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따른 음악의 시원



글 / 박근배 교수


음악사 적으로 음악의 역사를 분류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19세기말 이후)로 부터, 낭만(19세기 초에서 말까지), 고전(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 르네상스(15세기말부터 16세기 전반), 중세(400연내지 500년경부터 15세기까지), 그리고 고대(B.C 4000년경부터)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고대 이전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나 더 이상의 자료가 없어 무성한 추측만 할 따름이다. 그 결과 일반사학자들은 고대문명의 근원지가 서부 아시아인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이집트의 나일강 하류 및 중류지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런 역사적 가설이나 유적의 발견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 인간이 밝혀낸 추적 가능한 역사적 사실의 한계라고 할 수 있어, 음악의 역사만을 살펴본다면 기독교음악의 역사가 곧 음악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음악의 역사서를 쓴 그라우트(Donald j. Grout)는 그가 저술한 「서양음악사」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서양 예술 음악의 역사는 기독교 교회의 음악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최초 음악의 형성으로부터 그 발달사의 역사적이고도 문헌적인 사실에 대해서 성경에 나타난 음악에 대한 구절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음악에 관한 구절은 창세기 4장 21절로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竪琴)과 퉁소(洞簫)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는 말씀이다.


이 창세기의 구절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술(藝術)을 하는 모든 이들이 한번쯤은 상고해 보아야할 구절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사용하는 재료와 방법은 다르지만 인간에게 주는 감동은 같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성경의 어떤 부분과도 연관되어 설명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어려움이 남게 됩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마치 신약성경 첫 부분인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보듯 아담에서 가인으로 그리고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낳고 하여 결국 유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예술가의 조상(祖上)이었다고 하는 정도로 읽혀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하는 이의 조상이 되었다는 유발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또 왜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음악의 조상이 되도록 하셨는지를 알아본다면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속성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유발이라는 사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성경적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구절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앞에서 제시했던 유발의 시점에서부터 역사의 역추적을 통하여 이를 조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유발에 대해서는 구약성서 창세기 4장 21절에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竪琴)과 퉁소(洞簫)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고 나온다.


그 유발의 부친은 라멕이라는 인물이며,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 중 처음으로 두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던 사람이다. 그 첫째 부인의 이름은 아다요 그 둘째 부인이 씰라였다. 아다는 첫째 아들인 야발과 그 동생 바로 유발을 낳았으며 둘째 부인 씰라는 두발가인과 나아마이라는 딸을 낳았다.


유발의 부친 라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그의 5대조 할아버지인 가인을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자이며, 가장 극단적인 잔인성과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를 한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유발의 부친인 라멕이라는 인물입니다. 라멕은 창세기 4장 23절을 통하여 이런 노래를 부른다. 그는 그의 아들 두발가인(씰라의 아들로 쇠로 무기를 만드는 자)이 만든 무기와 유발이 만든 악기를 양손에 쥐고는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는 하나님에 대한 거만한 반항심과 자신의 교만함을 과시한 노래로 인류 최초의 시(詩)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조상인 가인과 비교하며 노래하고 있는데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 이리로다"라고 자신이 마치 하나님께 죄를 경악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노래하고 있다.


유발은 이런 집안의 아들이다. 아담이 받았던 하나님의 저주와 그 장자 가인이 하나님께 받았던 형벌은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은 창세기 2장에서 4장을 통하여 숨가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인의 계보를 통하여 음악의 조상인 유발은 태어나게 되었다.



아담의 첫 열매


성경은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창조 하셨다는 말씀이 있다.

첫째 날은 빛이요, 둘째 날은 궁창, 셋째 날은 바다와 땅 그리고 식물, 넷째 날은 해와 달 그리고 별, 다섯째 날은 각 종류대로 하늘을 나는 조류와 바다 속의 어류를 만드셨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동물과 사람을 만드셨으며, 그 중에서도 사람은 하나님의 최대 걸작품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창세기 1 : 27절)"하셨으며 또 우리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최초 인간인 아담은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얻게된 하와(창2: 21)와 예비해 놓은 "동방에 에덴 동산(창2: 8)"에서 살게 되었다. 에덴동산은 인간에게 시작이요 끝의 의미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은 지금도 에덴을 꿈꾼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꿈이란 이룬바 없는 것에 대한 하나에 신념이요 목표이다. 그러나 주어졌던 것을 상실하고 다시 그것을 이루고자하는 것은 꿈이 아니고 회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덴은 벗고 살아도 부끄러움을 모르며, 일용할 양식을 위해 땀흘리는 것과 같은 수고가 필요 없는 인간에게 최초로 허용된 낙원(Paradise)이었다.(창2:8-14) 그리고 그곳은 인간과 하나님께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요 인간이 그토록 꿈꾸어 왔던 유토피아(utopia)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에덴의 상실은 인간의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창3:5).”는 유혹에 빠져 자신이 창조주와 같아지려는 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하와는 자신의 범죄를 남편인 아담에게 반복케 하였으며, 하와의 범죄를 알면서도 아담은 다시 그 범죄를 행하게 되었다.


“하와와 아담의 양심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와가 간교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 에덴동산 가운데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창2:17)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맛있게 따먹었고, 아담 역시 하와의 잘못된 권유를 동참했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와의 권유에 의해 선악과를 먹던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는 했지만 아마 하와처럼 맛있게 먹지 못했던지 아니면 한 가닥의 양심이 발동되었던지 그만 목에 선악과의 씨가 걸리고 말았다. 이것으로 둘을 비교해 본다면 거리낌없이 선악과를 잘 소화 시켰던 하와와 그래도 무엇인가 양심에 찔렸던지 목에 씨라도 걸렸던 아담의 차이가 여자와 남자의 양심 차이라고 할 수 있다는 우화도 있다. 어쨌든 그 일 이 후에 남성만의 상징인 이 영광의 목 부분에 튀어나온 뼈를 지칭할 때 남자의 양심의 씨앗이 걸렸던 자리라 하여 '아담의 사과'(Adam's Apple)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한다.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의 상실(창3: 23~24)은 에덴의 큰 축복을 상실했다는 말과 같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죄 값으로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라는 엄청난 징벌을 감수할 수밖에는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인간을 흙으로 만드신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엄청난 벌을 내리셨으며, 결국 땅을 통하여 죄 값을 감당케 하셨는데 이것이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내린 최초의 형벌인 '땅의 저주'인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을 '농사하는 자'의 뜻하여, '땅의 노예' '땅을 섬기는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하여 지금의 우리들도 이 죄의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그 후 아들을 낳았다.(창4:1) 이것은 인류의 최초의 인간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얼마나 축복되고 경사스러운 일인가? 하와도 이를 너무도 기뻐하며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4:1)라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첫 열매, 첫 소산인 아들의 탄생은 진정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첫 아들의 이름이 가인으로 지었다. 그리고 얼마 후 둘째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 이름을 아벨이라고 하였다. 이 두 아들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담의 장자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으며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으며, 가인의 직업이 농사짓는 자(창4:2)라는 것은 성경 적으로 큰 시사점을 갖게 하는 대목인 것이다.



가인에게서 이어진 아담의 형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을 때, 아담은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라고 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물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는 대답에서 보듯이 현재 우리도 책임 전가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살고 있다.


아담의 죄의 형벌은 '땅의 저주'와 죽음을 예고하시는 "흙으로 돌아가리라"(창3:19)는 것이었으며, 이런 형벌은 가인에게도 이어졌다.


가인의 직업은 농사짓는 농부였다. 농부는 흙을 근본으로 삼는 직업이다. 흙이란 생명을 뜻한다. 아담을 흙으로 만드신 하나님, 범죄 이전 이것은 창조요 생명의 원천이었다. 생명의 흙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저주와 죽음이라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흙의 의미는 인간의 교만성을 낮추기 위함이다. 또 가장 값어치 없고 너무도 흔한 '땅의 티끌'(dust from the ground)로 비유된다. 그래서 하와를 속인 뱀의 형벌도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3:17)는 땅의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아담의 후손이요 장자인 가인이 이 같은 직업을 가지게 된 것도 저주의 열매라 할 수 있다.


가인이란 말은 '소유', '획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름과도 같이 가인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도 혼자 소유해야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반대로 하나님께 드린 자신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이 열납 됨을 심히 분히 여기며 동생을 죽이기에 이른다.(창4:3~8) 최초의 살인 후 하나님은 아담에게 했던 동일한 질문을 가인에게도 하였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라고 하나님께서 질문을 하고 있지만 이 질문 속에는 가인을 책망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다기보다는 마치 재판장이 마지막 선처를 위해 죄인에게 "너의 죄를 자복 하고 회개해 보아라"는 것과 같은 진정 뉘우치기를 바라시는 깊은 사랑이 담긴 질문이었던 것일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더욱 분해하며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9)라고 자기의 죄를 숨기며 오히려 반문하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지금도 가인을 '살인자'요 '인간 말종이요. 패역의 상징'으로 말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가인의 행동 때문이다. 죄를 짓는 것은 잘못이므로, 마땅히 그에 따르는 응징의 벌을 받아야 하지만 죄의 징벌에 앞서 행해야 할 행동이 있다면 바로 죄에 대한 회개라는 사실이다. 그래야 죄에 대한 진정한 용서와 관용이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가인의 이런 모습을 벌하게 된 것이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라는 형벌을 내리셨다. 이것은 아담에게 내리셨던 "땅의 저주"의 형벌과 같은 내용으로 우리 인간에게 땅의 형벌을 통하여 인간의 수고한 것보다도 그 소산을 풍성치 못하게 하여 그로 인하여 인생의 여정에 고통이라는 형벌을 주신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징벌은 계속되었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流離)하는 자가 되리라"(창4:12) 이 같은 형벌은 가인에게 한 자리에 안주(安住)치 못하지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도록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내리신 형벌이 가인과 그의 계보를 가진 자손들에게 영원히 "가인의 속성"이라는 것으로 남아 이어지게 하였다.


우리는 자랑스럽지 못한 조상에 대한 과거를 들추거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초적인 음악의 조상이 가인에 속하였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들추고 싶지 않은 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들어 난 음악의 조상인 유발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 역사의 역추적을 통하여 보았더니 그의 조상이 가인이요 그 아버지가 아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계보를 살펴보지 않고는 그 후 몇 대를 걸쳐 태어난 유발에 대한 자세한 추적이 불가능하였기에 이렇게 장황한 아담의 계보를 열거하게 되었다.



가인에게 준 두 번째 형벌


아담에게서 가인으로 이어지는 형벌은 '땅의 저주'(창3:17)와 죽음을 예고하시는 "흙으로 돌아가리라"(창3:19)는 것이었다. 이 두렵고 엄청난 형벌을 대물림하게 된 아담과 가인 부자(父子)를 보면서,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도 음악의 첫 조상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아담과 그의 장자 가인은 그들의 범죄함의 결과로 인하여 '땅의 저주'라는 엄청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땅의 저주'와 그의 아들 가인이 받게 된 '땅의 저주'는, 매우 성격을 달리 합니다. 아담의 '땅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결과, 인간의 시원(始原,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인 흙에 저주를 내려 종신토록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의 형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불만과 분노에 못 이겨 동생 아벨을 살인하면서 땅이 원하지 않는 피를 삼키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 결과로 가인은 생존의 기본 토대였던 그 땅에서 영원히 추방당하게 되는 '유리(流離)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가인의 아버지 아담이 범죄 함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가인의 추방 사건은 매우 유기(有機)적이면서도 유전(遺傳)적인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잘못과 형벌이 그 대에 그치지 않고 대물림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추방당하게 된 가인은 설 땅을 잃게 됩니다. 그 당시 고대 사람들의 사상은 땅은 인간의 고향이요, 어머니의 품과 같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런 사상적 배경도 역시 하나님의 인간 창조 원리에 기인(基因)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창3:19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런 삶의 기본 토대요, 마음의 고향인 땅에 무죄한 피를 흘린 살인자에게 풍요한 소산과 열매를 내주기를 거부하며, 토해 버리겠다는 창세기 4장 11절의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라는 절규에 가까운 분노의 형벌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첫 번째 형벌입니다.


가인의 죄 중에서 아직 해결되지 못한 부분은 '핏 소리의 호소'입니다. 창세기 4장 10절에는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 중 '호소하느리라'의 의미는 히브리말로 '사람을 죽이네'라고 외치는 비명과 같은 말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의 사상은 무죄하게 죽은 자의 피는 보복이 될 때까지 울부짖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생 아벨을 죽인 그 땅에서 살수 없다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땅에서 피하며'(창4:12)라는 명령을 가인에게 내립니다. 이것은 분명 가인에게 주어진 형벌의 하나입니다. 이 형벌은 지금의 땅에서 추방을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엄청난 형벌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역시 깊은 하나님의 사랑이 숨겨져 있는 구절입니다. 가혹한 형벌 뒤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먼 곳으로 추방함으로써, 죽음을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당시 제도권 밖으로 인도하신다는 깊은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 내려진 추방(追放)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추방이란 한편으로 보면 자기가 활동하며 살던 곳에서의 영원한 결별이요, 강제적 퇴출(退出)을 의미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형벌에서의 놓임을 받아 자유롭게 떠난다는 긍정적인 뜻도 포함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인의 형편은 이런 두 가지 선택보다도 더 시급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것은 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연관된 사회적 관습에 연유(緣由)합니다.


당시는 동족을 떠난 자의 생명은 보장받을 수 없었으며, 특히 가인처럼 어떤 범죄를 짓고 고을을 떠나는 자의 법적인 보호란 보장이 없었습니다. 이런 자는 누구든지 자유로이 죽여도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추방은, 곧 죽음으로의 노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이런 그의 두려움을 하나님에게 이렇게 애절하게 고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 온 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4)라고,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가인에게 사랑을 베푸시며, '가인에게 표(標)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합니다.


이런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준 두 번째 형벌이 '유리(流離)하는 자가 되리라'(창4:12)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유리 하는 자의 속성이 음악 하는 이들에게 대물림됩니다.



주여! 제 이름이 가인입니다.


가인은 비록 살던 터전에서 추방당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로부터 죽음만은 면할 수 있는 표(標)를 받게 됩니다. 가인은 다시금 하나님께 받게 된 형벌을 몇 번이고 되뇌입니다.'유리(流離)하는 자, 유리 하는 자, 유리 하는 자가 되리라'(창4:12)


그리스어의 테크네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 기능이나 기술을 가르치지만, 그렇다고 공작(工作)적 또는 공리(功利)적인 기술의 영역에만 국한하지 않고 예술적 영역까지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의 Ars로 유래되었다가 영어의 Art라는 단어로 변화되어 예술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예술이란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 하나는 기술적인 측면과 또 하나는 예술적인 측면이 공존하며 이루어지는 형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 기독교 신학에서의 수정된 도덕적 이원론이 이원적(二元的) 의미를 가지고 쓰이는 경우가 흔합니다.(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고, 사단은 타락한 피조물로서 어느 곳에나 악을 침투시키는 존재로 간주되어 있다는 관념) 이런 이원론의 관점에서 보는 인간의 본질적 구조는 물질적 요소인 육신(肉身)과 영(靈) 또는 혼(魂)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육신을 좇는 것과 영을 좇는 것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롬8:5~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5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분명히 어떤 행위가 잘못된 일이라고 느끼면서도 육신의 유혹에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또 이 결과에 대한 분명한 결론은 죄는, 대가를 반드시 동반한다는 원리(原理)입니다.


가인의 유리방황의 생활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보장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먹고 살아야하는 생존을 위한 사투(死鬪)는 그로 하여금 지난날을 후회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상실을 통해 그의 부친 아담의 뼈아픈 후회의 심정을 가인도 똑같이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치르게 되는 죄의 이원적 의미는 매우 상대적 의미를 가진 결과를 초래하며 지극히 극단적인 선택을 요구합니다.


땅의 이원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된 땅의 의미는 '젓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출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과 대조적으로 가인이 유리(流離) 방황(彷徨) 끝에 거주하게 되는 땅 놋(방황하는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으로 비유 됩니다.또 다른 비유로는 아브람(후에 아브라함이 됨)과 그 조카 롯의 거주지인 요단 들인 소돔과 고모라와 아브람의 거주지였던 가나안 땅으로 성경에서의 이 두 땅의 의미는 선과 악의 상징처럼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아담에서 이어지는 선악(善惡)적 계보에 대한 두 가지의 흐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아담과 가인으로 이어지는 계보입니다. 아담의 장자 가인의 잔악성으로 죽음을 당하여 대를 잇지 못하는 아벨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순수성을 지닌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어갈 셋(아담이 일백 삼십 세 때)을 낳았으니, 이것이 두 번째 계보이며 후에 노아로 이어지게 됩니다. 자세한 계보의 의미는 다음에 더 자세하게 언급하려고 합니다.


다시 땅으로 돌아와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성경의 주요 무대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Fertile Crescent)이었습니다. 이 '비옥한 초생달 지역'은 서편으로는 이집트와 소아시아, 남으로는 수에즈 만(灣)과 페르시아 만(灣), 동으로는 쿠르디스탄과 자그로스 산맥, 북으로는 흑해에 이르는 지역까지를 말하게 됩니다. 이 페르시아 만에서 시나위 반도에 걸친 넓은 지역은 숲이 우거지고 물이 풍부한 지역과 황량하고 메마른 땅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 두 구분된 지역을 도표로 그려보면 마치 초생달 모양이 나타난다고 하여 '비옥한 초생달지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곳을 팔레스틴이라고 하지만 이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A.D.138년 이후부터라고 합니다. 거슬러 올라가 족장 시대(B.C.2166~1806) 즉 아브라함에서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는 시기에는 이곳을 '가나안'으로 불렀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가나안을 여호와의 언약의 땅이라 하여 '허락하신 땅'(창17:8, 출6:4)으로 믿었으며, 여호수아와 그 후계자들은 이곳을 점령한 후에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 후에도 로마 시대에는 이곳을 '유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사용하여 인간을 만드셨으니(창2:7) 인류의 시작이 흙이라 말할 수 있으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하셨으니 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흙을 통하여 축복도 하셨지만, 여자를 속여 범죄케 한 뱀에게는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終身)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창3:14)라는 형벌을 흙을 통하여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가장 큰 형벌인 원죄적 형벌이 시작되었으며, 이것도 흙과 땅을 저주하는 형벌로 이어집니다.


흙, 곧 땅이란 가인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가인에게 주어진 땅의 형벌은 땅이 그 효력을 잃게 되어 수고해도 얻을 수 없는 소산과 그 땅을 피하여 유리방황하는 자로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유리방황하는 자를 향해 "그대의 누구인가?"라고 하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내 머뭇거리던 한 사내는 아주 조그만 소리로 "주여! 제 이름이 가인입니다"



육신의 노래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름다운 배필 하와를 선물로 주자 그 기쁜 마음을 노래한 일명 '배필의 노래'입니다. 이 '배필의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 (창2:23) 지금까지 어떤 사랑의 표현이 이 사랑의 노래보다 더 아름답게 노래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악은 사람의 목소리를 통하여 음악을 재창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성악을 표현하는 목소리는 단순히 음들의 나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언어에 뜻과 의미를 전달하는 특징을 가지는 가사를 동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악은 고대나 중세 때부터 시(詩)와 언어(言語)가 거의 일체적(一切的) 의미를 가지고 발전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악은 교회음악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쓰였습니다. 인간은 다양한 소리 구성의 변별력에 의해 언어를 구사하며, 그 언어의 조합에 의해 의미를 전달받게 됩니다. 또한 언어는 음악처럼 시간성을 가지는 특징이 있어 한번 발화된 소리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고 마는 언어를 묶어 놓을 수 있는 방법으로 글씨라는 문자의 기록방법을 고안하게 됩니다. 문자는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다시 해독해 보면 오랜 시간들이 흘러 지나버린 상황들을 바로 지금의 시점처럼 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대표적 역사서가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책의 종교다"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이 의미는 기독교 신앙은 어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적 기원과 진정성(眞正性) 또 그 권위(權威)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계시(啓示)된 말씀인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음을 지적한 명제입니다.(톰슨Ⅱ. 간행사에서 인용)


앞에서 장황(張皇)하게 설명한 교회음악에서의 가사의 중요성은 음악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간접적 표현법을 직접적 표현법으로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공헌을 합니다. 이런 연유(緣由)로 해서 교회음악은 간접적인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기악음악이 배제(排除)되게 되었으며, 오히려 순수한 성악으로만 하나님을 높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교회음악의 본질적 접근방법에 있어서도 교회음악에 있어 성악의 중요성은 교회음악의 최종적 목표요, 지향점인 '하나님만을 향하여 그의 영광을 찬양 드리는' 직접적인 표현법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운동은 교회음악을 새로이 재정비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같은 시기의 종교개혁운동에 선구자인 프랑스의 칼빈(J. Calvin)은 그의 개혁적 사상을 교회음악에도 피력(披瀝)하였는데, 그 칼빈의 교회음악관을 보면 '교회음악은 악기 없이 시편의 회중 찬양만을 단음제창 형식으로 극히 제한 되게 허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칼빈은 "특별히 허락하지 않는 한, 음악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용하지 말라"고 주창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음악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를 취하였던 칼빈주의자의 중심 사상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음악관에 있어서 교회음악은 성악만을 인정하고 기악을 거부하는 결과는 가인의 자손들의 세속적인 삶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인은 유리방황하다가 에덴 동쪽 놋이라는 땅에 에녹이라는 성을 쌓고 자손을 번성하게 됩니다. 가인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성을 쌓고 그곳에서 자손을 번성시킵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7~8세기에 이르는 시기를 그들 나름대로 문화를 발전시키며 이어갑니다. 이런 가인의 후예들의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창4:21)이 태어나게 됩니다.


가인의 후손들의 극단적인 잔인성은 음악의 조상이라는 유발의 아버지인 라멕의 노래를 통하여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두 번째 노래로 기록된 일명 라멕이 부른 <칼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장 23절)


성경에 나타나는 음악은 세속적인 성악으로 시작됩니다. 또한 성경에 나타나는 인간들의 행동은 원(cycle)을 그리며 그 원을 한없이 돌며 살아갑니다. 아담이 범죄(sin)함으로 시험(Temptation)을 당하고 그로 인한 영혼의 고통(Pain of the Spirit)을 받으면서 죄를 용서해줄 것을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Strong pleas)하게 됩니다. 이러한 간구를 하나님의 도움(God's help)으로 용서받게 되면 인간은 다시 나태(Putting off)해져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는 다시 범죄 하는 악순환(惡循環)을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에게 이어진 라멕의 노래


성경에 나타난 아담의 자손 중 장자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는 유리하며 정착하게 되는 에덴 동쪽 놋 땅입니다. 이곳에서 가인은 아들 에녹을 낳고 그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는 성을 쌓고 자손을 번성하게 됩니다. 에녹이 이랏을, 이랏은 므흐야엘을, 므흐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이 라멕을 낳았습니다. 라멕은 아담에게서 보면 6대 손이요 가인으로부터는 5대 손이 됩니다.


오늘 살펴볼 인물은 라멕입니다. 라멕은 음악의 조상이라는 유발을 낳은 아버지입니다. 또한 인류 최초로 두 아내를 거느린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멕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타나 있는 기록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른 '칼의 노래'를 살펴보면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라멕의 가족관계를 살펴보면 첫 번째 아내는 아다이며, 두 번째 부인은 씰라였습니다. 아다는 야발과 유발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 큰아들 야발은 장막에 거하여 육축(六畜)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 동생 유발은 수금(竪琴)과 퉁소(洞簫)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 씰라는 두발가인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는 동철(銅鐵)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의 날카로운 무기나 병기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 밑에 나아마이라는 딸을 두었습니다.(창4:20~22)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족보는 가문, 씨족, 지파, 민족 등과 같은 혈통 중심의 계열로 기록되어 있으며 주로 남자들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구속사에 필요한 인물만을 기록하는 선택 기록설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인물들의 이름은 우리처럼 성(性)씨가 없고 모두 독립된 이름을 갖고 있어서 그 씨족간의 연결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또한 이름은 단순히 부르기 위한 호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직업이나 성격을 나타내고 있어서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고자 할 때 이름의 뜻을 풀이해보면 그 인물됨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은 그 이름의 뜻이 '힘이 강한 자'라는 의미를 가側?있습니다. 그의 아내 아다는 '꾸민 자'요, 씰라는 '딸랑거리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멕은 그 이름대로 '힘이 강한 자'였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 두발가인을 통하여 병기와 무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자신이 그 병기를 사용하여 잔인한 살인도 서슴지 않는 자(者)였습니다. 라멕은 그 병기를 가지고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거칠 것 없는 잔인함은 행동에 그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잔인한 살인적 만행을 과시하는 노래로 이어집니다.


그의 노래는 굉장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악한 행동을 노래를 통하여 부른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는 보고 듣지도 못했던 악기까지 동원하기까지 하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의 노래에 필요한 악기를 만드는 일을 그의 아들 유발을 통해 하게 합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의 잔악한 모습이 얼마나 극적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손에는 날카로운 병기를 휘두르며 또 다름 한편의 손에는 악기를 잡고 금수(禽獸)가 포효(咆哮)하는 듯 우렁차게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하겠습니까.


이때 사용된 악기가 수금(킨토르-현악기)과 퉁소(우갑ugab-관악기)입니다. 이를 계기로 음악의 시원(始原)은 세속의 노래와 악기로 시작됩니다.


라멕의 노래는 이렇게 울려 퍼졌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장 23절)


그의 노래는 자신의 엽기적(獵奇的) 살인 행위를, 두 번씩이나 그의 아내들을 불러 모아놓고 자랑스럽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연관되어 떠오르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라멕의 5대조 할아버지 가인입니다. 자기의 동생 아벨을 잔인하게 죽이고도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을 향해 분해하며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라고 자기의 죄를 숨기며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반문하던 가인의 가증함이 새삼 되살아납니다.


라멕이 노래한 "나의 창상(創傷)을 인하여"라는 구절은 '내가 당했으니 내가 당한 것보다 더 큰 복수를 한다'는 정당방위(正當防衛)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는 복수의 방법으로 자기가 한군데 상처를 받으면 그 자를 죽이고, 한번 손찌검을 받으면 한 아이를 죽인다는 것이며, 또 자신을 다치게 한 자에 대해서는 일곱 배로 복수하겠다는 엄청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보복적 복수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금지하셨습니다. 라멕의 완악하고 잔인함은 그 극명(克明)함을 더해 갑니다. 라멕은 아들 두발가인으로 하여금 날카로운 병기를 만들게 하여 자신의 힘과 잔인함을 과시합니다. 그의 노래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창4:24)


아마 라멕 자신도 이 대목을 노래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5대조 할아버지인 가인이 행했던 행동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은 '나도 가인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이라 어쩔 수 없다'는 투의 당위성을 밑바닥에 깔고 한 술 더 떠, 자기의 조상 가인이 그 잔악성으로 받는 형벌이 칠 배라면 나의 죄는 그보다 열 배나 더 막중한 칠십 칠 배나 될 것이라는 일종의 비아냥 섞인 교만함을 드러내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악(惡)하게 된 이유가 그의 조상 가인에게서 연유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악함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대물림이라는 생각했으며, 그 정도에 있어서 자신은 자기의 조상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다는 식의 과시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라멕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창4:14)


가인이 주의 낯을 뵈올 수 없다는 고백을 들으면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 후에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던(창 3: 9) 행동이 연상됩니다. 낯을 피하는 행위, 즉 얼굴을 하나님을 향해 들 수 없어 외면한다는 것은 자신을 감추기 위해 숨을 곳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곳이 은밀하여 자신을 감출 수 있으며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가기만 하면 행동을 절제(節制)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행동에 있어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매우 극단적 결단을 요구합니다. 삶의 중심이 빛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던지, 아니면 그 빛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외면하는 삶을 살을 것인지를 분명하게 묻고 있습니다.


가인이 이 같이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지 못하는 행위적 고백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한다는 뜻을 포함하는 행동이며, 그로 인해 감히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고나설 수 없다는 무언(無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아담이 범죄 후에 에덴에서 쫓겨나 세상으로 나설 때의 마음과 그의 장자 가인이 농사짓고 살던 자리를 쫓겨나 세상 밖으로 유리(流離) 할 수밖에 없는 형벌을 받게된 처지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공포였을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무서운 공포 앞에 선 가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4)


이것이 자신감과 교만한 삶을 살았던 가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가인이 하나님 앞에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청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어 "가인에게 표(標)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4:15)는 약속의 말씀을 주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라멕은 어떤 자였습니까. 라멕은 가인의 5대 후손이며 므드사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인이 유리하다 정착하게 된 에덴 동편 놋 땅을 중심으로 살았던 원시 족장시대의 한 인물입니다. 인류 최초의 두 아내인 아다와 씰라를 취함으로써 일부다처제의 시조가 되었으며(창4:19) 첫째 부인 아다에게서는 야발과 유발을 낳고, 두 번째 부인 씰라에게서는 두발가인을 낳게 됩니다. 그의 성품은 무자비하고 잔인했으며 그는 자신이 지어 부른 광기 어린 노래(창4:23-24)를 통해 복수의 힘을 자랑하게 됩니다. 라멕은 자기가 사람을 죽인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살인행위를 정당화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라멕은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 인간의 힘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 힘이란 노아의 홍수로 죄악의 씨앗조차 수장(水葬)되고 마는 허무한 종말을 맞는 결과를 낳게됩니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가계(家系)를 정리한 이유는 라멕의 아들 중 유발이라는 인물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단지 그가 라멕의 아들이며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竪琴)과 퉁소(洞簫)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창4:21)라는 극히 간단한 구절이 고작입니다. 이 간단한 구절로 어떻게 그를 살펴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그가 최초로 현악기와 관악기를 만들어 연주했던 음악가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계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노아의 방주의 사건을 통해 수장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해 그가 태어났던 세속의 성 놋도 인류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아 음악을 이어가게 됩니까.



새로운 음악의 탄생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창 7:4)


가인이 유리방황하며 마침내 찾아낸 땅이 '방황하는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 놋입니다. 이곳에서 아담의 장자 가인의 계보가 이어져 그들 나름대로 세속의 타락된 문화를 일구며 살게 됩니다. 그 타락된 문화의 끝에서 선 자가 바로 라멕입니다. 그는 그의 아들들을 통하여 자신의 잔인성과 세속적 성공을 이루려는 계획을 성취하는 준비를 시키게 됩니다. 강철을 만드는 아들에게는 싸움과 정복의 야욕을 성취하기 위하여 무기를 만들게 하고, 악기를 만드는 아들에게는 그의 세속적 업적을 알리는 음악을 연주하게 합니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태어난 자가 유발이며, 그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입니다. 그렇다면 유발은 어떤 자입니까?


성경을 통하여 유발이라는 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창세기 4장 21절로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竪琴)과 퉁소(洞簫)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는 구절이 고작입니다. 다행히도 그가 어떤 음악을 했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구절을 그의 아버지 라멕의 불렀던 일명 「칼의 노래」(창4:23-24)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라멕의 교만한 노래는 그의 아들 유발이 연주하는 음악에 의해 더욱더 빛나게 울려 퍼지게 됩니다. 또한 그가 꿈꾸었던 세속적 문화 속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은 세상을 향한 세속적 문화를 향유하기 위한 음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세속적 음악을 연주하던 유발이 현악기인 수금(킨노르,Kinnor)과 관악기인 퉁소(우갑, Ugab)의 조상으로 기록됩니다.


이 악기들로 그는 그의 아버지 라멕이 부르던 광기 어린 노래에 맞춰 연주를 했습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음악의 시원(始原)은 세속적 기악음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곱지 않은 음악의 시원으로 탄생한 기악음악은, 교회 안에서 늘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찬송할 수 있는 성악음악에 비해 격하되는 경향을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신학적으로 기악음악이 세속의 뿌리에서 왔기 때문에 교회음악에 부적합한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기악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얼마나 크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본다면, 부적합한 음악이라는 근거는 무척이나 궁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음악에 있어서 성악음악과 기악음악의 관계는 고대로부터 주종관계를 형성하면서 적어도 기악음악이 독립되는 르네상스 음악 이 후에 이르기까지 지속됩니다.

여기서 더 정확하게 성악음악의 우위의 원인을 밝힌다면, 성악음악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송축하거나 그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는 것에 반하여, 기악음악은 그

의미의 전달방법이 제한된다는 것에서 가름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음악은 이처럼 타락된 문화를 향한 음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타락의 문화를 이루어 가던 가인의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 갈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세 번째 아들인 셋을 허락하시고, 그 백성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교회음악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셋이 낳은 아들이 에노스입니다. 에노스를 얻고 난 후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이 창세기 4장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셋 시대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인해 바른 신앙관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언약을 맺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공동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톰슨Ⅱ-주석성경, p.6) 성경은 새로운 언약을 맺을 때마다 늘 찬양과 함께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셋과 에노스로 계보는 면면히 이어져 '의인이요 당세의 완전한 자'(창6:9)인 노아에 이릅니다. 그는 아담의 9대손이며 홍수 이전의 열 족장들 중 마지막 족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때에 이르러 인간들의 타락된 역사를 심판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탄식과 분노하심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창6:6-7)라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홍수를 통한 심판의 의미는 단지 인류를 멸절(滅絶)시키려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에덴을 예비하시고 인간이 살도록 허락하셨던 하나님, 죽을 수밖에 없던 가인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주셨던 하나님, 회개하고 구원의 방주에 들어가기를 일 백 이십 년간이나 기다리시던 하나님이 아닙니까?


노아의 홍수는 부패한 인류를 쓸어버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다시 써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이었습니다.



'다른 씨'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음악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아담과 가인, 그리고 라멕과 유발로 이해되는 죄악의 문화를 이루었던 역사였습니다. 이런 역사와 함께 했던 음악도 역시 분명 세상을 향하던 세속 음악이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새로운 방향에서 진행됩니다. 그것은 가인으로 이어졌던 세속 음악의 뿌리가 아니라, 세속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씨'에서 시작되는 교회 음악의 역사를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음악 역사의 시작은 하나님의 분명한 방향성과 함께 진행됩니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바라던 자'의 오심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 즉 '바라던 자'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어나갈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른 씨'(창4:25)를 통해 이루시는 데, 여기에서의 '다른 씨'란 '가인과는 분명히 다른' 이라는 의미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까지 쓰며 태어나게 된 자가 바로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입니다. 셋이라는 이름은 '택함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태어난 셋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의 씨로 셋을 세우고, 그의 아들 에노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 번성케 하는 첫 걸음을 시작하셨습니다.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 '그 때야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뜻은 '이름을 불러 그에게 말을 걸다'.라는 뜻으로 이것은 곧 셋 시대에 바른 신지식(新知識)인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겸손히 고백하며 처음으로 기도와 찬양, 감사와 경배가 있는 공(公)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이 첫 공 예배에 있었던 것이 찬양이었습니다.


새로운 셋의 자손들은 가인의 자손과는 달랐습니다. 이는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시기에 살았던 그의 자손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선?5장 16절에서 24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셋의 5대 손(孫)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므두셀라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재를 통해 그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경건한 사람이었음으로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 곁으로 간 인물입니다.(창 5:24; 히 11:5) 그리고 에녹에서 므드셀라로, 므드셀라는 라멕을, 라멕은 노아를 낳게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와 같이했던 믿음의 자손들과는 다르게, 또 다른 한 편에는 하나님의 세상을 더럽히며 죄악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가인으로 이어진 죄악의 역사는 노아에 이르기까지 더욱더 커져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貫盈)함과 그 삶이 더 이상 고쳐질 수 없음을 아시고 모든 생물을 이 세상에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십니다. 이때의 죄의 관영함은 잘 보여주는 성경 구절이 창세기 6장 4절에 나오는 '네피림(Nephilim)'이라는 단어입니다.


네피림이란 히브리어 '나팔'이라는 말의 파생어이며 '떨어지다'(fall)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네피림'을 하늘로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의 후손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70인역(LXX)은 네피림을 '장부'(丈夫)란 뜻의 '기간테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거인'이란 'giant'로 번역하여 단순히 그 신체적 특성상 장부가 거인으로 불릴 수 있는 일단의 사람 혹은 족속을 가리키는 말로 보았으며, 더 나아가 그 신체적 특징은 아울러 도덕적 특성까지 암시하고 이들을 훼방꾼, 무법자, 난폭꾼, 가해자 등의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종합하자면 노아 당시의 '네피림'이란 거대한 신체를 지닌 '폭꾼들' 내지는 '침략자들' 정도의 뜻으로 이해함이 좋을 듯하며, 문자적 뜻은 '강한 자', '힘센 자', '우두머리'를 이릅니다. 또 당시 이들은 세상을 지배하던 힘세고 강한 영웅이었거나 아니면 많은 하수인을 거느렸던 압제자였음을 뜻하고 있습니다.(톰슨Ⅱp.6)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네피림이 히브리어로 '나팔'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뜻에 포함된 의미가 '강한 자', '힘센 자'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자면, 나팔은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를 말하고, 이 악기는 라멕의 아들 유발이 그 조상입니다. 그리고 이 '나팔'에서 파생된 네피림이 지니고 있는 '강한 자', '힘센 자'라는 뜻은 유발의 아버지 라멕의 이름, 즉 라멕이라는 이름의 뜻하는 '강한 자', '힘센 자'와 같다는 묘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결론을 내린다면 가인으로 이어지는 그의 후예들의 역사 속에 세속 음악의 역사는 늘 같이 공존하며, 성경에 나오는 세속적 의미조차도 언제나 그들과 묘한 상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습니다.



아기집 처럼 편안한 궁창


하나님 나라를 이어갈 '다른 씨'에서 난 자들의 수(數)에 비해 세상은 악할 때로 악해져 온 땅에는 불법과 죄악이 관영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하여 세상의 악함을 쓸어버리게 됩니다. 드디어 홍수가 시작되어 땅을 덮기 시작합니다. 이 날이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 칠 일이었습니다.(창7:10~12)


성경에는 홍수의 사건을 날짜까지 정확하게 명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홍수의 사건을 우리 인간들에게 불법과 죄악의 결과에 대한 대가가 어떤 것인가를 기억하게 하시려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또 다른 의미는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적 사건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홍수의 사건은 단순히 하늘이 열려 비가 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서는 사십 주야로 비가 쏟아졌으며 이 보다도 먼저 땅에 있는 물이 솟아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7장 11절과 12절에서는 이 광경을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라고 되어있고 이어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하늘에서 비가 오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먼저 땅에서 물이 솟아났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라는 구절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둘째 날의 사건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지구의 형상이 온통 물로 뒤덮여져 땅을 볼 수 없는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천지창조 둘째 날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궁창이란 문자적으로는 '두들겨 넓게 편 판(板)'이라는 뜻으로 곧 지구를 넓게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의 하늘을 의미합니다. 또 궁창 아래의 물이란 지구 표면을 덮고 있는 물을 말하며 궁창 위의 물은 대기층에 떠다니고 있는 모든 수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늘의 궁창, 즉 지구를 감싸고 있는 물밑의 궁창처럼 하늘 위에도 물로 구성된 궁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셋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1:9)고 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물위로 땅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창1:10) 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이 이야기는 천지창조로부터 노아의 방주 사건까지를 배경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지구는 어떤 환경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천지창조로부터 노아의 방주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지구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수명(壽命)은 보통 8백년에서 1천년에 이르는 장수를 누렸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930세, 셋은 920세, 마할랄렐은 895세, 그리고 인류 역사상 이 땅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노아의 할아버지 므드셀라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이 시기의 지구는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이 있어 마치 이 형상이 잉태한 어머니의 아기집 모습처럼 지구도 역시 궁창이 보호막을 형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놀라운 형상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첫 번째 이 시기의 지구는 비가 오질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식물이 자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 시기는 비록 비가 오지 않았어도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창2:7)는 구절로 알 수 있듯이 비가 오지는 않았어도 늘 대지는 피어오르는 안개로 인하여 알맞은 수분을 머금고 있어 땅은 늘 촉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이 시기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없었습니다. 사계절이 없다는 것은 늘 온화한 날씨가 유지되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8장 22절을 보면 노아의 방주 이 후에 이르러서야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홍수 이 후에 와서야 사계절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 시기의 사람들과 동물들은 육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본질적인 인간들의 죄성으로 볼 때는 홍수 전에 사람들이 육식을 하지 않았다고 믿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지 인간에게 육식(肉食)을 허용하고 있는 최초의 구절은 창세기 9장 3절을 통해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부터 인간에게 육식이 허용되었는가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제 1설은 홍수로 말미암아 땅이 황폐해진 결과 식물이 부족하자 비로소 육식이 허용되었다(Rosenmuller, Clarke, Kalisch). 제 2설은 처음부터 허용되었으나 인간의 신체 구조상 채식이 적합하였으므로 스스로 먹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홍수 후에 연약해진 신체의 변화로 인해 육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Pererius, Aquinas, Luther). 제 3설은 타락 전에도 육식이 허용되었으나 여기서 그 허가가 새롭게 갱신된 것이다(Calvin, Bush, Lange).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육식을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는 점입니다.(호크마 종합주석 1, 기독지혜사. p256)


정리하자면 죄악의 관영함으로 인하여 육지에 있는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들(창7:22)을 홍수로 멸절(滅絶)하여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의 아기집 속과도 같이 보호해 주며 유지되어 오던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둘러 싸여 있던 지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창 아래의 물이 솟으며 궁창 위의 창이 열려 모든 죄악된 인간들과 그 문화가 수장되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음악인의 속성


어느 한 학생이 강의를 막 끝내고 나오려는데 제게 이런 질문을 해왔습니다. "교수님, 조금 전 강의 중에 구약성경 4장 21절을 통하여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셨는데,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하고는 "노아의 방주사건으로 인하여 죄악의 씨는 모두 수장(水葬)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세속음악의 조상이 가인의 뿌리인 유발에서 나올 수가 있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난 99년 7월부터 쓰기 시작한 바로 이 글인 "무릎을 꿇어야 사는 가인의 후손들"의 논제(論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논제는 음악을 하는 이들이 지닌 근본적인 속성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또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음악을 크게 나누어 보고, 그 음악을 따라 살아가는 음악인의 속성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음악을 분류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음악입니다.


창세기 1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세상을 보시고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찬양은 이 세상이 시작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있어야 하며, 모든 피조물은 찬양으로 기쁨을 노래합니다(욥38:7).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엡1:3). 그래서 찬양은 결코 인간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음악이야말로 최상의 가치를 가진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적그리스도 음악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음악은 음악의 내면에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영이 있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 음악은 쉽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일반음악과 식별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10장 10절에는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라 하였으며, 베드로 전서 5장 8절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쉽게 분별할 수 없는 음악은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소극적인 방법이지만 최소한의 방어입니다. 그렇다면 고전음악처럼 음악으로는 순수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있는 음악은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세 번째 고전음악 즉 순수음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고전음악 즉 순수음악 이라는 범위는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에 일어났던 음악 사조를 한정지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레고리우스 성가 이전부터 그 이후에 이르는 서양의 음악 양식 전반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 순수음악은 음악이라는 것 외엔 어떤 종교적 가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음악적 순수성을 잃지도 않은 중립적 가치를 가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순수음악은 음악일 뿐입니다. 순수음악의 지향점은 분명히 세상에 있으며, 그 지향점 역시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순수음악은 그 뿌리가 교회음악에서 파생된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전음악 즉 순수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종교와 무관하게 국가의 공교육을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순수음악을 향유(享有)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순수음악은 교회음악과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수음악의 뿌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알아봄으로써 교회음악이 왜 순수음악을 낳게 되었는지도 알아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접하는 고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 낭만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큰 주류(主流)는 마치 순수음악의 발전사인 것처럼 알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역사가 교회음악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서양음악의 역사서인 그라우트(Donald jay Graout)의 서양음악사(A History of Western Music) 첫머리에서는 "서양 예술의 역사는 기독교 음악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 책은 고대 음악을 설명하면서 그 근거를 구약성서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라우트의 이런 음악사적 견해는 음악의 근본적 발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며, 결국 서양음악사 전체의 내용이 교회음악사라는 사실을 반증(反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글을 정리하면 이 글의 논점인 "왜!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하는 가"라는 문제를, 음악을 하는 이들이 지닌 근본적인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음악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고, 교회음악과 순수음악의 맥락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다음에는 교회음악의 뿌리가 순수음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그것을 통해 교회음악의 모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의 저녁 뉴스에 대마초를 피우다 경찰에 잡혀온 가수에 대한 내용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붉게 물들인 머리에 얼굴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또 귀에는 여러 개의 귀걸이와 목걸이 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청바지는 무릎이 다 나올 정도로 뚫어져 있고, 겉에 입고 있는 티셔츠는 몸을 잘 드러내도록 꽉 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우상답게 매우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몇 달 전에도 역시 인기 가수였던 한 고교생이 술에 만취된 채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살의 동기는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활동했었는데 요즘에 와서 그를 불러주는 방송사도 뜸해졌고 노래할 무대도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기가 있었을 때는 이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최상의 대접과 그를 부르기 위해 경쟁하던 방송국의 출연 요청이 성가실 정도였었다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다가졌다는 자만심을 가졌던 그는 이제 세상이 점차 외면한다는 강박관념에 자신을 포기하는 자살을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음악의 시원을 살펴보면 세속음악으로 시작됩니다. 아담이 아내인 하와를 얻게된 기쁨을 노래한 '배필의 노래(창2: 23)'나, 가인의 후손 라멕이 불렀던 '칼의 노래(창4:23~24)'가 그것입니다. 이 글의 주제가 '무릎 꿇어야 사는 가인의 후손들'입니다. 그렇다면 음악하는 이들, 곧 예술가들이 왜, 무릎을 꿇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음악의 시원이 세속의 씨인 가인의 후손들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시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흙은 땅이라는 말로 육신을 의미합니다. 육신이 죽어 땅에 묻히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여기에서의 생기는 하나님의 영(靈)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육'과 '영'이 결합하여 한 인간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하나님의 피조물을 생령이라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생령은 영육(靈肉)을 가진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음악의 시원이 세속음악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 문화를 이루었던 사람 들, 즉 가인의 속성을 닮은 그의 후손을 조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노아의 홍수의 심판으로 인하여 모두 물에 수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서운 사실은 그들의 문화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물에 수장되었어도 그들의 문화는 영적인 잔재로 남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음악인들은 세속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글의 시작에서 어린 음악도의 죽음을 먼저 이야기한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혈육인 동생을 죽이는 범죄로 말미암아 살던 곳에서 쫓겨나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음악인들의 기질이 가인과 그의 후손들과 얼마나 유사한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음악인들은 유리합니다. 마음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늘 방황합니다. 그리고 기질적으로도 한 곳에 마음을 붙이고 있지를 못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음악인들의 방황은 사회적 무리(無理)를 일으키고는 하였습니다.


12세기 초에 중세 남프랑스에서는 봉건제후의 궁정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지은 시를 낭송하거나 그 시에 노래를 직접 작곡하여 노래를 부르는 시인 겸 작곡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사(騎士)였으며 그들이 하는 일은 성(城)과 성을 오가며 마음에 드는 궁정의 귀녀(貴女)를 향해 사랑하는 마음을 시나 노래를 지어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노래를 하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더라도 그것에 대한 댓가로 이마에 키스를 받는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단지 그 시인겸 작곡가는 키스의 영예를 간직하기 위해 이 같은 일을 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음유시인(吟遊詩人)이라 불리는 트루바두르입니다. 이것은 남프랑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북프랑스로 번져 '트루베르'를 낳게 됩니다. 이것이 독일로 파급되어 미네젱거라고 했으며, 남쪽의 이탈리아에서는 트로바토레가 활동하는 한마디로 전 유럽을 통해 음유시인이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음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이어진 '영적 음악'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속성은 가인의 씨로 이어지는 '이름은 유발이니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창4:21)'에 속하는 자들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어디에 속하는 음악인이겠습니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결혼 정년기가 된 젊은이들은 자기의 짝을 찾기 위해 분주합니다. 과연 어떤 사람과 한 평생을 해로(偕老)하며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정성으로 배필을 구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만남이 무르익어 결혼을 해도 좋겠다고 서로의 마음이 일치되면 남녀는 양가의 부모님들에게 자신의 짝을 인사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검증의 절차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앞둔 부모님은 제일 먼저 상대측 부모님과 그 집안의 내력을 알기 원합니다. 혹시 유전적인 병이나 집안의 부모님이나 조상 중에 높은 벼슬이나 직책을 가진 분이 있는지 등에 큰 관심을 보입니다.


왜, 음악을 하는 이들이 '무릎 꿇어야 사는 가인의 후손들'이어야 합니까?

이 문제는 '음악의 조상이 누구인가'를 아는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이 글은 음악의 조상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 역사적 추적은 위에서 아래로 계보를 쫓아 내려간 것이 아니라, 음악의 조상인 유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며, 그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역추적 하다 보니 그의 조상이 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다시 위에서 아래로 세워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육체와 영혼을 가진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은 생식으로 가인을 얻었습니다. 가인은 최초의 살인의 형벌로 여호와 앞에서 쫓겨나 에덴 동쪽 놋 땅에 에녹이라는 성을 쌓고 살게 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타락의 문화를 꽃피우며 그의 자손을 이어갔는데 그의 6대손이 라멕이라는 자입니다. 그 라멕이 아들을 낳았으니 그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창4:21)"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계보입니다. 결과적으로 가인의 후손에서 유발이라는 음악의 조상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혼인에 있어서도 집안의 내력을 따지며 그의 자라온 환경을 알아보는 것이 결혼할 상대를 가장 객관적으로 알아 볼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음악인이라면 음악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음악의 조상은 누구인가를 알아봐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지난번(16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노아의 홍수로 말미암아 가인으로 이어지는 육적 후손의 계보는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담의 범죄함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최초의 범죄에 참여한 것과 같은 원죄적 죄의 보편성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음악인의 속성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음악인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살아갑니까?


음악가들은 자신의 표현할 수 있는 무대를 동경합니다. 무대 위에서 자신이 노력하여 얻게 된 예술성을 표출하게 됩니다. 음악가들은 이런 무대에 서기 위하여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준비하는 것입니다. 음악가라면 무대를 주목합니다. 무대에 선 그를 주목하는 관객이 있어서 음악인들은 행복합니다. 그러기에 음악가들은 관객보다 늘 깊은 예술성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앞도 하기 위해 몸을 치장하며 의상도 화려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음악가들의 화려한 무대 뒤에는 어두운 그늘이 존재합니다. 관람객이 돌아간 썰렁한 관람석을 보면서 화려했던 시간의 여운의 가닥을 잡고 허무함을 달래곤 합니다. 음악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누가 도와 줘서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음악이요, 예술입니다. 이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음악인들이 이 싸움에서 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싸움의 승리자보다도 실패자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아담의 원죄적 속성이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음악인들이 지닌 잠재적인 세속적 속성도 늘 가까이서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Sin)의 정의는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죄의 성경적 개념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구약은 죄를 '하타드'라 하여 '표적을 맞추지 못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아웰' 혹은 '아온'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 말은 '지정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선(善)과 악(惡)의 중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의 편에 서느냐 그렇지 않고 악의 편에 서느냐 하는 문제는 철저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 의지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知)정(情)의(意)로 구성된 인격을 말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에게는 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의지가 매우 부족합니다. 또한 선과 악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런 선과 악을 수없이 드나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음악인들의 기질과 끼, 그리고 예술의 혼속에는 세속적 속성이 녹아져 뒤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캘빈(Calvin, Jean;1509~1564)은 교회에서의 음악을 '악기를 배제한 인성으로 된 음악'만으로 허용하였습니다. 또 스위스의 츠빙글리(Zwingli, Ulrich;1484~1531)는 교회 안에 있던 음악을 완전히 제한하는 극단적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종교개혁과 함께 교회음악을 재정비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음악의 세속화가 사회의 세속화와 같이 한다는 말이 됩니다.



무릎 꿇어야 사는 가인의 후손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것들을 종합하며, 이제 이 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처음 시작의 주제는 음악을 전공하거나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한번쯤 "음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성경에 나와있는 음악의 시원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만큼 진정성과 객관성을 가진 역사서도 없으며, 음악의 기원 및 서양음악사의 전체 내용이 기독교 음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음악의 시원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보았던 성경구절이 창세기 4장 21절로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竪琴)과 퉁소(洞簫)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니'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음악의 조상 유발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 그의 부모와 그의 조상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유발의 부친은 라멕이었으며 라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5대조 할아버지인 가인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가인을 기억합니다.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잔인성을 가진 사람을 말하라고 하면 가인을 꼽을 정도로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습니다. 또 그의 부친인 아담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호흡인 생기를 불어넣어 인류 최초의 조상 아담이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부족함이 없는 에덴에서 살게 된 아담은 사탄인 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면서 에덴동산을 상실(창3:23~24)하게 됩니다. 아담은 죄 값으로"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엄청난 벌을 받게 됩니다. 결국 땅을 통하여 죄 값을 감당케 하셨는데 이것이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내린 최초의 형벌인 '땅의 저주'입니다. 아담의 죄의 형벌은 '땅의 저주'와 죽음을 예고하시는 "흙으로 돌아가리라"(창3:19)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벌은 가인에게도 이어집니다.


가인의 직업은 농사짓는 농부였습니다. 농부는 흙을 근본으로 삼는 직업입니다. 흙이란 생명을 뜻합니다. 아담을 흙으로 만드신 하나님, 범죄 이전의 흙은 창조요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생명의 흙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저주와 죽음이라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가인의 벌은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라는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아담에게 내리셨던 "땅의 저주"와 같은 형벌이었습니다. 가인의 또 하나의 형벌은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流離)하는 자가 되리라"(창4:12)였습니다. 이 같은 형벌은 가인에게 한 자리에 안주(安住)치 못하지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내린 형벌은 가인과 그의 계보를 가진 자손들에게 영원히 "가인의 속성"이라는 것으로 남아 이어지게 됩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음악의 조상이라는 유발을 낳은 아버지입니다. 라멕을 이해하는 데는 그가 부른 '칼의 노래'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라멕이 노래한 "나의 창상(創傷)을 인하여"라는 구절은 '내가 당했으니 내가 당한 것보다 더 큰 복수를 한다'는 자신의 정당방위(正當防衛)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라멕의 완악하고 잔인함은 그 극명(克明)함을 더해 갑니다. 라멕은 아들 두발가인으로 하여금 날카로운 병기를 만들게 하여 자신의 힘과 잔인함을 과시합니다.


음악의 조상인 유발은 이 같은 계보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그의 음악은 그의 부친 라멕의 잔인함을 노래하는데 쓰인 세속음악의 씨를 낳았던 것입니다.


음악인의 속성은 여기에 기인합니다. 마음과 육신이 유리방황하며, 격분을 감추지 못하는 기질과 본질적으로 세속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언제나 세속적 타락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부패한 인류를 쓸어버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다시 써 나가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악의 후손들은 물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정리하자면 죄악의 관영함으로 인하여 육지에 있는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들(창7:22)을 홍수로 멸절(滅絶)하여 다 죽게 되었습니다.(창7:4)


그렇다면 노아 이후에는 죄가 없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악의 삶을 살던 인간들은 홍수로 멸절하였으나 새로운 씨의 후손들에게도 죄악은 살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이요, 이 죄의 속성도 대물림된다는 사실입니다.


음악은 세속음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인의 기질과 문화를 이어받은 세속음악의 속성은 현대의 우리 음악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의 기원은 태초의 천사들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보좌를 넘보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을 성경에서는 천사, 사탄, 귀신으로 비유고 있습니다.(유1:6)


이제 결론을 내려고 합니다. 성경을 통해 알아본 음악의 시작은 세속적 뿌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타락된 문화와 삶을 향유하던 자들이 즐겼던 음악은 세속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어서 세속음악은 음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세속적 문화를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런 세속음악의 속성이 음악인들에게 남아 있어서 언제라도 밖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악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늘 뚜렷한 음악관을 가지고 건전한 마음으로 음악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가 종교음악이야 세속음악이냐를 나누자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순수성을 가지고 음악을 대하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지를 가늠해 보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이 글을 통하여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인 음악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끝으로 이글의 모든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 이사야 43편 21절을 되뇌이며 마치려고 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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