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죄 론 (贖罪論)  


개 요

I. 구약의 속죄 (Atonement in the Old Testment)

1. 희생의 기원

a. 하늘에서 정해졌다.

b. 지상에서 제정되었다.

2. 희생의 본질

3. 희생의 효력.

a. 구약의 희생은 좋은 것이였다.

b. 신약의 희생은 보다 좋은 것이다.

II. 신약의 속죄 (Atonement in the Newl Testament)

1. 속죄의 사실

2. 속죄의 필요성

a. ---- 에 대하여 반응을 이르킨 하나님의 거룩함.

b. ---- 을 발생케 한, 인간의 죄악.

c. ---- 에 의하여 피하게 된 진노.

d. ---- 속 죄.

3. 속죄의 본질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a. 속 죄

b. 화목 제물

c. 대 속

d. 구 원

e. 화 해

4. 속죄의 효력

a. 죄의 용서

b. 죄로부터의 구원

c.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d. 영생의 선물

e. 승리의 선물



I. 구약의 속죄 (Atonement in the Old Testament)


구약의 희생을 기술하기 위하여 아까운 시간과 지면을 사용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까닭은 단순한 "희생"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뜻을 알아 볼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현대의 학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속죄의 요소를 제거한 학설이 있다면 이는 비성서적 학설이다. 왜 그러냐 하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 희생의 용어의 사용보다 더 특징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피고 인간의 죄를 씻어 구원하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제거하기 위한 참다운 희생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약의 용어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이 용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해석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왜그러냐 하면 구약의 희생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예배의 의식)은 완전한 희생을 가르키는 예언의 표식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 모형으로서의 희생을 분명히 이해하면 희생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구약의 희생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의 초림과 더불어 보다 높은 고차원의 시대가 도래하였는데 하나남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에 대하여 준비하게 하였다.


최초의 복음 전파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켜 인류의 죄를 속하는 피를 가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선언하였다. 이 최초의 복음 전파자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이란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용어를 정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수 천년 후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속죄의 희생을 통한 구속의 도리를 처음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본항에서는 구약의 희생의 기원과 역사와 본질과 효력에 대하여 취급하기로 하겠다.



1. 희생의 기원 (The Osigin of Sacrifice)


a. 하늘에서의 정해졌다.

속죄는 결코 하나님의 때 늦은 방편이 아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은 뜻밖의 일이라고 놀라서 그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성급히 만들어 낸 것이 속죄의 도리는 아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처음과 나중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 인간을 구속할 속죄의 도리를 마련하였다. 마치 어떤 기계 제작자가 기계를 만들기 전에 벌써 그의 머리 속에 설계를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속죄의 도리가 실제로 성취되기 이전에 그의 마음속에 속죄의 도리를 설계하셨다.

이와 같은 진리를 우리들은 성경을 통하여 찾아 볼 수 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13:8). 유월절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하기 몇일 전에 "미리 정해졌다"(출12:3,6) 이와 마찬가지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니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벧전1:19,10) 그는 인간의 영생을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셨다. 그런데 이 영생은 "하나님의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


(딛1:2) 이와 같은 희생을 통하여 인간들이 의롭게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창세 전에" 선언되었다.(엡1:4).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비록 그들이 무지하여 악한 손을 들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기" 때문이다 (행2:23).

그러므로 기독교는 천 구백여 년 전에 비로소 시작된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이 역사적으로 나탄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 지상에서 제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성되기까지는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이 동안에 죄인들은 어떻게 해야만 했는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며 또한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은혜를 의미하는 제도를 설정해 놓으셨다. 곧 이 제도는 동물의 희생을 가리킨다. 이 제도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제도 중에 하나이다.

창세기 3장에서 우리들은 동물을 살해한 최초의 기사를 읽어 볼 수 있다. 우리들의 최초의조상은 범죄한 후에 그들의 몸이 벗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몸이 벗었다는 것은 양심이 벌거벗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외형적으로 나타내 준다. 그들은 벗은 몸을 나무 잎으로 가리우려고 하였으며 마음 속으로는 온갖 변명을 하려고 하였으나 쓸데 없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그들의 벗은 몸을 가리워 주었다는 것을 읽어 볼 수 있다. 비록 여기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은 매우 간단하지만 동물을 잡은 것은 확실히 하나의 희생의 제물이였고 또한 그 행위의 영적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속죄의 도리를 마련해 주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은 여기서 인간의 죄를 가리우기 위하여 무죄한 동물이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양심을 가리워 주기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희생의 근본적 목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성경의 맨 처음에 있는 창세기는 죄인의 죄를 가리우기 위하여 무죄한 짐승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고 성경의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 계시록은 인간의 죄를 사유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한 흠없는 어린 양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2. 희생의 본질 (The Nature Sacrifice)


이와 같은 희생의 근원적인 제도는 왜 인간들은 어느 시대 어느 것에서나 희생의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그 이유를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비록 이바인의 희생은 본래의 모범에서 의곡되기는 하였지만 희생의 두 가지 근본 사상인 예배와 속죄에 근거를 두고 있다.


(1) 인간은 자기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는 신의 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신의 이와 같은 권리를 인정하여 자기 자신을 신 앞에 복종시키는 표시로서 인간은 예물 또는 희생을 신 앞에 바친다.


(2) 그러나 때때 로 인간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본능적으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 때 만일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다시 원만히 회복하기 위하여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자기는 신의 노염을 사서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동물을 잡아 그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림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피하는 동시에 신의 은총을 받고저 하는 제사 행위는 고대인의 가장 뿌리 깊은 신앙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저들이 이와 같은 모든 것을 배웠을가?

바울은 저들이 하나님을 알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였다.(롬1:21).

마치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의 자죽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이방인의 희생에도 하나님의 계시의 자죽이 남아 있다.


언어에 혼동이 있은 후에 (창11:1-9) 노아의 자손들은 산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때가지 우상 숭배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흩어질 때에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갖고 흩어졌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인간들은 온갖 죄를 범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매우 간략하게 롬 1:19-32은 기술해 주고 있다.


많은 민족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곧 다시 말하면 저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천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그 천세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었다.

또한 저들은 나무나 동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신 것을 깨닫는 대신에 도리어 이 자연물들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저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게 되자 저들은 자연히 우상을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우상 숭배는 결코 지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방 종교의 근거가 되는 자연 숭베의 사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정욕을 신으로 삼아 그 결과는 도덕적 부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타락하였을지라도 인간의 예배 의식을 살펴 볼 것 같으면 인간이 하나님을 보다 잘 알고 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다. 애굽이나 인도나 중국의 우상 숭배를 돌이켜 볼 곳 같으면 만물을 창조하신 영원한 영인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아 홍수 이전에 온 세상이 도덕적 부패로 가득 차 있었던 것과 같이 영적 어두움이 온 민족 위에 뒤덮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舊세계의 모든 것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를 시작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을 사용하여 새로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세워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의 빛을 이 세상에 다시 비추어 줄 한 민족의 조상으로 삼았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이방인 민족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의 도덕적 생활과 국민적 생활과 종교 생활을 다스릴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


이 여러 가지 율법 가운에 희생의 법 (The Laws of Sacrifice)이 포함되어 있다. (레1: - 7: 까지) 이 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 올바르게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배 의식을 타락시켰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순전한 예배 의식을 타락시켰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순전한 예배 의식을 회복시켜 주었다.


모세의 희생의 제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창조주에게 대한 제일의 의무인 예배를 드리는 수단이었다. 저들이 이와 같은 희생의 제물을 드린 목적은 하나님과 저들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함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저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에 저들은 속죄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또 자기 이웃에 대하여 죄를 범했을 때에는 속건제를 하나님께 드렸다.(레 6:1-7)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원만하게 회복하고 나서 저들은 자기 자신을 다시 헌신하기 위하여 번제를 드렷다 (레1장)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아 다시 용납되어 하나님과 행복하고 즐거운 교제를 회복하고 나서 그는 화목제를 드렸다. (레3장)

이와 같은 피의 제사의 목적은 온전한 희생의 제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대속의 죽음이다.(고후5:21)

여호와께서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셨다 (사53:10). 그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빚을 갚으셨다. 그리고 또한 그는 우리의 죄악된 과겨를 깨끗이 씻어 주셨다. 그는 우리들의 번제물이시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온전히 생명을 바쳤기 때문이다.(히9:14,엡5:2).

그는 우리들의 화목제가 되신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만들기 위함에서 였다. (요6:53-56,레7:15,

20 참조).


3. 희생의 효력

어느 정도까지 구약의 희생을 효력을 발생하였는가? 구약의 희생은 실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며 깨끗이 씻을 수 있었는가? 이와 같은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 그러냐하면 레위인의 희생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비교하고 대조하여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이 마지막 희생이 된다는 점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히브리서는 잘 다르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핍박을 받고 실망 낙담하여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 행위를 다시 하고저하는 히브리 교인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성전의 화려한 예배 의식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같이 보일지라도 저들이 믿는 실재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 교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돌리기 위하여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여 새 언약이 옛 언약 보다 영원한 것이며 완전한 것이라고 하였다. 제사장과 동물의 희생이 있는 성전의 예배 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은 그림자를 잡기 위하여 실체를 저버리는 행위요, 불완전한 것을 붙잡기 위하여 완전한 것을 버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히브리서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논한 것을 볼 것 같으면 옛 언약도 그 설정 목적에 있어서 좋은 것이나 새 언약은 보다 좋은 것이라고 하였다.



(a) 구약의 희생의 좋은 것이었다.

만일 구약의 희생이 좋치 않은 것이였다면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정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구약의 희생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일정한 목적을 성취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좋은 것이었다. 즉 다시 말하면 여호와 백성들이 여호와께 범죄한 후 다시 은혜의 상태로 돌아가 그와 화목을 누리고 원만한 교제를 갖게하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희생의 모든 조건을 수행하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약속을 의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숙죄한 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4:26).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제물들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두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 회개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것을 지시해 줄 수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히9:22). 그러나 한편 저들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마음의 올바른 자세들 갖추지 않고 드리는 예배 의식은 하나의 무가치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희생의 제사 행위는 즉 다시 말하면 상한 심령의 희생에 대한 외적 표현이어야만 한다 (시26:6,50:12-14,4:5,5:16,잠21:3,암5:21:24,미 6:6-8,사1:11-17 참조). "악인의 제사 (피의 희생)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 고 솔로몬은 선언하였다.(잠15:8).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들은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드리는 의식의 행위는 하나님게서 받아 드리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놓았다.



(b) 신약의 희생은 보다 좋은 것이다.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의 제사를 하나님게서 정하신 것이라고 시인하면서도 개화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의 희생이 속죄의 완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1. 비이성적이고 무책임한 동물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과는 크게 다르다. 동물들은 이지적으로 또는 자진하여 희생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희생을 드리는 자와 희생의 제물 사이에는 하등의 교제도 없었다. 동물의 희생이 인간의 영혼에 중요성을 줄 수도 없고 또한 속 사라에게 영적 능력을 줄 수도 없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비이성적인 동물의 피가 인간의 영적 구속에 하등의 영향도 줄 수는 없다. 완전한 인간의 생명을 희생의 제물고 드림으로써만 인간을 영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것이다.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는 구약의 신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4). 기껏해야 동물의 희생은 보다 온전한 속죄의 수단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를 깨닫게 되었다.(롬3:20).

그리고 이와 같은 희갱의 제물은 다만 하나님의 진노를 이르키게 할 죄를 무력하개 만드는데 불과하였다.


2. 동물의 희생을 가르켜 "육체의 예법"이라고 하였다. 곧 의식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고 죄의 외적 행위만을 사하였다. (히9:10). 그러나 그속에 영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였다. "염소와 황소의피와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켜 하여 거룩케 하거든"(히9:13). 즉 다시 말하면 동물의 희생은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한 이스라엘 사람을 격리케 하는 외적 더러움을 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육적으로 자기 자신을 더럽게 하였을 것 같으면 그는 다시 자기 자신을 깨끗게 하고 제물을 바칠 때까지 그는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격리되었던 것이다. (레5:1-6).


또 만일 그가 물질적으로 자기의 이웃에게 해를 입혔을 것 같으면 속건죄를 드릴 때까지 그는 저주 아래 있었던 것이다 (레6:1-7).첫째 경우에 있어서 희생은 육체의 더러움은 씻을 수 있었으나 영혼을 깨끗게 할 수 없었다. 둘째 경우에 있어서 희생은 외적 행위는 속할 수 있었으나 마음의 변화를 이르키지는 못했다. 다윗 자신도 동물의 희새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영적 소생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시51:6-10).


3. 동물의 희생을 반복해서 끊임없이 드려 왔다는 사실 부터가 이 희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동물의 희생이 희생을 드리는 자를 완전케 할 수 없었다 (히10:1-2). 즉 다시 말하면 이 동물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수립하는 인격을 함양할 수 없다. 이 동물의 희생으로 새로운 삶의 발단이 될 수 있는 영적 변화르이 체험을 단번에 할 수는 도저히 없다.

(히10:10).


4. 동물의 희생을 드린 제사장들도 완전치 못한 존재들이였다. 그들이 불완전한 임무를 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그들이 언제나 마음대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저들은 예배자들을 온전히 직접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히9:8) 제사장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영적 체험을 갖게 할 희생을 갖고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히9:9).


만일 어떤 영적 이스라엘 사람이 구속에 대한 자기의 소망에 대하여 질문을 할 것 같으면 그는 동물의 불완전한 희생을 통하여 그 문제의 해결은 미래에 가능하다는 것과 완전한 구속은 메시야의 출현과 더불어 도래할 완전한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참으로 예레미야 선지는 이와 같은 계시를 받았던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는 그의 백성들이 율법의 언약을 언제까지나 늘 지킬 수 없으리라고 실망하였다. 이 백성들의 죄는 철필로 기록되었다.(렘17:1)

또한 그들이 마음은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 (17:9) . 구스인이 그 피부를 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돌리킬 수 없었으며 (렘13:23)


또한 그들이 마음이 너무나 타락하고 냉담해져서 그들이 아무리 희생의 재물을 드려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렘6:20). 참으로 그들은 희생의 참다운 목적으로 잊고 있었다. 인간의 안목으로 바라볼 때에 그들은 소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가 임할 때에 백성들의 마음이 변하여 죄의 용서함을 받을 것이라고 예레미야를 위로하였다. (렘31:31-34).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우리들은 히10:17,18 속에서 조금 전에 인용한 예레미야의 예언의 영감된 해석을 읽어 볼 수 있다. 즉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완전한 희생의 수단에 완전한 속죄가 성취 되었음으로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은 필요 없게 되었다. (히10:6-10 참조).


이 완전한 희생을 통하여 인간은 단 번에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체험을 갖게 되었다. 율법의 희새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에 의하여 성취하였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펀에 앉으사." (히10:11,12).


5.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업이 완성되기 전에도 사람들이 의롭다함을 받은것은 확실하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았고 (롬4:23).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 (마8:11,눅16: 22). 모세는 영광을 받았고 (눅9:30,31). 에녹과 엘리야는 승천하였다.


이와 같은 영적 상태에 도달하기에 합당한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면 동물의 희생은 불완전하고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완전한 희생이라고 인정하고 나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어떤 것에 근거하여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을가?


오늘날 인간들이 성취된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이 저들은 미래의 희생을 미리 내다보고 믿었기 때무에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에 대한 논증을 히9:15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롬3:25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소급하여 효력을 발생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그의 죽음은 과거와 관련하여 효력을 나타 냈다.


히9:15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 옛 언약은 완전한 속죄를 주기에는 무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옛 언약을 폐하시고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죽으심으로 새 언약을 주셨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게서 구약 시대의 신자들을 의로운 것으로 여겼을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미리 예상하시고 하신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과거의 모든 빛을 갚기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으로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새 언약이 오면 오든 것이 가능케 될 것을 예상하시고 구약의 성도들을 의롭다고 칭하셨다.


구약 시대의 신자들도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누리고 잇는 특권과 꼭 같은 것을 누릴 수 있었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 대답은 부정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구약 시대에는 회개와 믿음에 따르는 성령의 영원한 선물이 없었다. (요7:39). 또한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영생의 완전한 진리를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딤후1:10) 요컨대 저들은 저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불완전으로 말미암아 제한을 받고 있었다. 기껏 해야 저들은 장차 임할 선한 것을 미리 맛보 는데 불과했다.



II. 신약의 속죄 (Atonement in the New Testament)


1. 속죄의 사실 (The Fact of the Atonement)

영원 전부터 예정되었고 또한 구약의 예배 의식 속에 모형적으로 예포되어 있는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갔을 대에 역사적으로 완성되었다. 곧 이 때에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이루워졌다. "다 이루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인용해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더 면밀하게 잘 기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의 돌발적인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공의 빛나는 소망을 갖고 인생을 출발하였으나 자기도 예측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조차 없는 파멸로 이끄는 착잡한 환경 속에 빠지고 말았다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복음서의 증언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일부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겠다고 선언한 것을 보아 그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신의 사명이지 결코 미리 예측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운명은 아니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메시야의 아들의 신분과 신성을 선언한 것이요 (시2:7) 둘째는, 주의 종으로서의 메시야의 사명을 선언하고 있다. (사42:1). 사42:1에 언급되어 있는 종은 이사야 53 장에 묘사되어 있는 고난은 그의 소명의 일부분임을 잘 의식하고 계셨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에 사탄의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벌써 그는 안일하고 인기있는 길보다도 고난과 역경의 어려운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부터가 인간의 죄의 짐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죄악된 인간들과 한가지로 행도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사야 53장에 의할 것 같으면 주의종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행동은 우리들의 비참을 친히 담당코저 하는 사상의 위대한 행위하고 할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그는 죄인으로 헤아림으로 받았는데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의 속죄 사업은 시작되었다.


주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통해서 여러 번 그의 죽음이 닥아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비유를 들어서 암시하셨다. (마5:10-12,23:37,막9:12,13,3:20-30,3:6, 2:19). 그러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는 고난을 받고 죽은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후로 그는 그의 제자들의 마음 속에 그가 고난을 받게 될 것을 깊이 명심시켰다. 이와 같이 미리 경고하여 준 이유는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갈 때에 그의 제자들의 믿음에 파탄을 가져오지 않게 하기 위함이 이었다 (막8:31,9:31,10:32).

그는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을 뜻하지 않은 불행한 비극으로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대속의 목적을 지닌 죽음으로 인식시키기 위함에서였다. 인자는 많은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려고 세상에 왔던 것이다.


최후의 마찬시에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으로 그의 공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기념해 주실 것을 당부하였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도 인류의 죄를 사하시는 것을 기념할만한 의식을 정하시었다.


그때까지 아직 메시야와 하늘 나라에 대하여 유대교의 사고 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던 그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저들은 깨닫게 되었다. 그후부터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속죄의 수단으로 미리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증거하였다.


2. 속죄의 필요성 (The Necessity for Atonement)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속죄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성결과 인간의 죄악성이나,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성결의 반작용은 진노로써 나타났는데 이 진노를 막는데는 속죄의 수단이 요청되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논할 요지는 성결과 죄악성과 진노와 속죄 등이다.



(a) 성 결 (Holiness)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성결하다. 즉 그는 인격면에서나 행위면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그의 인격의 이와 같은 속성은 그와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시33:5)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시89:14).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세계를 그의 일정한 법을 따라서 창조하셨다.그의 법은 인간의 인격의 기초를 이룬다. 그리고 그의 율법이 돌비에 새겨지기 전에 이미 인간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었다. (롬2:14,15). 이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와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하여 주며 또한 인간의 책임의 기초가 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인류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성경 구절을 볼 것 같으면 죄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시키며 회개치 않는 죄인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추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

언약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즉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로우신 분은 오직 의를 행하는 사람과 사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 하나님과의 교제를 맺고 있다는 것은 생명을 의미한다. 처음서부터 끝가지 성경은 이 진리 즉 순종과 생명은 일치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창2:17,계22:14).



(b) 죄악성 (Sinfulness)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단절시킨다. 마치 부정이 부부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괴시킨다 (렘3:20).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사59:2).

파괴된 율법을 다시 고치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속죄의 기능이다.



(c) 진 노 (Wrath)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와 성결에 대한 공격이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다. 사람이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게서 자기의 명예가 침해를 받도록 허용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예는 그를 항거하는 자를 멸망시키기를 요청한다. 또한 그의 의는 유린된 육법을 회복하기를 요구한다. 또한 그의 성결은 죄에 대하여 반응을 이르키는데 이 반응을 가리켜 진노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의 반응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손을 불에 뎃을 때에 일어나는 반응과 같이 곧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신의 진노는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격적 고려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으로 지은 것을 조급히 파멸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고하고 기다리면서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의 인자하심이 인간들을 인도하여 회개시킬 것을 바라면서 그는 심판하시기를 더디하신다 (롬2:4,벧후3:9).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됨을 오해하고 심판에 대한 생각을 비웃는다."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8:11).


아무리 심판이 지연될지라도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은 법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음으로 반드시 최후의 심판은 있을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이와 같은 진리를 갈보리 언덕에서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동안에 지은 죄를 용서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 하심이이다." 또 이 구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역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이 시대에 나타난 그의 정의의 계시에 비추어 하나님의 용서의 시대인 전 시대의 죄에 대한 심판을 중지하셨다. 이 때에 의로운 재판장이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의 죄를 무죄로 선언할 수 있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만방의 죄를 못본체 하는듯이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하여 범죄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죄의 삯을 거두어 드리지 않는듯이 보였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것 이다.

하나님은 죄를 무시하고 있는가?


그러나 예수게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의 무서운 형벌이 제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도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어떤 학자의 글을 인용하면, "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그의 분노를 가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형벌을 내림으로써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극악한 형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결코 살아 남을 인종은 하나도 없었으리라. 어느 정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간과하셨다. 그런데 어떤 임금이 죄를 간과하여 형벌을 지연시킨다면 그는 불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잘못 해석하여 그의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

스도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죽게 함으로써 그의 정의를 들어 냈다."



(d) 속 죄 (Atonement)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고 또한 義의 원리를 위반하고 말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다는 사실이 인간의 뇌리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이 그 것을 죄로 증언하고 있다. 죄악된 과거를 속함 받고 미래의 확신을 얻게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가? 율법을 범한데 대한 속죄의 방도가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하여 세 가지 답을 줄수 있으리라.

 


1. 어떤 사람은 속죄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생이란 가혹한 법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다. 이 가혹한 법은 이 법을 범한 자에게는 기계적인 냉혹성을 갖고 벌한다. 사람은 심은대로 거두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죄는 영속하는 것이므로 죄인은 결코 과거로부터 피할 수 없다. 그의 미래는 그의 죄악 된 과거에 저당잡혀 있기 때문에 도저히 사함을 받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상을 나타내주는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

움직이는 손가락이 글을 쓰네.

자꾸 계속해서 움지이며 글을 쓰네.

너의 온갖 지혜와 동정으로 써 놓은 글을 한 줄이라도 지을 수 없네

너의 눈물로 단 한 자인들 씻어버릴 수 없네.


이와 같은 이론은 인간을 환경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은 자기의 운명에 하등의 영향력도 줄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은 이론을 지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드래도 자기 자신의 법칙에 제재를 받아 꼼짝 못하는 신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은 죄인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2. 그 다음에 속죄는 필요없다고 가르치는 또 하나의 다른 극단론이 있다.


하나님은 너무나 인자하시기 때문에 죄인에게 벌을 주시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심이 깊기 때문에 범한 율법에 대한 배상을 요구치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는 필요치 않으며 용서함은 당연한 것으로 받게 된다. 어떤 의사가 그의 환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말을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속죄 같은 것은 필요없습니다. 나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하나님께 죄송합니다 고 말하면 충분합니다.." 얼마 후에 그 환자는 의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지금 나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다시 병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 하겠습니다." 동시에 그 환자는 치료비를 의사에게 줄 필요없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아마 여기서 의사는 독특히 교훈을 받았으리라. 곧 다시 말하면 단순한 회개만으로는 죄의 댓가를 지불할 수 없으며 또한 죄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것을 변상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으리라.



3. 신약 성경은 속죄는 가능한 동시에 또한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속죄 가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은 의로운 동시에 또한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속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인자하신 동시에 의롭게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두 가지 그릇된 이론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두 가지 진리를 너무 과장한 것리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쩨의 이론은 하나님의 정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의 은혜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흘렀고 두 번째의 이론은 그의 은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의 정의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속죄는 하나님의 두 가지 품성에 다 타당한 면을 지니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의 은혜와 정의를 다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그의 은혜를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 면 그는 죄인이 죽는 것을 원치 않게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하는데 있어서 그는 정의를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우주의 안전성은 하나님의 지배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품성에 타당한 공정성을 유지하였다. 그의 정의는 죄인의 형벌을 요구하나 그의 은혜는 죄인을 용서하는 길을 마련하였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품성에 타당한 공정성을 유지하였다. 죄를 경시하며 죄악의 비극적 실제를 무시해 가면서 죄인에게 동정심을 나타냈다면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하나님의로서 공정성을 잃게 되고 만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엄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갈보리 언더에서 죄의 댓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도 손상을 받지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의치 않으면도 은혜로울 수 있으며 무자비하지 않으면서도 의로울 수 있는 것이다.



3. 속죄의 본질 (The Nature of the Atonement)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은 십자가의 고난의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라는 말 자체가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 가셨는가? 신약에 이 사실이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 속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속죄,화목 제물,대속,구원,화해 등이다.



(a) 속죄 (Atonement)

히브리어로 속죄라는 말은 "가리우다"(cover)를 의미하는데 영어 성경 흠정역에는 여러 가지 말로 번역되었다. 속죄하다, (죄를) 속하다,화햐,화해시키다, 진정시키다, 용서하다,자비스럽게 대하다, 연기하다 등 여러 가지 뜻으로 번역되었다.


히브리 원어의 속죄라는 말은 죄와 (시78:38, 79:9, 레5:18), 죄인 (레4:20)을 가리워 주는 것을 의미한다. 죄를 사한 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이르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시지 않도록 죄를 가리우는 것을 의미한다.


알프레ㄷ 케이브 (Alfred Cane) 박사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 히브리 언어로 속죄라는 말은 "가리운다" 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보시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가리우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을 다른 곳에 집중시키게 하는 것을 또한 뜻한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분을 이르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를 속한다는 것은 죄가 보이지 않도곡 빛나는 베일로 죄를 가리워 완전히 시선을 다른데로 집중시키는 것을 뜻한다. 신약에서는 (의의) 새로운 옷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구약에서는 " 속죄"를 의미하였다. 율법 하에서 속죄가 행하여 질 때에는 죄와 더러움을 보고 노여워 불타 오르는 하나님의 눈을 죄를 가리운 옷으로 진정 시켰던 것이다.


좀 더 비추어져 들어났을 때에 그 빛으로부터 감싸지는 것을 말한다. 속죄는 죄인을 가리우는 것을 의미하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죄는 보이지 않으며 또한 존재치 않음으로 죄가 인간과 그의 창조주 사이에 이 이상 더 끼어 들 수 없는 것이다. 독일 신학자의 말을 빌리면 `범죄한 영혼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거하는 하나님의 제단 앞에 나올 때에 범죄한 영혼의 죄의 본질은 그와 하나님의 제단 앞에 나올 때에 범죄한 영혼의 죄의 본질은 그와 하나님 사이에 끼어 든다.

그러나 속죄의 능력이 죄를 가리움으로 고발된 그의 죄는 도말되는 것이다."


제사장이 제단에 피를 받쳤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 자기를 위하여 실현되었다고 확신하였다. "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출12:13).


속죄의 결과는 어떤 것들인가? 죄가 말살되었다 (렘18:23 사43:25,44:22).죄가 제거되었다 (사6:7). 죄가 가리워졌다 (시32:1). 죄가 깊은 바다에 던지워졌다.

(미7:19). 죄가 하나님의 등 뒤에 던져졌다 (사38:17). 죄가 사해졌다 (시78: 38). 위에 인용한 성경 구절을 상고하여 보면 속죄의 결과는 죄가 제거되고 보이지 않게 되고 무효로 되어 종당에는 죄가 가리워지는 것을 알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상 더 죄를 보시지 않는다. 그리고 죄도 그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한 죽음이기 때문에 속죄의 죽음이 다 (히9:26,28,2:17,10:12-14,9:14). 또한 그의 죽음은 희생의 죽음으로서 죄와 관련된 죽음이다. 그러면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24)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게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5:21). 죄를 속하는 것은 죄를 범한 사람으로부터 죄를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 죄를 범한 사람이 속죄함을 받음으로써 모든 불의를 떠나 의롭다함을 받게 되며 온갖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깨끗하게 한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죄를 제거한다."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의 죄는 제거된다. 곧 저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b) 화목 제물 (Propitiation)

"화목 제물" (Propitiation)이라는 말은 "가까이" (near)를 의미하는 라틴어 "Prope"에서 유래한 것으로 믿어 진다. 이 말은 접촉 시킨다. 또는 총애를 받게 하다. 또는 화목케 한다를 의미한다. 화목의 희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접촉케 하며 그의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총애와 은혜를 받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케 한다.


하나님께서 화목의 제물을 받고 죄인에게 그의 사랑을 다시 준다. 이와 같은 사상은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도 나타났다. 화목케 하는 것은 속죄의 희생을 드림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분을 진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가르켜 "화목 제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롬3:25,요1서2:2,4:10).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이로 하나님과 인간을 격리케 하던 죄의 세력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되었다. 가장 고상한 특권인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댓가를 지불하고 획득된 것이다. 제임스 데니(James Denney)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마치 옛날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던 모든 기구에 속죄의 피를 뿌렸던 것과 같이 하나님 앞으로 접근케 하는 모든 기독교인의 예배를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은 것은 값으로 살 수 없는 특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값으로 살 수 없는 특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숨어 들어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단번에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롬3:25속에 기록되어 있는 "화목 제물"(Propitiation)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 속죄소"(Mercy Seat)라는 말로는 번역되었다. 히브리어로 "속죄소"라는 말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가리움"(Covering)을 의미한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있어서 속죄소라는 말은 다 같이 속죄의 희생을 의미하는 개념을 전해주고 있다. 언약의 법궤 (출 25:10-22)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 법궤는 이스라엘의 의로운 통치자의 보좌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속에 그의 의로우신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의 돌비가 들어 있다. 둘째로,법궤의 뜨껑인 속죄소에는 그룹이라는 천사의 상이 얹혀 있다. 이 법궤가 우리들에게 전해 주는 두 가지 현저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율법을 새긴 돌비는 하나님은 의의 신으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며 그의 율법을 선포하여 악인을 징벌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죄악된 백성이 어떻게 그가 보시는 앞에서 살 수 있었을가? 율법을 덮고 있는 속죄소는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일 년에 한 번씩 피를 뿌리는 장소였다. 속죄소는 죄를 덮는 곳으로 하나님은 의로우사 속죄의 희생으로 인하여 죄를 끊임 없이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속죄의 보혈로 말미암아 심판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로 변하게 된다.


법궤와 속죄소는 속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우리들 롬3:25,26속에서 속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믿음로서 받아 들임으로)말미암는 화목제물 (속죄의 희생)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심판이 지연 된다고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 아니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죄인을 의롭게 만들 수 있는 그의 길) 나타 내려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으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죄에 대한 형벌을 내 리시는 동시에 또한 죄에 대한 형벌을 취소할 수 있을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이 그 형벌을 받음으로써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하나님의 율법도 존중시되는 동시에 죄인은 구원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형벌을 나리시는데 얼마나 의로우시며 또한 죄를 용서하는데 얼마나 자비스러운가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어떻게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겠으냐는 상당히 이해키 어려운 난문제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해결되었다.

옛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제물로 되었다는 것은 실제적 사건이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어떤 사람들은 속죄를 다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명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표명됨으로써 죄인들이 회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으로써 죄인인 회개할 수 있다는 것도 속죄의 결과 중에 한 가지라고 할 수는 있다. (요1서3:16). 그러나 이것이 속죄의 전부라고 는 할 수 없다. 가령 예를 들면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보는 데서 우리들이 강물에 뛰어 들어 빠짐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우리들이 사랑을 나타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강물에 빠졌다고 그 가난한 사람이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식료품 사회의 계산서가 자동적으로 지불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혀 있는 죄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우리들이 갚지 못하여 쩔쩔매고 있는 죄의 빚을 지불하기 위한 실제적 행동이다.



(C) 대 속 (Substitution)

구약의 희생은 본질적으로 대속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을 대신하여 제단에서 행하여 지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제단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요, 제사장은 죄인을 대표하였다. 희생의 제물은 이스라엘 사람을 대신하여 드린 대속물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들 스스로가 할 수 없는 것을 십자가 상에서 행하였다.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공로로"받게 되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우리들의 참회와 감사와 헌신을 드리는데 이것들을 드릴 때에도 우리들의 참회와 감사와 헌신을 드리는데 이것들을 드릴 때에도 우리들은 "그의 이름으로"행한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는 화목의 제물인데 우리들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들은 대속의 사상을 두드러지게 살펴 볼 수 있다.


구약에서 희생의 피가 죄를 범한 사람을 속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들은 이사야53장에서 희생의 의미가 최고에 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느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와 같은 모든 표현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한 저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릴 형벌을 짊어지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희생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형사을 취하시여 인간과 같이 되어 인간의 형벌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형벌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 상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본시 죄가 없으시고 또한 일생 동안 사시는 동안에 한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는 그가 죄인이 되었다 (죄인의 자리 취하였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또 베드로의 말을 빌리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벧전2:24).



(d) 구 원 (Redemption)

구약에 있어서나 신약에 있어서나 "속죄하다"(Redeem)라는 말은 댓가를 지불하고 되사는 것을 의미한다. 댓가를 지불하여 구속에서 해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시장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주 예수는 구속자시다. 그리고 그의 속죄의 사업은 구원을 뜻한다 (마20:28,계5:9,14:3,4, 갈 3:13,4:5,딛2:14,벧전1:18). 구원에 대한 가장 흥미있는 예를 들어 근족을 속량하는 구약의 율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레25:47-49) 이 율법에 의할 것 같으면 빚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토지를 팔았거나 자지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사람이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 속량한다는 조건 하에서 언제든지 자기의 토지를 다시 찾을 수 있으며 또한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첫째로, 그는 그 사람의 친척이어야 했다.

둘째로, 그는 속량 또는 다시 사리를 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로, 그는 속량할 돈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 자격을 구비하였다.


그는 우리와 꼭같은 인간의 본성을 취함으로써 우리들의 친척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였다 (고후 8:9). 그리고 또한 그는 신이시기 때문에 그의 보배로운 피로써 댓가를 지불할 수 있었다.


우리들이 구원의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구원이야말로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구원을 가법게 생각해서는 안되겠다. 어떤 기독교 신자들이 그들의 생활을 멋대로 사는 것을 보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참다운 생명은 잃거나 혹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한 번 이 생명을 잃어버리면 그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구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생명을 되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부자는 자기의 제물을 믿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제물의 힘은 유한한 것이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적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의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시49:7-9). 그러나 인간들은 죄 속에 살면서 그들의 참다운 생명을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에 인간의 수단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 구원을 받기 위하여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숩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 28).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오신 가장 큰 최고의 목적은 영적 생명을 잃은 인류에게 다시금 그 생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버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상실했던 참다운 생명을 다시 찾게 되었다.


베드로는 그의 독재자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이 "망령된"(vain) 이라는 말은 텅빈 것과 불만족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 가시기 전의 인간의 생활은 공허하고 헛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인간의 생활이란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을 암중 모색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실재와 접촉할 수 없는 생활이였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실재와 접촉할 수 없는 생활이였다. 이 공허한 생활은 영원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 이 따위 공허한 생활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고 부르짖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기반에서 우리들을 구원하였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의 권세를 받아 드릴 때 그의 생활은 결코 불만족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받아 드린 사람의 생활은 결코 예수 전통이나 기성 관습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권세로 자극을 받아 형성된 새 생명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혼을 해방하며 소생시킨다.



(e) 화 해 (Reconciliation)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되었다.(롬5:10).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골1:21-22). 속죄의 의미는 가끔 오해되거나 잘못 인식되는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속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하여 노하셔서 그의 아들이 죄의 형벌을 죄인을 대신해서 지불하여 하나님을 위무할 때까지 하나님은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죄인과 화해하지 않으면 교리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에 하나님 편에서 먼저 인간의 죄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우리들의 최초의 조상에게 옷을 입혀 주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속죄의 제물을 정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 주셨다. 인간의 구원의 창시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위엄성은 손상을 받았지만 그의 성결성은 이에 대하여 곧 반응을 이르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멸망받는 것을 원치 않고 (겔33:11) 도리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과 단순히 화해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 화해시키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다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 화해의 행위는 이미 완선된 일이다. 이 화해의 일은 인간의 유임을 위하여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전 세계는 이미 화해된 것이다.

다만 전도자들이 이 사실을 전하여 사람들이 이 사실을 받아 드려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각기 개인들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을 실천에 옮겨 놓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수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화해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화해의 일은 우리의 노력과 관계 없이 무한한 댓가를 지불하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인간이란 다만 이 화해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뿐이다.



4. 속죄의 효력 (The Efficacy of the Atonement)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이 인간들에게 어떤 결과를 갖어 오는가? 인간의 체험 속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a) 죄의 용서 (Pardon of Transgressions)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을 통하여 우리들이 갚을래야 도저히 갚을 수 없었던 빚을 갚게 되었고 과거의 죄를 용서받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는 이미 그의 죄가 도말되고 제거 되었음으로 죄악된 그의 과거가 어두운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라 다니지 않는다 (요1:29,엡1:7히9:22-28,계1:5). 그는 새로운 삶을 출발했기 때문에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결코 과거의 죄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요5:24).



(b) 죄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Sin)

속죄를 통하여 신자는 그의 과거의 죄로부터 해방될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로 부터 해방된다. 이 문제는 로마서 6장으로부터 8장까지에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유대인 가운데 그의 주장에 반대하고 일어 설 자가 있을 것을 미리 예상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만일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는 신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죄를 경시할 것이 아니냐고 그들이 바울에게 도전해 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6:1) 바울은 이와 같이 잘못된 신앙관을 거부하고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의 신앙으로 인하여 죄와 완전히 깨끗히 절연한다고 즉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하여 죽는다고 단호히 말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구세주를 믿는 산 신앙의 결과는 죄악된 낡은 것을 십자가에 목박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는 사람은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확신하고 전심 전력을 다하여 죄를 물리칠 것이다. 십자가는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 죄에 대한 심판이다. 그러나 유혹자인 마귀는 분주히 돌아 다니며 인간을 유혹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또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끊임 없이 자지 않고 깨여 경계하며 날마다 죄악의 충동을 십자가에 못박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롬6:11). 이와 같이 하면 승리는 확실한 것이가.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6:14). 즉 다시 말하면 율법은 인간에게 어떤 것을 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인간이 죄의 종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빚이된다.


따라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빚이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은혜는 죄인을 위하여 어떤 것 즉 갈보리 언덕의 완성된 구속 사업이 행하여진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행하여진 바를 믿을 것 같으면 그를 위하여 행하여진 바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강력한 우방을 갖고 있는데 그는 곧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신자의 마음 속에 내주하면서 그를 하여금 죄악의 충동을 분쇄하도록 협조하여 주시며 또한 기도하도록 도와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승리와 자유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해 주신다 (롬8장).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장벽을 무너드려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의 생활 속에 들어 올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갈3:13,14).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은 신자는 성결과 성령의 살려주시는 체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딛3:5-7). 옛날의 죄악 된 생활에 대하여 죽고 새로 중생하여 물로 나게 되고 (깨끗히 씻음받은 체험) 영으로 나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음) (요3:5).



(c)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Deliverance from Death)

죽음에는 육체적 의미와 영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육체적 의미에 있어서 죽음은 육적 생명의 종식을 가르킨다. 따라서 육체적 죽음은 질병과 자연死와 기타 돌발적인 원인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죽음은 영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리는 형벌을 뜻한다. 또 영적 죽음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영적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죽은 회개치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격리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영원한 격리는 곧 둘째 사망을 뜻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다만 육체적 죽음을 뜻하는 것이였다면 그 말씀이 당장 성취되었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도 계속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말 속에 죄악의 온갖 형벌의 결과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격리,불안,죄악의 경향성,육체적 연약성 종국적 육체의 죽음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생각해 볼 때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언은 참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 가셨다고 성경이 말해 주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육체적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형벌로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나추어 죽음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그는 신성을 지니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능히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사실이 가능케 되었는지 우리들은 알 수 없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으 신비로 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우주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서도 기정 사실로서 받아 드리고 있다. 전기가 어떤 것이며 또한 전기의 작용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고 전기가 제공해 주는 혜택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또한 속죄의 문제를 마치 수학 문제처럼 논증할 수 없다고 속죄의 은혜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히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자 상에서 몇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시며 돌아가신 그 죽음에 그 중대한 의미와 죙악의 형벌의 암담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절망의 부르짖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와 같은 부르짖음은 결코 순교자의 말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순교자는 하나님게서 같이 계심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부르짖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격리되는 것을 체험하는 자의 부르짖음이다. 곧 이 행위는 죄를 짊어지는 행위이다 (고후5:2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육체적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롬 8:10). 그러나 그들이 죽는 것은 죄으 형벌로서가 아니라 보다 큰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참되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11:26).

(d) 영생의 선물 (The Gift of Life Eternal)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멸망치"않고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멸망이라는 말은 영적 멸망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3:14-16,롬6:23 참조). 영생이란 것은 다만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뜻한다. 곧 영생은 하나님과 화목하여 그와 교제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하나님과 불목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교제를 갖는 것이 곧 영생이다.왜 그러냐 하면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현세에서도 신자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맺고 있기 때문에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또한 영행을 미래의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곳도 있다. (딛1:2,롬9:22).


그 이유는 장차 하나님과 맺는 교제야말로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이 그의 얼굴을 보리라."



(e) 승리의 생활 (The Victorious Life)

십자가는 발전기와 같은 것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전력을 이르켜 기독교인의 생활에 자극을 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것이라" 이와 같은 신앙 고백은 십자가의 위력을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기독 교인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그의 영혼의 반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 향한 참다운 회개를 고취시킨다. 범죄를 하고 나면 거기에는 자책과 치욕과 분노 같은 것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죄를 진 데 대하여 참으로 뉘우치고 슬퍼하는 곳에 참다운 회개가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자각은 저절로 생겨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은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정신을 어둡게 만드는 죄의 본질 속에 있기 때문이다.


죄인은 회개를 위한 강력한 동기가 필요하다. 즉 다시 말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죄를 얻게 되었으며 또한 잘못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할 수 있는 어떤 자극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회개의 동기가 될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는 죄가 무섭다는 것을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초래하였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또한 죄의 무서운 형벌을 나타내 주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도 나타내 주었다. 참으로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의 자녀들이다. 저들의 회개는 저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저들의 회개는 죄가 어떤 것이며 또한 하나님으 사랑이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는가를 나타내 주심으로써 저들의 영혼 속에 일어난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큰 환난을 겪은 어떤 성도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된 말씀이 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7:14).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결케 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들은 죄를 항거하였음으로 지금은 깨끗게 되었다. 저들은 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어디서 얻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는 힘이 갈보리 언덕에 계시 되었다. 십자가의 능력이 저들이 마음 속에 들어가서 역사함으로써 죄를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갈2:20 참조)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12:11).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들을 강권하여 저들로 하여금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압력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가 저들의 배후에 하나의 원동력이 되어 있었음으로 저들은 패비하지 않았다. 저들은 저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에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저들의 비겁으로 인하여 감히 배반할 수 없었다. 저들은 그의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는 저들의 것이다.


이 승리의 생활 가운데는 사탄을 이기는 승리가 포함되어 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은 대신하여 사탄을 정복하였다고 선언한다 (눅10:17-20, 요12:31,32,14:30, 골 2:15,히2:14,15,계12:11). 기독 교인들은 마귀를 이기는 승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한, 마귀를 능히 이길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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