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의 역사


이것은 이미 총회 설립 이전부터 예고된 일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내지 선교사 총무 아더 브라운(Arthur J. Brown)이 한국장로교 총회 설립 2년 전, 1910년에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로체스터 대회(Rochester Convention)에서 보고한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보잘것없는 이 나라가 이제 비기독교 국가들 중에서 복음화 되어 더 거대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처럼 보인다”는 예상은 1세기가 지난 오늘 사실로 입증되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드문 일이다. 특히 장로교회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주도하는 중심 세력으로 처음부터 그 위치를 톡톡히 감당해왔다. 비록 ‘한국장로교가 한국이라는 사회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여 왔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때 항상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100년 동안 장로교는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힘입어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새로운 세기로 접어들면서 틀을 다지기 시작한 한국장로교회는 그간의 수많은 대 사건들과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으로 흔들리지 않고 역사를 이어왔다.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의 치욕, 이어 진행된 일제의 36년의 식민 통치 그리고 1945년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굴곡 많은 민족사 속에서도 교회는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며 오늘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도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20년대 김익두 부흥운동, 6.25 직후 회개운동 그리고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과 민족복음화 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지켜주셨고, 해외 선교열을 불어 넣어 주셔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교회로 성장시켜 주셨다. 그리고 이 일에 예장총회를 그 중심에 세워주셨던 것이다. 때로는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의 시녀로 전락했던 암울한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장로교회는 민족과 사회의 선도 기관으로서의 면모를 지켜올 수 있었다.

 지난 역사를 회고할 때 그동안 한국장로교회는 크게 선교사 입국과 장로교 설립(1884-1900), 대부흥운동과 노회 및 총회의 조직(1901-1910), 해외선교 및 사회 변혁과 한국장로교 성장(1910-1930), 도전과 응전의 시대(1930-1945), 대립과 분열의 시대 (1945-1960) 그리고 개혁과 재편의 시대(1960-2000)로 대별될 수 있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어떻게 한국장로교회 총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가를 고찰하려고 한 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로교 총회는 물론 교회가 처한 시대적 역사적 환경도 충실히 반영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1884년 9월 20일 중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 알렌이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면서 개신교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해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그리고 스크랜톤이 입국하여 한국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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