 생물이다(계 4:6-8). 그러므로 그룹은 한 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고, 다른 한 면으로 창조물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창조물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상징한다. 앙장 위에 수놓인 그룹은 주님의 몸에 창조된 부분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 위에 나타남을 예표한다.

 

가는 베실은 우리의 사람됨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원래 거칠어서 가는 베실과 같지 않았으나, 구속받은 후에는 부드럽고 섬세한 가는 베실의 상태를 나타낸다. 가는 베실과 조각목은 모두 인성을 말한다. 가는 베실은 주로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조각목은 신실하고 견고함을 말한다. 구원받은 사람의 인성이 강한가를 보려면 조각목을 보아야 하고, 구원받은 사람의 인성이 아름다운 가를 보려면 세마포를 보아야 한다. 조각목에는 금을 입이고,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든 앙장에는 그룹을 수놓았다. 금은 하나님의 귀중함을 상징하고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금을 조각목 위에 입힌 것과 같이 그룹을 세마포위에 수놓았다. 따라서 조각목은 금을 받치고 세마포는 그룹을 받치고 있다. 이것은 구속받고 하늘에 속하며 존귀하고 아름다운 인성이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견고하게 받치고 있음을 상징한다.

 

회막 주위의 널판은 세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튼튼해야한다. 회막 위에 덮개는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보기 좋아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이것은 방의 천장이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 좋게 하는 것인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견고하며 아름다운 인성과 영광스러운 신성이 있다. 인성의 견고함과 아름다움은 세마포이고 신성의 영광은 그룹이다. 가는 베실은 우리의 사람됨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중에 청색 실은 하늘에 속한 표로서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고, 자색은 존귀한 위치를, 홍색 실은 구속받은 것을 가리킨다. 그 다음 그룹 곧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를 떠받쳐져 있다. 왜냐하면 세마포 위에 그룹이 수놓아졌기 때문이다.

 

금과 그룹은 하나님의 면을 가리키고, 조각목과 가는 베실은 사람의 면을 가리키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예표한다. 사람이 회막 안에 들어와서 보는 것은 금으로 싸인 조각목과 그룹을 수놓은 세마포이다. 사람이 교회 안에 들어와 보아야 할 것은 신성이 인성 위에 받쳐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금과 그룹이 조각목과세마포 위에 받쳐져 있는 의미이다. 하나님과 협력하는 견고하고 아름다운 인성이 있어야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교회는 가는 베실이고 청색과 자색과 홍색이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룹이어야 한다. 가는 베실은 그분의“정결함과 의로우심”을 가리킨다. 주님은 가는 베실과 같이 결백하고 공의로우시다. 청색은 하늘에 속한 것을, 자색은 왕을, 홍색은 구속받음을,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이 창조물 위에 나타남을 가리킨다. 회막 안의 덮개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그룹이다. 청색, 자색, 홍색 실은 그다지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가장 사람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 위에 수놓은 그룹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주목을 끌어야 할 것이 창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창조물은 구속받고 깨끗하며 공의롭고 하늘에 속한 왕의 신분을 지닌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러한 사람 위에 나타난다. 이것이 그룹의 의미이며,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상태이다.

 

염소 털로 만든 앙장

 

장막을 덮는 두 번째 층은 염소 털로 만든 앙장이다(출 26:7-13). 이 두 번째 층의 덮개는 인성을 말한다. 나태복음 25장에서 염소는 죄인을 가리킨다(마 25:32-33). 구약에서 속죄제 도한 염소를 희생제물로 드렸다(fp 4:23, 28, 5:6). 그러므로 염소는 죄와 관련된다. 더욱이 출애굽기 26장 7절은 두 번째 층의 폭이 열 폭이나 열도 폭이 아닌 열한 폭이라고 한다. “십(10)은 사람의 완전함을 가리키고, ”십이(12)는 하나님과 사람의 완전한 연합을 가리킨다. 그러나 “십일(11)“은 사람의 완전함을 말하는 ”십“보다는 크고,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말하는 ”십이“보다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 없는 군더더기이다.

 

예를 들면 두 손에는 열 손가락이 있어야 한다. 만약 한 쪽 손에 여섯 개의손가락이 있다면 그것은 군더더기이다. 두 번째 층의 앙장은 하나는 다섯 폭, 또 다른 하나는 여섯 폭이다(9절).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불필요한 상태를 상징한다. 이 군더더기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것이요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죄이며 부패한 것이다.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 전부 죄는 아니지만, 사람에게 있는 군더더기는 죄이다.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사람에게는 있는 군더더기가 바로 죄요, 부패함이다. 언제든지 우리 몸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죄이다.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은 원래 “십(10)”이었다. 그러나 사탄이 그의 것을 아담에게 더했을 때, 아담에게 있으면 안되는 것이 더해져서 “십일”로 변했다. 그것이 죄이며 부패함이다. 교회는 여전히 부패한 성질을 갖고 있다.

 

성경의 예표에 관한 원칙에서 식물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행위와 상태를 상징하고, 동물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속이 필요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장막의 두 번째 층의 덮개가 동물인 염소의 털인 것은 구속이 필요하며 피로 덮는 것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즉, 두 번째 층의 염소 털 앙장은 오늘날 교회 안에 아직도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기쁘게 받으실 수 없기 때문에 구속과 피의 덮음이 필요함을 상징한다.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

 

회막의 세 번째 층은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 앙장으로서(출 26:14), 두 번째 층인 염소의 털의 앙장을 덮는다. 이것은 교회가운에 인성의부패한 것들 구속으로 완전히 덮어야 함을 의미한다. 회막 안에 들어온 사람이든 회막 밖에 있는 사람이든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완전히 덮였기 때문에 열한 폭의 두 번째 층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부패하고 죄악된 부분은 피 아래 있다. 불게 물들인 색은 피의 색, 즉 구속의 색깔이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민 23:21).그분은 교회에 죄가 없다고 보신다. 그분은 교회의 모든 죄와 모든 부패를 그분의 보혈로 덮으셨다. 한 마리의 어린양이 우리를 위해죽었고, 그 피와 가죽이 교회를 덮었다. 따라서 사람이 안에서 밖으로 보든, 밖에서 안으로 보든 “염소 털의 앙장을 볼 수 없다.

 

해달의 가죽

 

회막의 가장 바깥층은 네 번째 층으로 해달의 가죽이다(출 26:14하). 해달의 가죽은 두껍고 튼튼하며 매우 거칠어서 조금도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해달의 가죽은 비바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의 가장 바깥쪽은 해달의 가죽처럼 사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을 지라고 모든 풍파와 타격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교회가 외적으로 화력하고 웅장하지 말아야 하며, 그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교회의 아름다움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회막의 바깥쪽은 해달의 가죽이고, 안쪽은 정금과 그룹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외적으로 어떤 매력적인 것도 없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안에 계신 하나님께 달려있다. 교회가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이끌거나, 외적인 화려함으로 사람을 매혹하려는 것은 모두 회막이 예표하는 원칙에 위배된다.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투박하여 사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교회도 그러해야 한다. 밖으로는 아름다운 것이 없으나 견고하여 타격을 견디고 풍파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외적으로 화려하게 할 때 교회는 약해진다. 이것은 유리창이 외적으로 보기 좋지만 쉽게 깨지는 것과 같다. 오늘날 어떤 교회는 외적으로 아름다워 보이지만 한 번 부딪히면 무너지고 깨져버린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외적으로는 투박하게 보이지만 그 안은 강하고 아름답다.

 

회막의 바닥

 

회막 안에는 마루가 없고, 다만 광야의 모래땅만 있다. 회막 안에서는 어떤 것이든 위에 있는 것이 중요하고, 아래 있는 것은 가벼운 것이다. 여기에서 가벼운 것은 무게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위에 있는 것은 모두 중요한 것이며 아래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지금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회막 안의 주위는 정금으로서 매우 눈부시고, 그 위를 덮는 것은 그룹이 수놓인 세마포로서 매우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래는 터가 없는 사막이다. 그러므로 회막 위는 매우 중요하지만 아래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하늘에 속해야 함을 상징한다. 위를 향할 때만이 아름다움이 있고, 아래를 향할 때는 마루가 없는 사막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위를 보아야 하며 아래를 보아서는 안 된다.

 

회막의 바닥은 오늘날 교회가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서 광야를 걷고 있음을 말해준다. 교회는 이 당에 영원한 기초가 없고 뿌리를 내려서는 안 되며 좋은 바닥이 없다. 회막이 세워진 그 땅이 바로 회막의 바닥이 되었다. 회막은 땅에 뿌리가 없는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다.

 

내가처음으로 푸저우(福州)에 왔을 때, 내 눈을 가장 자극하는 것은 푸저우민장(福州?江) 다리 옆에 있던 배 젓는 많은 할머니들이었다. 그들은 얼굴을 곱게 단장하였으나 두 다리는 진흙으로 오리발처럼 보기가 흉했다. 그들의 상태는 회막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사람이 위에 있는 장막을 보면 적색, 청색, 자색, 홍색에 하얀색을 더하고 그룹을 수놓아 대단히 보기가 좋다. 그러나 아래바닥을 보면 참으로 오리발과 같다. 이것은 땅에서 움직이는 교회는 땅에 속하지 않았으며, 땅의 어떤 것도 주의하지 않고, 위의 것만을 주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막의 층

 

회막은 두 개의 층, 혹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있다. 바깥쪽은 성소이고 안쪽은 지성소이다. 그 이에 바깥마당이 있는데, 성경에서는 바깥뜰이라고 한다. 바깥들 주위에는 천으로 만든 포장이 있어 바깥뜰 전체를 싸고 있다. 회막은 바깥뜰의 포장인 외곽에서부터 세 부분, 즉 바깥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뉜다. 장막이 사람인 우리를 예표한다면 그 세분은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의 세부분을 예표하는 것이 분명한다. 우리 각 사람은 세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밖은 우리의 몸이고, 주금 안쪽이 우리의 혼이며, 가장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영이다. 혼은 속에 있지만 비교적 바깥부분과 가까우며, 영은 우리의 가장 내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회막이 사람의 방면을 예표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 교회를 예표하는 방면을 전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회막의 층은 교회 안의 영적 상태를 예표한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어 바깥뜰에서 사는 것 같다. 진보한 어떤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성소에서 사는 것과 같다. 또 더욱 진보한 어떤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성소에서 사는 것과 같다. 또 더욱 진보한 어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는 지성소에 이른 것과 같다. 신약의 은혜아래서 주님만이 하늘에서 대제사장이고, 우리는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와 입장은 완전히 같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영적인 분량은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구약의 회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각종 사람들은 신약의 교회 안에서 개개인의 영적 상태를 예표한다.

 

구약에서 성막의 바깥뜰에서 섬기는 사람은 레위인 이고, 성소에서 섬기는 사람은ㅇ 제사장이며, 지성소에 들어가 섬기는 사람은 대제사장이다. 신약의 은혜아래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대제사장과 제사장과 레위인 을 나주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벧전 2:5)으로서 서로 같다. 다만 주 예수님 자신만이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히 4:14).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분량이나 영적인 체험에서 어떤 성도의 상태는 레위인과 같고, 어떤 성도의 상태는 제사장과 같으며, 어떤 성도의 상태는 지성소 안에 들어간 사람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정확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결코 유대교 안에 있는 등급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영적인 분량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위상 등급은 없기 때문에 일등, 이등, 삼등을 나룰 수는 없다. 지위에서 다만 모든 사람은 제사장이다. 그러나 분량과 영적인 체험에서 어떤 사람은 바깥뜰에서 살고, 어떤 사람은 성소에 살며, 어떤 사람은 지성소에 산다.

 

바깥뜰

 

바깥뜰에 있는 사람은 제단과 물두멍을 접촉한다(출 40:29-32). 제단은 속죄하는 장소이고, 물두멍은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 곳이다. 이것은 우리가 갓 구원받았을 때의 상태이다. 여기에 회막과 관계가 없고 포장 밖에 있는 한 사람의 사람이 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소 한 마리와 양 한 마리를 이끌고 제단에 와서 속죄제를 드린다. 그는 그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가 제사장이면 물두멍에 와서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장막에서 일과 관계되려면 속죄와 정결하게 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사람이 장막에서 이일과 관계되려면 속죄와 정결하게 하는 두 가지 문제가 있음을 알려준다. 구원받은 사람이 받은 은혜는 죄의 구속과 몸의 정결케 됨이다. 이럴 때 그와 하나님 사이에 영원한 간격의 문제가 해결된다. 이것이 바깥뜰에 있는 사람의 상태이다.

 

이것은 비록 갓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키지만 오늘날, 많은 형제자매들은 구원받은 지 십 변, 이십 년이 지났으나 영적인 상태는 여전히 바깥뜰에 있다. 그들에게 간증을 부탁하며 그들의 간증은 바깥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제단이나 물두멍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죄가 어떻게 용서받고, 어떻게 씻음을 받았는가만 간증한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갓 구원받은 사람처럼 아주 낮다.

 

성소

 

바깥뜰에 있는 사람보다 성소 안에 있는 사람의 영적 상태는 좀 더 깊다. 성소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있다. 진설병이 있는 상과 금등대와 향단이 있다(출 25:23-31, 30:1-6). 세 가지 물건 모두 그리스도 자신을 말한다. 진설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시며, 금등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의 빛이시며, 향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되게 하시는 분임을 말한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체험이 되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성소 안에 있는 사람은 바깥뜰에 있는 사람보다 더 깊고 더 진보한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 가운데 살기 시작한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는 하나님과 교통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이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이 되시고, 생명의 빛이 되시며, 그가 하나님과 교통 하는 근거가 되셨지만 대부분 그의 상태는 여전히 그이 혼 안에 있다. 어떤 일을 언급하기만 하면 그의 혼은 흥분하고, 그의 감정은 달콤해져서 사람들에게 이것을 간증하기를 좋아한다. 그가 이렇게 쉽게 흥분하고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영적 상태가 아직 성소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지성소

 

예표에서 성소는 혼을 가리킨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서 성소는 우리 자신을 가리키다. 그러나 회막의 예표를 연구하는 사람은 바깥뜰이 겉사람을 가리키는 지 아니면 성소가 겉사람을 가리키는 지에 대해 난감해할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외적으로 볼 때 바깥뜰은 밖에 있고 성소와 지성소는 안에 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성소는 겉사람을 가리킨다. 우리는 회막 안에 휘장이 있다는 것을 안다. 또 히브리서 10장은 그 휘장이 육체가 되신 주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킨다고 말한다.(20절). 그 육체는 또한 우리자신이다. 그러므로 성소는 실제적으로 “사람”의 방면만 있지 “하나님”의 방면은 없다.

 

물론 바깥뜰의 측면에서 볼 때 성소는 안에 있다. 그러나 휘장의 측면에서 볼 때 성소는 휘장 밖에 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성소에 들어가라고 하지 않고 지성소(19절, 원문참조)에, 즉 휘장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편에서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실 성소 안에 있는 진설병은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양식이심을 예표하지만 그리스도 자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금등대가 하나님께서 생명의 빛이심을 예표하지만 이것 역시 그리스도 자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향단이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기쁘게 받으심을 예표하지만 이것 역시 그리스도 자신은 아니다. 오직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가 그리스도 자신이며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지성소 안에 계시기 때문에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지성소 안에는 양식과 빛과 하나님이 기뻐하심이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혼에 영향을 주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혼을 만족하게 하시며 우리의 혼을 즐겁게 하시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있게 하시며 그분의 기뻐하심을 받을 수 있게 하신다. 이런 것은 혼 안의 상태이다. 비록 그리스도는 우리의 혼을 이러한 상태가 되게 하실 수는 있지만, 그분은 우리의 혼 안에 거하시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성소, 즉 사람의 혼 안에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실 수 있고, 우리를 비추실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화목과 타당함과 그분의 기쁨을 얻을 수 있게 하시지만 그분은 우리의 혼 안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휘장 안에 계신다.

 

때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만족하고 있으며, 얼마나 주님의 빛 비춤을 받고 기뻐하는지, 주님과 얼마나 달콤한 교통을 갖는지를 간증하는 형제자매들을 만난다. 이때 우리는 성소 안에 있는 그 형제자매가 이제 막 바깥뜰에서 성소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내적인 그리스도인 같으나 여전이 지성소 밖에 있고 아직 휘장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다.

 

어떤 성도들은 그가 큰 죄인이었으나 주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죄를 완전히 벗었다고 간증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셨기 때문에 지금 그는 실제로 해장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 주님을 섬기려고 한다. 이러한 간증을 통해 우리는 그가 제단과 물두멍이 있는 바깥뜰에서 소와 양을 잡고 손발을 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바깥뜰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반년이 지나서 이 성도는 또 그와 주님과의 교통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말하고, 만족을 얻었을 뿐 아니라 빛 비춤을 받아 안에 빛이 있다고 말하지 모른다. 그는 매우 흥분하여 그칠 줄 모르고 말한다. 이때 우리는 이 사람이 성소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진보했다. 이전에 그는 다만 주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 죽으시고 그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만 알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 안에 계시며, 그의 양식과 빛이 되셔서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는지 안다. 이때 그는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인 것 같으나 실지로는 아직 지성소 밖에 있으며 휘장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만야 그가 주님께 충성스럽다면 성령은 그에게 이러한 상태가 하나의 과정일 뿐 아직 종착점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실 것이다. 그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휘장 안으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교회 안에는 참되게 지성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성소 안에서 사는 사람보다 더 깊고, 참으로 “속사람”안에 산다. 그들은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만졌을 뿐 아니라 더욱 지성소 안에 들어갔다. 그들은 외적으로 영향을 조금 받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깊은 속을 만지셨다. 이것이 지성소 안이다. 지성소 안에는 진설병과 금등대와 향단이 없다. 다시 말해서 진설병은 언약궤 안의 감추어진 만가가 되었고, 금등대는 언약궤 안의 감추어진 법이 되었으며, 향단 또한 언약궤 안의 감추어진 싹이 난 지팡이가 되었다(히9:3-4).

 

이 언약궤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깊은 곳에 들어간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몇 마디의 말을 하지 않고, 그렇게 흥분하지 않으며, 심지어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당신은 그에게서 견고한 것을 만질 수 있다. 그 사람은 이전에 성소에 있을 때의 상태와 완전히 다르다. 성소 안에 있는 어떤 사람을 만지면 그는 즉시 기도하며, 그의 기도는 성소 안에 있는 향단에서 피어나는 향기와 같다. 그뿐 아니라 그의 거의 하루 종일 향을 피우고 기도한다. 그는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당신은 지성소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흥분하거나 심지어 기도하며 간증하는 것도 많이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를 접촉할 때 그 안에 보배가 있으며, 그 속에 남과 다른 어떤 것이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 사람 밖으로 비추는 빛은 많지 않지만 그 사람 안에 숨겨진 것은 매우 확고하다. 성소 안에서는 모든 것이 나타나지만 지성소 안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다. 지성소 안에 있는 사람은 성소 안에 있는 사람처럼 흥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나타남이 많이 않지만 안에서는 견고하다.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성소 안에서는 사는 매우 분량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등급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분량의 문제이며, 영적인 체험과 정도의 문제이다. 등급을 교회에 가져온다면 교회는 유대교로 변하게 된다. 떡 떼는 집회에서 성도들은 모두 주님 앞에 온다. 그들의 지위는 제사장으로서 모두 같다. 그러나 어떤 성도가 입을 열어 기도하며 찬송할 때, 사람들은 그가 바깥뜰에 있는 사람이거나 성소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 감사와 찬미는 마치 주님의 상을 둘러싼 것 같지만 실지로는 제단을 둘러싸고 있다. 우리가 주님의 상 앞에서 감사와 찬미의 말을 들을 때 그들에 있는 영적인 분량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을 많이하지 않고 목소리가 크지 않으며 흥분하지도 않지만 그가 입을 열면 당신은 그가 지성소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당신은 그 가운데서 하늘을 만지고 하나님을 만진다.

 

작년 11월에 한 형제가 영국에서 중국으로 왔다. 처음 며칠 동안 어떤 형제들은 소위 부흥 가운데서 집회소 지붕이 날아갈듯 흥분하여 기도했다. 그때 많은 형제자매들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만지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만진 것 같았으며 공중에 떠오른 것 같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형제자매들의 기도와 간증을 들으면 들을수록 , 나는 안에서 그들이 성소 안에 있으며, 혼 에 속했을 뿐 아니라 혼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교회 안에서 영적인 분량은 차이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깥뜰에 있고,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이 성소에 있으며,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이 지성소에 있다. 이 예표의 그림은 매우 적합하다. 주일 집회 때 많은 사람들이 아내와 자녀를 데리고 오고, “어린양”과 “소”를 갖고 와서 즐겁게 제사를 드린다. 이것은 바깥뜰의 광경이다.

화요일 기도집회가 되면 인수는 적지만 주일 오전 보다 깊어지고 성소의 맛이 난다. 기도할 때 우리는 가끔씩 어떤 성도들에게서 그리스도를 만지고,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만진다. 그것이 지성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영적인 상태는 세부분으로 나룰 수 있다.


 

제11장

교회의 예표(5) - 장막(1)

 

 

 

장막

 

이번 장에서는 장막이 어떻게 교회를 예표하는지 볼 것이다(출 26장, 36장).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부터 있었다.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이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장막을 둘러싸고 진을 쳤으며, 장막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었다.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집결할 때마다 모두 회막문 앞에 모였다(29:42-23). 그러므로 장은 회막(會幕)이라고도 불렀다. 이 장막, 즉 회복은 예표에서 네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장막은 주 예수님을 예표한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에 거하시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거하시매”는 헬라어 원문에서 “장막을 치시매“라는 의미이다. 주 예수님께서 육체가 되신 것은 곧 그분께서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신 것이다. 주님께서 사람가운데 사시는 것이 바로 육체를 통해 사람들 가운에 장막을 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막의 첫 번째 예표는 주 예수님께서 육체가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이다. 장막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의 처소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사람들이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 처소이다.

 

 

다시 말해서, 주 예수님께서 육체가 되신 것은 하나님께 이 땅에서 장막을 갖게 해드리는 것이요, 그분께 거하실 처소를 갖게 해드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육체 안에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도록 이 땅에 장막을 치시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했던 것이다.

 

 

둘째, 장막은 교회를 예표한다. 장막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인데, 이것은 교회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인 것을 묘사한다. 에베소서 2장 22절은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임을 보여준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확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인 장막이듯 교회도 그러하다.

 

 

셋째, 장막은 성도들을 예표한다. 모든 성도는 성령의 전이다(고전 6:19).그러므로 장막은 또한 성도들을 예표한다.

 

 

넷째, 장막은 장래의 새 예루살렘을 예표한다. 계시록 21장은 장래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하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실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3절). 그러므로 장막은 또한 새 예루살렘을 예표한다.

 

 

교회 전체로 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장막이다. 교회의 각 지체들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장막이다. 즉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이요, 하나님의 거처이다. 하나님께서 역대로 일하심으로 구속하신 사람들의 집대성은 장래 큰 장막, 곧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인 새 예루살렘일 것이다. 이러한 실재가 오기 전에 구약은 하나님의 그림자와 예표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땅에서 그분의 처소를 얻으시는가를 묘사하는데, 그것이 바로 장막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두 번째 예표의 의미인 교회를 예표하는 장막을 중점적으로 볼 것이다.

 

 

장막의 기반

 

 

장막은 마치 천막과 같은 간단한 건축물로서 견고한 기반이 있어야만 비로소 서 있을 수 있다. 장막의 기반은 은으로 만든 받침대이다. 출애굽기에서 은은 생명을 사오기 위한 것이다(30:11-16). 그러므로 은은 구속을 의미한다. 이처럼 장막의기반이 되는 은 받침대는 구속을 의미하는 은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교회의 기반, 즉 교회의 하나님 앞에서의 입장을 예표하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속을 의미한다. 출애굽기는 은 받침 하나가 은 한 달란트의 무게임을 보여준다(39:27). 한 달란트는 약 40(34.3)킬로그램(참조 계 26:21)인데, 전체 장막은 100개의 은 받침으로 되어있었으므로 상당히 무거웠다.

 

 

만일 은 받침의 무게가 충분하지 않다면 장막은 받침 위에서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하던 시기에 장막의 기반이 견고하지 않았다면, 사막에서 큰 바람이 불어올 때 모든 장막이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은 받침의 무게가 충분히 무거워야만 장막이 견고하게 지탱될 수 있었다. 장막은 완전히 은 받침의 어떠함에 의존했다. 이것은 교회가 반드시 하나의 터, 기반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견고하며, 요동하지 않고, 어떠한 풍파에도 요동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그리스도의구속이다. 이것이 은 받침이 예표하는 바이다.

 

 

널판

 

 

 

장막의 판은 널판이라고 불렀다(출 26:15)장막은 움직이는 건축물로서 수시로 헐 수 있고 언제든 이동할 수 있으며, 또 언제든 조립해서 접어 둘 수 있었다. 따라서 장막의모든 부분은 활동적이다. 장막은 회막이라고도 하는데, 마흔 여덟 개의 널판으로 되어 있고 그 널판은 몇 가지 면을 예표한다.

 


두 본성의 구성체

 

 

모든 널판은 금으로 싸인 나무로 되어 있다. 안은 조각목이고 밖은 정금으로서 금으로 나무을 싼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두 가지 본성의 구성체이다(출 26:29, 25:10-11, 36:36). 금은 하나님의 본성을 예표하는데, 하나님의 본성은 하나님의 생명에 있고,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금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예표에서 나무는 사람의 본성을 가리킨다. 나무와 금을 함께 둘 뿐 아니라 하나로 연합시킨 것은 교회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임을 예표한다. 따라서 이것은 두 가지 성분의 구성체이다.

 

 

조각목은 견고하고 고상한 종류의 나무로 주님의 인성의 면을 예표한다. 주님의 인성, 즉 그분의 사람의 부분은 견고하고 고상하다. 구원받은 우리는 원래 아주 약하고, 형편없고, 건친 사람들이라고해서 우리가 교회에서도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참되게 구원받은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과정을 거쳐 새롭게 얻게 된 부분의 인성은 마땅히 조각목으로 간주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는 견고하고 강건했으며, 조각목과 같았다. 그의 생각은 분명했고, 판단력을 정확했으며, 의지는 견고했다. 또한 감정은 풍부하고 합당했다. 그러나 사람이 사탄과 죄에 침해당하고 타락하면서 인성이 손상되었고 결국 점점 어둠과 연약함 속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할 뿐 아니라 이 땅의 유혹을 벗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새롭게 조성한다.

 

 

하나님께서 이 두 번째 창조 안에서 사용하시는 재료는 처음보다 더 높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는 땅의 진흙을 원료로 사용하셨다. 그러나 두 번째 창조에서는 금을 사용하셨으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원료에 더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후, 사람은 행위가 변화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성격도 변화되어야 한다. 원래 흐리멍덩하던 사람이 구원받은 후 생각이 분명해지며, 원래 의지가 약했던 사람이 구원받은 후 의지가 강해진다. 원래 판단이 정확하지 않았던 사람이 구원받은 후 판단이 정확해 진다.

 

 

조각목은 질이 좋은 나무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을 높은 인격 안으로 옮겨 놓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도들에게 그러한 구원이 뚜렷하지 않다. 우리들은 비록 구원받았으나, 질적으로 큰 변화가 없다. 흐리멍덩하던 사람은 여전히 흐리멍덩하고, 성격이 견고하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견고하지 않고, 판단이 정확하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부정확하다. 생활 중에 말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고, 시간을 준수하지 않으며, 진실함과 견고함이 여전히 부족하다. 왜냐하면 비록 사람이 구원을 받았으나 그가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 안에 운행하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은혜를 받았으나,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 안에서 사람의 품격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그들의 행위를 바꾸어 준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예전에 화내기를 좋아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람의 품격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타고난 성격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는 특별히 성도들이 성격을 훈련하기를 요구했으나, 지금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충분히 운행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다만 기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과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도록 해야 한다. 말함에서도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하며, 말해야 할 것은 반드시 확신 있고, 정확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높은 품격을 소유하고 우리의 성격이 강화되어 무엇을 하든지 뛰어나고 탁월해야 한다. 쓸모없는 나무가 조각목으로 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성격에서 구원받지 못하면, 성경의 진리를 분별할 때 영원히 정확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정확한 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실하고 정확하고 엄격한 성격이 필요하다.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성경을 읽어 낼 수 있다. 느슨한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면, 영원히 분명하지 않을 것이며, 정확한 사람이 성경을 읽은 다면 정확하게 성경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격의 문제이다. 성경을 읽는 문제에서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섬김도 이와 같다. 만일 우리의 성격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가볍고 느슨할 것이다. 만약 이렇다면 주님의 손에서 우리는 별로 유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봉사는 반드시 구원받은 인성으로 해야 한다.

 

 

회막 안에 있는 조각목은 하나님과 협력하는 인성을 예표한다. 이것은 타락하지 않은 고양된 인성이다. 어떤 봉사를 하든지 우리는 그것이 조각목인지 “버려진 나무”인지 자문해야한다. 우리가 일을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일을 이렇게 안배하든 저렇게 결정하든 우리는 그것이 견고하고 정확한지, 아니면 임의대로 하고 건성으로 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천성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봄으로 구원을 얻고, 나아가 우리의 성격을 훈련해야한다. 교회 안에서 인성은 모두 조각목이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자주 말에 정확하지 않고, 시간을 지키지 않으며, 일을 느슨하게 하다가 기도할 때가 되면 흥분하고 떠들썩하여 사람들에게 그들이 아주 신령하다는 느낌을 주다. 이런 사람은 단지 공허한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기도로써 그들의 성격을 온전케 해야 한다. 그들은 주님 앞에 무릎 끓고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의 이런 정확하지 않은 성격을 철저히 변화시키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조각목으로 변하게 되며, 교회는 더욱 강화된다.

 

 

장막이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금 때문이 아니라 널판 때문이다. 금은 귀하지만 금 자체는 약하여 단독으로서 있지 못한다. 널판을 의지해야만 장막이 서 있을 수 있다. 교회가 이천 년간의 역사에서 강하게 서있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부분 인성의 성분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마르틴 루터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각목같았기 때문에 일어나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다. 1942년에 나는 조지 뮐러의 전기(傳記)를 샀는데, 그 책에 그의 서재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에서 서재의 배치는 얼마나 정교하고 정결했는지, 보는 사람이 존경심을 느낄 정도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은 그 시대에 그에게 위임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뮐러를 선택하신 것은 그가 어디에도 굴하지 않는 견고한 조각목이었기 때문이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사람이 더해질수록 교회는 분명 강하게 일어날 것이다. 널판은 금으로 싼 나무로 되어있지만, 널판이 서 있는 것은 주로 조각목의 견고성에 달려 있다. 많은 각지에 있는 교회들이 연약한 것은 형제자매들의 인성이 약하고 조각목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성이 없는 영적인 사람을 두실 생각이 없으셨다. 내 말은 강한 인성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강화된 인성을 갖고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영적인 사람은 인성과 신성이 연합된 사람이다. 절대로 사람의 성분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인성은 반드시 독립되지 않고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으며,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과 연합된 인성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속에는 기본적인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강인한 성격의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귀용 부인은 비록 자매였으나, 그녀 역시 강인한 성격을 가졌다. 존 번연 또한 주님을 위해 아름다운 간증을 가졌고, 다비 형제는 주님에게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이었다. 여기 언급된 모든 사람은 참으로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모두 조각목으로서 강인하여 주님을 위해 영광의 간증을 위해 서 있을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유용하려면, 하나님의 생명과 영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해야 한다. 시멘트 같은 우리의 타고난 성격은 끊임없이 성령의 물이 들어와야 만이 견고하고 강하게 될 수 있다. 견고한 성격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유용하게 될 것이다.

 

 

회막이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회막 아래 견고한 은 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것이 기반이다. 그러나 견고하고 단단한 조각목이 있어야만 이것을 지탱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를 굳건하게 서 있게 하는 것은 구속의 기반과 견고한 인성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고, 하나님께서 하셔야하며, 사람과 무관하고 사람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관념을 갖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칠 팔세의 어린아이를 통해 강한 교회를 세우실 수 없다. 인성이 성숙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하나님만 있고 사람이 없다면, 즉 신성만 있고 인성이 없다면, 강한 교회를 세울 길이 없다. 신성이 인성 위에 지탱되기 때문에 강한 인성이 있어야 교회가 일어날 수 있다. 금으로 나무를 덮은 것이라야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구원받은 이들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밖으로는 육체가 있다. 그러나 널판은 우리에게 밖은 신성이고, 안은 인성인, 즉 신성이 인성에 의해 지탱되는 것을 보여준다. 서 있는 것은 조각목이고 겉으로 표현된 것은 정금이다. 종교 개혁 당시에 일어난 것은 루터이지만 그에게서 표현된 것은 금이요 하나님이었다. 이것이 금으로 덮인 조각목의 원칙이다. 교회가 얼마나 강한가는 주로 인성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성경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영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교회의 강함은 견고하고 강한 인성에서 비롯된다. 널판의 그림은 교회가 구속의 기반과 견고하고 강한 인성으로서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두 개의 촉

 

 

각 널판 아래 모두 두 개의 촉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도 아니요ㅗ 셋도 아니 두 개다(출 36:22). 성경에서 둘(2)은 간증의 숫자이다. 이 간증의 숫자의 의미는 단독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은 두 개의 다리로 서 있다. 비록 한 사람이 서 있지만 두 개의 다리를 사용하는 것은 단독이 아니라는 것을 표명한다. 교회 안에서 어떤 형제자매는 한 다리로 서기 때문에 견고하게 서지 못한다. 그들은 단독적이며 간증이 없다.

 

 

하나의 널판에 두 개의 촉이 있고, 촉 아래 홈을 가진 두 개의받침이 있다. 이 두개의 촉이 홈을 가진 두 개의 받침과 결합하는데, 이것이 바로 간증이다(출 36:22,24, 30, 원문참조). 만약 옥 하나에 홈 하나만 있다면 간증이 아닐 것이다. 두 개의 촉과 두 개의 홈은 제대로 맞추어져야 한다. 이 촉은 이 홈에도 딱 들어맞고, 저 홈에도 딱들어 맞아야 한다. 두 개가 모두 매우 올바른데,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간증이 된다. 만일 하나의 널판이 다른 하나의 촉만 갖고 하나의 홈 안에만 놓여진다면 그 널판은 아무렇게나 놓일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촉은 반드시 모두 들어맞아야 한다. 한 쪽만 맞아서는 안 되고, 두 개가 모두 맞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간증이다. 이 예표가 담고 있는 의미는 어떤 하나의 널판도 단독적으로 서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의 널판이라 할지라도 촉은 두개를 갖고 있다. 교회도 같은 원칙으로, 모든 사람이 서 있는 위치는 두 개의 촉이어야만 한다. 어떤 것을 하든 단독적이어서는 안 된다. 모두 두 개의 홈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 확증할 수 있어야한다. 이렇게 할 때만이 비로소 안정적으로 서있을 수 있다.

 

 

하나의 띠

 

 

널판 사이에 띠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허리띠와 같다. 그띠는 모든 널판들을 하나로 연결한다(출 36:31-34). 그러므로 그 띠는 성령의 하나를 예표한다(참조 엡 4:3). 원래는 낱낱이 개별적인 널판들인데, 띠가 더해짐으로서 널판들이 하나가 되었다. 교회도 이와 같다. 형제자매들은 모두 개별적이지만, 성령께서 모든 사람 안에서 띠가 되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

 

띠는 널판의 금고리 사이를 가로지른다(출 36:34). 그 금고리는 리브가의 코에 걸려 있던 금고리에 비유할 수 있다(창 24:47). 널판은 조각목을 통해 서 있고, 금고리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로 연결시키신다. 그분은 우리가 구원받은 날, 우리 안에 신성한 생명으로 들어오시는데, 이것이 바로금고리가 예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는 성령 안에 있고, 하나님의 생명 안에 있다.

 

 

교회의 하나는 사람 안에 있지 않다. 사람 안에는 오직 분열만 있다. 교회의 하나는 완전히 하나님 안에 있다. 회막 안에서 널판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벽을 이룬 것은 나무에 달려있지 않고 금고리에 달려있다. 널판은 본래 다수였으며, 독립적이고 흩어지는 것이지만 금고리를 통해 연결되었다. 널판은 영원히 연결될 수 없는 것이었으나 하나로 연합되었으며, 하나의 벽이 되었고, 금고리 위의 띠들로 연결되었다. 회막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널판들은 교회 안의 개개의 성도들과 그 각사람 안에 인성과 신성이 인성이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우리의 인성으로는 서로 융화될 수 없다. 그러나 신성 안에서 우리는 연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안에 살 때 흩어지게 될 것이지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 안에 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이다. 교회의 하나는 완전히 성령 안에 있다.

 

 

오순절 날 강림하셔서 교회를 산출하신 그 영은 인성을 갖고 계신다. 그래서 띠들은 외적으로는 금이지만, 내적으로는 나무이다. 여기에 하나의 커다란 중점이 있는데, 그것은 앤드루 머리에 이르러서 비로소 분명해졌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이셨을 뿐 인성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셨다. 그분의 영은 다만 신성할 뿐이었다. 그러나 육체가 되시면서, 신성이 인성 안으로 들어왔고, 그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하나님은 인성을부활 안에 이끌어 오셨다. 따라서 그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을 때(고전 15:45하), 신성을 지니셨을 뿐 아니라 인성도 지니게 되었다.

 

 

요한복음 7장은 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부활 이전에는 아직 그 영이 계시지 않았다고 말한다(39절). 그때 하나님의 영은 계셨지만, 그 영은 계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구약 전체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는 사용된 적이 없으며, 주님께서 육체가 되시고 나서야 비로소 성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결국, “성령”은 인성을 지닌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성령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 바로 이 영께서 모든 성도들을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

 

 

제10장

교회에 관한 예표(4) - 이스라엘백성

 

 

구약에서 우리는 교회에 관한 예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여자의 예표이고, 다른 한 가지는 처소, 즉 거처인 장막, 전, 성소의 예표이다. 이 두 가지의 예표사이에서 연관성을 갖고 있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은 왜 이 두 가지 예표와 관련이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한 면으로 단체적인 여자이고, 다른 면으로 하나님의 처소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분의 배필, 즉 아내로 삼으셨다.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이사야서에서도 이런 말씀이 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는 하나님 앞에서 여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처로 예표되고 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일 때, 바로 그것이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처소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 한 면에서 여자요, 다른 면으로는 하나님의 거처인 것과 같다.

 

 

에베소서는 분명하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배필이요(5:31-32),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임을 말하고 있다(2:22). 계시록에서도 새 예루살렘과 어린양의 아내(21:2, 9)를 언급하며, 교회가 하나님의 처소요, 하나님의 배필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구약의 예표에서, 여자와 처소의 두 가지 예표사이에 있으며, 이 두 가지 예표는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에게서 여인과 처소를 볼 수 있다.

 

 

하와, 리브가, 술람미의 예표에서 우리는 처소를 볼 수 없다. 반면, 장막과 성의 예표에서는 여자를 볼 수 없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만 우리는 여자와 처소를 함께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예표는 완전하며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처음과 끝이 있으며 그 과정이 있다. 이스라엘은 앞 장들에서 본 바와 같이 교회를 예표하고 있는 일곱 명의 여인들과는 또 다른 한 가지 중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그 과정을 통과하는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예표한다.

 

 

고린도전서 5장은 유월절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유월절을 지낸 것이 바로 교회전체가 유월절을 지낸 것임을 보여준다. 7절은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유월절을 지내는 것이 개인적인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늘은 이 사람이 유월절을 지내고, 내일은 다른 사람이 유월절을 지내는 것이 아니다. 단체적으로 동시에 유월절을 지낸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당신과 나, 심지어 사도바울과 베드로 모두가 함께, 같은 시간에 유월절을 보낸 것이다.

 

이 예표는 정월 초일일에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이 회개하면 양한마리를 잡아서 유월절을 지내고, 2주 후 정월 14일에 또 한 사람이 회개하면 또 다른 양 한 마리를 잡아 유월절을 지내라는 뜻이 아니다. 이 예표는 모든 하나님의 선민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유월절을 지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5장은 개인의 구원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유월절을 지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 10장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광야를 통과한 모든 과정이교회가 어떻게 세상에서 나와서 광야를 통과하는 가에 대한 예표임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서,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이스라엘 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거치고, 소수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을 얻은 것을 말하는데, 이것 또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일이다.

 

이상의 몇몇 성경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전체 이야기가 모두 교회를 예표하는 것임을 증명한다. 이 예표는 단순히 몇 가지 점만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하고, 체계가 있고, 처음과 끝이 있으며 과정이 있다. 이제 이것을 한 항목씩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하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전에, 그분은 그들을 그분의 백성으로 이미 선택하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선택된 백성이다. 이것은 교회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음을 예표한다.

 

 

이집트로 내려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 내려가 바로의 손아래 떨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교회가 사탄에 속한 세상에 떨어지고,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예표한다.

 

 

하나님의 구속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유월절을 보낸 것은 교회가 구속받은 것을 예표한다. 교회는 세상과 사탄의 권세 아래 떨어졌을 뿐 아니라 죄악과 하나님의 유죄 판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유월절의구속이 필요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구출해 냄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것은 곧 세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다. 홍해를 건넌 것은 교회가 침례 받은 것을 의미하며,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매장됨을 예표한다. 홍해의 물은 하나님의 백성과 이집트로 갈라놓은 물로서 바로 침례의 물이다. 이 물이 교회와 세상을 영원히 갈라놓았다. 이 물을 통해 교회는 세상에서 나왔다. 침례는 바로 사람을 세상에서 구출해 내는 것이며, 매장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영원히 분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양면이 있는데, 하나는 구속이고 다른 하나는 구출이다. 타락한사람은 하나님의 유죄 판결 아래 놓였을 뿐 아니라 사탄의 압제 아래 있다. 하나님의 유죄 판결이라는 면에서는 어린양의 죽음과 피 흘림으로 죄를 속량할 필요가 있다. 사탄의 압제라는 면에서는 하나님의 날개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구출이 필요하다. 타락의 순서를 보면, 사람은 먼저 사탄의 권세 아래 떨어졌고, 하나님의 유죄판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구원의 순서를 보면, 사람은 먼저 구속되어 유죄 판결에서 벗어나고, 그 후 압제에서 벗어나 구출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지내면서 어린양을 잡고 피를 바르는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의 구속의 이야기이지 결코 능력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대치되는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어린양이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벗어날 때, 그들을 뒤쫓던 이집트의 군사들은 모두 홍해에 빠졌다. 그때 그들이 본 것은 하나님의 큰 능력과 보호하는 날개이다. 이것은 구속이 아니라 능력이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발생했다. 우리는 한 면에서 주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유죄판결을 면하고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 동시에 성령의 큰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는 사탄의 압제에서 구출되었으며, 이집트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광야를 통과함

 

 

이집트는 사탄의 점유하고 차지한 세상이며, 하나님의 선민을 강탈한 곳이다. 광야는 사람이 세상에서 표류하거나, 혹은 선민들이 거쳐 간곳을 말한다. 전자는 하나님의 선민이 구원받기 전에 거했던 곳이며, 후자는 하나님의 선민이 구원받은 후 통과 하는 곳이다. 한 면으로 교회는 사탄이 강탈한 세상 속에서 나왔다. 다른 면으로 교회는 이 땅에 남아서 광야를 표류하며 나그네로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광야의 또 다른 영적 의미는 교회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시기를 뜻한다. 이 미성숙한 표류시기 가운에, 교회는 아직 하나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요구에 따른 표준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광야를 가는 것에도 두 방면의 예표가 있다. 하나는 교회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표류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가 아직 성숙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하늘에 속한 가나안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집트와 광야는 교회에 대해 모두 세상을 예표한다. 이집트는 사람을 점유한 세상을 예표하고, 광야는 표류하는 세상을 예표한다. 이집트는 하나님의 선민을 강탈한 곳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선민이 거쳐 가는 곳이다. 따라서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이집트에 있었고, 구원받은 후에는 광야에 있게 된다. 구원받기 전에는 세상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구원받은 후 세상은 다만 우리가 지나가는 곳이 되었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표류하고, 정처 없이 각처에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요, 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민의 장막은 움직이며, 뿌리가 없고, 일반적인 집과 같은 정해진 위치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한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었던 것이 교회가 세사에서 표류하고 지나감을 예표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또 다른 면에서 교회가 성숙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지 못했으며, 영적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예표한다.

 

 

광야에서의 실패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역사는 완전히 실패의 역사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기까지 38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 40여 년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실패가 있었다. 이러한 실패는 완전히 교회의 실패의 광경을 묘사한다. 교회의 모든 어려움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 가운데서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은 참으로 교회의 실패를 그린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이러한 실패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씩 실족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역사를 읽은 후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실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만이 실패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실패했다. 우리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낙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볼 때, 패배자들은 모두 늙고 낡은 자들이었다. 낡아진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실패는 교회에 대해 두 가지 예표를 갖고 있다. 한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한 사람은 교회의 실패한 사람을 예표하고, 또 한 면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출생하고 낡아지고 늙었기 때문에 교회의 옛 창조를 예표한다. 낡아진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죽었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옛 창조의부분이 표류하는 동안 죽어야하며, 새 창조만이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광야의 실패 역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 중 실패한 자는 교회 안에서 실패한 자들 예표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일들은 교회역사가 거친 모든 실패를 예표한다. 계시록의 일곱 서신에서 언급한 발람의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인데, 이것은 이 방면에서의 교회의 실패를 예표한다. 그리고 실패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 있는 옛 창조에 속한 타고난 본성이 완전히 끝날 때, 비로소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예표한다. 이것은 마치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 옛 세대는 모두 죽고, 새로 태어난 세대만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과 같다. 이것은 그들이 요단강을 건넌 것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모든 사람은 요단 강을 건넜는데, 이것은 옛사람이 매장되고 죽음에서 부활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옛것이아니라 새것이 되었다. 새 것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지에 이를 수 있다.

 

 

요단강을 건넘

 

 

침례 받을 때 주된 일은 세상을 매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체험 가운데, 두 번째 매장이 있는데, 이것은 요단강을 건너 옛사람을 묻는 것이다. 이스라엘백성은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떠났다. 그들의 광야에서의 실패는 이집트의 일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옛사람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의 옛 창조에 속한 본성을 끝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침례를 통해 세상을 장사지내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것에 이어 우리는 광야를 지나 요단강에서 옛사람을 장사지내야만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의 중점은 낡은 것과 옛것이 죽고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다. 홍해에 묻힌 것은 이집트의 군병이었고, 요단강의 물에 매장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그들은 열두 개의 돌을 요단강의 물속에 남겼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옛사람이 물에 매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들은 다른 열두 개의 돌을 요단강에서 취하여 가나안 땅에 두었다(수 4장).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세대가 하나님의 목적에 도달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매장되어야 하고, 새사람만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를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이 예표에는 두 가지의미가 있다. 한 면에서 교회가 어느 날 참되게 요단강을 건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모든 옛창조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창조 안에 있게 될 때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게 된다. 다른 면에서는 영적인 노정에서 교회와 개인의 생명은 계속 전진하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에 비로소 광야의 표류하는 생활이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영에 속한 실제적인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옛 창조를 끝낼 때, 비로소 새창조 안에 살게 된다. 이 끝냄은 바로 요단강의 물이다. 요단강을 건넌 후에는 영적인 전쟁이 있다.

 

 

홍해에서 매장된 것과 요단강에서 매장된 것은 다르다. 홍해의 물에 매장된 것은 이집트의 군병이고, 요단강에서 매장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우리가 침례 받을 때, 비록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매장되었으나, 매장된 것은 세상뿐이다. 우리는 또 다른 매장을 체험하는데, 바로 요단강이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표류하는 생활을 끝내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끝나는 것이다. 두 종류의물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다.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을 처리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자아를 끝낸다. 체험 안에서 우리가 세상을 처리하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옛 창조, 즉 육체가 아직 존재하기 때문에 방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실패는 이집트에 속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육체에서 나온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와 자아와 옛 창조는 끝나고, 요단강에 매장되며, 다시 새롭게 시작할 때만이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

 

 

가나안에 들어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두 방면의 예표를 포함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예표하고, 다른 하나는 에베소서에서 말한 “하늘들”을 예표한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풍성(3;8)에 대해 말하고, 또한 하늘들을 언급한다(1:3, 2:6). 구약의 여호수아서는 신약의 에베소서에 비유할 수 있다. 여호수아서에서 기록한 것은 가나안이고, 에베소서에서 기록한 것도 가나안이다. 가나안은 그리스도의 풍성과 영적인 전쟁이라는 두 개의 중점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가나안 땅의 풍성을 누리지만 또한 전쟁도 있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때, 즉시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게 되고, 동시에 영적인 전쟁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혹은 에베소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경지에 이르게 될 때, 즉시 이 두 가지 일이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풍성을 예표함

 

 

 

구약에서 가나안의 풍성을 묘사할 때, 세 가지를 사용하는데, 젖과 꿀과 포도이다. 동물성과 식물성 두 가지를 다 포함한 젖과 꿀은 풍성의 결정이다. 소와 양이 풀을 먹어 산출한 것이 젖이 된다. 따라서 젖은 동물성과 식물성을 배합하여 산출된 결정이다. 꿀벌은 꽃에서 꿀을 얻는데, 꿀벌은 동물이며, 꽃은 식물이다. 따라서 꿀은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을 가미해 산출된 결정체이다. 황폐한 땅에는 동물의 생명이 없을 뿐 아니라 식물의 생명도 없기 때문에 결코 젖과 꿀을 산출 할 수 없다. 어떤 땅에서 젖과 꿀이 산출된다는 것은 그곳이 생명과 생명의 풍성으로 가득함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와 광야에서 먹었던 무교병과 쓴 나물과 만나는 그리스도를 예표하지만, 그리스도의 풍성을 예표하지는 못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젖과 꿀이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만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예표하는 아름다운 면이 있다. 그곳의 포도는 두 사람이 어깨로 메야 하는 크기였다(민 13:23). 그곳은 소산이 풍부했다. 특히 제6년째의 수확량은 2년을 더 유지할 만큼 많아서 경작하지 않는 7년의 필요도 채울 수 있었다(레 25:4, 19-21). 이것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말해준다.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이 있을 뿐 아니라 포도가 있다. 성경에서 포도의 용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술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삿 9;13, 시편 104:15), 포도주는 생명의 구원을 예표한다. 이로서 가나안 땅의 모든 풍성은 생명에 속한 것이고 생명에 속한 풍성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을 예표한다. 이 풍성은 에베소서에서 기록한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이다(3:8). 하나님의 백성 이 가나안 땅에 도달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에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서에서의 하늘들을 예표함

 

 

또 다른 의미에서 가나안은 에베소서에서의 하늘들을 예표한다. 가나안은 풍성한 소산물을 갖고 있지만 대적인 가나안 일곱 족속이 있다. 이들은 에베소서에서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악한 영의 권세, 즉 사탄과 그의 사자들(6:12)을 예표한다. 따라서 가나안의 이러한 풍성한 땅 안에 여전히 전쟁이 있다. 이 전쟁은 죄와 육체에 대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직접 악한 자 사탄과 싸우는 것이다.

 

교회가 광야의 표류 생활을 끝내고 그리스도의 풍성 안으로 들어갈 때, 동시에 영적인 전쟁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이 시기에 한 면으로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고, 다른 한 면으로는 영적인 전쟁을 하게 된다. 한 면에서는 가나안의 모든 풍성을 누리고, 다른 면에서는 매일 전쟁을 하여 하나님의 대적을 처리했다.

 

성경을 읽은 많은 이들은 구약의 여호수아서가 에베소서와 흡사하여 한 면에서는 풍성을 누리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한 면에서 영적인 영역 안에서 영적인 전쟁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두 권의 성경은 교회가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해 싸우는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 우리의 적은 세상이나 죄나 육체가 아니라 바로 사탄의 권세이며, 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은 여호수아서의 기록과 같이 가나안의 일곱 족속이다. 그들은 점차 이스라엘 백성을 곤경에 빠뜨렸고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이 되었다. 따라서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와 사무엘서에 언급된 전쟁이야기는 에베소서 2장, 3장, 6장과 연관된다. 이것은 교회가 어떻게 하면 승리하고, 어떻게 하면 실패하는지 말해준다. 우리는 이 가운에서 영적 전쟁에 관한 원칙을 읽어 낼 수 있다.

 

 

왕국을 세움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오자마자 전쟁이 시작되었고, 전쟁은 다윗 때까지 지속되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와 전쟁을 시작했고, 역대의 사사들도 모두 하나님을 위해 싸웠다. 사무엘도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싸운 사사였다. 사무엘에 이어 다윗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싸웠다. 이 전쟁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풍성이든 가나안 땅의 전쟁이든 그 목적과 결과는 모둔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옮겨지기 위한 것이다. 교회가 싸운 전쟁의 마지막 결과는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계시록 12장에서 교회 안의 이기는 이는 사탄과 전쟁을 하는데, 그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이다(10절). 오늘날 교회 안의 어떤 성도는 광야에, 어떤 이는 이미 가나안에 도착하여 하나님을 위해 전쟁을 할 수 있다. 전쟁의 결과 교회는 사탄을 공중에서 땅 아래로 내어 쫓을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땅에 임하게 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진 후, 평강의 왕 솔로몬이 보좌에 앉은 것은(왕상 1:12)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예표한다. 전쟁의 결과 주님은 다시 오실 수 있고, 그분의 나라가 임할 수 있다. 우리는 왕국을 세우고 평강의 왕이 보좌에 오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쟁을 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이 땅에 가져오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보좌에서 평강의왕으로서 모든 것을 다스리실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예표들은 단계적으로, 왕국이 세워지는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시 오셨을 때이다.

 

 

황폐케 됨

 

 

다윗과 솔로몬이 왕국을 세운 후에, 오래지 않아 이스라엘 왕국은 황폐해 졌다. 성전 건축 이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하나님께 드린 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했고(대하 7:1),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고, 황폐해졌으며, 그 결과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이스라엘백성이 왕국을 세우고, 서전을 건축한 것은 한 면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을 가져온 것을 예표하고, 다른 면에는 교회가 이미 하나의 목적에 이르렀고 영광으로 충만하게 된 것을 예표한다. 이것은 오순절 날의 교회의 광경을 예표한다.

 

 

솔로몬이 성전을 드리던 날, 그는 이미 다윗을 대치했다. 이것은 고난 받으신 예수님께서 이미 영광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예표한다.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0-31)라고 말했다. 다윗은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솔로몬의 시대가 되었다. 이 땅위에 참된 하나의 성전이 세워졌는데, 그 성전은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다. 성전이 드려진 그날부터 성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는데, 이것은 오순절 날 하나님의 영이 제자들 가운데 충만했던 것을 예표한다. 솔로몬이 성전을 드린 그날에 성전 안에 영광이 충만했던 것은 오순절 날의 광경을 예표한다.

 

그러나 성전을 완공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고 황폐해졌다. 이 황폐함은 교회가 오순절 날 이후에 황폐해졌음을 예표한다. 이것은 이세벨과 발람의 사례로 증명할 수 있다. 계시록의 일곱 서신 중 발람(2:14)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가 교회의 실패를 예표함을 증명한다.

 

 

황폐케 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사로잡혀갔다(왕하 24:13-16). 하나님의 눈에 바벨론은 로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은 교회가 로마에게 포로 될 것을 예표한다. 계시록 2장은 두아디라 교회(18절)와 이세벨(20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아디라 교회는 로마 천주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로마는 바로 바벨론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잡혀가게 된 주된 이유는 이세벨이다. 이세별과 아합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세벨은 아합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세벨은 아합의 집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가르쳤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분노하셨고(왕사 16:29-33),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세별의 사례는 이스라엘 백성의 황폐케 된 결과는 바벨론으로 완전히 사로잡혀 가는 것이다.

 

 

계시록 17장에 이르러, 교회는 이미 바벨론으로 하락했다(1-6절). 그때 “내 백성아, 그 성에서(원문참조)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18:4)라는 하늘에서의 소리가 있었다. 그 성이 바로 바벨론 성이며, 이것은 로마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바벨론 성이 있었던 곳은 일곱 산 위인데, 지리학자와 역사학자들은 로마가 일곱 산(언덕) 위에 있다고 말한다.(17:9).

 

 

교회의 황폐함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솔로몬 이후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역사를 기록한 열왕기상· 하와 역대상· 하를 반드시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이 네 권의 책은 완전히 교회의 황폐함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네 권의 책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책으로 읽지 말고, 교회를 묘사한 책으로 읽어 보라. 예를 들어, 여로보암이 단에서 한 일(왕상 12:26-30)은 참으로 빗나간 기독교의 어떠함이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떨어지게 한 요인이었는데, 이것은 모든 교회가 로마 천주교로 떨어지게 된 것을 예표한다. 그들의 황폐함은 교회의 황폐함이다.

 

 

성경전체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경은 시작 부분인 창세기 2장부터 한 쌍의 부부, 즉 아담과 하와를 보여준다. 그때부터 성경은 일관되게 한 아담과 한 하와를 말하고, 마지막에는 어린양이 신부를 취하는 것을 언급한다. 거기서 어린양은 아담이고, 그가 취하는 여인은 여전히 하와이다. 처음과 끝 사이에도 그 둘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이다. 절대로 열왕기와 역대기 등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만을 다루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성령의 계시가 없다면, 아마도 이 말씀들을 하나의 역사로만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교회의 어떠함이고, 교회에 관한 계시이며, 교회가 이 땅을 통과할 때 얼마나 황폐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약을 아무리 읽어도 교회에 관해서 분명히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을 자세히 읽어 본다면 교회에 관한 그림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실패한 것처럼 교회가 그렇게 실패했다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립 후 황폐하게 된 것처럼 교회가 그렇게 황폐해졌다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것처럼 교회 또한 그렇게 포로가 되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구약의 역사를 교회에 관한 생생한 묘사로 읽는다면, 한 항목 한 항목의 예표들을 읽어낼 수 잇을 것이다. 성경은 살아 있는 책이다. 그 가운데에 그리스도를 깨닫고 인식한다면, 교회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 두 가지 커다란 중점을 합하면 하나가되는 데, 그것은 곧 남편과 아내이다.

 

 

회복

 

 

솔로몬이 성전을 드릴 때, 전(殿) 안에는 제사장이 있었고, 성 안에는 왕이 있었다. 전은 성전을 의미하고, 성은 예루살렘 성을 말한다. 제사장은 레위인이고, 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곳이다. 왕은 유다지파 사람이고, 성은 하나님의 권위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는 곳이다. 제사장과 왕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서와 하나님의 계시를 중시했다.

 

이후에, 이스라엘 나라는 황폐해졌고, 전과 성은 모두 훼파되었으며, 율법서 또한 없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계시가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역사에서 우리는 교회가 황폐해짐으로 잃어버린 세 가지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계시임을 알 수 있다. 교회가 로마천주교로 떨어진 이후에, 하나님의 임재와 권위가 소멸되었고, 오직 사람의 권위만이 남게 되었다(참조 계 2:20). 또한 하나님의 계시가 없어지고 마귀적인 가르침(24절)과 사람의 의견만이 교회에 충만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의 시작은, 세 가지 노선, 즉 하나님의 전과 성과 말씀 안에서였다.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나왔다. 그들은 원래의 터로 돌아와, 성전과 거룩한 성을 중건하였고,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에스라는 주로 구약 율법의 교훈을 회복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성경의 율법을 강해했는데, 이것은 모세 때보다 더 분명했다(스 7:6, 10). 하나님의 회복의 나머지 두 가지 노선 가운에 하나는 전이요, 다른 하나는 성(城)이다. 전은 임재의 문제이고, 성은 권위의 문제이다. 전은 스룹바벨이 회복했고, 성은 느헤미야가 회복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자 율법학자였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는 총독이었고, 왕의 직분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회복은 세 가지를 포함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권위이다. 교회가 마르틴 루터부터 회복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어떤 이는 스룹바벨, 어떤 이는 에스라, 어떤 이는 느헤미야였다. 우리가 성경에서 그 책들을 읽을 때, 그들이 참으로 스룹바벨이고 에스라이며, 느헤미야임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회복하였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전의 회복이다. 조지 물러의 전기를 읽어보면,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만질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전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을 회복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이 예표하는 것과 신약의 교회의 회복은 완전히 일치한다. 회복의 시기 중에서 형제회의 교사들이 보았던 빛은 그전에 보았던 것들, 즉 과거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특별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본 것은 더욱 그러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한 것은 대단히 위대한 일이다. 물론 하나님의 전과 성을 회복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고, 성은 하나님의 권위를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권위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1장에 있는 형상과 권위의 두 노선이 내려온 것이다. 먼저 전을 회복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형상을 회복한 것이고, 성을 회복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회복한 것이다. 스룹바벨이 전을 회복하고 , 느헤미야가 성을 회복했으며,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했다. 교회 회복의 역사는 세 가지를 회복하는 것인데, 바로 하나님의 전과 하나님의 성과 말씀의 회복이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스가랴서와 말라기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된 이후, 비록 그들에게 약함과 실패가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영광의 소망이 있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전과 하나님의 성과 하나님의 말씀은 많은 부분 회복되었다. 우리는 어떤 이들에게서 강한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전의 회복이다. 어떤 이에게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성의 회복이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투명하게 교회 안에 충만하다. 2천 년간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과 같은 때가없었다. 오늘날 성경은 상당히 투명해졌다. 모세시대에 사람들은 율법을 인식하였고 오래지 않아 에스라 시대에는 더욱 그 인식이 깊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경은 천오백년 전부다 훨씬 투명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회복이다.

 

전이 회복되었고, 성이 회복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도 회복되었다. 비록 황폐함은 면할 수 없었으나, 황폐함 가운데 하나님의 회복은 지속되었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영광의 소망이 있었다.


 

제9장

교회에 관한 예표(3) - 술람미

 

 

술람미 -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을 누리는 교회를 예표함

 

 

다윗과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두 방면을 예표함

 

 

끝으로 구약에서 일곱 번째로 교회를 예표하는 여인을 술람미이다(아 6:13). 술람미는 솔로문의 왕비이다. 솔로몬은 부활하시고 영광을 얻으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술람미는 부활하고 영광을 얻은 교회를 예표한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것은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영광 안에 들어가셨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24장 26절에서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영광 안에 들어가실 것을 언급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 계시든, 장래에 이 땅에 오시든, 오늘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든 원칙적으로 모두 영광 안에 계신 것이다. 이와 같이 솔로몬은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리스도는 영광을 얻으시기 전에 이 땅에서 각종 고난을 통과하셨고 마지막으로 죽으셨다. 다윗은 고난을 거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그이아내 아비가일은 고난ㅂ다고 존군(從軍)하는 교회를 예표한다. 솔로몬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으셨음을 예표하고, 그의 왕비 술람미는 영광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누리는 교회를 예표한다. 아가서는 술람미가 어떻게 솔로몬을 체험하며 누리는 지를 말하는데, 이것은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아가서에서의 그리스도는 죽음을 거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시오, 죽음에서 나와 부활 안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매일 체험하는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접촉하고 교통하는 그리스도는 아가서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요,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이 땅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의지해 걸어갈 때, 우리는 고난 가운에 계신 그리스도를 살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의지할 때만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면에서 다윗과 솔로몬은 연결된다. 결코 다윗이 죽은 후에야 솔로몬이 있은 것이 아니다. 다윗이 있을 때 솔로몬이 있었다. 한 시기가 지나고 또 다른 시기가 온 것이 아니다. 이 두 시기는 하나의 체험의 양면이다. 다윗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면, 즉 생활상의 발자취를 예표한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면으로서 승천 안에 계신 그분의 능력을 예표한다. 주님은 예수의 면이 먼지이고, 그리스도의 면이 나중이다. 다윗이 먼저이고 솔로몬이 나중이다. 그러나 우리의 체험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먼저이시고 예수가 나중이시며, 솔로몬이 먼저이고 다윗이 나중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접촉하는 분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사실 진리에 부합하지 않은 말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다는 말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믿을 수 없다. 우리가 믿는 것을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사람의 제한을 돌파하셔서 이미 부활하셨고 성령 안에 계신다. 그분은 사망에서 나오셔서 영광 안에 들어가셨다. 이 영광은 부활이자 성령이다. 성령과 부활과 영광, 이 세 가지는 나눌 수 없다. 이 세 가지는 사실 하나이다.

 

 

 

주님은 부활 안에 들어가실 때 영광 안에 들어가셨고 성령 안에 도달하셨다. 엄격히 말해서 이때 그분은 예수가 아니시고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는 영광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사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성경에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거나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말(갈 2:16, 3:26, 빌 3:9, 딤후 3:15)은 있어도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먼저 접촉하게 된다. 부활 안에 있는 것은 곧 성령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 그분은 우리 속을 만지시고, 우리도 안에서 그분을 만지게 된다. 이것은 공중의 전파가 라디오의 수신기를 만날 때 효력이 나타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 안에 그 영과 연결하는 믿음이 있을 때, 그 영은 우리 속을 만지시게 되고 우리 안에서 그 영을 만나게 된다. 그 영은 곧 부활이시오 또한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접촉한 분이다.

 

 

휘장 안에 들어가고 진영 밖으로 나옴

 

 

우리는 죽어 있고 공허한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 안에서 한 영을 마지며 부활하시고 영광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난다. 그분의 이름을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안에서 그분을 만지고 그분을 접촉한 그날 이후,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고 움직이시는 그분으로 인해 나사렛 예수의 생활을 밖으로 살아 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능히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의 발자취를 따름으로써 이다. 그분께서 받으신 능욕을 지고 진영 밖에 있는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다(히 13;13).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다윗을 따르던 용사들이다윗과 함께 광야를 표류했던 것과 같다. 이것이 아비가일의 예표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 한 면을 내적인 것이고 다른 면은 외적인 것이다. 우리의 내적 상활은 술람미에 비유할 수 있고, 외적인 상황은 아비가일에 비유할 수 있다. 한 면으로 우리는 휘장 안에 있고, 다른 면으로는 성 밖, 즉 진영밖에 있다. 한 면으로는 지성소 안에 있고, 다른 면으로는 사람들 앞에 있다. 우리는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누리고, 밖으로 예수를 따른다. 아침 일찍 방에서 기도할 때에 우리는 술람미가 솔로몬과 상아궁에서 함께 생활하고 교통했듯이 그리스도를 만진다. 이것은 밀실, 즉 은밀한 곳인 지성소 안에 계시는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이다. 반면 외적인 생활에서 주님을 위해 간증하고 주님을 위해 일할 때, 아비가일과 다윗이 함께 광야를 표류했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표류한다.

 

 

우리는 매일 이 두 가지 상황 안에 있다. 하나는 술람미가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 안에서 부활하시고 영광을 얻으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생활이며, 다른 하나는 아비가일이 진영 밖으로 나와 세상 속에 살면서 낮아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이다. 술람미와 솔로몬이 상아 궁에서 함께 거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통한다. 우리의 밖의 생활과 일은 마치 아비가일이 다윗을 따라 고난을 받고 종군하는 것과 같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고, 우리 밖에 계신 분은 나사렛 예수이시다. 우리는 은밀한 곳에서 술람미의 누림을 갖고, 보이는 곳에서 아비가일의 생활을 갖는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누릴 뿐 아니라 밖으로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따른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간증할 때, 우리의 동료와 친척과 친구들이 우리를 박해하고 어려움을 줄 때, 우리는 마치 좁은 길을 가고 있는 것과 같고 우리의 상황은 나사셋 예수님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우리를 어렵게 하고 박해하며 반대할 때도 우리는 안에 계신 부활의 그리스도를 누린다.

 

나는 과거 일본인에게 투옥되어 십여 일 동안 어려움을 당했다. 가옥에서 그들은 나를 형벌에 가했는데, 외적으로 보면 참으로 고난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안에서 주님의 임재를 만졌는데, 그것은 확실히 부활 안에 있는 것이었다. 밖으로는 나사렛 예수님과 같이 박해를 받았지만, 안에서는 솔로몬, 즉 부활이시오 영광을 얻으신 성령 안의그리스도를 누렸다. 이것이 곧 술람미를 통해 예표된 것으로, 장래 우리의 솔로몬이 돌아오실 때에 우리는 그분의영광 안에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술람미일 것이다. 오늘날 영적인 체험 안에서 우리는 그날을 맛 볼 수 있고 그날의 광경을 예견할 수 있다.

 

빌립보서 3장 1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체험하신 후 부활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부활을 체험한 후 죽음을 통과한다. 그분에게는 죽음이 먼저 이고부활이 그다음이지만, 우리에게는 부활이 먼저이고 죽음은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의지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고, 자신을 의지해 나사렛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갈 수 없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접촉한 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실 때, 비로소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갈 2:20).

 

 

휘장 안에서, 즉 그가 교통하던 내실에서 나와야만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고, 이 땅에서 고난을 받은 예수를 따를 수 있다. 히브리서 10장 19절과 20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이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가운데로 열러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직 휘장 안에 들어간 사람만이 그분께서 가신 진영 밖으로 나가 그분께서 받으신 능욕을 질 수 있다(13:13).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를 따라가도록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은 이미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지금은 부활안에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다시 우리로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신다.

 

 

술람미는 부활 안에 있는 교회를 예표함

 

 

그리스도는 술람미가 누리고 체험한 솔로몬이다. 술람미는 교회가 부활 안에서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누리고 체험하는 가를 예표한다. 교회는 부활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린다. 부활이 없다면 교회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부활 안에 있지 않은 교회는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의 몸은 천연적이거나 옛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안에 있으며 새 창조 안에 속한 것이다. 이것이 술람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인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분을 만났다. 요한복음 7장 38절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고 말하고, 39절은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그 영안에 , 부활 안에, 또한 영광 안에 계심을 보여준다. 우리가 얻은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매일 접촉하는 그리스도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체험이 되실 수 있다. 그분께서 부활안에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그분을 접촉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다.

 

 

교회가 접촉하는 솔로몬, 즉 그리스도께서 부활과 영광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잔치 안에서 함께 누리고 안식할 수 있다. 몰론 오늘날의 상황으로 볼 때, 결코 우리가 그분 안에,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완전한 안식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는 정도의 안식을 누리고 있다. 이 약간의 안식은 부활 안에 있다.

 

 

하와와 리브가의 기록은 결혼으로 끝나지만 술람미의 기록은 결혼으로 시작하며 결혼생활에 대해 언급한다. 이 결혼 생활은 부활 안에 있는 생활이다.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온 후, 또 다시 아담과 하나가되는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리브가가 이삭과 결혼한 후, 그녀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게 많이 기록되지 않았다. 이후에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교회를 예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술람미의 기록은 결혼으로 시작하며 결혼생활을 거친다. 결혼 생활은 바로 부활 안에 있는 생활이다. 어린양이 아내를 취하는 것은 장래의 일이지만 부활 안에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결혼했다. 부활 안에서 우리는 이미 결혼 생활을 하고 있으며 새 예루살렘 안에 있다. 결혼 생활은 새 예루살렘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것이 술람미가 예표하는 중점이다. 부활 안에서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와 연결되었고, 교회와 그리스도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부활의 의미

 

 

부활은 주님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고, 우리에게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주님은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나는 부활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나”는 1장 1절에서 말한 “태초에 말씀이계시니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에서의 “하나님”이다. 요한복음에 계시된 주 예수님은 다른 세권의 복음서의 주님과 다르다. 다른 복음서는 주 예수님의 사람의 면을 중시했다면, 요한복음은 주 예수님의 하나님의 면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나는 부활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나”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11장 25절에서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다른 세권의 복음에서는 이런 말이 없다. 그분은 누가 복음에서는 사람으로, 마가복음에서는 노예로, 마태복음에서는 왕으로 언급되었다. 세권의 복음서는 역사와 지리와 하나님의 기적들에 관한 각 방면의 기록에서 공통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르다. 요한복음은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분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의미는 부활은 하나님이시고 생명 또한 하나님 자신임을 가리킨다.

 

 

무엇이 부활인가? 부활은 생명이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계실 때부터 부활이 있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한 부활은 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삼일 지난 후에야 부활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부활도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1장 21절부터 25절까지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니라”라고 대답하였다. 마르다가 다시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마르다는 계속해서 부활을 시간 안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사실 부활은 시간 안에 있지 않다. 부활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계실 때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부활을 알 때만이 우리는 무엇이 영에 속한 체험인지 이해하게 된다. 부활은ㅇ 단지 생명이 아니다. 생명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 부활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란 생명에, 그 생명을 묶거나 가둘 수 없는 것이 더해지는 것이다. 생명만이 있는 것은 부활이 아니다. 반드시 그 안에 가두거나 묶어 둘 수 없는 것이 더해져야한다.

 

한 알의 씨앗은 마치 한 알의 생명과 같다. 우리가 이 생명을 흙 속에 심고 묻어둔다면, 생명이 그 안에서 뚫고 나올 것이다. 생명이 흙을 뚫고 나올 때 이것은 생명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고린도 전서 15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부활의 의미이다. 부활은 다만 생명이 아니다. 그 생명이 어떤 속박도 받지 않고 심지어 사망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행 2:24-32). 우리의 하나님은 생명이시요 또한 부활이시다. 어떤 것도 그분을 속박하거나 가두어 둘 수 없다. 어떠한 환경이나 어떤 사람과 사물도 그분은 돌파하신다. 어떠한 것도 그분을 압제하거나 묶을 수 없다. 어떠한 쇠사슬도 그분에게는 의미가 없고 효력이 없다. 그러므로 부활의 의미는 바로 생명이 모든 묶임과 압제와 구속을 돌파하여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오 부활이시다. 그런데 이 둘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하나님께서 부활이시라는 면이 그분께서 생명이시라는 면보다 더 중요하다. 이 생명은 어떠한 환경의 압제나 묶임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이 생명은 사망까지도 뚫고 나간다. 그분은 사망의 묶임을 받으시지 않은데 이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삼 일 후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부활은 우주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있었다. 태초에 영원 안에서 그분은 생명이셨고 부활 이였다. 어느 날, 부활이시오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들어오셨다. 이 육체는 그분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그분은 직접 이 감옥 안에 들어오셔서 그 안에서 제한을 받으셨다.

 

주님은 삼 년 반 동안 멸시와 박해를 받으셨다. 그리고 심문과 매 맞음과 수치를 당하셨다. 그분은 밖으로 많은 고난 가운데 계셨고 나사렛 예수라고 멸시를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 안에는 오히려 부활이 가득했고, 부활은 그분 안에서 능력이 되었다. 부활의 능력을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은 부활 안에 계셨기 때문에 능히 나사렛 예수의 길을 가실 수 있었다. 그분은 태어나시고 땅에서 사시고 죽으신 후에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태초에 영원과거 안에 부활이 있었다. 이 부활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부활이신 주님께서 낮아져 사람 안에 오셨을 때, 사람의 박해와 압제와 어려움 가운에 떨어졌고 반대하는 각종 환경 안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이시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분을 압제 하거나 속박하거나 가두어 둘 수 없었다. 삼십삼 년 반 동안 사망의 요소이자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사탄은 있는 힘을 다해 모든 것을 동원하여 부활이신 하나님을 묶고 압제하여 구속하고자 했다. 하나님께서 만일 육체 안에 들어오시지 않았다면 사탄은 그분을 묶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육체 안에 넣으심으로 사탄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셨다. 하나님은 아마도 “사탄아 오너라. 너희에게 나를 묶게 하겠다. 너희 모든 것을 나에게 두고 나를 압제하도록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을 지도 모른다. 결국 사탄은 심지어 사망까지도 이 부활위에 두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은 죽음도 그분을 묶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두려움도, 심지어 사망도 그분을 묶지 못했다. 그분은 사망을 뚫고나왔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다.

 

 

그분은 그분께서 사망에 들어가시기 전에 이미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라고 말했다. 이 부활의 권능은 하나님 자신이고 죽은 자를 부활하게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주 예수님은 먼저 예수이셨고, 그 뒤에 그리스도이셨다. 그분은 먼저 나사렛 사람의 생활을 사셨고, 후에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 계셨다. 이것은 내적인 것이다. 그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시기 전에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분께서 부활이심을 알리셨다. 그분께서 사람 안에 계셨을 때 사탄은 모든 부정적인 것들로 그분을 압박했지만 그분은 그 안에서 나오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부활이심을 증명한다.

 

 

주님을 믿었을 때 우리는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쪽에 불과하다. 우리는 죽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은 것이다. 로마서 10장 10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믿는다거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는 다고 말한 부분을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 우리가 이렇게 그분을 믿을 때 부활의 주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를 원하신다.

 

이 말은 매우 어렵게 느낄 수도 있지만 체험 안에서는 쉽게 이래 할 수 있다. 주님을 믿는 후 우리는 사람에게서 박해나 어려움을 받을 수 있다. 그때에 우리는 밖으로 압력을 받아 고통스럽지만 안으로는 오히려 영광스럽게 느끼게 하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밖으로 눈물을 흘릴지 모르지만 안으로 오히려 기쁘다. 그 능력과 영광과 기쁨이 바로 부활이며, 우리 안에 계신, 솔로몬이신 그리스도이다. 술람미는 비록 장래 영광을 얻을 교회를 예표하지만 또한 오늘날 부활 안에 있는 교회를 예표하기도 한다. 술람미의 예표는 장래의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주관적이며, 오늘날 우리의 주관적 체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측면에서 부활은 두 개의시기를 나뉜다. 하나는 나타나기 전의 부활로, 영원 안에서 부활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나타난 부활로,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삼 일만에 죽음에서 나와 부활하신 것이다. 그날, 주님의 부활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거기에 부활이 있었다. 부활은 시간 안에서 나타났지만 그 나타남이 많지는 않았다. 주 예수님께서 산에서 변화되신 그날 조금 나타났다. 그분은 이 땅에서 삼년 반 동안 고난을 당하셨으나 실족하신 적이 없고 실패하신 적이 없다. 사람이 어떻게 그분을 기만하고 압제 하고 위협하든 그분은 변함이 없으셨다. 이것은 부활의 표현이다. 부활은 어떤 사람이 해 낸 것이 아니라 표현된 것이다.

 

 

부활의 나타남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구원을 얻은 한 형제가 있었다. 1900년 의화단의 난이 일어났을 대, 그는 겨우 10대 소년이었고, 베이징(北京)의 어느 한 상점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당신 의화단은 그리스도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그래서 베이징의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소년이 상점 안에 있을 때, 갑자기 길가에서 큰 소리가 났고, 소년은 문틈으로 밖을 보았다. 길가에는 의화단이 두건을 두르고 손에 칼을 들고 흉악하게 차를 호송하고 있었다. 그 위에 스무 살 정도의 젊은 여인이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은 까닭에 붙잡혀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치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자는 대문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두려움 없이 심지어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여 찬송가를 부르며 차에 앉아 있었다. 소년은 상 점 안에서 이 장면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결국 그는 주님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도 나가서 주 예수님을 전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날 그 자매가 의화단에게 붙잡혀 가면서 보여 준 광경은 부활의 나타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 예수님께서 아직 죽고 부활하시기 전에 그분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학대와 어려움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 나타내신 것은 부활이었다. 어느 날 그분은 부활하셨다. 이것은 완전히 부활 안에 들어가는 것이요, 죽음에서 부활한 광경이다. 오늘날 교회도 이러하다. 그날에 이미 죽은 성도들은 부활할 것이다. 살아 있는 성도들도 변화되어 들림 받을 것이고, 우리는 실제적으로 부활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에도 우리는 오늘날 부활 안에 살 수 있다.

 

 

오늘날 부활은 우리 안에 있다. 많은 때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저주받고 어려움을 당하여, 많은 시험과 유혹이 몰려온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주님의 빛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활의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에게든 우리에게든 부활이 두 시기를 갖고 있음을 분명하게 본다. 술람미는 부활한 교회를 예표하는데, 거기에는 두시기가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시기보다 첫 번째 시기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상아궁 안에서 솔로몬과 함께 생활하는 술람미는 바로 지성소 안에 서 그리스도와 함께 교통하는 교회를 예표한다. 이것의 중점은 장래의 부활이 아니라 오늘날의부활 안에 있는 생활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ㅇ이다. 그리스도인은 부활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부활 안에 있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다. 자신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부활 안에서 우리 안에 도달하심으로써 우리의 능력이 되시고, 우리로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신다.

 

 

겉으로 볼 때 이 길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의 능력이 있음을 안다. 이 능력은 바로 부활 안에서 우리 안에 도달하셔서 우리의 솔로몬이 되신 하나님이다. 그분은 우리가 다윗이 걸었던 길을 가고 다윗이 가졌던 생활을 하도록 우리를 밀어내신다. 우리는 안으로는 솔로몬이요, 밖으로는 다윗이다. 우리는 안으로는 술람미이며, 밖으로는 아비가일이다. 사실 이 둘은 나누어진 시기가 아니고, 안과 밖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많든 적든 안으로는 솔로몬이요 밖으로는 다윗인 체험이 있다. 우리는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박해 받아 광야를 표류하는 슬픔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달콤하고 영광스러운 한 능력과 한 교통이 있다. 우리 안에는 한 하나님, 한 영, 한 솔로몬이 있는데, 이는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말할 수 있었다. 솔로몬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다윗의 길을 능히 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실 때 우리는 능히 나사렛 예수의 길을 가게 된다. 이것이 깊이 있고 수준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어린양이 신부를 취하는 것은 장래의 일이지만 체험적으로 우리는 이미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했고 그리스도와 결혼했다. 부활 안에서 우리는 이미 새 예루살렘에 있고 결혼 생활 안에 있다. 이것이 술람미가 예표하는 중점으로서 미리 맛보는 생활이다. 오늘날 교회는 부활 안에 있고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하나가 되었다.

 

 

세 가지 중점

 

 

여기에서 주의해야할 세 가지 중점이 있다. 첫째, 술람미와 솔로몬의 이름이다. 이 두 이름은 어근이 같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은 남성명사이고 술람미는 여성 명사이다. 두 단어는 “평안”이라는 뜻을 가진 동일한 어근을 갖고 있다. 솔로몬이든 술람미이든 다 “평안”를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부활안에서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이고 평안이라는 뜻이다.

 

둘째, 시편 45편은 솔로몬이 술람미의 체험이자 영광임을 보여준다. 술람미가 체험한 것과 그녀에게 있는 영광은 모두 솔로몬 자신이다. 이것은 교회가 부활 안에서 체험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말한다. 교회의 모든 영광은 또한 그리스도이다.2천년동안 교회가 거친 과정과 교회의 영광은 모두 술람미의 몸의 금장식과 정금으로 된 의복으로 예표된 그리스도이다.

 

 

셋째, 술람미와 솔로몬은 완전한 연결과 완전한 만족 안에 있었다. 만족 안에 안식이 있다. 비록 하와의 예표에서는 그녀와 아담의 연결과 만족을 보여주고, 리브가의 예표에서도 그녀가 이삭과 연결되고 이삭이 위로를 얻었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이것이 그들의 예표의 중점은 아니었다. 오직 술람미의 예표만이 그녀의 솔로몬의 연결과 만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아가서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이 두 사람은 일치된 경지에 이르게 되고, 완전한 만족과 영원히 닳지 않는 안식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어떠한 아름다운 연결과 완전한 만족이 있는가를 말해준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영원한 안식 안에서 만족과 안식의 생활을 보낸다. 이 안식과 만족이 바로 새 예루살렘의 광경이다. 이와 같이 구약의 여자는 교회를 예표한다.

 

 

맺음말

 

 

오늘날 이 일곱 명의 여인은 교회의 각 방면을 예표한다. 이것은 교회에 관한 인식을 분명하게 그림을 제시해준다.

 

첫째,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리스도에게서 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며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우리는 하와의 예표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승천 후 하나님은 그분께서 육체 되셨던 곳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그분의 배필로 삼으셨다. 이것이 교회이다. 세상 끝에, 즉 밤이 임할 때 그리스도는 그분의 거처인 휘장 안에서 밭 곧 이 땅에 오셔서 성령께서 인도하신 교회와 만나실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시고 서로 만족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리브가로 예표된다.

 

 

셋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거절당하실 때 세상에서 얻으신 것이다. 이것은 아스낫으로 예표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실 때 세상 사람의구주가 되셨다. 그분께서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실 때 거기서 한 아내를 얻는데, 이것이 교회이다.

 

 

넷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얻으신 것으로, 십보라로 예표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실 때 광야에서 방화하시다가 아내를 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 아내는 그분과 함께 광야를 표류했다. 교회는 광야에서 함께 표류한 그분의 동반자이다.

 

 

다섯째, 교회는 원래의 남편(옛사람)이 죽자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하나님 정해진 축복을 누렸다. 이것은 룻을 통해 예표된다. 그녀의 이야기는 구속을 상세하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본래 옛창조에 속했고 타락했다. 그러나 옛창조는 죽음으로써 타락한 위치를 벗어나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하나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정하신 축복을 계승하고 완전한 구속을 얻었다.

 

여섯째, 교회는 본래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고 그분을 거역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타격을 받아 옛 본성은 죽고 그리스도와 연결되었으며,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전쟁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것은 아비가일로 예표되며, 우리의 타고난 본성이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고 반대하며 거절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느 날 옛 본성은 타격을 받고 소멸되어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심지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중에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싸우는 종군하는 군대인 교회가 되었다.

 

일곱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그분을 체험하고 누린다. 이를 통해 완전한 만족과 영원한 안식을 얻고, 최종적으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 이것은 술람미로 에표되며 완전한 만족과 안식이 있는 생활이다.

 

 

이상의 일곱 명의 여인은 교회의 일곱 가지 예표로서 교회의 그림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는지부터 시작하여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서 부름 받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명의 양식을 어떻게 공급하는지를 말한다. 또한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광야를 표류하다가 구속받았는지, 그 후 어떻게 종군하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그리스도를 따라 싸웠는지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그분의 배필이 되어 함께 영광 안에서 왕권을 행사하는지를 말한다.

 

 

일곱 명의 여인이 교회를 예표하는 순서는 매우 놀랍다. 첫째는 교회의 산출과 본질이고, 둘째는 교회가 세상에서 나온 것이며, 셋째는 교회가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요 17:16). 넷째는 교회가 광야에서 표류한다는 것이고, 다섯째는 교회가 구속받았다는 것이다. 여섯째는 교회가 종군하였다는 것이고, 일곱째는 교회가 영광을 얻고 왕으로서 다스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일곱 방면을 함께 나열한다면 한 폭의 완전한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교회에 관한 명백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거쳐야 하는지, 또한 무엇을 해야 하며 장래의 결말이 어떠할지 알게 될 것이다. 교회가 오늘날 이 땅에서 어떠한 길을 가야하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어떠한 그림인가.


제8장

교회에 관한 예표(2) - 아스낫, 십보라, 룻, 아비가일

 

 

아스낫 - 세상에서 얻어진 교회를 예표함

 

 

구약성경에서 많은 여인들을 언급하고 있으나 모든 이가 다 교회를 예표하는 것은 아니고 그녀의 남편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여인의 남편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면 그녀도 교회를 예표하게 된다. 하와가 교회를 예표하는 것은 아담이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리브가가 교회를 예표하는 것도 남편인 이삭이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이다.

 

 

창세기엣 남편이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아내가 교회를 예표하는 첫 부부는 아담과 하와이다. 두 번째는 이삭과 리브가이고, 세 번째는 요셉과 아스낫이다. 비록 신약에서 근거를 착지는 힘들지만, 요셉도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요셉이 일생동안 체험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체험한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그의 아내 아스낫은 교회를 예표한다.

 

 

요셉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가? 이것은 일곱 방면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분이다. 복음서에서 하나님은 주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라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에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해를 당했다( 창 37:18). 주 예수님도 혈육의 형제, 즉 유대인에게 해를 당하셨다(요 19:14-16). 셋째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해한 것은 요셉을 질투했기 때문이다(창 37:4, 11). 유대인이 주 예수님을 해한 것도 그분을 질투했기 때문이다(마 27:18). 넷째,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음의 땅에 묻었을 때 하나님은 환경을 일으키시고 그를 구출하셨다(창 37:28). 유대인들도 주 예수님을 죽음의 땅에 두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큰 능력의 손으로 죽음에서 부활 안으로 이끄셨다(마 28:6).

 

 

다섯째,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내버린 후 이방인이 와서 그를 데려갔다(창 39:1-6). 유대인들이 주 예수님을 버렸을 때도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분을 받아들였다(마 15:21-28). 여섯째, 요셉이 이집트에서 사람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여 그들이 죽는 것을 면하게 하였다(창 41:56-57). 주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버림당하신 후, 이방인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구주가 되셔서 사람들이 침륜에 빠지는 것을 명하게 하셨다(요 6:51). 일곱째,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과 함께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떡 굽는 관원장은 죽고 , 술 맡는 관원장은 살았다(창 40:21-22). 이와 같이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두 명의 강도가 함께 있었는데, 한 명은 구원받고 다른 한 명을 멸망의 길로 갔다(눅 23:32, 39-43). 우리가 만일 요셉의 이야기를 자세히 읽는다면, 이것이 주 예수님의 이야기와 같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의심할 여지없이 요셉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그의 아내 아스낫은 교회를 예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낫은 어떤 면에서 교회를 예표하는가? 아스낫은 그리스도 자신이 세상에서 얻은 교회를 예표한다(창 41:45). 이것은 리브가가 예표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리브가는 성령께서 세상에서교회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을 예표한다. 이 예표에서 이삭은 여전히 가나안 땅에 있었다. 그는 밧단아람으로 내려가 리브가를 찾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늘에 속한 장막 안에 거하셨고, 성령으로 오셔서 밧단아람에서 교회를 불러내시며, 그리스도 안으로 계속 인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날이 어두워졌을 때 이삭이 장막 안에서 걸어 나와 즉시 리브가를 만났다. 이것은 리브가의 예표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며, 성령께서 세상에서 교회를 불러내신 것을 강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스낫의 예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교회를 얻으심을 의미한다. 요셉이 이집트로 내려와 아스낫을 아내로 취하고 계속 이집트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녀는 이집트를 떠난 적이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구주가 되시며, 세상 가운데서 교회를 얻으신 것을 예표한다. 아스낫이 요셉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그녀는 비록 이집트 사람이나 이집트에 속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교회는 비록 세상에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십보라 - 광야 가운데 있는 교회를 예표함

 

 

요셉이후에 그리스도를 예표 할 만한 사람은 모세이다. 히브리서 3장은 분명하게모세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이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낸 사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로서 하나님께 보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타락한 땅, 즉 사탄에게 점유된 땅에서 구출해내심을 예표한다.

 

 

모세는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가? 먼저 모세는 태어나면서부터 박해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 당신 이집트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출생하는 사내아이를 죽이려하였고 실지로 많은 남자아기가 죽었다(출 1:16, 22). 이것은 그리스도의 출생부터 헤롯왕이 그를 죽이려했고, 결국 많은 남자 아기들이 살해된 것을 예표한다(마 2:16). 모세는 비록 부모가 있었으나 바로의 딸에게 양육되고 자랐다(출 2:10). 이와 같이 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한 여인 마리아에게 양육되고 자랐다( 마 1:23). 셋째, 모세는 바로의 박해를 피해 광야로 도망했다(출 2:15). 주 예수님도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내려가셔야 했다(마 2:19-21). 마지막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집트의 바로의 학정에서 구출하도록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출 3:7-10). 이것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사탄의 묶임에서 구출하도록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오셨음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3장은 모세가 사도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지적한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그의 아내 십보라는 교회를 예표한다. 십보라는 모세가 박해를 받아 광야에 있을 때 얻은 아내이다(출 2:21). 그러므로 십보라는 광야에 있는 교회의 방면을 예표하며, 이것은 사람들에게 버려진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표류하실 때 얻은 교회를 말한다.

 

모세 이후에 그리스도를 예표할 만한 사람은 여호수아이지만, 성경에서 여호수아의 아내가 누구인지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교회의 예표도 찾지 어렵다.

 

 

룻 - 구속받은 교회를 예표함

 

 

보아스는 하나님의 유업의 합법적인 상속자임

 

 

구약성역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또 한사람은 보아스이다. 보아스는 아주 특별한 여인을 아내로 얻었다. 그녀는 성경에서 특수한 위치에 있다. 보아스의 아내 룻은 교회의 구속의 면을 예표한다. 룻기 전체는 구속의 이야기디아. 리브가는 부름 받은 교회를, 십보라는 광야에 있는 교회를 룻은 구속받은 교회를 예표한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유업의 합법적인 상속자이다. 구약의 장자의 자격을 주의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에 모든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하거나 땅에 속하거나 혹은 물질에 속하거나 영에 속한 것을 막론하고, 심지어 하나님 자신까지도 영원한 계획안에서 예정하신 것을 사람에게 주고자 하신다. 이것은 창조와 구속 안에 있는 모든 축복으로서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심지어 하나님 자신까지 포함한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이때에 아브라함이 받은 이 축복을 누가 이어 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겼다. 다메섹 엘리에셀은 그것을 받을 수 없었고,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도 자격이 없었으며 오직 약속에 따라 난 이삭만이 상속받은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이삭이 낳은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는 야곱만이 상속자로 선택되었다. 규정에 의하면 장자의 자격을 가진 자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활한 야곱은 수완을 써서 형의 장자의 자격을 탈취했다. 사실 하나님의 축복과 장자의 자격은 자연이 그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들은 야곱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아브라함의 축복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 열 두 명 중에 한 명만이 장자의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장자의 자격의 축복은 구약에서 세 항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는 두 배의 땅을 받는 것이고, 그다음은 하나님의 왕위를 받는 것이며, 마지막은 하나님의 제사장 직분을 받는 것이다. 이 세 항목을 합친 것이 야곱의 아들들 가운에 소유하게 될 장자의 축복이다. 야곱의장자인 르우벤은 원칙적으로 세 항목을 포함한 장자의 자격의 축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장자의 자격을 상실했다. 이로 인해 장자의 축복은 세 명의 다른 형제들에게로 넘어갔다. 두 배의 땅은 요셉에게(창 48:22), 왕의 자격을 유다에게(49:8), 제사장 직분은 레위에게 주어졌다(출 28:1).

 

 

보아스 때에 이르러서는 이 세 가지 축복 중에 땅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고, 제사장 직분 또한 황폐해졌으며, 오직 왕의 자격만이 분명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장자의 자격의 축복은 왕으로서 필요한 것이 되었고, 보아스는 바로 이 축복의 합법적인 상속자였다.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을 낳았으며,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마 15:5-6). 유대인ㅇ의 왕권은 보아스에게서 나왔는데, 보아스는 다윗 왕의 선조다. 그러므로 유대인 중 왕의 출현은 보아스에게서 산출된다. 이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영광의 왕도 육신으로는 보아스의 후손이다.

 

 

사람의 창조된 부분과 타락된 부분

 

 

보아스는 룻이라는 아내를 얻었다. 룻은 모압사람이었다. 모압 사람은 롯의 수치스런 자손이다. 창세기에서 롯과 그의 첫째 딸에게서 난 것이 모압이다(19:30-33, 36, 37). 이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며 비정상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압 사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자손은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신 23:3). 이것이 룻의 내력이다.

 

 

룻은 원래 하나님의합법적인 축복과 무관한 사람이었고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던, 거룩한 백성에게 거절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을 구속(救贖)했다. 보아스가 룻을 구속할 수 있었던 것은 룻이 보아스의 친족인 엘리멜렉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룻 2:1). 룻은 엘리멜렉의 둘째 아들 말론의 아내였다(룻 1:1-4). 이로써 구속의 연결 고리가 생겼다. 룻은 원래 모압사람이었으나 보아스와 친족인 사람에게 시집감으로서 지위와 권력이 있는 보아스에게 구속받고 귀속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한 일본 여자가 중국인과 무관했으나 어떤 중국 남자와 결혼하여 그에게 귀속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만약 중국인 남편이 죽었다면 그녀는 법률적으로 합법적인 지위를 찾아 남편의 재산을 이어 받을 수 있다. 룻이 구속받은 것도 그녀가 동족인 보아스에게 속하게 된 것에 기인한다. 그녀는 합법적인위치에서 보아스의 구속을 받았다.

 

 

보아스가 룻을 구속한 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근거한다. 당시 유대인이 아내를 얻고 죽었을 때, 아들이 없을 경우 그의 친형제를 찾아 그 아내를 취하게 했다. 만일 친 형제가 없으면 가까운 친족 중에 그 아내를 취하게 했다. 그리고 이 아내가 낳은 아들을 후손으로 세워야 했다(레 25:25, 신 25:5-6).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스라엘의 율법이다. 보아스는 이에 근거하여 룻을 구속했다.

 

룻의 내력은 참으로 영광스럽지 못하다. 이러한 내력은 구속받기 전의 좋지 않았던 우리의 내력을 예표한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내력은 룻의 후손이며 모압의 자손이 아니었는가? 또 그 자손의 십대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절대로 구속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절대로 구속 받을 수없는 사람이었다. 룻과 보아스는 조금도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우리와 그리스도 역시 조금도 관계가 없었다. 우리는 여호와의 축복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하나님은 조금도 우리를 구속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룻의 내력은 우리의 부패한 면과 타락한 면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절대로 부패한 부분을 구원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동족이라는 면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아담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심으로 아담의 자손이 되셨다. 타락의 면에서 우리는 모압의 자손이고 여호와의 축복과 무관하다. 그러나 아담의 자손이라는 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속을 받게 되었다. 구속의 원칙은 사람을 죄악된 부분에서구하는 것이다. 즉, 창조되었으나 타락한 사람을 죄 가운데 있는 부분을 분별해 내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죄인으로 오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가 연합되는 것은 타락된 부분이아니라 창조된 부분이다. 타락된 부분은 모압 사람이고 창조된 부분은 룻의 전 남편이다.

 

 

로마서 7장 은 우리가 원래 옛사람, 창조된 사람으로서 남편이었음을 보여준다. 역대로 성경을 읽은 사람 가운데 로마서 7장에 관한 논쟁이 있다. 문제는 그 남편이 율법인가, 아니면 육체인가에 관한 것이다. 사실 율법과 육체는 나룰 수 없는 문제이다. 율법이 반포된 이유는 사람에게 육체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에게 육체가 없다면 율법도 필요 없을 것이다. 에베소서 2장은 십자가에 대해 말한다. 주님께서 육체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하신 것은 바로 규율 안에 있는 계명의 율법이 근거하는 그 육체를 폐하셨다는 뜻이다.

 

 

우리의 타락한 부분은 모압 사람으로 예표되었고, 창조된 부분은 룻의 남편으로 예표되었다. 룻의 남편과 보아스가 동족이라는 것은 우리의 창조된 면일 그리스도와 동족임을 예표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구속받을 근거를 갖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수 있다. 반드시 우리를 구속하셔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창조된 면이 있고, 타락한 모압사람인 우리에게 창조된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모압 여인이 이스라엘인 남편이 없었다면 또한 그녀의 전 남편이 보아스와 동족이 아니라면, 이 모압 여인과 보아스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보아스는 그녀를 구속할 어떤 의무나 책임이나 권리나 지위가 없다. 보아스가 룻을 구속할 권리가 있었던 것은 룻이 보아스의 동족인 사람에게 시집갔기 때문이다. 이 예표는 타락한 모압사람 곧 타락한 죄인인 우리 안에 창조된 남편이 있고, 창조된 성분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것을 계시한다. 우리의 창조된 부분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리와 그리스도는 동족이고, 우리와 보아스는 동족이며, 우리는 그분의 구속을 받을 위치에 있고, 그분은 우리를 구속하실 의무가 있으시다. 그분은 우리를 반드시 구속하셔야 하고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구속을 받아야 한다.

 

 

모압 여인 룻과 그년의 전 남편을 절대로 두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반드시 하나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모압 사람이기 때문에 모압 사람 룻과 보아스는 관계가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모압 사람 룻과 보아스는 아무 관계도 없게 된다. 보아스는 의무가 없고 룻을 위해 무엇을 할 권리가 없으므로 그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모압 사람 룻이 한 유대인에게 시집가서 유대인과 하나 됨으로써 구속받을 권리가 있게 되었고, 보아스 또한 그녀를 구속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타락한 사람인 우리가 만일 내면에 창조된 부분이 없다면 우리와 그리스도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상징한다.

 

 

히브리서 2장은 그리스도는 천사를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 즉 혈육을 입은 사람을 위해 오셨다고 말한다(16절). 룻이 구속 받은 것은 그녀의 남편의 부분 때문이지 그녀의 모압 사람의 부분 때문이 아니다. 아담의 부분은 모압으로 타락하였고, 지금은 구속할 보아스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룻이 구속받은 것은 그녀가 보아스와 동족이라는 부분 때문이다.

 

우리의 창조된 부분은 그리스도와 동일하다. 자녀가 혈과 육체 속했으므로 그분도 또한 혈 과 육을 입으셨다. 천사는 혈과 육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와 동족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구속하실 의무가 없고 천사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누릴 권리가 없다. 오직 아담의 자손만이 그분과 동족이고, 그분의 구속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그분 또한 반드시 우리를 구속하실 의무가 있다.

 

 

여기에 리브가와 동일한 점이 있는데, 리브가는 분명히 이삭과 동족이었다. 보아스의 구속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보아스와 동족인 사람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인 우리를 그분의 친족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그분은 사람을 구속하실 의무가 있게 되었고, 동시에 사람은 그분의 구속을 받고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생기게 되었다.

 

 

타락하고 창조된 부분에서 벗어나 죽음

 

 

또 다른 문제는 보아스의 친족이 많은데 왜 그는 룻을 구속해야 했는가이다. 답은 로마서 7장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서 7장은 남편이 죽지 않으면 아내는 다시 시집 갈수 없다고 말한다. 만일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다(2-4절). 보아스의 모든 친족은 죽지 않았고 오로지 룻의 남편만 죽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반드시 그녀를 구속해야 했다. 이것은 만일 우리들의 남편이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남편인 옛 창조의 부분, 즉 아담에 속한 부분이 죽어야만 그리스도는 비로소 우리를 구속하실 수 있으며 우리의 남편이 되실 수 있다.

 

 

유업을 상속받음

 

 

이렇게 볼 때 모압의 부분은 우리의 타락한 일면을 예표한다. 보아스와 동족인 부분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창조되었음을 예표한다. 남편의 죽음은 옛사람 곧 우리의 창조된 타고난 부분을 반드시죽음에 넘겨야 한다는 것을 예표한다. 보아스는 룻의 남편이 되어 연합되었고, 보아스에 속한 모든 것들은 룻의 소유가 되었다. 또한 그녀가보아스에게서 왕이 될 다윗의 선조를 낳은 것은 그리스도를 산출하고 그리스도를 사람들 가운데로 가져오는 것을 예표한다. 룻과 보아스가 함께 합법적으로 몫을 상속받게 딘 것은 그리스도와우리가 하나 되고, 우리가 그분과 한 몸이 되어 함께 하나님께서 정하신 축복을 상속받게 되는 것을 예표한다. 이것이 교회가 구속받은 이야기이다.

 

 

교회는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 즉 아담의 일부이다. 그런데 어느 날 타락하여 모압의 성분이 더해졌다. 이것은 창조된 부분, 즉 룻의 남편이 죽은 것과 같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하나로 연합하시기 위해 들어오실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배필이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정하신 축복을 상속받게 되었다.

 

 

여기에서우리는 다섯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창조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남편의부분이다. 둘째, 타락의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모압의 부분이다. 셋째, 모압의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넷째, 남편 즉 창조된 부분이 끝나야 한다. 다섯째, 보아스, 곧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야 한다. 그리스도는 전 남편을 대신하여서 새 남편이 되신다. 이리하여 교회는 구속받아 그리스도의 배필이 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축복의 몫,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몫을 합법적으로 상속받게 되었다. 이 몫은 바로 장래에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비가일 - 고난 중에 전쟁하는 교회를 예표함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철저하게 작기나 예표하는 사람은 다윗이다 신약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다윗이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말한다(마 12:3). 그러므로 다윗의 아내는 교회를 예표한다. 다윗은적어도 세 명의 아내가 있었다. 첫째는 사울의 딸 미갈이고(삼상 18:27하), 둘째는 이히노암(25:43)이다. 그러나 이 수람에게는 교회를 예표하는 어떤 특성도 없다. 오직 셋째로 언급되는 아비가일(42절)만일 교회를 예표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다윗은 고난 중에 전쟁하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고난 중에 싸우는 교회를 예표한다. 사무엘상 25장 이후에 아비가일은 지속적으로 전쟁하는 전사인 다윗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전쟁하는 교회를 예표한다. 이것이 아비가일이 예표하는 특징이다.

 

룻은 원래 남편이 있었고 아비가일 역시 남편이 있었다. 룻의 전 남편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동족임을 말하지만, 아비가일의 전 남편은 우리 옛사람이 얼마나 흉악하며 그리스도를 부인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아비가일의 원래 남편의 이름은 나발인데, 그것은 우매하다는 의미이다(25:25). 그녀의 남편은 다윗이 빈곤할 때, 다윗을 경시하고 거절했으며 적대시하였다(10-11절) 이것은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경시하며 반대하는 우리의 타고난 성품을 예표한다. 오늘날 나발이 재난을 당해 죽자 아비가일은 기회를 얻어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 이와 같이 어느 날, 우리의 부패한 본성, 즉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고 거절하며 경시하는 본성이 재난을 만나 죽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배필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고난 중에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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