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니케아 종교회의(성삼위의 관계)

1. 성부와 성자의 관계

박해가 종식된 직후에 교회 안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그의 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서유럽의 터틀리안과 같은 사람은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해석으로서 삼위들 안에 있는 본질의 통일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까닭에 논란은 제국의 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교회가 항상 그리스도에 대한 유니테리언주의적 관념들과 싸워야 했던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현대의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의 선구자는 아리우스주의와 16세기에 일어난 소시니우스주의(Socinianism)이다.

318년, 혹은 319년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는 장로들에게 “통일된 삼위일체의 위대한 신비에 관하여” 설교했다. 장로들 중 한 사람인 아리우스는 금욕적인 학자요 대중 설교가였다. 그는 그 설교는 신격 안에 있는 삼위들의 차이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공격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에 대한 다신론적 관념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당하게 다루는 주장을 폈다. 그 문제는 본질상 그리스도 구세론적인 것이었다. 만일 그리스도가 유세비우스와 아리우스가 각기 주장한 것처럼 참된 하나님보다 못하며 아버지의 본질과 유사하거나 상이한 본질을 지닌 반인 반신(半人半神)이라면, 과연 그가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 논쟁은 매우 치열했으며, 결국 알렉산더는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아리우스를 정죄했다. 아리우스는 니코메디아의 감독인 유세비우스의 궁궐로 도피했다.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와 동창생이었다. 이 논쟁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는 물론이요 제국의 일치까지도 위협했다. 콘스탄틴은 알렌산드라아의 감독과 아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분쟁을 해결하려 했지만, 황제의 편지로는 그 분쟁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은 교회의 감독들로 구성된 공의회에게 그 분쟁을 해결하라고 했다. 이 공의회는 325년 초여름에 니케아에서 개최되었다. 200명 내지 300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는데 제국의 서쪽 지방 출신은 10명도 되지 않았다. 황제는 제1차 회의를 주재하고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교회는 처음으로 자신이 국가의 수장의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라는 영구적인 문제가 이곳에서 분명히 등장했지만, 감독들은 신학적 이단을 다루는 일에 몰두하여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공의회에서는 세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이사라의 유세비우스와 다른 사람이다)의 지지를 받은 아리우스를 비롯한 소수의 참석자들은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성부와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는 고결한 생활을 했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무에서 창조된 존재로서 성부와는 다른 본질을 가졌으며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믿었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등한 존재가 아니며 동등하게 영원한 존재가 아니고 동등한 본질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다. 즉 그리스도는 거룩한 분이시지만 신은 아니었다.

아타나시우스(295?-373)는 후일 정통적 견해가 된 사상의 주요 옹호자가 되었다. 그는 부유한 부모 덕택에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명한 교리문답 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저서인 『성육 신론』(De Incarnatione)에는 그리스도론에 관한 그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30세가 조금 넘은 이 젊은 신학자는,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존재하셨으며, 물론 하나의 분명한 인격이시지만 성부와 동일한 본질(homoousios)을 가지셨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자신이 주장한 내용에 미치지 못하는 분이시라면 인간이 구주가 되실 수 없다고 믿었다. 아타나시우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문제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등하며, 동등하게 영원하며,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주장 때문에 다섯 차례나 추방당했다.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자요 교회사가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를 따랐다. 그는 논쟁을 싫어했기 때문에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는 아리우스의 사상과 아타나시우스의 사상 중에서 최선의 것들을 결합한 온전한 견해를 제안했다. 처음에는 참석자 중 200명 이상이 그의 견해를 따랐다. 그는 그리스도는 아리우스의 주장처럼 무에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잉태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성부와 같은(homoi) 본질을 가지신다. 그의 신조는 마침내 니케아에서 작성된 신조의 기초가 되었지만, 니케아 신조는 성부와 성자의 본질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점에서 그의 견해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영원성, 그리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다는 점 등을 다짐함으로써 정통적 주장은 니케아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작성된 신조를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니케아 신조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물론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니케아 신조는 니케아에서 작성된 것과 유사하기는 하다. 325년에 작성된 신조는 “그리고 성령 안에서”라는 구절에서 끝나며, 그 다음에 아리우스의 견해를 정죄하는 부분이 이어진다. 325년부터 361년 사이에 콘스탄틴 대제와 그의 아들들의 치하에서 정통적 주장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정통파의 주장이 패배하고 아리우스 주의가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361년부터 381년 사이에 정통파의 주장에 대한 두 번째 반발이 일어났으며 결국 381년에 정통파의 주장이 승리했다. 381년에 테오도시우스는 니케아에서 작성된 견해들이 참 기독교인의 신앙이라고 정의했다. 어쨌든 325년부터 381년까지는 싸움과 원한의 기간이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결정 사항 중 제1조에서는, 니케아에 참석한 318명의 교부들의 신앙은 “버림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며, 계속 주도적인 것으로 존속해야 할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451년 칼케돈에서 인정되었으며 현재 사용되고 있는 니케아 신조는 키릴의 저서에 수록된 예루살렘 신조와 같은 시리아-팔레스틴 신조에 기초를 두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 신조와 사도 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의 신조는 교회의 위대한 보편 신조이다. 모더니즘과 유니테리언주의와 관계가 있는 아리우스 주의는 비정통 교리로 간주되어 배격되었고,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이 기독교 신앙의 신조에 포함되었다. 아리우스주의는 고트족, 반다족, 롬바르트족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니케아에서의 결정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최종적 분열로 초래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결정이 지닌 가치를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

니케아 공의회로 인해 교회는 독립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즉 그 후 교회는 제국 교회가 되어, 갈수록 황제의 지배를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서방 교회는 이러한 지배에서 벗어나 일어설 수 있었지만, 동방 교회는 국가의 정치권력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 성부와 성령의 관계

341년부터 360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있었던 마케도니우스(Macedonius)는 성령은 천사들과 동일한 차원에 있는 “봉사자요 종”이며, 또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하는 피조물이라고 가르친 듯하다. 이것은 성령의 참된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아리우스의 견해가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에 해로운 것이었듯이, 이것은 성령에 대한 개념에 해로운 것이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이 견해들을 정죄했다. 581년 톨레도에서 오늘날 우리가 니케아 신조라고 칭하는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낭독할 때에 “성부로부터 발현하다”라는 문장에 “성자로부터”(filoque)라는 표현이 추가되었다. 이 문장은 성령과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후로 서방 교회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며 동일하게 영원하며 동일한 본질을 가진 성령의 위격과 참된 신성을 주장해왔다.

요약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사상을 간단히 간추려 보면,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아리우스는 유사(homoiousios)하다고 보았으나, 아타나시우스는 동질(Homoousios)로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God of God)이시고 로고스요, 지혜요, 아들이시요, 하나님의 능력이시므로 성경에는 한 하나님이 선포된 것이다. 왜냐하면 로고스는 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결국 그가 나온 그에게 귀착된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시나 그 신성의 단일성(the monad of divinity)은 분열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신성의 원천은 하나라고 할 수 있고 두 원천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정확히 말하여 단일성이 계신다고 할 수 있고 본질과 위격(hypostasis)이 모두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를 반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성부)과 완전히 동질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신성(神性)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아리우스가 반신성(半神性)을 주장한 데 비해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 신성(完全 神性)을 주장하였다. 그는 한평생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려고 노력한 사람으로서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이야말로 기독교의 신앙의 머릿돌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 인성(人性)에 관해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로고스-육신’형은 완전한 인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을 우리들이 아들 됨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우리 보통 인간보다 우월한 분이기는 하나 역시 피조성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를 하나의 특유한 피조자로 보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人性)을 가진 완전인(完全人)이라고 논박하였다.

그리고 아리우스가 영혼은 없으며, 로고스가 영혼이라고 주장하면서 무(無)에서 모든 것이 창조된다고 하였을 때, 아타나시우스는 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출생하신 것이요, 낳은 자인 성부와 출생(beget)된 자인 성자는 동질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독론 :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관계에 대한 논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인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교의(敎義)는 니케아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 이 후에도 기독론에 관한 논쟁은 꾸준히 일어나 정통과 이설(異說) 사이에 심한 충돌이 일어나곤 했다. 교회에서 연 회의는 많았지만 그 중에도 동서 양쪽에 있는 전체 교회에서 대표들이 모였던 7회의 회의를 전체 회의 또는 총회라고 부른다.

제 2차 회의

제 2차 회의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소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안디옥의 감독 밀레티오가 회의를 지도하였는데, 밀레티오가 죽은 후에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의장을 대신했다. 이 회의가 소집된 동기는, 신인양성(神人兩性)은 예수라고 하는 한 개의 인격 안에서 어떻게 서로 결합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폴리나리스(Apolinaris)가 하나의 학설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아폴리나리스는 플라톤(Platon)의 심리학설, 즉 인간은 몸(Body)과 마음(Soul)과 영(Spirit)의 셋으로 되었다는 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간의 영을 대신하였고, 로고스와 마음과 몸으로써 하나의 인격을 이루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을 제한하였다. 아폴리나리스는 아리우스처럼 신성을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인성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가 사람의 영이 없으니 인성 제한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의 설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가진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가지지 못한 것이 있게 된다.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에 논박한 가장 유력한 신학자들은 갑바도기아의 두 그레고리우스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아(自我)가 된 것은 로고스라고 인정은 하면서도 그 로고스는 모든 인성을 섭취하고 동화하여 인간적인 행위와 감정의 주체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아폴리나리스의 학설을 기각하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이라고 결의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이 모두 완전하다는 사상은 자연히 신인의 양격(兩格)이 있다는 설로서 이 때문에 다시 큰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제 3차 회의

제 3차 회의는 431년 에베소에서 열렸다. 소집자는 테오도시우스 2세였다. 이 회의 의제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양성론(兩性論)에 관한 것에서 시작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의 대감독으로 있다가 나중에 콘스탄티노플의 대 감독이 된 사람인데,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두 개의 격위(格位)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될 위험성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는 신이 아니고 로고스가 임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안디옥파의 테오도레의 설(說)에 근거하여 마리아가 낳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로고스를 머물게 하여 모시는 것, 즉 「하나님을 싣고 다니는 것」(Theo Phorus)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알렌산드리아의 감독 키릴로스(376년-444년)가 적극 반대하였다. 그는 신인 양성(兩人 兩性)은 예수에 있어서 결합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로고스는 육신이 되었고 마리아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낳았다고 주장하였다. 키릴로스가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을 주장한 것은 옳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키릴로스파는 동방 회원들이 아직 도착하기 전에 그 틈을 타서 네스토리우스파가 도착하자, 그들은 그들대로 키릴로스를 이단이라고 결의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두 결의에 모두 비준을 하였는데, 후에 키릴로스에 대한 선고를 취소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출교하였다. 그러나 황실의 세력을 이용하여 두 당파의 조화를 도모하고, 네스토리우스에 동정하는 테오도레에게 위임하여 하나의 신조를 기초하게 하였다. 키릴로스는 이것을 승인하였는데 이 신조는 칼케톤 신조의 준비가 된 외에 희미하여 참된 해결을 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키릴로스는 그 후 점점 궁정에 세력을 뿌리박고, 435년에는 네스토리우스를 아라비아로 귀양가게 하였다.

도적회의

이 회의는 449년 에베소에서 열렸다. 이 회의의 의제는 유티케스(Eutyches)의 단성론(Monophysitism)에 관한 논쟁이었다. 유티케스는 콘스탄티노플 부근의 수도원장으로서 열심 있는 키릴로스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는 두 가지 성품으로 되어 있는데, 그 두 성품이 합일한 후에 인성은 신성에 침범되고 섭취되어서 그리스도의 몸까지도 우리들의 몸과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단성론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는 양성으로 있었으나, 후에는 단성(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당시 키릴로스는 죽고 없었는데 콘스탄티노플 지방대회는 유티케스의 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들의 인성과는 다른 종류의 것으로 여긴다는 이유로 이를 부인하였다. 그러나 알렌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Dioscorus)는 이 논쟁에 이기는 것은 알렌산드리아의 세력을 펴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유티케스에게 성원을 보내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권하여 회의를 소집하게 하니, 이것을 도적회의(盜賊會議)라고 부르게 되었다.

알렌산드리아의 감독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의장이 되어 병졸들과 무뢰한들을 회장에 배치하고 반대자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협박하여 「이성이 있다고 하는 자는 두 토막을 내라」고 떠들고, 유티케스의 복직과 안디옥파의 수령들의 추방을 결의하였다. 이 회의는 정식 종교 회의에 계산치 아니한다.

제 4차 회의

이와 같은 기독교 세계종교회의가 여러 번 개최되고 기독론에 관해 끊임없는 논쟁을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존재로만 아니라 또한 인간으로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완전한 인간성이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완전한 신성과 같이 꼭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교회 안에는 많은 다른 신성에 관해 견해들이 있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관해서도 많은 다른 견해가 있었고,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하여 서로가 연관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연구와 깊은 사색이 공통점과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는데, 기독론에 관해서 길고 무서운 논쟁들이 발전되었다.

결국 451년에 한 종교회의가 니케아 근처 칼케톤(Chalchedon)에서 개최되었다. 소집자는 마르키아누스(Marcianus) 황제로서, 약 600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칼케톤 신조가 작성되었는데,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꼭 같이 중요한 수준에 선 것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분, 완전의 신성을 신앙함을 다시 확인하고 그리스도는 충분하고 완전한 인간성을 동등으로 가진 것으로 교회는 신앙한다고 고백한 것이었다. 더욱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두 성품 즉, 인성과 신성이 존재함을 고백하였다. 교회는 이 두 성품의 관계에 관하여 혼동이 없고 변함이 없으며, 분리가 없고 불화가 없이 존재한다고 공인하였다. 결국 교회는 그리스도는 두 성품을 가져도 한 인격이지 두 인격이 아니라는 고백을 한 것이었다.

칼케톤(Chalchedon)회의의 결의 사항을 다시 요약 설명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에도 완전(完全)하고 인성(人性)에도 완전하며, 각기 그 성질을 보존한다. 그리스도는 참 신(神)이며 참 인간으로서 이성(理性)있는 영혼과 육체를 소유하였다. 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으며 이 양성(兩性)은 썩거나 변하지 아니하며 떠나지도 아니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으로 동정녀에게서 출생하셨다는 것이었다. 이 회의는 <니케아> <에베소> 양 회의에서 정한 신조를 확인하고 설명을 가하여 교리를 명백히 하였는데, 칼케톤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함께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적 조항의 표현이다.

제 5차 회의

칼케톤 회의는 교리의 논쟁에 있어서 일단락을 짓게 하였으나 싸움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년-565년)는 즉위하자 곧 단성론자와 타협을 꾀하고, 또한 로마의 감독에 대하여 독립된 지위를 차지하려는 동기도 섞여서 3장령(三章令-The Three Chapters: 안디옥파의 세 신학자, 데오도�, 이바스(Ibas), 데오도�의 의견을 변박한 것)이라는 것을 발표하였으나 유익함이 없었고 도리어 소란을 더하여 제 5회의 대회의를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하였다. 여기서 칼케톤 신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정통 교리를 삼고, 일성론을 취한 교회는 분리하여 고립된 단체가 되었다. 이집트에 있는 코프트 교회, 에디오피아 교회, 알메니아 교회, 시리아로부터 메소포타미아 근방에 있는 야곱 교회가 그것이다.

제 6차 회의

제 6차 회의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680년에 열렸다. 소집자는 콘스탄티누스 4세로서, 셀기우스(Sergius)의 단일신론과 로마의 감독 호노리우스(Honorius of Rome)를 정죄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다 가지셨지만 오직 신의(神意)만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단성론(Monothelitism)을 배격하고, 그리스도에게는 두 의지(意志)가 있다. 그리하여 인적(人的)인 의지는 신적(神的)인 의지에 복종한다는 양성론을 채택하였다.

제 7차 회의

제 7차 회의는 니케아에서 787년에 열렸는데, 동방 교회 마지막 총회였다. 소집자는 콘스탄티누스 6세였는데, 이 회의가 소집된 동기는, 레오 Ⅲ세가 성상 사용을 금함으로 수도사, 신도들이 반대하여 종교적 반란이 일어나자, 레오 황제는 교황, 신도들이 성화 반대자들이라 하여 성지를 빼앗는 등 탄압을 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6세가 즉위하여 성화 숭배 문제를 갖고 회의를 소집했으니, 이것이 곧 제 7차 회의이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를 숭배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성화, 십자가, 복음서들을 「존숭(尊崇)할 것이니 참 예배는 신성에 한하나 이상에 대한 존숭은 그 물질에 향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표현하는 그 속의 실재에 대한 존숭이라」했다. 이 회의가 황제께 올린 서한에 성상 숭배가 정담함은 예수가 참 사람이셨다는 사실과, 복음 사건들이 참 역사적임에 기반을 두었다. 신성이 물질계에서 멀지 않다는 것과 화신에서와 마찬가지로 물질계가 신께 접근케 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원칙이 승리한 것이다.

기독론 요약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에 관한 신학적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두 본성의 관계에 대한 정통 교리가 최종적으로 형성되기까지 많은 수난과 폭력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알렉산드리아와 연결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했고, 안디옥과 관련된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무시하고 인성을 강조했다.

라오디케아의 수사학 교사요 감독이었던 아폴로나리우스(Apollinarius)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한 견해를 개진하면서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이심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폴로나리우스는 약 60세 때에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해 나름대로 특이한 견해를 개진했다. 그 이전까지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좋은 친구였으며, 정통주의의 수호자였다. 아폴로나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부당하게 분리하는 일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그리스도는 참된 몸과 혼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영이 로고스로 대치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 요소인 로고스는 소극적 요소인 몸과 혼을 적극적으로 지배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그가 참된 인간이심을 경시했다. 그의 견해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죄되었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1?-452?)는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된 학구적 수도사로서, 아폴로나리우스의 견해와 대조적인 견해를 개진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 신모(神母, theotokos)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리아를 부당하게 찬양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 대안으로서 그리스도의 모친(christokos)이라는 용어를 제시하고,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면의 모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그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몸이 붙은 쌍둥이처럼 기계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격이 되었다. 결국 그리스도는 정신적으로 신성과 연결되어 있는 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인(神人, God-man)이라기보다 신의 담지자(God-bearer)였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431년에 에배소에 모였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키릴(Gyril)이 주도하여 이 교리를 정죄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은 제국의 동쪽 지방에서 사역을 계속했으며, 페르시아, 인도에까지 가서 자기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635년에는 알로펜(Alopen)에 의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지만 9세기말 중국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사람들의 견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시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인성을 무시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유티케스(Eutyches)는,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신 후 두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이 융합하여 하나의 본성, 즉 신성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았다.

440년부터 461년까지 로마의 감독으로 있었던 레오 1세는『교리서(Tome)라고 알려진 장문의 편지에서 이 견해를 정죄했으며, 451년에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에서도 이 견해를 정죄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성서와 일치할 기독론을 발표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이시오 완전한 인간, 참된 신이시오 참된 인간”으로서 “혼동됨이 없고, 변화됨이 없고, 구분됨이 없고, 분리됨이 없이 두 개의 본성”을 소유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개의 본성은 성육신에 의해서 하나의 본질을 지닌 한 인간 안에서 조화롭게 결합된다. 이 규정은 그 공의회에서 결정된 이후로 정통 견해로 여겨져 왔다.

유티케스의 견해들은 6세기 중반까지 비잔틴 제국의 평화를 어지럽힌 단성론(Monophysitism) 논쟁에서 되살아났다. 지금도 이집트, 이디오피아, 레바논, 터키, 러시아 등지의 콥트 교회 안에는 1500만 명 이상의 단성론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관한 문제가 해결된 후, 이어 그리스도의 두 가지 의지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그리스도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를 가지고 계셨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들은 동등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한 가지 의지가 나머지 의지에 종속되었는가? 이 논쟁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에서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가지 의지가 조화롭게 통일 상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 상태에서 인간적인 의지가 신적인 의지에 종속한다고 확인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동방 교회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동방교회가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8세기에 다마스커스의 요한의 발언을 제외하면, 동방 교회의 신학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론 : 인간 구원의 방법

지금까지 다룬 이단들과 논쟁들은 주로 동방 교회 내의 문제들이었다. 터툴리안과 같은 지도자가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관계 등에 관한 정통적 견해를 갖도록 교회를 인도해온 서방 교회에서는 신학과 기독론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의 합리주의적인 헬라 사상가들처럼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신학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서방 교회의 사상가들은 보다 실직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헬라 정신은 사상 분야에서 기여했으며, 반면에 보다 실질적인 로마의 정신은 교회 내의 관습과 관련된 문제들에 관심을 가졌다. 예를 들자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 인간이 구원받는 방법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오직 신적 능력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구원의 과정에 인간의 의지가 작용하는 곳이 있는가?

제롬이 “스코트족의 감옥에서 괴로움을 당했다”고 묘사했던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는 영국의 수도사요 신학자로서 400년경에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켈레스티우스(Celestius)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구원 방법에 대한 자신의 사을 공식화했다. 곧 그는 어거스틴이 자신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409년에 로마를 떠났다. 냉정하고 침착한 인물인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이 구원받기 전까지 경험했던 것과 같은 영적인 갈등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이런 까닭에 펠라기우스는 구원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가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죄악 된 본성 때문에 처한 죄의 늪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있어서 자기의 의지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었다.

펠라기우스는 각 사람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존재로 피조 되었으며, 선이나 악을 선택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각 사람의 영혼은 독립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따라서 아담의 죄에 물들지 않았다. 세상에 죄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원죄에 의한 인간 의지의 타락 때문이라기보다 인간 육신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물론 과거 세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죄가 현세대의 육신을 연약하게 했기 때문에 구원 과정에서 개인의 의지가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으면 죄를 범하게 되지만, 인간이 첫 조상으로부터 원죄를 물려받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지는 거룩함을 획득함에 있어서 자유로이 하나님과 협력하며, 성경, 이성, 그리스도가 남기신 모범 등을 이용함으로써 은혜에 이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원죄가 없으므로, 유아 세례는 구원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가 되지 못한다.

힙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중생이 오직 성령의 사역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펠라기우스가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들을 속박했다. 왜냐하면 아담은 인류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가 완전히 타락했으므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구원 문제에 관한 한 그의 의지를 발휘할 수 없다고 간주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은 온 인류가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으므로 누구도 원죄에서 도피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에게 활력을 주입하시어 자신이 제공하신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하셔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구원을 받도록 택하신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견해는 431년에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죄되었다. 그러나 동방 교회나 서방 교회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수도사인 존 카시안(John Cassian, 360?-435?)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의지가 협력할 수 있는 절충안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악이며 그들의 의지는 연약해졌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구원 과정에서 인간의 부분적인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있다. 그는 어거스틴이 가르친 예정론과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교리가 윤리적 무책임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했다. 529년에 개최된 오렌지 종교회의(Synod of Orange)에서는 온건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지지하고 카시안의 견해를 정죄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기독교회 내에서 계속 문제가 되어왔다. 20세기의 자유주의 사상은 인간이 신적 의지와 협력하여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의 부활에 불과하다. 문제는 기독교가 종교인가 도덕인가, 인간의 자유 의지인가 하나님의 은혜인가, 문화에 의한 발달인가 발달은 가능케 하는 회심에 의한 발달인가, 인간의 합리적 능력의 문제인가 하나님의 계시의 문제인가 등과 관련된 것이다. 교회는 펠라기우스나 존 카시안의 견해보다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선호해 왔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중세 교회의 견해는 존 카시안을 추종하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견해와 유사한 것이었다. 451년에 이르러 대부분의 주요 논쟁이 종식되었으나, 그것들은 기독교회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교회의 일치는 보존되었지만 초대 교회의 특성이었던 정신적 자유가 상실되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주요한 교리적 문제에 관하여 성서들을 해석하는 기준이 되는 의미와 관련된 권위 있는 진술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드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불이익도 있었다. 신학적인 면을 강조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신앙적으로는 정통적이면서도 그 신앙이 포함된 윤리적 기준에 맞추어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 생겨났다. 신조와 행위는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폭력과 박해라도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공의회에서 제기되는 상이한 관점들을 중재하는 자로서 활동한 황제는 종교적인 문제에서 국가의 권력을 발휘하며 종교와 국가의 분리 상태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참고로 우리가 검증하고 넘어갈 본질이나 위격의 역사적인 의미상의 변천을 보면, 먼저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에서 본질은 일반적이거나 공통적인 것을 뜻했고, 스토아주의에서는 분리되어 일반적으로 재료가 된 공통적인 형태의 것으로 불리워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는 좀 더 세분화되었는데 제1본질은 개인적이면서 분리되지 않는 독특한 존재를 뜻하며, 제2본질은 하나의 공통적인 종, 즉 창조 혹은 존재로 향하게 되는 사상과 연결되는 의미로 구분되었다.

‘위격’의 의미를 살펴보면, 우선 문자적인 의미는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란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물질의 현실성 내지는 현존이라고 말한다(외부적 출현에 반해). 70인역에서는 집의 기초 내지는 희망의 기초 등으로 사용되다가 종합이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신학자 필론(B.C. 30-A.D. 45)에게는 독립성 내지는 유일성을 뜻하고 있었으며, 히브리서 1:3은 본질의 의미와 같다고 본다. 또한 그 말은 고린도후서 9:43, 히브리서 11:1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철학적인 용어로 ‘위격’이란 용어를 규정하기 시작한 최초의 입장은 신플라톤주의인데, 유일자가 위격으로 계시되는 행태를 말하고 있다. 즉, 본질은 모든 것보다 상위의 개념을 뜻하고, 위격은 창조의 행위를 말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위격이란 용어는 본질과 의미를 구별하기 어려운 단어였고, 오리겐은 삼위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게 되었다.

출처 :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
글쓴이 : john&j-graceDad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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