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의 성서적 고찰과 종교개혁 시대의 성만찬 이해



한국 장로교 입장에서


유월절?


성만찬에 대한 성서적 고찰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시되고 연구되어 오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제정하신 이 성례전이 유월절 식사이었느냐 아니었느냐이다.


마가를 비롯하여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식사는 바로 유월절 식사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성서기술과 함께 지속되어 온 성만찬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유월절식사를 성만찬의 근원으로 이의 없이 받아들여 왔었다.


성만찬이 유월절식사이었음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가 Joachim Jeremias이다.

그는 저서 ‘Die Abendmahlsworte Jesu’ 제1장에서 이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J. Jeremias는 유월절 전통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서 주장하고 있다.


a. 예수는 그의 최후의 만찬을 관습에 따라

사람들이 가득한 예루살렘 시내에서 행하셨다.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예수는 베다니로 다시 가시지를 않으셨다.


b. 공관 복음(마가 14:17, 14:30, 마태 26:20)과 요한 복음(요한 13:30)

그리고 바울의 기사(고전 11:23)에 따르면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밤에 거행되었다.

이것은 보통의 식사 습관과는 다른 것이었다.

예외로 유월절 식사는 밤에 행하여졌다.


c. 마가 14:26과 마태 26:30에 나타나는 찬양 Passahallel의 후반부로서

식사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Jeremias는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두 개의 잔을

유월절 식사에서 사용되는 4개의 잔 중 2개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관습과 성만찬의 비교연구를 통하여서 새로운 이론들이 대두하였다.

이중의 하나가 키두시 식사라 불리는

유대인들이 매 안식일이나 축제날에 전통적으로 가졌던 식탁에 관한 것이다.


이외에도 Dome G. Dix, H. Lietzmann K. G. Goetz 등은

유대교의 우정의 식사였던 Habhuramahl로 보고 있으며

K. G. Kuhn 등은 엣센 공동체에서 해하여지던 식사로 보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통적 견해로서

성만찬의 기원은 유월절 식사이고 예수께서 최후로 지켰으며

여기서 새로운 성만찬으로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공관 복음 기자와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께서 안식일 전날에 즉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데에 일치하고 있다.

공관 복음 기자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그의 최후의 만찬을

목요일 저녁에 즉 유월절 식사에 행하셨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이 유월절 식사는 Nisan월 14일 저녁부터 15일까지 행하여졌다.

이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유월절 축제의 첫날인 15일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서(요한 18:28)"

관청에 들어가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곧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요한복음 기자의 계산법을 따르게 되면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Nisan월 13일에 거행되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 잔치와는 관계가 먼 것이 되게 된다.

이러한 날짜의 상이함을 조정하기 위하여서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다.

아래에서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a. D. Chwolson: 예수께서 죽던 해의 Nisan월 15일은 안식일이었다.

해서 유월절 양을 잡는 것과 안식일과의 겹침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 해에는 유월절 양을 목요일인 13일에 잡아야 만했었다.

이렇게 됨으로서 유월절 잔치는 두 가지의 서로 상이한 날에 행해지게 되었다.


Chwolson의 주장에 따르면 바리새인 그리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공관 복음에 나타나는 대로 13일 밤부터 14일까지 유월절 잔치를 행하였으며

이에 반해서 사두개인들은 요한복음의 기록대로 전통적인 날짜인

14일 밤부터 15일까지 행하였다는 것이다.


b. P. Billerbeck: 당년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이에

유월절 잔치의 날짜에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즉 당시의 두 계층 사이에서는 Nisan월 시작에서부터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

이 결과로서 유월절이 서로 다른 날에 시작되었다는 것.


c. A. Jaubert: 서로 상이한 달력이 당시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달력에 따라서 Nisan 14일이 서로 다르게 계산되어졌다는 것.

즉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쿰란-에센의 달력을 사용하였으며

이에 반해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기록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던 공식의 달력인

Lunisola Kalender의 날짜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이한 주장들은 어떠한 결론이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 논의되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어느 한 견해로 확정되어져야만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했든지 간에

분명히 새로운 성례전으로서 성만찬을 제정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월절의 전통에서 예수의 성만찬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의미를 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제정사


고전 11:23-26


주의 만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전 11:23-26에 나타나는 바울의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3절에서 바울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문구를 해석하는 데에 논쟁이 있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한 것과 같은 신비한 계시인지,

아니면 바울이 하나의 전통(제자들 사이에서 구두로 전해 오는)을 알고 있었는지.

이러한 논쟁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바울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짧은 바울의 표현은 그 상황의 실존적 성격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 식사는 보통 식사와는 다른 것이며

예수는 이 식사 후 잡히셔서 십자가로 향하게 되며

이것은 죄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곧 진정한 양이신 예수께서 모두를 위해서 단 한 번 희생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미 고전 5:7에서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 희생의 양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울은 신령한 음식과 음료가

얼마나 속된 음식 및 음료와 혼동 될 수 있는 가를 지적하기 위해서

"주님의 떡과 잔 (27절)"이라는 두드러진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음식과 음료는 오직 주님 자신이 그에 효력을 끼치기 때문에

신령한 성격을 띄우고 있고 그래서 주님의 몸과 피와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기 현시를 계산에 두지 아니하고

따라서 주님의 만찬을 축하하고 있지 않는 예배 자는

누구나 성만찬에 적절하지 못하게 처신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가서 그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다.

이것이 바울이 그의 기록에서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는 바울의 기록은

"이리하여 지금 높이 우신 그분은 그의 죽음에서 그가 단번에 우리에게 주셨던 것을

주님의 만찬에서 계속하여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잔은 아버지에 의해서 예수에게 계획되어진 신의 뜻이었으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희생의 잔"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의 만찬은 희생적인 식사,

주님의 희생적인 삶을 부어 주는 데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의 희생적 제공,

즉 세상에서 그의 몸이었던 것에 직접적으로 향하는 제공 안으로의 참여를 포함하고 있다.


이리하여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희생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책임적 존재를 말하며 그리스도의 재림 대망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Wiederholungsbefehl이 두 번씩이나 나타나고 있다.

곧 성만찬에 거행될 때마다

예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되셨다는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억"이라는 것은 단순한 회상의 의미가 아니라

오늘에 있어서의 Vergegenw rtigung을 의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14:22-24)와 마태(26:26-28)


마태와 마가의 주의 만찬 제정 기사는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학자들은 마가의 기술을 마태가 따랐을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둘 사이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마태 26:28에 추가된 "죄의 용서"부분이다.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 나타나는 단어인 "언약"은 출 24:8에 근거하고 있다.

마가와 마태에 나타나는 성만찬 제정에 관한 모든 기사는

예수가 그의 언약과 관련된 그 자신의 피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언약은 주되심에 관련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 자신과 그의 백성 사이에 세우신 것에 대한 복종인 것이다.

또한 언약의 피는 그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언약을 효과 있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마가와 마태에서 발견되는 대명사 "나"에 대한 강조는

예수의 새 언약과 옛 계약 사이의 비교에 관련되는 것이다.

즉 마가와 마태는 예수의 말씀이 새 언약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잘못 이해 되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곧 잔 그 자체도 또는 물질적인 피도 이 언약을 효과 있게 하는 힘이 없으며,

십자가도 주님의 만찬 그 어느 것도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존재 형태 또는 새로운 하늘의 뜻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마술이나 마법을 가르치려 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예수의 희생적인 삶과 연결시켜야만 한다.

즉 마가 14:24에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이라는 구절은

희생적인 의미를 가진 언어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주는 삶’(Selbst-Hingabe)에 기인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많은 사람"이란

단지 몇 명만이 아닌 모든 인간들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마가 14:25에 나타나는 "포도의 열매"에 관한 언급은

세상의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식사를 예견한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현재적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


이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라는 사실이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는 새로운 모세로서,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로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써 (히 9:12)

새로운 완전한 계약 (히 9:26)을 맺은 것이다.

잔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상에서 흘릴 예수 자신의 피였다.

이 피는 새로운 언약을 맺는 희생의 피였던 것이다.


누가 22:15-20


누가의 성만찬 제정 기사는

일반적으로 15-18절과 19-20절 두 부분이 합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누가는 독특하게 두 개의 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빵 전의 잔과 빵 후의 잔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누가가 성만찬을 유월절 식사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잔은 유월절 식사에서 사용되는 네 개의 잔 중 두 개를 언급하는 것이다.

19-20절에서 "너희를 위해 주는"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를 회상하면서 성만찬을 반복하라는 명령이며,

그리고 잔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예수의 피안에서 이루어진 새 언약과 관련된다.

이 누가의 기사에서 바울과 같이 회상으로서의 만찬을 반복하라는 명령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희망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또한 만찬을 하나님 나라에서의 메시아적 축제로 보고 있다.


종교 개혁시대의 성만찬이해


예수에서 시작된 성만찬은

초대 교회를 지나 종교개혁 전까지는 그리 큰 신학적 문제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발단으로 해서

로마 카톨릭과 개혁자와의 사이에서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성만찬의 현장에 예수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느냐"이었다.


로마 카톨릭교회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성만찬에 대한 입장은

집례자인 사제가 빵과 포도주에 대한 축성을 하는 순간에

이 빵과 포도주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해석

즉 화체설 이다.


로마교회는 이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믿게 되었고

변할 수 없는 교리로서 오랫동안 지속시켜 왔기에 지금도 동, 서방교회에 정착되어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받으신 육체가

실제적으로 그 현장의 빵과 포도주 속에서 변화하여 성도에게 전달됨을 강조하면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은

예배나 기도회, 그리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에서 분리시켰다.


이 화체설은 1215년 이노센스(Innozenz) 3세 교황 밑에서 행해진 공의회에서

확고한 교리로 확정되었다.

이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제와 희생물이 그리스도 자신과 동일하며,

그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제단의 성례 안에 실제 포함되어 있으며,

신적 능력에 의해 그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본질 변화한다."


이에 덧붙여서 공의회는 정당하게 서품 된 사제만이

성체 성사를 축성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당시에 신자의 영성체가 너무나도 드물어졌기 때문에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곧 부활절 때 성체 성사를 받지 않으면 안 됨을 교회법으로 정하였다.


이 화체설은 1551넌 10월 11일 트렌트 공의회 13회기의 제 4장에서

다시 한 번 명확히 공포되었다:


"제4장 실체 변화에 대하여;

우리의 속죄주 그리스도는 빵의 형태 아래 봉헌된 것을

참으로 그의 몸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언제나 확신되어 온 것을

이제 이 성스런 공의회는 새로이 선언한다.

즉 빵과 포도주의 축성에 의하여

빵의 실체 전부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화하고

또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그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고

거룩한 카톨릭 교회는 이 변화를 실체 변화라고 부른다."


트렌트 공의회가 이상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한 가르침을 곡해하는 해석에서 지키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그것은 루터가 명백히 실체변화라는 가르침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가 이 전통적인 가르침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루터의 성만찬 이해


일반적으로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성찬이 희생 제사라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몹시 반대하였다.


루터는 1520년에 저술한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 제도와 신학을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성만찬에 관해서

로마 교회가 세 가지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신자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를 주지 않는 것이다.

루터는 고전 11장 25절의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것은

일반 신도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으로

포도주를 일반 신도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성례전을 변질시키는 것이고

다 함께 참여함으로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되므로

잔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죄에 속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둘째는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의 과오를 지적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은 마술적인 것이라고 표현한다.

루터는 An den christlichen Adel에서

화체설은 신조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설일 뿐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셋째로, 카톨릭 교회가 성만찬을 희생 제사로 해석함을 지적한다.

루터는 성만찬이 희생 제사도 인간이 행하는 선업도 아니고 만찬이며,

그리스도가 이 만찬을 제정한 것은

믿는 자를 위로하는 신앙을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기 위하여서라도 역설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성찬에 현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을 카톨릭과 같이 문자대로 믿었으나

카톨릭과는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가 성찬 시에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소유한."

이런 루터의 표현은 보통 Konsubstantiaionslehre라 불리지만

루터 자신은 이 용어를 사용치를 않고 있다.

루터는 성만찬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관시키고 있다.


그는 대 요리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단순한 빵과 포도주에서 구별시켜 주는 것은 말씀이고,

말씀이 외적인 요소와 결합할 때 그것은 성례전이 된다.

말씀으로 인하여 그 요소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하실 수도 없고 속이실 수도 없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무소부재를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몸이 이 영광을 나눠 가짐으로 무소부재 역시 나눠 가지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고 통치하시는 곳에

그리스도도 역시 육체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그의 기독론이 뒷받침되어서,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존재하는 곳에는 육적으로도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이론은 빵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찬은 절대적 효과가 있어서,

악한 자들이 성찬을 받거나 집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나 신앙 없이 받아진 그리스도의 몸은 독약이며 죽음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루터는 성찬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이것을 통하여 죄 사함을 얻고, 새 사람을 강화시키고 영양을 주며,

우리들의 신앙이 새로워지고 강화시켜 주는 양식과 자양물"이라고 하였고,

죽음에 대항하는 힘을 얻고 영생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능력과 유익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이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쯔빙글리의 성만찬 이해


쯔빙글리의 성만찬론은 기념설 또는 상징설로 불려진다.

곧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사에서 드려진 몸과 피의 표징들이다.

이 표징들은 몸과 피가 이렇게 드려진다는 것을 상징하며,

그리고 우리에게 구속사역을 회상시켜준다"는 것이다.

그의 성찬론의 중점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 구속의 감사, 영적 연합에 있다.


쯔빙글리는 1523년의 저서 67개 논조에 대한 해설에서

"미사는 희생제사가 될 수가 없으며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을 되새기는 회상이며 구속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서 그는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부인하고

빵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는 견지하였으나,

육체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부인하고, 믿음 안에서 영적 참여를 가르쳤다.


그가 이같이 주장하는 배경에는 성만찬 제정의 말씀에서

"est(ist)"라는 단어를 "significat(bedeutet)"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쯔빙글리는 성서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일곱 염소는 칠 년의 풍년이다"

또는 요한복음의 "나는 포도나무이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등의 표현에서의

"이다"는 "의미한다"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표상은 성찬에 계시지 않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지리적 관념을 가지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지상의 성찬의 자리에 동시에 계실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후에 그의 신성으로만 편재하시며

그의 인성으로는 하늘의 일정한 장소에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에게 있어서는 세례가 내적인 거듭남의 표시와 상징이듯이

성찬도 역시 한 표시이며 상징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서 그는 성만찬을

그리스도와 그리고 믿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공동 식사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성찬에 있어서 참여자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성찬에 임재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임재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임재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사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Eucharistie)를" 행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임재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진정으로 임재 한다고 믿는 바

그러한 임재 없이는 영적 교제(Kommunion)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조악하고 육체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신앙적이고, 경건한 마음에 의한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 먹히운다고 믿는다."


쯔빙글리는 1525년 4월에 미사를 폐지하고 대신 성찬예배로 대치하였다.

이 예식은 청년들에게는 목요일에, 중년층은 24일에

노년들에게는 부활절 주일에 행하였는데,

이때 누룩이 섞이지 않은 빵과 포도주를 나무그릇에 담아 행하였다.

그는 1년에 네 차례

-부활절, 오순절, 가을에 한 번, 크리스마스-성찬식을 행하도록 제안하였다.


Marburg회의


루터 파와 쯔빙글리 파의 양쪽의 신학적 이견을 조정하기 위해서

필립의 주선으로 자신의 성에서 1529년 10월 1일에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5개 조문에서 14항까지는 커다란 문제없이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15항인 성만찬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이 회답은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표현하기를 "우리는 서로 다른 영을 가졌다"고 하였다.


칼빈의 성만찬 이해와 실제


종교개혁의 제 2세대인 칼빈의 성찬론은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의 비성서적인 성찬론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였고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찬 논쟁을 거치면서

양자를 조화하려는 마틴 부처의 영향을 받아서 소위 "영적 임재설"로 정착하게 되었다.


성례전


먼저 칼빈은 성례전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례는 약속에 대한 인장이며, 언약의 표징이다.


그는 로마 카톨릭과는 달리 성례전에 참여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설교를 통해서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칼빈은 "설교를 들을 때 비로소 보이는 표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였고

복음이 선행하지 않는 성례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 성례전에는 반드시 성령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성례전이 정말로 자체의 직책을 수행하려면

내적 선생인 성령이 와서 마음을 감동시켜야 하며,

이 성례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 없는 성례전은

아무리 거창하게 거행되어도 신앙을 북돋아 줄 수 없는 것이다.


성만찬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는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이며,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계속해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하는 표징"이라고 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서 빵을 받을 때

빵이 신체에 영양과 생명을 주어 신체를 유지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과 생명을 주는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성찬의 중요한 기능은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한 6: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한 6: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약속에 대한 인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은 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그는 또한 성서 주석에서

"성찬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려고 준비된 기념물"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1542년의 제네바 신앙 문답서 제 362문에서

성찬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이며 표시이다.

즉 이러한 예전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성찬의 목적과 효과


성찬 제정의 목적에 대해 칼빈은

"주님이 그의 몸과 피를 주셔서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양육되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이를 제정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며

더 나가서는 "주께서는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권장하며

고취하는 방법으로 성찬을 제공하셨다"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성찬은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자라며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의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받으신 고난이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이 빵에 의해서 자라고 힘을 얻고 보존되므로

그 살리는 일이 영원하다는 확신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성찬의 효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구속과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 밖의 모든 은혜들이다"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신자간의 일치의 효과가 있음을 설명한다.

즉 "주께서는 성찬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들에게 주셔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며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데,

주께는 한 몸이 있을 뿐이며 우리를 모두 그 몸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이 참여에 의해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

성찬에서 제시되는 빵은 이 단결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 말씀과 믿음과 성령


칼빈은 우선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가 성찬에서 받는 은혜에는 모두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고 표현한다.


또한 성령이 동반하지를 않으면 성례는 유익이 없게 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이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며,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를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의 능력이 우리와 멀리 계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 영의 양식이 되도록 결합시킴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칼빈은 불신자의 성찬 참여를 반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임재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적으로 임재 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따라서 화체설을 반대하며, 쯔빙글리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편재설도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반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성만찬에 임재 함을 말한다.

그는 "성찬에 대한 소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거룩한 의식의 효과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하며 이적적인 능력으로

그것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고 주장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안에 참예의 띠가 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성만찬 실제


칼빈은 "성찬을 자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집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1537년 제네바의 소 의회의 대표로서

 제네바에 있어서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대한 문서에서

성만찬을 자주 - 일주일에 한 번씩 - 집행하기를 주장했었으나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Straburg에서는 월 1회씩 성찬식을 집행하였다.

그는 1541년에 재차 제네바의 소 의회에

성만찬을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행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다시금 거절되었고

이에 대해 의회는 일 년에 4회의 성만찬 집행을 결정하였다.


한국 교회의 성만찬의 이해와 실제


1885년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의해서 시작되어진 한국개신교는

이후 아주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중 특히 장로교는 가장 큰 교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장로교의 예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빠져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만찬 예전이다.

이에 대한 원인은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의 영향이 그 하나이다.


초대 한국교회는 입국한 선교사들 특이나 미국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그들의 예배형태들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초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중요 점은 카톨릭과는 달리 예배예식과 교리보다는

이들은 주로 학교교육과 성서번역 특히 복음전파에 있었다.


한국초대 교회에 있어서의 성례전


초기 한국 장로교회에 있어서의 중심점은 바로 성서 그 자체에 있었다.

G. H. Jones는 설명하기를 "성서에 대한 강조는 한국교회에 있어서의 큰 특징"이었다.

성서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말씀의 선포와 함께 행하여져야 할 성례전은 극히 소홀히 되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1885년 이전에는 세례는 한국內에서는 이루어지지를 못하였고

단지 한국 外에서 행하여졌다.

이에 대해 민 경배는

"그래도 국내에서도 세례는 비교적 꾸준히 이행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한국 내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노도사(魯道士)가

1886년 7월 11일에 비밀리에 언더우드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며,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 역시 같은 해 6월에 배재학당에서

두 사람의 한국학생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되어있다.


당시에 이러한 일들은 법을 어기는 것으로서 실로 생명을 걸고서야 가능한 일이어서,

사실 당시의 선교사들은 이러한 위험한 모험을 만류하는 입장에 있었다.

1889년 4월 27일은 소위 한국의 요단강 세례가 베풀어진 날이다.

언더우드가 의주(義州)에 갔을 때 33명의 교인이 세례 받기를 원하여서

당시의 국법이 허락치를 아니하므로,

결국은 배를 내어 강을 건너, 중국 땅 안동(安東)에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성찬(聖餐)은 그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이에 상응한 존중을 받아 오지를 않았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1885년 4월에 우리나라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이 해 6월 28일에 헤론과 스크랜턴이 알렌 내외와 함께 처음 예배를 드리고,

1886년 7월 23일에 공식으로 한국 정부에 통보하고

공관 안에서 영국, 미국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성찬예전이 최초로 집행된 것은 1885년 10월 11일이다.

이때에 한국교인들은 참석하지를 못하였다:

"해군 장교 세 사람을 포함한 참석자 12명의 명부에는 한국인의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이후 1887년 9월 새문안 장로교회가 세워지는데

창립예배 시에도 성찬예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는 성찬예전을 모르고 그 성례의 견고한 짜임새 위에 세워지지 아니한,

그런 한국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우리나라 교인이 처음으로 성찬예전에 참예한 것은

새문안교회가 세워진 후 3개월이나 지난 1887년 12월 성탄절에

언더우드의 목사의 집에서였다.

이 역사적인 날의 예전에는 선교사를 포함하여 단지 7명만이 참석하였을 뿐이다.

복음의 말씀이 이 땅에 들어온 지 3년 8개월이나 지난 후요,

성서가 우리나라말로 번역된 지 5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이에 대해 참으로 이상한 일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서의 성례의 실천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 권장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세례의식이 한국정부의 종교박해를 유발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알렌 의사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즉 세례는 선교사들의 사업이나 증언이 아니고, 바로 기독교 바탕이요,

따라서 성례가 교회의 본질이 되어있다고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며 우리의 초대교회는

참된 의미의 성도의 사귐,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공동성이 결여된

그러한 교회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의 영향


이러한 예배예전이 소홀하게 된 배경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을 들 수가 있다.

초기 선교사들의 배후에는 청교도적 예배가 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이주한 이들의 예배는

유럽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파이퍼는 미국 변경개척시대의 예배 발전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 당당한 지위를 가졌던 두 교파는 회중교회와 장로교인데,

이 두 교파 모두 다 신학은 칼빈주의적이고, 예배는 청교도적이었다.


미국 식민지에서 회중교,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사이에는

어떤 고정된 예배순서를 배격하였다.

미국 개척시대의 특징은 개인주의와 부흥운동이었다.

미국 개척시대의 이들 교회는 그들의 첫 과업을

"위급한 데에서 건져내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예배를 회심과 구별하여, 아주 중요하게 다루지를 않았다.

당시의 예배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예배에 일정한 형식이 없었다.

2) 예배의식을 거행할 교역자가 부족하여서 의식은 자주 있지를 못했다.

3) 개척의 회중 편에서는 교육받은 목회를 의심스러워하였다.

4) 설교가 예배에서 가장 중시되었다.

5) 예배순서의 특징은 수많은 찬송에 있었다.

6) 개척시대의 예배의 특징은 즉흥적이었고,

   과거와 전통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를 않았다.

7) 예배의 장소는 평평하고 거칠었고, 교회 건물을 의식에 알맞도록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러한 전통 안에서 성장한 한국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온 예배의 형태에는

성례전에 대한 강조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를 못하였다.

또한 이들이 한국에 소개한 예배는

부흥적인 요소가 강조되어진 감정적이며 신앙 중심적인 것이었다.


성만찬에 대한 현대 한국 장로교회의 이해와 실제


한국 장로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종교개혁시대 중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이다.

이 시대에 영국의 국왕은 자신의 교회와 일치하는 예배를 하도록 강요하였고,

이로 인해 찰스 1세 때에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심한 반발과 함께 분쟁의 여지를 포함하게 되었다.


결국 영국의회는 Westminster에 모이게 되었고

여기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독자적 신앙과 예배의 형태와 내용을 인정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장로교회 정치와 예배모범이 나오게 되었고

이를 1645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는 이를 정식으로 받아들였으며,


이것은 각국으로 퍼지게 되어

세계 장로교의 소중한 교리 및 예배의 근거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중

성례, 세례 그리고 성만찬에 대한 교리에 대해 Philip Schaff는

"성례, 세례 그리고 성만찬에 대한 교리는 특히 칼빈적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또한 J. B. Marsdon은

"우리는 영국교회의 예배교리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인 A. F. Mitchell 박사는

"성만찬에 대한 교리는 쯔빙글리의 기념설(Ged chtnislehre)

그리고 루터의 실재임재설(Realpr senslehre)과는 다른 것이며,

카톨릭의 화체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웨스트민스터의 예배모범 중 성만찬 예전을 소개하여 본다.


말씀의 예배

예배의 부름

예배기도(경외, 찬양, 성령의 임재를 기원하는)

구약성서(한 장을 봉독)

신약성서(한 장을 봉독)

운율을 사용한 시편

고백과 중보기도

설교

기도(구속, 복음, 설교에 대한 감사)

주님의 기도


성찬 예배

봉헌(성물을 알맞은 그릇에 넣어 가져다 드리는 것 등)

성찬에의 초대

성물의 성별

성찬 제정사(고전 11장)

교훈

성찬기도(시작기도, 창조 구속 말씀과 성례에 대한 감사기도, 성령의 초대)

성체 분할

분병 / 분잔

성도들의 참여

거룩한 삶에 대한 권면

성찬후 기도(성찬에 대한 감사기도, 거룩한 삶에 대한 기도)

시편에 의한 찬양

축도


한국 예장(통합)은 예식서에서 성찬의 신학과 의미에 대해 5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성찬은 그리스도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일,

즉 죄로부터 구속하시고 믿음을 주시고 성화 시키시는 은혜에 대하여 감사는 것이다.


(2) 성찬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죽음, 부활, 재림)를 새롭게 회상(기념, 재현)하며,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재 하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보증하는 것이다.


(3) 성찬에서 그리스도인은 성부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회상하며, 성령님의 임재를 기원한다.

이는 성령님이 오셔서 성찬을 받는 자를 그리스도 뿐 아니라

역사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도록 그의 몸과 피로 양육시키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4) 성찬은 그리스도와 화해한 본을 따라 성도의 교제를 이룬다.

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과 분쟁을 화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나아가 온 세상의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헌신 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5) 성찬은 하나님 나라에서 있을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미리 맛보는 잔치의 식사이다.

그리고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고 의와 화평을 이루도록 보냄을 받는다.


그리고 기장은 성례와 성찬을 신앙고백에서는 다루지를 않고

단지 예배 예식서에서 다루고 있다.

기장은 "성례전은 행위로서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모는 성도들은 이 성례전에 참예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관련된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예장에서나 기장에서나 큰 범위로 보면

이론적으로는 칼빈의 성례전이론을 따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서 보면 그러하지 못함을 발견한다.


칼빈은 성만찬을 "자주, 가능한 한 일주일에 한번씩"할 것을 강조하였다.

예장의 예배모범에 따르면

"세계 개혁교회의 예배에서는 매주 성찬 성례전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각 교회의 형편에 따라 그 횟수는 자율적으로 조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가능한 성찬 성례전은 자주 거행하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회상하고 참여하게 해야 한다"라고

새로이 개정된 예식서는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성찬예전은 연 2회 내지 4회가 거행되고 있다.

더군다나 기장의 예배 예식서에는

성찬의 횟수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지고 있지를 않고 있다.


그리고 고신의 예배 예식서에서는 성찬의 횟수는 당회에 일임 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초대 한국교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현 한국 장로교교회에서도 성만찬 예전은 여전히 경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만찬은 초대교회로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예배에서는 이 성만찬은 항상 예배의 중심에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성만찬을 통해서 교회는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볼 수 있으며

거기에 참예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다시금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O. Cullmann은

성만찬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하는 새로운 계약의 재확인으로서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성도들의 메시아적인 하나됨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만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만찬을 세례식후 곧바로 행하였던 것을 우리는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초대교회의 성만찬이야말로 깊은 감격과 생명력을 지닌 예전으로

예배의 순서에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예전의 모든 주제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 하시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이었으며,

이 예전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총과의 대면이라는

생동적인 신앙을 주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예전의 현장에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또한 그의 원하시는 대로 새롭게 소생한 성도들은 그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의 사건을 이 예전 안에서 이루게 됨으로서


이 성례전을 가리켜 중심적 행위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추어 오늘의 한국교회가 드리는 매주일 예배 속에서

성만찬예전이 차지하는 위치를 볼 때,

우리는 과연 초대교회가 행하였던 또한 경험하였던

그러한 감격을 소유하는 가에 대해 질문하여 본다면

그의 대답은 그리 긍정적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일 년에 한두 번 혹은 3-4회에 달하는 횟수에서 그리하고,

또한 성만찬에 대한 이해에서도 그러하다.


우리교회가 갖는 성찬 예전은 실제 현장에 있어서는

"나를 기념하라"라는 언어적 의미 외에는

그 이상의 신학적 의미 부여에 무관심한 것을 느끼게 된다.


또한 이 성찬예전이 개신교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모를 정도로

형식적으로 행하여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오늘의 한국의 장로교 교회에서

목회자와 성도 모두에게 귀중한 성례전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를 필요로 하게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단순히 말씀만 듣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닌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전 가운데서 경험하고 깊이 깨달은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씀과 성례전이 함께 이상적으로 행하여지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서

우리는 보다 관심을 기울여서 성만찬을 다시금 바라보며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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