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약 500-1500)


AD. 476년 로마의 서방지역은 폐허로 변했다. 정치적 안정은 침해받게 되었고, 그결과 기독교는 불안정한 시대를 맞지 않으면 안되었다. 불안이 더욱 심화된 것은 7세기 이후에 있었던 이슬람의 침략운동으로 AD. 750년까지 성지점령과 콘스탄티노플 위협까지 심각하였다. 서방교회는 이러한 이슬람의 위협적인 태도는 AD.1095-1204년 동안 십자군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에 이르게 되었다. 기독교 자체적으로 9-10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헬라어권역 기독교인들과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쪽의 라틴어 권역 기독교인들 사이에 점층하는 긴장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최종적인 권력을 일반적으로 AD. 1054년 )


배경1. 흔들리는 서방제국.
중앙정부를 잃은 서방제국은 토지를 통해 부와 권력을 연명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최대한 넓은 장원을 장악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기마 기사들을 양성했다. 농부들은 식량과 거주지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영주의 농노로 들어갔고, 영주가 배당하는 농토를 개작하며 식량을 얻을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봉건제도 였다.


배경2. 이슬람의 등장.
아바비아의 작은 무역항 메카라는 곳에 모하메드라는 한남자는 AD. 610년 가브리엘 천사가 자신에게 유일하게 참되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맡겼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메카에서 자신들을 추종하는 자들(알라에게 복종하는 자들)을 불렀고, 그들의 종교를 이슬람(복종)이라고 선포했다.
모하메드가 죽은 후 그의 추종자들은 아비리아와 시리아, 북아프리카를 정복했고, AD.638년 예루살렘을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배경3. 신성로마제국의 탄생. 샤를마뉴 황제.
중세가 시작되었을때, 이교도인 프라크족은 서방에서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AD. 496년 프라크족 전투 사령관인 클로비스는 니케아신조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백성들을 기독교로 이끌었다. AD.600년경 프랑크족이 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하였을때, 로마교회는 프랑크족을 의지했고 AD.754년 프랑크족 피핀 3세는 중앙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로마교회에 바쳤다.


당시 로마교회와 교황 레오3세는 이탈리아 귀족들에 의해 이미 힘을 잃은 상황이엇고, 귀족들이 교회를 통제하려 들면서 폭행을 당하기도 하여 카알왕에게 피신하였다. 많은 비난과 고발에도 불구하고 프랑크족의 카알 왕은 교황 레오 3세가 결백하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교황 3세는 성탄절에 카알 왕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며 "평화로운 최고의 황제로 하나님께 왕관을 받은 카알 아우구스투스" 라고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 사건은 역사상 최초로 교회가 황제를 만들어낸 순간이며, 오래전에 멸망한 세방제국에 동방제국과 비견될만한 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지,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후대에 사람들이 '샤를마뉴', '카알대제'로 불렀던 사람이 바로 이 샤를마뉴 신성로마제국 최초의 황제였다. 샤를마뉴는 이 칭호를 받은후 자신이 로마의 기독교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생각하며 로마교회가 이탈리아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도록 지원하였다.   



1. 분열되는 교회. (로마카톨릭-동방정교회)


로마교회와 동방교회는 9-13세기 동안 다툼을 벌여왔다. 주요 다툼은 3가지로 요약할수 있다.


1) 니케아신조 수정.
로마교회는 신적본질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안에서 똑같이 거주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방교회는 신적본질은 오직 아버지 안에만 거주한다고 믿었다.
이 갈등에게 대해 로마교회와 동방교회는 일치를 구하지 못했다.


2)훔버트의 경솔한 교서.
동방교회 콘스탄티노플의 새로운 주교 미카엘는 서방교회 교황을 인정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동방에서 로마의 주교에게 충성하는 교회를 폐쇄시켰다. 이에 로마교황 부르노는 사절단으로 훔버트를 파견하여 화평을 청하였지만 동방교회는 이를 거절했다.


3) 십자군 원정.
AD. 638년 이후 성지였던 예루살렘은 이미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된 상태였으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는 이슬람교도들이 크리스천 순례자들에게 통행세를 받아먹고 있었다.


AD. 1095년 어느날 서방교회 로마의 교황 우르반 2세는 동방교회 형제들에게 이슬람교도들로 부터 빼앗긴 영토를 찾아오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AD. 1099년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을 되찾았고, 그 안에 있는 남녀노소를 학살했고, 회당에 불을 지르는등 무차별적인 행동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이후 이슬람에게 다시 예루살렘 빼앗겼고 이에 십자군은 4차 원정에 나서지만 본래의 목적가 다른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AD. 1202년 원정에 참가를 약속했던 십자군 중 3분의 1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동방제국의 왕자 하나가 부족한 재정자금을 자신이 대신 매워주는 대가로 동방제국의 황제를 폐위시켜달라고 조건을 내덜었다. 결국 십자군 지도자들은 아비규환의 상황속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AD. 1204년, 겉옷에 붉은 십자가 문양을 새긴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노략질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강간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로마에 귀속시키면 교황의 면죄부를 받을수 있다는 말도안되는 이 4차 십자군 전쟁에 의해 교회는 두집단(서방-로마카톨릭, 동방-동방정교회)로 영원히 분열되었다.


2. 중세 로마카톨릭의 타락 : 르네상스 시대.


1) 로마 카톨릭의 타락.

12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중세교회 교인들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종교재판과 면죄부와 분열만 안겨주었다. 교회의 대답은 허공을 맴돌았고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기에 교황이나 황제는 불신과 권력투쟁으로 서방 전체를 통치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통치는 각 나라의 제후들과 영주들의 몫에 가까웠다.
로마의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교황의 교서도, 국왕들도, 어떤것도 믿을만 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프랑스의 작은 마을 '아비뇽'으로 피신한다.(이를 아비뇽 유수라고 한다) 여기에서 약 72년동안 여러 교황이 중요한 직위들을 거래하고, 아무런 제약없이 면죄부를 팔기도 했다.
이러한 교황의 타락에 반하여 행해진 신비주의 운동(경향)은 기존 교회의 조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직접적인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면 교히ㅗ가 필요없듯이, 전통적으로 은혜의 통로였던 성례, 설교, 심지어 성경까지도 그 중요성이 악화되었다.


AD. 1347-1350년 유럽인구의 3분의 1이 흑사병으로 죽고, AD. 1337-1453년간 영국과 프랑스간에 100년 전쟁이 이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캐서린은 교황 그리고리 11세가 아비뇽에서 다시 로마로 입성한다. 그러나 교황선출 문제를 두고 로마와 이비뇽이 두곳에 두명의 교황이 양립하는 기이한 시대가 40년간 지속되자 AD. 1409년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피사 공의회가 열린다. 교황 선출을 둘러싼 대분열은 AD.1450년경 종식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더 급진적인 개혁을 향한 운동이 진행되는 여지를 불러일으켰다.


* 공의회 수위설
교회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은 물론 다른 모든 교회의 권위보다 높다는 신념. 콘스탄스공의회와 피사 공의회가 주창했다.


2)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
중세라는 용어는 르네상스 저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16세기 말이 되었을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른것 같다. 르네상스의 저술가들은 '중세시대'라는 표현을 장엄한 고대와 고대가 부활된 르네상스 사이에 끼어있는 시대라고 평가절하아였고, '중세신학'을 고대의 암흑시대 끝에서 16세기 사이의 기간에 있었던 서방의 유럽신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중세시대 사상사에서 '스콜라주의'와 '인문주의'는 가장 중요한 지성적 운동이었다. 이 두 사상은 1300-1500 신학계를 포함한 지성계를 지배했다. 
인문주의는 신학적으로 지나치게 치밀함을 추구하는 스콜라주의에 반발하여 새로운 르네상스 철학을 구체화하려 하였다.


 (1) 스콜라주의
스콜라주의는 신앙에 관한 특별한 체계가 아니라 신학을 조직화하는 특별한 방식을 가르킨다. 이들은 자료를 제시하고, 구분하며, 신학에 관한 포괄적인 견해를 취합하고자 고도로 발전된 방법을 제시했다. 인문주의 비평가들에게 지나치게 사소하고 무익하고, 메마른 지성적 사색이었다고 비춰진것도 이해할만 할 정도로 철저했다. 그러나 이 스콜라 철학은 이성의 역할과 신학에 있어서 논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성과를 이뤄냈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오캄의 저술 , 실재론과 유명론)


 (2) 인문주의
인간으로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인문주의의 이상이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중세 전반에 걸쳐 처음나온것이었다. 전에는 인간은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악한 세상에서 수도하면서 장차 하늘에 간다는 믿음가운데 살아야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은 아름다운것이고 인간의 그 창조의 왕관으로 비춰졌다 . 문예운동으로 커진 이 운동은 고전으로 돌아가 언어 문헌학적인 연구로 성경을 원어로 읽게 하였고, 고대 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글에 심취하게 하였다.
(대표적 인물 에라스무스)


가톨릭교회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제공하지 못했고, 신선한 지도력은 찾아볼수 없었다. 중세 말 유럽은 별안간 시대의 개척을 중단하고 소비로 일관하는 사회를 맞이하였다.


교회는 영적, 도더적 지도력을 버리고 재정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으며, 백성들은 무거운 종교세와 국가세에 시달리게 되면서 유럽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만을 기다려야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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