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과 창조신화 비교연구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창조론에 관한 연구 견해들

1. 학자들의 견해 

2. 성경의 창조론과 고대근동 창조신화의 비교연구 

 1) 바벨론 신화 

 2) 이집트 신화  

 3) 희랍의 신화 

3. 구약에 나타난 창조사상에 관한 연구

1)창세기

  2)출애굽기  

  3)예언서  

  4)시편  

  5)지혜문학  

4. 기독론적으로 본 창조 

  1)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


Ⅲ. 결론

(성경의 창조론과 고대근동 창조신화 비교)


 

Ⅰ. 서론


현대 자유주의 학자들이 성경을 대할 때, 맨 처음 부인하는 사실이 바로 창조론이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창조기사를 단지 설화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있다. 특히 성경의 창조기사를 그보다 먼저 기록된 고대근동의 창조설화에서 따온 것이라고 까지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우리는 단지 성경의 창조론을 믿음으로만 믿고 현실로는 인정하지 못하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고대근동의 창조설화가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이 두 내용의 차이점은 무엇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또한 성경의 창조론이 여려 창조기사들로 여러개의 자료에 의해서 편집된 문서가 아닌, 하나님의 독특한 표현방식의 기록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창조론에 관하여 성경 자체내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고개를 든 비평주의 연구가 성경의 진리를 정확하게 밝히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을 외곡되고 신앙으로 부터 멀어지게 한 요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과학과 이성과 합리주의가 이 새대가 참 진리를 전달할 수 없으며, 어떠한 것이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삶인지를 연구를 통해여 밝히고자 한다


먼저 글을 전개함에 있어서 창조론 연구에 관한 문제 제기와 연구범위를 언급하고 창조론 연구에 있어서 그동안의 학자들의 견해를 간략하게 기술한후, 고대 근도의 창조설화와 성경의 창조론을 비교 연구한후, 성경자체내의 창조에 관한 기사를 연구하고, 끝으로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와의 상관관계를 논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Ⅱ. 본론


창조론에 관한 연구 견해들


1. 학자들의 견해:


보수주의 학자들은 창세기를 연구함에 있어서, 성경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창조내용은 하나님의 존재자체에 대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역사에 나타난 여호와의 놀라운 능력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셨고, 이스라에을 자기 백성 삼았다고 말한다. 또한 창조기사는 불가지론이나 무신론의 용납을 불허하는 동시에 고대 신화들에서 보는 다신론을 철저히 배격한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유일신적 사상이 구약 성경 전반에 근저를 이루고 있다.

성경에서 창조론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또하나의 발견은 창조자체로만 창조론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근거로 하고 있으며, 이스라에의 계약신학의 관점에서 보는 견해도 있다. 신약에서는 창조에 관한 부분을 기독론적 입장에서 바라보기도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와같이 신 구약 모두에서 창조론은 언급할 때, 모든 창조물은 전적으로 창조주에게 의존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향한 자신의 구속의 계시를 강조하고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비평주의 학자들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질서와 내용의 차이점에 의심을 품고, 창세기가 단일 저자에 의한 작품이 아님을 주장한다. 즉, 이들은 단일 저자의 창조적인 활동의 결과로 완성되었다기 보다는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여러가지 자료를 후대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수집하고 편집, 배열한 채로 자신들의 독창적 작품속에 함께 삽입한 결과로 완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료비평을 통하여 구약성서를 바라보는 시각이 비평적으로 바뀌어 야훼자료(J), 엘로힘자료(E), 신명기 자료(D), 사제적 자료(P)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이스라엘 종교 이해에서 진화론적 관점이 지배적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다른 비평학자들은 양식비평이란 관점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하여 이야기, 율법, 시편, 예언, 지혜의 양식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창세기를 산문으로 형성된 이야기 신화라고 보았다.

또한 구약에 나타난 “인간” 단어 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간을 통하여 본 창조의 의미에 관심을 갖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인간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담( )인데 구약 성경 전체에 560회에 걸쳐 나온다. 이 단어의 근원은 창 1: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 )을 창조하셨다는 것에서 온 것이다. 이 어원은 땅( 에서 왔다. 이 단어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창조 근원이 흙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흙으로 창조된 다른 짐승과 같이 땅에 고착되어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


둘째로, 이쉬( )인데 이는 동물과 구분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또한 인간의 능력과 존귀성을 표현하는 말이다고 설명한다.


셋째로, 에노쉬( )인데 이는 허약한 인생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하기에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밖에도 창조의 시간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시간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에 의해 지음받은 인간의 연대를 측정함에 있어서 과학은 인간이 약 5만년전에서 150만년전 사이에 태어났음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히브리 맛소라 사본에 의하면 인간의 연대는 B.C 4004년이며, 70인경이나 사마리아 사본에 의하면 B.C 5411년이 된다. 이러한 사본상의 차이에 대하여 B.B Warfileld는 성경에는 탈락된 족보가 있기에 나타나는 차이라고 설명했다.


성경에 나타난 날( )의 개념을 살펴보면, 날은 성경에 수 없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창8: 4절, 욥14: 6절, 렘50: 27절, 시2: 7절 등에 의하면, 창세기 1장의 날( )이 꼭 24시간을 나타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pay age theory 라는 학설로 1세기, 2세기, 4세기, 어거스틴등이 주장했었다. 그러나 19세기 진화론자들의 주장으로 인하여 ‘날’의 개념이 상징적인 표현으로 ‘한 시대의 종말과 한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학설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표현도 될 수 없지만 안식일의 계명에 위배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창세기 1장 1-2절을 첫째날에 포함시키지 않거나 또는 포함하더라도 그 날을 24시간(1일)으로 보지 않으려는 학설들이 나왔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날은 1차적으로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한다. 계시 진리인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창조기사를 6일에 걸쳐 창조 하였음을 이야기 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중조설’을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중조설 이란, 창세기 1장1절에서 우주가 완전히 창조되었으나, 천사가 타락한 이변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지구를 심판하신 결과 어둠과 물로 뒤덮인 혼돈과 공허가 생기게 되었는데 2절이 바로 심판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창 1장1절과 3절부터 다시 시작하는 6일 창조의 시기 사이에는 무궁한 세월이 개재했다고 보는 견해다. 이러한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공룡이나 원인, 그밖의 소멸된 생명체들에 대한 해석을 위한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중조설이 진화론을 거부하고 성경적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중조설 역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성경의 창조론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연구 중에 하나이다.


 

2. 성경의 창조론과 고대 근동 창조 신화의 비교 연구


현대의 통신 수단은 각계 각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세계와 인간의 기원 내지 진화에 개념들을 보급시켰다. 특별히 창세기 1장에서 11장에 대하여 심사 숙고한 개방된 신자들에게는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가져다 주는 문제들이 일어났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성경학계에 제일 논란이 되고 있는 고대 근동 창조 신화와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관을 비교 검토 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며 그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찾아보고져 한다.


본장을 연구함에 있어서 하나의 명제를 제시하고져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다는 것이다. 본 장에 대한 연구는 몇몇 논문과 학술지가 있으나 이 명제를 따르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 장에서 논하고져 하는 모든 것은 이같은 명제 하에서 취급하고져 한다.

 

1) 바벨론 신화

바벨론 창조 서사시는 두 가지의 경로로써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즉 유세비우스의 역사에 기록된 희랍어 번역문이고, 둘째로는 스미스씨에 의해 발굴된 바벨론어로 기록된 토판이다.

이 신화는 메소포타미아 사람의 신앙에 따라서 태초에 일어났으며 지난해에는 죽고 새해에는 태어나는 것과 같은 해마다 다시 제정되는 운명적인 드라마를 다룬다.

바벨론 창조 서사시인 'Enuma Elish'는 메소포타미아 종교 문학의 가장 심각한 표현인데 이는 7개의 토판으로 구성되었는데 처음 시작하는 말을 따라서 이름이 붙여졌고, 그 의미는 이다.


이것은 신년 축제의 네째날에 제의로써 낭독되어졌다. 창세기라고 이름 붙여진 것도 역시 동일한 이유에서다. 이 서사시의 형성 연대에 관해서는 아직 일반적으로 일치하는 의견은 없지만 현존하는 본문들 중에는 B.C 1000년을 넘어가는 것은 없다. 하지만 문맥상의 재적 증거와 언어학적 표준에 의하여 다수의 학자들이 그 시기를 B.C 2000년대의 초기로 말한다. 먼저 바벨론 창조 신화와 창세기의 창조관의 유사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창세기 1: 1절 - 2: 3절

Enuma Elish

※ 하나님의 영은 우주적 물질로 창조하시고 그것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창1: 1) 땅은 깊음을 덮고 있는 어둠으로 황량한 벌 판 이었다.

 

※ 빛이 창조되다. (창 1: 3-5절)

 

※ 하늘이 창조 ( 창 1: 6 - 8절)

 

※ 마른 땅이 창조 (창 1: 9 - 10절)

 

※ 광명체의 창조 (창 1: 14 - 18절)

 

※ 인간의 창조 (창 1: 26 - 28절)

 

※ 하나님의 휴식과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심 (창 2: 2 - 3절)

 

※ 신적인 영과 우주적 물질은 공존하며

영존한다. (Tablets 1, 1 - 8)

 

※ 원시의 혼돈: Tiamat 는 어두움을 둘러쌌다.

(1, 58)

※ 빛이 신들로부터 둘러 나왔다.

 

※ 하늘을 창조 (Ⅳ, 136 - 139)

 

※ 마른땅을 창조 (Ⅳ, 140 - 146)

 

※ 광명체의 창조 (Ⅴ, 1 -22)

 

※ 인간의 창조 (Ⅵ, 1 - 37)

 

※ 신들의 휴식과 축하 (Ⅵ, 51 - 122)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성경의 창조관과 Enuma E;ish의 기사가 서로 명백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학자들 상이에는 두 문헌 사이에 어떤 종속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비록 두 문헌 사이에 어떤 유사점과 순서가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창세기의 창조관의 내용은 ‘Enuma Elish'와 판이하게 다른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창세기에 보여진 하나님은 우주적 물질과 분명히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성경기자는 여기서와 그다음에 나오는 것에서 단지 땅의 본래상태와 연관을 나타내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요구되는것 이상으로 하늘에 관하여 아무것도 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땅의 주민들과 종교적인 목적을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이 그 나뉘어지지 않은 물질들가 혼돈과 엄밀히 따로 존재하고 있는것이 보인다. 그러나 바벨론 창조신화의 신들은 혼돈의 원시 물질과 분리되지 않고 그것들과 얽혀있다. 하늘이 아직 창조되지 않았을때 땅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때에 그들을 발생시킨 ‘APSU' 와 ’ Mummu'와 그들 보다 먼저 나온 Tiamat 만 있었을 때, 그들의 물들은 한 흐름으로 뒤엉켰고, 이 신화에 나타난 남성시인 APSU는 지하수나 큰 호수 같은 것을 의미하고 여성신 Tiamat sms 짠 물을 의미하는데 이 두 원시의 물이 서로 엉켜있는 상태가 창조이전의 상태의 것이다. 여기서는 신들은 곧 우주적인 원시의 물들이며 원시의 물들이 곧 신이다. 이로 비추어 볼때, 창세기의 창조관에는 Tiamat 과 관련된 ‘Tehom'에 관해 언급하고 잇긴 하지만 다신론적인 의미는 제게되고 있다.


둘째로, 빛의 창조에 관하여 ‘Enuma Elish' 에는 광명체의 창조이전에 이미 빛이 있었던것으로 간주되고 있고 여기에서 빛은 신의 명령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 자체로 부터 유출되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있어서는 ’빛이 있으라’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빛이 생겼다고 한다.


셋째로, 하늘의 창조에 있어서 바벨론 창조신화에서는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원문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주는 Tiamat 의 죽은 몸 보기를 그쳤다. 그가 그 괴물을 쪼개어 재치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그는 Tiamat 를 조개처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는 Tiamat 의 반을 세워서 그것을 하늘로 붙였고 빗장을 당겼고 수비대를 설치하였다 고 기록했다. 또한 여신 Tiamat 과 점ㄹ은신 Marduk 의 치열한 싸움 결과 Marduk 이 Tiamat 를 죽였다. 이때에 Marduk 은 그 괴물을 쪼개어 작품을 만들려고 마음 먹었고, 그것을 두 쪽으로 갈라서 그 중의 하나로 하늘을 만들었다고 하는 힘든 노동이 첨가된 창조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생긴것을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에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의 말씀은 우주의 창조를 위한 어떠한 원시의 전쟁이나 살인적 전쟁에 대한 상상이 없다.


넷째로, 마른 땅의 창조 기사에 있어서 바벨론 창조신화에는 ‘그는 그들에게 Tiamat 의 물이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하늘을 가로 지르며 지역들을 휘둘러 보았다. 그는 압수의 거처를 정했고, 누디무드이 주거를 정했다’(Tablet TV. 140-146). 그러나 성경의 창조론은 그런 변덕스럽고 염려되는 자연 신들에 대한 주저함이 보이지 않는다. 성경의 창조론은 어떤 양식에 의하여 땅의 물들이 바다로 모였고 마른 땅이 나타났는지 이것들의 창소들이 지구 덩어리에 잠기거나 가라앉음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굳은땅의 솟아남에 의해서인지 기록되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자연의 종교와 자연을 초월한 종교의 차이가 나타남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 땅과 바다를 형성하였다. 그 형성과정은 합리적 순서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직접, 간접으로 되는 일이지만 그것이 그렇다고하여 자연법칙과 모순되어야 한다고 할것은 없다. 하나님의 간섭은 자연법칙을 이용할실때도 있다.


다섯째로, 광명체의 창조에 관해서 바벨론 창조 서사시에는 그는 위대한 신들을 위하여 거처를 만들었다. 그는 그들의 하는 무리들의 경계를 결정하기 위해서 Nebiru 의 거처를 만들었다. 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그것에 따라서 그는 Enlil 과 Ea 의 거처를 설립했다. 그는 Tiamat 의 뱃속에다 헌정을 설치했다. 그가 날을 비치게 하였고 밤을 그에게 맡겼다. 그는 그를 날들을 알려주는 방의 생물로 임명했다(Ⅴ, 11 - 13). 이러한 부분을 살펴볼 때, 전체묘사가 상당부분 과학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묘사는 당시 바벨론이 고대 점성학이 발달한 중심지중에 하나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리 놀랄만한 것은 못된다. 그러나 성경또한 과학적이고 권위를 가지고 있는 문서임을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밝히고 있다. 칼빈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은 전에 빛을 창조하엿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에 새 질서를 설정하여 주사 태양이 낮의 빛을 공급하게 하고 달과 별은 방에 비추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에게 이 임무를 할당해 주시므로 우리가 다음의 사실을 배우게 하신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이 자신의 뜻에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것들을 부과하신 것을 집행하신다.


여섯째로, 인간의 창조인데 이점에 와서 두 창조기사의 차이점은 그 절정을 이룬다. 두 창조 기사에 있어서 인간창조의 순서가 맨 나중인것은 같지만, 창조된 우주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와 신과의 관계, 인간의 운명등에 관한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바벨론 창조신화속에서의 Marduk 의 인간창조의 목적은 기교있는 작품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것은 또한 신들을 위한 것이고, 신들의 편안과 위안과 자유를 위하여 인간의 노예처럼 부려먹기 위한 의도로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성경과는 다르게 창조시 축복의 분위기속에서의 창조가 아닌 우울하고 침울한 가운데 창조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창조에 있어서 성경은 최초부터 인간창조가 지상의 모든 다른 피조물보다 구별되고 뛰어남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영적인 인경성을 동반하며 자유로운 자아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창조의 의미는 인간이 신적 생명으 거룩성과 축복의 피조적인 복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인간의 창조와 축복을 정점으로 하여 완성되어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이상의 비교를 통하여 볼 때, 성경의 창조론은 Enuma Elish 의 창조 기사와는 전혀 다른 창조이며, 서로 유사한 창조론이 아님을 증명하였다.

 

2) 이집트 신화

비평학자들은 성경의 창조기사가 바벨론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는 것 못지않게 얘굽의 문헌에서 성경의 창조론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애굽의 창조 신화중에서 가장 관심의 촛점이 되고 있는것은 Memohite Theology of Creation 이다.


이 본문은 상형문자로 현무암에 쓰여진 것으로 원문의 연대를 B.C 700에서 B.C 2000년대 까지로 보고 있다. 애굽 신화에서는 ‘Ptah'가 창조자로 소개되고 있다. Ptah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혀로 말함으로써 모든것을 창조하고 있다. 그 내용안에는 다음과 같은 창조기사의 내용이 나타나 있다. 아툼(Atum)의 형태안에 어떤것이 마음으로 생겨났고 어떤것은 혀로 생겨났다. 능력있고 위대한 신은 Ptah다. 아홉 신들은 입으로 만든 사물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로 인하여 수(Shu) 와 테프놋을 나오게 하고 그 아홉신들을 창조하였다. 눈의 보는것과 귀의 들음과 코로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마음속에 정보를 재공한다. 또한 마음은 하나하나의 개념이 생기게 되는것이고 마음이 생각한 것을 발표하는 것은 혀다. 그래서 모든 신들이 형성되었고 그의 아홉신들이 완성되었다. 참으로 모든 신적 질서가 마음이 생각하고 혀가 명령함을 통해서 실제로 일어났다. Ptah 는 모든 신들이 질서를 이루게 하였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만족해 하였다. 이상의 애굽의 창조신화는 성경의 창조론과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애굽의 Memohite 의 창조기사는 신들의 출생계보와 자신들이 거처하기 위해 성소를 만들고 제물을 정해주고 있으며, 인간에 관하여는 부저과 성의 생명과 죽음에 관하여 조금 언급하는 정도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론에는 신들의 출생에 대하여 조금도 언급하고 있지않다. 이 두 창조기사를 비교해 보면 애굽의 창조기사는 단지 성소에 제물을 얻는 것에 신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번성해 나가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둘째로, 멤피스의 창조기사는 프타가 신들의 몸체를 자기가 선택한 형태인 여러 종류의 몸체들로 만든다. 그러나 성경의 인간창조에서는 창1: 26절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3) 희랍의 신화

고대 희랍의 신들은 일반적으로 창조에 책임이 있는 자들로서 간주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전에 존재했던 선재 세력의 피조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헤시오도스의「Theogony」(신통기)는 판테온에서의 우두머리 자리를 타오스에게 부여해 주었고, 그의 후계자인 땅이 하늘에 의해 수태되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의 모체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오르페우스 신화에 의하면, 위대한 창조자 파테스가 알에서 나와서 우주와 고대 황금시대의 영웅들을 창조했고, 그후 그의 손자인 제우스가 그와 그의 피조물을 살켜 버릴 때까지 은거햇으며, 훗날 레우스가 변론하는 세계질서를 체창조했다고 한다. 희랍의 창조 신화들은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 매우 다양했으며 창조를 그 자체로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모호한 태초로부터 생식과정을 통해 발전해온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상의 고대 근동의 창조신화와 성경의 창조론과 비교해 볼 때,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히 신관과 인간관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첫째, 신관에 있어서 다신론과 유일신 사상의 차이점 이다. 바벨론 창조 서사시에서 보았듯이 말둑은 여러신들 중의 하나로써 죄고의 신으로 추대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유일신관은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고대근동의 창조신화에서 유래되지 않았다는 중거를 보여준다 하겠다.


둘째로 인간관에 있어서 고대 근동의 창조신화에 나타난 인간은 단지 부수적인 것이요, 창조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있다. 신들의 관심은 신들자신에게 있고 자연현상 그 자체이 있으며, 인간은 단지 심부름꾼이나 보조자로 일 할 뿐이다. 그러나 서역은 6일간의 천지만물 창조후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심은 인간이 창조의 절정임과 그에게 정복과 다스림의 죽복을 줌으로써 인간이 창조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들을 살펴볼 때, 성경의 창조론과 고대 근동의 창조설화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것이 아님을 증거해 준다 하겠다. 각 신화들에 나타나는 문학적 특징인 창조설화에 대한 내용을 단순히 성경에 창조론에 빗대에 연대적으로 앞선다고 해서 성경이 고대근동 신화를 모방하였다는 비평주의 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진리를 보다 깊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겠다.



3. 구약에 나타난 창조사상에 관한 연구


1) 창세기

고대 히브리인들이 언제부터 창조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들은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창조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F. M. Cross 는 족장들의 하나님 ‘El'은 가나안의 창조신으로서 족장들의 창조 신앙과 후기 역사적인 신앙 사이는 끊이지 않고 완전히 연속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스라엘 족장 이야기속에도 'El'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옴을 언급하면서 ’엘‘ 이라는 신의 용어를 별칭으로 여호와 하나님에게 적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와 그들의 종교인 ’엘’을 이스라엘 민족이 신의 이름으로 대치해서 사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예, E: olam : 영생하시는 하나님 - 성소는 브엘세바, El Elyon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 성소는 예루살렘, El Elohe lsrael : 이스라엘의 하나님 - 성소는 세겜 , El Bethel : 벧엘의 하나님 - 성소는 벧엘, El Roe : 감찰하시는 하나님 - 성소는 브엘세바, El Shaddai : 전능하신 하나님 - 성소는 불확실함)


이에 반하여 폰 라드는 가나안 창조신화와 이스라엘의 창조 신앙은 이질적인 것으로 본다. 즉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분명히 가나안의 창조 신화를 이질적인 것으로 거부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는 창세기 1장은 분명히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었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하면서 창조의 질서에 있어서 하등 동물에서 고등 동물의 순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창세기 1장의 고나심은 땅이 마른 것인데 반하여 2장의 관심은 땅이 축축히 젖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2장에서 창조와 타락을 타락을 모사함에 있어서 신화적인 표현과 신인 동형 동성론적인 표현을 꺼리낌 없이 사용한 것을 예로 들면서 이스라엘 신관이 유일신이요, 영적인 신, 여호와를 표현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창서기의 창조론은 이스라엘의 문화적, 종교적 유산 속에서 일찍부터 당신 고대 근동의 창조 설화와 대결하면서 살아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경우로 나타날 수 있다. 첫째, 말씀에 의한 창조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함과 자유로움과 자의적인 것에 근거를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둘째, 무(無)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의 주권을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 셋째, 창조의 조화와 선함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질서로서 특정 지을 수 있다. 이 질서는 이서으로 조화를 부리는 코스모스의 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신이 정한 질서로 그 질서 안에서 각 피조물은 창조의 뜻을 수정해 간다. 창조의 조화와 선함의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알게 함이요, 세상과 생명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닌 한님의 창조물이며 우주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은 사람이며 따라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형화롭게 하는 것 임을 알게 하려고 기록한 것이다.


2) 출애굽기

출애굽기에서도 창조 사상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여호와가 대 자연을 지배하는 분이란 사실을 보여 주며, 고대근동의 창조설화와 대립되는 내용들을 전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출애굽기의 내용은 바벨론 신화인 Marduk 과 Tiamat 의 싸움을 주제로 한 신화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내용들이다. 즉, 홍해의 기적 사건에서 모세의 노래(출15: 1-8절)에서 나타나는 바다, 깊음, 물, 파도 등은 바베론 신화에 없는 것이고, ‘미리암의 노래’ 역시 여호와의 구속 행위를 찬양함으로써 여호와가 자연과 온 우주을 다스리는 분임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입성했을 때에 그들은 그곳의 토착종교인 바알 종교를 접하게 되었을 때, 그곳의 종교가 이스라엘 하나님과 너무나 거리가 있는 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소출이 여호와에게서 부터 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방종교 가운데에서도 창세기의 여호와에 대한 신앙고백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3) 예언서

오경이후 이사야서에 이르기까지 창조신앙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 숨어 버린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에 이르러 창조 신앙이 구속사와 함께 중요한 신앙으로 나타난다. 이사야에서 해방의 날이 가까왔다고 예언한 것은 창조의 주권자가 여호와만임을 증명해 주는 말이라 하겠다(사 40: 20; 42: 5; 43:1,7,15; 45: 7, 8, 12, 18; 48: 7; 54: 16). 특히 여기서 ‘창조하다’ 라는 히브리어 동사 ‘바라’( ) 를 그의 예언서에서 16회 사용하면서 다른예언서들보다 더욱 창조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내용에서 나타나는 창조관은 귀향민의 생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온 우주 창조주와 유일신으로 여기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또한 이사야 40장 18-26절에서 사용한 ‘나는 여호와니라’란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은 전 우주의 하나님으로 그의 절대서을 나타내며 이는 곧 그분만이 하나님이시고 그 분 외에는 다른 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다른 선지자보다 창조 신앙뿐 아니라 구속두 되심을 함께 전하고 있는 사실을 사 25: 9절을 통해서 보여준다.


또한 예언자 예레미야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사상을 엿 볼 수 있는데 그는 창조론을 가장 진지하게 인식한 첫 예언자로서 여호와께 잇는 역사의 주재권은 여호와께서 창조주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자연의 영속성을 빗대어 렘 5: 24절에서 선포하고 있다.


아모스 선지자는 여호와의 심판을 그이 예언의 중심으로 삼음에 의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암5장 8절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하나님을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니라”고 선언하면서 심판의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임을 말하였다.


나훔 선지자도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나훔 1; 4절)


하박국 선지가도 여호와가 자연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요엘서에서도 땅과 하늘의 징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요엘 2: 30- 31절), 하늘과 땅에 피와 불과 연기가 있을 것이며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핏빛같이 보일 것이다. 창차 임할 구원에 따라 오는 이같은 우주적인 변동은 심판의 하나님의 현현을 극적으로 말해 줌으로써 심판의 하나님은 또한 창조의 하나님도 되시며 자연계에 지도자도 되심을 말하고 있다.


이상의 예언서들을 통해서 살펴본 주요 중심주제는 하나님이 심판주요, 구속주며, 이세상을 창조하신 분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론이 고대 근동 창조 신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논리에 부합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창조는 자신의 은혜의 경륜 가운데서 계획하신 것을 그 백성에게 알려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4) 시편

예언자서에서 나타나는 창조에 대한 함죽성있는 표현에 비해서 시가서에서는 자연스럽게 창조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시편중에 특히 찬양시로 구성된것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 즉, 창조와 구원의 행위에 대한 찬양 시를 접할 수 있다.( 시8, 19, 29, 33, 65, 68, 96, 98, 103-105, 111, 113, 114, 117, 135, 145-150) 폰 라드는 시편속에서도 예언서와 같이 독특한 창조사상이 구칙적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일례로, 시편 33, 136, 148편에서 잘 나타나있다. 이곳에서 처음 앞 부분에서는 창조신앙을 노래하다가 후반부에서는 갑자기 구원신앙을 말하는 내용으로 바뀐다. 이것을 그들속에 구원신앙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하겠다. 이상의 시편에서 살펴본 내용은 창조사상이 구원사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5) 지혜 문학

지혜 문학의 유일한 신학적 근거는 창조 신앙이며 여기서 창조는 그 차체로써 의미를 갖고 다른 신앙과는 관계가 없다. 이러한 내용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 욥기 38장, 잠 3장 19-20절, 8장22절, 14장 31절, 20장 12절이다. 지혜문학에서는 구원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혜문학의 특수한 신학적 전제들 때문이다. 반면에 창조의 이적, 창조이 계획성, 창조의 기술적 비밀들, 창조의 질서들에 그만큼 더 강하게 관심을 쏟았다. 잠언 기자들의 고백에서도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심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 지혜문학에서 창조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지혜 문학은 민족과 종교의 장벽을 뛰어넘는 대화의 광장을 제공함으로 창조 신앙을 신학적인 대화의 광장으로 제공하고 있다.



4. 기독론적으로 본 창조


1)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

신약의 기자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한 분이라고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 유대교 랍비들과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계시하셨다는 입장을 취하여 창조의 과정을 기독론적으로 고찰하였다. 예수 안에서 만물이 밀착하였고(골1:17), 그분 안에서 창조물의 통일성이 하나님의 역사적 목적의 일부분으로서 한층 더 증명되었다(엡1:9,10). 강력하신 말씀으로 우주를 떠받치고(히 1: 3) 세상의 구세주 및 대속자로서 역사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신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이같은 신념에 비추어 볼 때 초대 교회의 구서원들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다고 주장한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마 25:34; 엡 1:4; 벧전 1:20 등) 만물은 모두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골 1:15), 이는 만물이 처음이요 나중이신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의 기자들은 오래전에 예언을 통해 약속된 은혜의 새 나라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미 나타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새 창조는 사실상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약속이었다( 엡 1;14; 계21: 1-4). 그때에 모든 구속받은 피조물들은 그들의 창조주를 찬미할 것이다(계 4:8-11; 5: 13). 그리스도는 아담이 예시한 새로운 사람이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분의 죽음은 세상을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고 개개인의 인격체가 중생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셨다.


누구든지 자신을 완전히 갈보리의 사역에 일체화시킬 때 그는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구세주께서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계획하신 인간형을 회복시키셨고, 따라서 그분에게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이다.


 

Ⅲ. 결론


창조론을 취급함에 있어서 우리는 고대근동의 창조신화와 비교하여 보고, 또한 창세기와 출애굽기와 예언서와 시편과 지혜 문학을 근거하여 논하여 보았다. 그뿐 아니라, 창조론이 신약과 그리스도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보다 분명한 창조를을 배우게 되었다.

 

폰 라드가 비록 구속사에 구한하여 창조론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천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주창조의 기원사에 관한 질문이 창조론을 믿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입장이지만 우리는 비평주의자들이 갖는 성경의 창조사실을 창조설화로 오도하지 않도록 보존하고 지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은 학자들은 인간이성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였으며, 진화론적 입장에서 창조론을 설명하였다. 우리는 또한 이들이 사용하는 과학적인 방법론이 창조기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함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성경의 창조론이 바벨론의 창조 서사시나, 애굽의 멤피스 창조신화와 유사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성경의 창조 사상에 흐르고 있는 독특성과 유일성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우리는 성경의 신관과 고대근동의 신관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을 통해 고대근동의 신관은 최고의 신, 하위의 신을 등급으로 구분하는 다신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면 성경에서는 유일신 하나님만이 우주만물의 창조하심을 나타내는 상이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인간관에 있어서도 고대 근동의 창조설화에서는 인간에 대한 설명이 별로 나타나 있지 않으며, 모든 신들의 섬김의 도구로 분노의 대상으로 나타나지만, 성경의 인간관은 인간 창조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절정이요, 극치임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은 고대근동 창조설화의 비교를 통해서 성경의 창조론을 증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자체의 내적증거들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으 창조사실과 구원의 주로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구약의 창조론이 신약의 예수그리스도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증거들을 기술하여 보았다. 우리의 신앙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을, 비평주의나 진화론자들처럼 비진리로 만들지 말고 그들의 잘못된 논리와 방법론을 바르게 바로잡아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창조의 근원이시라는 사실과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심판자이심을 바르게 알려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