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에 계시된 신론



Ⅰ서 론

로마서에는 하나님에 관하여 142번 언급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65번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성령에 관해서는 12번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는 삼위를 다 다루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울은 삼위 이신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오늘의 주제이며 로마서에 계시된 신론을 다루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신론은 하나님 즉,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보는 것에 초점을 맞춰 나가야 함이 바른 고찰의 순서이다. 때문에 삼위 하나님 중에 어떤 분의 계시만 다룬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진다. 그러므로 로마서에 나타난 삼위 하나님에 관해서 살펴야겠다.


따라서 필자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부분에서는, 로마서(성경)에 나타난 신지식과 하나님의 존재 증명 다뤄보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에서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속성과 인간과 함께 공유하는 속성들을 비교해 보고 여기에 덧붙여 삼위일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로마서에 나타난 부분만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작정과 예정하심과 창조와 섭리를 로마서에 계시된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Ⅱ 하나님의 본질

1. 신지식

롬1:19-32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에서 '이는'(디오티)이라는 표현은 본절이 앞 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에 대한 설명임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으나 인간은 이를 묵살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란 직역하면 '하나님의 알려진 것'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기본적인 '신지식'(Vincent) 혹은 '종교심'(Augustine)을 말한다. 또한 '보임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네론'이란 17, 18절의 '아포칼튑토'와 유사한 뜻으로 애매하던 것이 분명해지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창조주(Creator)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이나 자연 법칙 등 일반 계시를 통해 자신이 알려지도록 배려하셨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의 죄악으로 인해 그 알려진 계시의 빛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행 가운데 머물렀던 것이다.1)


2. 하나님의 존재증명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되나니 그러므로 저 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1:19, 20) 자율적이며, 완전하게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신의식을 전제로 진리에 접근하며, 인간의 이성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경우 에만 진리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인간의 관점이다. 일반계시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창세기1:16, 시편19편, 욥기12:7-15, 사도행전17:27, 로마서1:19-20 등 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세계에서 하나님의 증거들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2)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 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2:14-15)에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17:26-27)3) 이밖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특별계시로 증거하고 있는 성경적 근거는 요한복음 1:14-18, 14:8-9, 사도행전 4:11-12, 로마서 3:21-26, 5:12-21. 갈라디아서 2:15-21 등이다.



Ⅲ 로마서에 나타난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삼위일체라는 말은 기독교의 신론에서만 사용되는 독특한 용어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신적인 영광과 칭호를 받는 세 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이시다. 이 세 인격은 순서나 사역에 있어서 서로 구별되면서도 모두 신적인 칭호와 영광과 속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성부 하나님은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증거 하는 몇 가지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자의 신성에 관한 증거로는 롬9:5절에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이라는 구절을 통해서 성자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성자의 전지성을 증명하는 구절로는 롬11: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에 잘 드러내고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한 구절은 로마서 8장에 집중되어있다. 그중 몇 구절을 살펴보면, 우리가 다시는 정죄 받지 않는 것은 바로 롬8: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밝히고 있는데 그 근거가 바로 롬8: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죽은자를 부활시키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롬8: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모두 하나님의 칭호와 영광과 속성을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세분의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분의 하나님만이 존재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세분의 인격이 구별되면서도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위일체는 이와 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 인격과 사역과 특성에 있어서는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것을 터툴리안은 "한 실체-세 인격(Una substantia-tres persona)"이신 하나님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삼위일체"란 말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연구해보면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한 실체인 동시에 구별되는 세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관은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신관이며,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3위 하나님은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순으로 기술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사이의 질서와 논리적 순서를 밝힌 것이지, 어느 한 위가 다른 위에 의해 지위와 능력과 기원에 있어서 종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것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 할 수 있다.


1. 존재론적 순서

삼위 하나님을 존재론적 순서로 말하면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으셨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generation)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방출(procession)한다고 말한다.


2. 경륜적 순서

삼위 하나님을 외적인 사역의 순서로 말하면, "만물이 "성부"에게서"(out of)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고"(through), 성령 "안에"(in)있다고 말한다(요1:3, 14)


3. 사역적 순서

삼위 하나님을 인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순서로 말하면, 성부를 구속을 계획하시고(요17:6), 성자는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시며(롬5:84)), 성령은 구원의 효과를 각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3:18)고 말한다.

따라서 삼위일체 문제는 이 세상에 똑같은 모델이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혜와 말로 하나님을 모두 설명하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성경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라고하는 일이다.


Ⅳ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

1. 작정하심

하나님의 작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뜻대로 하신 영원한 경륜인데,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앞으로 되어질 일을 미리 정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작정은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영원 전에 계획하시고 미리 명하시고, 정하시고, 결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되어질 일을 작정하신 방법을 알아본다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에서 밝힌 것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따라, 그의 의지에 따라,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고 가장 자유스럽게 가장 현명하게 모든 행사를 작정하셨다. 무한 완전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는 분이시므로 그의 모든 행사도 불변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앞으로 행하실 모든 행사도 불변적으로 정하셔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작정은 어떠한 종류가 있는가?

하나님의 일반 작정과 하나님의 특별 작정이 있었다. 그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반 작정과 특별 작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일반작정은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46:10)와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7-28)에서 잘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반작정은 그가 세우신 영원하신 목적을 말하는데, 그는 그것으로써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와 활동과 행위, 그리고 선한 행위 뿐 아니라, 모든 악한 행위의 허용까지도 미리 정하셨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특별작정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특별작정은 천사와 인간에 관한 작정 특별히 인간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작정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간선택에 대한 작정에 대해서 살펴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선택에 관한 작정은, 그의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계획을 말하며, 그는 그의 기뻐하심에 따라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며 끝 날에 영원한 생명과 복락에 이르게 하셨으며, 거기에 이르는 수단으로 믿음과 거룩을 부여하심으로 그의 지극히 부요하신 은혜를 찬양하게 하셨다.

2) 하나님의 인간유기에 관한 작정은 무엇입니까?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9:21-22)의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유기에 관한 작정은 선택받지 못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그의 주권과 불변하는 의지를 따른 영원한 계획을 말합니다. 그는 그들을 그들의 죄에 따라 멸망 받도록 버려두셨으며 영원한 형벌의 날에 그의 진노와 무한한 공의의 능력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선택으로 작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유기로 작정하시는가?  이 질문의 답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1-13),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에서 잘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선택된 자 안에 예견된 선행으로 인해 되어진 것도 아니요, 유기된 자 안에 예견된 악행으로 인해 되어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가 그렇게 하시고자 원하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선택하셨고, 그렇게 하시고자 원치 아니하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선택하지 아니하셨던 것이다.5)

3) 작정교리에 대한 반대

많은 사람들이 작정 교리를 믿지 못한다. 특별히 다음의 3가지 반대설을 생각해본다. 그중 첫째가 인간의 도덕적인 자유와 모순된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26:24)와 같이 성경은 인간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명백하게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행을 허용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그러한 악행을 행할 때는 그가 전심으로 그 악행을 사랑하고 그 충동에 동조하고 기꺼이 자원하여 그 일을 행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그 일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질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양면성을 온전히 조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모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둘째로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 얻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게 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1)에서 밝히고 있듯이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구원여부를 결정하셨다면, 인간들은 인간의 노력과 완전 무관한 것이라고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그릇 된 견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에 관해 어떻게 작정하셨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더욱이 하나님은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도 작정하셨을 뿐아니라, 그 실현의 방법도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과정을 깊이 묵상하고 그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해야 할 것이요. 하나님의 이러한 작정은 우리로 낙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이 우리 능력에 달려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하여 오히려 우리를 크게 격려하는 것이다.


2. 예정하심

우리를 선택하신 후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예정하셨다. 예정하다(pre- destinate)라는 단어는 어떤 목적에 앞서서 미리 점찍어 두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기도 전에 우리가 그분의 소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에게 표식을 찍어 두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위에 찍힌 표식을 눈으로 볼 수 있는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실 수 있고, 사탄도 또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분을 우리 속에 담아서 표현하도록,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미리 점찍음을 받은 자들임을 하나님은 아신다. 사탄도, 천사들까지도 알고 있다. 우리의 체험에서 보면, 우리가 그분의 아들들이 되기를 기뻐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그분은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동반하고 우리를 이끌어 가실 그분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의 목표는 아들의 명분이다. 성경에서 이 단어 아들의 명분은 두 가지 중요한 뜻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의 성숙과,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것을 상속받을 위치가 그것이다. 어린 아이는 그의 아버지의 생명을 갖고 있지만, 그가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에게 주기로 예비한 모든 것을 아직은 상속받을 수가 없다. 그가 충분히 자라서 성숙되었을 때 비로소 상속을 받을 수 있다. 우리도 그와 똑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고 성숙된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선택하셨다.

우리가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을 받았다면 그분의 자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만 그분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성숙된 그분의 아들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 될 때, 우리를 위해 이루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많은 아들들이 될 수 있고, 그에게까지 자라서 그분을 표현할 수 있다(요1:12).

인간의 타락 이후에 온 인류는 죄인들, 사탄의 아들들이 되어 버렸다(요8:44).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여 그분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얼마나 놀라운가! 비록 오늘날은 그분과 같게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선택하심 안에서, 어느날 우리가 그분의 성숙한 많은 아들들 - 그분의 표현을 위한 생명으로 충만하고, 그분을 대표하기 위한 통치권으로 충만한 - 이 될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하나의 표현이 오늘날의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요, 장래에는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3. 창조하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6)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6)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 만물 가운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의 지식으로도 능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보이는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고,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보이는 것이 존재한다. 대 우주의 법칙과 질서에는 또한 보이지 않는 어떤 힘(능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일 보이지 않는 인력의 법칙, 보이지 않는 원소와 공기가 없다면 우리가 짧은 시간이나마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가장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 눈은 불완전하므로 너무 큰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은 것도 볼 수 없다. 너무 멀어도 보이지 않고 너무 가까워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이루어졌다 눈에 보이는 피조물의 세계(우주 만물)는 창조주의 영적 기운에 의해 존재하고 유지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자연의 법칙과 힘에 의해 봄에는 싹이 나고 꽃이 피며, 여름에는 자라고 열매를 맺으며, 가을에는 그것들이 결실을 하고 잎이 떨어지며, 겨울에는 눈보라가 치고 얼음이 언다. 보이지 않는 힘과 법칙에 의해,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변하기도 하고 또 그것이 다시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면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가 있다.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이시다. 성경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일4:12)라고 하셨고, "또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딤전6:16),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라고 하셨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웅장한 대 우주, 아름다운 꽃들, 각종 열매 맺는 나무들, 날으는 새, 흐르는 물, 물 속에 사는 고기들, 산천초목,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와 조화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지혜와 솜씨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서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하나님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4. 섭리하심

롬4:23-24절의 의미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함은 곧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동일한 고백이다. 하나님 없는 예수님은 있을 수 없고 예수님 없는 하나님도 있을 수 없다.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모두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였다면,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이제 성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해서였다는 말씀이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고 하였다. 그 말씀과 여기 예수님의 부활과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처럼, 우리가 아직 의인이라 칭함을 받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의인으로 될 수 있는 이유를 만드신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 정당한 이유였고 하나님의 공의와도 가장 아름답게 조화되는 이유였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죽기만하시고 다시 사심이 없었다면 이는 무엇을 뜻할까. 이는 성도의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없어진 것뿐이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졌겠지만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여전히 없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도 의도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며 우리는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부활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좌와 사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구속시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죽음은 그 분의 다시 사심으로 인해 성도가 의롭게 되는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성도가 의롭게 된다 함은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성되는 것이며 하나님 고유한 통치의 나라 안에 성도가 들어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의 주권자가 되심과 같이 이제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 증거 된 것이다.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생명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의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분의 성도를 의롭다 하셔야 하는 데, 그 이신칭의의 계기가 성도의 믿음이며 이러한 말씀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는 모든 성도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구원과 영생의 길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인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죄에서 자유로운 의의 반열 서셨음을 의미하며, 그 분을 믿는 모든 성도들도 동일한 의의 유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의 믿음이 실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함을 성도는 잘 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우리의 진리 탐구와 해탈의 경지에 이름으로써 성취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죄인들일 뿐이었으나,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되고 하나님을 사상하게 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지게 된 것은 모두 처음부터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섭리하심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제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서부터 하나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잘나서도 우리가 구원 받을만해서도 아니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게 된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의의 징표가 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여전히 죄 가운데 살다가 죽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의의 옷이 입혀졌으니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의의 흰옷이다.


Ⅴ 결 론

하나님은 온 우주를 두 팔로 감싸 앉고 온 관심으로 지켜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를 이끌고 계시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부름을 입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일을 아름답게 결말지어 주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롬8:28)고 하였고,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전9:1)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만이 최선책인 것이다. '역사 배후의 큰 손, 하나님' 이것이 로마서에 계시된 하나님이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성도에게 보다 넓은 안목의 세계관을 심어 주고 있다. 이 세계관은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하심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다. '세계는 보다 큰 하나님의 뜻 속에서 움직인다. 그러므로 로마서에는 그리스도인은 극한 시련 속에서도 좌절할 수 없다.'는 역설적인 암시가 담겨 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다. 그분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속에는 연단과 훈련이 있을 뿐이지, 결코 실패나 패배가 없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며, 우리의 수고가 주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으신다. 때문에, 우리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Ⅵ 참고문헌

 프리처스 설교성경7권, 포도원출판사 1995.

 현대신학논, 두란노, 목창균 1998.

 그렌드 종합주석14권, 성서교재간행사 1994.

 하나님의 큰일,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