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의 설교 유형



차  례 / 1  


 * 머리말 / 3

 제1장 설교의 명칭과 정의 /4                               
  1.설교의 명칭과 의미 
  2.설교의 정의  
   1)사전의 정의
   2)학자들의 정의

 제2장 설교의 유형 /10                                     
  1.설교형식에 따른 분류 
   1)제목설교 
   2)본문설교 
   3)강해설교 
    a)강해설교의 명칭문제 / 11    b)강해설교의 정의 /12 
    c)강해설교의 목적 /12 
  2.설교 내용에 따른 분류 
  1)인물설교 
  2)교리설교 
  3)윤리설교

 제3장 설교의 중요성과 그역사 /14                          
  1.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와 교부들 
  2.수사들과 개혁자들 
  3.청교도들과 개혁자들 
  4.19세기 
  5.20세기 

 제4장 한국교회 설교의 역사적 고찰 / 24                    
  1.선교 초기의 설교 유형 
   1)선교사 설교의 문제점 
  2.초기 한국교회의 설교 내용   
  3.일재시대 암흑기의 설교 내용 
  4.초기 설교의 특징   
  5.고난받는 교회와 설교 
  6.1960년대 이후의 설교

 제5장 현대설교의 유형과 분석 / 33                         
  1.백주년 기념 설교집의 분석 
   1)일반적 유형 분석 
   2)신앙적 유형 분석 
   3)구조론적 유형 
   4)성경 본문 분류 
   5)현행설교와 기호설교의 내용 분류 비교 
   6)현행 예화와 기호 예화의 분류 비교  
  2.장로교회의 설교유형  
   1)해석과 적용의 유형 
   2)말씀의 현장화 
   3)설교목적에 따른 유형 
   4)구조적인 면에서의 유형 분석 
   5)현대 설교 현장의 위기 

 제6장 보수주의 교회가 지향해야할 설교 유형 / 45           
  1.원로와 선배들의 견해 
   1)박윤선 목사 
   2)임택진 목사 
   3)박희천 목사 
   4)홍정길 목사 
   5)이병돈 목사 
   6)장두만 목사 
   7)계지영 목사 
   8)정성구 목사 
  2.예수님과 사도들의 견해

  결론 / 54  
 

 
 머 리 말
 
 화란의 설교학자인 반델 베흐트(Van del Vegt)는 말하기를 설교없이는 구원없다라는 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선포 즉 설교를 해서 구원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기독교는 처음부터 설교의 종교였다. 그렇기 떠문에 기독교가 참으로 기독교 다와지고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와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설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설교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그리고 힘있게 거되던 시대는 교회가 바르게 성장했고 반대로 강단에서 설교의 능력을 잃었을 때는 교회는 물런 국가와 사회도 어두워지고 부패했었다 그러므로 현대교회가 설교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것은 교회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려는 개혁운동이기 때문이다. 사실16세기의 종교개혁은 바로 성경관의 개혁인 동시에 설교의 개혁이었다 존 칼빈을 위시해서 뜻을 같이한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쳤을때 무었보다 강단의 개혁 즉 설교의 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다. 개혁자 은 1천년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어두운 교회를 향해서 형식주의와 의식주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결국 된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시작된다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런 개혁적인 취지에서 한국교회 초기설교 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의 설교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서 앞으로 우리
보수주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설교를 논해보고자 한다.
 
 

 제 1 장 
 설교의 명칭과 정의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할때는 우선 자기가 하려고하는 그일에 대하여 명확한 의를 내릴수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만일 이를 잘못하면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모든 노력은 헛 수고가 될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설교의 명칭과 정의를 내려보는 것이 중요한 순서인 것 같다

 1.설교(說敎)의 명칭과 의미
 사실 설교란 말은 일본 명치(明治) 초년에 일본교회가 헬라어의 또는         에 해당하는 말을 설교라고 번역해서 사용하던 것을 해방이후 우리교회가 받아 사용하고 있다.(해방전에는 강도라는 말을 썼다)
 한국교회가 영어에서 설교란 말을 번역할 때 그 용어들이 서로 다른 어근에  나왔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설교(Sermon), 설교하는것(Preaching)은 어근이 각각 다르다. 영어의 Sermon은 라틴어의 sermo에서 나온 말로서본래는 담화나 연설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근대적인 의미로는 교회에서 예배의 중심으로서의 설교형식을 갖춘 연설로 이해 되었다. 이때 Srmon은 넓은 뜻으로서 설교를 말할때 쓰여진다.

 그러나 Preaching은 설교하는 행위 자체를 두고하는 말이다 이것은 곧 헬라어의          에 해당하는 말의 번역으로서 말씀의 선포 또는 복음내용을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preach란 말 자체는 라틴어의 praedico에서나온 말로서 선포하다,찬미하다,예언하다의 뜻을 가진 말이며, 이는 또한 헬라어의         에서 유래했다.이 말은 예언을 말하거나 신적 계시인 말씀을 선포하는 의미를 가진 뜻이다 1)

2.설교의 정의
 설교가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설교학자들이 많은 시도를 해보았으나 "말씀의 봉사라는 의미의 사도적 계념이나,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엄숙한 부분인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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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교학 정성구 (총신대학 출판부) P 34-37
                                                                    5 
서 그의 나타나실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말씀을 크게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전과 설교학자들의 정의를 몇 가지로 생각해보기로 하자.

1) 사전의 정의
국어사전:종교 교리를 설명함 또는 그 설명
웹스터사전:종교적인 주제를 가지고 공적으로 강화하는것
  ("to discourse publicly on a religious subject") 
철학대사전:교회에서 사람들을 기독교도 다운 생활로 인도하기 위하여 계시된 진 리를 일반에게 알리어 설명하는 것 2) 
기독교 대사전 :종교적 진리를 공중 앞에서 말로 설명하는것
그리스도교대사전:성경이 증언하는 복음의 진리를 현대 교회에 산 진리로서 증언하는 행위 3) 

2)학자들의 정의
앤드류 블랙우드:미국 감독교회의 대설교가인 그는 설교라는 것은 필요한 어떤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선정된 인물이 성경의 거룩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무엘 볼베더:미국 칼빈신학 설교학 교수인 그는 설교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구두로 행하는 선포라고 정의했다4) 
필립 브륵스는:인간에의한 인간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이라 정의 했다 
에반스는:설교는 인간에 대한 구원의 선포이다 했다

다드(C.H.Dodd):영국의 다드교수는 설교는 자기의 말을 전달하는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선택하여 보낸 분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이다 

펠프는:말씀하기를 설교의 순수한 개념은 성경에 포함된 종교적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을 향해서 연설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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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고려출판사 1992년
 3)기독교서회 P506
                                                                    6 
호핀은:설교란 공예배시에 기독교 진리를 계획적이고 구체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가르비는:설교의 긍극적 근거를 말하지 않고 설교란 영생을 위하여 인간의 인격을 통한 신적 진리의 전달이다.라고 정의 했다 
포사이드:설교는 복음의 연장이고 복음의 선포이다.설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중단없는 행위로서 그것이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선언되는 것 이라했다 
짐그레함: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고 설명해 주는 것이다

고도고상:설교란 하나님께서 부름받은  설교자가 성령의 인도에 의하여 성경의 말씀을 고백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헤릭 존슨은: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목적에서 사람을 감동하도록 권면하는 법있는 강화이다 라고 정의했다 
정성구:설교란 구속주인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을 만나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임택진;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행위이다.
박희천: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조리있게 잘표현하여 양떼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끼치는 것 
곽선희:설교란 계속적인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재해석이다
천병욱:설교란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말을 계속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이주영:설교는 하나님꼐서 세우신 사람을 통하여 전달되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정의 하면서 덧붙이기를 설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것 곧 구속사역이 그 중심이 되는 것인데 이것을 선언하고 선포하여 죄인의 마음 속에 성령의 역사가 임하여 구원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참된설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박준서:성경적 의미에서 설교란 성경 본문과 오늘의 삶의 상황을 이어주는 교량이요 오늘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재발견 하는 작업이요 오늘의 상황을 말씀의 빛 아래서 밝히 조명해 주는 것이요 또한 설교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하는 상황에 적용시켜주는 작업이다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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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현대교회와 설교 존스타트(반석)P13
 5)현대설교학 이주영 (성광문화사)P24
                                                                    7 
 이 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설교에 대한 정의를 내렸으나그 뜻은 대동소이하고 다 옳은 듯한 표현이다 어쨌던 설교에 대한 정의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설교는 초자연적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선포란 점이다.

 위의 정의를 인정하면서도  우리 한국장로교회가 전통적으로 내려온 헤릭존슨의 정의를 채용하고 그의 정의에 대한 해석을 함으로써 설교가 무었인가를 더욱확실히 드러내 보고자 한다.존슨이 말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목적에서 사람을 감동하도록 권면하는 법있는 종교적 강화이다 라는 정의를 채용키로 한다. 다음 내용은 헤릭 존스의 정의에 대한 곽안련 박사의 해석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첫째로,설교는 강화라는 부분을 생각해보자.
 설교는 어떤 형식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이다 그런데 설교는 여러가지 형식도 많고 방법도 많다. 예컨대 개인전도, 노방전도, 등의 무형식적설교이다 또 기도회 때 하는 즉석 설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논하는 설교란 법칙이 없이 무원칙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안수 받은 목사가 공식 예배시에 설교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설교자가 종교적 영적 강화라함은 이런뜻이다.
 즉 이 세상에는 종교적 진리가 아닌 다른 많은 진리가 있다. 예컨대 과학에서증명한것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수학, 화학, 천문학, 철학, 등의 진리가 있다.사람들은 이것을 학문으로 연구하며 받아들인다. 이런것들은 설교에 이용하여 도움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이런 세속적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예배시에 이런 내용을 설교하는 것은 설교일 수가 없다.그러므로 설교는 종교적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종교적 진리란 말을 쓸때현세와 내 세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셋째로, 이 세상에는 기독교 외에도 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종교들의 내용은 기독교의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니고그와는 반대된다. 세상의 일반 종교는 모두가 자연 종교이며 자율주의적 종교에 불과 하기에 계시종교이며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종교적 진리라고 해서 다 설교라 할 수 없다.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생명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여야 한다.그런데 여기서 기초를 둔다라는 의미는 설교 할 때 매 구절 마다 성경구절을 인용한다는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같은 제목 아래 유사한 성경 구절을 나열한다고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기초를 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성경 본문에 충실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물런 종교적 진리이다. 그러나 어떤 구절의 핵심이 무었인지 분명히 모른채 다만 그 본문에 나타난 현상만 가지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설교 일 수가 없다. 예컨대 마3:16절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란 한 구절을 인용하여 비둘기의 특징과 성격, 모양세로부터 여러가지 교훈을 허다고 하자 . 물런 종교적으로 좋은 강연은 될 수있을지 몰라도 이런 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다.

 네째, 설교의 목적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전해야 한다.
 설교는 구원과 양육이 포함되어야 한다. 설교는 불신자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천국백성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훈련 시키며 성화 과정으로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그 설교가 얼마나 훌륭한 웅변인가를 보여주는 기회가 아니다. 연극장에서와 같이 반시간 정도 연극을 하는 것도 아니다 . 참된 설교자는 파선된 배를 보고 그들을 건져내려는 결사적인 노력과 열심을 갗지 않으면 않된다 . 사람들은 겉 모양으로 보아서는 모두가 신사숙녀이지만 저들의 마음 가운데는 온갖 이기심 탐욕, 증오심,죄악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침체되어 있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마
다 청중들에게 그 설교가 마지막 설교이며 최후의 설교로 알고 증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일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지금 죽어가는 자에게 최후의 설교를 한다는 심정으로 열과 정성을 다드려 설교에 임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심령을 움직이는 설를 원하고 있다. 설교의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이것은 생명을 내걸고 해야할 사역이다.

 다섯째,설교는 감동을 받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감동하도록 하지 않는 설교는 설교라고 할 수 없다.설교를 든고 심령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 되어야 한다. 설교는 든는 사람들의 의지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믿음 깊은 회개 , 진리에 대한 확신,경건한 생활에 대한 새로운 결심이 일어나도록하지 않으면 않된다.설교는 교육과는 다르다.설교는 지식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그 영혼을 움직이고, 의지를 움직이고 , 인격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여섯째, 설교는 방법론도 중요하다.
 설교는 은혜받은데로 말하고 싶은 데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설교는 노방전도나 개인 전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물런 개인적으로 전도하면서 성경을 풀어서 가르칠 수도 있고, 형식이 없이 어디든지 노방에서도 설교는 가능하다. 그러나 설교는 예배에 있어서 중심부로서, 예배순서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 이유는 개혁교회의 예배의 중심은 설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교는 설교법에 따라야 하며 수사학적으로 꾸며지고 조직된 것이어야 한다.
 
 일곱째, 설교는 강화의 형식을 띤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중에는 글도 중요하나 역시 구두로 하는 말이 중요하다 .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뜻을 전하는데 는 눈, 손, 동작,등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래도 입으로 하는 말이 가장 효과적이다. 저술가나 화가는 눈으로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화초 장사나 향로 장사는 후각을 만족케 한다.
곽안련 박사의, 말 같이 설교자는 사람들 앞에서 손짓 얼굴 표정, 몸짓으로 사람들의 눈을 이용하여 그들의 마음 속에 진리를 넣어주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그의 말로서 그들의 귀를 두두려 더욱 강하게 그들의 영혼에 호소한다.

이것들 보다 더 힘있고 유효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인격이다 라고 하였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인격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큰 힘이 된다. 이 세상에서는 인격의 힘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설교자는 그의 인격으로 사람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우리가 어떤 설교자의  감동적 설교를 속기로해두었다가 나중에 읽었다 하자. 그 때 너무나도 평범한 설교가 어떻게 커다란 충격과 감격을 주었는지 이상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인격을 빼버리고 설교 원고만 읽는 다면 별로 감동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직접예배에 참석하고설교자의 온 몸으로의 설교를 보고 듣는다면 그 말씀 앞에 녹아지 된다. 그리고 같은 원고라도 누가 설교 하는가에 따라서 그 반응도 무척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모두가 설교자의 인격과 관련된다. 설교는 단순
히 말이 아니고 인격에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효과적이며 능력있는 말씀이 된다.

우리는 위에서 설교란 무엇인가 라는 항목에서 여러가지 설교의 정의를 내리는 중 헬릭 존슨의 정의가 적절하다고 생각되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위와같은 해설을 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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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설교학 정성구(총신대학출판부) PP193-197
 
 

 제 2 장
설 교 의  유 형

 1.설교형식(본문취급)에 따른 분류

 1)제목설교
 설교형식 자체가 연역적이다. 다루고자 하는 제목과 문제를 내걸고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여기 저기서 뽑아 그 제목을 증명. 지원하고 그 제목에 대한 설교자 자신의 결론적 요점을 전개시켜 나가는 설교이다 무조건 제목설교를 정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강해설교를 선호하고 주장하지만, 목회자로서 목회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제목설교가 필요한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고 강해설교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조건 그 사람을 축복하시고 제목설교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제목설교자 중에 널리 알려진 훌륭한 설교자들이 많이 있다. 좀 자유주의적 색체가 있기는 하지만 에머슨 포스틱 같은  침례교 설교자가 이에 해당하고 빌리 그래함 목사도 역시 제목설교자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설교는 성경 그 자체의 말씀보다도 설교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의도에서부터 설교가 출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제목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훌륭하게 인도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의 전제가 인간적일 수 있고 위험하다는 것이 약점이다. 트리니티 신학교의 월터 카이져 교수는 심지어 5년에 한번씩 할수 있다면 제목설교를 시도하십시요.시도한 다음에 즉각적으로 회개하십시오.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제목설교가 가진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참고) 주제설교와 제목설교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실제로는 구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주제라는 뜻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것을 뜻한다면 제목이라함은 보다 구체적이고 세분한화한 내용의 특징을 전제한다.

 2)본문설교
 본문설교자들은 대체로 본문을 짧게 정한다. 본문설교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유명한 스퍼젼이다. 든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설교가 길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 본문 설교는 성경의 한두 구절을 본문으로 정하는 설교이다
주제와 대지가 본문에서 나오는 설교를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본문 설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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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청중을 깨우는 강해설교 이동원(요단출판사) P97-103
 
고 불러왔다. 본문설교의 위;험성은 본문을 짧게 잡기 때문에 문맥을 무시기 쉽다는 것이다. 본문 자체의 진정한 의미를 끌어내기 보다는 의미를 강요할 가능성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스퍼전의 ,유명한 설교에도가끔 문맥을 무시한 채 지나치고 그릇된 적용들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3)강해설교
 필자가 강해설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동기는 처음으로 미국 유학을 갔을 때였다 하이킹이라는 설교학 담당 교수가  설교를 한편씩  써오라고 해서 써가지고 갔는데 ,사랑에 대한 주제의 설교였는데 F를 주었다 필자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낙제를 주었냐고 따졌다. 교수는 당신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제목을 정했을 때 당신에게는 사랑이 무엇인가 라는 선입견적인 사고가 있었다 그것이 네 설교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지적을 받았다.

다시쓸것을 요구하면서 본문을 선택하라. 본문을 들어보라 . 본문을 분석하라. 그다음에 본문을 발전시키라 그리고 설교를 써보라. 본문에 근거해서 본이 무었을 말하고 있는가 ?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었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 에 관심을 가지라고 충고했다.

 루니아(Klaas  Runia)박사는 "말하기를 기독교적인 설교가 되려면 성경적인 설교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설교 방법은 어떤 것인가? 대다수  설교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강해설교가 가장 성경적인 설교라고 인정하고 있다.

 톰슨(D.Thomson)은 말하기를 "나는 전부터 성경적 설교의 바탕으로서 강해설교를 주장해 왔다"고 하였다.또 성경주석가요 설교가인 메이어((F.B Meyer)는  그의 학생들에게 언제나 사용될 수 있는 설교 방법은 오직 강해식 설교법" 이라고 썼다.또 강해설교 연구가로 알려진 로빈슨은 말하기를 "신적인 권위의 능력을 가장 온전하게 전달하는 설교가 바로 성경 강해설교이다 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가장 성경적인 설교는 강해설교라는 결론을 얻는다.

 A .강해설교의 명칭문제
 강해설교란 영어의 Expository  Preching 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그런데 이 말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주해(註解) 설교 또는 주경(註經) 설교 해석설교 성경설교 등으로 매우 다양하게 불리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해나 주석은 해석하는 작업이요 강해라고 할때는 설명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강해는 단순히 글자 풀이나 언급을 하기 보다는 알아 듣기 쉽게 말한다는 의미가 된.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주석이나 주해설교라는 말보다 강해설교란 명칭이 설교의 성격으로 보아 잘 어울리는  말이 된다고 본

 B.강해설교의 정의
  a)메이어의 정의
  강해설교란 그 속의 비밀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정신이 설교자의 설교자의 심령속에 들어 오기까지 설교자의 머리와 마음과 두뇌와 근육을 총동원하여 이에 대하여 생각하고 , 울고 그리고 기도한 성경 중의 어느 한 책이나 또는 보다 확장된 부분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취급하는 방법이다 라고 했다.

  b)로빈슨의 정의 
 미국 보수 침례신학교 학장인 그는 "강해설교란 , 성경 본문의 배경과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으로 연구하여 발견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하여 다시 청중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

 c)데니스 레인(Denis J.V.Lane)의 정의
  데니스 레인 목사는O M F 의 본부에서 상담역을 하고 있는 분으로 한국교회에 강해설교에 대한 많은 도전을 주신 분이다. 그는 말하기를"강해설교란 성경의 특정귀절의 뜻을 회중의 필요한 환경에 맡추어 설명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깨닫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고 할것이다. 2)

 C .강해설교의 목적
 강해설교를 하는 설교자들은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기대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a)성경의 숨은 진리를 재발견 하게 한다
 b)기독교 지식의 성장에 목적이 있다.
 c)성경의 실제적 활용의 목적
 d)바른 영적 성장에 목적이 있다.  3)

2.설교내용에 따른 분류
 1)인물설교
 인물설교도 강해서 설교식으로 할 수도 있고 제목설교 식으로 할 수도 있다
. 취급하는 본문에 따라 어떤 인물은 맥락을 가지고 강해식으로 접근할 수있고 한두번 등장하는 인물이나 그 인물이 성경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우라면 제목설교적 접근을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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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데니스 레인 강해설교 자료모음집 (두란노서원)P29
3)설교학 정성구 (총신대학출판부) p258-

 2)교리설교
 이것은 거의 제목설교의 형태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교리 자체가 연역적인 것이고 그 교리를 변증하기 위해서 여러 구절들을 인용해야 하기 때문에 제목설교가 될 것이다.

 3)윤리설교
취급하는 방법에 따라 제목설교도 될 수 있고 강해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윤리설교는 쟁점을 다루고 있으므로 제목설교적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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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청중을 깨우는 강해설교pp99-101



  제 3 장 
 설교(說敎)의 중요성과 그 역사(歷史)

 그리스도의 교회는 설교에서 시작했다 오순절의 베드로의 설교에서 교회는 땅위에 탄생했다.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1.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밍 교부들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기독교의 첫번째 설교자였다. 확실이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이러한 말들로써 요약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의 예언의 성취로서 주의 성령이 자유케하는 그의 멧시지를 전파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기름부의셨씀을 주장하셨다 .예수께서는 설교자와 교사로서의 강한 사명의식을 느끼셨으며 이에 대한 요한의 증거도 이와 비슷했다(요13:13,18:20,37)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사도들이 설교사역에 우선권을 두었던 사실은 특별이 사도행전 6장에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4절)에 전념하기 위하여 다른 형태의 봉사에 빠져들려는 유혹을 물리쳤다 .본래 예수꼐서 그들을 부르셨던 것은 바로 이일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생에 기간동안에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마10:5-7)에게 설교하도록 그들을 보내 셨으나 부활 후에는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그들에게 엄숙히 위임하셨다 (마28:19) 그들은 나가 두루 전파하였다(막16:20)

그들은 성령의 능력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또는 고통과 영광의 기쁜소식을 선포하였다(벧전1:12)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로 베드로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4:31)그밖의 예루살렘에 다른 사도들, 그리고 세번의 선교 여행에서 누가의 존경을 받았던 바울이 그리하였다. 바울은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며 주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행28:31)바울은 인생 말년에 그의 젊은 부관 디모데에게 그의 임무를 넘겨주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던지 못얻던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권하라(딤후4: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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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풍만) pp22-23
  (제9회 연신목회세미나 강의집)p408)  
  
 속사도교부들의 작품중의 하나인 디다케(The Didache)는 기록하기를 "나의 자녀들아 너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밤낮으로 기억하라. 너는 그를 주와 같이 존경하라"(디다케3:8, 4:1)고 했다.

순교자 저스틴의 첫번째 변증은 기독교를 변호하며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진리의 체현이시며, 인류의 구주이시기 때문에 기독교는 참되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주일마다 드리는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대하여 설멸하였다 그의 글중 성경 읽기와 성경 본문 설교에 대한 강조점과 말씀과 성례전의 결함에 대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주일이라고 하는 날은 도시나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사도들의 언행록이나 선지자들의 글을 읽는다. 그 다음에 낭독자가 읽기를 멈추면 그 모임의 지도자가 말로써 가르치며, 이 선한 교훈을 따라 살도록 권면한다. 그 다음에는 모두 함꼐 일어나 서 기도한다

. 그리고 그 앞에서 이야기 한대로 기도가 끝나면 빵과 포도주와 물이 나누어진다
 2세기말경의 라틴 교부 터툴리안은 그의 변증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글들을 읽기 위하여 모인다---그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살찌우고 우리의 소망을 고무시키며 우리의 확신을 더욱 견고 하게 한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훈들을 반복적으로 배움으로써 우리는 좋은 습관들을 굳힌다. 또한 동일한 곳에서  권면들이 행해지고 꾸지람과 거룩한 책망들이 베풀어진다(39)
 희랍 교부 이래니우스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고수해야 하는 장로들의 책임을 강조 하였다.
 이들은 또한 우리를 위해 그처럼 놀라운 섭리를 성취하신 ,한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이 신앙을 보존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족장들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선지자들을 경멸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성경을 상세히 설명해 준다 4세기초 가이샤라의 감독이었으며 교회사의 아버지인 유세비우스는  기원후 2백년을 설교자들과 교사들의 활동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은 집을 떠나 여행하면서 아직까지 전혀 신앙의 말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그들에게 거룩한 복음서를 주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복음전도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받아 다른 나라와 민족들에게로 떠나곤 하였다

 후기 교부시대에 가장 뛰어난 설교자는 안디옥에서 12년간 설교하다가  398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된 크리소스톰이었다. 그의 설교의 주요한 네가지 특성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성경적이다. 그는 여러권의 책들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설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 성경의 인용과 암시들로 가득하였다 두번쩌로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단순하고 솔직하다.

그는 문자해석을  주장하는 안디옥 학파를 따랐는데 , 이 학파는 우화적 해석을 하는 공상적인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대조되는 학파이다 세째로 그의 도덕적 적용들은 현실적이다 네째로 그는 죄를 선고함에 있어서 두려움이 없었다 사실 그는 강단의 순교자였다. 왜냐하면 그를 추방하도록 만든것은 주로 그의 충실한 설교였기 때문이다 2)

2.수사들과 개혁자들
 설교의 시대는 수사들이 나타나면서부터 그 연대가 추정된다.....우리가 알고 있는데로 강단의 역사는 설교하는 수사들과 함께 시작된다 . 그들은 설교에 대한 증가는 대중들의 요구를 자극하며 충족시켰다. 그들은 설교 기술의 혁명을 일으켰으며 그들의 직무를 확대시켰다. 아시아의 프란시스는 마치 가난에 관해서 설교하기를 위탁받은 사람과 같았다 그와 동시대 인물인 도미니크는 설교를 더 크게 강조 하였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한 프란시스회 수사들과 도미닉회 수사들의 놀라운 주장으로부터 종교개혁의 위대한 선구자인 존 위클리프에 이르기까지는 그렇게 긴 세월은 아니었다 그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에 있어 최고의 권위라고 선포했다. 그는 부지런하고 성경적인 설교자였으며, 성경으로부터 교황권, 면죄부,화체설과 교회의 부를 공격하였다 그는 목사의 가장 주요한 사명이 설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상에서 획득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봉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이다 이 봉사는 특별히 성직자들에게 부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일을 더욱 철저하게 요구하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른 일들을 놓아 두시고 주로 설교 하는 일에 전념하셨으며 그의 사도들도 그와같이 하였다

 종교개혁은 설교에 구심성을 부여하였다. 강단이 제단보다 눠아졌다. 이는 루터의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다.구원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말씀없는 성체용 빵과 포도주는 성례전적 특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 하나님의 약속들이 교회를 만드는 것이지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그 외의 모든것은 없어도 그 영혼은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말씀이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기 때문이다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 필요성은 바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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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풍만)p26

사실로 부터 유래한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확립한 것은 정치적 술책이나 무력의 힘이 아니라  바로 이 거룩한 말씀에 대한 설교였다 . 루터는 후에 이 사실을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말씀이 모든 것을 해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그의 기독교 강요를 썼을 때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눠였다 . 특별히 그는 참된 교회의 제일 중요한 표징은 말씀에대한 충실한 설교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기록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순전하게 설교되어지고 들려지며, 성례전이 그리스도의 제정하심에 따라 집행되는 곳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 곳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 고하였다 사실 말씀과 성례전에대한 이 사역, 즉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복음의 선포는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하는 영원한 표로 생각해야  한다.

 영국의 종교 개혁자들은 칼빈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성례전은 말씀으로 부터 그 효력이 나타나며 말씀없이는 효력을 상실한다는 것과 , 말씀과 성례전은 교회의 필요 불가결한 표징들이라는 것,그리고 성직은 본질적으로 말씀의 사역이라는 그의 가르침을 그들은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 19개 조항은 그리스도의 보이는 교회는 그안에서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고, 성례전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의식에 따라 정당하게 집행되는 신앙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라고 공언하였다.

 이 거룩한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떤 개혁자도 영국 종교 개혁의 대중설교자인 휴 래티머 보다 더 진하게 행한 개혁자는 없다. 그는 고위 성직자가 되지 않았으며 그의 평범하고 소박한 특성을 결코잃지 않았으며 그는 마음으로 부터 말하였으며 그의 말들은 사람들의 마음에가 닿았다 래티머의 유명한 연설은 경작의 설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연설은 그가 런던탑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직후인 1548년 1월 18일에 성 바울 대성당에서 행해졌다 그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밭에 심어지기 위하여 뿌려진다는 것과 설교자는 씨뿌리는 자 라는 것이다. 그는 그 설교를 전개시켜 가면서 레스터셔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땅에서 농사지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하였다 설교자는 일년내내 애써야 하는 농부와 같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들이 쓸데없는 사업과 오락에 참견하는 일로 그들의 시간을 낭비한다는 사실을 슬퍼하였다.

 강력한 종교개혁의 위대한 결과들과 업적들은 주로 설교자들의 설교의 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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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 (풍만) pp31-32
 
이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최상의 그리고 최대의 지속적인 활동이  행해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랑하고 가르친 열심있는 사람들의 사역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종교 개혁과 설교와의 관계는 상호의존,상호보조,상호 지도의 관계로 기술될 수 있다.3)

3.청교도들과 복음주의자들
 초기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서 설교에 주어진 강조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청교도들에 의해서 계속 이어졌다.
 청교도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그들이 다른 어떤 존재들이기 전에 설교자들이며 또한 그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들을 다른 설교자들과 구별하여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단합하고 투쟁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이 복음을 설교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의식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 는 것이 그들의  영감이며 의로움이었다

 17세기의 청교도들 가운데 참목자상의 저자인 리차드 박스터는 청교도 전통과 그 자신의 책이 보여주고 있는 전형들을 그대로 따른것으로서 유명하다.
한마디로 우리는 할수 있는 한 많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가르쳐야 한다. 참으로 이 두가지야말로 목회자가 가져야 하는것이 아닌가! 그 얼마나 위대하고 탁월하며 놀랍고 신비로운 일인가!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며 학생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학교이며 우리는 그의 안내인들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문법책이다 우리가 매일 그들을 가르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라고 그는 썼다

 대서양저편에서 미국의 청교도인인 커튼 마더는 보스턴에서 양쪽 대양 해변에 그 영향력을 미치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과 설교자라는 그의 책 속에서 목회자 후보생을 위한 지침서 라는 것을 마련하였다.그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기독교 사역자의 직무는 세상에 있는 누구라도 승인할 수 있는 가장 명예롭고 중요한 일이다. 어째서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이 이 직무를 불완전하고 죄지은 인간에게 맡기셨는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사의한 일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설교자의 직무에 대한  위대한 계획과 목적은 사람들의 영혼속에 하나님의 왕권과 통치를 회복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의 놀라운 완전하심과 그의 임무와 은혜를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며, 가장 명백한 언어로 선포하는 일이며, 또한 사람들의 영혼을 그리스도와 영원한 교제 속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다 . ...이것은 그에게 영광이 되는 것으로서 천사가 흠모할 만한 일이다
  
  죠지아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존 웨슬리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가졌다 그의 경험속에서 그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 만을 의지 하였다 그의  죄들이 사라졌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그를 죄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느 즉시 그가 받은 자유케하는 구원을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와 교회 마당에서 마을 잔디 받에서 들과 야외 극장에서 그는 복음을 선포하였고 그의 설교를 들으러 모인 수많은 군중들에게 그리스도를 권하였다 1757년 8월 28일자 그의 잡지에서 그는 사실 난는 설교때문에 산다 고 말하였다 그의 교과서는 언제나 성경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며 독자들에게 구원을 깨우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

 죠지 휫필드는 분명코 더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그는 영국과 미국을 돌아다니며 34년동안 일주일에 평균20번 가량의 설교를 하였다 능변에다가 열심있고 교리적이며 열정적인 그는 생생한 은유들과 평범한 예화들, 극적인 제스처로써 그의 설교에 생기를 더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의 권위를 철저하게 확신하였으며 그의 메시지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4)

4. 19세기
 챨스 시므온 은 캠브리지 대학부 시절에 개심하였다. 그때 그는 거기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열망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1782년에 그의  그 교회의 교구 목사가 되었다. 그는 54년 동안 홀리트리니티 교회의 강단을 지켰으며 성경을 조직적으로 가르쳤다 설교에 대한 시므온의 고귀한 식별은 목회자를 대사로 생각한는 개념으로부터 나왔다.

 목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사이며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말하는 자이다.그가 성경에 근거한 것을 설교한다면 그의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자의 말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19세기 전반에 있어서 성경에 대한 고등 비평의 공격들과 찰스 다윈의 진화론 에도불구하고 강단은 영국에서 그 명성을 지켰다. 사람들은 그 당시의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으려 몰려들었고 인쇄된 그의 설교를 열심히 읽었다. 그 설교자들중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교회의 존 헨리 뉴멘, 성 바울 대성당의 케논 리든 브리튼의 로버트슨 그리고 모든 설교자들 중에서 가장 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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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 (풍만)p35-9
 
어난 런던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태버나클의 스펄젼이었다.

 1812년에 신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첫번째 교수직을 맏았던 아키볼드 알렉산더의 아들인 제임스 알렉산더는 설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 가운데 설교의 중요성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염려한다. 오늘의 젊은 사람들은 설교에 임할 때 대 전투를 하루 앞둔 자의 각오로 임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열정의 원천을 찾아 인간 감정의 대양의 깊은곳까지 충격을 주어야 하는 사람으로서 설교 준비를 하지 않는다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방법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개혁자들은 위대한 설교자들이었다

 후에 알렉산더는 설교를 단지 다른 사람들의 삶에 여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설교자 자신을 위한 참된 성취라고 주장하였다. 설교에는 기쁨이 있다 . 설교든는 사람에게 지루한 만큼 설교자 자신에게도 지루하게 행해질 수 있다. 그러나 설교가 훌륭하게 행해질 때 그 설교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귀한 감동을 일으킨다. 그러한 설교에는 기쁨이 있다.

 설교의 이러한 능력과 기쁨 때문에 금세기에 이르러 에딘버러의 알렉산더화이트가 낙담해 있는 한 감리교 목사에게 설교 포기할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서 있는 천사들이 당신의 그 위대한 일 때문에 당신을 부러워 하고 있오! 라고 충고할 수 있었음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말은 1908년에 있었던 일이다. 또한 1907년에는 회중교회 신학자 포사이드의 저서 긍정적인 설교와 현대 지성이 출판되었다 그 책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모한 시작일지 모르나, 나는 감히 기독교는 설교와 함께 흥하거나 설교와 함께 망한다고 생각한다.5)

5.20세기
 금세기는 행복감에 도취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전반적으로 낙관적인 분위기에 동조하였다.
 20세기 초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실베스타 혼 목사는 1914년 예일대학에서 설교의 로멘스 라는 제목으로 설교에 대한 비쳐 강좌를 인도하였다 혼은 회중교회의 목사이며 영국의 하원이었다. 그는 하원에서는 능변가로, 설교에있어서는 열정가로 평판이 눠았다 정치가이자 설교자이엇던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어느 것이 더 영향력 있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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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 (풍만)pp40-1
 
 하나하나님의 사자인 설교자는 사회의 참된 스승이다. 즉 통치자가 되도록 집단에의하여 뽑힌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이상을 형성하기 위해, 그 이상을 통해서 사회 생활을 인도하고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뽑힌 사회의 스승이다.

 역사의 진정한 로맨스는 이러한 설교자들의 로맨스다 . 이 사람은 무력의 충돌과 어리석은 힘의 각축들 속에서 오직 진리라는 이름의 칼과 의의 갑옷과 평화의 영을 구하면서 평온하게 서있다. 이 사람은 세상이 정복할 수 없고 저항할 수 도 없는 영웅이다 . 세상의 가장 영속적인 승리는 모두 그의 것이다. 회중교회 목사로서 , 설교를 정치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생각했던 또 한 사람은 조운즈 박사였다 그는 거의 40년 간을 본머드에 있는 리치몬드 힐 회중교회 목사로 있었다. 한 정당의 지도자로부터 의회의 후보자로 출마하도록 권고 받았을 때 그는 그 권고를 사양하면서 그 이유로서 산발랏과 도비야에게 보낸 느헤미야의 답변을 인용했다.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느6:3) 조운즈 박사는 두마디를 강조하며 선언했다. 나는 의회가 인간의 조건을 좀더 개선 시키기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무시하지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상처를 궁극적으로 치료 할 수 있는것은 입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이다그러므로 구속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부름 받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이다

 금세기 초에 유행했던 낙관주의는 먼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그 다음에는 참호속의 진흙과 피의 참사로 산산이 부서졌다 실로 전쟁을 경험한 후 이전의 자유로운 낙관주의를 버리고 인류에 대한 새로운 현실주의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신앙을 표명했던 칼바르트와 같은 지각있는 신학자들은 , 설교가 이전보다 더욱 심각한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그들의 확신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것보다 현실 상황에 더적절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긴박하며 더 유용하며, 더 구속적이고, 더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아주 자명한 이치이다

 또 다른 예는 에딘버러의 제임스 블렉의 경우이다. 그는 1923년 스코틀랜드에서의 워랙 강좌와 미국의 프린스톤 강좌에서 학생들에게 그들의 설교 사역을 진지하게 수행하라는 고무적인 충고를 하였다. 우리의 봉사는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모든 재능을 바칠 만한 것이다......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일찍부터 여러분의 설교 사역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아 주기를 부탁한다. 우리의 일은 필요한 모든 준비와 그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재능을 모두 사용해야 할 만큼 중대한 일이다. 여러분의 일은 영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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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 (풍만)pp45-7

을 보살피고 기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 일에 여러분 자신의 값진 삶의 열심과 열정을 쏜으라. 6)

 비록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 속에서의 세속화 과정이 가속화 되었다 할지라도 그 2차대전 조차도 설교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못했다 웨스트민스터 샌드럴홀의 월 생스터는 18세때 감리교 지방 설교자가 도었고 1950년에는 영국 감리교 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잘알려진 저서인 설교의 기술에서 그는 설교자의 임무와 특권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설교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다! 위대하신 왕의 사자!영원한 복음의 증인 ! 다른 어떤일이 그보다 더눠고 더 거룩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사람이 전념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거룩한 활동이다 그러므로 그 일은 어쩌면 천사들조차 부러워서 그 일을 하고자 하늘의 궁정을 버릴만한 일인 것이다.

 앤드류 블랙우드도 그와 비슷하게 설교는 지상에서 가장 고상한 일로서 그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논평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1960년대, 1970년대 그리고 80년대에 이르게된다. 불행이도 설교의 조수는 점점 쇠하였고 그 간조는 여전히 오늘날도 낮은채로 있다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의 설교의 쇠퇴는 교회 쇠퇴의 징후이다. 회의론의 시대적인 분위기는 확신있는 선포의 회복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설교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단언하며 설교의 부활을 요구하는 소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켄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도날드 코건보다 더 영국교회에서의 설교의 회복에 자극을 준 사람은 없다. 설교자 대학이 영국에서 세워진 것은 주로 그의 발의에 의해서였다. 설교에대한 자신의 첫번째 저서인 은혜의 청지기들에서 그는 이러한 말로써 설교의 절대 필요성에 대한 그의 헌신을 표현하였다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의 기적이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죄 사이에서있는 설교자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준비와 인간의 필요 사이에 서 있는 자가 곧 설교자이다. 인간의  죄를 용서에,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의 전능에, 인간의 탐구를 하나님의 계시에 연결 시키는 것이 그의 과업이다

 자유 교회에서의 예는 1938년부터 1968년까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매우 영향력있는 목회를 해온 마틴 로이드 존즈 목사의 경우이다. 그는 주일날에 자신의 강단을 떠난일이 결코 없지만 그의 메시지는 지구의 가장 먼구석 구석까지 미쳤다. 그의 의학적인 훈련과 내과 의사로서의 초기 경험,성경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흔들릴 수 없는 신념, 그의 예리하고 분석적인 지성, 사람의 마음을 꿔뚫어 보는 그의 통찰력, 그리고 그의 열정적인 웨일즈인의 기질로 인하여 그는 50년대와 60년대의 영국의 가장 힘있는 설교자가 되었다 내게 있어서 설교의 사역은 이제까지 부름 받을 수 있었던 누구에게나 가장 귀하고 위대하며 가장 영광스런 소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감격스럽고 가장 흥분 시키며 가장 보람되고 가장 놀라운 일이다.

위에서 간략한 역사적개관을 해보았다. 이 고찰은 적어도 두 가지의 가치가 있다.

 첫째, 이 고찰은 설교의 위대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기독교 전통들이 얼마나 길고 폭 넓은가를 증명해 준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부터 시작해서 초기의 교부들과,동방에서의 크리소스톰, 서방에서의 어거스틴과 같은 니케아 종교개혁 이후의 위대한 신학자 설교자들로 이어졌으며, 이어서 중세의 프란시스회와 도미닉회 설교 수사들, 종교 개혁자들과 청교도들, 웨슬리와 휫필드를 지나 19세기와 20세기의 현대 목사들에 이르는그 역사는 거의 2000년에 걸친다.

둘째,이 길고 폭넓은 전통은 한결같이 일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물런 여기에는 생략되었지만 설교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심지어 설교를 모독하기까지 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2000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그리스도인의 설교의 중요성을 증대하자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동일한 논증과 어휘로 호소하자는 것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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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제9회연신원목회자세미나 강의집 p421-


 
  제 4 장 
  한국교회 설교의 역사적 고찰

 미국의 설교 역사학자 다간은 교회사란 바로 설교의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성장하고참으로 교회다운 자기 못,습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정확히 증거될 때라는 말입니다 . 그러므로 설교의 흥망과 교회의 흠망성쇠가 항상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실 세계교회의 역사를 보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뜨겁게 확신있게 증거될 때는 교회가 힘 있는 교회요, 능력있는 교회가 되지만 교회가 쇠퇴할 때는 반듯이 강단의 쇠퇴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한번 생각해 보면서 한국교회가 성장하고 축복받은 배후에는 비판의 여지도 많겠지만 한국교회의 지난날에 우리의 선배들이 눈물과 땀과 피를 바친 흔적과 자국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볼 만 합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선교 1백주년을 보내고 새로운 세기를 몇 발자국 앞으로 내딛고있습니다. 지난 한 세기동안 한국 교회의 설교 모습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 설교가 민족의 가슴에 어떻게 뿌리 내렸는가를 물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수 없다.

1. 선교 초기의 선교사들의 설교 유형
 첫째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의 설교 방법에 대해 살펴보면  한국선교의 초기에 왔던 선교사들은 대체 무었을 어떻게 설교를 했는가. 또 그들의 멧시지는 한국 백성에게 어떻게 전달이 될 수 있엇는가. 사실은 별로 기록이 없어서 잘 알 수 는없다다만 선교사들이 설교하기 시작한 것은 1884년 알렌이 들어와서부터 차차 믿는 이가 더해가고  적어도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20년 동안으로 그때를 선교사 주도형의 시대라고합니다. 설교도 그랬고 교회정치도 신학교 모든것이 선교사 위주로 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를 구체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교회사의 여러 기록을 보면 선교사들의 설교 내용은 단순하고 복음적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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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교개발 (쿰란출판사) p212-4


1) 선교사 설교의 문제점 
 이땅에 처음 복음을 가져온 선교사들은 목회 경험이 없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설교 훈련이 안된 20대에 들어 왔다. 왜냐하면 1880년대 전후 그러니까 19세기 미국의 한 풍조가 있었는데 제일 우수한 사람과 제일 열정이 있는 사람이 선교사로 가고 나머지가 국내에 남았습니다.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목회 경험이 없는 분들이 많히 들어온것은 사실 입니다. 그래서 20대의 젊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와 실제 경험이 부족하고 미숫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열정은 있었습니다. 그런 선교사들이 한국말을 배워서 띄엄띄엄하는 설교 내용은 1900년대 전후해서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제목설교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첫번째 지적이이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이 처음 가르칠때 제목 설교를 하는 방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한국교회 100년사 가움대제목 설교가 통념화 되어버렸습니다. 아예 설교는 본래부터 그렇게 하는 것인가 생각할 정도로 미국 선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미국에서는 1940년대를 전후해서 강해 설교 또는 본문 설교로 전환 됩니다.
잘 아시는 대로 C.H다드같은 사람은 유명한 양식사 학자 입니다야식사 학파의 대표격인 다드가 설교의; 케리그마 문제를 이야기한 이후에 많은 신학계에 돌을 던지면서 설교라는 것은 본문을 읽고 눈감고 은혜받는 것이 아니라 반듯이 그 본문 가운데 케리그마가 무었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암시했습니다. 물런 다드의 신학 이론은 받지 않지만 그것이 상당히 자극제가 된것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강단에 신학을 다시 찾는 한편 1935년대 화란에는 소위 구속사적인 설교 연구가 대두되어 스킬도와 칼바르트 이론이 서로 투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목 설교의 방법은 아무래도 초기선교에 있어서 대단한 몫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목 설교의 방법이 한국에 전통적인 것이었는데 이제 우유병만 들고 먹던 시대를 지나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깊은 일을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접근하고 그것을 강해 하면서 설교할 줄 아는 것도 이제는 개발하고 발전 시켜야할것입니다. 어째던 제목 설교의 방법이 한국교회 강단에 그대로 이식되었고 교회 강단에결정적인 전통으로 굳어 졌습니다뿐만 아니라 제목 설교의 영향은 주로 많은 예화를 필요로 했으니 처음 부터 설교의 한 방법으로 예화를 많이 모의고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평양 장로교 신학교에서 첫 신학지남의 첫번째 난에 바로 그 예화를 모아서 제시하는 대목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설교에 있어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접근 방법으로서 예화의 사용은 선교 초기에 접촉점을 얻기 위한 것으로 공헌을 한 셈이다. 저는 이것도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면서도 유치한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이런 경향은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설교에 있어서 해석학적인 이해나 성경 신학에 대한 이해는 없고 다만  단편적인 진리를 예로 들어서 현상적이고 경험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것을 가리켜 요새는 예증적인 설교 모형적인 설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 설교를 하는 사람 모두 이 예증적인 설교를 하는데 성경에 있는 역사적 본문을 보면서 그 역사적 본문의 인물이나 성격이나 환경을 깊이 이해하여 오늘의 삶과 연결시키는 섦교, 이는 구속사적인 진리를 캐내는데 대단히 부족합니다 예를 들면 흔히 삭게오가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어깨 너머로 보려 했으나키가 작아서 않되니 염치 불구하고 뽕나무에 엉금엉금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 기어올라간 삭게오의 신앙이 너무 좋아서 그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은 삭게오에게 총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촛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화 설교와 구속사 적인 설교와 다른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설교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삭게오에게 총점이 있는것이 아니라 삭게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총점을 맞춥니다. 삭게오야 내려오너라. 오늘 너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말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 가운데 나타난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말씀 하시는 그 메시야시라는 것을 힘차게 증거하는 그런 안목에서 접근하는 방법을 구속사적설교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한국교회에 지금까지 내려온 제목 설교의 방법은 예증적인 설교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다윗을 설교할 때 성경은 다윗의 인간됨과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다윗을 다윗되게 하신 하나님을 설교에서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을 구속사적 설교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은 위대했습니다 하고 설교하다가 아브라함 링컨도 나오고 죠지 워싱턴 이야기도 나오고 하여 구속사와 세속사를 구별짓지 못하고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구속사적 설교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그러한 신앙을 갖도록 하신 하나님을 힘있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런류의 제목 설교의 경향이 100년동안 한국 교회에 변하지 않고 지켜 왔는데 미국에는 이미 1930년대 후반에 제목 설교의 방법에서 본문설교 또는 강해설교의 방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한국교회 100년 동안 전혀 설교 신학에 대한 토의가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10년 전까지는 설교학에 대한 책은 두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장로교에서 1925년에 나온 곽안련 목사님의 강도학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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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설교개발 (쿰란출판사)pp218-20

설교학으로 바꾸어 1세기 동안 써먹었습니다.

그 다음 1926년에 감리교에서 나온 교중에 대한 직무 라는 책이 설교학인데 그 번역한 책을 1세기 동안 썹습니다. 그래서 10년전에 신학교를 졸업하신 목사님들이 배운 설교학은 본문설교는 이렇고 제목설교는 이렇고 설교는 이렇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2)

 2.초기 한국교회의 설교 내용
 이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시기는 국운이 기울어지고 온 민족이 소망을 잃고 방황하던 시기였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아직도 선교사 주도형의 교회로한국교회 목사들의 발언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기한국교회 사역자들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외쳤던 설교는 당시 대중들의 텅빈 마음을 채우는 충족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설교자도 결국 그 시대의 정황에 아래 있었기에 그 시대마다 독특한메시지가 나옵니다 . 그래서설교는 그 시대의 거울입니다.

 가령 장영자 사건이 터졌을 떠 학생들에게 여러 주보를 가져오라 했더니 그 다음날 주보는 그런 메시지가 많았습니다. 그런 불의를 책망하는 설교가 많았습니다설교는 바로 그 시대의 거울이라서 시대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의도적이듣 의도적이지 아니든 그것이 반듯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 있었을 때 목사님들의 메시지는 이 암울한 시대를 똘고 나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스리를 외치는 메시지가 꽉 차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일제시대의 암흑기의 설교(20년-45년대)
 1920년대에서 45년 사이의 메시지는 대개 출애굽기를 많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고 출애굽한 것을 우리 민족의 해방과 일치시킨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을 많이 설교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결국 어린양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므로 우리 민족도 반듯시 독립하고야 말것이다. 일제는 곧 망하고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는 소망을 제시했습니다. 이 민족은 설교자가 없었던들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암울한 시대에 그래도 목사님들이 생명의 메시지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신것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소망을 잃지 않도록 민족을 깨우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이 살아 있는 한 민족은 죽지않고 살아납니다. 어쨌든 설교학자들이 말하는 설교는 그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초기 선교사들의 설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언어 장벽으로 당시의 민족적 수남으로 말미암은 민족의 아품을 선교사의 서투른 설교로는 위로할 길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만집,김장호 목사님의 설교를 보면 선교사는 우리 가슴을 몰라요 . 선교사가 우리의 아픔을 어떻게 압니까? 코 큰 사람들이 우리의 아픔을 어떻게 압니까?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을 잘 모릅니다. 선교사들의 설교는 말은 됩니다 그렇지만 영과 영이 부딪치는 메시지가 안됩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예를들면 이가 꼬물꼬물하다는 것을 여기 작은 동물이 운동을 하오 합니다.
대충 감은 잡지만 우리의 가슴에시원한 감동이일어나는 메시지는 선교사들은 못합니다. 선교사들에게설교를 들을 때는 그냥 구경거리입니다. 그냥와서 대충 분위기를 알았지 정말 나라를 빼앗기고 남편을 빼앗기고 아내를 뺏긴 민족의 설움을 위로해 줄 수 잇는 메시지는 선교사들의 설교로는 안됩니다.

 침레교회 선교사로 와 계시던 팬위크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가 한국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자기는 한번도 해보지 못한 감화력을 가지고 차분히 설교할 때 전기가 통하는 것 같고 찬물을 끼얹는 것 같더랍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땀을 흘리고 설교하는데도 한국교회 성도들은 빙긋빙긋 웃고만 있더라는 것이 팬위크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입니다. 선교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 가르쳤으며 성경에 대한 광범위한 바른 지식과 정열이 있었지만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 전달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설교에 중요하게 논의되는 것이 전달의 문제입니다.

설교에 있어 전달은 아주 중요합니다. 문화적인 격차 피부색깔, 메시지의 생소함, 설득력을 동반하지 아니하는 복음전도가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감저의 통로를 뚫을 수가 없습니다. 팬위크는 눈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와 속죄의 사랑을 증거햇지만 한국 사람은 소리없이 웃고만 잇었고 말씀이 가슴을 파고 들지 못했다.선교사들의 설교와한국인의 설교에는 받는 쪽이 달랐습니다. 역시 한국인은 한국 설교자들로 말미암아 가슴에 닿는 메시지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3)

 4.초기 한국교회 설교의 특징
 첫째, 민족의 구원과 자각을 일깨우는 설교였다
 초기 교회의 설교자들은 이 민족의 가장 선두에 서서 대중들을 이끌어 가는 선각자의 역활을 감당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목사님들이 세계정세에 가장 밝은 정보통이엇다. 바로 목사님들이 미국 선교사들과 직통이기 때문입니다. 미국등 전세게에서 일어나는 모든 내용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

교회만이 가장 광범위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령 목포에서 일어난사건이 금방 서울로 전달됩니다. 교회는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의 신문보다 교회의 전달이 훨씬 빨랐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목사님들의 강단 설교는 이 민족에게 영적인 기갈을 채워주엇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각과 구원을 일깨우는 길잡이 역활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모든 사람들이 불교의 윤회적 역사관을 가지고있던 시절에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는 기독교 역사관인 직선적인 알파와 오메가의 역사를 들려 주었습니다그때 교역자들은 문자대로 망루에선 파수꾼처럼 두 눈을 번뜩이고 적정을 살피며 밤를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길선주 목사님의 설교인 평화의 빛이라는 것에서 볼 수 있는데 길선주 목사님의 설교는 완곡한 표현 있지만 일제의 치부를 공격하는 설교는 당시에 계엄령하에 있었던것과 같았기 때문에 전부 삭제도었습니다.

삭제된 부분이 사실은 제미 있는 부분입니다 일제의 치부를 강하게  공격하는 내용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영원한 하늘 나라를 말하면서도 사실적인 관심과 발등에 떨어진 불인 민족 구원을 힘있게 외쳤습니다.

 당시 성공회 부총무였던 허현 목사는 출애굽기 2,3장을 설교하면서도 조금색다른 말을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의 일생과출애굽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서 구출받게 될 것을 비유적으로 말했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 설교는 민족의 구원과 자각을 일깨우는 설교였습니다.

 둘째,민족의 갈길을 밝혀주는 설교였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이땅에 복음의 진리가  뿌려지고 교회가 세워질 무렵에는 변화의 와중이었습니다. 우선 봉건주의의 몰락과, 서양문명의 도입, 국권의 상실, 일제의탄압, 민족해방의 과제를 안고 잇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강단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선포뿐 아니라민중을 계몽하고 자주, 자유 독립을 고취하는가 하면 민족의 갈길을 제시하는 설교를 했습니다.교회의 지도자들이 사실상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또 이미 그 시대 자체가 목사님들에게 그것을 요청했다.

당시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에는 교회만이 민족의 소망이다 독립신문에는이 민족이 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게되면 이 나라가 세계에 빛나는 민족이 되리라 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삶의 영역에 전부 앞장서 있었기 때문에 신문을 다 주도했었습니다. 확실히 당시 교회 지도들은 시대를 앞지르는  사람들로 인식되었습니다. 당시의 설교자는 우리 민족이 개혁해 나갈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했습니다. 그 메시지는 예날에 자기 모습의 껍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것을 입혀야 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이 민족이 걸어가야 할 윤리는 소극적인 자기 방어가 아니고 적극적인 윤리를 가져야 할것을 호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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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설교개발 (쿰란) pp221-5

 셋째,새로운 윤리의 표준으로서 예수를 설교했다.

  우리의윤리의 표준이 어디냐 예수 그리스도가 윤리의 표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이조 500년의 유교의 아둔한 꿈에서 깨어날 것을 말했습니다.
오백년동안 유교의 형식적 윤리의 틀속에 있었던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확실히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국 초기의 설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고 해석했던 단순한 외침이 결국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었고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청교도적이고 보수적인 설교의 틀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5.고난받는 교회와 설교
 1) 설교의 두 게열
 1919년 3.1일운동 이후에 는 설교의 내용이 변하고 있습니다. 물런 그에 앞서 길선주 목사의 설교는 허탈과 좌절에 빠진 이 민족의 가슴에 용기와 능력과 확신을 안겨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벽에 부딪치자 당시회의 지도자들의 메시지는 다양한 모습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무디로 불리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의 설교에서 언제나 뜨겁게 외쳐졌습니다. 또한 천국에 갈자의 요건과 회개가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민족적 악습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메시지는 길선주 목사와 달리 내세적이고 피안적인 현실 도피를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조금 문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해합니다. 그때 당시 우리민족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지가 이분화됩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며영원한 하늘나라를  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보수신앙의 틀이 이 세상에 대해서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원론적 사색을 하는 이유가 과거 우리 민족이 40년 가까이 이런틀속에 살면서 굳어진것입니다.

 사실 우리 개혁교회 선교의 패턴은 복음의 치안성과 피안성이 동시적으로강조되어야 그것이 개혁 교회의 설교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해서 장차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뜨겁게 강조하면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말해야 우리는 말씀 전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 대하여 매섭게 말하면서도 장차 오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이 이른바 말씀 전부를 전하는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대표적인 설교가 길선주 목사라는 것입니다.

 김익두목사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이성봉 목사의 메시지도 잘나가다가 끝에가서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차라리 이 허무주의를 처음 도입에 넣고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피뭍은 복음을 뜨겁게 증거했으면 좋았을텐대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나중에는 세상 만사 살피니 참헛되구나 부귀 공명 장수인들 무엇하리요 하면서 그러니 알아서 해라 이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암울하고 소망이 없고 이 세상은 썩어질 세상 일본놈은 반듯이 망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자 이런 식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아의 패턴이 자꾸 탈 현세적이고 피안적인 것이 된 이유가 이런 설교의 패턴과 무관 하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설교의 메시지는 병들고 찌든 영혼을 위로하고 싸매기에 추분했습니다. 세상 나라는 소망이 없기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민족의 소망이었습니다.
실로 그가 외쳤던 민족 순수한 복음 운동은 한국교회의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고일제의 간악한 흉게가 노골화 되어감에 따라서 교회는 그 힘을 속으로 응고 시켜 갔습니다. 교회는 민족의 갈길을 밝혀 주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나라 사랑의 의식을 굳히는 터전이 되었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이념과 새로운 세게관을 제시해 주는 장소였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한참 이런 설교를 할때 김익두 목사님과 쌍벽을 이루는 분이유명한 김장호 목사님입니다. 김장호, 김익두. 두목사님은 다 황해노회 출신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노선은 초자연적 기독교, 이적적 기독교,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한 기도교인데 반하여 김장호 목사는 당시의 공위량 선교사 밑에 조수로 따라다니며 배워 아주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그가 공위량 목사에게 배운게 뭐냐하면 이런 메시지 였다.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은 기적이 아니고 바로 밀물과 썰물의 잘 보았다가 건너갔다. 이런 설교를 햇고 그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김익두를 따르던 사람들은 김장호 목사가 올라오면  물러가라 하고 서로 그러다가 나중에는  선교사들이 싸움을 말려도 않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1918년에 노회가 김장호 목사를 정죄 했습니다. 결국 그때 한국교회가 취한 태도가 한국교회 신앙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니케아 회의가 왜 모이고 도르트 총회가 왜 모였습니까? 설교 때문에 모였습니다. 역사의 부기점마다특별이 시대마다 교회는 어려운일을 당할때 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젖혀놓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옳았던가 하는 질문을 할 때 또 오뚜기처럼 서서 바로 나갔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 교회가 언제라도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도 1918년에 이렇게 협의화해서 결정했습니다.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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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설교개발 (쿰란)pp224-8

교회 신앙 패턴이 보수적이 아니면 모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보수적 신학 서적이 아니면 팔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918년 김익두와 김장호 사이의 논쟁에서 김익두 노선을 우리의 신앙 체계로 삼은 데서 한국 교회의 큰
흐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4)

 6. 1960년대 이후의 설교
 6.25이후 혼란의 시대를 거쳐서 1960년대 국가 경제 발전에 맞추어 한국 교회 강단의 메시지는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복주의 사상과 물량주의가 힘있게 된 것입니다. 1950년대 메시지는 요한 계시록을 중심으로 설교를 많이 했는데 요새는 그 설교는 별로 안합니다1960년대 전에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설교를 많이 했는데 요새는 이 땅에서 어떻게 잘살까? 거기에 촛점이 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것이 옳은가 물어 보아야 겠습니다. 요새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우니라는 설교는 않합니다. 이 설교를 했다가는 교인들이 교회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 했습니다. 낙타는 바늘귀로 얼마든지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낙타털을 깍아서 실로 가늘게 꼬아서 넣으면 들어간다고 설교 했다고 합니다.

 성경대로 하면 됩니다 부자는 절대로 천국에 못들어 갑니다 이렇게 밑둥지를 잘라놓고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지 처음부터 겁을내서 낙타털을 뽑아가지고 넣으면 들어 간다고 하면 안됩니다.

 어찌하든 물량주의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 강단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뜨거운 감격과 말씀을 통해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빛과 소금의 노릇을 하기는 커녕 교회는 자기 안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소사이드 박사가 말한데로 설교로써 기독교는 일어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복음 선포이기 때문입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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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2회 전국목회자 세미나강의집(쿰란) PP211-230정성구)



제 5 장
현대 설교의 유형과 분석

 1. 백주년 기념 설교집의 분석
 자료;한국 교회 백주년 기념 설교집(빛을 발하라)상,중,하 3권,한국 교회 백주년 준비위원회 사료분과위원회, 총248편의 설교문 분석 및 분류 1]일반적 유형 분석
  1)주석 설교             59편 
  2)교리 설교             62편 
  3)예화 설교 예화 설교  101편 
  4)증언 설교             26편 

 이와같은 것을 분석한 후  외국의 사례를 보면 우리 나라의 증언 설교 가 26편인 것에 비해 같은 비례로써 외국의 것은 12편에 불과 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신앙이 외국의 그것보다 더 생동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여기 부석된 설교 자료는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난 한국교회 100년 동안에 행해진 것들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증언 설교는 더욱 많아지는 경향을 띄고 있다.

 2]신앙적 유형 분석
  1)창조 신앙        58편 
  2)임마누엘 신앙    61편 
  3)십자가 신앙      88편 
  4)부활 신앙        41편 

 기독교 신앙을 크게 넷으로 요약하면 창조신앙, 임마누엘 신앙, 십자가 신앙, 부활 신앙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도 최소한 이같은 네가지가 들어 있어야 한다. 위 네가지 신앙중 그 어느 것을 생략하거나 제거해 버린다면 그것은 사실 기독교 신앙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위의 네가지 신앙 양태를 띠어야 한다.

 1)창조 신앙---사랑하는 까닭(근거)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신다.피조물과 창조자의 관계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시고 이 세상에 나아가 살려고 하셨다면 나를 그냥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이다.

 2)임마누엘 신앙---사랑의 노출(표현)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신데 실체는 어디 있는가? 그래서 그 실체를 내보이시게 되는데 그 구체적인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오실 때 어떤 이름으로 오셨는가? 임마누엘! 즉 사랑이 구체적으로 세상에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 사랑의 말씀이 곧 육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3)십자가 신앙---사랑의 고난(현실)
 하나님의 사랑의 현실은 무었인가? 그것은 고난이다. 고통이다. 곤난이 동반하는 사랑이야말로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부활 신앙---사랑의 승리(결단)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을 통하여 이제는 부활로 연결되고 사랑의 승리로나타나게 된다. 다른 표현을 하자면신앙의 결단이다

  3]구조론적 유형 
 신앙의 의식화와 신앙의 생활화의 작업은 서로 잘 조화를 가져야 한다. 한국의 많은 신학자들이 한국 교회를 분석하면서 한국 교회는 기복 사상에 너무 치우친다는 평가를 한다. 아니면 병 고치는 것, 기사 이적에 치우친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한국 교회가설교를 통해서 시도한 것은 신앙의 의식화 작업이라고 본다. 신앙의 의식화 작업이란,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가 새롭게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깨우침을 받게 되는 체험을 말한다. 이 체험은 내게 변화를 일으켜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 마치 소경이 눈을 뜨게 되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체험이다그런데 신앙에는 이런 의식화 작없에 뒤따라 생활화 작업이 전개되
어야 한다. 신앙의 생활화 작업이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한국 교회는 전자에 치중했으나 후자 곧 신앙의 생활화에는 등한했던 것 같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하나님의 자녀 의식 곧 신앙의 의식화에 힘써야 겠지만 예수님의 제자됨 곧 신앙의 생활화에 더욱 노력해야 하겠다고 본다. 이 이론을 도표로 표기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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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6회 연신원강의집 PP337-340)

          +-아는 것(앎 생각) 
          +--- 신앙의 의식화  -------+ 
          |      (깨달음)            +-믿는 것9믿음) 
          | 
          | 
          |                          +행하는 것(행함) 
          +---신앙의 생활화  --------+ 
                 (따름)              +-되는 것(됨) 

                             +- 주석 설교-+ 
          +---믿는것   ------+            | *아는 것 
          |                  +- 교리 설교-+ 
          | 
          | 
          | 
          | 
          |                 +-예화 설교--+ 
          +---되는것  ------+            |*행하는 것 
                            +-증언 설교--+ 
 
4]성경 본문 분류
 1) 신약                           2)구약
    마태     38                      창세    9
    마가     4                       출애    2 
    누가     20                      레위    1 
    요한     21                      민수    1 
    사도행전 17                      신명    2 
    로마     12                      여호    4 
    고전     4                       사사    2
    고후     3                       왕상    3 
    갈라     4                       왕하    2 
    에베     14                      에스라  1  
    빌립     10                      욥기    1 
    골로     3                       시편    3 
    딤전     4                       전도    2
    딤후     5                       아가    1 
    히브     7                       이사    4 
    야고     3                       예렘    2 
    벧전     7                       에애    1
    요일서   3                       에스겔  2 
    계시     10                      다니    1 
                                        하박    3 
    # 본문없는 설교   12 
 
 (1)성경본문 분류요약

  신약;복음서     83 
   사도행전       17 
   바울서신       59 
   키타서신       20 
   요한 계시록    10 
   합계 : 189 

   구약:오경     15
   역사서         12 
   시가문학       7 
   예언서         13 
   합계: 47 
   본문없는 설교 12 
   총합계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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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제6회 연신원강의집 PP341-345

  5) 현행설교와 기호설교의 내용분류 비교 
  (통계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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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분류 현행-기호  목회자가 현행하는 설교  교인이 좋아하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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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령체험                    9.2                   11.4
2.치유와 축복                 7.9                   4.8
3.죄의 용서                   19.7                  17.8
4.내세의 소망                 22.8                  26.2
5.가정의 평화                 4.9                   7.5
6.교회 생활                   17.4                  4.8
7.일터와 이웃사랑             12.3                  19.3
8.사회적 책임과 나라걱정      5.8                   8.2
--------------------------------------------------------------------
     합   계                100.0(1.180)          100.0(1,212) 
 ------------------------------------------------------------------
*1----4는 신앙의 내용
*5----8은 신앙의 틀
자료:현대 연구소편(한국교회 성장과 신앙 양태에 관한 연구조사)
     책임자 김중기)pp70-71 
 
 
 

   6) 현행 예화와 기호 예화의 분류 비교 
  (통계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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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분류현행--기호  목회자가 현행하는 예화(%) 교인이 좋아하는 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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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경에 있는 기사               41.2                    46.3
2.교인들의 생활 이야기           14.0                    8.9
3.사호성치 시사성 있는 사례      21.6                    25.6
4.위인 전기를 중심한 예화        11.8                    4.3
5.설교자 자기 경험 중심의예화    11.4                    14.9
--------------------------------------------------------------------
     합   계(N)                100.0(1.219)            100.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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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현대사회연구소편(한국교회 성장과 신앙양태에관한 조사연구)pp72-73


 .2.장로교회의 설교유형
  한국교회 설교 유형을 어디에 기준을 두고 유형이라고말할 수 있느냐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다. 그래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서 펴낸 100주년기념 설교집을 택하여 보았다 엄격히 말하면 통합측의 설교의 유형이라고 해야 겠지만 거기에 수록된 131편의 설교를 가지고 그것을 기초해서 한국교회 설교유형을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1) 해석과 적용의 유형
 먼저 이들이 어떻게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했느냐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의 설교를  분석해 본다. 설교의 본문을 영어에서는 택스트(Text)라고 한다.이택스트를 갖게 되면, 이것에 대해서 1차적인 임무는 무었이냐 하면 주석이라 할 수 있다. 이 주석에 대한 노력의 결과에 따라서 어떠한 해석이, 어떠한 강해가,어떠한 좋은 의미가 나오느냐 하는 것이 결정되는데,대단히 섭섭하게도 이 주석(Exgesis)에 대한 노력들이 희박한 것을 볼 수 있었다.설교의 본문은 하나하나 볼 때에 그 본문과 전개되어진 설교를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말해버린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정확하고 엄밀한 말씀의 해석의 노력이 대단히 부족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주석이 끝나면 이 말씀 속에서 오늘 현재 나에게 그리고 내 회중들에게 무었을 말해 주고 있느냐, 오늘 내가 찾아볼 수 있는 진리가 무었이냐 하는 것이 다음 단계로 들어가야 된다.진리를 뽑아내서 거기에서 설교가 나오는 것이 우리의 설교의 단계이다. 그런데 본문의 뜻은 여기 있는데 자기 마음데로 그저 하나하나 대지들을 선정해 가지고 본문의 뜻은 여기 있는데자기 마음데로 그저 하나하나 대지들을 선정해 가지고 본문을 거기에 부속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많이 볼 수 있었다.적어도 본문이 말씀의 앞을 서고 거기에 대한 주제가 연결되어 질 때에 그때에 소위 majdr point 대지들이 나와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현상이 대부분이었던 사실을 말하지 않
을 수 없다.
    2) 말씀의 현장화 
 그 다음이 현상의 문제이다.이것을 적용이라고 하지만 말씀의, 현장화,이것이 제일 정확한 말인 것 같다. 어쩌면 85퍼센트의 설교가 본문을 가지고 그 때에 거기서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했다는 것이 전체이다. 100중 85가 이와같은 본문 해석 중심에 머물고, 나머지 15퍼센트를 겨우 말씀의 현장화에 할애하는 것을 보게 된다.그 말씀은 오늘 여기 이 현장에 필요하다. 오늘 바로 여기서 필요하다. 엘리야가 바알의 제자들과 싸우면서 하나님을 들볶는 광경이 있다면 그 때는 왜? 하면서 그 말씀이 거기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여기의 오늘이라는 현장에 낱낱이 밝혀져야 하는데 이 현장에 대한 고려가 우리의 설교에 대단히 미약한 것이다. 겨우 15퍼쎈트만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매우 실망적인 결과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말씀의 해석 전체를 50으로 본다면 즉 서론이 10, 그리고 주석이 40 정도로 하고 나머지는 말씀의 현장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여기서 조금 잘못 이해하면 마치 비복음적인 설교자처럼 오해 받게 될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늘의 현실을 많히 도입한다고 해서 그것이 비복음적인 것은 아니다.

오늘의 현실을 복음에 쪼명 시켜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것이냐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그것은 비 복음적인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3)설교의 목적에 따른 유형 
 다음은 설교의 목적을에 따른 유형을 분석해 보았다. 설교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도날드 뮐러가 쓴 성경적 설교법 이라는 책에서 이런 예화가 나오고 있다. 어느날 벤자민 레이스목사가  설교를 유창하게 잘 준비해  와서는 토요일 저녁에 먼저 자기 부인에게 읽어 주었다 그런데 이 기가막힌 설교 원고를 부인이 다 듣고 나서는 그 설교, 문장력이나 인터네이션 , 표현력, 그 모두가 대단히 좋아서 하나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묻고 십습니다.

그 설교는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하십니까? 그 질문을 받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이 설교를 무었 때문에 무었을 위해서 한다는 것을 알 수없었기 때문에 그 설교의 원고를 부인의 눈앞에서 찢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밤 밤이 새도록 원고를 다시 작성해서 강단에 올라 갔다는 예화가 있다. 우리의 설교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이 설교를 내가 무었 때문에 , 무슨 목적을 가지고 하느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누구에게 이 설교를 무었 때문에 해야 하느냐 하는 목적의식이 그 설교 속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 설교는 화려한 표현이나 웅변은 될수 있어도 설교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한 인간을 진리대로 완전히 변화 시켜서 듣는 이가 진리대로 살도록 만들겠다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설교의 목적을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생략하고 네가지만 들어서 설명해 볼까 한다.

 첫째,복음적인 설교이다. 다음은 교훈적인 설교이고, 치유설교, 사회를 향한 예언적 설교이다 .

 첫째,복음적인 설교(Kerygmatic  Preaching)
 복음적 설교 라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이 주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 믿으십시요, 그리고 예수를 믿어 참길에, 참 생명에, 참 진리에  머무십시요! 하는 것이 복음적인 설교이다. 물론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미 구속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도  이 진리를 다시 한번 깨우쳐 주는 각도에서 이러한 설교를 계속 할수 있는 것이다 . 이 설교를 아리는 일명 전도 설교 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사건, 부활의 사건 등 여러가지의 설교를 할 수 있다. 이 복음적인 설교를 한국 교회는 매우 줄기고 있다. 이 설교가 약20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 했다. 20퍼센트라는 것은 적은 비율인데 그 적은 이유는 그들이 설교를 쓸때에 특별이 구원에 대한 전도의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것이 아닌가 나름데로 생각해 본다.

 둘째,교훈적인 설교(Didacti Preaching)
 영국의 신학자,C.H. Dodd가사도들의 서료와 그 발전에서 사도들의 설교를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하나는 케리그마적인 설교요, 또 하나는 디다케적인 설교가 그것이다. 순수하게 구원을 위해 외친 멧시지를 복음적인 설교로 보고, 그 다음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그들이 예수를 믿고 들어 왔을 때에 음식을 먹지 말라 또는 먹으라는 거기에 대한 어귀가 잇을 때 거기에 대한 해명,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든지, 윤리적인 문제는 어떻게 한다든지 하는 것을   낱낱이 가르치는 것이 거기 많이 나온다. 그래서 이 부분, 소위 신자된 사람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것을 가르친 것을 디다케적인 설교라고 말한다. 이와같은 설교는 장로교 합동측에서
많이 하고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십일조 내는 문제로 부터 어떻게 해서 든지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살도록 부탁하고 가르치는 것이 이 교리 설교인 것이다. 이 설교가 뜻밖에도 장로교회에서는 많아서 47.3퍼센트가 나오고 있다.

이 수치는 매우 엄청난 것으로 그만큼 장로교가 성도들의 신앙을 엄격하게 규제할 뿐만 아니라, 엄격하게 이 길로 살도록 청교도적인 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데 대해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설교에 있어서 목사님들이 유의할 점이 있어서 언급하려고 한다.
교인들이 제일 괴로워 하고제일 마음 아파 하는 설교가 바로 이 설교인 것이다. 그것은 그저 내 마음대로 믿고 내 마음대로 살았으면 좋겠는데 하지 말라, 또는 저것을 해라 등의 규제가 어떻게 심한지 교인이 딱 질색을 하는 것이다. 1960년대까지 전쟁 후의  타락상과 부패상을 지적하면서 이런 설교가 많이 행해졌다.

 세번쩌로,치유설교(Therapeutic  Preaching)
 치유 설교는 우리가 구태여 심리학자 칼 융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대인들은  정치, 경제, 사회, 윤리 속에서 완전히 그 범주에 뒤덮여서 살아가는 사람들인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본래적인 자신을 다 상실해 버리고 정치라는 물결과 경제라는 물결과 여러가지의 물결에 휩싸여 오늘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말은 즐긴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병든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다 병들어 있다.

 이와 같이 병든 사회에 있어서 교훈 설교 즉 교리 설교는 교인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는 설교였다. 치유 설교를 일명 목양 설교라고 부르짓는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우리주님의 말씀입니다 오시오 성령을 받으시오! 성령을 받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또한 내 영혼도 잘됩니다. 범사가 잘됩니다. 육신도 강건해 집니다. 진급도 됩니다 이와같이 그져 됩니다 됩니다. 인것입니다그져 잘살수 있고 ,잘 먹을 수 있고 잘될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다고 하니 거기에는 전혀 괴로운 말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무었이든지 다 잘된다는 말에 교인들의 귀가 번쩍뜨여서 그야말로 예수 믿는 맛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교인들이 가장 좋아
는, 즉 병든 교인들에게 병을 지적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잘된다고 또한 위로와 평화와 박수치는 즐거움 가운데 살아가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러한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장로교 목사님들이 교훈적인 설교를 하다보니 묘하게 교인들이 하둘 다른 교회로 옮겨 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도 나도 이 목양설교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상이다. 그리하여 설교의 패턴이 달라지는 것을 가는 곳마다 볼 수 있게 된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이와같은 방향 무었이든지 다 잘 된다고 하는 목양설교를 선택한 교회는 자연적으로 교인이 늘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그러한 방향으로 전환해 같고 또한 그것을 반대할 생각도 없는 것이다.

 네째는 사회를 향한 예언적 설교(Socil-Prophetic preaching)
 우리나라는 상당히 핏줄이 있는 나라이다. 그 말은 우리나의 역사가 핍박과 같은 어려움으로 얼룩진 나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핍박의 역사속에서 성장해 왔다. 그런데 근데에 들어서 사회를 향한 예언적 설교가 없어졌다. 약9퍼센트만이 겨우 사회를 향한 예언적 설교를 하고 있을 뿐 이다. 목양설교는 23퍼센트로 나왔는데 물런 이것은 정확한 비율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어떻든간에 기독교는 한 개인의 구원만을 촛점으로 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인이 둘이 모이고,100이 , 또는 1000이 모이면 사회가 된다. 사회속에 교회가 있는  것이지  사회와 동떨어져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속에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이 내 사회속에서 이 내
조국 속에서 , 진리에 입각해서 비틀어진 사실이 있을 떠에 , 그것을 묵인하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외면 하는 것이 설교자로서의 바른 자세라고 할 수있게는가 .설교자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를 캔다면 구약에 잇는 모든 예언자들이 우리의 뿌리이다. 적어도 예언자들이 가졌던 이 혼이 오늘 한국교회에서 없어진다면 , 한국 교회의 앞날은 암담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로스엔젤리스에 복음주의적인 근본주의 신학교육기관인 탈버드신학교의 다니엘 버우만 교수가 설교학 서론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지고 이 사회를 조명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라고 말한다

    4) 구조적인 면에서의 유형 분석 
 구조적인 면에서의 유형분석을 해보면 일반적으로 알다시피 설교는 단순히 언어의 구사만으로써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깊은 명상이 있어야 되겠다.
깊은 기도는 두 말할 것 없다. 그리고 깊이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전체가 어떻게 설교로 구성되는냐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분석 구조를 보니까 구조론에 있어서 대단히 부족  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수  있었다. 설교의 서론,  그리고 본론의 자료 수집, 그리고 전체적으로 매우 약했고 또한 외길 이었다는 점이다. 이 말을 좀더 풀어서 설명하면 설교의 88퍼센트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도입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가지다.옜날 어느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고 또 이렇게 하셨다고로 지금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설교의 대분분이 이런 형태이다. 편나안하고 쉬운 설교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교인들의 수준이 눠아 감에 따라 설교가 구조적으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새로운 논법으로 알맹이 있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끌려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음은 서론과 본론을 보면 서론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형태가 있다 그리하여 78퍼센트의 설교가 본문 풀이를 거지고 서론을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대 설교학에서 말하는 것과는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결론에 있어서도 그렇다, 결론이라는 것은 설교의 한목적을 가장 마지막으로 주는 가장 중요한  시간인데 이 시간을 끌어오지 못한다. 85퍼센트가 그저 한번 더내용을 요약해 주는 것으로써 끝나고 있다.

현대 교인들은구조 면에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기 때문에 클라이드리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교인들이 강단에 와서 설교를 들을 때에 곧 스위치를 끈다는 것이다. 즉 귀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완저히 귀를 막고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단히 위험하다 한 말을 또하고 여러가지의 복잡한 문제가 대두된다. 특히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연간 156회의 설교를 하다보니 반복 설교를 하게 된다. 특히원고가 없는 목회자들은 많이 반복해서 설교를 한다. 원고 설교를 착실히 해간다면 반복할 이유가 없다. 저신의 설교 구조에 대해서 정신을 쓴다면 늘 새로운 구조가 그들에게 흘러나갈 수 있다. 눈을 버쩍 뜨고 설교의 자료의 수집을 위해 힘쓴다면 설교의 내용이 그렇게 미흡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간절이 매달리고 하나님꼐서 나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기다리면서 충실하게 엎드린 종에게 그 말씀의 생명력이 없을 리가 없다. 한가지 형태속에 머므는 어리석고 무미 건조한 설교로 계속 할 수는 없다.분명한 것은 성령과 설교에 대해서 인데, 성령이 도우시면 되겠지 그러나 인간의 최선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나의 100퍼센트 노력을 했을 성령도 100퍼센트의 은혜를 주심을 기억하자.3)

5) 현대 설교 현장의 위기
 정장복 교수는 자신의 설문조사를 근거로 한국교회의 현대 설교 현장의 위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1)성경 본문을 떠난 설교를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이 자기의 생각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본문을 거기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본문의 지배자로서 설교자들이 오늘도 강단에 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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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P제2회연신원강의집 PP171-162

 2)말씀의 현장화를 가져 오지 못한 설교를 지적하고 있다.
 3)변질되고 왜곡된 방향으로 흐르는 설교를 지적하고 있다.
 4)목회자 자신의 삶과 부리된 설교를 하고 있다.
 5)회중에 지배되고 끌려가는 설교
 6)신학이 없는 설교를 말하고 있다.
 7)설교자의 목회적 수단화된 설교를 말하고 있다.
 8)설교자의 지적,인격적 바탕이 결여된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9)예언적 선포가 수반되지 못한 설교라고 말하고 있다.
 10)위기의식과 결단을 가져오지 못하는 설교이다.

 위기의식이라는 것은 우리 목회자들이 반듯이 가져야 한다. 내 설교의 위기의식,신앙의 위기의식,여러가지의 위기에 직면한 문제들을 외면해서는 않된다. 사람이 내가 지금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 때에 더 발전적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그 길을 모를 때는 더욱 더 퇴보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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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제2회 연신원 목회 세미나 강의집PP159-161



제 6 장
보수주의 교회가 지향할 설교

 1.원로와 선배들의 견해

 1)박윤선 목사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창세기부터 성경을 차례로 강해하라.목사가 죽을 때까지 신구약 성경 한번다 설교해 보고 죽기도 쉽지 않아 라고 말씀하시므로 성경을 연속 강해설교를 추천하고 있다  1)

 2)임택진목사(청량리 중앙교회 원로목사)
 참다운 설교는 성경에서 나온다 그리고 도덕 교훈 설교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구속사적인 설교를 추천하고 있다 2)

 3)박희천 목사(내수동교회 담임)
 설교의 재료를 성경으로 삼고 성경으로 말하게 하라.즉 성경속에 숨어 있는 뜻을 발견하여 전해주는 강해 형태의 성경 설교를 추천하고 있다 3)

 4)홍정길 목사(남서울교회 담임)
 저는 제목설교보다는 강해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제목설교는 설교하는 사람의 편집에 의해 설교가 얼마든지 체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자면 불교의 스님이 성경구절을 뽑을 때에"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헛되지 않은 것이 없도다"이처럼 성경의 일부만 뽑으면 분명히 성경임에도 그 의미는 다르게 전달됩니다 사람의 말이 되기 쉽습니다.불경의 내용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뜻입니다물런 제목 설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지만 제목 설교는 개인의 사상과 생각을 전할 수 있는 위험을 늘 가집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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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말씀  94.4(두란노서원)p20
2)그 말씀  92.8(두란노서원)p83
3)그 말씀  92.8(두란노서원)pp54-7
4)그 말씀  92.8(두란노서원)pp

 그러나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제목설교가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이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설교 가운데 제목 설교가 많다는 블렉우드의 주장은 사실입니다. 그렇치만 설교자가 설교제목을 통해서도 나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록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이 아니라서 힘들고어렵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강해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강해 설교를 권하고 싶습니다.   5)

 5)이병돈 목사( 은평교회 담임)
 말씀 중심의 설교, 강해식 설교가 아니고는 청중을 사로잡을 수 없꼬, 강해설교가 정착되면 설교자나 청중이 함께 말씀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자족한 강단의 은혜를 서로가 느끼게 될 것이다. 본인은 20년 이상 강해설교를 통해서 설교자 자신은 물론 청중들의 불만없는 교회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도 강해 설교를 권하고 싶다.

 강해설교의 유익

 첫째:설교를 통해 체계적인 성경 공부가 이루어진다.
 강해설교는 성경 본문을 연속적으로 설교하기 때문에 체계적인 성경 공부가 설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다시말하면 성경 전체를 보는 안목을 길러줄 수 있다. 본인은 장별강해(낮설교), 절별강해(밤설교)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강해설교는 편식이 없다.
 다시 말하면 내 취향이나 관심이나 필요에 의해 성경 본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성경을 달든 쓰든 강해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성경을 골고루 전달할 수가 있다

 셋째,설교에 대해 청중으로부터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미 정해진 성경을 계속 강해하기 때문에 청중의 귀에 개인적으로 거슬리는 설교라도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을 강조하기 때문에 설교의 부작용이 없다.

 넷째,강해설교는 청중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성경이 빠진것이 없고, 의로 양육하기에 유익하므로 모든 사람의 영적 욕구를 충족시킬수 있다 .

 다섯째, 강해설교는 성경해석에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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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 말씀  92.9(두란노서원)p16
6) 그 말씀  92.8(두란노서원)pp81-2

 사람의 목표나 설교의 목표에 본문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본문 자체를 그대로 해석하는 설교이기 때문에 말씀에 억지가 없다.말씀이 말하게 하고청중을 말씀으로 초대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여섯째,강해설교는 어떠한 목회현장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일곱째,강해설교는 대중 성경공부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여덟째,강해설교는 청중으로 다음 설교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설교의 본문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청중이 미리 성경 본문을 읽을 수 있고 그러기에 다음 설교에 더 호기심을 갖고 설교자의 강해를 경청하게 된다.6)

  6)장두만목사(성서침례신학교 교수) 
  본인은 모든 설교는 강해 설교라야 한다는  소신을 고 있다 본인의 이런 소신을 신학교에서의 강의와 또 실제 목회현장에서 강해설교를 하고 있다.
 강해설교란 주어진 본문을 문자적 문법적 역사적방법으로 해석하여 일정한 조직하에 현대의 청중에게 적용시키는 설교이다. 이것을 간략하게 말하면 강해설교는 본문의 가르침을 존중하고본문에 충실하게 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 내가 택한 본문의 주제가 무었이며 그 주제가 본문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보아 가면서 체계있게 오늘의 청중들에게 전달한다. 내가 택한 본문이 무었을 말하는지에 관계없이 설교를 하거나 , 본문의 어느 한두 단어나 구를 중심으로설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 본문 전체의 가르침과 부분과의 관계를 동시에 주의 하면서 설교를 만들어간다. 그렇기때문에 강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바르게 증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7)

 강해설교의 실제
 제목:성탄에 대한 세 가지 태도
 본문:마2:1-12
 중심내용:성탄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설교의 목적:사람들로 하여금 성탄에 대한 세 가지 태도를 알게 하여 가장 바람직한 태도를 갖게 하기 위하여.

 서론
 1)오늘날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인들만의 명절이 아니라 범세계적 명절이 되었다.
 2)이 때가 되면 사람들이 들떠 있다.
 3)사람들이 들떠 있고 분주한 이유는 각각 다르지만 이들이 성탄에 대해 갖 태도는 셋중의 하나이다.
 4)마2:1-12을 통해서 그 세가지 태도를 생각해 보자.

1.어떤 사람은 성탄에 대해서 적대적이다(1-3)
 A.헤롯 왕(헤롯대왕)과 같은 사람이다.
 1)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에둠(에서)의 족속이었다.
 2)그는 로마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항상 왕위에 대해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3)이러한 때 왕중 왕이 탄생했다는 소문을 든고 보니 불안하고 당황하고 적개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B.헤롯왕이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불안하고 당황하고  적개심을 느꼈듯이 오늘 우리 가운데도 헤롯과  같은 태도를 취하는 자가 많다.
 1)오늘날 우리는 물론 헤롯왕과 같이 왕위를 도전 받지는 않는다.
 2)그러나 비슷한 경우는 있다.
 a)만일 내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가 내인생을 주장하게 되고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나의 생활에 있어서 왕이 되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리스도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갖는 사람들이 있다.
 b)만일 내가 예수를 믿게 되면 과거에 가지고 있던 모든것 친구와 술먹고 놀던 재미, 여자와 놀던 재미 다 잃어버리고 예수에게만 지배지 않을까 생각하고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3) 오늘 여러분은 어떠한가?

 2.어떤 사람은 성탄에 대해 무관심하다.
 A.이것이 종교 지도자들이 가진 태도였다.
 1)헤롯의 질문에 그들은 정확히 대답했다.
 a)그는 베들레헴에서 나겠다(미5:2)
 b)그는 다스리는 목자가 되겠다(삼하5:2)
 2)그들은 성경에 박식했다-왕의 질문에 대해 성경을 인용해 답변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 가서 그리스도께 경배하기를 거절했다.
 a)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8km에 불과했다.
 b)그것은 그당시의 기준으로도 결코 먼거리가 아니었다.
 3)그들이 경배하러 가지 않은 이유는
 a)성경을 몰라서가 아니다.
 b)거리 때문에도 아니다.
 c)날씨 때문에도 아니다
 d)무관심 때문이었다.

 B.오늘날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1)온세계가 성탄을 지키지만 그리스도 없는 성탄이다.
 2)그리스도가 탄생 했던 않했든, 성탄이 무슨 날이든 상관 없다.
 3)그리스도의 탄생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고, 그것은 내 영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는 대신에
 a)돈버는 일에
 b)카드 보내는 일에
 c)선물 교환에
 d)교회 행사에
 e)육적인 재미보는 일에만 관심 갖는 사람들이 많다
 4)오늘 우리들은 이 종교적 지도자들과 같지 않은가?
 
3.어떤 사람은 참으로 경배한다(7-17
 A.이것은 동방 박사들이 가진 태도이다.
 1)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다.(민24:17)
 2)그들은 성경을 알되 종교 지도자와는 달리 먼거리를 사양치 않고 와서 예수께 경배했다.
 3)그들은 귀한 예물을 드렸다.
 a)황금
 b)유황
 c)몰약
 4)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다.
 B.오늘날도 참된 경배자는 그렇게 한다.
 1)무었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다.
 2)조용한 가운데 이날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고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

  결론 
 1)성탄에 대한  태도는 세 가지가 있었다.
 2)여러분의 성탄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가?   8)

7)계지영목사 (포항북부교회 담임)
 현제 미국에서 가장 알려진 설교학자는 프레드 크래독(Fred B.Craddock)과 데이빗 버트릭(Dabid Buttrick) 그리고또한 사람 유명한 설교학자가 프린스 톤의 토머스롱인데 그런데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설교를 강해설교다,본문설교다, 제목설교다 분류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강해다,제목이다,본문이다, 분류하지 않고설교가 얼마나 성경적이냐에 관심을 갖습니다. 강해설교 라는 스타일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비 성경적인 설교를 할 수 있고 ,반면에 제목설교로도 얼마든지 성경적인 설굔를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내 설교가 성경적인 설교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기독교 2천년 역사상유명한 설교,세계를 움직인 설교는 거의다 제목설교이기 때문에 우리가 제목설교를 악한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설교가 성경적인 설교인가?

  첫째로,내용면에서 하나님(구속사) 중심이어야 합니다. 
 예를들어 요셉에 관한 설교를 하면 요셉이 선하게 살았으니까 우리도 선하게 살자, 혹은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정말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자는 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가지고 야곱이나 요셉같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구속 역사를 이끌어 가는가에 주안점을 두어야지 어떤 특정한 인물을 보고 도덕적 교훈을 글어내서는 않됩니다. 하나님중심의 설교 더좁혀서 그리스도중심의 설교가 성경적인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둘째,성경설교는 기쁜소식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바젤대학 하인리 오토(Heinrich  Ott)라는 분은 설교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악상르 지적해야 하고 ,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과 결단을 촉구해야 하고, 그러나 무었보다도설교의 중심은 하나님꼐서 베푸신 구속의 은총, 즉 구원의 기뿐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기능면에서 본문이 어떻게 행하는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이 책망하는 본문인가.위로하는 본문인가 , 격려하는 본문인가에 따라 회중에게 본문의 의도를 잘 살려서 전달해야 합니다. 본문은 말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본문은 꼭 무었을 행하려고 하거든요.성경적인 설교는 본문이 가르치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려는 것인가를 잘 살려서 내 설교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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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그 말씀  92.8(두란노서원)pp108-9
8) 장두만 강해설교 작성법(요단출판사,187)
9)그 말씀  92.8(두란노서원)pp114-5

 8)정성구목사 (전 총신대학장)
 설교에 있어서 강조점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구속사적인 설교라는 점이다.
본인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크게 세가지의 강조점이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이다 어떤 본문을 선택하던지 간에 이 세가지에 촛점을 맡추어 설교한다. 그것은 ,성경에는 여러 개인들의  전기나 시문학 작품들이 등장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의 스토리만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구속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의 이러한 맥락을 강조한다.성경을 점으로 보지 말고 선으로 보라는 것이다. 성경의 파편만 꺼내서 거기에다 의미 부여를 하려 들찌말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이바로 하나님을 중심한 설교요,구속사적 설교인 것이다이렇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구속사적 안목에서 불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구속사적 강해설교를 위한 실제
  본문:창세기2-3 
  제목:하나님의 언약 

  1.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왕국 건설이 게시되었고 창세기 2-3장에는 언약이 제정된다. 야웨-언약을 성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2.언약은 종교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고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갖는다.
  3.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파트너로 삼으신다. 즉 인간을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존제로 만드신다 .
     그러므로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교제의 대상으로 삼으신다.
  4.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한다.
  5.이를 일반적으로 행위 언약 이라 한다. 그러나 이 명칭은 오해해서는 않된다.
    마치 영생이 인간의 봉사의 댓가로 주어지는 것처럼, 선행에 대한 상급의 댓가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더그라프는  이것을 은총의 언약이라고 불렀다.
6.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임재하시어 그 역사를 시작하시고 점진 시킨다.
7.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에게 문화적인 사명을 부여 하신다.
8.즉 에덴동산을 다스리도록 하셨다-문화적 소명
9.창세기3장을 타락이라는 제목 대신에 은혜언약이라고 하는것이 좋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유의해야 할것은 창세기 3장에서 타락은 중요한 것이 사실이나 ,
   타락 자체를 너무 강조하면 창세기 3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게시는 뒷전에 밀려나기 쉽기 때문이다.
   즉 창세기3:1-7절은 인간의 타락을 기록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한다.
10.성경은 인간의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게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1.우리는 창세기 3장을 통해서 버림받아 마땅한 인간을 위해  돌아 가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12.하나님의 은헤의 게시가 있기 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고 변명했다. 심판의 게시만으로는 인간이 회계하고 죄를 고백하지 못했다.
    결국 인간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은혜의 언약이 게시도었다.
13.창세기3:15절--원시복음
 1)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원수가 되게 하실 것을 선언하심으로 구원을 약속하셨다.
 2)이 구원이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행동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만이 인간의 구원을 보장한다.
 3)하나님은 사단을 멸망시킬 구세주, 곧 여자의 후손을 약속 약속했다.즉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다.
 4)이 구세주는 사단의 손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

이 약속에서 세로운 하나님 나라의 후손을 찾는다.
*최초의 신정은 파괴되었으나 곧바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존속할 제2의 신정을 시작케 하기 위하여 힘을 발휘하신다. 이 후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도 전개된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운동의 전개를 추구하는 것이다.

14.창세기 2-3장에 대한 성경적 이해
  1)개관 
  (1)고린도전서 15장 21-22절9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대표성) 
  (2)고후11:3(사단의 역사는 하와를 유혹할 때처럼 오늘도 역사한다) 
  (3)롬5:12-14절(아담의죄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음) 
  (4)딤전2:11-12(아담과 하와) 

  2)시험 
   (1)마4:1-11절, 눅4:1-13절(첫 아담의 실패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승리케 하신다)
   (2)히2:8절(그리스도는 시험을 이기신다) 

  3)타락 
   (1)롬1:23절(하나님의 영광을 버림) 
   (2)롬3:10-18절 (타락의 결과) 
   (3)시51:5(원죄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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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그 말씀  92.8(두란노서원)pp94-5

  4) 결과 
   (1)사65:17-18(재창조,새하늘과 새땅) 
   (2)계21:4-5(만물을 새롭게함) 
   (3)고전15:56-57(그리스도의 긍극적 승리) 10) 
 보수주의 교회가 지향할 설교에 대하여 선배들의 의견을 살펴보았다.그 의견들을 종합해 볼때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철저한 성경적인 설교를 추천하고 있다
 둘째:성경적을 벗어나지 않기위해 가능하면 강해설교를 추천하고 있다
 셋째:성경을 단편적으로 설교하기 보다는 성경전체의 맥인 구속사를 설교할 것을 추천하고 있다.

 2.예수님과 사도들의 견해
 그럼 우리 보수주의 교회가 보존하고 모범으로 삼아야할 예수님과 사도들의 설교의 유형은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추구했던 설교의 유형을 분석해볼때 그 견해를 알수 있다

 예수님의 설교 유형 

 예수님은 기독교의 첫 설교자였다 예수님은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마9:35) 예수님의 설교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구약성경)의 선포와 해석이 설교의 특성이요(눅4:14-21)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설교의 주제이며(마4:17)
 셋째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구원받으라는 것이 설교의 내용이며(막1:15)
 끝으로 천국복음을 이해하기 쉽게 설교하기 위해 비유를 많이 사용 하신것이 예수님의 설교의 특색이다(막4:34)

 예수님의 설교는 청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을뿐 아니라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설교하셨고, 실제 생활에 실천할 수 있게 설교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모두 예수님을 칭찬 하였고(눅4:16-22),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다고 하였다(막7:29)

 사도들의 설교 유형
 모든 민족엑복음을 전할것을 위임받은 사도들은 (마28:19) 설교에 최우선권을 두었다(행6:4) 사도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설교)하라고 부탁했다(딤후4:1-2)

  초대교회 설교중에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2:14-36)와 스데반의 순교설교(행(7:1-53)와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외친 설교(행13:16-48)는 원시교회의 3대 설교이다. 이 세 설교의 공통점은 이 세 설교의 공통점은 첫째는 성경적이요 둘째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여 사람들을 구원하는 설교였다는 데 있다.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 보수주의 교회들이 지향해야할 설교의 유형은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그리고 보수주의 선배들의 권면처럼  설교의 기초에 있어 천지는 없어져도 시대는 변해도 영원히 변함이 없고 일점일획까지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한 성경적인 설교를 해야 하겠고,

 그 유형에 있어 성경을 벗어나지 않게하고 성경이 말하게 하는 강점이 있는 강해설교가 좋다는 선배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 내용과 목적에 있어 하나님의 뜻과 그 영광을 드러내며 또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과 내용을 가진 구속사적인 설교와 복음적인 설교를 지향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럴때 초대교회의 설교 현장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역사와 부흥의 불길이 우리 보수주의 교단의 설교 현장에도 나타날것을 믿으며 본 논문을 마감합니다.

참고문헌

정성구 [개혁주의 설교학) 총신대학 출판부 1991.
존 스타트 [현대교회와 설교] 정성구 역.반석문화사 1992.
이동원 [청중을 깨우는 강해설교] 요단출판사 1990.
장두만 [강해설교 작성법] 요단출판사 1986.
이중표 [설교개발] 쿰란출판사 1989.
앤드류 블랙우드 [설교학] 박광철 역 생명의 말씀사 1983.
잉그베 브릴리오드 [설교사] 홍정수 역 목회총서 1978
로이드존즈 [목사와설교] 서문강 역 clc 1983.
곽안련 [설교학] 대한기독교서회 1979.
존스타트 [설교자상]문창수 역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5.
데니스 레인 강해설교 모음 (두란노서원) 1985.
제2.6.9연신원 목회자 세미나 강의집
그말씀 92년8,9월호 94년4월호[두란노서원]
그리스도대사전 기독교서회 1990.
세계철학대사전 고려출판사 1991.
                                                          
 
[공유] 사 도 행 전 낙서장

2006. 3. 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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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쉴만한물가 | 작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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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도 행 전
1. 주의 권한과 종된 자의 할 일 (행1:6-11) 4
2. 주님의 승천과 새 출발 (행1:6-14) 6
3.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와 (행1:12-14, 계11:3-4, 22:16) 8
4.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신을 보내심 (행2:1-13) 11
5. 주의 승천과 교회의 발전 (행2:37-47) 13
6. 주의 승천과 주의 이름의 영화 (행3:6-10, 4:10-12, 29-31) 14
7. 승리를 이루는 기도 (행4:23-37) 16
8. 인간 권력으로 막을 수 없는 위력 (행5:17-32) 19
9. 교회 지도를 바로 하므로 발전 (행6:1-17) 20
10. 순 교 와 발 전 (행7:54-8:8) 22
11. 기독교 순교의 처음 열매 (행7:54-60) 24
12.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 (행8:26-40) 26
13. 사울의 회개와 교회 발전 (행9:1-8) 28
14. 해를 받기로 택한 그릇 (행9:10-18) 31
15. 택한 자를 위한 천사 활동 (행10:1-8) 33
16. 이방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됨 (행10:28-48) 35
17. 성신의 보내심을 받아 선교를 하게 됨 (행13:1-10) 37
18. 이방의 빛이 되는 선교 운동 (행13:44-52) 39
19. 참된 전도자의 증거 (행14:8-18) 41
20. 서방에 선교 개척 (행16:10, 24-34) 43
21. 심판 날을 작정한 하나님의 역사 (행17:22-31) 45
22. 주께서 함께 하심 (행18:1-11) 47
23. 로마에 가서 증거할 것을 (행22:1-21, 23:11) 49
24. 로마에 전도의 문이 열림 (행28:16-23) 51
25. 선지서를 전하는 바울과 말세증인 (행28:23-28, 계10:5-7) 53
26. 바울이 담대히 복음 전파함 (행28:24-31) 55
 
         로 마 서
1.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롬2:1-8) 58
2.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자 (롬7:1-6) 60
3. 곤고한 사람으로 감사할 일 (롬7:22-8:2) 63
4.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롬7:6) 65
5.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 (롬7:15-23, 8:12-17) 67
6. 참된 해방을 받은 자격 (롬7:22-25, 8:1-7) 69
7. 결코 정죄함이 없는 역사 (롬8:1-2, 34-35) 70
8.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롬8:3-11) 73
9. 성신의 역사와 인격 문제 (롬8:12-17) 75
10. 하나님의 예정과 인격 (롬8:28-30) 78
11. 넉넉히 이기게 하는 사랑 (롬8:31-39) 80
12.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롬9:1-3) 82
13. 사명에 불타는 바울의 심정 (롬9:1-3) 85
14. 영적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자 (롬12:1-2) 87
15. 영적 예배 (롬12:1-2) 89
16.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합당한 생활 (롬12:14-21) 92
 
             고 린 도 전 서
1. 일한 공력이 헛될까 조심하자 (고전3:10-23) 95
2. 신령한 자의 판단 (고전3:15) 97
3.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자 (고전7:10-35) 99
4. 제일은 사랑 (고전13:11-13) 102
5.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는 수고 (고전15:9-11) 104
6. 아담 안의 죽음과 그리스도 안의 부활 (고전15:20-28) 106
7. 인생의 두 가지 형체 (고전15:44-49) 109

              
        갈 라 디 아 서
1. 택한 종에게 되는 일 (갈1:11-17) 112
2. 복음에는 외식이 있을 수 없다 (갈2:11-16) 115
3. 예수를 믿는 정로 (갈2:15-21) 116
4. 심판 받을 행위 (갈5:2-10) 119
 
 

주의 권한과 종된 자의 할일
( 행 1 : 6 - 11 )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그 역사의 권한을 바로 알고 일할 때에 모든 일은 질서 있게 되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승천할 때에 때와 권한에 대하여 말씀한 것은 그 제자들이 필요 없는 일에 간섭을 하기 때문에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할 일은 증인이 될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권한과 종된 자의 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의를 알아야 한다.

  1. 하나님의 권한 (6-7)
  예를 든다면 어떤 주인이 품꾼을 부를 때에 그 시간을 정하는 것은 주인의 자유에 있는 것이니 품꾼은 극력껏 맡은 일에 주인의 요구대로 일할 것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어느 종이나 들어 쓸 적에 예정 아래서 한계를 정하여 일하게 한 것이니 사도들이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은 어느 종이나 역사 하게 할 때에 그 기한은 알려 주지 않고 마음 가운데 재림의 주를 갈망하게끔 역사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한 종을 들어서만 그 사명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종에게 어느 때까지 세상에서 일한다는 기한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할 사명을 할 때에 때와 기한에 있어서는 조금도 알아보려고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목적이 그 기한 안에 수를 채우기 위해서는 모략적인 방법을 쓰되 그 종의 마음에 기한이 급했다는 마음이 생기게 하신다. 이것은 어느 종이나 자기가 일할 기간을 주었으므로 그 기간 안에 자기 할 일을 하라는 뜻에서 때가 임박한 줄 생각이 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왕국을 기다리는 심정이 불탔으므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선지를 통하여 묵시의 글을 기록하게 할 때에 목적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목적 하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 육적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할 때에 이스라엘 말기에 바벨론에게 먹힘을 당하여 황폐화되었다가 회복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 질 때도 극도로 교회가 부패하여 바벨적인 세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심판이 올 것을 말씀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세계에 전파되어 십자가의 피로 산 백성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은 세계적인 역사가 있게 될 것과 세계적인 환난이 북방으로 올 것과 세계적인 심판에서 구원받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다시 있은 후에 그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지상 왕국의 축복을 받게 되고 순종치 않는 자는 바벨론이 망할 때에 같이 망한다는 것이다(계 10:7, 11:15).

  둘째 : 잃었던 지상 축복을 다시 찾는 일은 부활성도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 재림시에 남은 종이 될 자와 백성이 찾을 것을 말할 때에 선지서 전체는 부활성도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변화성도에게 해당된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사도의 사명은 친히 주님의 부활을 본 자이므로 이것을 세계 만방에 전할 것뿐이라는 것이다.

  2. 종된 자의 할 일 (8-11)
  첫째 : 성신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종이 성신 권능을 받지 않고 일하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나리는 주님과에 대적이 되는 동시에 성신을 근심케 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은혜시대의 법을 어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던 것이다(눅 24:49). 왜냐하면 성신을 받기까지 한 곳에 모여서 합심 기도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데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14). 하나님의 종들은 종된 자격을 가진 것이 아니고 성신권능을 받음으로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생각하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것이 종된자의 먼저 할 일이라고 본다. 자기가 성신권능을 받지 못하고 나선다는 것은 자칭 유대인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 : 순교적인 생활이 있어야 한다 증인이라는 것은 순교가 없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상이 가득한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에 역사적인 종교를 반대하고 역사 적인 모든 풍속을 반대하고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를 가나 박해를 받을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또는 유대 본국에 과거 종교 제도를 다 없애고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한다는 것은 자기 본국에서도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유대인에게 핍박을 받았고 이방인에게도 핍박을 받았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증인된 생활에 피를 뿌린 종교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셋째 : 승천한 그대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종이 할 일(11). 계시록을 보면 주님 다시 올 때는 예언을 지키는 자가 복 있다고 계22:7에 말씀했다. 그러면 예언을 증거하는 종도 큰 난국을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붉은 짐승에게 용의 큰 권세를 주어서 세계를 침투하게 할 때에 그 짐승의 표를 받고 머리를 숙이면 멸망을 받는다는 증거를 해야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계14:9 이하를 보면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라고 한 것을 보면 진노의 날에 양떼를 살리는 종이 되려면 예언을 증거할 때에 붉은 짐승의 환난에서 계11:6이하와 같이 증거하는 자라야 양떼를 살리는 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 종은 권세를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다.

  결  론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것은 말세 증인이 증거를 마친 다음에 죽은 자는 순교자라야 부활하고 남은 자는 예언을 증거하던 자라야 들림을 받아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는 지상 강림할 때에 바벨론이 불타는 동시에 백마 탄 군대가 짐승의 군대를 없이 하므로 완전한 이스라엘적인 다윗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계 19:19-20:4).


 
 주님의 승천과 새 출발
( 행 1 : 6 - 14, 요절 14 )

  서  론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시어 구름을 타고 승천하기까지는 전부가 타락한 인생의 죄의 대가를 짊어진 생활이었다. 그러나 부활 승천할 때부터는 인간의 타락한 생활에서 새 출발을 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주님을 따라 간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 그들의 생활은 새로운 출발이 되지 못하고 육의 사람으로 일시 주님을 따라가던 자들이었으므로 열매 없이 쓰러지고만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할 때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는 단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새 출발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대지 : 시대를 바로 알게 되므로 (6-8)
  주께서 승천하기 전에는 사도들까지라도 시대를 모르고 그 즉시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왕이니 이 땅에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눅24:21). 그러므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물어 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사명이 아니고 성신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고 저희 보는데서 승천하시었다. 그때야 모든 사람들은 시대를 바로 알고 새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 죄를 위하여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세계적인 복음 운동을 할 사명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한 기간으로 정하여 그 때부터 새로이 출발한 그 사명은 오늘에까지 계속된 것이다.

  2 대지 : 재림에 대한 것을 알게 되므로 (9-11)
  이날까지 모든 사람은 초림의 주가 오므로 그 즉시에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구약 예언서에 이스라엘의 회복은 육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세계적인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메시야가 오므로 이 세상은 메시야 통치 왕국이 오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승천할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너희 주가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였다. 그 때부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구름을 타고 올라간 그대로 온다는 것을 확신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고대하고 새로운 출발을 가지게 된 것이다.

  3 대지 : 한곳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게 되므로 (12-14)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을 보고 돌아온 120명의 무리들이 한곳에 모여 합심 기도를 하는 일은 이날까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까지도 새로운 출발을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오순절 다락방 교회라고 한다.

  결  론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이 땅에 타락한 인생들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 일에 큰 역사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승천이 없다면 타락한 일생은 새로운 출발을 가질 수 없고 영원한 죄 값으로 흑암의 권세 아래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오므로 어느 민족이나 하나같이 삶의 길을 찾게 되었다.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와 말씀에 전력하는 교회
행 1 : 12 - 14, 계 11 : 3 - 4, 22 : 16 )

  서  론
  하나님께서 언제나 시대적인 역사는 개인을 통해서가 아니고 성도가 뭉쳐진 교회를 통하여 역사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는 것을 순종하는 기관이니 하나님의 시키심을 순종할 것뿐이다.

  1.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 (행1:12-14)
  주님께서 구름 타고 승천할 때 남은 교회는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였다. 이것은 왜냐 할 때 성신 강림을 목적했기 때문이다. 성신이 강림한다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의 피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강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환난이 올 때 흩어졌던 무리들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보고 새 힘을 얻어 전혀 기도의 힘을 쓰는 다락방 교회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때 교회는 기독교 종말적인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아니요, 기도를 전력하여 성신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와 부활을 만방에 전하는 큰 사명을 맡은 본부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 그들이 기도에 전력을 두지 않고 산재 상태에 있었던들 이러한 큰 성신의 역사를 맛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의 부탁을 하나같이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자기의 사생활을 생각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합심 기도의 주간을 정했던 것이다. 합심이라는 것은 주님의 뜻만 순종한다는 것 외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과거는 열 두 제자로 기도의 전력을 두고 뭉쳐진 일이 없었다. 겟세마네 동산의 하룻밤 기도도 잠만 자고 있던 그들은 십일이라는 기간을 전력을 다해서 뭉쳐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어려운 환난을 통과함으로써 깊이 깨닫는 지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니 십자가의 환난기를 지나고 보니 자기네가 가졌던 주관과 기대는 어긋나는 일을 당할 때 자기를 포기하고 승리의 부활을 이루신 주님의 명령만을 순종하자는 것으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은혜 시대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을 위하여 성신의 역사를 기다리고 합심 기도로만이 세계를 정복했던 것이다.

  2. 말씀에 전력을 둔 촛대교회 (계11:3-4)
  말씀에 전력을 둔다는 것은 말씀대로 재앙이 나리고 말씀대로 재앙으로 땅을 치고 말씀대로 보호가 있고 말씀대로 심판하는 시기에 남은 교회를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는 증인이 권세를 받아 예언하는 기간에 나타난 감람나무 촛대교회다. 이 때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이것은 은혜 시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때는 전혀 기도의 힘을 써야 할 때는 지나고 이미 기도의 힘을 써서 기름 준비한 처녀들이 예언의 말씀의 등불을 들기에 전력을 두는 재림기다. 재림 전 일 천 이 백 육십 일이라는 기간에 되여 지는 일이니 시대적인 종말의 예언을 밝히 증거하는데 전력을 두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재앙의 날에는 예언을 가해도 감해도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 계22:18-19에 있기 때문이다. 이 촛대교회는 재앙의 날에  대중을 살리기 위한 사명을 띤 교회이니 원수가 피해를 못 주도록 하나님은 보호한다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씨를 뿌리는 역사보다도 알곡을 모으는 때 남은 교회다. 영혼이 천당에 가는 시대가 아니고 살아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남은 종 남은 교회로서 새 시대를 정복하는 권세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이 내릴 때 그 진노를 받지 않는 교회는 말씀에 전력을 두어야만 될 것이니 진노의 날은 성령을 부어 주는 날이 아니고 재앙이 쏟아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말씀의 전력을 두지 않는다면 이 교회는 종말의 큰 미혹을 가져오는 거짓 선지의 세력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권세의 역사는 예언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결  론
  우리는 교회가 바로 서느냐 못 서느냐 하는 문제가 은혜 시대라면 끝을 바로 맺느냐 못 맺느냐 하는 것이 환난기다. 기도에 전력을 다하는 교회가 은혜 시대의 중심이 되었다면 말씀에 전력을 두는 촛대교회가 환난기에 중심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시대적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있는 것이니 교권은 우리와는 하등의 필요가 없는 것이니 하나님께로 오는 권세를 받는 자밖에는 참된 교회를 인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신을 보내심
( 행 2 : 1 - 13, 요절 4 )

  서  론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천국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하는 말씀을 하시었다. 세례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하였고(마3:2),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 하였으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천국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역사가 이 땅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성령과 불과 세례를 베풀리라고 말했고(마3:11), 예수님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했다(행1:5).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승천하시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성신이 강림하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역사는 완전히 이 땅에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성신을 보내시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징조가 나타났다.

  1 대지 : 다 같이 모인 곳에 보내심 (1)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한데 모여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순종하는 무리들은 10일 동안 개인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단체적으로 한 곳에 모여 합심 기도를 계속했던 것이다. 만일 이들이 한데 모이지 않고 각각 개인 행동을 취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면 이러한 역사가 나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대로 한 곳에 모여서 기다릴 때에 성신을 받았던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성신 역사를 내리려고 하여도 땅에 있는 사람들은 합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기 때문이다(행5:32). 성신을 받는 것은 도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부족해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가 받게 되는 것이다.

  2 대지 : 강한 바람같이 임하였다 (2)
  성신의 역사가 강한 바람같이 온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 모든 만물의 생명은 바람이 없이 있을 수 없다. 바람이 있으므로 호흡이 있고 바람이 없이는 호흡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죽은 영들이 다시 소성 할 수가 없다.
  둘째 :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세계를 통일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신은 세계 통일의 역사를 하고 계신 것이다.

  3 대지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임하였다 (3)
  불이라는 것은 강하게 일어나는 힘이 있으므로 얼마든지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다락방에 성신의 역사가 나리므로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불은 무한의 번창을 할 수 있는 거와 같이 성신도 무한의 역사를 하고 있다. 불이 가는 곳에는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성신의 역사가 임하는 곳에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4 대지 : 방안에 성신이 말하게 하는 방언이 나타남 (4-13)
  성신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의 입을 열어서 말하게 하는 것이니 성신의 역사가 없이 방언을 할 수 없다. 방언이라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의 방언이 있고. 둘째, 하나님 편에서 비밀을 알려 주는 방언도 있고. 셋째, 말씀을 널리 전파하는 방언도 있다. 언제나 성신은 방언으로 역사 하는 것이다. 본래 방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 바벨탑을 쌓았다가 각 나라 방언이 생긴 것도 사람이 스스로 한 방언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하게 하므로 했던 것이다(창11:7). 그러나 다락방 방언은 저주로 임한 방언이 아니고 저주받은 백성들에게 복음을 속히 전하기 위한 방언이었던 것이다.

  결  론
  성신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왕권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아 오는 것이니 성신을 받은 자는 마귀를 이기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때부터 기독교는 승리의 용사적인 출발을 하여 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이다.


 
주의 승천과 교회의 발전
( 행 2 : 37 - 47, 요절 41 )

  서  론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한 교회도 세워진 일이 없었고 아무런 발전도 없었지만 승천하신 후에 교회 발전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1 대지 : 종된 자의 발전 (37-38)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는 제자들에게 아무런 발전이 없이 결국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것으로 결말을 지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도망을 가서 숨었던 제자들도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증거하는 인격이 이루어졌던 것은 사람으로 볼 때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대중 앞에서 담대히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할 때에 듣는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베드로 앞에 와서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것은 종된 자의 인격 발전의 큰 증거이다. 그물 한 채를 가지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앞에 모든 사람들이 찔림을 받고 머리를 숙이고 어찌할꼬 하는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성신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의 종된 자들이 발전을 가져오지 못하고 점점 미약해지고 열매 없는 마른나무같이 되는 것은 성신의 권능을 받지 못한 증거이다. 누구든지 성신의 권능을 받을 적에 사람의 인격 발전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불과 50일 전에는 작은계집 아이에게 떨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하던 베드로의 인격이 이렇게 올라갔다는 것은 교회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발전이 되려면 종된 자의 인격 발전이 있어야 한다.

  2 대지 : 교회 발전 (39-42)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한 사람도 완전한 신앙에 선 사람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하루에 삼천 명이나 되는 신자가 일어났다는 것은 교회의 큰 발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완전 승리의 열매로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다. 무서운 박해 속에서 기독교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보좌 우편에 계셔서 대언 기도하시는 열매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주님께서 직접으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고 종의 인격을 발전시켜 쓰실 적에 교회 발전은 그 때부터 일어난 것이 세계를 정복하는 발전을 보게 된다.

  3 대지 : 경제 발전 (43-47)
  교회의 발전이 있는 동시에 경제까지라도 풍성한 축복을 받아 주의 사업에 활발성을 가지고 일하게 되므로 교회의 영육이 아울러 생활의 발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부요한 자들이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성도들의 생활 발전을 위하여 도와주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인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발전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을 초월하여 성신의 역사로 되는 것이니 주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지금까지 큰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얼마든지 성령의 역사를 나려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주의 승천과 주의 이름의 영화
( 행 3 : 6 - 10, 4 : 10 - 12, 29 - 31, 요절 6 )

  서  론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일이 없었지만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역사가 있게 되었다.

  1 대지 :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걸어감 (3:6-10)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역사가 있게 하되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에 놀라운 이적 기사가 나타나게 하시었다. 이것은 인생 자체에게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완전 승리의 이름으로 악마의 세력이 세상에서 물러가는 동시에 병마가 물러가게 된 것이다. 인간의 질병이라는 것은 죄 값으로 오는 것이니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에 무슨 병이든지 다 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사람이나 다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에 기사가 나타나게 한 것은 베드로를 대표적인 종으로 쓴다는 증거를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시어 모든 성도들이 하나같이 베드로 앞에 뭉쳐지도록 하신 것은 언제나 시대를 따라 대표적인 종을 신과 같이 쓰되 사람 스스로가 역사 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 때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할 때 기사가 있었고 신약 시대는 예수의 이름으로 이적 기사가 있은 것은 구약 때는 여호와께서 언약을 세우는 때이므로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할 때에 기사가 나타나는 것이요, 신약 시대에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여 만민의 죄를 사하는 화목 제물이 되셨으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만일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없다면 십자가의 도가 널리 전파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되므로 십자가의 도는 세계 만방에 전파된 것이다.

  2 대지 : 천하 인간이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게 됨 행4:10-12)           
  세상에 많은 영웅도 있고 성인도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으로는 아무런 역사가 없되 예수의 이름으로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될 때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고 예수의 이름으로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준다는 것을 자랑하게 된다.

  3 대지 : 예수의 이름으로 큰 응답이 나림 (4:29-31)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날 때에 소위 예루살렘 공회라는 이름을 가진 교권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을 주었다(4:15-18). 그러한 가운데서도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부르짖는 호소를 올릴 때에 땅이 진동하며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리들은 어려운 핍박이 올 때에 예수의 이름을 더 높이며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서 여러 가지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예수의 이름 아래에서 완전한 단체가 이루어진 것이 초대교회의 역사라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라면 이것은 예수교가 아니다. 예수교라는 것은 예수의 이름만 자랑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적 기사가 있고 예수의 이름으로 큰 응답이 나리는 것을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라는 것이다.

  결  론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행하신 일이 있으므로 기독교는 큰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요14:12-13).


 
승리를 이루는 기도
( 행 4 : 23 - 37 )

  서  론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들어서 승리를 이루는 열매를 가져올 때 대적의 세력을 강퍅케 하는 동시에 당신의 종들을 더 강하게 일으켜 승리를 이루도록 역사 하는 것은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르킬 수 있는 기도가 있지 않고는 하나님은 역사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나라를 좌우하고 있는 신의 본부니 신의 본부의 활동은 땅에 있는 종들의 강한 기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 승리를 이루는 기도에 대한 비결을 본문에서 배울 수 있다.

  1. 일심 호소 (23-24)
  일심이라는 것은 기분 좋고 환경이 좋을 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수에게 죽게 될 난관에 부딪히고 전도문이 꽉 막혀서 어찌할 수 없는 가운데 그들은 조금도 동요를 받지 않고 낙심이 안되고 더욱 일심으로 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교회 지도자를 어떤 법관이 잡아다가 때리고 전도하지 말라는 일이 있을 때 겁을 내고 그 교회가 일심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하나님이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종이 누가 환영을 하면 힘을 내고 박해하고 어떤 교권이 탄압을 할 때 용기를 잃으면 하나님의 종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력에 굴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면 하나님은 사람만도 못하니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할 것이다. 정권, 교권을 초월한 힘을 하나님께 받는 호소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마귀가 강할 때 더 일심 단결해서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는 일이 없이는 승리를 볼 수 없는 것이다.

  2. 예언을 기억하는 기도 (25-26)
  그들은 무서운 박해를 당할 때 시편 2편에 이방이 분노해서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말씀이 응한다는 사실을 볼 때 필연코 승리는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대적이 일어나는 것이 예언의 말씀이 응하는 것이라면 시온산 정부가 이루어지는 것이 필연코 있을 것이라는 굳은 신앙의 힘을 소유했던 것이다. 금일의 붉은 세력이 이 땅 3분지1을 점령하고 세계를 침투해 나오고 마귀의 앞잡이 거짓선지의 세력이 교회를 침투하는 것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사실이라면 동방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나서 원수를 짓밟게 하겠다는 것을 믿고, 필연코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호소해야 될 것이다. 즉 원수가 강하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 편이 승리한다는 말씀도 문제없이 될 것은 사실이다.

  3. 하나님이 하감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기도 (29)
  우리는 사람이 나를 안다는 것보다도 무소불능 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하감 하시되 내 양심을 아시고 우리 사정을 더 분명히 아시고 우리 자체가 우리 앞길을 모르나 하나님은 미리 하감 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양을 인도하는 목자는 앞길을 다 보면서 인도하는 것이다. 양은 아무리 위험해도 따라만 가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4. 하나님이 역사 하면 된다는 마음에서 기도한다 (30)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 하느냐 안하느냐는 것을 문제시 할 것이니 당장 위험하다 또는 소망이 없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 하면 승리는 필연코 있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결  론
  이와 같은 기도가 있는 교회에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큰 역사가 떨어졌던 것이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아울러 큰 축복이 왔던 것이다. 인간의 어느 정권이 이 교회를 다치지 못할 큰 단결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31-35). 우리의 뭉쳐지는 힘이란 기도의 열매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의 경제가 곤란하다고 압력을 받는다든지 또는 교인이 합심이 안된다고 낙심한다는 것보다도 나의 기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눈물겹게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기도의 열매가 아니고는 아무런 가치를 세상에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세계를 정복할 힘은 기도라는 것을 계5장 9-10절에 말했다. 승리의 기도가 있는 교회로 끝을 맺는 새시대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인간 권력으로 막을 수 없는 위력
( 행 5 : 17 - 32, 요절 29 )

  서  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는 인간의 정권이나 교권으로 탄압하는 일이 있게 하는 동시에 그 교권과 정권을 초월한 역사로 교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만민이 알도록 끔 증거를 하기 위한 방법이다.

  1 대지 : 주의 전사가 도와준 역사 (17-20)
  소위 대제사장이라는 무리가 교권을 쥐고 사도들을 탄압하며 이방 적인 로마의 정권을 배경 삼아서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밤에 주의 천사가 나타나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내어 말하기를 성전에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일을 천사가 도우지 않으면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 없는 난국을 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도 기독교가 이러한 일이 있기 전에는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 없는 난국이 올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교권, 정권의 탄압을 받고 발전하지를 못하고 만다면 이것은 생명의 종교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이러한 증거를 나타낸 것은 기독교 역사가 종말에 가서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알파와 오메가가 언제나 같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성경에 기록하게 한 것은 이것을 보고 교회는 그 힘이 어떠하다는 것을 만민이 알게 하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2 대지 : 새벽 예배의 힘 (21-25)
  천사가 옥에 갇힌 사도들을 이끌어 내어 새벽에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게 했던 것이다. 대제사장과 소위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이 함께 회의를 열고 사도들을 옥에서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관속들이 가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의혹 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던 중에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도저히 교회 발전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본다면 새벽 기도에 모이는 힘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천사들도 새벽 예배를 도와서 역사 했던 것이다.

  3 대지 : 사도들의 담대한 증거 (26-32)
  아무리 비겁한 사람들이라도 성신 충만을 받음으로 인해서 큰 능력을 받아 담대해 질 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증거했다. 첫째,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절대적으로 교권과 정권을 무서워하지를 안해야 된다고 증거했다(26-29).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다(30). 셋째, 예수님은 임금과 구주라는 것을 증거했다. 넷째, 순종하는 자에게 성신을 주신다고 증거했다(32). 이 때는 증거할 때에 성신의 역사가 같이 하므로 교회가 큰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결  론
  교회 발전의 힘은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이것은 천사가 도와주는 동시에 성신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서 사도들을 강하게 증거하도록 하면서 그 증거를 도저히 인력으로 막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교회 지도를 바로 하므로 발전
( 행 6 : 1 - 7,요절 4 )

   서  론
  교회라는 것은 지도를 바로 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역사를 나리지 않아도 교회는 유지할 수 없고 또 지도를 바로 하지 못하고 사명자들이 혼란하게 되어도 도저히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로써 바로 하는 일에 대하여 공부하기로 한다.

  1 대지 : 사명적인 한계를 바로 하여야 됨 (1-2)
  하나님의 교회는 몸과 같다. 몸이라는 것은 각 지체가 자기의 할 분야를 바로 하게 될 때에 완전한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도 사명의 한계를 바로 알아서 움직이게 되어야 완전한 교회가 된다. 말씀을 전할 사명자가 물질에 치우친다는 것도 잘못이요, 물질로 움직여야 할 사명자가 그 처리를 잘못해도 안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도 물질을 가지고 구제 사업을 할 때에 사도들이 물질을 맡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은 사명의 한계를 바로 못하는 일 인줄 알고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데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 사도들이 사명의 한계를 바로 움직이도록 처리를 할 때에 주의 역사가 더 크게 임하였다.

  2 대지 : 집사를 세워 물질적인 사명을 맡기게 됨 (3-6)
  물질의 사업보다도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혀 힘쓰는 것이 더 큰 일이므로 사도들은 지혜롭게 일을 처리할 때에 물질에 관한 모든 문제는 집사들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영적 방면에서 전력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교회 발전의 큰 힘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맡은 사명의 한계를 바로 아는 사람에게 역사 하신다. 예를 든다면 세상의 군대도 각자가 맡은 부서를 바로 하여야만 승리하게 되는 것과 같다. 언제나 강단에 서는 종은 신령한 양식을 일반에게 주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되며 교회의 제직은 말씀을 전하는 종을 위하여 물질 방면에 있어서 명철하게 일을 처리해야만 교회에 시험이 없이 발전할 수 있다. 교회 발전이 큰 지장이 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종이 다른 방면에 치우치게 되면 교회는 자동적으로 영적 혼란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3 대지 : 정상적 발전을 가지게 됨 (7)
  생명이 있는 활동이라는 것은 정상으로 점점 왕성하게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푸른 나무가 시냇가에 위치를 정하게 되면 언제나 정상적으로 푸른빛을 내는 것과 같다. 교회도 말씀이 충만한 위치에 있게 될 때에 정상적으로 부흥 발전을 가져오게 되므로 승리의 열매를 이루게 된다. 교회가 정상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순서를 첫째, 말씀이 왕성하는 일. 둘째, 일꾼이 많아지는 일. 셋째, 대적을 굴복시키는 일이다.

   결  론
  교회를 지도하는 자는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니 한 사람도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처리하여야 되며, 무슨 일이든지 질서 있게 움직이되 인물 선택을 바로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도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집사로 택하여 세우고 교회를 움직일 때에 정상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교회 지도자는 자기가 직접으로 모든 것을 다 한다는 것보다도 사람을 바로 택해서 세우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불능의 신이시지만 언제나 사람을 택해서 세우고 그로 하여금 교회를 발전시키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가 독선적으로 일한다는 것은 교회 발전의 큰 지장이 있는 것이다.
 


순 교 와 발 전
( 행 7 : 54 - 8 : 8 ).

  서  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평안한 가운데 두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환난과 핍박 속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하셔서 더욱 발전하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왕권 반열에 들 자를 먼저 집사 중에서 나오게 했고, 둘째는 집사가 순교하는 동시에 사도 바울이 나오게 했고, 셋째는 사도 바울이 나오므로 세계적인 복음 운동이 일어나므로 세계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1 대지 : 스데반의 순교
  첫째 : 영안이 열려짐(54-56).
  하나님께서 기독교 순교의 첫 열매가 되는 스데반에게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한 것은 누구든지 순교하는 자는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같이 왕권을 누린다는 증거로 보여준 것이다.
  둘째 : 돌에 맞음(57-58).
  셋째 : 기도를 함(57-60).

  스데반이 억울하게 돌에 맞을 적에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면서 순교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대 승리를 본 처음 열매가 된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비극이요, 낙방할 일이지만 이 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세계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2 대지 : 사울의 핍박과 교회 발전 (8:1-8)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울이 교회를 진멸하고 각 집에 들어가서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가두는 일을 하였다. 이러한 박해가 있어도 사방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간 데마다 복음을 전하므로 교회는 널리 전파되는 동시에 많은 무리가 전도를 받고 돌아올 때에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되었다. 사울에게 교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는 핍박을 하게 하시던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회개시켜 세계적인 전도사로 삼으셨다(행9:15). 이것을 본다면 기독교라는 것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더 유익이 되도록 하시는 역사가 있다. 이렇게 악하게 교회를 전멸시키던 사울을 회개시켜 이방의 사도를 삼은 것은 십자가의 도는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체험하고 증거할 사도를 세우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러한 사람을 불러서 세우는 것이 큰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준 것이다. 기독교를 핍박하던 자가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할 위력이다.

  결  론
  하나님의 역사는 왕권 받을 사람을 속히 이루자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울을 들어서 교회를 핍박하여 순교자를 내는 동시에 순교자를 나게 한 박해자 사울이 회개하고 세계적인 복음 운동의 선구자가 되게 한 것이 생명 있는 기독교의 위력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순교의 처음 열매
( 행 7 : 54 - 60 )

  서  론
  기독교는 순교 없이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순교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는 축복의 열매다. 스데반 청년이 기독교에 순교의 첫 열매가 된다는 것은 그 자신도 축복이요, 기독교에 큰 열매가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이 시키는 순교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는 것이다.

  1. 스데반의 담대한 증거 (51-53)
  담대한 증인이라는 것은 외식을 용납치 않고 절대적인 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동시에 시대를 바로 증거한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 자라도 참된 종을 대적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참된 종을 피 흘리게 한 예루살렘이니 너희가 회개치 않으면 멸망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어떤 교권이나 어떤 정권을 무서워하지 않고 증거하는 자 이였다. 만일 어떤 종이 역사적인 교권을 무서워한다면 이것은 순교자의 동무는 될 수 없다.

  2. 영안이 열리며 천계(天界)를 봄 (56)
  담대한 증거 자가 될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한다는 증거는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하며 주님의 자체가 그에게 나타나는 일이다. 이것은 순교자인 스데반에게 큰 힘을 주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하나님은 순교자에게 큰 담력을 주지 않으면 순교자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스데반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그 우편에 서신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3. 간곡한 기도 (59-60)
  스데반은 기도에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 돌무더기 속에서도 괴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돌로 치는 무리를 향하여 간절한 기도가 나온 것은 위에서 주는 축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린 청년의 하나에 불과한 집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올린 기도를 그 입에서도 올리게 됐다는 것은 예수와 같이 왕권에 도달하는 승리의 기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열매라는 것은 이것이 성신 충만의 승리의 열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스데반의 피로 땅을 적시게 하시고 그 대신 사울을 세웠던 것이다. 사울은 그 당시에 순교의 피를 쏟는 스데반을 바로 죽였다고 판결을 내렸던 사람이다(행8:1). 하나님은 피가 땅에 떨어진 그 피를 대신해서 원수가 되었던 사울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강권 발동을 시켰던 것이다. 주님은 다메섹 길에서 홀연히 하늘로 빛이 비춰지면서 사울은 엎드려 떨었던 것이다. 사울은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는 스데반을 죽이는 순교의 눈동자가 되었던 자이었으나 고요한 음성이 들려 오는 소리는 사울의 고막을 울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였다. 그 음성을 들은 사울은 회개치 않을 수 없는 자리에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이다. 스데반 청년이 순교를 한 열매는 이방의 사도를 대신 세우는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이천 년간 역사의 한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는 순교의 피가 흐르는 땅에 반듯이 큰 열매가 나타났다는 것이 20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열매이다. 공산당 세력에서 피 값을 갚는 14만 4천이 일어나는 종말의 역사가 될 것이니 20세기 끝을 맺는 역사는 억울한 피를 흘린 셈의 장막에서 일어날 것은 사실이다.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
( 행 8 : 26 - 40 )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한 종을 쓰시는 것은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쓰는 것뿐이니 택한 종은 겸손히 순종할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하여 택한 종을 들어 쓰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종은 겸손히 그의 역사에 순종할 것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자기의 어떤 방법으로 일한다는 것은 그 근본적인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그날 일하는 것을 절대로 순종해 나간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아무런 것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겸손히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역사는 다음과 같다.

  1. 천사의 인도를 받게 됨 (26-27)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나타나서 이르기를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무조건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는 빌립은 큰 열매를 맺게 되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종이 순종하는 길을 갈 때에는 인간이 볼 때에 어리석은 일 같으나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역사 하시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방 고넬료의 가정에 전도할 때에도 천사의 인도를 받았고, 바울이 아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갈 때에도 천사의 인도를 받았던 것이다. 크나큰 열매는 베드로가 가이사랴를 향하여 가는 길에서부터 있었고, 구라파를 통하여 세계를 움직이는 운동도 바울이 순종의 걸음을 걷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순종의 걸음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축복을 가져오는 열매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택한 종 하나가 순종하는 걸음은 얼마나 귀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도 앞으로 주의 천사의 인도를 따라가는 길에서 큰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2. 성경을 바로 깨닫게 됨 (28-35)
  택한 자는 성경을 읽기 좋아하는 동시에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 국의 큰 국고를 맡은 내시가 길을 가면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성신의 인도로 말미암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사53장을 읽게 되었다. 언제나 택함을 입은 사람이 성경의 뜻을 모르고도 은혜롭게 읽게 되는 것은 자기의 어떤 흥분이나 감정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에게 그 성경을 바로 깨닫도록 하는 것은 택한 종을 들어서 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천사의 방언을 할찌라도 택함을 입지 못한 자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로되 택함을 입은 자는 성경 본문을 읽는데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므로 택한 종을 통하여 간단히 말하여도 깊이 깨달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인간의 학설이 필요가 없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에게 성경대로 담대히 증거할 것뿐이다. 언제나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성경 본문을 간절한 마음으로 읽게 하는 동시에 그 성경 본문을 깨닫게 하되 선각자를 들어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아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니요, 겸손히 성경을 읽는데서 참된 종을 통하여 알게 하는 것이 성신의 역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선각자를 무시하고 자기가 스스로 성경을 알아보려고 한다면 교만한 일이라고 본다.

  3. 세례의 축복을 받게 됨 (36-40)
  오늘에 교회가 세례의 큰 축복을 등한시하는 일이 있다고 본다. 언제나 세례는 성신의 역사 아래서 성신의 인도를 받아 물 속에 잠겨 올라 올 때에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이 법을 시행치 않는다는 것은 세례의 축복을 받지 못할 과오가 있는 일이다. 우리는 택한 자의 몸이 성신의 역사로 물에 잠겨 올라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주받았던 사망의 몸은 물에 아주 장례가 되고 축복을 받을 몸으로 물에서 올라오는 것이 세례의 축복이다. 내시가 물에 잠겨 올라 올 때에 주의 성령이 빌립을 인도한 것을 본다면 얼마나 귀중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물에 잠겨 올라 올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한 사실을 보아도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물을 통과시키는 것은 큰 축복을 그 몸에 주기 위한 방법이다.

  결  론
  택함을 입은 자가 하나님의 택한 종을 만나게 되는 일이나 하나님의 택한 종이 택함을 입은 자를 찾아서 만나게 되는 일은 너무나 귀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택한 종을 들어 쓰는 주님의 역사이므로 여기에는 조금도 인간의 방법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울의 회개와 교회 발전
( 행 9 : 1 - 18, 요절 15 )

  서  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운 목적은 천국인 동시에 당신의 종들에게 왕권을 주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순교의 피가 흐르게 하고 그 대신 역사 하는 종이 순교하면 다른 종을 세워 역사하게 하여서 기독교 역사를 순교적인 역사로 보게 되는 것이다. 사울은 스데반이 순교를 할 때에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하등 양심에 꺼리끼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사울이 회개하고 기독교 발전의 큰 열매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1 대지 : 살기 등등한 사울 (1-2)
  사울은 기독교를 없애 버리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므로 스데반을 죽이는 것을 옳게 보는 동시에 큰 격동을 받아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기독교를 없이하는 결정을 하고 사방으로 흩어진 교인들을 없애기 위하여 길을 떠났던 것이다. 사울은 율법주의자로 율법을 숭배하는 사람이니만큼 기독교를 크게 오해하고 나섰던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불법적인 이단으로 보고 정통 유대교에 충성을 다하는 청년으로 나섰던 것이다.

  2 대지 : 땅에 엎드려진 사울 (3-5)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사울은 땅에 엎드려 졌다. 왜냐하면 해보다 더 밝은 빛이 자기에게 비쳐졌기 때문이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인간 세력이라는 것은 감히 주님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의 빛만 나타나도 꼼짝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 인간이다. 오늘날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으며 공산당들은 기독교를 세상에서 없이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나오지만 주님의 빛이 나타날 때에 엎드려진 사울같이 되고 말 것이다. 사울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온유하게 나타나셨지만 오늘날 예수님을 반대하고 나오는 원수들은 진노하신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슬피 통곡을 할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 앞에 감히 머리를 들 수 없이 쓰러지고 말 인간이다. 지금은 주님께서 잠잠히 계신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때이니 사람마다 주님께서 나타나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도 특별한 종에게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일이 있다.

  3 대지 : 눈이 어두워진 사울 (6-9)
  사울의 눈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의 빛이 눈에 비쳐졌기 때문이다. 눈이 어두워진 것은 사울은 눈먼 소경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자가 하나님의 교회를 없이 하겠다고 나선 것은 소경 중에도 소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눈을 멀게 하여 절실히 회개를 하도록 끔 하게 하신 것이다. 사울이 너무나 강포한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4 대지 : 이방 사도로 택한 사울 (10-18)
  주님께서 "아나니아" 라고 하는 종에게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첫째 :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서 안수하라고 하심
  둘째 :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이라고 하심(13-15).
  셋째 : 핍박을 많이 받으리라고 하심(16)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니 새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택한 자를 찾는데 있어서는 아무리 불의한 일을 하여도 찾아서 의로운 종으로 쓰는 것이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대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지었다 하여도 회개시켜서 완전한 사람을 만들어 쓰는 것이다. 기독교를 박멸시키던 사울이 기독교를 세계에 전파한다는 것이 교회 발전의 큰 위력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사를 계속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아무리 공산당이요, 무신론자라도 택한자는 강권으로 회개시켜 구원하는 것으로 새시대를 이룰 것인데 이것을 기독교의 위력이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언제나 위대한 역사를 하실 적에 인간의 생각과는 달라서 인간이 볼 때에는 안될 것 같으나 되게 하시는 것이다.
 


해를 받기로 택한 그릇
( 행 9 : 10 - 18 )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태로부터 사람을 택할 때에 주를 위하여 해를 많이 받기로 택한 그릇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주를 위하여 해를 많이 받은 자라고 본다. 십자가의 도를 가장 밝히 증거한 사도는 해를 많이 받은 바울이다.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밝히 증거한 편지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십자가의 도에 대한 변론을 완전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진리를 정확히 변론하는 은혜를 받은 것은 다른 사도보다도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해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해를 많이 받기로 택한 그릇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많은 성도에게 피해를 준 일 (13-14)
  바울은 누구보다도 성도들에게 피해를 많이 준 사람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지나친 열성을 바울이 가졌기 때문이다(갈1:13-16). 하나님의 택한 그릇이 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열심과 강한 성격을 받았다고 본다. 모태로부터 강한 성격을 받은 자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강하게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교인으로서 누구보다도 정통을 주장하였으며 율법으로는 책망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바울은 이와 같이 열심과 강한 성격을 가졌으므로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성도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알지 못해서 과오를 범하고 있는 바울에게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하여 나타나셨다(딤전1:13-14). 왜냐하면 아무리 택한 자라도 깨닫게 해 주므로 만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하기 싫어하는 자라면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을 때에는 살수가 있었지만, 알게 될 때에는 그 즉시에 바로 서게 되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고도 성도를 해치는 일을 했다면 택한 자라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택한자라는 것은 언제나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다.

  2. 이방인을 위하여 택한 일 (15)
  하나님께서는 예지와 예정이 계시므로 모태로부터 사람을 택하실 때에 어떻게 들어 쓴다는 작정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태로부터 사람을 택하실 때에 어떠한 일을 하라는 사명을 맡겼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택하여 쓰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뜻대로 부르시기도 하시고, 은혜를 주시기도 하시고, 들어 쓰시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을 스스로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 준 사명을 바로 알고, 그 일에 순종한다는 것 외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맡은 사명을 알고도 그대로 순종치 않는다면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본다. 왜냐하면 어떠한 일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이 순종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주님을 대적하는 것보다도 자기 인격을 상실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밭을 가는 쟁기를 만들 때에 도끼를 사용할 때도 있고 작은칼을 사용할 때도 있는데 도끼를 작은칼같이 쓸려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가 어떠한 일에 씌워진다는 것도 모르고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자기 인격을 모르는 사람이므로 모든 일이 다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3. 해를 많이 받게 되는 일 (16)
  사도 바울은 택함을 받을 적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해를 많이 받기도 예정된 사람이었다. 고후11:23이하를 보면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피해를 많이 당한 사도였다. 사울이 이러한 피해를 당하기 전에 주님께서는 "내 이름을 위하여 많은 해를 받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억울한 피해를 많이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주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주는 축복 인줄 알고 바울과 같이 항상 기뻐해야만 될 것이다. 언제나 대표적인 종이 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피해를 당하는 일이 많이 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해를 당하는 종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은 당신의 일을 위하여 피해를 많이 당하고도 감사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피해를 당하는 것을 원하셨던 것이다(사53:10). 그러므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심판의 대상자가 된다. 그리고 심판권을 가질 자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해를 많이 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택한 자를 위한 천사 활동
( 행 10 : 1 - 8 )

  서  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타락하고 또는 위험한 자리에 들어갈 때 택한 자를 위하여 천사를 부리는 일이 있는 것이다. 마귀를 들어서 택한 자를 위하여 활동하는 일도 있다. 이제 택한 자를 위한 천사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예언적인 천사 활동 (눅 1:10-19)
  하나님은 예고의 일을 위해서는 가브리엘을 활동시키는 것이다. 소식을 전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천사는 말했다(눅1:19). 하늘나라의 소식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일은 천사를 통해서 역사하는 것이다. 언제나 시대가 바뀌어지는 큰 역사가 생길 적에는 천사를 동원하는 일이 있다. 양심시대가 끝나고 언약신앙시대가 올 때도 대표적인 사람 노아나 아브라함에게 천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언약신앙시대가 지나고 율법시대가 올 때도 천사의 역사가 모세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율법시대가 지나고 은혜시대가 올 때도 천사가 세례요한의 부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은혜시대가 지나고 환난시대가 올 때도 천사를 동원하여 택한 자를 한 데로 모으는 역사를 말한다(마24:31). 천사는 하늘에서 보냄을 받기 전에는 인간의 마음대로 오지를 않는 것이다.

  2. 택한 자를 인도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하나님은 인간이 모르는 비밀을 알려주는 일도 하는 것이다. 또는 사람을 소개해 주는 일도 있다. 고넬료는 비록 이방 사람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이였던 것이다. 천사는 그 가정에 나타나서 사도 베드로를 데려다가 복음을 받도록 끔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부탁을 받고도 등한히 알고 있으므로 복음을 이방에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천사는 보냄을 받았던 것이다. 또는 빌립을 천사가 인도해서 구스 내시에게 전도한 일도 있다(행 8:26). 우리는 말세의 때가 급할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로 인도해서 복음을 받도록 인도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사야 52:12를 보면 마지막 때 사명자에게는 주의 천사가 같이 할 것을 말하였다. 언제나 주의 천사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같이 활동한 것을 말한 것이다.

  3. 보호하기 위하여 활동한다 (단 12:1, 행 12:8-10)
  하나님은 필요한 종이나 백성을 보장시켜 주기 위해서는 천사를 동원하는 것이다. 사드락, 메삭, 야벳느고도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 12장에 북방 세력이 오는 큰 환난에서는 네 민족을 호위하기 위하여 대군 미가엘이 일어난다고 했다(시 34:7).

  4. 적군을 치기 위해서 천사를 동원한다 (사 37:36)
  하나님께서 적군이 피해를 못 주도록 천사를 동원하여 막아 주는 일도 있으니 히스기야의 기도에 이와 같은 일을 보여준 것은 앞으로 환난기에 이와 같이 행하시겠다는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 것이다(욜 2:20).

  결  론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종을 들어서 역사하는 일도 있고 천사를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일도 있고 마귀를 시켜서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천사나 마귀나 하나님이 부리는 것이니 최후의 승리는 천사와 같이 하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 것이다.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은 천사의 보호를 받을 만한 사람을 골라 세우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18장 11절 이하를 보면 백마 탄 자가 승리한 다음에는 마귀가 필요가 없으므로 무저갱에 가둔다는 것을 계20장 1-3절에 말씀하였다.


 
이방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됨
( 행 10 : 28 - 48, 요절 44 )

  서  론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실천하는 일에 순종한 것이 위력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방과 유대 사이에 막혔던 장벽이 무너진 일은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으로 역사하는 일이 아니라면 안되겠으므로 이방인에게 지시하고 유대인에게도 지시해서 그 장벽을 무너뜨리게 한 것이다.

  1 대지 : 유대인에게 지시하심 (28-29)
  베드로가 "유대인으로써 이방인의 집에 가서 교제한다는 것은 위법인줄 알지만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않고 왔노라"고 하였다. 이것은 베드로가 해변 욥바 피장이 시몬의 집에서 이층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던 것이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데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앞에 드리웠다. 자세히 보니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 소리가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할 때에 베드로는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라고 하였다. 또 소리가 있어 가로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음성을 세 번이나 듣고 있을 때에 이방 가이사랴에서 사람이 찾아 왔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어느 사람이나 다 깨끗할 것이니 차별 없이 세계적인 선교를 시작하라는 것인 줄 깨닫고 서슴지 않고 이방인의 집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2 대지 : 이방인에게 지시하심 (30-33)
  이방인 고넬료는 주의 천사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기도한 것이 하나님께 상달되고 빈민을 구제한 것이 하나님께서 기억 하셨다고 하면서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행 11:13-14). 이 때에 고넬료는 사람을 해변 욥바에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보내어 베드로를 청했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기 위해서는 직접 천사를 보내어 인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방 땅에 선교가 개척된 것은 하나님의 강권 역사로 시작된 것이다.

  3 대지 : 베드로가 완전히 깨닫게 됨 (34-35)
  베드로가 절대로 이방과 유대가 차별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받으시는 줄로 깨닫고 서슴지 않고 입을 열어 증거하게 되었다. 아무리 유대인이라도 하나님께서 하지 않는 자가 있고 이방인이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때부터 분명히 깨닫는 일이 있으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힘을 얻게 되었다.

  4 대지 : 화평의 복음을 전함 (36-42)
  화평의 복음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다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므로 하나같이 중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5 대지 : 성신이 이방인들에게 임함 (44-46)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성신을 부어 주실 때 방언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방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6 대지 : 물로 세례를 줌 (47-48)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신 일을 베드로가 실행하는 것이다(마28:19).

  결  론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자와 복음을 받을 자에게 하나같이 지시해서 이방의 전도문이 열리게 한 것이 세계 만국에 선교를 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기 위해서 직접 천사로 인도하고 보호하는 일이 있다.


 
성신의 보내심을 받아 선교를 하게 됨
( 행 13 :1 - 10, 요절 2 )

  서  론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바나바와 바울을 먼 나라 선교를 위하여 보내라는 지시가 있었다. 바나바, 바울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전도에 나섰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교파적인 단체에 선교 기관이 있어서 보낸 것이 아니고 성신의 명령에 의하여 순종한 것뿐이다.

  1 대지 :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신의 지시가 나타남 (1-2)
  성신의 지시라는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니 성신의 지시가 없이 중대한 일을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에 간절한 기도가 있을 때에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서 일하게 하라는 성신의 명령이 있게 되었다. 언제나 참된 종은 성신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런 성신의 역사가 없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자칭 선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신의 지시에 따라서 순종하는 것은 자칭이 아니고 사도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2 대지 : 안수하여 보냄 (3-4)
  사명적인 안수라는 것은 성신의 역사 없이 있을 수 없다. 성신의 역사가 없는 안수라는 것은 교회를 망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신의 역사 없이 안수를 하는 자도 안수를 받는 자도 형식을 따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사명적인 안수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은 사람이 명령을 받고 나가는 사람에게 안수하는 것이니 이런 안수는 복음을 세계 만방에 전파하는 위력이 되었던 것이다.

  3 대지 : 거짓 선지를 굴복시킴 (5-12)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쓸 때에 두 가지로 쓰시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눈물 흘려 가며 깨닫도록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시는 것이요, 진리를 듣고도 짐짓 반대하는 거짓 선지는 책망을 해서 굴복시키는 일을 하신다. 바나바와 바울이 유대인 거짓 선지를 책망하여 굴복을 시킨 것은 복음 전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행한 일이다. 과거에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기독교를 없애기 위하여 폭행을 한 것은 알지 못하고 한 일이라고 하였다(딤전1:13). 그러나 이 박수는 바울 앞에서 책망을 받고 두 눈이 어두워지게 된 것은 짐짓 복음을 듣고도 방해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성신이 충만하여 말하기를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 하겠느냐 하면서 박수를 책망했던 것이다. 복음 전도자는 조금도 불의를 용납치 말고 강하게 나가야만 위력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절대로 사단의 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오늘 우리가 배울 것은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과 성신의 명령에 따라서 사명자 안수가 있어야 된다는 것과 전도자는 사단의 자식을 용납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철저히 행해 나갈 때에 선교의 위력을 얻게 된다.

  결  론
  하나님은 언제나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택한 종을 들어서 쓰는데 있어서는 강권 역사가 있으므로 종된 자로써 보내심을 받게 되므로 만 열매가 많게 되는 것이다,
 


이방의 빛이 되는 선교 운동
( 행 13 :44 - 52, 요절 48 )

  서  론
  하나님의 말씀은 이방으로 퍼져 나가는 빛이 되었다. 모든 선지가 이방의 빛이 되리라고 말씀한 예언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복음이 전하여 지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발악적인 행동을 하였고 이방인들은 기뻐서 환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보아서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악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할 일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1 대지 : 유대인들이 시기함 (44-45)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에 이방인들은 환영하며 말씀을 듣고자 모여들었지만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하여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훼방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유대 나라가 망하게 된 동기다. 유대 민족이 예수를 반대하므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오늘날까지 남의 나라로 다니면서 압박을 받고 2차 전쟁 당시에는 독일에서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본다면 그 민족에게 얼마나 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말1:11에 해뜨는 곳에서부터 지는 곳까지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이루어진 것이다.

  2 대지 : 이방 중심으로만 선교 운동을 함 (46-47)
  어느 곳에 가든지 유대인들은 따라 다니며 복음 운동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이방인을 중심 하여 복음 운동을 하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예언이 응하는 일이므로 사도들의 마음까지도 다 이방을 향하여 나갈 마음이 불타게 했던 것이다.

  3 대지 :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음 (48-49)
  복음을 전할 때에 아무 사람이나 다 믿는 것이 아니고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사람들만 믿게 된다는 것을 사도들은 말하였던 것이다. 본문을 본다면 소위 성민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에게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가 적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 중에서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일이라고 본다. 진리 운동이라는 것은 사람의 자유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의 자유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역사라고 보게 된다.

  4 대지 : 발에 티끌을 떨어버림 (50-52)
  선교자들은 말씀을 전해도 짐짓 반대하는 자를 상종할 필요가 없고 그 사람에게서는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고 다시는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 자식이니 그와 동참한다는 것은 오히려 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자는 택한자를 찾기 위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니 조금도 불의의 세력에 눌림을 받지 않고 담대히 나서야만 위력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선교 운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 아래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도 없고 낙심할 것도 없이 강하고 담대히 나갈 때에 복음 전파의 큰 발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참된 전도자의 증거
( 행 14 : 8 - 18, 요절 15 )

  서  론
  오늘날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있지만 자기를 숭배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목적하고 활동하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너무나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참으로 전도하는 종들의 증거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대지 :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중심 하여 역사함 (8-10)
  '루스드라' 라는 땅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바울의 전하는 말을 듣는 것을 볼 때에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알고 바울이 큰 소리로 하는 말이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게 되었다. 이것이 그 땅에 큰 증거가 된 것이다. 언제나 참된 전도자는 이적을 중심하지 않고 말씀 하나를 증거할 때에 그 말씀을 믿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에 따라서 놀라운 이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떠나서 이적을 중심 한다는 것은 참된 지리를 증거하는 종의 역사라고 볼 수 없다.

  2 대지 : 신과 같이 숭배함을 엄금함 (11-15)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메라 하여 쓰스신당의 제사장들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한 일이 있었다. 이 때에 참된 사도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를 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인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라고 하면서 제사를 못하게 하였다. 이런 것을 본다면 바나바와 바울은 얼마나 참된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미혹시키는 거짓 선지라면 이런 기회를 타서 신과 같이 대접을 받고 숭배를 받으려고 하겠지만 자기를 숭배하려고 하는 일에 대하여 옷을 찢고 하지 못하도록 야단을 치며 말렸다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려는 종들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종들이므로 그 진리 운동은 세계를 정복하는 위력을 가져온 것이다.

  3 대지 : 하나님만 공경해야 될 것을 증거함 (25-18)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것을 묵인하고 계셨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은혜를 나리고 구원하는 때이니 하나님만 공경해서 복을 받으라고 증거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복을 받으라는 것을 목적하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종들이므로 가는 곳마다 핍박이 많이 있었지만 필연코 승리는 사도들에게 있게 된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선교 위력이라는 것은 언제나 핍박이 따르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표적과 증거를 나타내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문이 열려지므로 교회를 세우게 된다. 참된 전도자는 조금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것도 없는 것이다.
 


서방에 선교 개척
( 행 16 : 10, 24 - 34, 요절 10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아시아를 비롯하여 서방으로 전도를 할 수 있는 문을 열어 주신 것은 먼저 서방을 중심 하여 크게 발전을 가져오게 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입을 통하여 야벳이 창대하여 셈의 장막에 깃들인다고 하신 말씀대로 야벳에 창대한 축복을 주기 위하여 서방으로 선교할 문을 열게 한 것이다. 이것을 본문을 들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대지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심 (6-7)
  성령이 바울에게 역사할 때에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일이다. 바울도 성신이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모르고 방황하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서방으로 바울을 보내어 서방의 교회를 먼저 발전시켜서 아시아로 전도할 하나님의 경륜인 것이다. 이런 뜻이 있다는 것을 알 자는 심히 적었지만 오늘에 와서 경륜이 이루어질 때에 대표적인 바울에게 성신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한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2 대지 : 환상을 보여 주므로 서방으로 건너 감 (8-10)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이방 사람에게 전도하게 할 때도 환상을 보여 주었고 바울을 서방 사람에게 전도하게 할 때도 환상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욜2:28에 있는 말씀이 응한 것이다. 바울이 환상을 볼 때에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것이었다. 마게도니아 사람은 야벳의 장막에 있는 사람이니 만큼 색다른 민족이었지만 바울은 서슴지 않고 서방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용기 있게 건너가게 된 것이다. 순종은 제사보다도 낫다는 말과 같이 바울이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므로 서방에 큰 빛을 비추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3 대지 : 옥중에서 역사가 일어남 (24-30)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을 들어 쓸 적에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고 그 가운데서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이 서방에 건너가서 점하는 귀신들린 여자를 만났는데 바울에게 쫓아와서 소리를 질러 "이 사람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같이 여러 날 동안 떠들 때에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하는 즉시 귀신이 나가게 되었다. 이 귀신은 점을 치는 귀신으로서 귀신들린 여자의 주인이 이 일로 말미암아 돈을 많이 벌었던 것이다. 그런데 귀신이 나가고 점을 칠 수가 없을 때에 바울과 실라를 잡아 관원에게 끌고 가서 상관 앞에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는 것이었다. 그 때에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 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게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당할 때에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매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다. 그 때에 옥을 지키던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연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우리가 다 여기 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요"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므로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4 대지 : 세례를 베풀게 됨 (31-34)
  그 날 밤 옥을 지키던 간수의 온 가정이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으므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서방에 건너가서 처음으로 일어난 역사이다. 인간이 볼 때에 큰 환난을 만났지만 서방에 크게 전도할 문이 열려진 것이다. 선교의 위대한 힘이라는 것은 어디를 가나 승리를 보게 된 것이다.

  결  론
  가장 위대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업이라고 본다. 아시아 사람이 서방에 건너가서 제 일보로 대승리를 보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은 야벳의 장막을 구원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심판 날을 작정한 하나님의 역사
( 행 17 : 22 - 31 )

  서  론
  하나님은 심판 날을 작정하신 일을 하나님만이 아는 일이다(마24:36).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생이 심판날에 구원받도록 활동하는데는 어떠한 역사를 하느냐에 대하여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자세히 알고 전해야 될 책임이 있고, 또 믿고 순종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아는 작정한 날을 향하여 쉬지 않고 가고 있는 심판의 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과거나 현재나 다 그 길에서 생활하다가 끝을 맺는 것이다. 죽었다가 부활하는 자도 그 날에 가서 갚음을 받을 것이다. 주님 올 때까지 살아남은 자도 갚음을 받을 것이다.

  1.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6-27)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완전한 생활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금일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하나님을 바로 발견치 못하는 데서 헛된 수고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아덴 땅에서 알지못하는 신의 단을 보고 거기서 전도를 했던 것이다. 많은 종교가 다신 숭배를 하는 것은 어느 것이 참종교인지 모르니까 덮어놓고 섬기는 것이다. 하늘에 별을 섬기고 산에서 나무를, 물에서 물을, 돌에서 돌을 섬기는 것은 참신이 누구인지 발견치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금일에 과학자들도 하나님을 바로 찾지 못했기 때문에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못할 적에 무신론이요, 그 하나님을 찾을 적에 완전한 지식인 것이다. 세계를 통일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라는 것을 사11:9절에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아보려는 마음을 가진자에게 나타나시되 중심을 보시는 것이(마5:8) 하나님을 찾되 깨끗한 양심대로 살아보려는 마음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과거에도 마음이 깨끗한 생활을 하려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지시 한 일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시대 사람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시인들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2.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역사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라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심판하기 위한 종말의 역사이다. 과거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에게는 약간의 부족이 있어도 허물 치를 안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 동양에 성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천애인을 부르짖는 것도 그 시대에 한 등불 같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옛 시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지 아니했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역사한 사실도 있는 것이다(행10:34-35).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도 회개치 않는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복음으로 심판하기 때문에 고넬료는 복음을 믿기 전에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베드로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행10:35).

  3.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로 심판이 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로는 그 부활증거를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생명의 은혜를 준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안다 하드라도 십자가의 부활을 믿음이 영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으로 영생을 줄 수 있는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벧전1:3-4). 그러므로 이날까지 세계 만방에 전한 증거는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한 것뿐이다(행17:31,눅24:46-47)

  4. 심판시의 증거 (계14:6-7)
  이것은 심판시기에 주 강림 후에 바벨론이 하루아침에 망할 때 심판하는 영원한 복음이다. 이것은 부활을 믿는 자라도 짐승의 표를 받으면 육체적인 구원을 심판 날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그 날이 오기 전에 세계 만방에 전하는 역사와 그 날이 올 때 전하는 역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모르는 아덴 사람에게 전한 말씀이 과거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허물 치 아니했거니와 지금은 회개치 안으면 멸망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말세 증인이 할 말은 과거에는 말세관이 혼선되었어도 허물치 안했거니와 이제 와서 만일 짐승의 표를 받으면 용서 없이 죽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시행할 때가 되기 전에는 허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께서 함께 하심
( 행 18 : 1 - 11, 요절 10 )

  서  론
  바울은 하나님이 돕는 역사가 아니라면 서방에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를 향하여 건너가게 된 것은 분명히 주께서 서방에 뜻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용기 있게 활동할 때에 다음과 같이 했다.

  1 대지 : 장막을 만드는 업을 함 (1-4)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한다 하여도 사람이 할 일을 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업을 하면서 서방에서 전도를 한 것이다. 아무리 주님이 함께 하는 역사가 있는 신령한 종이라도 사람이 기술적으로 할 일은 했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이 함께 한다고 하면서 정신 작용에서 기술적으로 하는 일을 필요 없게 본다면 이것은 사도 바울적인 사상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교회 확장을 시키는 일은 성신 역사에만 있고 사람의 할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는 사명자들에게 사람의 할 일을 하게 하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친히 역사를 나려 행하시는 것이다. 어떤 종이 자기의 할 일은 하지 않고 전부를 주님께만 만 맡기고 가만히 있다는 것은 탈선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2 대지 :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증거함 (5-7)
  하나님의 종은 자행자지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증거해야만 교회가 확장되는 것이다. 어떤 종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반대가 있고 핍박이 있다고 하여서 증거를 못한다는 것은 말씀에 붙잡힌 종이라고 볼 수 없다. 말씀에 붙잡힌 종이 아무리 대적이 훼방을 하여도 더 담대히 증거할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사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이 사람을 사로잡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언제나 참된 종은 말씀에 사로잡혀 증거하면 항상 주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가 있다.

  3 대지 : 택한 백성을 찾기 위함 (8-11)
  교회라는 것은 아무 곳에나 사람의 마음대로 세울 수가 없다. 택한 백성이 있는 곳에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종을 들어 쓰기도 하시고 교회를 세우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두려워 말고 담대히 전할뿐이다. 사도 바울이 성신의 인도를 따라서 복음을 전할 때에 택한 백성을 찾으시는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셨다. 두려워 말고 잠잠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며 해롭게 할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결  론
  사도 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해서 전도비를 사용하여 교회를 세울 적에 간 데마다 주님께서 함께 하는 증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절대로 원수를 무서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나가므로 서방에 교회를 확장시킨 것이다.


 
로마에 가서 증거할 것을 주께서 말씀하심
( 행 22 : 1 - 21, 23 : 11, 요절 22 : 21 )

  서  론
  사도 바울은 안디옥에서 사명적인 안수를 받고 이방을 중심 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증거하고 로마에까지 증거하게 된 일을 공부한다.

  1 대지 : 예루살렘에서 증거한 일 (22:1-21)
  바울이 이방에 교회를 세울 때에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하지 말고 규례를 지키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것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바울은 담대히 증거하게 되었다(21:21-40).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에 엄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었던 자다(22:3). 그러므로 기독교를 핍박해서 사람을 죽이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가두는 일을 했었다(22:4). 그는 대제사장에게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누구든지 예수 믿는 사람은 만나는 대로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던 자이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갈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비춰지는 것을 보고 땅에 엎드러져 음성을 듣게 되었다. 들리는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울이 뉘시오니까 할 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였다. 그러나 옆에 있던 사람들은 빛은 보았지만 말하는 음성을 듣지는 못하였다. 사울이 말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할 때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너의 모든 할 일을 거기서 누가 일러주리라" 하시었다(9). 이 때에 사울은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앞을 보지 못하고 눈이 어두워졌다. 그러므로 함께 가던 사람들이 사울을 끌고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사울을 찾아와서 세례를 베풀어주고 안수할 때에 사울은 성신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 그 때부터 바울은 담대한 종이 되었다(10-16). 그 후에 바울이 기도하는데 비몽사몽간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에서 떠나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을 하시었다(17-21). 그 때부터 바울은 이방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 어디에 가나 서슴지 않고 듣든지 말든지 자기가 받은 것을 증거할 때에 예루살렘에서도 대중을 모아 놓고 증거를 하는 것이었다. 듣던 대중들이 감동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서 바울을 때리고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지만 오히려 바울은 로마에까지 증거하게 된 것이다. 참된 증인이라는 것은 그 증거를 인하여 핍박을 당해도 서슴지 않고 증거하는 사람이다.

  2 대지 : 주께서 바울에게 담대함을 주신 일 (23-11)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들어 쓸 적에 어려운 환난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이 있게 하면서 두려워 말고 담대히 증거하라고 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는 것이다. 

  첫째 : 충성된 종이 되어야 왕권을 받게 때문이요.
  둘째 : 마귀의 세력아래서 주의 백성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요.
  셋째 : 더 큰 상급을 주기 위한 모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종이나 참된 종이 더 환난이 많게 되는 것은 그 종의 축복이 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진보가 되는 것이다. 바울도 환난을 만나므로 로마에까지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다. 인간이 볼 때에 실패를 당하고 죽는 것 같으나 그 길을 감으로서 서방에 교회가 확장되었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자기를 핍박하던 자라도 강권으로 불러서 아무리 핍박이 와도 자기가 받은 경험을 말하면서 증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이 그 말에 감동을 받게 되고 감동을 받는 사람이 나가 전할 때에 핍박하던 사람이 감동을 받아 믿게 되고 계속으로 이렇게 된 것이 세계적인 복음 확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박해의 종교라고 하리만큼 누구나 다 박해를 하던 사람이 믿고 자기가 박해를 하던 것같이 자기도 박해를 받으며 참고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의 승리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로마에 전도의 문이 열림
( 행 28 : 16 - 23, 요절 23 )

  서  론
  바울이 로마로 가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소송에 걸려서 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자라는 말을 부쳤지만 바울은 아무런 죄가 없고 이런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어나게 되고 오히려 서방에 교회를 확장시키기 위하여 전도의 문을 열어주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1 대지 : 소송한 일이 전도의 조건이 됨 (16-20)
  바울은 로마에 가서 유대인 중에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이게 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다고 말함.
  실지는 바울이 유대교를 훼방을 하든지 배척한 것이 아니고 유대교가 이러한 복음을 깨닫고 복을 받기를 바란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담대히 말했던 것이다(롬9:1-3).

  둘째 :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말함.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므로 소망이 있는데 이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바울의 마음에 통분이 생각을 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고대하던 나라가 메시아를 반대한다는 것은 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 대지 : 바울의 사상이 어떠한 것을 듣고자 함 (21-22)
  기독교는 바울의 사상을 가져야만 되는 것이다. 바울의 사상은 유대 주의적 사상이 아니고 십자가 중심에서 세계 인류는 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다는 그 말씀을 중심한 사상이다. 그러므로 유대교 사람의 사상은 독선을 가지고 이방인에게 구원이 없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를 원수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을 염병같은 이단이라고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사상은 바울이 가지고 나온 사상이라야 정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국을 세운 것은 세계적인 구원의 종교를 이루기 위한 것이니 구약의 모든 말씀을 육적 이스라엘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상이 아니다.

  3 대지 : 하나님 나라를 증거함 (23)
  바울은 일자를 정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되 모세 율법과 선지서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을 권하며 합법적인 강론을 했던 것이다. 로마는 로마 대제국의 수도이니만큼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 합법적인 변론을 듣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변론적인 강론을 할 때에 큰 열매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세계적인 복음 확장의 발판이 되었다. 로마에 기독교가 들어가므로 로마는 기독교의 발전 근본이 된 것이다. 한 때는 네로 황제 박해로 무서운 환난이 있어 많은 순교자를 내었지만 카타콤 시대를 지난 후에 로마 제국은 기독교 종교국이 되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는데 있어서는 억울한 피가 그 땅을 적시게 되는 일이 있었다.
 
  결  론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온다 하여도 일할 문을 열어 주는 일이 있으므로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하고 로마에 끌려 갈 때에 여러 가지 풍랑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로마에서 크게 이루어진 것이다.


 
선지서를 전하는 바울과 말세증인
( 행 28 : 23 - 28, 계 10 : 5 - 7 )

  서  론
  하나님의 말씀인 선지서는 신약 성서의 원체와 같은 의미를 깊이 알고 우리가 성경을 논해야 될 것이다. 바울도 로마에 가서 이사야서를 들고 강론을 했던 것이다. 말세의 증인도 선지서를 들고 증거할 것을 말했다. 그러면 바울의 강론과 말세 증인의 증거의 차별 점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성서의 혼선을 가져올 염려가 있다.

  1. 선지서를 강론하는 바울 (행28:23-28)
  바울은 일생 동안 어디로 가나 선지서를 강론했다. 심지어 로마에 가서 셋방을 얻고 오는 사람마다 선지서를 강론했던 것이다. 그 목적은 예수님 한 분만을 이방인에게 말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사명은 여기에 국한된 줄 알므로 선지서 전체를 강론할 자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국한된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엡3:1-3). 바울은 계시로 받되 선지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일을 밝히 증거할 수 있는 영감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을 정확히 선지서를 들어서 강론을 권위 있게 한 사람은 사도 바울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친 수로 신약 성경 십사권을 쓰게 되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특별한 은혜를 받은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바울의 강론이 없었던들 기독교의 십자가의 복음은 확실한 광명을 이루지 못할 염려가 없지 않는 것이다. 그는 특히 바리새 교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성서에 능한 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구약 성서의 학자적인 자격을 가진 바울은 계시를 아울러 받게 될 때 천재적인 강론을 말로도 하고 붓을 들어 쓰기도 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일을 분명히 복음적으로 알려면 바울 서신을 볼 필요가 있다.

  2. 선지서를 전하는 말세 증인 (계10:5-11)
  사도 요한은 묵시를 볼 때 다른 천사가 몸에 구름을 입고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같이 부르짖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큰 소리로 외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우렁찬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천사가 전한다는 것을 본 것은 아니고 말세의 사명자가 이와 같이 외쳐야 할 광경은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한 일이 선지서와 같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제목으로 말했다면 말세 증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비밀인 선지서와 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을 목적한 해석이다. 만일 심판 날에 가서도 바울만 증거하고 그밖엔 증거 못한다면 이 사람은 말세 증인은 못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교회에 가서 예수 믿으시오 하며 전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바울의 강론인 편지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았다면 완전 계시인 계시록을 통하여 심판기에 될 일을 분명히 알되 선지서를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바울이 이사야서를 드는 것은 그리스도 한 분만을 목적하여 들었고 말세 증인이 선지서를 드는 것은 심판기에 남은 종과 남은 백성들에게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데는 어떻게 된다는 사실을 강론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가 세상에 와서 행한 일을 밝히 증거키 위한 목적이요, 말세 증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으로써 당할 환난과 또는 환난가운데 받을 보호와 환난 중에 역사하는 역사와 거짓 선지자의 미혹을 바로 알려주어서 미혹 받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안식에 들어갈 백성들을 살길로 인도하자는 목적이다.

  결  론
  우리는 바울의 서신과 계시록을 반대적으로 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편지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고 계시록은 예언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했으니 이것을 합할 수가 없다. 즉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말세 증인이 믿음으로 천당 간다고 해도 위험이요, 바울이 증거할 때 예언을 지켜야 한다고 했어도 탈선이 될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일만 바로 증거했기 때문에 탈선된 교훈은 조금도 강론한 일이 없다. 말세 증인은 심판 날에 재앙을 받지 않도록 하는 사명이 있으니 이 예언의 말씀을 증거해야만 탈선이 없을 것이다.


 
바울이 담대히 복음 전파함
( 행 28 : 24 - 31, 요절 31 )

  서  론
  하나님께서 특별히 바울에게 담대한 힘을 주시어 로마에서 복음 전하게 하신 것은 로마를 중심 하여 세계적인 복음 확장을 가져 올 경륜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강권으로 로마로 인도하되 원수들에게 결박을 당하여 머나먼 지중해를 건너서 로마로 가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벳을 창대게 하는 일을 할 때에 로마를 중심하여 역사를 하게 하신 것은 로마 제국이 가장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 수도로 바울을 보내어 거기서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하게 했던 것이다.

  1 대지 : 반대자를 두려워하지 않음 (24-27)
  바울은 마음이 강퍅한 유대인에게 무서운 박해를 많이 받았지만 거기서 약해지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을 생각하고 오히려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에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보고도 도무지 알지를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았기 때문 인줄 알고 거기서 완악한 자들에게 조금도 눌림을 받을 필요는 없다. 듣든지 말든지 담대히 전하는 것이 종된자의 사명이다.

  2 대지 : 구원을 이방인에게 보내신 줄 알고 담대함 (18)
  바울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을 것을 확신하고 담대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모든 성경은 세계 민족적인 구원을 가르친 것인 줄 깨달은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전력을 다 했던 것이다.

  3 대지 : 금하는 사람이 없게 됨 (30-31)
  바울은 이태동안을 자기 셋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은 다 영접하여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것을 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에서 자기 택한 백성을 찾기 위해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정확한 장소를 택하는 일이며,
  둘째는 누구든지 오는 사람을 반가이 영접하는 일이며,
  셋째는 담대히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담대하지 못할 때에는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역사를 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전하는 사람이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은 벌써 사단에게 눌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사람이 억지로 말한다는 것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신의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서방으로 교회를 확장시키려면 로마에 복음을 전하여야만 되겠으므로 바울에게 무서운 환난을 만나게 했던 것이다. 이 환난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총궐기하는 환난이다. 유대인 중에도 바리새교인이요, 바리새 교인 중에서도 최고의 열심이 있는 사람이 기독교를 전멸시키려 나섰던 것인데 다메섹 광야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본격적으로 이방중심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보다도 교회를 더 많이 세우고 율법과 은혜를 잘 구분시켜 유대적인 사상을 버리고 세계적인 사상을 가지고 나설 때에 아무리 따라 다니면서 유대인들이 방해를 해도 점점 더 강하게 일어나므로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만 오면 총궐기하여 바울을 없애기를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을 보고 유대인들을 전부 격동을 시켜서 죽이려 할 때에 바울은 로마 국적에 이름이 있는 사람이므로 유대인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을 함부로 피해를 줄 수가 없게 되어 로마 황제에게 결판을 내어 달라는 것이다. 로마인들이 이 일을 알아본즉 로마 제국에는 하등에 관계가 없고 단지 종교 문제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바울은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고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환난을 일으킨 것은 오히려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전도의 문을 열어 주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참된 종에게는 더 형통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 롬 2 : 1 - 8 )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해서 무조건 판단을 나리시는 것이 아니요, 용서하는 법을 세우시고 얼마든지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그런데 이러한 법을 세우시고 끝까지 기다리는데도 불구하고 순종치 않을 때에는 의로운 판단을 하나님께서 나리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옴 (1-2)
하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는 자를 진리대로 판단하신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가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의 마음은 악에 속해 있는 마음이다. 악이라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남을 판단하는 일이다. 자기 허물은 숨기고, 남의 허물을 드러내려는 사람은 그 자체가 형제를 해코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니, 그 마음은 사단에 속한 마음이다. 남을 살려 보려는 마음은 간절한데 실수가 있는 사람은 진리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상을 보시고 불쌍히 보시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회개하지도 않고, 남을 공연히 판단하며, 정죄하고자 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행동이므로 주님께서 바리새인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을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대적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판단은 진노로 옴 (3-5)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판단을 나리시되 죄를 범하는 그 즉시에 나리시는 것이 아니요, 모든 죄를 합해서 진노의 날에 나리시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날, 그 시에 판단을 나리신다면 이것은 의로운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부족이 있다 하여도 인자하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시어 각 사람에게 너그러이 대해 주시는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련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너그러이 참으시고 기다리는 데도 불구하고 짐짓 하나님을 만홀히 알고, 그 인자하심을 오히려 멸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며, 하나님은 무능하다고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인도하실 때에 겸손히 순종하여야 하며, 길이 참으실 때에 풍성한 은혜를 받아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될 인격을 하나님께 받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자는 날마다 진노를 받을 일을 쌓고 있는 생활이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실 때에 같이 참고 나가는 자는 상급을 쌓아 놓는 생활이다.

3. 하나님의 판단은 구하는 대로 옴 (6-8)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무엇을 구하든지 구하는대로 주신다. 그러므로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노로 갚으시는 것을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절대적인 자유를 주어 구하는 대로 주시되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줄 수 있는 공로를 독생자로 이루어 놓으시고, 아무리 죄가 있다 하더라도 속죄를 구하면 속죄를 주시는 것이요, 사랑으로 역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진노를 나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다. 죄 중에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은 죄이다. 하나님께서 큰사랑을 인간들에게 베풀어도 그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큰 죄로 판단을 나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믿어야 한다.

첫째 :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신다.
둘째 : 하나님께서는 진리대로 판단하신다.
셋째 : 하나님께서는 행한대로 판단하신다.

오늘날 소위 신자라 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무시하고, 공연히 남을 이단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자기 교파를 내세우고자 하며 자기의 권리를 내세우고자 하는 것은 죄 중에 가장 큰 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죄가 아니요, 교회 안의 죄이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은 거룩한 천국과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없이는 거룩한 나라를 이룰 수가 없으므로 모든 말씀을 세울 때에 인생이 할 수 없는 일을 다 해주신다는 언약을 세우고 그 말씀에 의하여 의로운 판단을 나리시게 된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자
( 롬 7 : 1 - 6 )

하나님은 열매를 요구하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인생을 향하여 역사 목적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는 동시에 그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또는 영광을 주기도 하신다.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되므로 열매를 맺는 자가 될 수 있다.

  1. 율법에 대하여 죽는 일이 있으므로 (1-4)
율법이라는 것은 죄를 지으면 용서없이 죽이는 것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죽음으로만이 죄의 권세를 벗어날 수가 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은 자라면 반드시 죽기 전에는 그 법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값은 율법대로 용서 없는 사망이다. 그러므로 죽을 자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다. 이제 그리스도의 대신 죽은 공로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믿는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인정을 하시기 때문에 죽을 사망의 법을 벗어나게 되므로 하나님은 율법적인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율법의 죄 대가를 완전히 십자가로 청산했고 또는 죽을 사람을 살렸으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한 지체로 하나님은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승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피조물된 인간이 범죄한 대가를 조물주가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었다는 그 조건이 얼마든지 피조물된 인간의 죽을 사망을 면하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열매를 맺으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는 그 대가를 완전히 십자가에서 청산했으므로 그 죄는 완전히 청산해 진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그리스도는 열매를 맺게 할 역사를 그에게 나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마귀의 흑암을 벗어나지 못한 자라면 완전히 죽은 단계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기독교의 신앙의 산 체험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지는 체험이 완전한 증거가 되는 일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체험이 없다면 완전히 죽는 자리에 이르기 위하여 십자가를 바라보고 눈물 흘려 간구해야 될 일이다. 금일에 기독교 교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어지는 체험이 없이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합법적인 신앙 노선에 섰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자는 아무런 열매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든다면 남편이 있는 여자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그 남편의 법에 매여 있고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벗어남과 같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야 율법을 벗어 날 수 있다. 신자가 죄질 마음이 생기는데 억지로 율법이 무서워서 떠는 마음으로 있다면 이 사람은 율법아래 있는 자요, 죄에 대하여 내가 죽고 죄를 미워하고 죄의 사상이 없어지고 정욕이 죽은 자가 되어서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음에 죄를 지을 때에 죄 아래 있는 자라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 중심으로 죄를 지을 때에 아무리 도덕적인 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한 열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활이다 (5-6)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가 된 자에게 항상 영을 새롭게 해서 새로워지는 심령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할 때에 그것을 기꺼이 받으시며 그 사람이 일한대로 친히 갚아 주는 일을 하시므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완전한 그리스도왕국을 이루게 된다. 어떤 신자가 그 영이 새로워지지 못하고 피곤해지는 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한 증거라고 보게 된다. 영이 새로워지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뜻으로 나리는 역사이다. 율법이라는 것은 영을 새롭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어떤 의식이나 도덕이나 수양을 목적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 상태가 매말라지는 것이요, 모든 일을 영이 새로워지는 것을 목적하고 이루어지는 일이 될 때에 이 사람은 하나님을 상대해서 교통하는 영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세계가 없다면 자동적으로 외식을 가져오게 된다.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자나깨나 그 영이 새로워지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겸손한 자에게만이 있는 것이다(사 57:22).

3. 담대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요일서 3:21-22)
기도라는 것은 심령이 새로워진 자로 담대히 원수를 대항하여 싸워 나아갈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열매가 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으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이다(롬 8:37).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영이 새로워진다 하여도 자기 사명에 불타는 마음으로 원수를 무서워 하지 않고 담대히 나가는 일이 없다면 승리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고난을 극복하고 나갈 때에 많은 열매를 맺는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큰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은 마귀세력을 들어서 대항을 시켜보는 것이니 담대한 마음으로 싸울 때에 하나님은 승리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 사람을 통하여 있을 때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한한 축복을 주고자 하시는 신이시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기업은 전부 열매 있는 자의 것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열매가 없어도 상급을 준다는 사랑이 아니요, 열매를 맺도록 역사해 주시는 동시에 그 열매를 따라서 상급을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곤고한 사람으로 감사할 일
( 롬 7 :22 - 8 : 2 )

인생에 있어서 곤고한 생활이 있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곤고한 자체는 아주 버림을 당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 택함 받은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곤고한 것은 택한 자에게 없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택한 자가 하나님을 경외해도 완전히 성신으로 이루어지는 인격을 받기까지는 자신 속에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라는 것은 두 가지 법이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고, 둘째는 그 법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 첫째 사람은 양심이라 볼 수 있고, 둘째 사람은 육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택한 자라도 육체의 사람이 양심의 사람을 이기게 되면 죄를 짓고 양심의 사람이 육체의 사람을 이기면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곤고한 사람이 감사할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과정 (22-24)
현재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감사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는 자는 적다고 본다. 왜냐하면 죄와 싸워 보려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불신 사회는 말할 것도 없지만 교회 안에서도 죄와 싸워 이겨 보려고 곤고를 느끼는 사람이 적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죄와 싸우기에 곤고한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케 하고자 하는 사랑이 계신 동시에 죄와 싸우기에 곤고한 사람에게 완전이란 것을 주기 위해서 역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싸우는 자는 그 영이 하나님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요, 완전해 보려고 애쓰므로 곤고한 자이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요일서 5:16에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범죄자를 위하여 저희에게 생명을 주시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예를 든다면 군대가 적군과 싸우다가 피곤하여 쓰러질 때는 그  사람을 보호할 책임이 군부에 있는 것같이 이 세상 전쟁에서 죄와 싸우다가 곤고한 자를 하늘 본부에서 그를 버리지 않고 그에게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있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2. 예수로 말미암아 감사할 일 (25)
그리스도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것이니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는 자를 그 마음의 소원대로 이루어 주는 역사를 하는 것을 성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해짐으로써 성신을 받는 것이 아니고 완전해 지고자 하여 죄와 싸우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이 감사할 일이 있게 된다. 

  결코 정죄함이 없음(8: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누구든지 중심으로 죄를 미워하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결코 정죄하지 않고 그 사람을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금 역사하는 것을 십자가의 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참된 해방을 줌(8:2).
이 해방이라는 것은 성신의 법으로 말미암아 주는 해방이니 이것을 십자가의 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죄를 없이하는 능력이니 성령이 와서 역사할 때 십자가의 능력이 믿는 자에게 오므로 죄를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은 전부가 성신의 법으로 되는 것이니 우리는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는 생활이다. 하나님은 성신의 법에 의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전부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뿐이라는 열매를 성령으로 맺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으로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루어 주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니 사랑이라는 것은 당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결  론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생명인데, 육체의 생명이 있는 몸에 곤고를 느끼게 되고 영적 생명이 있는 마음에 곤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와 대립하는 세상에서 육이나 영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음으로만이 곤고한 몸과 영은 소성을 받게 되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영적 곤고를 느끼는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감사하게 될 때에 그는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게 되었다(8:18).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자기에게 참된 해방이 온 것을 받는 생활에서 고난을 당한 것은 죄로 말미암아 오는 고난을 주시기로 작정했고 또는 원하시는 것이 아니요, 자기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도 받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받는 고난을 영광으로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생활에서 기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바울은 넉넉히 이기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8:37-39). 복음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전부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사하는데서 모든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곤고한 사람을 찾는 사랑이요, 죄를 사하기를 원하는 사랑이요, 해방을 주기를 기뻐하는 사랑이요, 일한대로 갑절이나 갚아 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사랑을 받은 자는 억지로 하는 일은 전혀 없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영광으로 아는 생활에서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 롬 7 : 6 )

서  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유형적인 제물이나 의식적인 규례나 율법적인 교훈으로서가 아니요, 오직 영의 새로운 것으로서 섬기는 것을 완전한 그리스도의 참된 신앙이라 하는 것이다. 이제 영의 새로운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하여 말한다.

1. 죽을 것이 죽어야 될 것이다 (6)
여기에서 죽는다는 것은 육체의 정욕이니 영적 생명은 아니다. 인간 자체의 죄악의 본질인 그 정욕이 죽은 것을 가르친 것이니 이것이 육체 속에서 역사함으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의 새로운 것이란 것은 율법적인 신앙으로가 아니고 순수한 복음적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만이 영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2. 진리의 젖을 사모하는데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벧전 2:2)
영의 새로워지는 것은 신령한 젖을 사모함으로서만이 새로워져 자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사모하는 마음이 없이 되어 있다면 이것은 원체로 오는 진액을 받지 못한 나뭇가지와 일반일 것이다. 나뭇가지가 진액을 받게 됨으로 더 무성할 수 있는 진액을 흡수함과 같이 항상 중심에 사모하는 것이 있다면 영의 새로운 것이 날마다 풍성하여질 것이다.

3. 지식이 새로워지는 일 (골 3:10)
우리의 영이라는 것은 지식을 따라 새로워지나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랄 때 영은 새로워지느니라(골 1:10). 사람의 키가 자람에 따라 육적 지식이 새로워짐 같이 영이 자라는 동시에 영적 지식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4. 원망과 시비가 없이해야 할 것이다 (빌 2:14-15)
아무리 은혜를 받고도 남을 원망하고 시비하는 자가 된다면 그 영은 새로워지는 빛을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영이라는 것은 원망이란 것이 있을 때 스스로 죽고 마는 것이다.

5. 상 주심을 믿고 일하는 것이다 (히 2:6)
영이란 것은 아무 활동이 없으므로 둔해지고 활동이 있으므로 새로워지는 것이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상 주심을 믿고 싸우는 생활이라야 할 것이다(빌 3:14-15).

결  론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사는 생활을 떠나서 영의 새로움으로서 섬기는 생활이 산 생활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육으로 떨어지면 동물에 지나지 않는 타락이 있을 것이요, 영이 새롭게 됨으로 섬기는 생활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룸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을 볼 것이다(엡 4:14). 이제 영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음으로 그 인격은 장부와 같이 승리를 이룰 수 있는 열매를 갖게 될 것이다.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
( 롬 7 : 15 - 23, 8 : 12 - 17 )

인생이라는 것은 모양은 하나이지만 두 가지 사람이 있다.
육의 사람이 있고 영의 사람이 있는 것이다. 신앙 자로서 육에 속한 인격을 가질 때와 영에 속한 인격을 가질 때의 차이점은 사도 바울의 간증적인 글을 보아서 알 수 있다.

1. 육의 사람 (롬 7:15-21)

첫째 : 죄에 끌리는 사람이다 (15-17)
사람이라는 것은 죄에 끌리면 육에 속한 사람이요 영에 끌리면 영에 속한 사람이다. 아무리 신자라도 중심에는 죄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죄에 끌리면 아직까지 그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죄가 그 몸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몸에 죄의 역사가 있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육에 끌려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째 : 중심에 원하는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18-20)
마음에는 원해도 그 원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심령이 자라지 못하고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심령이 된 증거이다.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는 육에 있는 죄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 육에 속한 사람이다.

셋째 : 두 가지 법을 섬기게 되는 자이다 (21-23)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세상에 나가면 세상에 끌려서 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가는 일도 있을 때가 있다. 육의 사람이라는 것은 도저히 진리대로 실천할 수가 없는 인격이다(8:7).

2. 영의 사람 (롬 8:12-17)

첫째 : 영으로 육의 행실을 죽인 자이다 (8:12-13)
신앙 생활은 성신의 역사로 몸의 행실이 죽어지는 일이 있기 전에는 도저히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몸에 병이 있는 아이가 그 몸이 자랄 수 없는 것같이 심령에 죄가 남아 있는 자는 그 영이 자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심령으로 몸의 행실이 다 죽게 될 때에 그 영은 자유롭게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되므로 나날이 영적 발전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 영이 그 몸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 성령의 인도가 같이 하는 자이다 (14-15)
성신의 인도라는 것은 육에 속한 사람에게 있을 수 없고 육의 행실이 완전히 죽게 될 때에 성령의 인도 하에서 움직이는 생활을 하게 된다. 성령은 역사할 때에 먼저 그 몸의 마귀세력을 없이 하고자 하는 것이 성신의 원하는 것이니 모든 육체의 행실을 죽이고자 노력할 때에 성신은 강하게 역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은 마귀와 절대 타협할 수가 없으므로 조금이라도 죄를 용납하고 숨기는 생활을 할 때에 성신은 그 사람을 인도하고 다스리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신의 인도라는 것은 거룩한 생활로 인도하는 것이다.

셋째 :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고난을 이기고 나아가는 사람이다 (16-17)
육에 속한 사람은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극복할 자격이 없고 영의 사람이 죄악의 세력을 이기고 나아가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될 때에 육의 안락을 요구치 않고 영원한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기뻐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은 억지가 아니요,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다.

결  론
첫째아담이 범죄 하므로 육에 속한 사람이 되고 둘째아담 그리스도가 승리하므로 성신의 역사가 타락한 인간에게 은혜로 올 때에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따라 움직이는 생활을 말한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므로 승리의 열매가 있게 되고 승리의 열매가 있으므로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참된 해방을 받은 자격
( 롬 7 : 22 - 25, 8 : 1 - 7 )

서  론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은총을 받는 것도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도 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용서도 법을 따라 있고, 성신의 역사도 법을 따라 있기 때문이다.

1.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 (롬 7:22-23)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것이다. 사람 앞에 실천은 못하나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참된 해방인 성신의 역사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2. 죄악의 고통을 느끼는 자 (롬 7:24)
죄를 가슴 아프게 알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그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의무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병든 사람에게 라야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죄악의 고통을 당하는 자를 고치러 오셨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오는 자 (8:1)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품안을 찾아만 온다면 그리스도는 결단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탕자가 아무리 실패를 했지만 아버지 품안으로 돌아올 때 즐거운 잔치를 하며 환영한 사랑같은 것이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

4.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 (8:4)
누구든지 성신의 인도를 받아 보려고 하는 자라면 성령은 책임지고 인도하고 다스리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은 피조물된 인간들이 마귀의 권세 아래서 포로된 것을 보시고 그저 있을 수 없는 뜨거운 열심을 가진 신이시니 누구든지 위의 네 가지와 같이 행하려는 자를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역사
( 롬 8 : 1 - 2, 34 - 35 )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역사하시는 일은 죄를 없이 하고자 하여 아들을 죽게 하신 것이니 결코 정죄하지를 않고 역사하시므로 당신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되 다음과 같이 하신다.

1.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는 역사 (1)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불러서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역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택한 자를 친히 찾으시는 역사로, 둘째는 강하게 붙들어서 인도하시는 역사로, 셋째는 완전히 은혜로 다스리는 역사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려운 일이 올수록 어린이에게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절대로 택한 자를 당신의 품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역사하되 신자의 마음이 조금도 세상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세상의 쓴잔을 주어서 시련을 시키는 일도 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품안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징계하는 일이 있다(계 3:19-20).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 죽은 피의 공로로 얼마든지 용서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죄를 범해도 품에 안아 준다는 것이 아니고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항상 택한 자를 다스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승리가 없다면 죄인을 불러서 자기 안에 둘 수가 없을 것이로되 택한 자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으므로 택한 자를 강권으로라도 당신 품안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2. 성신의 법으로 행하는 역사 (2)
성신의 법이라는 것은 생명의 활동으로 역사하는 것인데 십자가 해방의 역사이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믿어지도록 하는 것도 성신의 법이요, 죄를 이길 수 있게 역사하는 것도 성신의 법이니, 성신의 법이라는 것은 택한 자에게 무조건 역사하는 법이다. 십자가라는 것은 불택 자를 위한 십자가가 아니요, 택 자를 위한 십자가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에 벌써 택한 사람을 구속하는 제사가 완성되었으므로 택한 자를 강권으로 성신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신을 찾아서 받는 것이 아니요, 성신이 택한 자에게 강하게 역사하기 위하여 다스리시므로 죄를 회개하지 않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고 죄를 고의적으로 짓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의라는 것은 우리가 구할 때에 역사하는 것보다도 구하기 전에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이니 택한 자는 십자가의 의가 믿어지면서 회개하게 되는 역사가 심령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 사람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에게 성신의 법이 해당되므로 택한 사람은 그 법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결심이 아니요, 자기도 모르게 성신에게 이끌려서 믿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택한 자가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고 정죄에 이르지 않도록 성신의 법이 그를 다스리는 것이다.

3. 사람이 정죄할 수 없는 역사 (34-35)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정죄하지 않고 성신의 법으로 다스릴 때에 어느 사람이나 그 사람을 다스릴 권리가 없고 그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 만일 기독교 신자가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든지 어떤 사람에게 정죄를 받아 은혜가 떨어진다든지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택한 자를 위하여 간구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간구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첫째는 범죄가 있어도 기도하시고, 둘째는 위험한 일을 당해도 기도하시고, 셋째는 크게 역사할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택한 자를 정죄할 수는 없다. 아무리 훼방을 하고 거짓말로 음모를 꾸민다 하여도 결국은 그를 들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결  론
가장 복된 일은 정죄함을 받지 않는 일이다. 죄가 있어도 책망을 할지언정 절대로 정죄하지 않는 사랑과 죄를 이기도록금 역사해 주는 사랑과 남을 사랑하도록금 역사해 주는 사랑과 그리고 남을 가르칠 수 있도록금 역사해 주는 그 사랑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에게만 오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역사는 불택 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선택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어떤 자가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택한 자를 죄를 짓지 않도록 해서 거룩한 자녀를 삼으며 거룩한 종을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정죄하지 않는 역사라는 것이다.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 롬 8 : 3 - 11 )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고자 하는 예정 속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섭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할 수 있게 지은 것보다도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당신이 역사해 주므로 만 할 수 있게 하여 당신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로 영광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는 동시에 영광스러운 나라를 그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지만 지킬 수 없는 사람을 지킬 수 있도록 역사해 주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사람으로서 다 하나가 되게 하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각자 스스로가 할 수 있게 내었다는 것으로 통일을 가져올 수 없고 할 수 없는 인간으로 하나님께서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은혜로만 하나가 되는 거룩한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아들의 몸에 죄를 정하심 (3)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법을 행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법을 숨김없이 인간에게 알도록 발표한 것이 율법과 계명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죄가 무엇이라고 알려준 것은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고, 죄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려준 것뿐이다. 예를 든다면 의사가 병자 자신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조건으로 병의 내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병이 있는데, 이러한 방법을 쓰면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율법과 계명을 가르친 것은 죄가 무엇인지 알려 주고 그 죄를 없이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오직 독생자의 몸에 죄를 정해서 대신 죽는다는 법밖에 없다는 것을 선지서에 가르쳤으며, 그 법대로 실천한 것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이란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죄도 알리지를 않으시고 어떠한 방법으로 죄를 사해 주신다는 것도 알리지 않으시고 무조건 역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병세를 알려주는 것도 고쳐 주는 것도 의사가 하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알려주는 동시에 어떠한 방법으로 그 죄를 없이해 준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이 날까지 많은 종들을 희생시키면서 인간의 죄를 걸머진 독생자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덕에 불과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죄를 아들의 몸에 걸머지게 하는 데서부터가 인간에게 나타낼 사랑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의인 동시에 독생자의 의며 독생자의 의인 동시에 믿는 자의 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에 끌려가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아들의 몸에 걸머지운 것은 인간에게 주고 싶은 그 마음을 발표하는 행동개시의 역사이다.

2. 성령을 좇아 행하게 하심 (4-5)
인간은 성령을 좇을 수 없는 타락한 인간이지만 누구든지 독생자의 거룩한 보혈을 믿으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므로 믿게 된다. 죄인들이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거기에 결부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으시는 방법의 하나이다. 십자가의 의는 택함 받은 자를 위한 의이니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가 범죄에 있다 하여도 성신으로 역사해서 책망을 하게도 하시고 징계도 하게 하시어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따라오게 하시는 것이다. 오순절 성신이 임하실 적에 성신의 책망이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나타날 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욕하고 때리던 무리들이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고 떠는 마음으로 베드로 앞에 울면서 모여든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역사가 무엇인 것을 모든 인간들은 알게 되었다. 성신의 역사가 인간들이 반대하여도 택한 자에게 임하는 것은 택한 자를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의로 말미암아 성신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신님께 순종하는 것이 의무요, 그 밖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역사뿐이다.

3. 성령이 거하게 하심 (5-9)
성령은 거룩한 신이지만 독생자의 의로 택한 자에게 보냄을 받을 적에 택한 자 안에 거하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요, 성령이 우리에게 와서 죄를 깨닫도록 책망하고 믿어지도록 감화를 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따라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의 의로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이 거하는 사람을 그리스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결  론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사람이 죄에서 해방을 받은 것도 기쁜 일이요, 마귀의 인도를 따르던 사람이 성신의 인도를 따르는 것도 기쁜 일이요, 마귀가 마음에 거하던 지옥 생활에서 성령이 마음에 거하는 천국 생활도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성신의 역사와 인격 문제
( 롬 8 : 12 - 17 )

인생이라는 것은 자체에 완전성이 있는 것이 아니요, 완전성이 있는 신의 역사로 그 인격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 신앙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완전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성신의 역사를 통하여 완전하게 하시는 것이 당신의 뜻인 동시에 영광이 된다. 그러나 인간 자체에는 성신을 받을 자격이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인하여 성신을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롬 8:2-4). 그러면 성신의 역사와 인격 문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성신의 역사와 육신 문제 (12-13)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의 몸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몸은 성신의 전이기 때문이다. 신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의 몸을 통하여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도 사람의 몸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요, 성신도 사람의 몸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마귀는 사람의 몸에 정욕이 발생케 만들어서 자기의 도구로 쓰는 것이요, 성신은 몸에 죄된 행실을 죽여서 없이 하고 난 뒤에 그 몸을 도구로 써서 의의 병기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롬 6:12-14). 성신은 십자가의 승리로 인하여 우리 몸에 역사하시는 신이시니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는 역사하셔서 몸에 있는 죄의 근성인 정욕을 죽이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성신이 몸의 정욕을 죽여주므로 거룩한 인격을 이룰 수 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신의 역사로 몸의 정욕이 죽는다는 것을 체험치 못하고 성결을 부인한다는 것은 큰 과오가 되는 일이라고 본다. 성신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 역사하시는 신이시니 육체의 정욕이 성신의 역사로 죽을 것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역사하셔서 그 몸의 정욕이 죽게 하므로 능히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인격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2. 성신의 역사와 영의 문제 (14-16)
성신이 우리에게 오셔서 역사하실 때에 우리 영과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 영이 성신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이 우리 영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첫째는 인도하시며(14), 둘째는 부르짖게 하시며(15), 셋째는 증거하게 하신다(16). 이렇게 되므로 영은 자유롭게 활동하는 영이 된다. 우리의 영은 성신의 인도가 없이는 바른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없으며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강하게 부르짖는 힘을 얻을 수 없으며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증거하는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영을 지배하는데 있어서는 성신을 통해서 지배하여 우리 영을 발전시키므로 영적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성신의 역사를 받지 못하고는 영적 활동을 하는 영의 사람이 될 수 없다. 현 사회의 사람들은 육으로 사는 생활, 정신 작용으로 사는 생활, 영으로 사는 생활로 나뉘어져 생활하고 있다. 육으로만 사는 자는 정신 작용으로 사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요, 정신 작용으로 사는 사람은 영으로 사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이 함께 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활동이 있게 된다.

3. 성신의 역사와 생활 문제 (17)
성신의 역사로 사는 생활은 그리스도와 같이 항상 싸우는 생활이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남을 살리기 위하여 싸워 주듯이 성신을 받은 사람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싸우는 생활이 있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만민을 살리기 위하여 싸우는 그 전쟁에 한 정병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에게 성신을 부어 주신 목적은 그 한 사람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요, 많은 사람을 살려주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성신을 받은 자는 자동적으로 싸우는 생활이 있게 된다. 이것은 성신의 역사가 많은 사람을 구원해 주는 것을 목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신을 받은 자는 남을 살려 주기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싸우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남을 살려 주기 위하여 고난을 달게 받고 나아가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성신의 역사가 떠나간 종이라고 볼 수 있다.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남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은 고난을 받을 때에 거기서 더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동시에 인정을 받은 종으로서 묵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그들이 받은 묵시의 글을 바로 전하려면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귀하고 큰 일은 성신의 역사로 인격이 완성되는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역사로 완전한 왕국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신의 역사와 인격 문제를 바로 알고 나아가야만 열매 있는 생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격
( 롬 8 : 28 - 30 )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로 사람을 돕게 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한 인격을 이루기까지 돕는 만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까지도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롬 8:18-20).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이 범죄 하므로 전 세계 인류가 그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만물의 형상 앞에 머리를 숙여 절하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아래서 언약을 세운 하나님의 말씀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그로 하여금 맏아들이 되게 하고 그를 믿는 자녀들은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는 모든 생각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나 전부는 예수 형상을 본받고자 하는 목적 앞에서 기도나 전도나 봉사나 모든 일을 행해야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활동은 다음과 같다.

1. 뜻대로 부르심 (28)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종교인데 아무 사람이나 찾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니 택함을 입은 자는 모르나 택하신 하나님은 모태로부터 미리 아시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지방적으로 택한 자를 출생하게도 하시고 부르시기도 하는 것이다. 부르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시는데도 아무 때나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정한 때에 부르시는 것이다. 부르시는 하나님은 앞으로 될 일도 예정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쓰는 한 도구이다(행 10:5, 13:48, 18:10). 그러므로 전도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 뿐이요, 조금도 인간의 어떤 방법을 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주님께서도 세상에 오실 때에 어떤 인간의 방법으로 할 수 없는 낮은 자리와 낮은 인격을 가지고 역사했던 것이다.

2. 본받는 자가 되도록 역사하심 (29-30상반절)
예를 든다면, 포도원 농부가 극상 포도를 심고 극상 포도의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자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역사하시되 행위를 보고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는 동시에 아들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신다(롬 8:13-17). 하나님께서 바울을 불러 쓰실 때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나아가도록 역사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는 완전히 승리하도록 성령을 보낼 공로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부르심을 받은 자는 성령을 무조건 부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령으로 역사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되도록 역사할 때에 주님께서 하실 말씀을 그 종이 하고 주님께서 찾아가서 택한 자를 찾을 일을 종을 통하여 하고 주님께서 손으로 하실 일을 그 종의 손으로 행하므로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행하는 일을 저도 행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것도 행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 영화롭게 하심 (30하반절)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므로 만왕의 왕이 된 것 같이 택함 받은 사람도 그 왕권 반열에 들어서 세세토록 왕노릇 하는 영광을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계 22:5).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것은 오히려 죄가 될 것이로되 하나님께서 왕이 되도록 예정하셨으므로 그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는 동시에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정하신 것은 그 뜻을 인간으로 폐할 자가 전혀 없는 것이다(롬 8:35-38).

결  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는 것이니 왕국이라는 것은 왕된 자의 수가 차기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넉넉히 이기게 하는 사랑
( 롬 8 : 31 - 39 )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마귀를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기도록 해서 이기는 자에게 왕국의 축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이긴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을 넉넉히 이기게 하자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넉넉히 이기게 하는 사랑은 무엇이냐는 것을 성경을 읽어서 알 수 있다.

1.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한 사랑 (31-3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랑이 제일 큰사랑이니 그 사랑 속에서는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모든 것을 줄줄 믿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 죄를 위하여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한 하나님께서 벌써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구할 때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은 줄 믿고 구하여야 된다(요일서 5:15).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것을 믿는 것이니 그 밖의 것은 벌써 다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된다.

2. 택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사랑 (33)
아무리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의를 믿는 자를 의롭게 인정하시는 것이니 의로운 사람의 모든 권한은 구하는대로 받고 보호를 받을 주권이 있고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것이다. 신자가 어떠한 사람의 악평이나 훼방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완전히 의롭다 함을 받은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보다도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볼 때에 기뻐하지 않을 일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내 원수에게 인정을 받아 보려고 노력한다면 마음에 노할 일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는데 어떤 인간에게 인정을 받아 보려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사람의 어떤 송사나 훼방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3.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는 사랑 (34)
세상에 제일 큰사랑은 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 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피땀을 흘리기까지 간구하셨고, 십자가 상에서도 손과 발에 못 박혀 피를 쏟으시면서도 인간의 죄를 위하여 간구하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 기도대로 이루어 줄 수밖에 없는 완전한 기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승리라는 것은 간구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무조건 하나님께로 역사가 나리므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요, 그런 일이 닥쳐오더라도 넉넉히 이기에 해 주시므로 그런 일을 당치 않은 자보다 더 큰 왕권의 상급을 받게 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시다.

4. 택한 자를 버리지 않는 사랑 (35-39)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절대 잃지 않고 버리지도 않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시고 역사하시는 것이니 피조물된 것이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는 자를 절대로 해칠 수가 없다. 만일 조물주께서 택한 자를 피조물된 자에게 빼앗긴다면 피조물이 조물주보다 강한 것이니 이러한 일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물주 하나님은 완전한 창조주요, 피조물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에서 어떤 피조물이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가 모든 피조물을 이긴다는 것은 넉넉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다.

결  론
하나님은 택한 자를 들어 쓰시되 무엇이나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소불능의 나래 밑에서 넉넉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생활을 하게 하시는 것이 곧 사랑의 원칙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승리가 있으므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세세에 있게 되는 것이다.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종이 되자
( 롬 9 : 1 - 3 )

하나님의 종은 양심과 성신의 역사가 함께 하여야 될 것이다. 성신은 언제나 어떤 인격이나 학식이나 재능이나 의식을 따라서 움직이는 신이 아니고 양심을 보고 양심의 활동을 따라서 성령은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생활을 본문에서 배우기로 하자.

1. 그리스도 안에서 참 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참 사랑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도덕도 거짓이 있을 수 있고, 의식도 있을 수 있고, 인간적인 현통에도 거짓이 있을 수 있고 문학적인 신사라도 거짓이 있을 수 있고 과학적인 기술자에게도 거짓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교파 울타리 안보다도 한 교회 안보다도 정통 교리 체계 안보다도 좀 더 들어가서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참 사랑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참 사랑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 외에는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살리되 그리스도의 참 사랑만이 참된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니 이 사랑 안에는 형제를 위하여 내가 목숨을 바치고 싸워 준다는 것 하나만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어떤 종이 자기의 위신이나 명예나 생활에 타격을 받는다고 하여서 불평을 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 사랑 안에는 '그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 그대로 남에게 준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14만 4천에 드는 종은 거짓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그 사람의 비밀을 지켜 주는데서는 아는 것을 모른다 할 수도 있고 보고도 못 보았다 할 수 있고 그 사람의 단점을 알고도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밖의 거짓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2. 형제를 위하여 근심과 고통이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2)
만일 하나님의 종이 자기의 어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근심과 고통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형제를 위하여 근심하고 고통 하는 마음으로 부르짖는 기도와 전도는 열매 있는 종의 생활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심령 교통을 받은 것은 우리를 위한 고통이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쉬지 못하고 기도하는 것도 우리를 위한 애달픈 기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양떼를 위하여 마음에 근심하고 남의 시련을 나의 시련보다도 더 근심하고 남의 고통을 내가 당하는 고통보다도 더 안타까워하는 것이 있다면 이 종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격동하는 마음이라고 보게 된다. 양떼가 주려도 목이 마르다 해도 목자의 마음에 근심이 없다면 그 목자는 삯을 위해서 있는 목자라고 보게 된다. 마음에 하나님의 양떼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종은 형제를 위하여 근심과 고통을 하는 종이라고 보게 된다. 자기 몸이 병들 때 근심을 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며 자기 몸이 괴로울 때 고통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리요, 이와 같이 사랑하는 형제들의 딱한 사정을 볼 때에 근심하며 기도하고 가슴을 두드려 가며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이 오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옷을 찢고 성전에 올라가 울며 기도할 때 북방 앗수르가 무너졌던 것이다. 금일에 와서 아시아의 넓은 대륙을 공산당이 집어 삼키되 교회를 짓밟고 들어와 다 황폐화된 금일에 남한 땅 작은 모퉁이에 있는 종으로서 이 비참한 일을 보고도 기지개 켜며 잠자기를 좋아하여 오락과 연락에 도취가 된 자라면 그 양심은 성령 안에 있는 양심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마음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근심과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3. 희생적인 소원이 있다 (3)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친히 담당하시면서 인간이 구원받기를 소원한 것과 같이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저주를 받아도 자기 골육과 친척이 구원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 일꾼의 정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자아를 희생하고 남을 살린다는 마음이 불탈 적에 그리스도의 능력은 십자가를 통하고 그 종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은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찾을 것이고, 자기 목숨을 찾는 자는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과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과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우리에게 와서 항상 역사하는 성신과 항상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괴로움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종과 합해지므로써 왕국 건설 운동은 필연코 대 승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자기네 유대 교권을 내세우기 위하여 바울을 염병같은 이단이라고 정죄 하던 바리새 교인들은 열매 없는 나무같이 찍힘을 당했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을 두고 복음을 전하던 그 역사는 세계를 정복하는 대 확장을 이루는 동시에 필연코 승리의 왕국을 이루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자아를 위하여 날뛰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자아를 희생하여 형제를 살린다는 사랑의 용사가 될 적에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이 되어 새 시대를 왕권으로 정복하게 될 것이다.

결  론
인생의 가치라는 것은 옳은 일에 증거하는 자가 될 때에 옳은 사람이 되고 불의한 일에 증거하는 사람이 될 때에 불의한 자가 되는 것이다. 금일에 공산당은 허위 선전에 날뛰고 있지만 이것은 아무런 열매 없는 검불이 될 것이요, 참된 양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하는 진리의 사람은 완전히 열매를 맺는 푸른 나무같이 될 것이다.
 


사명에 불타는 바울의 심정
( 롬 9 : 1 - 3 )

서  론
하나님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을 완전히 중생 시켜 어느 사도보다도 더 불타는 심정을 주어서 맹렬히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던 것은 기독교 신앙의 표본으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기독교의 원수라도 하나님은 용서하여 쓰신다는 증거로 보여 주신 동시에 그를 높이 들어 썼던 것이다.

1. 조금도 거짓이 없는 심정 (1-2)
이는 극도로 강한 의사를 가졌기 때문에 특히 타인보다도 기독교를 더 박해한 것은 거짓이 없는 양심가인 동시에 유대교회 최고의 열성가였다(딤전 1:13).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은 거짓이 없는 양심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아무리 훼방, 핍박, 폭행을 행한 바울이자만 그 중심을 보시고 주님은 나타나 부르셨던 것이다.

2. 애족심이 강하다 (3)
바울은 이방의 사도인데 특히 타인보다도 동족의 박해를 더 많은 받은 사도이다(고후 11:24-25). 그러나 동족에 대한 애족심은 누구보다도 더 강하게 일어났다. 왜냐할 때에 이 복음을 반대하므로 자기 동족이 망할 때에 불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환영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은 바울의 정신은 아닐 것이다.

3. 희생적인 봉사심이 강하였던 것이다 (고전 4:11, 행 18:1-4)
바울은 친히 희생을 하는 동시에 친히 일하면서 복음 전하기를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그는 조금도 타인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정신이 강하였던 것이다(고전 9:11-15).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그에게 특성을 주신 것은 복음을 모르는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쓰기 때문에 이러한 심정을 불타게 가지도록 역사했던 것이다(4:18, 21-22).

4. 그는 동정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고전 9:21-23)
이것은 외식이 아니요,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는데서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받는 고통을 볼 때 눈물을 흘리는 심정에서 그를 대해 주는 심정이었던 것이다(빌 1:8). 우리는 남의 형편을 볼 때 동정하는 마음이 불타는 것이 없이는 복음을 전할 마음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의 불쌍한 민족을 위하여 조금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안타까운 심정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5. 세상 영광을 분토같이 보는 것이었다 (빌 3:5-8)
바울은 자신이 귀족인 동시에 학문이 높고, 로마의 시민권이 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고, 정통적으로는 바리새 교인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란 분을 위하여 다 버리고 오직 복음 하나만을 불쌍한 이방 민족에게 전한다는 마음 하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 신앙한다면 복음을 전한 자의 심정을 우리도 모범 한다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본다. 종말에 와서 예언하는 증인으로서 이와 같은 심정이 없다면 순교자의 반열인 그 수에 들 수 없을 것이다. 주의 종은 하나님을 중심하는 종인 동시에 택한 백성을 위하여 우리는 주의 일꾼이니, 바울과 같은 심정이 없다면 종말적인 권세 역사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순교를 함으로 끝을 마쳤고, 우리는 그들의 억울한 피값을 갚는 자가 되려면 권세의 역사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이 권세의 역사는 선지자와 성도의 원한을 풀어 주자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자
( 롬 12 : 1 - 2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에 생령이 되게 한 것은 생령된 사람에게 예배를 받고 예배에 따라 당신에게 있는 것을 풍성히 나려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인격에 들어가도록 하시며 예배를 통하여 완전한 인격을 이루게도 하시고 완전한 단체를 이루게도 하시고 완전한 나라를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목적이다. 성부, 성자, 성신이 홀로 있다는 것은 영광이 될 수 없으므로 생령된 사람을 통하여 예배를 받기도 하시고 생령된 사람에게 당신의 것을 주기도 하시는 것을 영광으로 삼으신다. 그러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려면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하기로 한다.

1. 몸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1)
사람이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적에 육의 사람이 아니요, 영의 사람이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 몸을 하나님이 주관하면 영의 사람이 되고 마귀가 주관하면 육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내실 때에 당신의 하실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로 쓰기 위한 질그릇으로 내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신은 몸이 없지만 사람에게 몸을 준 것은 영의 하나님이 그 몸을 통하여 당신의 원하는 뜻을 이루어 영광을 받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바친 자만 하나님께 있는 감춘 보화를 간직할 수 있는 그릇이 된다. 예를 든다면 바람이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물체가 있으므로 그 강한 바람은 힘을 나타내게 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물과 불이 합해서 강한 바람을 발휘한다 하여도 물체인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다면 효과를 조금도 나타낼 수 없음같이 하나님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사람의 몸이 없다면 그 강한 힘은 큰 능력의 역사를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몸을 무소불능의 하나님께 바칠 적에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므로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있게 되는 예배를 가지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그 몸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없다면 영적 예배가 될 수 없고 한 우상적인 예배의 의식이 되고 말 것이다.

2.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 (2상반절)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세상으로 치우치게 되면 더러워지고 어두워지고 강퍅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다(요일서 5:19).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그 마음이 세상에 기울어진 사람은 마음이 새로워지는 체험을 받지 못한다. 누구든지 날마다 마음이 새로워지는 사람이 되면 조금도 외식이 있을 수 없고 어디를 가나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에서 영적 예배를 날마다 갖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영적 예배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찬양대 음악을 맞추어 개회를 하고 폐회를 한다 하여도 그 찬양대가 성령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 될 수 없고, 아무리 설교자가 웅변, 학적, 변론, 역사적인 예화를 든다 하여도 그 종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나오는 설교가 아니라면 그 설교는 영적 예배를 가져올 수 없다.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양식을 나눠주는 설교가 될 때에 마음을 새롭게 하는 역사가 되므로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3.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2하반절)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모든 사람이 연합될 때에 영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을 따라 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따라 가는 것이 신령한 예배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줄 분별하게 되는 영계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행하실 일을 하게 되므로 열매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언제나 영적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치 못하는 사람들이 교권을 쥐고 교회를 움직일 때에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마귀에게 드리는 우상과 같은 교회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임한 것과 같이 인간 종말에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결  론
사람이라는 것은 영적 예배가 있으므로 초인간적인 세계를 알게 되고 교통하게 되고 그 세계로 들어가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영적 예배를 통하여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지게 되며 사람의 생활도 영적 예배를 통하여 열매 있는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영적 예배
( 롬 12 : 1 - 2 )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영적 예배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과거 육적 이스라엘이 유형적인 제사를 드릴 때는 새로운 성신의 역사를 나리는 일이 없지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상에 유형적인 제사는 완전히 끝을 맺었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부터는 유형적인 제사는 필요 없고, 영적 예배로만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오늘에 예배를 드리는 자가 많이 있겠지만 영적 예배가 되는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게 되고 영적 예배를 드리는 일을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지 못함으로서 아무런 열매도 없는 마른나무와 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예배는 어떻게 하는 자라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몸은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1)
우리가 몸을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로서 그 몸을 화목 제물로 영원한 제사로 드렸기 때문에 우리 몸은 산 채로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 몸을 다스리게 되는 것은 주님의 희생적인 피의 제사가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몸에 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몸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다스리는 몸이 되기 전에는 영적 예배가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예배를 드릴 적에 육적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이 사람은 육적의 사람이요, 영의 사람이 아닌고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다스릴 때는 우리가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게 된다(롬 8:8-9). 영적 예배라는 것은 우리 몸은 성령이 다스리게 될 때에 영적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성령이 다스리게 되는 원인은 주님께서 의로운 제사를 드렸으므로 우리가 주를 믿고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의 신은 예수의 의를 믿는 의를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2. 마음이 새로워지므로 (2상반)
영적 예배라는 것은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생활에서 영적 사람이 될 때에 항상 세상을 이기는 생활이 있게 되므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므로 영적 생활에 향상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마음이 새로워지는 생활을 못한다면 이 사람은 육에 있는 사람이요, 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육의 생각을 영이 지배하게 된다면 향상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몸이라는 것은 거룩한 영이 내주 하여 있는 성전이 되므로 만이 항상 마음이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의 산 제사는 육체의 정욕을 온전히 죽이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는 열매가 있게 된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 (2하반절)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자가 되려면 영적 예배를 드리므로 마음이 새로워지는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되므로 생활의 열매를 맺게 된다. 오늘에 교회가 환난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사람의 생각을 따라서 모든 일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공연히 남을 판단한다든지 필요 없는 일에 참여하여 교회 일을 움직인다면 그 교회는 벌써 흑암의 세력에게 먹힘을 당했다고 본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예수의 완전한 공로로만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둘째 : 예수의 대언 기도로만 응답이 나린다는 것이요,
셋째 : 권세로만 마귀를 이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생활이라는 것은 예수의 의로 우리의 죽은 영이 중생을 받게 되는 동시에 주님의 대언 기도로 영적 발전을 보게 되었고, 예수의 권세 아래서만 승리의 왕국이 이루어진다. 온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요, 완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영적 예배를 받기를 기뻐하시고 그 예배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나리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적 예배를 통하여 사람과 교통할 수가 있고 사람과의 교통이 있음으로만 하나님의 섭리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합당한 생활
( 롬 12 : 14 - 21 )

주님께서는 용서할 수 있는 공로도 있고,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권세도 있다. 그러므로 용서하기 위해서 참는 기간도 있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 진노하는 기간도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위하여 용서하고, 한 사람을 위하여 원수 갚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하되 모든 나라 사람을 용서하고, 원수를 갚되 모든 나라 사람을 원수 갚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갚는 날에 주 앞에 서려면 용서하는 주님의 뜻을 순종해야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용서하는 기간에 우리는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될 것이다.

1. 축복을 비는 기도 생활 (14)
기도라는 것은 원수를 갚는 날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요, 용서하는 날에 기쁘시게 받으시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사람이 항상 축복을 비는 마음이 없다면 용서하시는 주님 앞에 합당한 자라고 볼 수 없으며, 합당한 기도라고 볼 수 없다.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복을 주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했다면, 우리도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정신이 있어야만 원수를 갚으시는 주님 앞에 받을 것이 있는 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남이 축복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 합치가 된 것이니, 주님과 합치가 된 자라야 주님께서 갚아 줄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이 자기의 마음에 합당치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을 저주하는 기도를 한다면, 주님 대신에 자기가 심판 주가 되므로 실지는 주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실 일을 자기가 했기 때문이다. 오직 원수를 갚아 줄 책임은 주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주님과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인데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를 받았으니 지금 사는 생활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써 사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에 합당치 않다고 해서 남을 저주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심판권을 침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원수를 갚는 심판권은 주님께만 있으니, 우리는 형제가 나를 괴롭혀도 '축복을 주시옵소서' 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주님의 지체가 된 생활이라고 본다.

2. 참된 교제의 생활 (15-16)
우리는 형제에게 행한 일을 상급이 되도록 갚아 주시는 주님 앞에서 합당한 교제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얻어 보려고 형제를 사귀는 사람이라면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설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를 돕는 생활을 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서 그 사람의 하는 일을 오히려 적대시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바라보는 것보다 형제에게 갚음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주님보다도 형제를 더 의지하는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위하여 사는 생활보다도 형제를 위하여 사는 생활을 해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형제를 돕기 위해서 사는 생활에는 항상 동정하는 마음이 불타야 된다. 형제가 슬퍼하는데 슬프지 않고, 형제가 즐거워 하는데 즐겁지 않고, 형제를 높이는 것보다도 자기를 더 높인다면 주님 중심에서 형제를 교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자기 중심에서 교제하는 사람이므로 자동적으로 위선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형제에게 행하는 일을 주님께 하는 일과 같이 생각하는 자라야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될 수 있다(마 25:40).

3. 선한 일을 도모하는 생활 (17)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요,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 일을 위하여 쓰여지는 종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선한 일을 할 자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선이라는 것은 죽을 사람을 살려주고, 망할 사람을 흥하게 하고, 화 받을 사람을 복 받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주님밖에는 행할 자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우리는 순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할 것뿐이다.

4. 평화를 위한 생활 (18-21)
평화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다. 은혜 시대에는 아무리 형제가 부족이 있다 하여도 용서를 하면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화목 제물이 되어 지금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인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신 일이 없었다면 세계평화의 왕국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은혜 시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서 대신 죽게 하시고, 누구든지 그 아들만 믿고 회개하면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평화를 이루는 역사이다. 그리고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아무리 회개를 기다려도, 짐짓 당신의 사랑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한 사람들만 남은 자가 되게 하여 평화 왕국을 이루는 것이 진노의 심판과 새 시대이다. 우리 사명자라는 것은 진노의 날이 오기까지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악에 진다는 것은 악을 악으로 대하는 일이요,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아무리 악해도 선으로 대하는 일이다. 그러나 악의 사상을 용납한다면 그 시간부터 악에게 지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악의 사상을 용납치 말고, 악의 세력이 물러 가고 의의 세력이 승리하도록 하는 것을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합당한 생활이라고 본다.

결  론
원수를 갚는 것은 참된 사랑의 열매이다. 원수를 용납한다고 해도 참된 사랑이 아니요, 지금 원수를 갚는다고 해도 참된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원수를 갚아 줄 때까지 주님과 같이 참고, 주님과 같이 사랑해야 될 것이다.
                                      
   
 
일한 공력이 헛될까 조심하자
( 고전 3 :10 - 23 )

우리는 날마다 사는 생활이 집을 세우는 자와 같은 생활이다. 그러므로 집을 짓되 어떠한 집을 지어야 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집을 짓고라도 그 집에서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면 오히려 집을 짓지 않은 것만도 못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집을 지어야 그 공력이 헛되지 않을까 하는 일에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1. 사도 바울이 닦은 터 위에 집을 짓자
우리는 이 말 저 말, 이 생각 저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사도 바울이 14권의 성경을 쓴 그대로 신앙의 토대를 잡으면 그 이상 더 할 것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십자가의 도를 남보다도 더 명확히 쓸 수 있는 영감을 주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완전히 기독교의 정통 신앙의 터를 닦았다고 본다. 이 사람은 과거 청년 때에 바울 서신을 많이 본 것은 어느 성경보다도 내 신앙에 완전한 확신을 주기 때문이었다. 누구든지 바울 사도의 기록한 서신에서 조금이라도 가감된 신앙을 가진다면 그 터를 바로 잡지도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완전한 터를 잡고 다음과 같이 해야 될 것이다.

첫째 : 다른 터를 닦을 자가 없다고 생각을 두어야 한다 (11)
우리는 대표적인 종이 받은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은 신앙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운 대표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 외에서 가해도 교만이요, 감해도 교만일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를 들어서 우리에게 완전한 신앙의 토대를 잡도록 성신이 역사하셨는데 여기에 기준하지 않고 다른 무엇을 생각한다면 바울을 대적하는 것보다도 성신을 근심케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 불타지 않을 것으로 세워야 될 것이다 (12-15)
우리의 수고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주님께서 갚아 줄 수고도 있고 갚아 줄 것이 없는 수고도 있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만을 중심하지 않고 어떤 인물이나 교파를 중심해서 수고했다면 주님은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의 일은 어떤 개인이나 개교파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끌려서 그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한 것이니 이것은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과 같이 몇 날이 못 가서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주님만 중심해서 그 뜻에 복종하는 수고 외에는 다 헛수고가 될 것이다.

2. 일꾼된 자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일꾼이라는 것은 자기 홀로 일할 수 없고 성신이 내주 하여 역사하는 대로 쓰여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신이시지만 일하는 사람의 몸을 거룩한 성전같이 성별 되게 쓰는 것이니 일꾼된 자가 자기 몸을 함부로 아무 곳에나 쓴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우리 몸은 주의 피로 산몸이니 주님이 가실 곳을 우리 몸이 가고 주님이 붙들 사람을 우리 손으로 붙들어 주고 주님이 하라는 말을 우리 입으로 하게 되고 주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 몸으로 하는 것이 일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고 말씀하면서 성신을 받으라고 했던 것이다(요 20:21-22).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을 세상 죄를 걸머지고 죽으라는 사명을 맡겨 보냈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우리를 쓰시는 것은 주님이 행하신 일을 우리가 나가서 전하되 주님의 대행자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신앙의 대상을 완성시킨 일을 하셨고, 우리는 모든 사람이 바로 믿도록 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3.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18-23)
하나님께서 제일로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세상 지혜로 하려는 자라고 본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를 어리석은 일로 보고 하늘의 지혜로만이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절대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 지혜를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그 지혜로만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려고 할 때에 지혜로운 건축자가 될 수 있다.

결  론
인간 생활의 가장 비극은 남지 못할 일을 위하여 수고하는 생활이라고 본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복된 일은 작은 일에서나 큰 일에서나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일을 하는 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 하였다(10)


 
신령한 자의 판단
( 고전 3 : 15 )

서  론
인생이라는 것은 동물이 아니고 영물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을 가지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바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신령해지지 않으면 짐승만도 못한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령한 것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임자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모른다"고 탄식했다. 사람이란 것은 그 자체 본질의 심령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에 그 심령이라는 것은 신령한 것으로서만이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동물은 혼만 있기 때문에 거기는 신령이라는 것이 하등 필요가 없다. 예를 든다면 보석은 보석답게 써야 가치가 있고, 나무는 나무답게 써야 가치가 있는 거와 같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 생령의 사람은 신령하게 쓰여져야만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제 어떤 자가 되어야 신령해 지느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아야만 될 것이다 (6)
인간 지혜의 지식이 날뛰면서 성신의 지혜 받은 스데반을 이단이라고 판정을 내려 돌로 치라고 했던 사도 바울은 회개하고 성령의 지혜를 받고 볼 적에 아무리 세상 지혜가 있어도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그는 말했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로 타고난 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야 될 의무가 있고 받아야 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다시 예를 든다면 육신의 자식이 부모의 교훈을 받음과 같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와 교훈을 받아야만 될 것이다.

2. 통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10-11)
통달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사람은 깊이 연구하고 무엇을 알려고 할 때 물체에 대한 이치는 통달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물체의 이치를 통달케 하는 것이 과학적 연구라면 영계에 관한 깊은 것을 통달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학이라 할 것이다. 금일에 신학이라는 세계의 인간 지식이 결부된다는 것은 큰 위법 중에 위법이 될 것이다.

3.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일을 버리는 자 (13)
만일 어떤 종이 은혜를 받았다 하면서 인간 지혜 수단방법이 들어간다면 이 사람은 은혜를 쏟을지언정 깊은 영계를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왜냐하면 성령을 노엽게 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어떤 선생이 있는데 그 선생을 무시하고 다른 선생의 말만 따른다면 그 선생의 마음을 분노케 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물며 성령을 받은 자가 인간 지혜를 따라 일한다는 것은 성령을 괴롭히는 행동이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 (16)
우리의 신령이라는 것은 어떤 외형적인 이적이나 어떤 표적으로서가 아니다. 중심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것이 신령자라 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인 겸손, 온유, 진실, 사랑 이것이 있는 자라면 모든 일을 바로 판단할 수 있는 신령한 자라고 보게 될 것이다. 판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 외에는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사 11:3-4).

결  론
우리는 속담에 '되지도 못하고 다 된 채 한다'는 말과 같이 신령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남의 영계를 판단한다는 것은 멸망을 자취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 6:1-2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진리를 말씀의 칼로 바로 쪼개서 판단이 있게 설교하는 자가 마귀를 치는 권세의 종이 될 것이다. 기독교의 최고의 영계는 말씀의 칼을 들고 나가 말씀으로서 세계를 통일시키는 일로 끝을 맺을 것이다(계 11:3).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자
( 고전 7 : 10 - 35 )

서  론
하나님은 어떠한 일이든지 화평 중에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니 아무리 신앙이 열렬하다고 하여도 무슨 일이든지 어지럽게 만드는 일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중심 하는 동시에 성경에 탈선되지 않는 일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되 분요함이 없이 해야 될 것이다. 만일 성경이 탈선된 일이 있는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고 싸우더라도 할 수 없으며 그밖에 일은 양심 자유에 맡기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교회에 덕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 부부간의 분방 문제 (1-6)
하나님께서 일남일녀를 창조하여 가정을 이루게 한 것은 서로 돕고 합의하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피차에 돕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자기 한 사람을 위하여 움직일 수 없고, 서로 책임을 지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서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여자가 만일 자기는 거룩한 체하고 남편과 분방하여 남편과 멀리 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고 남편이 거룩하다 하여 아내를 가까이 아니하고 분방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단에게 기회를 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분방이라는 것은 어떠한 특별한 기도의 기간을 정하고 얼마동안 합의하에 분방 하는 것 외에는 합당치 않다.

2. 혼인 문제 (7-11)
우리는 혼인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은 잘못이요, 또는 혼인을 억지로라도 해야 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앙 자유에 맡기되 부득이 혼인하여야 할 자신이라면 억지로 불타는 정욕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가당할 것이요, 혼인을 해도 자신상 필요 없는 관계도 있고, 사명상 안 해야 할 형편이라면 혼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3. 가정 문제 (12-15)
가정이라는 것은 신앙으로서 단번에 완전하게 거룩하게 되는 가정은 심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가 함께 부부의 생활을 하기 원하는 것이 죄라는 것보다도 함께 생활하기를 원한다는 경우에는 믿는 신자가 믿지 않는 자를 전도해서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참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믿기 전에 부부 생활이 있었던 사람에게 해당된 말이다. 이미 믿는 자가 안 믿는 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로되 믿지 않는 생활에서 먼저 믿고 나중 믿는 관계라면 먼저 믿는 자는 나중 믿는 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갈라서기를 원한다면 갈리게 하여도 하등 죄가 없다는 것이다.

4. 환경 문제 (17-20)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질 때부터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생활이니 과거의 할례의 유무가 관계가 없고, 과거의 종이나 자유 자에게 하등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억지로 갑자기 고쳐야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믿는 자는 다 그 복음을 받은 그 때 있는 환경에서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바로 살아가는 것은 존중하게 생각할 문제요, 환경 문제부터 억지로 고치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탈선된 경우라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워서 벗어나야 할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상관되지 않는 환경에서 억지로 변경을 하려는 것은 어지러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5. 자녀 출가 문제 (25-26)
우리는 억지로 자녀 결혼을 시키지 않으려는 부모는 잘못이요, 자녀가 합당치 않게 여기는 결혼을 억지로 시키려는 것도 잘못이다. 출가 문제는 절로 자유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녀가 출가하는 것은 주님의 사업에 큰 지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는 주님의 사업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결혼 생활은 더 합당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주 재림이 임박한 이 때 부부 생활은 사명 감당하기에 불리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명자에게 국한된 말이다. 주 재림이 임박한 환난의 세상에 무거운 짐을 사명자가 걸머진다는 것은 즉 육신의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데는 인간에게도 어지럽지 않도록 덕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목적에서 가정 생활을 어지럽게 만든다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다. 만일 가정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안 될 것이로되 진리 안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얼마든지 어지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제일은 사랑
( 고전 13 : 11 - 13 )

하나님은 사랑의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그 사랑의 만족을 이루어 놓은 것을 천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있는 완전한 것을 인생에게 전부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령인 동시에 그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역사를 능력이라는 것이다.
제일인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완전한 것을 이루는 것이다 (11)
사랑이라는 것은 완전치 못한 자가 완전한 자를 섬기는 사랑도 있고, 완전한 자가 완전치 못한 자를 길러 주는 사랑도 있다. 여기에 제일 가는 사랑은 완전치 못한 자가 완전한 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완전한 자가 완전치 못한 자를 길러 주는 사랑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에는 감히 대조할 수가 없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 하여도 길러 주신 부모의 사랑엔 비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제일 가는 사랑은 조물주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해 주는 사랑인 것이다. 우리 기독교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대한다든지 인간이 하나님을 대한다든지 하는 범위에 국한된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역사가 기독교를 이룬 것이니 그 사랑 안에서 중생 하여 자라나 온전한 사람이 되어 온전한 세세 왕국에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제일 가는 사랑의 종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체험하는 영계에 들어가서 완전한 인격을 하나님께로 받아야 된다. 완전한 인격을 하나님께로 받은 자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을 다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린아이는 앞에 사탕을 놓고 좋은 서책을 놓으면 자기에게 사탕이 필요하다고 하겠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좋은 서책을 자기의 무기로 사용하는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어린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때 그 때에 자기를 길러 주는 은사를 좋아하겠고, 완전한 장부가 될 때에는 성경 전체에 말씀의 칼을 무기로 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국 복음 운동을 하실 때에는 은사를 중심 하여 역사하셨지만 완전 승리의 지상 왕국을 이룰 때에는 마귀의 권세를 개방하여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해 보고 시험에서 말씀으로 이긴 자로 완전한 승리의 왕국을 이루게 하신다.

2.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13)
우리는 지금 주님의 사랑의 범위를 다 알지 못하되 그 사랑을 받아서 우리가 중생을 받고 은사를 받고 날마다 자라나는 생활에서 사랑을 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분명히 아시고 인도하시지만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시는 그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때에야 그 사랑의 목적이 무엇인 것을 다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사는 생활은 그 사랑을 다 알지는 못하였지만 그 사랑의 능력의 역사를 받아 날마다 전진하며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은혜 시대에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랑 속에서 역사했고, 환난 재앙이 올 때에는 그 몸까지 구속해 주는 역사 아래서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된다. 이 땅에서 받는 사랑은 재림시까지에 완전함을 이루어 죽은 자는 부활하고 남은 자는 변화하여 즐거운 혼인 잔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3. 믿음 소망보다도 제일은 사랑이다 (13)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요, 소망이라는 것은 사랑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는 것이니 믿음과 소망의 목적은 완전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체는 사랑이시니 당신의 사랑을 믿고 소망을 얻은 자로 완전한 나라를 이루어서 이들에게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을 세세 왕권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나 미래는 믿음, 소망, 사랑으로 나가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진 세세 왕권의 영광의 기업을 누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대사업은 완성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신은 사랑의 신이 신데 그 사랑의 소원을 다 이루어 놓은 것을 천국의 영광이라고 한다. 지상 왕국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천년 왕국이요, 영원한 천국이라는 것은 하늘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 새 예루살렘을 영원한 도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의 제일 큰 일은 제일 가는 사랑을 받고 사는 일이라고 본다. 누구나 다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만 제일 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이것을 받지 못하고 흑암에 떨어진 것을 붉은 용에게 꾀임을 받은 인간이라고 본다.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는 수고
( 고전 15 : 9 - 11 )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더욱 귀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받는 것이 좋은 일인 줄 아는 것보다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큰 일인 줄 생각하고 수고가 있어야 한다. 은혜라는 것은 수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이니, 이것이 기독교의 열매라는 것이다. 이제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는 수고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은혜로 된 인격 (9-10상반)
사람의 인격도 여러 가지로 되는 것이니, 과학으로 된 인격도 있고 도덕으로 된 인격도 있고 정치로 된 인격도 있다. 그러나 은혜로 된 인격이라는 것은 과학·도덕·정치를 초월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세계 인류를 살리는 인격은 은혜로 된 인격밖에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라도 은혜로 된 인격이 될 때에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고 싸워 나가게 됐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나쁜 나무라도 베어서 버리고 좋은 나무를 접붙이면 좋은 나무 열매를 맺게 되는 것과 같다. 은혜로 된 인격은 아무리 남을 죽이려던 사람이라도 그 즉시에 남을 살리게 위하여 나서게 되는 것이다. 바울 하나가 은혜로 된 인격이 될 때에 그 인격을 통하여 인류적인 속죄 구령의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계적인 복음 확장의 열매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을 본다면 은혜로 된 인격이 얼마나 열매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은혜로 된 수고 (10하반)
수고도 저주로 된 수고도 있고, 은혜로 된 수고도 있다. 사람이 땀을 흘려야 먹게 된 수고는 땅이 저주를 받은 증거요, 눈물과 땀을 흘려서 복음을 전하게 된 수고는 이 땅에 천국이 임하는 증거이다. 하늘에서 오는 은혜를 남에게 주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열매요, 먹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아담이 미혹을 받아 범죄 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수고를 하되 은혜를 남에게 주기 위하여 수고하는 자라야 은혜가 헛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고도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한다면 그 은혜는 헛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나리시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남을 살리기 위하여 수고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루어 놓기 위한 것이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남에게 대접을 받기 좋아한다는 것은 사단의 시험이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나간다는 것은 성신의 역사이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도 수고하기를 싫어할 때에 그 은혜가 더하여지지를 못하고 은혜가 감하여지므로 나뭇가지가 말라지듯이 자신이 메말라지는 상태에 있게 된다. 은혜를 받은 자라도 순교적인 생활을 함으로만 은혜 위에 은혜를 더 받아서 그리스도와 같이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3. 은혜로 된 열매 (11)
세상에도 여러 가지로 열매가 나타나는 일이 있지만 은혜로 된 열매만이 영원한 열매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산을 하는 일에 열매가 많으므로 세계적인 갑부가 된 일도 있고, 어떤 사람은 문학적 소질을 가지고 많은 서책을 내므로 세계적인 박사가 된 일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정치적 천재를 가지고 구라파를 자기 손에 넣었던 영웅도 있었지만 그 당시뿐이지 영원한 것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이 은혜로 된 인격을 받아 은혜로 된 수고로 많은 사람을 중생 받게 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열매는 이 날까지도 세계적인 활동을 하는 동시에 이 땅에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다. 예를 든다면 생명이 없는 기계는 처음에는 훌륭하게 보여도 점점 낡아지고 마는 것이로되 생명이 있는 겨자씨는 처음에는 보잘것없이 보여도 점점 자라나서 온 밭을 덮는 나무가 되는 것과 같다. 바울 한 사람이 은혜로 된 열매는 생명적인 종교로서 온 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이다.

결  론
가장 귀한 것이 은혜이며, 가장 귀한 것이 은혜로 되는 수고이다.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 죽어서 얼마든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의가 된 것은 은혜를 받은 자의 수고가 있다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서 수고만 한다면 가장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아담 안의 죽음과 그리스도 안의 부활
( 고전 15 : 20 - 28 )

하나님께서는 죽음이 오는 것도, 생명이 오는 것도, 다 계통적으로 있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다스리되 반드시 그 씨를 따라서 열매가 있게 하신다. 씨라는 것은 악의 씨도 있고 의의 씨도 있고 죽음의 씨도 있고 생명의 씨도 있다. 그러므로 죄의 씨를 주는 계통도 있고 의의 씨를 주는 계통도 있고 죽음의 씨를 주는 계통도 있으며 생명의 씨를 주는 계통도 있는 것이다. 이제 계통적인 역사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아담 안의 죽음 (20-21)
죽음이라는 자체는 순종치 않는 자에게 오는 법이니 선악과를 먹을 때에 죽음이라는 씨가 사람의 몸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질적 타락이다. 질이라는 것은 생명의 질도 있고, 사망의 질도 있는 것이니 아담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해 주는 질은 사망의 질이다. 선악과라는 것은 그 자체가 보통 과실과 같은 질이 아니요, 그것을 먹으면 사람이 죽는 질이 있는 과실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낸 것은 순종치 않는 자에게 사망을 주기 위한 법을 따라 낸 과실이요, 생명과는 순종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과실이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흙에서 지음을 받은 몸이니 완전한 몸으로 창조된 몸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완전한 몸이 되는 것이요, 순종치 않으면 죽는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몸으로서 자녀를 낳을 때에 그 피의 계통은 다 사망의 몸이 되었다. 이러한 몸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순종해서 하나님의 신의 도구가 될 때에는 그 몸을 다시 영생할 몸으로 이루어 놓는 법을 구속의 법이라는 것이다. 본문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한 것은 몸의 사망과 영생을 가르친 말씀이다. 아담은 몸의 사망을 받았으나 그 영은 속죄제를 드리므로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아담 후에 몸의 타락은 사망의 질이 되는 선악과의 질을 받은 계통이므로 누구든지 그 피를 받은 자는 다 아담에서 한 몸같이 되어 있으므로 죽은 것이다. 이와 같이 부활을 받는 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의 부활 (22-23)
모든 사람이 다 죽게 된 것은 아담의 후손은 누구든지 다 아담의 몸에서 나왔으므로 그 계통적인 사망을 받게 된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자들은 아담에게
속한 자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붙는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의 모든 자가 부활케 하는 이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예수님의 몸을 물과 피로 임하게 하심 (요일서 5:6-9)
그리스도의 몸은 아담의 계통이 아니요, 마리아의 태를 그릇과 같이 사용한 것뿐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계통적인 마리아의 몸의 피가 예수님을 이룬 것이 아니고 성신의 역사로 마리아의 몸에 역사해서 물과 피가 임하게 하므로 그리스도의 몸에 역사해서 물과 피가 임하게 하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영생할 생명으로 이루어진 몸이다. 이러한 몸이기 때문에 만민의 죄를 대속 하는 피를 쏟고도 창 자국이 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렀던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물에 잠겨 올라 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몸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롬 6:2-5).

둘째 : 성신의 전이 됨 (고전 6:14-20)
성신께서 우리의 몸을 다스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산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성령이 오셔서 역사할 수가 없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몸이기 때문에 성신이 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우리 몸이 성신의 도구가 될 때에 아담에게 속한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몸이므로 죽어도 살고,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 변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몸이 변화하는 것은 죄에 속한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몸이므로 영생할 몸으로 완전히 변화를 받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그 몸이 아담 안에 있으므로 죽을 것이요, 주 재림시에 변화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몸이므로 완전히 영생할 몸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왕권 받을 사람에게 이루어지므로 지상 왕국이 이루어진다.

3. 불가불 왕노릇 하는 일 (24-25)
그리스도의 통치 왕국이 이루어지는 그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1차 부활에 참여한 자가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왕국은 부득불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인격을 이룬 자들이 통치하게 된다. 이것을 새 시대라 하는 것이다.

4. 만물이 복종하는 일 (27-28)
첫째아담이 범죄 하므로 만물이 아담 안에서 저주를 받았고, 둘째아담 예수가 승리하므로 만물이 다 복종을 하는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성도의 통치 지상 왕국이라는 것이다.

결  론
아담 안에서 사망이 옴으로 만물이 저주를 받게 되어 사망을 받을 몸에게는 만물이 복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한 분이 순종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생명에 속한 몸으로서 만물이 복종하는 완전한 나라를 이룬 것을 그리스도의 통치 왕국이라는 것이다.
 


인생의 두 가지 형체
( 고전 15 : 44 - 49 )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사람의 몸을 창조하여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산 영을 가진 아담이 되게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창조할 때 완전한 몸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고 완전케 될 수 있는 피조물로 낸 것이다. 많은 동물을 흙에서 나게 했지만 사람만은, 그 몸이 영체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낼 때에 어떠한 방침으로써 영체가 되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가장 간교한 뱀은 악한 형체를 가질 수 있게 내었고, 사람은 영생할 영광의 형체가 되게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될 사명을 하지 못하므로 흙으로 돌아갔고 간교한 뱀은 사람을 꾀어서 이길 때에 자기의 사명을 했으므로 용이 되어 공중 세력을 잡고 크게 역사하게 된 것이다(계 12:9, 20:2). 다시 말하면 사람은 생령으로서 영화로운 영체를 가짐으로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간교한 뱀은 간교한 사람의 영으로서 대 승리를 보고 큰 용이 되어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중에서 사탄의 말을 순종하면 용과 같이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요, 사람은 산 영으로서 용을 이기고 하늘에 속한 영체가 이루어지면 영원한 천국의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대 섭리 하에서 사람에게 두 가지 형체가 있다.

1. 땅에 속한 형체
이 형체는 땅에 속한 열매를 먹고, 땅에 속한 물을 먹고, 땅에 속한 동물을 다스리며, 땅에 속한 식물을 가꾸며, 땅에 속한 나라를 이루어, 땅에 속한 자녀를 교육하며, 땅에 속한 사람으로 하여야 할 일을 해야 된다. 이제 땅에 속한 자가 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육하고 번성해서 의로운 씨를 이 땅에 충만케 하여야 될 사명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 마귀에게 미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그 몸은 의로운 씨를 전하지 못하고 악한 씨를 전하는 타락한 몸이 되었다. 이렇게 되므로 이 세상은 죄악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둘째아담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은 흙에서 그 몸이 나지 않고 성모 마리아 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물과 피가 임하여 땅에 속한 사람의 몸을 이루어서 인간이 땅에서 할 일을 친히 하시고 그 몸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은 이 땅 사람이 땅에서 지은 죄를 다 걸머지고 땅에서 죽은 것이며 땅에서 장례를 받은 몸이 다시 부활할 때에 이 땅에 있지 않고 승천하신 것은 땅에 있는 형체를 가진 사람들로 땅에서 할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하여 승천하셔서 지금 땅에 속한 사람들의 몸에다 성신을 부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땅에서 사는 생활에서 예수를 믿고 그 영이 산 영이 되는 중생을 받고 성신을 받을 적에 산 영의 사람으로 땅에서 할 일을 할 수 있는 몸이 되는 것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부어 주는 성신을 받으므로 땅에 속한 몸이 땅에서 할 일을 하는 인격을 이루어 주님께서 땅에 있을 때에 어떻게 하라는 사명을 할 수 있게 되므로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통하여 회개하게 되고 성신을 받게 되므로 교회를 이루고 주의 사업을 하게 되는 기독교 단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것은 이 땅에서 하는 사명은 땅에 속한 사람이 땅에서 하는 일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을 성신의 역사라 하며 기독교 진리 운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땅에서 걸어다니는 몸으로서 할 일을 다하는 것이 인생의 의무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교인이 땅에서 자기 몸으로 할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신령한 세계를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사명적인 정신이 아니요, 이것은 염세주의적인 것이니 이런 것은 생명이 있는 종교인의 활동이 아니다. 금일의 기독교가 세계에 대 종교를 이룬 것은 땅에서 할 일을 할 수 있는 그 인격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 성신의 역사가 있으므로 대 승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제 땅에 속한 몸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기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쉬지 않고 활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일 한대로 갚아 주려고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가 있다.

2. 하늘에 속한 형체
주님께서 땅에 속한 몸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땅 위에 교회를 세워 땅에 속한 자들이 할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고,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는 것은 땅에서 할 일을 충성 되이 하되 그 몸이 쓰러지기까지 활동하던 사람들의 몸을 당신의 몸과 같이 하늘에 속한 형체를 이루어 주와 같이 할 일을 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초림의 주는 세계만방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오신 것이요, 재림의 주로 오시는 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충성 되이 일한 자들의 죽은 몸을 다시 살려 하늘의 형체가 이루어지게 하고 주님 올 때까지 교회를 대적하고 나오는 붉은 용과 짐승의 정권과 거짓 선지와 싸우던 사람들은 죽지 않고 변화 승천시켜 하늘에 속한 몸을 받은 자들로서 왕국 조직을 이루어 이 세상에 악한 자의 세력을 다 때려부수고 세계를 통일하되 하늘에 속한 형체가 이루어진 자들이 통치하는 평화 왕국을 이룰 때 이 세상은 완전히 에덴 동산보다 더 좋은 나라를 이루어서 마귀의 세력이 없어진 평화 왕국을 이루어 아담에게 맡겼던 사명을 다시 할 수 있는 나라를 이루는 것을 지상 왕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날까지는 악한 씨가 땅을 더럽혔지만, 이 때는 의로운 씨가 복을 받고 거룩한 성산을 이루어 조물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형체를 받은 자들이 통치하는 시대를 가리켜서 이 땅에는 천년 왕국이요, 천국에 영원한 무궁 세계가 이루어지는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변화성도는 땅에서 할 일을 다 했으므로 하늘의 형체가 이루어지고 그 자손을 땅에서 번창하게 되므로 변화성도의 전도를 받고 따라 오던 양떼들이 지상에서 평화로운 시대의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은 변화성도의 전하는 말세의 비밀의 진리 운동이라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이라는 것은 땅에 속한 형체가 없이 하늘에 속한 형체가 없고 땅에 속한 형체가 있으므로 하늘에 속한 형체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땅에 속한 몸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야 할 일을 바로 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 하며 하늘에 속한 형체가 이루어져 영광을 누리는 것은 인생의 최고의 행복이 되는 세세 영광이라는 것이다.
              
 

택한 종에게 되는 일
( 갈 1 : 11 - 17 )

하나님의 택한 종이라는 것은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이루어지므로 오직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택한 종에게 되어지는 것은 연구했거나 노력을 했거나 또는 인간의 혜택을 입은 것이 아니요, 홀연히 되는 일이다. 아무리 사람이 볼 때는 소망이 없는 것 같아도 뜻밖에 놀라운 일이 있기도 하고, 사람이 볼 때는 악한 것 같아도 홀연히 의로운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이 택한 종에게 되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택한 자라도, 인간이 볼 때에 모든 일이 다 허사가 되는 것같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택한 자가 죄 되는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죄를 짓지 않도록 방지하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두셨다가 갑자기 택한 자를 바로 만들어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제 택한 종에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들어서 증거하기로 한다.

1. 계시로 말미암아 되는 일 (11-12)
택한 종이 일을 하게 되는 일은 인간 지식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도 아니요, 인간 도덕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도 아니요, 인간의 어떤 인도를 받아 되는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므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극도로 반대하는 사람이었으나 다메섹 광야에서 홀연히 계시를 받아 그 즉시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종이 연구해서 된다는 것은 완전한 종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 될 적에 완전한 것을 증거할 수 있는 종이 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의 역사가 인간 두뇌로 연구해서 된다면 이것은 생명의 종교라고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연구 안에 있는 것은 전부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계시를 받아 되어진 일은 오늘까지 세계 인류에게 큰 열매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계시를 받지 않고 되는 종은 택한 종이라고 볼 수 없다.

2. 은혜로 부르심을 받게 되는 일 (13-15)
아무리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은혜로 부르셨다. 이것은 바울이 알지 못해서 핍박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택한 자에게 깨닫도록 할 책임이 있으므로 그를 책망하는 것보다도 은혜로 부르신 것이다. 누구든지 택함을 입은 사람이라면 알지 못해서 죄를 지은 일은 있으나 깨닫게 될 때에는 그 즉시에 옳은 일을 하게 된다.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너무나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는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핍박한 이유는 유대교 외에 다른 교가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정통을 가지고 내려온 유대교를 기독교가 무시한다는 오해를 가졌으며, 유대교를 없이하고 예수교가 우세하게 된다면 자기의 정통은 다 쓸데가 없다는 생각에서 유대교권으로 기독교를 반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를 모르므로 행한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은혜를 깨닫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 언제나 택한 종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다스리신다. 깨닫지 못할 때에는 깨닫도록 지혜를 주시며 약할 때에는 이기도록 능력을 주시는 것은 택한 자에게 은혜로 역사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3.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일 (16-17)
사명이라는 것은 모태로부터 택할 때에 어떻게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정이 있으니, 아무리 사람이 애를 써 보아도 그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대로 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농부가 장기를 손에 잡고 일할 때에 그 장기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농부가 하고자 하는 대로 쓰여지는 것과 같다. 택한 종이 자기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사람으로서 감히 스스로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이 그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이 교회를 제일 많이 세웠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택한 종에게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조금도 인간의 무엇이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것을 신령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는 택한 종이 있음으로써 있게 되는 것이니, 만일 택한 종이 없다면 교회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가장 귀중한 일은 택한 종이 하는 일이다.
 

복음에는 외식이 있을 수 없다
( 갈 2 : 11 - 16 )


서  론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는 능력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니 이 복음을 받고도 외식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능력의 역사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제 복음을 따르는 자의 외식과 하나님의 경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찾아본다.

1. 성금에 외식을 용납치 않음 (행 5:1-5)
하나님은 얼마든지 죄인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을 주기를 기뻐하지마는 성금에 외식하는 아나니아를 용서없이 죽게 한 것은 복음에는 성금에 외식이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증거로 보여 주었다. 이것은 왜냐 할 때 성령을 속이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성신의 역사를 체험하고도 짐짓 성금을 감추고 외식하는 죄를 용서치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단의 자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설교의 외식은 용납할 수 없다 (마 24:48-51)
만일 어떤 종이 공연히 종을 인신공격하고 공연히 남을 쳐서 설교를 하는 자라면 이것은 설교의 외식이니 심판 날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단의 설교라는 것은 양을 살리겠다는 눈물겨운 심정이 아니고는 전부가 외식의 설교가 되는 것이니 악한 종이라는 것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태만과 동역자를 공연히 치는 교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동적인 외식의 행동이 될 것이니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3. 의식적 외식은 있을 수 없다 (갈 2:11-13)
우리는 의식적으로서 체면을 세우고 위신을 세워 보려는 것도 복음을 받은 자로서 합당치 않다는 조건에서 바울은 게바를 책망한 것이다. 복음을 받은 자는 의식을 초월하여 진리를 따라 행한 것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율법적인 의식에 따라서 할례자를 두려워하며 외식한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을 바울은 말한 것이다. 만일 복음적인 교회가 어떤 사람이 무서워서 형식적인 의식을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은 성신이 기뻐하는 일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4. 교제적 외식은 있을 수 없다 (골 2:18)
복음을 받은 기독교 신자로서 세상 친구의 교제적인 겸손이나 어떤 학설이나 어떤 숭배를 따른다면 여기에서는 영적 손상을 받을 뿐 아니라 상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으로 교제하는 것밖에는 다른 교제를 따른다는 것은 교제에 외식이 따를 것이니 여기에는 사단이 기회를 탈 것이다.

결  론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진 열매이니 이 복음을 받은 자는 외식 없는 중심의 뜨거운 사랑을 떠난 일은 전부가 외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계명의 큰 대지가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정로
( 갈 2 : 15 - 21 )

오늘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정로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아무런 열매가 없이 되어 예수님을 존귀하게 아는 것보다도 오히려 욕되게 하는 일이 많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그 정로를 걸어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믿음의 노선을 가야만 할 것이다.

1. 율법의 행위를 초월한 의를 얻고자 해야 한다 (15-16)
만일 어떤 사람이 율법의 행위를 고조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중심 성결을 목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적 행위는 도덕에 속한 행위로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적인 행위는 중심 성결이 없이 마음에 죄를 질 상태에 있다 하여도 행동으로 율법을 범하지 않으면 율법을 지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질 마음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 완전한 것을 받을 수 없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중심 성결이 있게 되므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의롭게 인정하시게 되는 것이다. 성신이 떠난 사람도 도덕적 행위를 가지고 사람에게 옳게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성신이 떠난 사람의 마음은 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성신이 오는 것은 율법적 행위에 의하여 오는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심 성결의 의를 받음으로서 일어나는 역사가 성신의 열매이다. 성신이 떠난 사람이 율법적인 행위를 가지고 성신 받은 사람을 박해한 것이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다. 육체라는 것은 타락한 죄의 몸이니,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죄악에 속한 생각이 육체를 따라 생기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해야 된다 (17-19)
신앙이라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불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사람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전부가 외식이 될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불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의롭게 보시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자가 사람 앞에 옳게 보인다 하여도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자의 마음을 따라 갈 수가 없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애를 쓰는 일이 있다면 아무리 부족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면서 그에게 은총을 나리시는 것이다.

3. 내가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있어야 된다 (20)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나'라는 것이 있다면 정로를 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게 했으니 나는 내 것이 아니므로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올라 올 수 없게 되었는데, 길을 가던 사람이 줄을 내려보내어 끌어 올려 주었다면 그 사람은 항상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줄을 보내 준 사람이 나를 살려 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것으로 산다는 것이 있어야 정로를 갈 수 있다. 사람이라는 것은 '나'라는 것이 죄인이므로 항상 '나'라는 것이 있을 때는 탈선된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항상 마음 가운데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이 있는 자라면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성령이 역사하므로 정로를 걸어가게 된다.

4. 항상 하나님의 은혜뿐이라고 해야 된다 (21)
우리는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율법은 나와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내가 사는 것이 십자가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절대로 사람이 행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요, 십자가의 의를 통하여 항상 오는 은혜로만 될 것을 믿고 나가는 자라야 정로를 걸을 수 있다. 하나님의 것을 사람이 받는데 있어서는 사람이 행한다는 것은 하등에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말고 내가 선을 행했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뿐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된다.

결  론
믿음이라는 것은 정로를 떠난다면 아무런 열매가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항상 도덕적 의를 중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중심 성결의 역사를 목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것이 있는 동시에 '나'라는 자체가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로 오는 은혜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만 신앙 정로를 갈 수 있는 것이다.


 
심판 받을 행위
( 갈 5 : 2 - 10 )


서  론
하나님의 심판이란 죄를 지은 사람을 덮어놓고 심판한다는 법은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지었다고 그대로 심판하는 신이라면 사랑이 없는 신이시니 사랑이 없는 신은 죄를 짓는 인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심판을 하되 심판 받을 행위를 가진 자를 심판하는 것이다. 이제 심판 받을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1. 남의 믿음을 요동케 하는 행위 (갈 5:10)
우리는 실수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되 고의적으로 남이 진리를 따라 바로 믿는 신앙을 쓸데없이 딴 교훈으로 동요를 시켜서 그 마음이 탈선되게 만드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 시대가 지나고 은혜 시대가 와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정통적인 복음을 받아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할례를 주장하는 이단설은 순수한 양떼의 신앙을 동요시키는 무리의 행위가 될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행동을 하는 종이 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죄는 죄 중의 큰 죄가 될 것이다.

2. 빛을 미워하는 행동 (요 3:19-20)
우리는 빛을 사랑하지만 어둠과 싸우다가 실수하는 죄도 있고, 짐짓 빛을 미워하는 죄도 있으니 두 가지 죄를 놓고 하나님은 역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체가 어두운 미로에서 헤매면서 빛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빛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빛을 미워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크지만 책임질 수 없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중심에 빛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면서도 빛의 열매를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은 빛의 열매를 맺도록 책임지고 역사하는 것이다. 아무리 주님의 교훈을 듣고 증거를 보고도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바리새교인들은 정통을 찾는 교파요, 매일같이 기도하고 또는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려도 결국은 멸망을 받았던 것이다. 사랑은 두 가지가 있고 미워하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 사랑도 빛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죄가 되고 미워하는 것도 악을 미워하는 것 외에는 죄가 될 것이다.

3. 종을 대적하는 죄 (사 41:8-11)
하나님께서 종을 쓰시되 말씀을 따라 쓰시는 것이다. 은혜 시대 종을 대적하던 자는 회개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스데반을 죽이는 것을 옳다고 판정을 나리던 바울도 회개하여 사도가 되었다. 그러나 말세에 동방 땅 끝에서 심판의 권리를 받고 나오는 종을 대적하는 자는 멸망이라고 했다. 이것은 왜냐 할 때 동방 역사는 피 값을 갚는 역사니 그 종에게 원수를 회삼물같이 짓밟는다는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사 41:25).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는 것은 대장이 군대에게 너를 대적하는 자를 쳐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말세 사명자는 만왕의 왕의 특명을 받고 나오기 때문이다(사 41:25).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는 것은 대장이 군대에게 너를 대적하는 자를 쳐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말세 사명자는 만왕의 왕의 특명을 받고 나오기 때문이다. 엘리야, 모세같이 쓰여지게 됐다. 이것을 기독교 종말에 진노의 날에 쓰여지는 종이라 한다(계 11:3).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쓰는 종도 있고 원수를 치기 위하여 쓰는 종도 있으니 죄인을 부르기 위해 쓰는 종은 대적해도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원수를 치기 위하여 쓰는 종을 대적하는 자는 멸망하는 것이다.

4. 예언을 경홀히 아는 죄 (계 22:18-19, 사 65:12)
교훈도 용서하기 위하여 전하는 교훈도 있고, 심판하기 위하여 주는 교훈도 있으니 종말에 심판하려고 예언하는 말씀은 조금만 가감해도 용서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했던 것이다. 결론으로 하나님은 심판을 하고 싶어하는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자체는 사랑의 본질이다. 그러나 사랑으로서 살리기 위해서 역사하는 역사를 순종치 아니하므로 자동적인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무서워하는 것보다도 시대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한다던지 그 말씀을 경홀히 여긴다는 것은 심판받을 행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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