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석의 다섯가지 원칙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또는 말씀 안에서 어떤 결론을 내릴 때 우리는

첫째로, 적절한 해석방법에 비추어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것은 없는지,

둘째로, 과정 중에 영해를 하거나 자의적으로 무리한 해석을 하지는 않았는지,

셋째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피상적인 연구에 머무르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피상적인 연구는 그릇된 해석만큼 파괴적이다.

이제 이런 위험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므로 성경해석상의 오류들을 피하고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기로 하자.

 

올바른 성경해석의 원칙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만일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제대로 지키기만 한다면,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는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번째 원칙은 문자적인 해석의 원칙이다.


해석학에 있어서 이것은 가장 기본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언어로 말씀하셨다고 믿는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라틴어로 “usisloquindi” 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성경의 단어들이 그 당시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던 의미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horse)이란 단어는 문자 그대로 말(horse)을 의미하며, 사람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사람을 의미한다. 성경의 단어들이 모두 신비로운 영적 의미를 담고 있거나 우화적으로 해석해야 의미가 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 단어들을 일차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성경에는 비유적인 표현들이나 직유, 은유, 과장, 의성어, 생략법 등이 사용되었다. 아마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모든 표현법들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풍자도 있을 수 있고, 복선이 깔린 과장도 있을 수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쓴 책에는 누가 보아도 상징적인 의미로 쓰인 표현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일상적인 언어의 표현들이다. 우리도 보통 언어생활에서 상징을 사용한다. 이를테면, “저 사람은 소나무처럼 곧은 사람이야” 혹은 “저 사람은 황소처럼 고집불통이야” 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무언가를 강조하고자 할 때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늘 어떤 심오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거나 신비한 경험을 추구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성경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람들에게 명료하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심지어 비유들도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비유들은 수수께끼 퍼즐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의 예이며, 예수님은 대개 비유의 의미를 직접 설명해주셨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성령님에 의해 그 의미가 분명하게 깨달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먼저 문자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이며 성경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여러분은 성경을 여러분이 원하는 방식대로 말하게 함으로써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행동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중요한 해석의 원칙인 문자적인 해석의 원칙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성경의 언어는 문자적인 언어이다.

 

두 번째 원칙은, 역사적인 원칙이다.


성경이 처음 기록되었을 때 사람들은 기록된 대로 명백하게 이해를 했다. 마치 헌법과 같이 모든 사람들은 기록된 의미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 당시 사람들보다 수 세대 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성경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달리 노력이 필요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역사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문화가 변했으며, 시대상황도 그 때와는 다르다. 심지어 언어도 변했고, 표현방법도 변했으며, 삶의 방식도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 문헌들을 읽을 때 그것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역사적인 상황이라는 문맥 가운데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 말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그 시대로 돌아가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시에 그들이 살던 도시의 특징은 어떠했는가? 그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정치적인 상황은 어떠했는가? 누가 다스리고 있었는가? 사회적인 압박은 무엇이었는가? 그 당시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긴장감, 문제들 또한 위기들은 무엇이었는가? 당시의 문화는 어떠했는가? 삶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관습들은 어떠했는가? 나는 설교를 준비할 때 이러한 모든 정보들을 조사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그래서 설교를 위해 단에 올랐을 때에는 보다 분명한 설교를 전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자주 놀라곤 하는데, 오늘 아침에도 몇 번이나 사람들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본문 말씀이 아주 명료하게 다가왔어요. 전에는 왜 제가 그걸 깨닫지 못했을까요?” 설교가 청중들에게 명료하게 전달된 이유는, 본문 말씀이 쓰일 당시에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역사적인 문맥 속에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살던 사람들과 그 말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리고 그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분별해야 하는 우리는 이런 역사적인 문맥을 파악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문화적, 역사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은 성경사전과 성경 핸드북, 역사적인 배경에 관한 책 그리고 주석이나 성경문화에 대한 책 등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원칙은, 문법적인 원칙이다.


성경본문은 문법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것은 구문론(Syntax)이라고 일컬어진다. 사전학(lexicography)은 단어를 연구하고, 구문론은 단어들 간의 관계를 연구한다. 우리는 동사, 부사, 형용사들에 대해 배워야 하고, 부정사와 분사, 그리고 전치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또한, 동사 및 명사의 활용, 탈격과 소유격 그리고 직접목적격과 주격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한다. 언어의 모든 구조를 익히고 관계대명사와 선행사에 대해서 알아야 하며, 조건문과 비조건문들에 대해서도 배워야 한다.

 

오늘날 신학대학원에서 이러한 공부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 아는가? 마스터스 세미너리(The Master’s Seminary)에서 내가 본 가장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는 미국의 대학교 졸업생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젊은이들을 입학생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 신학대학원 입학생들 중 사분의 일만이 기초영어 시험을 통과했다. 그 학생들은 영어를 말하고, 영어로 글을 읽는 미국 학생들이었지만 언어구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모국어인 영어의 언어구조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그것을 이해할 때까지 외국어를 가르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처럼 성경 해석을 위해 기본이 되는 영어의 구조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같은 외국어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 같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물론 문법은 누구나 좋아하는 과목은 아니다. 하지만 문법은 언어 속에 존재하며 언어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우리는 문법을 공부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문법공부는 필수적이다.


사람들은 내게 “목사님은 설교를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곤 한다.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설교본문을 원어로 읽는 일이다. 읽으면서 문법을 공부하고, 모든 단어들의 상관관계를 살피며, 문장의 구조와 그 속의 문법적인 요소들을 자세히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본문이 말하는 바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단어들의 수식관계는 어떠한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꼼꼼히 살핀다. 사실, 여러분에게 설교를 전할 때, 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적인 원리는 문장의 중심동사로부터 얻어지며, 중심 원리를 드러내기 위한 보조역할을 하는 생각들은 중심 동사를 수식하는 분사에서 얻는다. 여러분도 귀납적 성경공부 방법을 통해 문장들을 하나하나 다이어그램 방식으로 분석하고, 그 과정에 건전한 주석을 참조하면서 스스로 이러한 공부를 할 수 있다.

 

해석학의 네 번째 원칙은통합의 원칙이다.


옛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criptura scripturum interpretator) 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통합의 원칙이란 우리가 성경 을 해석할 때 성경의 다른 부분에 비추어 조화를 이루는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은 후 “와아, 이것은 성경 다른 어떤 곳에서도 가르치고 있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교리야” 라고 단정하지 말라. 만일 여러분이 성경의 다른 어느 부분에서도 가르치고 있지 않은 새로운 교리를 발견했지만 그 교리가 성경의 일반적인 교리와 모순이 된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일치의 책이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스스로 모순되는 분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원칙이다.

 

지금까지 제시한 것 외에 다섯 번째로,한 가지 원칙을 더 한다면적용의 원칙이 있다.


여러분이 해야 할 마지막 질문이 이것이다. 자아, 여러분은 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힘들게 진행시켜 왔다. 문자적인 의미를 찾고, 역사적인 배경에서의 문맥을 고려했다. 문법적인 요소들도 살펴보았고, 이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도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이 던져야 할 마지막 질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이 진리가 나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진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어떻게 이 진리를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앞에서 소개한 다섯 가지 원칙을 모두 수행하기 전에는 이 마지막 질문은 아직 마음속에 간직해 두기 바란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좋았어, 이 말씀을 나에게는 이런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군” 이라고 생각하면서 중간 단계를 스치듯 지나가버린다.

 

마지막으로 성경해석학의 다섯 가지 원칙 외에 하나를 더 첨언한다면, 성령님의 조명이라는 원칙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해석의 모든 원칙대로 최선을 다해 말씀을 분별하였다고 해도 성령님의 조명이 간과된다면, 그 모든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씀하는 대로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요일 2:27에서 말씀하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기름부음’이란 바로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조명해주시는 성령님을 의미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하지만 주의할 것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성경교사가 필요치 않다거나 우리를 인도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없어도 된다는 교훈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들, 복음 전하는 자들, 목사들 그리고 성도들을 가르치도록 교사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은사를 받은 사역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성도들은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교회를 허락하셨다. 물론 각 성도 안에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있기 때문에 요한일서 2장에서 다루고 있는 거짓 교리와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진리와의 차이를 스스로 분별할 수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교사들의 도움이 없이, 또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성령님에 의해 성경의 모든 구절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저절로 각 성도에게 주어진다는 보증은 결코 아니다. 이 말씀은 단지 거듭난 성도들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본적인 진리들을 거짓 교리들과 비교하여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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