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에 나타난 축도의 의미


  1. 서론

  신약성서기자 가운데 축도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깊이 생각한 사람은 바로 바울이다. 그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축도에 자신의 신앙체험에서 나온 기독론적인 각인을 새겨놓았다. 바울서신들 말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축도들은 서로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 반면 동시에 차이점들도 보여주고 있다.


  이 축도들은 보통 "은혜"(cavri")를 기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단순한 표현만을 사용하거나 (살전 5:28; 롬 16:20; 고전 16:23), 또는 "성령과 더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두 마디 형태를 사용하여 기원하고 있다 (갈 6:18; 빌 4:23; 몬 25). 그러나 고후 13:13에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축도문은 이와 좀 다른 양식으로 되어 있다. 즉 이 축도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하나님의 사랑-성령의 코이노니아'라는 세 마디로 구성된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바울의 축도문 가운데 유독 이 축도문만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담고 있다.


  오늘날 예배 때마다 행해지고 있는 축도가 바로 이 바울의 축도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축도는 근원적으로 볼 때, 구약의 민수기에 나타나는 이른바 '아론의 축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호와는 너를 축복하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당신의 얼굴을 네게 비취사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당신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고 네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 6:24-26). 이 아론의 축도는 오랜 기간을 거치는 동안에 그 형태의 변화를 겪었으며, 바울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끼쳤던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나타나는 바울의 축도문을 중심으로 다루는 가운데, 바울 신학의 조명하에서 이 축도가 지닌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축도가 사용된 문맥 이해


  오늘날 예배 때 행해지는 축도는 예배라는 틀 속에서 빠져서는 안될 요소로 되어 있다. 이처럼 제의적 요소로서 축도가 매번 반복되다보니 축도 속에 담겨있는 뜻을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반복하는 것에 그칠 위험도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고후 13:13에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축도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구체적인 편지문 가운데 그 마감어로 사용된 것이다.


  앞서 우리는 구성적으로 볼 때 이 축도문이 바울의 다른 축도문과 차이가 남을 지적하였다. 그 차이를 다름아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표현이 첨가되어 나타나고 있는 사실에서 찾았다. 이 예외적인 표현은 우연히 첨가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바울의 특별한 의도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왜 바울은 이 표현을 첨가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이 서신의 본문을 읽으면 쉽게 알 수 있다. 본문 가운데에서 우리는 바울과 당시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유대인 출신의 (고후 11:22) 방랑선교사 (고후 3:1; 11:4) 사이에 생긴 불협화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한마디로 바울의 사도직을 둘러싼 것이었다. 자신들을 사도라 여기며 (고후 11:5, 13; 12:11), 바울과는 다른 복음을 (고후 11:4) 전하였던 이들 바울의 적대자들이 그의 사도직의 적법성을 의심하고 있고 이에 대하여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사실이 고린도후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이 불협화음으로 인해 바울이 한 때 마음속 깊이 상처를 받았음을, "큰 압박과 마음의 아픔과 수많은 눈물 가운데에서" (고후 2:4; 비교 7:8) 이 편지서를 쓰고 있다는 자신의 표현에서 잘 읽을 수 있다.


  결국 바울은 서신의 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생겼던 앙금을 넘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한 형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맥 가운데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루고자하는 축도문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3. 축도문의 구성과 이해


  이제 이 축도문이 담고 있는 세 마디의 구성에 유의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바른 이해를 위해 그리스 원문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2) 하나님의 사랑과
  3)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마디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으로 되어있다. 바울은 이 "은혜"를 특별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 표현은 고후 8:9에 이미 사용된 것으로, 여기에서 바울은 이 표현이 담고 있는 특별한 의미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즉 그는 부요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때문에 가난해지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부요하게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목적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의 의미를, 이어서 나오는 부문장인 목적절(호티)을 사용하여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곧장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빌립보서의 찬송시를 (특히, 빌 2:6-8) 연상하게 한다. 바울은 전승에서 물려받은 이 찬송시를 고후 8:9절에서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여기에 "여러분 때문에"(디 휘마스)라는 구원론적인 표현을 보충하였던 것이다. 결국 내용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함"(프토케이아)이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과 동일시되고 있다. 


  축도문의 둘째 마디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랑을 가리키고 있는 말이다. 이 표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들 인간에게 베푸시는 구원과 관련된 말이다. 예수의 사역 특히 그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한 사실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롬 5:8에 잘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통하여 입증하신다"라는 말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표현의 내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축도문의 마지막 셋째 마디를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어려움이 놓여 있다. "성령의 코이노니아"(헤 코이노니아 투 하기우 프뉴마토스)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성령이 주체가 되어 역사하여 가능케 된 성도들 상호간의 공동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주체적 의미의 속격). 이러한 뜻에서 "성령의 교통하심" (개역) 혹은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 (공동번역)로 번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번역에는 삼위일체적인 사고가 전제된 것 같다. 그런데 고후 13:13에서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완벽한 형식을 찾기는 어렵다.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그리스도-하나님-성령'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또한 성부 성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즉 성령을 주체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목적격의 의미로 파악하면서, "성령에 참여"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Gen. obj.-목적격의 의미를 가지는 속격). 이 두 번째 해석은 바울이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의 피"(koinwniva tou' ai{mato" tou' Cristou') 내지는 "그리스도의 몸"(koinwniva tou' swvmato" tou' Cristou')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한다든지 (고전 10:16), 또는 "그의 고난"과 관련하여 (koinwniva tw'n paqhmavtwn aujtou', 빌 3:10) 함께 사용하고 있는 사실에서 유추해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믿는 사람들이 세례 때 영접하는 하나로된 성령을 통하여 (ejn…pneuvmati) 모두 하나의 몸체로 되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체험한다는 바울의 사고와도 (고전 12:13)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이 후대에 완성된 삼위일체론적 사고에 나타나듯이 성령을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주격으로 표현하기를 극히 절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아마도 "성령에 참여"로 번역하는 것이 본래의 뜻에 보다 가까울 것 같다.



  4. 바울신학의 핵심으로서의 축도


  앞서 이 축도의 세 마디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세 마디 중 처음에 나타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바울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을 강조하고자 이를 앞세웠던 것이다. 바울이 "은혜"라는 단어를 그 누구 보다도 즐겨 많이 사용했다는 사실에서도 (살전, 2번; 고전, 10번; 고후, 18번; 갈, 7번; 롬, 26번; 빌, 3번) 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함", 고후 8:9)는 바로 바울신학 전체를 요약하는 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온 인류를 위해 "값없이" (dwreavn) 베풀어진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난 "구원"(ajpoluvtrwsi")사건과 동일하며, 동시에 이 사건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th'/ aujtou' cavriti) 것이며 그의 의를 입증하기 위한 "대속"(iJlasthvrion)사건이기 때문이다(롬 3:24-26).


   바울은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을 축도의 머리에 두었던 것이다. 이 은혜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 죄인에게 보여주신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었으며, 이로써 성령에 참여함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축도의 첫째 마디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바울신학을 함축한 표현이라면, 이어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에 참여"는 그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볼 수 있다.



  5. 쿰란-에쎈파적 축도에 비추어본 바울의 축도


  이제까지 우리는 바울의 축도를 그 자체에 국한하여 살펴보았다. 바울보다 좀 앞선 시기에 살았던 유대인의 축도가 쿰란문서가 발견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 유대적 축도와 비교하는 가운데 바울의 축도가 지닌 독특성이 더욱 두드러짐을 볼 수 있다. 이 축도는 당시 유대교의 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쿰란-)에쎈파 사람들의 작품으로서 그들의 공동체와 관련된 규칙들을 모은 "Serek ha-Yahad"라는 문서 가운데 들어 있다.


  "사제들은 그의(= 하나님의) 모든 길을 온전히 거닐고 있는 하나님의 운명의 사람들 전체를 향해 다음과 같은 축도로 말해야 한다: '그가 (= 하나님께서) 너를 온갖 선한 것으로 축복하시고, 너를 특히 모든 사악한 것에서 지키시며, 너의 마음을 생명의 지혜로 밝히시고, 영원한 인식으로써 네게 자비를 베푸시며, 그의 자비로운 얼굴을 영원한 평화 가운데 네게 들어 올리시기를 바라노라'. 그러나 레위사람들은 벨리알의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저주하여 소리 높혀 이렇게 외쳐야 한다: '너는 저주받을 지어다. 온갖 사악한 네 죄의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보복자들의 손으로 너를 놀라게 하실 것이며, 모든 복수자들의 손으로 너를 진멸하시리라. 너는 저주받을 지어다. 자비도 없이 네 행위의 어두움에 따라서. 너는 저주받을 지어다. 끝없는 암흑불 속에서. 네가 부르짖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네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며, 네 죄가 사해지도록 용서하시지 않으리라. 그가 자신의 성난 얼굴을 너에 대한 복수로 쳐들 것이며, 너를 향하여 어떠한 평화의 말도 조상들 편에 굳게 선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으리라.' " (1QS II,1-9) 


  여기에서는 축도와 저주가 한 쌍을 이루고 있고, 그에 따라서 두 무리의 사람들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그의 모든 길을 온전히 거닐고 있는 하나님의 운명의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윗 인용문의 끝 부분에 나오는 "조상들 편에 굳게 선 모든 사람들"과 동일하다. 이것은 에쎈파 사람들이 자신을 지칭하여 사용한 표현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축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에센파에 가입하지 아니한 사람들 모두를 가리켜서는 "벨리알의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 부르면서,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 대신에 저주를 받으리라고 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이해는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롬 3:23) 바울의 사고에는 걸맞지 않고 있다. 죄인된 인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공로로 값없이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이로써 "성령에 참여함"이 허락되었다는 바울의 축도 이해와 차이가남을 쉽게 엿볼 수 있다.



  6. 결론


  끝으로,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고후 13:13에 들어 있는 그의 축도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유추해낼 수 있다.
  (1) 바울의 축도는 그 어떤 인간적인 공로나 업적을 전제하지 않는다.
  (2) 오히려 바울의 축도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의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3) 이 은혜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의 사랑의 표현이며 성령에 참여함을 가능케 한 사건이다.
  (4) 또한 바울의 축도는 그 어떤 사람도 배제시키려는 경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5) 결국 바울의 축도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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