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찬양대를 기대한다


[1]


예배의 본질은 축제요 삶이다.

축제란 먹고 노는 행동을 말하지 않는다.

축제란 서로의 사랑과 신뢰가 있을 때에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찬양대는 모일 때마다 대원들 간의 사랑과 신뢰를 확인하는 연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찬양대 연습 과정에서 오히려 사랑이 아닌 미움과 다툼이 일어나고 신뢰는커녕 불신의 벽만 높아 간다면

그 찬양대는 아무리 훌륭한 연주를 하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때때로 찬양대 지휘자들은 연습 과정에서 대원들에게 화를 내며 폭언을 하는 경우도 있다.

연습이 마음먹은 대로 안되는데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테크닉적인 완성도 보다는 사랑과 신뢰의 예배 정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찬양대는 예배를 주관하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찬양대는 이 점에 있어서 세상 합창단과는 다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에 매달리는 자세는 옳지 못하다.

신앙은 결과만큼 과정도 소중하다.


노래는 잘하는데 대원들이 지휘자를 싫어하고 지휘자와 반주자가 불화하고 지휘자가 대장을 달가워하지 않는 찬양대가 있다면,

예배를 위하여 아무런 도움도 안된다.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찬양대의 노래는 교회 내의 잡음을 불식시키며,

미움의 요소를 몰아내며, 교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화평의 무드를 조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


찬양대의 발전이란 외형적인데서 찾아서는 안된다.

숫자가 많아지고 유명한 성악가들이 많이 들어 있고 명지휘자를 모시고,

거창한 무대에서 음악회를 자주 갖는 찬양대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다.

사랑과 신뢰의 예배 정신으로 교회 전체의 분위기를 선도해 가는 찬양대가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가 곧 교회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철학과 이념과 삶의 방식과 인생관으로 충만해야 한다.

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개하고 전파하는 공동체가 찬양대이다.


이것이 또한 성가 대원의 사명이기도 하다.

찬양대는 음악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음악적 표현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전파하는 수단이다.

그 이외의 다른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찬양대의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찬양대가 이렇게 질적으로 향상되었을 때 그 노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게 된다.

찬양대가 영으로 노래하고 마음으로 노래하여 성도들의 마음에 은혜를 끼치면 목사가 긴 설교를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성도들은 은혜의 깊은 자리에 가 있기 때문이다.


[3]


예배의 자리에서는 어느 누구도 특권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회중의 자리에서 회중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할 찬양대가 언제부터인가 중세의 영광을 꿈꾸기 시작했다.


즉 찬양대원들은 성직자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찬양대는 이제 성직의 높은 자리에서 오히려 노래를 회중에게 들려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회중은 찬양대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자신이 함께 하나님에게 찬양을 드린다는 의식은 없고 오히려 찬양대의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찬양대는 진정한 찬양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기교적으로 훌륭한 연주를 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할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타락된 중세 찬양대의 모습이다.

오죽하면 칼뱅은 찬양대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을까?

찬양대는 회중의 자리로 내려가 회중의 노래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찬양대의 자리 배치도 문제이다.


회중을 향해 있는 찬양대석은 십자가를 향하도록 수정되어야 한다.

즉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려고 하지 말고 회중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의 자세가 요청된다.


[4]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이 만나면서 이루어진다.

이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찬양대의 노래는 수직적인 찬양과 수평적인 찬양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겠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만 강조하여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신약성서 에베소서 5장 19절에는 찬양의 종류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열거되어 있고,

찬양의 기능으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서로 화답하라'와 '주께 노래하라'가 그것이다.

 '서로 화답하라'는 찬양의 수평적 기능을 말하며 '주께 노래하라'는 수직적 기능이다.

이 두 가지 기능에 대하여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예배음악의 기능은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찬양하는 기능이고(수직적),

또 하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경건성을 훈련시키고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수평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찬양대는 이 두 종류의 찬양의 기능을 모두 감당해야 한다.

즉 찬양대는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또한 성도들의 신앙 훈련과 복음 전파에 공헌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에베소서 5장 19절에 나오는 찬양의 종류를 제한하지 말고 모두 수용해야 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에 대하여 오스카 죈겐(Oskar Soehngen)은,

시 (Psalmos)는 시편, 찬미(hymnos)는 창작 찬송, 신령한 노래(ode pnoimatike)는

보다 자유로운 형태의 영가, 즉 오늘날의 복음성가와 같은 노래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 나라 공동번역에는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중에서 '찬미'는 대부분 수직적 기능에 해당하는 노래들이고, '신령한 노래'는 수평적 기능을 위한 것이 많다.

그리고 '시'라고 하는 시편 찬송은 이 두 기능이 비슷하게 섞여 있다. 고, '신령한 노래'는 수평적 기능을 위한 것이 많다.

그리고 '시'라고 하는 시편 찬송은 이 두 기능이 비슷하게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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