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찬양, 어떻게 볼 것인가?



이재용


I. 들어가는 말


어느 한 외국인이 한국의 교회를 탐방하면서, 한 유명한 교회의 주일 예배를 드리고 나왔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외국인은 안내를 하던 한국인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자, 그럼 이제 한국의 예배를 드리러 가지요.”

위의 일화는 단순히 웃어넘길 수 없는 우리나라 교회의 실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비단 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환경은 서양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며 민족적이고 토속적인 모습은 거의 박물관에나 가야 찾아볼 수 있을 지경이다.


국악은 교회음악에 있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주제이다. 한국의 교회음악은 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한국적인 찬양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해왔다. 그 때마다 국악찬양은 언제나 거론이 되었지만, 국악에 담겨져 있는 강한 무속적 용어와 개념들, 또 국악이 다른 종교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 등의 문제로 국악찬양 논의는 보다 더 심도 있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국악이라는 말을 들으면 고루하고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하며, 국악에는 불교적이고 유교적이며 무엇보다도 무속적인 색채가 너무 짙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한 국악은 한(恨)의 음악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음악이 될 수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국악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의 민족음악인 국악은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될 수 없는가?


본 발제의 목적은 국악과 교회음악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검토함으로서 교회음악으로서의 국악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국악으로 찬양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또 가능하다면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해 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악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씻고, 그 저변에 깔려있는 사고의 맹점을 집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본 발제를 통하여, 국악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나 찬양에 국악적 요소를 무분별하게 적용 또는 대체하려는 시도 또한 비판하고, 통전적 의미에서의 국악 찬양의 활용을 모색해보려 한다.

 

II. 국악과 교회음악의 역사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서양음악이 함께 들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와 더불어 기독교는 처음부터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음악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배척하고 외면하였다. 우리의 민속음악들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는 한국 전통 문화에 낯선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 전통 음악을 제대로 수용할 수 없었고, 전통 음악이 유,불,선에 뿌리를 두고 있어 한국 기독교인들이 거부감을 갖게 되었으며, 전통 음악이 사회적으로 천민의 것이라는 인식과 서양 음악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사대주의적인 열등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가톨릭의 초기 선교사였던 달레(Charles Dallet)의 편지는 선교사들의 전통문화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가장 미신을 잘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운명을 점치고 점쟁이들을 찾아간다. 집마다 출생과 생명의 보호신인 성주와 주거의 보호신인 터주 등의 가신을 넣어두는 신주단지가 한 두 개씩 있고, 산을 지나다가 무슨 사고가 일어나면 산신에게 어떤 제물을 마쳐야 한다. 그들은 돈을 주고 점쟁이들을 통하여 큰 의식을 행하고, 법석을 떨면서, 알맞은 집터나 묏자리를 알아보고, 장래 배우자의 사주를 보거나, 액을 떼고, 악기(惡氣)를 몰아낸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와 음악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발견된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굿거리장단 등의 속악을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무속적이거나 불교적인 색채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민속음악을 통하여 귀신을 초청하고 남사당 패거리 등에서 굿을 벌이는 모습을 상상하였다. 이는 초기 선교사들이 한옥을 교회로 사용하려고 하였을 때, 조선 사람들이 한옥은 사찰을 생각나게 한다고 하여 양옥을 선호했던 것과 같은 논리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음악의 역사를 볼 때, 선교사들이나 초기 기독교인들이 무조건 전통음악을 배격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찬송가인 「찬미가」(1892)를 편찬한 감리교 선교사 존스(Johnes) 목사는 찬미가 증보판(1895) 서문에서, “번역 찬송이 참다운 찬송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한국인 찬송 작가를 마련하실 때까지 개척자적인 중간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선교사 게일(J.S.Gale)은 전통음악으로 교회음악을 세우고자 상당히 조직적으로 노력했고, 오늘날 토착화 논쟁을 펴는 한국인의 관점과 매우 흡사한 사고를 했다. 그는 가능한한 한국 민요적 성격을 가진 찬송가를 한국교회가 갖기를 원했다. 그는 서양곡조라도 한국음악에 맞춰 부를 수 있으면 그렇게 하기를 원했고, 또한 스스로 한국의 뱃노래에 맞추어 가사를 짓기도 하였다. 그는 찬송가 가사를 현상모집할 때에 시(詩)의 체격을 서양식이 아닌 동양식의 것만을 택하라고도 하였다. 길선주 목사 역시 전통음악을 교회에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일환으로 그는 1909년 이름 있는 악사들을 장대현 교회에 초빙하여 교회 의식에 맞는 가락과 그 가락에 맞는 성경 구절을 선택-연구하는데 힘을 다했다. 이를 위해 그는 상당한 돈을 투자하였으나, 결국 편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이 이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한국교회는 국악을 수용하지 않았다. 우선 한국의 초기 서양음악가들은 거의 교회 출신이었으나, 국악인들은 대게 광대나 기생으로서 사회적으로 고립된 계층에 속했었고, 종교적으로도 주로 불교나 무속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독교를 믿고 교회에 들어온다는 것은 자신의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결단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또한 궁중음악의 전통은 누구나 다 아는 보편성을 띠지 못했고, 제한된 곳의 행사를 위한 음악이었다. 국악에서 정악에 속하는 궁중음악은 조선왕조의 몰락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또한 홍난파나 현제명과 같은 기독교 음악인들은 전통음악에 대해서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한 사람들이었으며, 서양음악에 매진했던 사람들이라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교회의 국악 및 전통음악에 대한 배척은 찬송가 형성과정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해방 후,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의 연합으로 1949년 「합동 찬송가」를 발행하였을 때, 한국인의 창작곡은 고작 2곡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또한 장로교의 분열이후 발행된 「새 찬송가」(1962)에도 독일 찬송, 일본 찬송은 대폭적으로 수록하였지만, 정작 한국 찬송은 결여되어 있었다.


오늘날까지 한국의 교회음악이 보여주는 특징은 서양의 교회음악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찬송가도, 찬양대의 합창도, ‘교회음악사’와 같은 책들도 번역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역사가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두 가지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청소년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간 복음성가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전통음악인 국악을 기준으로 우리의 교회음악을 세우자는 운동이다. 복음성가 운동은 7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이제는 명실상부 교회의 대표적인 음악이 되었다. 그러나 국악으로서의 찬양은 지속적인 논의에도 불구하고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국악찬양을 옹호하는 입장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 것은 볼 수 있다.


기장의 향린교회는 국악으로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대표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향린교회는 1994년 10월 교회갱신 실천결의문을 통해, 예배와 교회문화가 민족 정서를 담아낼 수 있도록 갱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향린교회는 예배의 모든 순서를 순수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한다. 예를 들면, 개회는 ‘열음’, 성서본문은 ‘하늘말씀 읽기’, 설교는 ‘하늘 뜻 펴기’라고 사용하는 것이다. 또 예배를 열 때는 삼위일체의 삼위를 뜻하는 세 번의 징을 울리고, 예배를 닫을 때는 삼위일체의 일체를 뜻하는 한 번의 징을 울린다. 또한 교독문과 신앙고백은 인도자와 회중이 4.4조의 운율에 따라 메기고 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교회가 자체적으로 「국악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영광송과 말씀송, 감사송과 결단의 찬양은 국악찬송가를 사용한다. 향린교회는 얼마 전 ‘국악과 예배’라는 워크샵을 통해 이러한 국악예배와 찬송을 보급하는데 힘쓰고 있다.

 

 III. 민족음악과 찬양


우리는 앞서 우리의 민족음악이 교회음악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좀 더 본질적인 고찰에 들어가기로 한다. 민족음악이란 한 민족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서가 짙게 담겨있는 음악이다. 국악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론 우리의 국악에는 무속적이거나 불교, 유교, 도교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고 상징화된 음악적 표현이라고 보는 편이 더욱 정확하다. 때문에 우리는 국악의 찬양 사용을 논하기 전에, 민족적 정서가 가득 담겨있는 민족음악으로 과연 하나님께 찬양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성경을 통해 민중음악이 찬양으로 승화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시대의 노래 모음인 시편은 대부분 표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 표제들 중에는 히브리인에게 친숙한 민요곡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이미 시편을 대중적인 민요 곡조에 얹어 불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알-다스헷(txev.T;-la;)은 시편 57,58,59,75편의 표제인데, 그 뜻은 ‘터뜨리지 말라’이며, 이는 포도를 따면서 부르는 노동요(勞動謠)이다. 알-소산님(myNiv;Vo-l[;)은 시편 45,69편의 표제로서 ‘백합화’라는 민요 곡조에 얹어 부르라는 것이다. 알-하깃딧(tyTiGih;-l[;)이란 표제는 시편 8,81,84편에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이것도 일종의 노동요인 ‘포도 밟는 노래’의 가락에 맞추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며, 이것은 수확한 포도를 발로 밟아 즙을 내는 작업을 하면서 부르는 민요이다. 알-알라못(twoml'[;-l[;)이라는 표제는 시편 46편에 나오는데 이것도 ‘소녀’라는 민요곡에 맞추어 부르라는 뜻이다.


즉, 예배음악의 원형은 민중음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종교적 가사를 비종교적인 가락에 얹어 부르는 구약과 신약의 시대적 습관은 후에 유럽의 교회 음악사에서 콘트라팍투어(kontrafaktur)라는 하나의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되었다. 콘트라팍투어는 일반적으로 종교적 가사를 민요나 민간 음악 등 비종교적인 가락에 얹어 찬송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중세와 종교 개혁 시대에 유행하던 교회 음악 만들기의 방법이었다. 대표적인 곡으로 수난절 찬송인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는 16세기 말 독일의 하슬러(Hans Leo Hassler)가 작곡한 연애 노래 “Mein Gmut ist verwirret, das macht ein Jungfrau zart”를 콘트라팍투어 방식으로 바꾸어 만든 것이다. 이 노래의 원 가사는 아래와 같다.


내 마음이 안절부절이네, 그 처녀 때문일세

나는 아주 안절부절하고 있네, 내 마음은 중병이 들었네.

낮이고 밤이고 안식이 없고, 언제나 탄식뿐일세.

한숨과 눈물 뿐이고 슬픔 속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있네. (1절)


이 연애 노래는 17세기 독일의 찬송 작가였던 파울 게하르트(Paul Gerhardt)에 의해서 찬송가가 되었고, 바흐(J.S.Bach)는 마태수난곡을 작곡하면서 이 찬송을 코랄로 편곡하여 다섯 번이나 사용하였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서양 찬송가들은 이와 같은 민중음악이 많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스웨덴 민요이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와 “하늘 가는 밝은 길이”는 스코틀랜드 민요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나 “신자 되기 원합니다”는 미국의 민요와 흑인 영가이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는 독일 국가이고, “피난처 있으니”는 영국 국가이다. 또 “전능의 하나님”은 러시아 국가이다. 이 노래들은 모두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노래였지만, 콘트라팍투어 방식으로 찬송가가 된 노래들이다.


 문성모 교수는 이와 같이 서양의 민중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었다면, 우리의 민중 음악인 국악도 예배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가 우리의 민족음악을 기생음악이니, 술집음악이니, 무당음악이니 하며 논쟁하고 있을 때, 미국교회는 이미 우리의 아리랑을 가사를 바꾸어 찬송가로 쓰고 있다.(미국 장로교 찬송가 346장)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전통음악이 교회음악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거나, 적극적 반대는 아니더라도 걱정의 태도를 갖는다. 이에 대해 홍정수 교수는, 음악 역시 사람처럼 ‘거듭 날 수 있다’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시편의 ‘소산님’의 노래, 칼빈의 민요적 시편가, 헨델의 메시야 중 몇 노래, 영국의 캐롤들은 원래 세속적이었던 것이 ‘교회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세속음악의 의미변화는 마치 전에 어떠한 죄를 지었는가를 묻지 않고, 지금 어떠한 믿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용납하는 기독교적 구원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국악이 불교음악이며, 궁상각치우 5음계는 굿마당을 펼칠 때 사용했던 음계라는 비판은, 국악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 편견으로 볼 수 있다.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훨씬 전에, 왕산악이라는 궁중의 재상이 거문고를 만들어 많은 곡을 만들고 선비들에게 보급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불교는 국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이용했을 뿐 결코 불교가 국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궁상각치우는 중국의 음계이며, 우리 국악은 12음률로 되어 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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