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종말론



Ⅰ. 종말론에 대한 서론적 고찰

Ⅱ. 현대 종말론의 경향들

Ⅲ. 개혁주의 종말론




서 론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때 다른 동물이나 식물들과는 달리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특별한 존재란, 육체적인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로서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의 성품을 부여받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특별한 존재인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와 권한까지도 부여하셨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관장할 수 있는 권한과 지위를 허락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동방의 에덴에 아름다운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서 하나님과 동거동락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지위와 권한을 박탈당하고 육체적, 영적인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창세기 2:16 -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인간의 죄의 결과로 이 세상은 죄가 관영한 세상이 되었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과 새하늘과 새땅, 곧 천국을 예비하실 계획을 세우셨는데, 이 세상 역사의 진행과 그 궁극적 목적과 목표는 바로 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이 세상의 멸망과 새하늘과 새땅의 건설인 것이다.


성경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종말의 시대라고 말한다.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말의 시대적 상황을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바른 종말론적 사관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며, 성경을 통하여 바른 성경적 종말론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신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인생에 대한 우리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Ⅰ. 종말론에 대한 서론적 고찰


종말론(eschatology)이란 교의학(조직신학)의 한 부분으로서 마지막에 되어질 일들에 관한 교의(the doctrine of the last things)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종말론은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종말론의 내용)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종말론의 근거) 사람들이 발췌하여(종말론의 신학적 입장) 주제별로 정리한 교리, 또는 교의라고 하는 것이다.


종말론이란 용어는 19세기의 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직신학의 한 분야로서 전통적으로 크게 2가지의 분야로 나누어져 그 주제를 다루어 왔다. 하나는 개인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개인적 종말론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 관해서 장차 일어날 사건들을 다루는 일반적 혹은 우주적 종말론이 있다.
개인적 종말론에 속한 주제들은 육체의 죽음, 영혼 불멸성, 중간상태 등이 있고, 일반적 종말론에 속한 주제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육체의 부활, 최후의 심판, 요한 계시록 20장의 천년기, 영원한 형벌, 신천신지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 '종말'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이 세상의 멸망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종말'을 연상하게 되면,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기대감과 희망보다는 왠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아마 믿음이 좋은 사람이나 믿음이 적은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든지 아직 실감되지 아니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동정보다는 현실 세계에 대한 심판과 멸망이라는 두려움이 먼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예로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 선교회 이장림 목사가 주장한 예수 재림의 날을 기억할 것이다. 그 때 온 국민의 관심은 이 사건을 주목하게 되었고, TV에서도 이 장면을 놓칠세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다미선 선교회의 신도들의 모습을 직접 카메라에 담아 전국에 방영하였다. 아마 여러분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다미선 선교회 신도들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그 때 여러분의 심정은 어떠했는가? 아마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 속에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긴장감과 불안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그 이유는 정말 예수님이 재림해 오신다면 내가 과연 들림을 받을 수 있을까? 만약에 내가 들림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우리 마음의 한편에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종말론적 사건들은 궁극적으로 종말의 목적이요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전적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에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잘 준비하여 들림을 받을까 하는 점과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에 있을 7년 대환란이라는 세대주의 신학사상이 그들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일부 신자들에게만 국한된 종말론적 의식이기 보다는 대부분의 신자들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한국형 종말론적 사고라고 생각이 든다.


우리는 종말에 대하여 좀더 폭넓고 바른 이해를 갖기 위하여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어떻게 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19세기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임할 성질의 것이다 라고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하나님 나라의 임함에 관한 신학적인 관심이 별로 없었다. 다시 말하면, 19세기 이전까지의 종말에 대한 관심은 육체의 죽음이 신자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육체의 죽음), 영혼은 불멸한가?(영혼 불멸론),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은 어디에 가 있을까?(중간상태) 라고 하는 개인적 종말론의 주제들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언제 어떻게 하실까?(그리스도의 재림론), 육체가 부활하면 어떤 상태일까?(육체의 부활교리), 그리고 최후의 심판과 천년 왕국에 대한 논쟁, 영원한 형벌, 신천신지에 대한 일반적 종말론의 주제들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현대 신학에서의 종말론의 관심은 개인적 종말론이나 일반적 종말론에 속한 주제들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이 현재적인 것인가 아니면,미래적인 것인가, 아니면 현재 - 미래적인 것인가에 그 신학적인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종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토대로 가장 보수적이며,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을 체계적으로 잘 설명한 안토니 후크마 교수의 개혁주의 종말론에 대하여 배울 것이다.


후크마 교수는 20세기의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성경신학적인 방법으로 종말론을 체계화시킨 「THE BIBLE AND THE FUTURE」(「개혁주의 종말론」류호준 역)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후크마 교수는 여기서 종말론의 구조를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 종말론'으로 구성하고 있다.
'시작된 종말론'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임함에 관한 현재 - 미래적인 요소들을 성경을 통하여 잘 제시해 주고 있으며, '미래 종말론'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루고 있는 개인적 종말론과 일반적 종말론에 대한 주제들을 언급하고 있다.



A. 교회사 속에서의 종말론 이해


우리는 종말에 대한 선 지식의 일환으로 기독교가 종말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를 교회사를 통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기독교회는 교회의 장래와 그리스도인 개인의 장래에 대한 영광스러운 예언을 한 번도 잊어 본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개인이든 혹은 교회든 이러한 예언들을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는 없었으며, 또 생각할 때마다 거기서 위로를 받아 왔었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이 세상의 근심에 짓눌리거나, 이 세상의 쾌락에 탐닉하여 장래에 관한 생각을 거의 잊어버리는 적도 제법 있었다. 게다가 어떤 때는 장래의 소망 중에서 한 부분에 더 많은 관심을 쏟다가, 또 어떤 때에는 그 소망의 다른 부분에 더 치중하곤 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교회가 태만할 때에는 이 기독교적 소망이 희미해지고 막연해지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망이 아주 사라져 버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 점과 더불어 언급되어야 할 것은, 교회사를 통하여 볼 때, 종말론이 기독교 사상의 중심적인 위치를 점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교리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특별한 발전을 경험하는 시기가 있었지만, 종말론은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종말론 사상의 역사는 세 단계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사도 시대로부터 5세기 초엽까지.


교회는 그 초창기에도 기독교적 소망의 개별 요소들, 예를 들면, 육체의 죽음이 영원한 죽음은 아직 아니라는 것, 죽은 사람의 영혼은 계속해서 살아 남는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복된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 후에는 대심판이 있어서 악인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고, 경건한 사람은 하늘의 영원한 영광으로 상받게 되리라는 것 등을 매우 잘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단지 장래에 대한 소망에 포함된 별개의 부분들로만 여겨졌을 뿐, 교리적인 짜임새는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매우 잘 이해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들 요소간의 상호 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2세기 동안에는 천년 왕국설이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을뿐, 그러나 이 시기에는 종말론이 발전을 보지 못했다.


2. 5세기 초엽에서부터 종교 개혁 때까지.


5세기 이후 로마 카톨릭은 교회의 세속화로 인하여 종말론적 관심을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의 관심은 장래에서부터 현재로 옮겨짐에 따라 천년 왕국설도 점차 잊혀져 갔다. 특히 오리겐과 어거스틴의 영향 아래서는 반천년왕국적 관점이 교회를 풍미하게 되었다. 비록 이러한 종말론 교리들은 정통적인 교리로 간주되기는 했지만, 깊이 사색되지도, 체계적으로 발전하지도 못했다. 죽음 이후의 삶,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죽은 자의 부활, 최후의 심판, 그리고 영광의 왕국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 있기는 했어도, 이런 일들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왕국 사상은 영생과 장래의 구원이라는 사상에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관심의 중심부에 놓이게 되었고, 계급적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게 되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상과, 교회가 장래를 위한 합당한 교육 훈련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상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지대한 관심이 중간기 상태, 특히 연옥설에 모아졌다. 이와 맞물려서 교회의 중보가 전면에 부각되고, 미사에 관한 교리,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관한 교리, 면죄부에 관한 교리 등이 생겨났다. 이러한 교회 지상주의에 대항하여 다시금 천년 왕국설이 몇 가지 갈래로 나타났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교회의 배타주의와 세속성에 대한 경건주의적 반동이었다.


3. 종교 개혁에서부터 현재까지.


종교 개혁의 사상은 주로 구원을 적용하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개념에 초점이 모아졌는데, 종교 개혁자들은 주로 이런 관점에서 종말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초기의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도의 영화를 다루면서, 종말론을 단지 구원론에 부속된 교리로만 취급하였다. 그 결과 종말론의 한 부분만이 연구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부활, 최후의 심판, 그리고 영생이라는 관점에서만 초대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으며, 재세례파에서 볼 수 있는 천년 왕국설은 거부하였던 것이다. 카톨릭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종교 개혁자들은 중간기 상태에 관해서도 많은 연구를 해, 카톨릭이 주장하는 많은 교리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 종말론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18세기 합리주의 시대에는 종말론이 무미 건조한 영혼 불멸로, 다시 말해 죽음 뒤에도 영혼은 그저 살아 남기만 할 뿐이라는 초라한 개념으로만 존속하였다. 끝없는 발전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진화론의 영향 아래에서 종말론은,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무의미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이후 하나님 나라에 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19세기에 등장한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신자들의 도덕적, 윤리적인 행위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점차 일어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은 보수적인 신학의 진영에서보다는 자유주의 신학의 진영에서 더 활발히 일어났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현세적으로 실현된 것인가라고 하는 현재적인 성격과 아니면 미래에 실현될 것인가 하는 미래적인 성격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성경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를 지적하고 성경적인 종말론의 구조를 체계화시켰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현재 - 미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보수적인 신학사상을 이어받아 종말론을 체계화시킨 사람이 바로 안토니 후크마 교수인 것이다.



Ⅱ. 현대 종말론의 경향들


앞서도 말하였지만, 종말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현재적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미래적인 것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종말이 역사안에서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역사를 초월해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도 논쟁의 핵심이었다.


A.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종말론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유럽, 특히 독일 신학계를 주도한 신학 사조를 자유주의, 혹은 현대주의 신학이라 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하려 한 것이다.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두고 사회 환경을 관심의 주 대상으로 하며, 이성을 신뢰하고 예수의 인간성과 종교적 관용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 등이 이 신학의 주요한 특징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여러 갈래로 다양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종말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를 인류의 모본이나 교사로 보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이며 종말론적인 면보다는 현재적인 면을 강조하여 인간의 종교적 경험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 그 공통점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학자는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 - 1889)과 아돌프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 - 1930)을 들 수 있다.


리츨은 기독교를, 하나님 나라를 창건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위에 세워진 영적 윤리적 종교로 정의하였다. 또한 리츨은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전적으로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 특징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윤리적인 인간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며, 이 공동체를 창건한 예수는 윤리적으로 위대한 교사요 인류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하르낙은 하나님 나라를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극으로 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외적 통치로, 그리고 그것의 도래를 미래적인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내적 통치로, 도래를 이미 실현된 현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르낙은 예수의 설교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도래의 개념이 명료하게 제시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전승된 것과 예수 자신의 것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인데, 전술한 두 극 가운데 전자는 유대 민족의 종교적 전승으로부터 유래된 것이고, 후자는 예수 자신의 것으로 말하고 있다. 하르낙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하리라는 개념이 껍질이라면, 이미 도래했다는 개념은 예수 자신의 생각이자 알맹이이다. 하르낙은 하나님 나라를 개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했다.


리츨과 하르낙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이나 미래적인 성격을 거부하고 현재적 성격을 강조한다. 따라서 종말론을 경시하고 그것을 진보적 역사관으로 대치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윤리적 영역이나 내적 체험의 영역으로 제한했다.


B. 철저한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

리츨과 하르낙에 의해 대변된 예수님 상과 하나님 왕국의 이해에 대항하여 지난 19세기 말엽에 강렬한 반항이 대두되었는데, 그 첫번째 반항이 알브레히트 리츨의 사위인 요하네스 봐이스(Johannes Weiss, 1863-1914)로부터 터져 나왔는데 특히 그의 저서인 Jes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에 잘 표현되어 있다.


봐이스는 예수님은 단순히 위대한 윤리 선생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가 시대의 중요한 정점에 서 있고, 스스로가 종말론적으로 지향된 구원을 선포하는 전파자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왕국을 미래적인 실체로 보았으며, 그 왕국은 인간의 임무가 아니라 또한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도래하지도 않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후크마 교수는 봐이스의 견해에 대하여 비평하기를, 봐이스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미래 종말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신학계에 큰 공헌을 했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왕국이 전적으로 미래적이며 결코 현재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너무 지나쳤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과 왕국에 대한 봐이스의 견해는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6)에 의해 확대되었다. 슈바이처의 해석은 흔히 철저한 혹은 연속적(consequent/consistent eschatology)로 불리어진다.


슈바이처의 주장을 몇가지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의 설교의 핵심적 요소는 그의 재림이며, 둘째,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매우 가까이 왔다고 보았다. 셋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개념은 유대 묵시문학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이며, 넷째는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시기에 대해 오해했으며, 그의 종말론적 기대는 환상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의 전도 여행이 완료되기 전에, 인자(the Son of Man)가 임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는 자기가 착각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죽임을 당했지만, 그것은 끝내 오지 않았다는 것이 슈바이처의 견해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철저한 종말론은 봐이스가 시작하고 슈바이처가 완성했다. 봐이스는 종말론적 요소가 예수의 설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데 반해, 슈바이처는 설교뿐 아니라 예수의 전 사역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만을 강조하고 그 현재성은 인식하지 못했다. 특히 슈바이처는 외형상으로는 예수의 전 생애의 중심이 종말론이라는 철저한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종말을 묵시적 환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종말론을 파괴했다. 그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하나님이 의도한 바 없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죽임을 당한 비극적인 인물에 불과했다.


C.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슈바이처의 종말론을 실랄하게 비판하고 종말론에 대한 논의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 찰스 다드(Charles Harold Dodd, 1884-1973)이다. 그가 종말론을 예수님의 교훈의 중요한 주제로 본 것은 슈바이처와 유사하나, 하나님 나라를 미래적인 것이 아닌 현재적인 것으로 주장한 것은 슈바이처와 전혀 다르다. 그는 예수의 초림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하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제시했다.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은 슈바이처의 철저한 종말론에 대한 반동으로 제시된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전적으로 미래적이라고 주장한 일방적인 견해를 교정한 것이 그 중요한 공헌이었다. 그러나 다드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전적으로 간과하고 그 현재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면과 미래적인 면을 동시에 증거하고 있는 성경적인 종말론에 대한 적절한 설명으로서는 미흡하다고 평가된다.


D. 실존론적 종말론(Existentialistic Eschatology)

현재적 종말론을 더욱 강조하는 또 다른 접근 방법을 제시한 사람이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이다. 당대 가장 탁월한 신약 성서 학자로 평가받던 불트만이 자신의 신학적 과제로 삼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대인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그가 제시한 것이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이다. 불트만은 신약 성서의 많은 부분이 신화의 형태로 되어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성서의 기록을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한 객관적 또는 문자적인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 저자들에게 실존적으로 일어났던 것을 신화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신약 성서의 신화적 표현은 현대인의 복음 이해에 무의미할 뿐 아니라 방해가 되므로 비신화화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화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여 비신화화하는 것이다. 비신화화란 초월적인 것을 이 세상의 것으로 말하는 것이며 성서의 진리에 대한 당시의 해석을 현세의 해석으로 고치는 것이다. 불트만 자신은 비신화화를 신화적 개념들 배후에 있는 보다 심원한 의미를 되찾으려고 하는 신약 성서 해석 방법이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불트만은 하나님 나라, 지옥,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의 개념을 신화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비신화화의 방법을 통해 실존적 종말론을 제시했다.
실존적 종말론은 미래에 일어날 문자적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과 관계된다. 인간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 영생의 가능성을 경험한다. 천국이나 지옥 역시 사후에 가는 곳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트만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현재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트만은 신약 성서의 케리그마를 밝히기 위해 비신화화 방법을 사용했다 그의 종말론의 특징은 종말의 미래적인 면을 완전히 부정하고 그 현재적이며 실존적인 면만을 강조한 것이다.


E. 정치적 종말론

유대인 맑스주의 철학자 블로흐(Ernst Bloch)의 영향을 받아 미래에의 희망을 전제로 정치적, 사회적 종말론을 발전시킨 사람이 위르겐 몰트만(Wurgen Moltmann)이다.
몰트만은 종말론에 대한 기존의 취급 방법과 전혀 다른 자신의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종말론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전통 신학이 종말론을 기독교 교의학 뒷부분에 두거나 그것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종말론은 신학의 뒷전이 아니고 시작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었다. 그는 종말론을 신학의 한 부분 또는 신학의 한 교리가 아닌, 신학의 전체로 간주했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는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희망이며 앞을 향한 전망과 성취이다. 그것은 또한 현재의 혁신과 변화이다. 종말론적인 것은 기독교의 한 요소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매개체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잘 반영한 것이 그의 「희망의 신학」이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희망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전제로 하고 있어 미래적 종말론이란 평을 듣는다.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이다. 한편 그가 역사 내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강조한 점에서는 그의 종말론을 역사 내재적 또는 정치, 사회적 종말론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몰트만은 기독교인의 희망의 실현에 목표를 두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정치신학을 발전시켰다. 희망의 성취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힘에 의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미래의 도래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희망의 성취는 많은 부분이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망의 신학은 이론의 신학이 아니라 행동의 신학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악에 대하여 왜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가를 묻는 대신, 그 악을 변화시키려고 행동한다. 교회는 현 역사 안에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노력해야 하며, 필요한 경우 어떤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여 현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 몰트만의 견해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몰트만은 역사 초월적 종말론과 현재적 종말론을 거부하고 역사 내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을 주장했다. 그의 공헌은 종말론을 교의학의 일부가 아닌 신학 전체로 간주한 것과 종말을 역사화하고 사회화한 것에 있다. 그러나 몰트만의 미래적 종말론은 희망과 미래에 대한 관심과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F.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종말론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종말론은 철저한 종말론과 실현된 종말론의 극단적인 것을 없앤 성경적인 종말론으로서 게할더스 보스와 쿨만 등에 의해 정립되었다. 이 종말론은 현재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 실존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우주적인 것에 대하여 양자 택일이 아닌, 양자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이 세대에 임하여 있고, 미래에 완성될 것임을 말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고 발전되어 간다는 논리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 있으며, 임하여 있는 그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때까지 이 땅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에 완성된다는 논리이다. 이 종말론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두 낱말로 설명되어지는 개혁주의 종말론의 신학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Ⅲ. 개혁주의 종말론

우리는 이 지면을 통하여 후크마 교수가 쓴 「개혁주의 종말론」의 구조를 살펴봄으로써 성경적 종말론을 이해하고자 한다.



A. 시작된 종말론


1.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개념에 관하여


첫번째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구약에도 종말론 사상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있었다면 그 종말론적 개념들이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1) 장차 오실 구속자에 대한 대망사상

① 창세기 3장 전반부에 기록된 인류 타락기사는 장차 구속자가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15)

일명 어머니 약속(mother promise)으로 알려져 있는 이 구절은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것이라는 예언 속에서 이미 장차 구속자가 나타나실 것이라는 약속이 담겨져 있다. 장차 계속될 모든 구속의 역사는 이미 이 어머니의 약속 속에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구약의 계시의 중심과 목적은 앞으로 오실 약속된 구속자에 대한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어떤 관점, 곧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보아야 만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 창3:15(여인의 후손으로 묘사) → 창22:18(참고;26:4; 28:14)(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묘사) → 창49:10(구체적으로 이 구속자가 유다의 지파에서 나올 것임을 말함) → 삼하7:12-13(이 구속자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묘사)


② 이스라엘 민족이 왕정정치제도를 수립한 후, 그들은 선지자직, 제사장직, 왕직이라는 세가지 특별한 직분을 인정하게 되었는데, 장차 오실 구속자는 이상의 세가지 직분의 완성된 화신으로 기대되었다.

/ 선지자 직분 : 신명기 18:15,
/ 제사장 직분 : 시편110:4,
/ 왕의 직분 : 스가랴 9:9, 삼하 7:12-13, 참고; 사9:7


③ 구약성경은 미래의 구속자가 오시는 광경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오시는 것으로 동일시할 때가 있다.

/ 이사야 7:14 - 임마누엘, 이사야 9:6 - 전능하신 하나님


④ 그 구속자가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되고 있다.

/ 이사야 53장


⑤ 그 구속자를 사람의 아들, 곧 인자로 묘사하고 있다.
/ 다니엘 7:13-14



2) 하나님의 왕국 사상

①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용어는 구약에 나타나 있지 않다. 시편과 예언서들에서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사상이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 : 신33:5, 시84:3; 145:1, 사43:15
/온 땅의 왕 : 시29:10; 47:2; 96:10; 96:1; 103:19; 145:11-13, 사6:5, 렘46:18

그러나 인간의 반역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불완전하게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만 아니라 온세상에 의해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경험될 수 있는 한 날을 고대하게 되었다.


② 장차 올 왕국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킨 것은 다니엘서이다.
단2:44-45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이 장래 어느날엔가 세우실 한 왕국, 결코 파괴되지 아니할 왕국, 모든 세상 왕국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릴 왕국, 영원히 견고하게 설 왕국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단7:13-14에서는 그 나라의 통치권이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에게 주어질 것을 말함으로써 다니엘은 미래의 왕국이 장차 오리라는 것을 예언할 뿐만 아니라 이 왕국을 사람의 아들로 묘사된 구속자의 오심과 연관시키고 있다.


3) 새 언약의 개념

언약이란 개념은 구약계시의 중심점이다. 예레미야의 외침과 예언은 당시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의 유대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범죄를 행함으로써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린 것에 대한 저주와 심판의 선언이었으나, 동시에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새 언약을 맺은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렘31:31-32)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새 언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신약성경은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히8:8-13, 고전11:25)


4) 이스라엘의 회복 사상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뒤로부터 이스라엘과 유다는 점점 더 반역과 불순종, 우상 섬김의 늪으로 빠져 들어갈 때 선지자들의 외침은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남북 왕국 모두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며 온 천지에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말울 한 예언들 속에서도 포로의 생활에서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되리라는 내용도 선포되었다.(렘23:30, 사11:11)


5) 성령의 부으심

요엘서에는 모든 육체 위에 내리실 성령의 부으심에 관한 예언을 발견하게 된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욜2:28-29)


그러므로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의 신자들이 큰 갈망을 가지고 바라다 본 미래의 지펑선 위에 일어날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신약의 몇몇 구절들은(눅21:25,마24:29) 위에 언급된 징조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요엘은 이 징조들이 성령의 부으심사건 전에 일어날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징조들을 문자적인 방법으로 해석한다면(해가 변하여 어두움이 된 징조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의 세 시간의 암흑으로 성취되었다고 이해하는 경우), 요엘은 자기의 예언을 통하여 수천년 동안 제각기 독립적으로 발생할 사건들을 하나의 단일한 환상 속에서 함께 보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소위 예언적 전망(Prophetic perspective)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예언자적 관점으로 장차 일어날 수많은 사건들을 하나의 환상 속으로 바라보는 현상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되어진다.


6) 주의 날 개념

예언자들의 글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주의 날'이란 문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무서운 파괴와 심판을 가져다 줄 가까운 미래의 어느날을 가리키고 있다.


① 오바댜 1:15-16에서 오바댜는 에돔의 불운의 날을 주의 날의 도래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란 심판과 구속을 가져다 줄 최후의 종말론적 날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다.


② 이사야 13:6-8절과 17-22절에서는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곧 일어날 주의 날로써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묘사들 사이에는 많은 시간적 공간적 간격들을 발견하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묘사들은 장차 먼 훗날 미래에 발생할 종말론적 주의 날로써 기록되어지고 있다.


③ 아모스 5:18에서는, 아모스 선지자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의 날이란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날들로서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러한 통념들을 깨뜨렸다.


④ 스바냐 1:14-15에서 스바냐도 역시 주의 날을 분노의 날로 표현하고 있다. 스바냐서의 나머지 부분들을 종합해서 살펴볼 때, 스바냐가 말한 분노의 날이란 곧 닥쳐올, 유대민족을 향한 심판의 날을 가리키고 있는 동시에 장차 인류의 최종적, 종말론적으로 일어날 전 세계적 재난의 날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되고 예언된 '주의날'은 어떤이들에게는 심판과 분노의 날로, 다른 이들에게는 구원의 날로 나타난다.


7) 새하늘과 새땅의 개념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소망은 항상 땅에 관한 구절과 자주 연관되어진다.

① 이사야서는 땅에 관한 미래적 희망이 잘 나타나 있다.

보라, 내가 새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

사 32:15 : 광야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밭이 될 것.
사35:1 : 사막에서 꽃이 필 것.
사35:7 : 메마른 땅들에서 샘이 솟으며
사11:6-8 : 동물의 세계에 평화가 찾아들며
사11:9 : 온 땅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충만하리라는 것.


결론적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언적 전망이라는 특수한 관점 아래서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계된 일들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계된 일들과 함께 섞어서 미래를 내다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메시야가 장차 오실 것이라는 사상은 신약성경에 와서는 두가지 단계, 즉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으로 구별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구약 신자들의 신앙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가까운 장래에 혹은 머나먼 미래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실 것을 기대하고 바라다 보았다. 사실상 구약의 성도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는 경주를 용기있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바라다 보는 신앙때문이었음을 후크마 교수는 말하고 있다.(히 11장 참조)



2. 신약 종말론의 본질에 관하여


후크마 교수는 구약의 신자들이 가졌던 종말론적 신앙을 신약시대에도 발견하게 됨을 말한다. 눅 2:25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의 간절한 소망이라든지, 눅 2:38 에 기록된 여 선지자 안나가 예수님을 친히 본 후,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도 강한 미래지향적 전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시대 초기에 경험되어졌던 성령의 구속적 사역들은 장차 다가올 미래에 완성되고 더욱 풍부해질 그러한 구속에 대한 하나의 전주곡으로 인식되어졌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약의 신자들은 한편으로는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크고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일련의 매우 중요한 종말론적 사건들이 장차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작가들이 예언했던 것이 신약성경에서 이미 이루어졌음을 발견하게 되며,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종말론적 기대의 성취라고 후크마 교수는 말하고 있다.


후크마 교수는 다음의 윌리암 맨슨(William Manson)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펴보게 되면 예언으로부터 성취로 변화하는 기후를 맛보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술들을 통하여 미리 예견해 두었던 일을 이제 성취시키고 있는 것이다. 일찍부터 묘사되었던 바로 그 종말이 예수님 안에서 이미 등록이 된 상태이다. ........종말의 가장 중요한 신호는 예수님의 부활과 교회 위에 내리신 성령의 강림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단지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표시로 내려졌던 신호가 아니라 마지막 때의 시작이며, 역사속으로 들어오는 입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시대에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 성령, 그리스도안에서의 생명 등등은 종말론적 의미들이다. 교회가 태동하기 시작하던 무렵에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그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장차 올 세계의 능력들을 이미 맛보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종말에 이스라엘이나 인간에게 일어날 것에 관하여 성경에서 예언되었던 것이 이미 예수님에게, 예수님 안에서 발생했다. 새 창조의 기초들이 이제 비로소 제자리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실상 위의 말이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했던 많은 예언들이 아직도 덜 성취되었으며, 또한 예수님 자신이 예언하였던 많은 일들도 아직 실현되지 않았음을 주지해야 한다고 후크마 교수는 지적한다. 따라서 신약의 종말론은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와 앞으로 실현되어져야 할 일, 이 두가지 측면을 다룬다.


후크마 교수는 다음의 윌리암 맨슨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 실현된 종말이 있다. 또다른 한편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이 있다.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충분히 실현된 종말이란 결코 가능하지 않는다. 종말론적 맥박은 기독교 안에서 뛰고 있고, 스스로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낱말처럼 종말이란 단어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그 처음 시작부터 근본적인 이중주곡을 들려주고 있다.


종말은 왔다.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은혜도, 영광도, 하나님 안에서의 현재적 풍요도, 미래적 완성된 삶도, 그 어느 것도, 실체가 파괴되지 않고서는 결코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후크마 교수는 신약의 종말론을 특징지워주는 단어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관계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란 신자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이란 신자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지칭한다.
다음의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말은 이러한 논리를 지원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란 종말론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이,

다시 말해서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됨(already fulfilled)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함(not - yet - completed)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이다. 신약의 전체 신학구조는 바로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후크마 교수는 신약성경의 종말론의 본질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구약에서 예언되었던 한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이다.

①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사건들로 여겨지기 때문.
/예수님의 출생(마1:20 - 23, 사 7장)
/베들레헴에서의 출생(마2:5-6, 미5:2)
/애굽으로의 피난(마2:14-15, 호11:1)
/백성들에 의해 배척을 받으심(요1:11, 사53:3)
/예루살렘에의 입성(마21:4-5, 슥9:9)
/은 30냥에 팔리심(마26:15, 슥11:12)
/십자가에서 찔리심(요19:34, 슥12:10)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는 일(막15:24, 시22:18)
/뼈를 꺽지 않음(요19:33, 시34:20)
/부자의 묘지에 장사됨(마27:57-60, 사53:9)
/그의 부활하심(행2:24-32, 시16:40), 그리고 승천하심(행1:9, 시68:18)


②그리스도의 사역에 hapax(단번에)와 ephapax(오직한번)이라는 단어들이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벧전3:18 - hapax사용. 히9:11-12;10:10 - ephapax사용.
또 다른 관용어는 히10:12절에 나타나는 eis to dienekes(for all time,한 영원한)이다.
이상에서 인용된 여러개의 구절로부터, 그리스도의 희생이 최종적 사건임을 배우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바가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결정적으로 발생되었고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③세례요한과 예수님이 선포한 예수님의 오심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하는 점이다.(마3:2, 막1:15/ 가까이 왔다라는 헬라어는 eggoizo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영으로 자기가 악마와 귀신들을 내어 쫓는 일이 하나님의 왕국이 오고 있다는 것이 구약의 종말론적 기대의 한 측면이었다면, 우리는 이 예언이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 안에 약속된 왕국이 왔고, 이 왕국은 장차 미래에 최종적 완성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④신약의 저자들은 이미 그들이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베드로의 설교(행2:15-17)와 바울의 서신서(갈4:4, 고전10:11)등.
/히브리서 저자(히9:26)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 행하였던 역할이 잠정적이었던 것에 비하여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것을 종말론적 성취 및 최종점으로 보았다.
/요한서신서(요한일서2:18)


이상과 같은 종류의 표현들은 신약시대의 신자들이 세상끝에, 말세에 ,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들이다. 또한 그들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이 왕국이 세워짐 속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2)구약의 저자들이 한 개의 운동으로 묘사했던 바가 신약성경에 와서는 두 개의 단계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 - 현 세대와 미래의 세대로.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신약의 신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예언자들이 예고했던 새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이 새 시대가 장차 올 또 다른 시대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 '저세상'(눅20:35), '내세'(눅18:30), '오는 세상'(마12:32)으로 표현.
/ 히6:5, 엡2:7
/ 단수로 사용된 '말세', '마지막 날에'는 장차 올 인류의 대 심판의 날이나 부활의 날을 의미하며(최종적 세대), 복수로 사용되면,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지금 현 세대를 지칭한다. (단수 : 마13:39/ 마24:3/ 마28:20 복수 : 히9:26)



<신약성도들의 종말론적 기대를 나타낸 도표>.


창조 그리스도의 초림 그리스도의 재림
| 지나간 세대 | 현 세대 | 장차 올 세대
------+----------------------+-----------------------+---------------
| | 마지막 날들 | 마지막 날에
세대들의 끝에 세상 끝에

3) 두 종말론적 국면들 사이의 관계성은 현 세대들의 축복들이 장차 올 더 크나큰 축복들에 대한 보증이며 담보물이라는 것으로 규명되어질 수 있다.

/행1:11, 히9:27-28, 딛2:11-13


그러므로 신약의 종말론이 독특하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그 기반을 둔 하나님의 목적들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그 독특성이 있음을 후크마 교수는 말한다.



3. 역사의 의미에 관하여

후크마 교수는 먼저 배격해야 할 유형의 역사 해석론을 몇가지 제시하고 있다.


1) 순환적 견해(cyclical)

이것은 고대 헬라인들 중에서 발견되어진다. 모든 일들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발생되어지며, 그래서 오늘날 일어나는 것들은 미래 어느날엔가 다시 반복되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후크마 교수는 순환적 견해에 대하여 존 말쉬(John March)의 비평을 인용하고 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우주론의 본성으로부터 살펴 볼 때 그들 헬라인들이 역사의 순환론적 견해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세상 역사의 위대했던 세대는 언젠가 되풀이해서 시작되며 사건의 순환은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때엔 역사적 실존이란 그 중요성을 상실케 되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것을 내가 이미 이전 순환 역사 속에서 했었을 것이며 미래의 순환 역사 속에서 다시 하게 될 것이다. 책임이니, 결정이니 하는 것들은 사라져 버리게 되며 그것들과 함께 역사적 삶의 어떠한 참다운 중요성도 -실상 역사적 삶도 장엄하고 큰 자연적 순환주기 속에 파묻히게 됨- 사라져 버리게 된다.


마치 옥수수가 씨 뿌려지고, 자라고 매년 익어가듯이 역사의 사건들도 연이어 재발 할 것이다. 더구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사건순환의 계속적 반복들이라면 그 순환 자체 속에는 어떤 의미의 가능성도 없는 것이다. 순환이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성취시킬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은 그 자체 밖에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헬라인들은 역사 자체에 어떤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인식할 수 없으며, 또한 어떤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시간과 역사란, 결코 실현되어질 수 없는 이상들의 불완전한 표현들이었다. 이러한 헬라인들의 역사관은 역사를 하나님의 목적의 완성과 그 목적을 향한 움직임으로 보는 기독교적 사관과는 병립할 수 없다.


후크마 교수는 성경적 역사관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역사란 의미없는 일련의 순환 회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과 우주에 대한 자기의 목적을 실현시키시는 하나의 매개수단이며, 역사는 신성하게 설정된 목표를 향해 움직이며, 미래란 과거에 만들어진 약속들의 완성과 성취로 바라다 보아야 한다는 사상은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기여한 특이한 공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2)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의 역사론

이런 유형의 실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역사 속에는 어떠한 중요한 유형도, 목표를 향한 어떤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단지 의미없는 사건들의 연속일 뿐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남는 것이라곤 개인주의 밖에는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역사란 전체적으로 의미를 상실한 공허한 것으로 남게 된다. 알베르트 까뮈(Albert Camus)의 소설「페스트」(The plague)에서 이러한 유형의 역사관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대하여 후크마 교수는 실존주의자들의 역사관 역시 기독교적 견해와 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각 개인의 결단을 중요시 여기면서도 역사에 있어서의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이 자기의 의사결정으로 삶을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다는 것이다.
후크마 교수는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의 특성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1) 역사는 하나님의 여러 목적들을 이루는 작업이다.

하나님은 그의 목적들을 역사 속에 나타내신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신성한 역사(sacred history) 혹은 거룩한 역사(holy history)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의미한다. 이 구속은 구약의 약속들, 모형들, 예식들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완성되며, 장차 다가올 미래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 구속은 그 최고 정점에 달하게 될 것이다.
신성한 역사의 사건들은 성경이 존재하기전부터 이미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었으며, 출애굽의 사건들, 요단 강을 건너는 사건,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성령이 부여되는 사건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간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그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통제와 지시 아래 있기 때문에 역사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2)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시103:19 : 하나님은 왕국의 모든 만물을 지배하신다.
/대하20:6 : 세상의 열방들도 통치하신다.
/잠21:1 :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바 임의대로 왕의 마음도 돌이키신다.
/엡1:11 : 하나님은 그의 뜻하신 바대로 모든 것을 성취하신다.
/창17:26 : 땅위의 나라를 위해 세우신 연도와 그들이 거주할 장소를 정하시고 제한하셨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 방법으로든 저 방법으로든 간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3)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다.

오스카 쿨만은 우리가 우리의 달력을 계수한다는 것,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후로 하여 햇수를 계산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사건이 전 역사 과정의 시간적 중심점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역사에 대한 구약의 이해와 신약의 이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은 역사의 중심점이 미래로부터 과거로 옮겨졌다고 한다. 신약시대의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 중심점이며, 그러므로 신자는 역사의 중심점과 역사의 최정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해야 함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신약 시대의 신자는 D - day와 V - day사이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중심점이라는 사실은 이 중심점 사건으로 과거의 모든 것이 성취되어질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4) 새로운 세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눅7:28에서 세례요한에 대하여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의 요한은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지금 소개하시는 새로운 시대의 왕국이 아닌 구시대에 속해 있으며, 다른 한편 그리스도의 왕국에 성도가 된 사람들은 새로운 세대에 살기 시작함을 말하는 것이다.
/골1:13 , 엡2:5-6 , 롬12;2


5) 역사의 모든 것은 목표를 향해 움직여가고 있다. -새하늘과 새땅을 향하여-

히브리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신약의 저자들도 역사를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의 이러한 정점에는 신약시대의 신자들이 아는 바대로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부활, 심판의 날, 새땅과 새하늘과 같은 사건들이 포함되고 있다. 새하늘과 새땅이 역사의 극치점이기 때문에 모든 역사는 이 목표를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성경의 표현방법이므로 구속의 목표는 다름아닌 오늘날 과학자들이 우주라고 부르는 것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엡1:9-10, 골1:9-20

후크마 교수는 이러한 기독교적 역사해석이 우리에게 함축하는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현 세대들의 특징적인 활동은 선교사역들이다. / 벧후 3:9

만약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왕국을 새로이 시작하셨다면, 또한 그가 우리에게 진실로 위대한 선교 지상명령을 주셨다면(마28:19-20), 교회가 해야할 위대한 사역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이 시대의 특징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2) 우리는 이미와 아직사이에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신자들이 갖는 위치를 의미한다. 즉, 신약의 신자들은 마지막 날들 속에서 살고 있으나 마지막 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약의 신자들이 이러한 긴장 속에 살지만, 구약시대의 신자들이 감히 알지 못했던 축복들을 누리고 있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신자들보다 하나님의 구속적 계획에 관해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안에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손에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반면에,

구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 완성을 소유하지 못하고 따라서 매일 그들의 죄들을 고백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역사속에는 두 줄기의 발전이 있다.

그리스도의 초림 이래로 세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과 나란히 병행하여 악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가라지 비유(마13:24-30;36:43)는 사단의 왕국이 최후심판의 날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하는 한 함께 공존하며 자라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의 왕국이 사단의 왕국을 지배하며 압제하고 마침내 정복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왕국 속에서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4) 우리의 역사적 판단들은 모두 잠정적이다.

이것은 최후 심판날에 선과 악이 분리되어 모든 역사적인 동향들에 대한 마지막 평가가 있게 됨을 인식할 때, 우리의 모든 역사적 판단들은 상대적이며, 시험적이고 잠정적임에 틀림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절대적으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선하다, 혹은 악하다, 또는 악이 지배적이다, 선이 지배적이다라고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판단들이 잠정적이라고 해서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하여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5)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이기었다고 믿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물의 궁극적 결과는 악이 아니라 선이며, 우주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은 결과적으로 실현될 것이며, 비록 악이 종종 강해 보이나 하나님이 이미 지배하심이라는 것이다.


6) 이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 뿐만 아니라 연속 상태도 존재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현세와 내세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 뿐만아니라, 연속상태가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 고후5:17 :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
/ 골3:1 :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일어났음.
/ 엡2:6 : 그와 함께 하늘에 앉도록 되어 있음.
/ 하이델 베르그 요리문답서 58번.


후크마 교수는 신자들의 삶, 죄에 대한 우리의 싸움들, 우리의 선교사역, 좀더 두드러진 그리스도인 문화를 세우려는 우리의 시도 등은 이 생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위해서도 가치가 있을 것이며 불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학과 문화의 열매들도 새땅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4.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후크마 교수는 하나님의 왕국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주제이며, 사도들의 전도와 가르침의 중심주제라고 말한다. 구약시대의 신자가 바라고 기대했던 사건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였으며, 이런 기대는 특히 다니엘에게 있어서 인자(Son of Man)의 미래의 나타나심과 연결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의 계속성과 최후의 절정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는 성경적 종말론의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후크마 교수는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한 최근의 종말론적 경향을 설명하고 있다.


리츨(Ritschl), 하르낙(Harnack), 도드(C. H. Dodd)는 예수님의 가르침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현재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봐이스(Weiss), 슈바이처(Schweitzer), 몰트만(Moltmann)은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으로 가르쳤으며,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과 같은 다른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후크마 교수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왕국선포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왕국이 오실자의 인격으로 곧 도래하려 한다고 말하며,(마3:2) 예수님은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때가 찼고(눅4:21), 그 왕국은 지금 그 자신의 인격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왕국의 선구자였지만, 그 자신은 왕국밖에 서 있었으며, 예수님은 왕국을 시작하셨다.
복음서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나님의 왕국과 동일시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마19:29 / 막10:29(눅18:29) / 행8:12 / 행28:31
사도 서신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읽지 못하는 이유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가르치거나 전파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을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후크마 교수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롬14:17의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왕국의 중심적 의미를 찾는데 있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첫번째 문제는 왕국이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영역(realm)이나 영토(territory)를 상징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reign)나 지배(rule)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왕국이란 용어는 종종 공간적 함축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 역사 속에서 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통치사역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의 목적은 죄와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며 새하늘과 새땅을 최종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단순히 어떤 개인의 구원으로서 또는 심지어 그의 백성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이해되어져서는 안되며, 그것은 그가 창조하신 온 우주를 그가 통치하시며 지배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왕국은 인간의 업적에 의해 성취된 형세가 아니며 또한 부단한 인간의 노력의 결정체도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인해 이루어지며, 왕국의 축복도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으로 인해 얻어지게 된다. 인간의 의무는 왕국을 존재케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가 삶의 전 영역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에 더 많이 복종시키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왕국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구원이요,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마7:24-27 :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치 아니하는 자.
/ 마22:1-14 : 혼인잔치에서 초대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 예복을 입은 자와 입 지 않은 자.

후크마 교수는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다는 징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①예수님의 귀신들을 쫓아내심 / 마12:28
②사단의 떨어짐 / 눅10:18
③기적들이 일어남 / 막11:4-5
④복음의 전파 / 눅10:20
⑤죄사함의 부여 / 막2:10 , 마10:34

후크마 교수는 하나님의 왕국이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것이라는 성경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현재적인 것.
마12:28(눅11:20) / 눅17:20-21 / 마13:44-46 / 눅14:28-33 / 마5:3-10 / 마18:4 / 마19:14


*미래적인 것.
마7:21-23 / 마8:11-12 / 마22:1-14 / 마13:24-30,36-43 / 마13:47-50 / 마25:1-13 / 마25:14-30



*바울서신에서
현재적인 것.- 고전1:19-20 / 롬14:17 / 골1:13-14
미래적인 것.- 딤후4:18 / 고전6:9 / 갈5:21 / 엡5:5 / 고전15:50


후크마 교수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바울의 가르침에 나타난 하나님의 왕국은 미래적 실체일 뿐만 아니라 현재적 실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는 왕국의 축복을 지금 향유하고 있으며, 왕국의 책임들을 나누어지면서 지금 하나님의 왕국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과 생활의 측면에 대해서 왕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대하여 후크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왕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한다.

살전2:12 / 눅12:32 / 골1:13 / 눅22:29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다는 것이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특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청하고 있다.

마18:3-4 / 마7:21 / 마5:20 / 막10:25 / 요3:3,5


3) 하나님의 왕국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마6:33 / 마13:44-45 / 마5:29-30 / 눅14:26 / 눅14:33 / 눅14:28-32


4) 하나님의 왕국은 우주적인 구속을 의미한다.

엡1:9-10 / 골1:19-20 / 롬8:19-21


따라서 후크마 교수는 모든 역사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며, 예술과 과학, 학업, 직업, 사업, 기업, 가사일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5. 성령과 종말론에 관하여


후크마 교수는 그동안 학계에서는 종말론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미진했음을 지적한다. 종말론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새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 새 시대의 특권들과 축복들을 즐기며 살고 있지만, 그러나 신자들이 현재 갖고 있는 것과 앞으로를 기대하는 것과의 시기의 긴장관계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후크마 교수는 종말론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구약과 신약의 증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구약의 증거


1)구약은 말하기를 성령은 어떤 예언적 징표들을 수반하는 최종적 종말론적 세대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한다.

/요엘 선지자의 성령강림 사건 예언에서 이후에가 행 2:17에서 베드로는 이 마지막 날들에라고 부르고 있다.
/베드로가 행2:17-36에서 성령의 강림사건에 부여한 중요성은 성령강림 사건이 말세의 도래를 알리는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2)성령은 장차 오실 구속자 뒤에 강림하며, 그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주실 분으로 말하고 있다.

/사11:1-2 / 사6:1-2


3)성령은 물질적 축복들과 윤리적 재생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미래적 새 생활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 구약의 가르침이다.

/ 사44:2-4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같이 할 것이라. (참고 사32:15-17)

/비슷한 내용의 구절이 에스겔 37:14과 39:24에도 있다.

/에스겔 선지자는 국가적 축복들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의 개개인들이 새롭게 재생될 것도 예언하고 있다.


/겔36:25-27

내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 신약의 증거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여러모로 연관이 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1) 눅4:17-19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1장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구절의 내용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주의 영이 임할 바로 그 메시야이며,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시킨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2) 마12:28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임했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역시 성령께서 그리스도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는 일이 바로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증거로 나타나고 있다.

3) 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에 발생한 성령의 쏟아부으심의 사건은 성령께서 그 충만한 가운데 임재하게 되었다는 종말론적 새 시대의 막을 올리는 위대한 종말론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바울도 구약예언과 조화를 이루면서 성령을 특별히 종말론적 선물이며, 새 세대의 계시자로 보고 있다.
게할더스 보스는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과 종말론의 관계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pneuma(성령)는 종말론적 혹은 천상의 영역이 모든 요소들 속에 있기 전 이미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있었다. 바로 이러한 성령의 내주는 장차 올 세상 속에서 어떠한 존재로 어떠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하는 양식을 특징지워주고 있다. 따라서 이렇게 기대하고 예기하는 형식으로 장차 올 세계는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이란 미래가 현재속으로 돌파하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미래 세대의 능력들과 특권들, 그리고 축복들이 이미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미래의 세대와 연관이 있는 새 존재 양식 속에 참여자가 된다는 것이며, 또한 장차 올 세대의 능력들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마 바울은 주장하기를 성령이 지금 주시는 것은 더욱 더 큰 축복들을 우선적으로 약간 맛을 보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바울은 성령을 현세의 축복들보다 훨씬 능가할 미래의 축복들에 대한 첫 열매들, 혹은 증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의 시대(오순절로부터 재림때까지)란 일종의 중간적 새대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세대에 신자들은 이미 장차 올 세대의 축복들을 향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그들은 아직 그 축복들을 충만히 소유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후크마 교수는 성령의 종말론적 역할과 연관이 있는 성경의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다.


1) 신자들의 양자됨이다.

바울은 신자들의 양자됨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말하면서도 성령의 사역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혀놓고 있다.

/ 갈라디아서4:4 ; 로마서8:14-16

따라서 양자됨과 관련하여 성령이 하시는 역할이란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들인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일이며, 동시에 이러한 양자됨의 풍성한 부가 예수님의 재림 전에서 나타낸 바가 되지 아니할 것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2) 첫열매(aparche, firstfruits)이다.

이 단어는 고린도전서 15:20과 23에서(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성령께 적용된 예가 한 군데 있는데 위에서 인용된 바 있는 로마서 8:23이다.

피조물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첫 열매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구약의 배경을 살펴보면 첫 열매들이란 들판의 첫 소작물들이나 가축의 첫 것들로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들이었다.(신18:4; 26:2, 느10:35-37) 그러므로 첫 열매란 추수 때의 시작을 상징한다. 로마서 8:23에서 성령은 첫 열매라고 불리고 있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 첫 열매들이란 장차 올 대추수의 첫 시작을 암시했듯이 신자들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장차 다가올 더 좋은 것들의 첫 맛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3) 육체적 부활사건이다.

성경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신자들의 부활사건에 능동적으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부활사건 : 롬 1:3-4 ; 8:11
/ 신자들의 부활사건 : 고전 15:42-44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성령을 소유함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장차 올 세대의 축복들을 우선적으로 맛보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담보와 보증은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첫 열매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축복들을 풍성히 향유하는 그때, 곧 하나님의 왕국의 최종적 완성의 때를 갈망하고 바라다 보고 있는 것이다.



6. 이미와 아직사이의 긴장에 관하여


이미와 아직은 신약의 종말론의 특징이며, 신자는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던 종말론적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신자들은 아직 최종적 상태에 다다른 것이 아니라 아직 부활될 육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후크마 교수는 이러한 긴장은, 신약에서 두세대(two ages)에 관한 교리 즉, 현 세대와 장차 올 세대를 통해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신약을 가로지르고 있는 역사의 이해, 즉 하나님의 왕국과 사단의 왕국이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발전하는 두 개의 줄기로서 이 긴장이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후크마 교수는 이러한 논리를 다음 몇가지의 성경적 근거로 진술하고 있다.


1)이미와 아직사이의 긴장 상태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명백히 제시되어져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교훈이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인 소망이라는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2)바울의 가르침 속에서도 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생명을 현재 우리의 죽을 육체 속에 나타내신바 되었으나(고후4:10,11) 이 새 생명이 현재적으로 나타난 것은 잠정적이요 미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나타내진바 된 동시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골3:3; 롬8:19,23) 그러므로 바울은 종종 기쁘고 승리에 찬 말로 성령의 현재적 내주하심에 관해 쓰고 있는 것이다.(롬8:9, 고후3:18) 반면에, 바울은 또 다른 곳에서 신자들은 지금 탄식하며 더 좋은 것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롬8:23, 고후5:2)


3)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비교하면서 대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려지신바 되었고, 그를 기다리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두번째 나타나실 것인데 이때는 죄와는 관계하시지 않는다(히9:28)는 것이다.


4)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 신자들의 미래적 소망을 연결짓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5)요한은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우리 사이의 대조를 조명해 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을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요한일서3:2)


6)요한 계시록에도 이미와 아직사이의 긴장이 표현되고 있음을 말한다.

후크마 교수는 요한 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두가지의 잘못된 해석법을 배격하고 있다. 그것은 요한 계시록이 단지 과거에 성취된 것으로만 해석하는 과거주의적 해석법과 또 하나는 전적으로 미래에 성취될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보는 미래적 해석법인데, 이런 해석법은 요한 계시록 전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이미와 아직사이의 긴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요한 계시록은 과거의 일들과 함께 미래의 일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사역 위에 미래에 대한 기대들을 구축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얻으신 승리에 관한 구절은 계1:18; 5:5-7, 9-10; 12:1-5, 11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구절은 계1:7; 19:11-16; 22:7, 12, 20이다.

후크마 교수는 이러한 이미와 아직사이의 긴장이 오늘날 우리 신자들의 삶과 생각에 미치는 특성들에 대하여 몇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1)이러한 이미와 아직의 긴장은 우리가 흔히 시대의 징조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특징지워준다.

시대의 징조들이라 할때,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교회의 선교적 전파사역, 이스라엘의 개종, 배도하는 일이 크게 일어나게 됨,

대환난, 적 그리스도의 출현등과 같은 일을 포함한, 그리스도 재림 전에 발생하게 될 모든 사건들을 말하고 있다.

2)교회는 이 긴장속에 들어 있다.

3)이러한 긴장은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극제가 된다.(롬8:13; 고전1:30; 갈6:8)

4)우리의 자화상(self - image)은 이러한 긴장을 반영해야 한다.(골3:9-10)

5)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롬8:17-18; 벧전4:12-13; 계21:4)

6)문화에 대한 태도는 이 긴장과 관련이 있다.


후크마 교수는 현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 대하여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있음을 말하면서 현 세상의 문화적 산물은 다음 세상으로 연결된다는 연속성을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 구절로 고전3:10-15의 공력에 대한 비유와 마25:21,23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비그리스도인들이 만든 문화적 산물들을 우리가 경시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분별하여 그것을 사용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B. 미래 종말론


미래 종말론은 미래에 있게 될 종말론적 사건들을 다루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종말론의 구조인 개인적 종말론과 일반적(우주적) 종말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적 종말론은 육체의 죽음, 영혼 불멸론, 죽음과 부활사이 기간동안의 인간의 상태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며, 일반적 종말론은 재림의 기대, 시대의 징조들,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기, 육체의 부활, 최후의 심판, 신천신지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


1. 육체의 죽음에 관하여


여기서 다루게 되는 육체의 죽음에 관한 문제는 특별히 인간에 대한 죄와 죽음과의 관계성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인가라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로마 천주교나 신교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의 하나라고 가르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기독교의 선생들은 다르게 가르쳤다. A. D 5세기경, 로마에서 가르쳤던 영국의 수도승인 펠라기우스(Pelagius)의 제자 셀레티우스(Celestius)는 아담은 유한적으로 창조되었고 그가 죄를 짓든, 안 짓든간에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또한, 종교 개혁 시대의 소시니안 주의자들(Socinians)이 이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으며, 칼바르트는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이며,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땅 위의 인간의 생명은 끝을 갖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크마 교수는 인간 역사에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결과 중의 하나라고 말하면서, 창세기 2:16-17의 주해를 제시하고 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성경 중에서 죽음에 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분명히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가르쳐 주고 있다. 죽음은 금단의 열매를 먹는데 대한 징벌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날과 죽으리라에 대한 해석이 여러갈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이다.


먼저 네가 그것을 먹는 그 날에라는 문구에서 그 날에 관한 해석은 보수적인 견해에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번째 해석에 있어서 그 날은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바로 그 날이다. 그런데, 아담이 바로 그 날 죽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일반은총 때문에 사형선고의 즉각적 집행이 연기되었다고 하는 견해이다. 두번째 해석은 게할더스 보스의 견해로,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이란 표현은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단순히 네가 먹은 만큼 확실히라는 뜻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


성경에서 이러한 관용구의 또 다른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열왕기상2:37에 있는 네가 나아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히 죽임을 당하리라와 출애굽기10:28에 기록된 내 얼굴을 결코 다시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이다. 여기서 그 날에라는 표현은 단순히 정녕히, 확실히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와 동일한 의미인 창세기2:17의 표현은 네가 이 과일을 먹는 바로 그 날에 네가 죽으리라는 뜻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오히려 네가 이 과일을 먹는 만큼이나 확실히 너는 죽으리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더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후크마 교수는 말한다.


또 하나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해석은 네가 정녕 죽으리라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하는 것이다. 우선, 히브리어 동사 muth는 일차적이고도 분명한 의미는 육체의 죽음이다. 창3:19은 육체의 죽음이 인간의 죄의 결과인 저주와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다. 그렇다면, 창2:17에서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인간의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육체의 죽음은 인간의 죄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후크마 교수는 창2:17에 선언된 죽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적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죽음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분리상태에 있는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신약에서도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분명히 확인하는 성경구절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육체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 신자들에게는 한가지 질문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하셨는데, 죄 용서함을 받은 우리 신자에게 왜 아직도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에 해답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42번에 잘 나타나 있다.


문 :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가 또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답 :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보상이 아니라 다만 죄에 대하여 죽고 영생에 들 어간다는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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