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사상사


- 기본의 폼으로 돌아가는 것! 기본의 폼은 곧 성경이다. 모든 사상과 삶의 체계가 성경의 기본 바탕위에 세워지고자 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다.
- 역사적 전통과 정통위에 서있다.

- 그렇다면 성경을 말하면 다 개혁주의인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어떤 이론과 사상을 말할 때 이것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모두다 내가 더 성경적이라고 큰 소리친다.

특별히 이단이 더 그렇다.
- 개혁주의라 함은 몇가지 그 양태를 가지고 있다.

1. 성경관


(1) 인간이 어떻게 신존재를 인식하게 되는가?
①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ement) : 창조/계시
- 인간을 보고 신존재를 인식
②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ement) : 하나님의 신적 작정
- 만물이 조화를 이루면서 가는데 그 배후에 힘이 있다. 그 힘이 신이다.
③ 도덕론적 증명(Moral Arguement) : 창조와 섭리속에
- 인간 마음속에 있는 도덕 개념을 따라 올라가면 도덕의 최고봉에 올라갈 수 있 고, 거기에서 신을 찾을 수 있다.
④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Arguement) :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심(인격적 관계)
- 흐르는 자연 법칙을 보면서, 우주법칙의 신비를 통해 신을 발견할 수 있다.

(2) 위의 4가지 신존재 인식이 생긴 이유?
① 보편적 신존재 사상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
②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종교의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어서 그렇기에 이단이 나 사신주의 휩쓸리게 된다.

(3) 그렇다면 무엇으로 신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가?
결국 이러한 사상을 통해 신의 존재만 인식할 뿐 우리가 말하는 참된 신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계시가 필요하다. 그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버지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4) 우리가 믿는 영감설
유기적 축자영감설: 받아쓰기의 반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되, 글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하나님의 계시로 받는다. 성경을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

(5) 그렇다면 성경을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들은 성경을 상황에 따라 어느 부분이나 또는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을 우리는 “자유주의”라고 한다. 자유주의의 시작은 인본주의이다. 인본주의라 함은 인간의 이성과 사고로부터 성경을 해석하고, 신존재를 증명하려는데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것은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다. 인본주의 사고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역사속에 나타난 인본주의 사고를 개관해보도록 하자


① 중세교회 - 교회의 권위가 점차로 성경의 가르침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고, 구원이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인간의 공로를 첨가하고, 인간이 하나님께 속했던 것을 자신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여기에 충추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개별자를 강조: 한 개인에 대한 궁극적 의미가 없다면 삶이 무슨 소용인가? 자연 대 은총의 문제, 기독교와 고대비기독교적 사상과의 혼합)의 영향을 받아서 계시와 인간 이성을 동등한 자리에 두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특별히 인간 타락관 문제가 있었다. 인간의 전적타락 보단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주장하면서, 즉 의지(will)는 타락했지만 지성(mind)는 타락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부분으로 인간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고를 가짐.


② 르네상스(문예부흥) -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음. 오직 사람에서 출발하므로 존재와 도덕에 의미를 주는 보편자나 절대자에 도달 할 수 없음. 이때 발흥한 문화가들 단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인물들이 모두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생겨났고, 역시 인본주의를 확대시켰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중세교회의 타락과 인본주의의 절대화를 막기 위해서 일어난 개혁이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의 핵심적 활동의 내용은 교회에 들어온 인본주의적 왜곡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참된 것을 말씀해 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들과 자연에 대하여 참된 것을 말씀해 준다” 즉 종교개혁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고, 성경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은 16세기-17세기까지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후 다시 많은 인본주의 사고가 커진다.


③ 계몽주의 - 17세기 말에 일어나 18세기 극대화됨. 계몽주의의 아버지 ‘볼테르’ 프랑스는 볼테르의 인본주의적 계몽주의의 기반에서 혁명에 이르게 되고, 결국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영국의 무혈혁명과 다르게 피와 공포의 혁명을 이루게됨. 이후 계몽주의의 유토피아적인 희망은 ‘이성’ ‘자연’ ‘행복’ ‘진보’ ‘자유’였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사고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는 사고로 후에 “이신론”을 만들어낸다.

이신론은 합리적 신존재 증명, 17세기에 일어나 19세기에 약화되었다. 이 사상은 하나님의 창조는 믿으나 초자연적사건은 부정한다. 창조후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직접 이끌지 않고, 합리적 상태로 그냥 두었다. 여기서 기적적 사역으로 일어난 비상섭리는 부정한다. [하나님께서 창조는 했는데 그저 만유인력이나, 우주의 자연법칙으로 하나님의 다른 개입[기적]이 전혀 없이 자연히 진행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이제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사람들에게 진리를 계시하지 않는다”
이 계몽주의 사고에서 결국 공산주의가 나온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세계 제1, 2차대전을 통하여 그들의 유토피아적인 인본주의 사고가 무너지고 만다.


④ 실존주의 - 계몽주의가 세계대전을 통하여 무력화되고, 오직 이성에 기초한 통일되고 참된 지식이라는 이전의 낙관론이 사라졌다. 그로인해 이성의 사고가 사라지고 비이성의 시대가 왔다. 실존주의자인 장 폴 샤르트르는 ‘이성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부조리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의지의 행동으로 진정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 즉 이성에서 비이성으로 삶을 이해하고 행동하려는 극단으로 옮겨진 것이다. 즉 비관론으로 점철된다. 여기에 여러분들이 잘아는 ‘루소’ ‘칸트(순수이성비판)’ ‘헤겔’ ‘키에르케고르(죽음에 이르는 병)’ 같은 인물들의 사상이 등장하게된다.


⑤ 신비주의 - 실존주의는 결국 비이성과 비관론으로 한계체험, 약물과 더불어 동양의 범신론적인 사고에 문을 열게 된다. 결국 이것은 오늘날 뉴에이지사상을 만들어낸 신비주의에 귀착하게 된다.

인본주의로 가면 곧 은총의 영역이 상실 된다. 그래서 굳이 기독교 안에서 있을 필요가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의 영역에 가까이 가는 것이 된다. 종교 다원주의적 원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인식이 통로로서 성경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으로 , 성경에 제시된 말씀은 무생물적인 전달의 도구이면서도 메신저 자체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성경을 대면하면서 만나기 때문에 성경을 대면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중보로 받아야 한다.



2. 역사관


- 무신적 역사관 : 유물주의적 공산주의 역사관 (칼 막스)
- 신적 + 인간적 역사관(협동의 역사관) : 논리적이긴 하나 신앙적 비논리 결과적으로 신의 한계를 드러냄(펠라기우스, 알미니우스 사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구원을 받아야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믿어주어야 한다. 인간이 믿어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 없다)
- 신적 역사관 : 개혁주의 역사관(어기스틴) - 성향의 변화,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고, 공유하면서 그 뜻을 이루어가는 거듭남의 은총 안에서 기꺼이

   하나님께 스스로 무릎을 꿇고 그 뜻을 이루길 원하는 인간의 자세,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며, 하나님의 섭리하에 우주만물이 움직여가고 있다는

   역사관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 현대신학의 문제는 역사관의 문제이다. 19세기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 신학은 초자연적인 예수에 의해서 혼란에 빠지자 초자연적인 예수를 부인, 신약에서 초자연적

   요소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여전히 역사적 예수는 계속 고수 (슈바이처-역사적 예수 연구, 불트만- 비신화화)



3. 신앙고백/신조(교리)


- 개혁파 신학에 있어서 신앙고백의 위치를 정확히 해야 한다. 이 위치의 문제가 곧 신학과 - 신앙 - 교회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신앙형성과 교회형성의 틀이다. 우리의 신앙은 무형적이다. 그 무형적 신앙이 무엇이다? 라는 전문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신앙고백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은 누구나 예수를 믿을 수 있으나 문제는 유지와 성숙과 발전의 문제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태어났으나 스스로 성장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어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신앙성숙의 틀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신앙고백이다. 수용했지만 지탱할 수 있는, 또 양육할 수 있는 내용을 갖지 못하면 오히려 잃어버리게 된다.


- 교회 존재이유는 하나님께 예배,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신자들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교회는 천국과 지옥의 혼합이 이루어진다고 역설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서로 치고 받고 하면서 용서할 수 있는 것을 배우면서 성숙해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해야 할 대상이 원수이기 때문이다. 죽도록 미워하는 원수가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교회라는 것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또 그 안에서 성례전을 통한 수직적, 수평적[감격의 나눔]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 신앙고백은 신앙형성의 틀과 교회형성의 틀로서의 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을 발전시키고, 설득시키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신앙고백의 형성이다. 개혁파 신학은 공적인 고백을 말하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누가 뭐라해도 똑같은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신학이기에 신학의 전제가 신앙고백이고, 설교는 하나님의 가르침의 설파인데, 그것은 곧 성경의 요약이 교리 즉 신앙고백이기에 우리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로서 신앙고백과 일치하는 가르침을 행해야 한다. 텍스트인 성경과 부텍스트인 신앙고백을 통한 가르침이 증거되어야 한다. 절대적 권위로서의 성경과 성경의 종속적 권위로서의 신앙고백의 위치를 인정해야 한다. 성경을 요약한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 신앙의 일치를 이루어가야 한다.


- 신앙의 일치와 교회의 일치를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교회가 공동체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공동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성례의 집행, 올바른 권징이 있다.

권징은 네가 고백한 신앙이 우리가 같이 공유하고 있는데 네가 그 고백에 맞지 않게 행하기에 네가 스스로 하나님의 권위 앞에 바로 서라.

이것을 바로 알려주는 것이 바로 교회의 권징이다.


- 신앙의 법은 양심의 자유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반드시 신앙고백을 통한 공유가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고백적 틀 안에서 양심의 자유가 발휘되어야 한다.


- 신앙고백이 교회 안에서 살아서 역사해야 한다.
- 사도신조 - 니케아신조 - 칼케톤 신조 - 콘스탄틴노플 신조 - 아다나시우스 신조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벨직신앙고백서 - 스위스 신조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4. 은총과 주권의 문제- 신본주의


- 우리는 하나님 “절대주권”을 신봉하는 신앙적 체계이다. 인간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만큼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절대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이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고는 구원론이 형성되지 않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교회에서 응답할 수 없다. 즉 구원과 자연세계를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정확히 대답할 수 있다.


- 주권을 배제시키면 구원이 형성되지 않는다. 구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상대적으로 흔들리면 역시 우리의 구원도 그것에 흔들리는 것만큼 흔들릴 수밖에 없다.


- 구원과 은총은 절대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데,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은총의 영역을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실 수 없는 분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거부한다고 해도(인격적 주체이기에) 그 인격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 비상섭리; 초자연적 사건은 인간의 한계로 인해 자연으로 않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돕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인간을 돕지 않으면 모두 죽기에...
- 하나님께서 바다를 가르신 것은 꼭 그 방법이 아니라도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 있으나 그럼에도 바다를 가르신 것은 인간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초자연적 사건은 하나님은 초자연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 초자연적 사건 자체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가정으로 해석하지 말라)


- 비상섭리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배려요, 사랑으로 이해해야 한다.


- 은총과 구원은 떼어 놓아서 해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총과 자연은총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은 일원론적인데, 신앙에 있어서는 이원론적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 교회는 세상에서의 가치간을 바꾸어서 일원론적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의식화 작업을 행해야 한다)



5. 신앙과 선행의 문제(기독교 윤리- 조직신학)


- 기독교 윤리는 신앙이다. 일원론적은 신앙과 윤리는 상관이 없다. (한국 국민이 가지고 있는 정서가 이원론적인데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서 신앙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천국에 있어 이층구조;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천국은 이 땅에서도 천국이어야 한다)


- 윤리는 곧 실천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곧 삶이다. 삶의 이상은 신앙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것이 우리의 이상이요, 목적이요, 비젼이다. 그것을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 안에서 찾아오는 번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거룩한 번민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언제나 번민을 형성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번민없이 어느날 이루어지는 결과로만 생각한다.


- 우리는 신앙을 고민하고, 삶을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곧 의식화 작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실천의 장이 바로 가정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중요시 되는 것이다.


- 기독교 윤리는 신앙이 바로 윤리이고, 선이다. 즉 신앙의 구현이 윤리가 되는 것이다.



6. 어떤 이들의 사상을 계승하는가?


사도들 - 어거스틴 - 쯔빙글리 - 칼빈 - 조나단 에드워드 - 아브라함 카이퍼 - 헬만 바빙크 - 벤자민 워필드 - 찰스 핫지 - 메이첸 - 게르할더 보스 - 에드워드 J 영 - 네스 스톤하우스 - 존 머레이 - 헤르만 리델보스 - 헨리 디이슨 - 루이스 뻘코프 - 코넬리우스 반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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